[심층분석]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조경제 : 월간조선

박근혜(朴槿惠) 정부가 창조경제를 화두로 꺼낸 지 만 2년이 지났다. 창조라는 단어는 매혹적이다. 마법을 현실화시키는 마력을 지닌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문제에 부딪히며 생각하고 상상한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이 창조정신이라면 시인의 마음도 이와 같을지 모른다. 2000년대 한국 시단에서 형식파괴 정신을 좇아가면 시인 이성복(李晟馥)·황지우(黃芝雨)·박남철(朴南喆)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의 창조정신은 젊은 시인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故 박남철 시인.

기자는 작년 12월 6일 세상을 떠난 시인 박남철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독자를 길들이려는’ 그의 창조정신을 흠모해 왔다. 무시무시하고 괴팍하며 날 선 객기로 문인들을 벌벌 떨게 했던 괴짜였으나 자신의 시 정신을 이해하는 이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는 《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으로 나뉘는 시단의 폐쇄적 권력 사이에서 방황하며 양쪽에서 경원(敬遠)시 됐지만, 오직 가난한 전업 작가의 길을 외롭게 걸었다.

그는 정통파 시인과 달리 시 고유의 비유나 시적 구조보다 형태파괴, 풍자, 분노 등을 여과 없이 토해낸 작품들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생전 시인은 자신의 창조정신을 “나는 반항했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에게 반항하는 삶은 절망이었고,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 창조정신이었다. 시인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삶은 눈물입니다. 저는 크게 한 번 욺으로써 시인이 되었고, 다시 크게 한 번 욺으로써 시인으로서 또다시 깨어났어요.”

창조적 열정에 불타는 사람은 민감하고 감정이 섬세하며 풍부하다. 그런 감정은 주위 사람과 타협하기 어렵고 갈등을 낳게 마련이다. 박남철 시인은 그런 갈등의 언어로 시를 썼다. 그는 주위 사람과의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갈등은 열정을, 창조정신을 불러왔다.

창조정신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

정호승 시인.

어느 예술가나 나이가 들면서 창조정신이 메말라감을 느낀다. 창조의 실패가 두렵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뒤처지는 것이 두렵고, 외면당하지 않을까 두렵다. 창조정신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이다. 박남철 시인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능성의 창문을 활짝 열어 모든 아이디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창의력의 불꽃이 번뜩일 때 놓치는 일이 없도록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상상의 눈으로 본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요. 실제로 꿈꾸기 시작하고 해보기 전까지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절대 알 수가 없어요. 언제든 우리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인은 꿈꾸는 자다. 꿈을 꾸지 않으면 더는 시를 못 쓴다. 꿈꾸는 일이 바로 창조정신이다. 한국 시단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인 정호승(鄭浩承)의 말이다.

“제 생각에, 시나 경제나 다 인간을 위한 일입니다. 시인의 창조정신은 사물(인간)이나 사물의 현상을 항상 새롭게 인식하고 발견하면서 이뤄져요. 인간이나 인간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사과라도 어느 측면에서 바라보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사과의 모양과 내용이 달라지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수많은 새로운 시들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식의 새로운 발견과 상상력이 바탕이 됩니다. 창조경제도 무엇에 대해 어떻게 새로운 인식을 갖느냐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인간과 인간의 삶에 무엇이 어떻게 도움될 수 있을까 하는 인식의 바탕 위에 창조가 꽃 피지 않을까요?”

시인과 예술가의 현상에 대한 인식전환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고독한 열정으로 수많은 습작의 시간을 통해 ‘간신히’ 길러진다. 그런 산고 끝에 나온 작품이 외면받고 배척당하면 예술가는 맥이 탁 풀리고 만다. 기자와 만난 한 화가는 “작은 데생에서 습작을 거쳐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세월이 족히 1년이 넘는다”고 말했다. 창작은 시간으로 잴 수 없는 세월의 뼈를 깎는 고통이다.

르네상스와 창조정신, 그리고 인문학

2014년 12월 4일 낮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의 ‘무역 1조 달러 달성 기념탑’ 앞에서 무역협회·코엑스 직원과 대학생 홍보대사들이 ‘창조경제로 도약하는 글로벌 무역 강국’이라는 주제의 행사를 하고 있다.

창조정신은 그 자체로 ‘경제’와 연결되기 어렵다. 하나의 꿈이 발전해 한국 사회의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예술가의 고된 창조처럼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윤의 열매만을 생각하면 수많은 실패와 연습(습작)이 보이지 않는다. 정호승 시인의 말이다.

“창조경제도 창조도 모험입니다. 모험은 위험을 수반합니다. 창조정신은 예측 불가능한 여행길이죠. 감정적, 인지적, 물리적 고통을 감수해야 해요. 혹자는 ‘흰 종이(원고지)나 빈 캔버스에 맞서는 것과 비교하면 에베레스트 등반도 아주 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무(無)에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지만 동시에 끝없는 기회입니다.”

예술가의 창조정신은 르네상스 정신에서 출발한다. 르네상스가 도래하기 이전 중세(中世)의 예술정신은 수공업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화가나 조각가의 예술작업은 길드에 의한 ‘생산’에 가까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라는 걸출한 천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예술가의 개성과 상상력은 배부른 소리였다.

르네상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라는 걸출한 천재를 통해 예술가의 개성과 상상력에 주목하게 됐다. 사진은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와 뇌 해부도를 합성한 그림.

중세시대 사람들에게 미술과 조각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작품을 모방하는 작업으로 여겨졌다. 예술작품은 초자연적인 사물(神)의 질서를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예술의 자율성이 들어갈 틈이 거의 없어 보였다.

중세 예술가의 아틀리에는 수공업자 조합인 길드의 공동체 의식에 의해 운영됐다. 말하자면 예술품은 발주자(發注者)의 주문에 의한 것이었고 장인과 조수, 도제들이 똑같은 작품을 두고 함께 일을 하며 생산하는 것이었다. 길드의 장인(匠人) 밑에서 일정 기간 도제를 받는 한, 예술가들은 길드의 영향이나 수공업적 전통의 지배를 깨뜨릴 수 없었다.(Arnold Hauser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2》 참고)

그러나 르네상스가 본격화되면서 화가나 조각가가 길드로부터 해방되고, 신분이 수공업자에서 예술가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인문학의 창조정신이 담겨 있다. 인문학 관점에서 작품을 창조정신으로 재해석하면서 개성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발주자의 주문이나 장인의 지시로 만들어지는 작품에서, 개성에 의한 표현과 독자적인 창작활동이 예술적인 과제로 등장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예술가들에게 개성의 이론적 무기를 제공했고, 그 결과 예술가들의 사회적 위치를 확고히 마련해 주었다. 개성의 힘과 개인의 정신적 에너지, 자발성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체험이었다. 정호승 시인은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로 예술의 창조정신은 인간정신의 본질과 현실을 지배하는 위대한 힘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인문주의자를 통해 자신의 정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고, 인문주의자들은 개성의 발현이라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효과적으로 선전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창조정신은 인문학과 만나면서 그 가치가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원석(原石)과 다름없는 창조정신이 응용물인 경제와 만나 ‘창조경제’로 거듭나기 위해선 인문학이라는 오랜 숙성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輸入學에 맞선 創造學의 길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 국문학의 큰 산인 조동일(趙東一)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연학문, 사회학문, 인문학문으로 구분된 세 학문의 갈래 가운데 인문학문이 앞서서 학문 혁신의 주역 노릇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인문학문이 배격되는 세태에 자각으로 맞서 전반적인 상황을 검토하고 조정하는 학문을 하는 것이 ‘창조학’의 긴요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작가나 예술가의 창조성(창의성)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창조성과 무엇이 다른가요? 시인이나 화가의 창조성이 과학자나 인문학자의 창조성과 다르다고 봐야 할까요?

그는 “창조의 기본성격은 문학이나 예술, 자연과학이나 응용과학 등 어느 분야에서든지 동일하다. 그러나 ①창조의 능력을 타고난 그대로 쉽게 발현할 수 있는가 ②일정한 단계를 거쳐 필요한 수련을 거쳐야 발현할 수 있는가는 분야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①의 극단에서 ②의 극단으로 가는 순서가 예술→인문학문→사회학문→순수자연학문→응용자연학문입니다. 앞쪽에 있는 것들에서 창조를 체험하고 훈련하고 얻은 성과를 활용해야 뒤쪽에 있는 것들에서도 창조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창조경제란, 응용자연학문에서 창조를 이룩해 경제적 가치로 활용하자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앞쪽에서부터 나아가지 않아 구호에 그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 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

“예술교육은 무시하고 과학교육만 대단하게 여겨, 예술에서 체험하고 훈련한 창조가 과학에서 발현될 수 있는 길을 막아선 안 됩니다. 또 국어를 도구과목으로 규정해 국어교육에서 문학을 제외하고, 문학창작을 경험할 수 없게 해서는 안 됩니다. ‘수입학’을 넘어서는 ‘창조학’을 주도해야 하는 인문학문이 대중강연 취향의 상식론으로 격화되고 있어 걱정스럽습니다.”

예술은 삶의 여정,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

화가 양순열.

기자는 〈겨울편지〉라는 제목의 기획 초대전이 열리는 포스코갤러리를 찾았다. 서양화가 양순열씨는 인간의 꿈과 사랑, 내면의 언어를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온 중견 화가다. 이번 전시회에서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티브로 한 대형 작품과 오브제 등 43점을 선보였다. 화가는 지금까지 11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동양화와 서양화,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제작방법과 표현재료로 독특한 예술을 구현했다는 평이다. 지금까지 그린 그림만 4000호가 넘는다고 한다.

양 화백의 그림 세계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고 했다. “길을 걸으며 길을 잃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한다.

“지필묵에 의한 사실적 표현법을 배우기 위해 경북 북부 지방을 돌며 10년 넘게 사생(寫生)작업을 했어요. 민화, 서예, 서양화, 조각·오브제, 설치미술 등으로 미술 영역을 넓혔고요. 자연을 탐구하면서,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살아온 시골 농부들과 선문답도 즐겼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산천의 정서들을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연의 관심이 사람으로 옮겨졌고, 한번 태어난 인생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의문을 던지기도 했어요.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 인간의 꿈과 사랑의 힘에 대한 관심을 가지다가 점점 ‘어머니’에 대한 주제에 천착하게 됐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소재로 한다. 그녀의 작품은 밝고 따스한 색감이 대부분이다. 어머니의 속살처럼.

“어머니는 늘 애틋하고 각별한 존재 아닌가요? 어머니의 고개 숙인 모습은 희생을 의미하죠. 작품 속 오뚝이(야호 오뚝이)는 자식을 위해 다시 일어서는 존재를 상징하고 있어요. 우리 아버지 시대는 눈물겨운 완강한 노동이 상징이죠. 이번 전시회에서 포스코의 안전모와 작업화를 재료로 아버지의 고된 삶을 오브제 작업으로 표현했어요.

어느덧 제 나이가 여인과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하였어요. 불어(佛語)에서 어머니(mero)는 바다(mer)와 의미가 닿아 있고, 한자의 어머니(母)도 바다 해(海) 자를 이루고 있어요. 어머니 마음은 바다같이 깊고 넓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여인의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과 힘든 어머니로서의 운명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합니다.”

창조경제는 인문학적 사고에서 나와야

한국의 창조경제는 기업가 정신을 강조한다. 사진은 한 지방자치단체가 1인 창조기업 비즈니스센터 개소식을 갖고 있는 모습.

그러나 말처럼 작업이 쉽지 않았다. “닷새 동안 뜬눈으로 보내기도 하고, 금방 잡힐 것 같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붓을 들어 상상의 사람을 현실로 그린 적도 많았다. 그러나 작품 완성이 됐다 싶으면 언제나 너무 흔한 사람 그림이었다”고 술회했다.

―예술가의 창조정신은 어떻게 해서 생겨납니까. 영감은 언제 어떻게 떠오릅니까.

“좋은 창조를 위해서는 실제 경험과 인문학적, 문학적, 과학적, 철학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개성 있는 안목 없이는 작품의 독창성이 돋보이지 않습니다. 창조경제나 문화융성의 정신은 인문학적 사고에 바탕 둔 도전정신과 닿아 있어요. (예술성도) 인문학적 사고의 바탕에서 해결책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제 작업에서 절실히 경험되고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듯, 예술가도 고단한 자기희생이 최고로 중요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 창조가 이뤄져요. 예술성은 일정부분 타고나야 하지만 배움과 연습을 통해 길러질 수 있어요. 연습과 창의성은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혼신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또 모방과 창조의 상관관계도 다소 비례관계라 볼 수 있어요.”

양순열 화백은 “미술은 인문사회과학과 기초학문에 아름다운 시녀이면서 문학, 철학, 과학, 의학, 경제, 건축 등 번쩍이는 창작의 길을 열어주는 첫 출발선”이라며 “미술의 상상력이 미지의 우주를 현실화시켜 ‘스푸트니크 쇼크’를 가져왔듯 국가 미래와 직결한다”고 했다.

과학기술, 생산기술과 달리 예술작품은 생산이라는 말 대신 창작이란 말을 쓴다. 왜 그럴까.

생산은 ‘만드는 이’의 혼이 없는 대량 복제라는 느낌이 강하다. 반면 창작은 혼이나 정신이 느껴진다. 사실 대량 생산과 지식기술을 설명하는 매뉴얼이나 사용법, 부품설계도, 딱딱한 법조문을 읽고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예술작품이 아닌 까닭이다. 이어령(李御寧) 전 문화부 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읽고 들으면 가슴이 뛰고 눈물이 핑 돌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시의 언어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생존수단만 존재하고 생존 그 자체의 목표, 다시 말해 생존의 자기 목적적인(autotelic) 삶의 즐거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과학의 성장이 아무리 눈부셔도 문학과 미학을 통해 느끼는 정서, 인류의 역사를 탐구하며 경험하는 인간의 운명, 윤리와 철학을 통해 익히는 사유의 건강함을 단순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누구도 인간정신의 양식을 과학적 실험이나 물질적 척도로 재단하기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학과 고교의 이공계 쏠림과 인문계 배척도 한국 사회의 거대 흐름이 됐다. 1월 9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서울 강남 A고교의 13개 학급 중 10개가 이과(理科)반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문과(文科)반은 작년 4개에서 3개로 줄었다고 한다. 이 같은 현상은 다른 인문계 고교도 마찬가지다.

이 전 장관은 “오늘날 인문학이 쇠퇴했다는 말은 인문학 자체가 쇠퇴한 것이 아니라 인문학 본연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자연과학으로 대체될 수 있는 공허한 학문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공허한 인문학은 감동과 즐거움을 주지 못하니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슴으로 느끼며 상상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지만, 인문학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학문”이라는 얘기다. 이 전 장관은 한국정책방송(KTV) 〈인문학 열전〉 프로그램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것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엉뚱한 대답 같지만 발상 자체가 다르죠. 그런데 이런 아이들은 학교 교육에서 탈락합니다. 물론 학교에서는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 가르쳐야죠. 그러나 엉뚱한 생각을 하는 1%의 아이들을 버린다면 그 아이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한다면, 거기서 무슨 창조적 사고가 나오겠어요?

지금 우리에게는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사고가 아니라 ‘얼음이 녹으면 펭귄이 살 곳이 없다’고 하는 사고가 더 절실해요. 북극의 빙산이 녹는 오늘날의 문화 맥락에서 보자면 그렇게 대답하는 아이에게는 시대감각이 있잖아요. 이런 아이들이 성장한 21세기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국가가 될 겁니다.”

인문학적 가치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인문학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가 곧 인간으로 존재하는 우리 자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영국의 창조경제 차이

박근혜 정부는 집권 초부터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강조하고 별도의 부처(미래창조과학부)를 마련했다. 두 테마는 상호보완적이지만 경중으로 볼 때 창조경제가 문화융성을 끌고 가는 형태다. 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창조경제를 “과학기술과 산업이 융합하고 문화와 산업이 융합하며, 산업 간의 벽을 허문 경계선에서 창조의 꽃을 피우는 것”으로 정의했다. 또 “민간 부문의 창의성과 자율성, 참여를 바탕으로 과학기술과 ICT(Information Communication Technologies), 문화, 산업 등을 융합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겠다”는 국정운영 철학도 밝혔다.

박 대통령의 창조경제는 ‘문화융성’과 궤를 함께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기업가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년 1월 22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기조연설에서 박 대통령은 “지속가능하고 포용적 성장을 달성하는 원동력은 ‘기업가 정신’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업가 정신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창조경제란 말은, 현 정부에서 처음 만든 개념이 아니라 영국이 1997년부터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해 온 개념이다. 그러나 한국과 영국이 추구하는 창조경제는 차이가 크다. 영국은 창조산업을 ‘개인의 창조성, 기술, 재능 등을 이용해 지적 재산권을 설정, 이를 활용함으로 부와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산업’으로 정의한다.(미래창조과학부 용역보고서 〈창조경제의 효과적 실현방안 연구〉 참고. 작년 1월에 작성된 이 보고서는 ㈜테크노베이션파트너스가 작성했다.)

영국의 창조산업은 기술 주도의 혁신을 강조하기보다 자국의 문화기반을 토대로 광범위한 문화영역의 발전에 중점을 둔다. 대체로 개인의 창의성과 기술, 재능에 창조경제의 근간을 두고 지적 재산권의 생성과 활용을 통한 부와 고용의 창출이 목표다. 한국의 ‘기업가 정신’과는 크게 다르다.

영국 캐머런 총리는 “2010년 창조산업이 다른 산업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중요한 산업 분야”라 강조하면서 “음악산업만으로 영국 전체 경제에서 연간 500억 파운드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밝혔다. 500억 파운드는 한국 돈으로 약 87조원이다.

영국에서 발행된 창조경제 관련 보고서에서는 디자인 집약적인 사업이 다른 산업에 비해 더 혁신적이고 더 많은 수익을 거둔다는 실증적 수치가 제시되고 있다. 창조경제 육성을 통해 문화, 예술, 지식, 가치 등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프트 파워’의 활용도 강조된다.

J·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가 영국 창조경제의 대표 아이콘이다. 시리즈 완결까지 9년간(1997~2006년) 308조원에 달하는 수익을 거둬, 같은 기간 한국의 간판산업인 반도체 수출 수익보다 77조원을 더 벌어들였다고 한다.

2011년 〈창조산업 경제분석보고서(creative industries economic estimates 2011)〉에 의하면, 출판 분야의 부가가치는 1조16억 파운드, 광고는 59억 파운드, 방송과 라디오는 53억 파운드를 기록한 것으로 추산됐다.

문화융성이 ‘레토릭’이 안 되게 하려면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메시지를 분석해 온 장현규(張賢圭) 미래연구소장은 “한국의 경제발전은 앞선 기술을 모방하고 따라 하는 일종의 ‘빠른 추격자’ 전략의 성공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압축적 산업화 시기의 추격자 전략은 이제 약발이 다했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높은 빌딩을 짓더라도 기초가 부실하면 모래성보다 못하듯이 창조경제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생각의 틀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시대의 발상으로 창조경제를 말하는 것은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질 중심에서 가치 중심으로 인식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도구적 합리성에서 소통적 합리성으로 나아가야 해요. 새로운 가치창출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고, 이런 점에서 인간을 가치의 중심에 두는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합니다.”

장 소장은 “뭔가를 창조하려면 다양하게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폭넓은 사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며 “어느 날 갑자기 주문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고 발현돼야 창조로 연결된다. 공장에서 주물을 찍듯 창조경제를 생각해서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했다.

“창조경제와 인문학의 융합은 발효(醱酵)의 미학입니다. 계산하고 재촉한다고 해서 융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경제를 말하면서 ‘단계론적 발전 과정’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는데 작위적으로 단계와 단계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진정한 창조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21세기는 물리적 힘이나 논리보다 감성과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창조경제의 꽃을 피우기 위해 문화융성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죠. 그러나 문화융성이 레토릭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혼이 담기고 사람의 향기가 나는 문화융성이 되어야 해요.”

우찬제 서강대 교수.

문학평론가인 서강대 우찬제(禹燦濟) 교수(국문학)는 “창조경제의 메시지에 개방과 융합의 분위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닫힌 개별성의 영역을 탈영토화해서 공공의 영역을 넓히고 거기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융합의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 교수의 말이다.

“창조경제를 추진하는 정부 부처별로 예산과 책임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고 대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작은 사례 하나만 소개할까요? 최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각 대학의 석·박사 논문 DB구축 사업을 한다면서 대학 쪽에 자료 제출 협조를 요청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미 국회도서관에서 DB를 구축해 놓은 상태고, 각 대학은 그쪽에다 자료를 제공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같은 사업을 하면서 예산을 또 사용하고 자료 제공처에 수고를 끼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하더군요.”

우 교수는 “디지털 시대의 환경이 갖는 장점 중 하나가 링크의 탄력성이 아니냐”고 했다. “역동적 링크를 통해 공유와 협력의 경제모형을 만들 수도 있는데 우리 사회의 현실은 아직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입니다. 문과, 이과로 나눠 개별 과목들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만들어 ‘분과 학문교육’을 하는데, 그 영역 속에서 ‘닫힌 교육’이 이뤄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요. 각 교과에서 교수학습 활동을 하면서 서로 연결되는 다른 과목의 내용을 링크해 주라고 교사들에게 강조는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혹, 문화융성과 창조경제 사이의 경중을 따지는 것도 20세기적 사고가 아닐까요? 둘이 따로인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거죠. 그러니까 문화융성과 창조경제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문화를 통해 경제적 자산을 제고(提高)할 수 있고, 상당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한류를 비롯한 여러 경험에서 확인한 바입니다. 창조경제의 영역에서도 문화적 비전 없이 창조경제의 기틀을 마련할 수 없지요. 말씀하신 대로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르네상스적 혁신가가 어느 영역에서든 블루오션을 열어나가게 마련입니다.”

우 교수는 “창의적 혁신가는 연결되지 않는 것들을 연결하고 돌파하는 사람”이라며 “그 출발은 우선 상상력에 있고, 새로운 꿈에 있다”고 했다.

지금이 농식품 수출의 ‘골든타임’

김재수 사장(가운데)이 2013년 2월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홈플러스 이승환 회장(오른쪽), 테스코 장폴 아시아 본부장과 함께 우리 농수축산 식품 해외 수출 지원에 대한 MOU 체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턴이나 다윈, 아인슈타인은 그들의 위대한 과학적 이론의 영감을 자신의 연구실에서 물리학 책이나 동물학 책을 읽거나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사과에서, 카리브 해의 섬에서 본 동물의 생김새에서, 취리히 시내의 전차 안에서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그 학자가 자신의 학문과는 직접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 곳에서 우연히 창조적 아이디어의 힌트를 얻은 경우다. 우 교수의 말이다.

“상상력과 꿈을 위해 인문학적 성찰은 깊은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주어진 컨베이어 벨트에 갇혀 있는 일상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자리, 다른 시간, 다른 관점에서 다시 세상과 사물,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변화는 다른 관점, 다른 상상력, 다른 욕망에서 비롯돼요. 예전에 미켈란젤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인문학에서 르네상스적 창조정신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탈영토화된 소통과 연결, 물리적 결합이 아닌 화학적 융합의 역동성, 다른 사고를 추구하는 욕망과 상상력, 르네상스적 장인들은 그런 것들을 실천했고, 21세기 역시 그런 이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기자는 ‘기업가 정신’의 관점에서 창조경제를 들여다보기 위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센터) 김재수(金在水) 사장과 만났다. aT센터는 작년 말 전남 나주로 본사를 이전한 상태다. 농림수산식품부 차관을 역임한 김 사장은 서울 aT센터에다 ‘창조마당’을 설치, 농업·농촌·농민의 건의사항과 창조적 의견을 수렴하는 공간을 마련해 운영 중이다.

사장 취임 초부터 직원들에게 창의적인 마인드를 적극 강조하며 전 직원을 대상으로 상상력과 아이디어,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창조농업 아이디어를 공모했다고 한다.

“1977년 국가 전체 수출액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우리 수출이 가파르게 성장했어요. 마찬가지로 농식품 수출도 100억 달러 고지를 넘으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겁니다. 어찌 보면 향후 2, 3년이 우리 농식품 수출의 ‘골든타임’입니다. ‘K-푸드’로 상징되는 한식이 슬로푸드로 주목받고 있고 한중(韓中) FTA로 14억 거대시장을 공략하면 조만간 농식품 수출 1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봐요.”

현재 공사가 운영 중인 ‘농수산물 사이버거래소’ 매출액은 2009년 출범 이후 6년 만에 매출액 2조원을 넘었다. 학교급식 식재료의 60%가 사이버거래소를 통해 유통된다. 사이버거래소를 통해 소상공인의 유통구조가 크게 개선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문화융성과 창조경제의 경중을 따질 때, 문화융성에 무게를 둬야 하지 않을까요?

“창조경제의 기본은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우리가 기존에 가졌던 모든 상식의 틀을 깨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성장동력과 혁신의 원동력을 찾아가자는 의미지만, 그 근본적인 자양분은 인문학적 사고를 바탕에 둔 종교적인 양심과 건전한 윤리도덕이 아닌가요?

창조경제의 실체와 가능성을 부정하는 이들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는 것보다, 문화예술을 통한 창의적인 예술혼이 어떻게 자연·사회·인문과학과 결합했는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눈부신 인류발전을 이끌었는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삶이 어떻게 변모될지 보여줘야 합니다.”

“김치·젓갈·식혜·장류 같은 발효음식을 보라”

—농업의 역사에서 창조정신의 예를 찾아주세요.

“우리 농업 분야는 예부터 창조적인 발상으로 큰 성과를 낸 분야입니다. 벼 재배 관련기술(통일벼 개발, 구들장 논), 각종 영농기술과 장비(측우기, 종자개량, 저수지 등)가 그렇습니다. 창조정신은 자본주의적인 이윤추구와 순수 예술혼의 우선순위에서 찾기보다 두 분야(경제와 예술)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고찰과 고민을 통해 상극으로 치닫는 편향성을 경계한 데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김치, 젓갈, 식혜, 장류 같은 한국의 발효음식을 보라”며 “발효음식은 섞임(비빔)의 미학이 담겨 있고 다양성과 창조성,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진 결과”라고 강조했다. 김 사장은 중국에서 부는 인문학 열풍을 소개했다. “중국도 지난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아래 단기간 내 G2 국가로 부상했지만, 최근에는 문화적 역량을 갖추기 위해 《논어》《손자병법》《삼국지》 등 중국 고전을 통해 서구적 자본주의의 폐습과 폐단을 환기시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창조경제란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상상력, 과학기술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창의적 아이디어 원천은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구현될 수 있어요. 학문과 실용의 융·복합으로 삶을 혁신하는 실용적 도구로 인문학이 다시 부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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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조경제

“창조경제와 인문학의 융합은 발효의 美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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