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 44세. 고려대 경영학과 중퇴. 정우앤컴퍼니, JW에셋, 다올투자신탁 설립.
現 하나다올신탁회사 대표이사 겸 하나금융 부동산그룹장.
⊙ 44세. 고려대 경영학과 중퇴. 정우앤컴퍼니, JW에셋, 다올투자신탁 설립.
現 하나다올신탁회사 대표이사 겸 하나금융 부동산그룹장.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풀릴는지 알 수 없다고들 한다. 이 사람에게 꼭 해당되는 얘기다.
대학입시에 연이어 낙방하자 군대에 다녀온 뒤 곧장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유학을 중도에 포기했다. 느닷없이 집안의 ‘가장’이 됐고, 우연한 기회에 부동산 업계에 발을 들여놨다. 부동산의 ‘부’자도 몰라서 공부를 하면서 사업을 해야 했다.
하지만 매사가 벼랑 끝이라고 자신을 채찍질했던 그의 의지는 이후 10여 년간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아줬다. 국내 최초로 ‘리츠(REITs)회사’를 만들었고, 사실상 공기업으로 여겨졌던 부동산 신탁회사를 민간(民間) 최초로 만들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국내에서 처음으로 ‘부동산 전문 자산운용사’를 설립했고, 이들 회사를 하나금융그룹에 팔았다. 올해 고작 44세인 그의 직함은 하나금융그룹 자회사인 ‘하나다올신탁 대표이사’다. 그의 동년배들은 은행에서 차장급 정도다.
하나금융에 부동산 신탁회사 매각
하나금융지주는 지난 2010년 4월, 부동산 신탁회사인 ‘다올신탁’을 인수했다. 그동안 국내 금융회사 수익의 대부분은 은행 부문에서 나왔다. 그런데 하나금융은 은행 외에 부동산업에 관심을 보이며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참신한 도전으로 바라봤다.
하나금융지주는 이미 종전부터 ‘다올신탁’이라는 회사에 투자를 하고 있었다(지분의 15%). 여기에 신규로 주식(43%)을 사들여, 총 58%의 지분을 확보했다. ‘다올신탁’은 ‘다올자산운용’이라는 회사에 투자를 한 상태여서 하나금융지주로서는 ‘다올신탁’을 자회사로, ‘다올자산운용’을 손자회사로 인수하게 됐다.
하나금융의 부동산업 진출도 관심거리였지만, 인수회사인 ‘다올신탁’ 대표이사를 유임키로 한 결정이 화제가 됐다. 40대(代) 초반의 금융회사 사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어서다.
주인공인 이병철 대표는 “인생의 제2막이 펼쳐진 순간이었다”고 했다.
“하나금융지주가 부동산 회사를 사서 부동산업에 진출한다는 얘기가 2009년에 나돌았습니다. 그 대상이 제가 설립한 ‘다올신탁’이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김승유(金勝猷) 전(前) 하나금융지주 회장과는 일전에 두어 번 스쳤을 뿐 이렇다 할 인연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김 회장이 사무실에 좀 들르라고 하더니 대뜸 ‘당신, 나랑 동업해’ 이러더군요. 작은 신탁회사 대표인 제가 큰 금융회사랑 무슨 동업을 합니까. 김 회장께서 ‘하나금융이 당신 회사를 인수할 것이다. 당신은 지분 20%를 남기고, 그 회사 대표를 계속 맡아라. 그러면 동업 아니냐. 나는 다올신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심정은 정말….”
이병철 대표의 짧은 침묵 속에는 그가 걸어온 지난 인생의 쓴맛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부동산 신탁회사’는 낯설다. 이병철 대표는 업무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아파트나 골프장을 개발할 때 디벨로퍼(developer)들이 땅을 계약합니다. 하지만 땅을 개발할 자금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땅을 들고 오면 신탁회사에서 이후의 모든 과정을 대행합니다.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금융권에서 조달하고, 시공사를 선정하고 향후 분양하는 일까지 대신합니다. 맨 마지막에 분양대금을 받아서 금융권에 원금을 갚고, 최종 남은 금액을 디벨로퍼들에게 되돌려주기까지 총체적인 일을 합니다. 부동산 분야의 전문가들이 소유자를 대신해 부동산을 개발, 관리, 운영하며 매출액의 0.3~0.5%의 수수료(fee)를 받는 일입니다.”
부동산을 유동화시키는 업무
―일반인에게 부동산 신탁 업무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역사가 길지 않고 ‘B TO B(Business to Business)’라 그럴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동산을 좋아하지만, 부동산을 유동화하는 방법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부동산이라고 하면 집을 사고, 대기업·금융기관이 보유한 빌딩을 운용하는 정도가 전부였죠. 미국, 홍콩은 일찍이 부동산을 유동화하는 기법이 발달했고 산업의 한 축으로 발전했는데 우리가 늦었습니다. IMF 때가 돼서야 부동산 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이병철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국내에 신탁법이 도입된 것은 1950년이었다. 부동산 전문 신탁은 아니고, 은행에서 일정 수준을 운용하는 정도였다. 뜻하지 않게 몇 번 사고가 나면서 1991년에 ‘부동산 신탁 전업회사’가 생겨났다. 한국부동산신탁(당시 한국감정원의 자회사), 대한부동산신탁(당시 성업공사의 자회사)이 그들이다. 우리나라 ‘1세대 신탁 전업사’다. 이들 회사는 IMF사태 때 부도났다. 이후 과거 주택은행의 자회사였던 주원부동산신탁이 오늘날 KB부동산신탁으로 발전했는데, 이처럼 부동산 신탁회사는 공기업적 성격이 강했다.
일반인들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싱가포르 투자청이 국내의 대표 빌딩인 서울파이낸스센터와 스타타워(現 강남파이낸스센터)를 산 것이 계기였다.
이병철 대표는 “이때부터 정부에서 제도적으로 부동산을 동산화하는 사이클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병철 대표 역시 부동산 신탁회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IMF 때 해외 자금이 국내로 급속히 유입되면서 서울법대를 나온 바로 위 형의 친구 몇몇이 외국인에게 법률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그때 프랑스 회사인 ‘까르푸’가 국내 진출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마땅한 파트너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까르푸’로서는 한국에서 사기를 당하지 않을 신뢰도가 높은 파트너가 필요했고, 이렇게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은 것이 이병철 대표였다.
“부모님께 매달 생활비를 보내야 했고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무슨 일이든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부동산의 ‘부’자도 몰랐죠. ‘까르푸’에서 일거리를 준다기에 무작정 회사를 만들고 직원 한 명을 뽑았습니다. 바를 정(正), 도울 우(佑) 자를 써서 ‘정우앤컴퍼니’라고 이름을 짓고, 지인들에게 자금을 빌려 회사를 만들고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까르푸’의 요구는 구체적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내의 부동산 시장을 매력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언어 소통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요, 토지를 매입하는 모든 과정을 버거워했다. 이병철 대표는 땅을 찾고, 가격을 협상하고, 토지의 인허가를 받는 과정, 시공사 선정 등 모든 과정을 맡았다. 계약금을 받지 않는 대신 ‘까르푸’가 성공적으로 론칭을 하면 그에 따른 성공보수를 받기로 했다. ‘까르푸’를 대신해 전국 방방곡곡 여관방을 전전하며 땅을 봤다.
첫 번째 고객은 ‘까르푸’
이병철 대표는 인터뷰 초기부터 “회사 얘기만 하고 싶다”고 했다. “훨씬 힘들게 사업 한 사람들에게 송구하지만, 제게는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아팠던 시절”이라며 말이다.
그는 그렇게 생면부지의 ‘까르푸’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 했습니다. 이른 아침이든, 오밤중이든, 서울이든, 지방이든 뭐든지요.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들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이 없었지요. 제게는 그 길이 벼랑 끝이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해달라는 것은 아무 토를 달지 않고 다 했습니다.”
첫 프로젝트는 넉 달 만에 성공으로 끝났다. 이병철 대표는 성공보수로 8억원 정도를 받았다. 맨손으로 회사를 차린 지 넉 달 만에 자본금의 4배를 벌어들였지만 마음은 편치 못했다. ‘체인스모커’였지만, 담배 사는 돈이 아까울 정도로 불안했단다. ‘일회성에 그치는 일이면 어떡하나’ 우려했지만 다행히 일감은 계속 들어왔다. 그는 ‘까르푸’, ‘월마트’의 국내 진출 업무를 대행하면서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땅을 보러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어느 날, 경기도 부천 시청 옆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동아건설의 백화점인 동아시티백화점이 공사를 하다가 자금난으로 중단한 땅이었다. 그는 덜컥 이 땅을 400억원대에 매입기로 하고 계약을 했다. 물론 이때까지 누구에게 투자를 받을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너무 무모한 것 아닙니까. 땅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괜히 계약금만 날릴 텐데요.
“그렇죠. 그런데 사업을 하다 보니 시각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 무조건적 자신감이라고나 할까요. 성공시키겠다는 긍정적 생각만으로 덜컥 저질렀습니다.”
그의 ‘뚝심’ 덕분인지, ‘운’이 따랐는지 알 수 없으나 네덜란드 연기금을 운용하는 로담코사(社)가 선뜻 1200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현대백화점과 CGV 극장이 입점키로 했고, 로담코 프로젝트의 대행 업무를 이병철 대표가 맡게 됐다.
그는 “제 사업 영역이 블루오션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큰물에서 놀아야 큰돈을 벌 수 있잖습니까. 부동산은 최소 몇백억 원이니까 성공보수를 받으면 몇억 원이 떨어집니다. 물론 중간에 잘못되면 보수가 일절 없지만요. 성실해야 하고 어떻게든 일을 성공시켜야 하지요. 모든 사업에 1, 2등은 있지만 부동산 투자 대행업은 시작이어서 경쟁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주식, 채권은 글로벌화(化)가 진행됐지만 부동산은 로컬(local)성이 강합니다. 땅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살 수가 없잖습니까. 아무리 큰 다국적 기업이라도 현지에 믿을 만한 파트너가 없으면, 선뜻 현지 부동산에 투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적절한 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였으니 블루오션이죠.”
무일푼에서 시작해 매년 사세 확장
사업을 조금씩 확대하던 때 언론에 ‘IMF 때 국부(國富)가 해외로 유출됐다’는 기사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주식 시장을 외국인 투자자에게 개방하고, 은행·빌딩을 매각한 것이 문제가 됐다.
2001년, 국토해양부는 ‘리츠법’을 도입했다. 부동산 리츠는 부동산에 투자해 그 투자금으로부터 나온 이익을 투자자들에게 되돌려주는 시스템이다. 일반인들이 주식에 투자하는 것처럼 100만원, 200만원의 소액을 부동산에 투자하는 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이병철 대표는 국내 1호 ‘리츠회사’를 만들었다. 당시 법적 최저 자본금은 70억원. 그동안 정우앤컴퍼니가 벌어들인 돈에, 나머지는 하나은행·교보생명으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그와 하나금융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 이때다. 정우앤컴퍼니의 이니셜을 따서 ‘JW에셋’이라고 리츠회사 이름을 붙였다. 회사 인지도가 낮아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설움도 겪었다.
“지인 소개로 최고 재벌 회사에 투자 유치를 갔을 때입니다. 중역과 부서 담당자들에게 한 시간 내내 열변을 토하며 투자해 줄 것을 요청했죠. 그 중역은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고, 한 시간 내내 제 말을 단 한마디도 듣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줄곧 다른 일을 했거든요. 그 회사 사옥을 나오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두고 봐라, 언젠가는 너희보다 큰 회사를 만들겠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JW에셋’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즈음이던 2004년, 그는 ‘부동산 신탁회사’로 관심을 돌렸다. 부동산 신탁회사는 부동산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할 수 있는 회사다. 설립 자본금만 100억원이 필요했다. 주위에서는 “이병철이 좀 잘나간다 싶더니 턱없는 욕심을 부린다”고 했다.
“부동산 신탁회사가 공공기관처럼 인식됐을 때였습니다. 장성급 군인이나, 고위 관료들이 신탁회사 사장으로 임명됐고 토지를 소유한 건설사나 개발업자가 그들에게 사정사정하며 업무 대행을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신탁회사 사장은 꽤 높은 사람으로 인식되던 때였는데 일개 개인인 제가 신탁회사를 차린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헛소리를 한다고 했죠.”
36세 부동산 신탁회사 사장
하지만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그는 우선 기존의 리츠회사에 투자했던 하나은행을 설득했다. ‘민간인’인 그가 ‘공기업’이나 다름없는 부동산 신탁회사를 차리기 위해서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였다. 결국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이 각각 15%, 신한은행이 7%를 투자키로 했다. 나머지 자본금은 ‘JW에셋’과 개인 주주들로부터 투자받았다. 그리고 2004년 7월, 국내 최초로 개인이 대주주인 부동산 신탁회사가 생겨났다. 회사 이름은 ‘다올신탁’으로 정했다. ‘다올’은 순수 한국어로, 베틀에서 씨줄, 날줄이 왔다갔다하면서 직물을 짤 때, 중간에 감기면 풀었다 감는 일을 하는 긴 막대기 ‘다올대’에서 따왔다.
이 대표는 “부동산과 금융의 막힌 곳을 풀어주는 다올대 같은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사명을 이렇게 지었다”고 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생판 모르는 업계에 뛰어들어서 겁없이 사세를 넓혔네요.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니고요.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목표한 것을 이루면 또 다른 일이 하고 싶었습니다. 매순간 최선을 다하되, 후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병철 대표의 이런 저돌적 성격은 부동산 신탁 업계 자체를 뒤흔들었다. 그는 기존의 딱딱했던 업계 관행을 깨고 스스로 건설회사나 금융기관을 찾아가 그들 소유의 토지·빌딩을 운용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직원들에게는 “나는 대표이사가 아니라 제1호 영업사원”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톱 20위권의 건설회사를 전부 고객으로 만들었다.
‘영업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꽤 건방진 성격이 아니었나 싶어요. 하지만 집안의 어려운 사정을 겪으면서 남 앞에서 머리 숙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머리를 숙여 보니 침 뱉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들 도와줍니다. 저는 지금도 영업 최전방에 나가 있고 직접 사람을 만나 일을 수주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여태까지 그래 왔고, 제 자식들에게도 고개 숙이는 법을 가르칠 겁니다.”
이병철 대표는 부동산 신탁회사를 차린 지 2년 만인 2006년, ‘다올자산운용’ 회사를 론칭했다. 신탁회사는 부동산과 관련된 서비스업을 할 수 있는 곳이고, 자산운용회사는 직접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는 회사다.
이병철 대표는 ‘다올자산운용’을 만든 이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州)에 있는 ‘웰스파고(Wells Fargo)’ 은행 건물을 4000억원에 매입했다. 또 말레이시아의 공항과 고속철도를 잇는 중앙역 근처의 사무실 빌딩 3개를 잇달아 매입하는 등 해외 부동산에 직접 투자하고 있다. 과거 싱가포르 투자청이 우리나라 핵심 빌딩들을 매입했듯이, 우리나라 회사가 세계 곳곳의 알토란 같은 부동산을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금융지주, 전문가 150여 명 전면 내세워 부동산 사업
그즈음 하나금융지주는 부동산업으로의 사업 진출을 선언하고, 이병철 대표의 신탁회사를 사들이게 된다. 마침 이 대표 스스로도 개인 대주주로서 회사를 성장시키는 데 한계를 느꼈던 시점이었다고 한다.
“미국에는 ‘블랙스톤’ 같은 부동산 펀드, 싱가포르에는 투자청이 있습니다. 중국 최고 갑부인 리카싱도 부동산으로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도널드 트럼프 같은, 또 블랙스톤 같은 부동산 펀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오던 터였습니다. 개인이 하기는 역부족이었는데 하나금융지주가 나선다고 하니 잘됐다 싶었습니다.”
하나금융지주는 국내 금융그룹으로서는 최초로 부동산사업그룹을 출범시켰다. 은행·증권·신탁·자산운용 등 그룹 관계사의 부동산 전문가 150명으로 구성돼 있다. 운용자산은 은행 2조5000억원, 부동산펀드 1조4000억원 등 현금성 자산 4조원, 부동산신탁자산 10조원이다.
이병철 대표는 “하나금융의 부동산사업은 철저히 고객 중심주의 원칙으로 이뤄진 조직으로 부동산의 모든 업무를 한곳에서 해결하는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부동산 시장이 계속 침체기에 있는데 어떻게 수익을 냅니까.
“시장이 좋을 때는 좋을 때대로, 나쁠 때는 나쁠 때대로 수익을 내야 하는 것이 저희 업무입니다. 침체기인 지금 시점이 실물 부동산을 싸게 살 수 있는 시기라 판단해 투자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여의도 하나대투증권 빌딩과 SK서린빌딩을 펀드로 편입시켰습니다. 해외에서도 잇달아 빌딩을 매입, 지난 1년 동안 총 1조4000억원 규모의 실물 부동산을 매입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습니다.”
―하나금융 부동산사업의 미래는 어떤가요.
“중장기 비전은 글로벌 플레이어들과 경쟁할 수 있는 종합 부동산 회사를 만드는 겁니다. 해외에는 시가총액만 수조 원에 이르는 종합 부동산 회사들이 있지만 국내에는 없습니다. 부동산을 테마로 하는 큰 회사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미국의 리먼 사태로 인해 부동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변화가 요구됩니다. 국내 시장에서는 PF 대출 등에 국한돼 있던 기존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앞으로 부동산 시장은 어떻게 변할까요.
“고령화, 1~2인 가구 폭증이 대세입니다. 과거에 노인들이 시골로 떠났다면 이제 도심으로 회귀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지 않습니다. 수요자가 주도하는 시장에서, 목적형으로 개발해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부동산 투자, 집은 딱 한 채만
‘부동산 전문가’인 그는 어떻게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아파트는 현재 살고 있는 곳 한 채만 보유하고 있고, 나머지 자산의 20%는 금융 부문에, 나머지는 부동산 펀드나 수익형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과거처럼 건물을 짓기만 하면 팔렸던 양적 팽창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또 아파트를 사기만 하면 집값이 올랐던 성장의 시기 역시 지났습니다. 불행히도 집으로 돈 버는 시대는 끝났다는 얘깁니다. 저는 지인들에게 집은 지금 살고 있는 집 한 채면 충분하다고 조언합니다. 나중에 자식들 출가시키고 두 분이 살기 적당한 집 한 채만 남기고 처분하라고요. 남는 자산 중 일부는 주식, 채권 등 금융에, 나머지는 부동산 관련 펀드에 관심을 가져보세요. 과거처럼 큰돈이 없어도 부동산에 투자해서, 거기에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많습니다.”⊙
대학입시에 연이어 낙방하자 군대에 다녀온 뒤 곧장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유학을 중도에 포기했다. 느닷없이 집안의 ‘가장’이 됐고, 우연한 기회에 부동산 업계에 발을 들여놨다. 부동산의 ‘부’자도 몰라서 공부를 하면서 사업을 해야 했다.
하지만 매사가 벼랑 끝이라고 자신을 채찍질했던 그의 의지는 이후 10여 년간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아줬다. 국내 최초로 ‘리츠(REITs)회사’를 만들었고, 사실상 공기업으로 여겨졌던 부동산 신탁회사를 민간(民間) 최초로 만들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국내에서 처음으로 ‘부동산 전문 자산운용사’를 설립했고, 이들 회사를 하나금융그룹에 팔았다. 올해 고작 44세인 그의 직함은 하나금융그룹 자회사인 ‘하나다올신탁 대표이사’다. 그의 동년배들은 은행에서 차장급 정도다.
하나금융에 부동산 신탁회사 매각
하나금융지주는 지난 2010년 4월, 부동산 신탁회사인 ‘다올신탁’을 인수했다. 그동안 국내 금융회사 수익의 대부분은 은행 부문에서 나왔다. 그런데 하나금융은 은행 외에 부동산업에 관심을 보이며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참신한 도전으로 바라봤다.
하나금융지주는 이미 종전부터 ‘다올신탁’이라는 회사에 투자를 하고 있었다(지분의 15%). 여기에 신규로 주식(43%)을 사들여, 총 58%의 지분을 확보했다. ‘다올신탁’은 ‘다올자산운용’이라는 회사에 투자를 한 상태여서 하나금융지주로서는 ‘다올신탁’을 자회사로, ‘다올자산운용’을 손자회사로 인수하게 됐다.
하나금융의 부동산업 진출도 관심거리였지만, 인수회사인 ‘다올신탁’ 대표이사를 유임키로 한 결정이 화제가 됐다. 40대(代) 초반의 금융회사 사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어서다.
주인공인 이병철 대표는 “인생의 제2막이 펼쳐진 순간이었다”고 했다.
“하나금융지주가 부동산 회사를 사서 부동산업에 진출한다는 얘기가 2009년에 나돌았습니다. 그 대상이 제가 설립한 ‘다올신탁’이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김승유(金勝猷) 전(前) 하나금융지주 회장과는 일전에 두어 번 스쳤을 뿐 이렇다 할 인연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김 회장이 사무실에 좀 들르라고 하더니 대뜸 ‘당신, 나랑 동업해’ 이러더군요. 작은 신탁회사 대표인 제가 큰 금융회사랑 무슨 동업을 합니까. 김 회장께서 ‘하나금융이 당신 회사를 인수할 것이다. 당신은 지분 20%를 남기고, 그 회사 대표를 계속 맡아라. 그러면 동업 아니냐. 나는 다올신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심정은 정말….”
이병철 대표의 짧은 침묵 속에는 그가 걸어온 지난 인생의 쓴맛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부동산 신탁회사’는 낯설다. 이병철 대표는 업무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아파트나 골프장을 개발할 때 디벨로퍼(developer)들이 땅을 계약합니다. 하지만 땅을 개발할 자금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땅을 들고 오면 신탁회사에서 이후의 모든 과정을 대행합니다.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금융권에서 조달하고, 시공사를 선정하고 향후 분양하는 일까지 대신합니다. 맨 마지막에 분양대금을 받아서 금융권에 원금을 갚고, 최종 남은 금액을 디벨로퍼들에게 되돌려주기까지 총체적인 일을 합니다. 부동산 분야의 전문가들이 소유자를 대신해 부동산을 개발, 관리, 운영하며 매출액의 0.3~0.5%의 수수료(fee)를 받는 일입니다.”
부동산을 유동화시키는 업무
―일반인에게 부동산 신탁 업무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역사가 길지 않고 ‘B TO B(Business to Business)’라 그럴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동산을 좋아하지만, 부동산을 유동화하는 방법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부동산이라고 하면 집을 사고, 대기업·금융기관이 보유한 빌딩을 운용하는 정도가 전부였죠. 미국, 홍콩은 일찍이 부동산을 유동화하는 기법이 발달했고 산업의 한 축으로 발전했는데 우리가 늦었습니다. IMF 때가 돼서야 부동산 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이병철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국내에 신탁법이 도입된 것은 1950년이었다. 부동산 전문 신탁은 아니고, 은행에서 일정 수준을 운용하는 정도였다. 뜻하지 않게 몇 번 사고가 나면서 1991년에 ‘부동산 신탁 전업회사’가 생겨났다. 한국부동산신탁(당시 한국감정원의 자회사), 대한부동산신탁(당시 성업공사의 자회사)이 그들이다. 우리나라 ‘1세대 신탁 전업사’다. 이들 회사는 IMF사태 때 부도났다. 이후 과거 주택은행의 자회사였던 주원부동산신탁이 오늘날 KB부동산신탁으로 발전했는데, 이처럼 부동산 신탁회사는 공기업적 성격이 강했다.
일반인들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싱가포르 투자청이 국내의 대표 빌딩인 서울파이낸스센터와 스타타워(現 강남파이낸스센터)를 산 것이 계기였다.
이병철 대표는 “이때부터 정부에서 제도적으로 부동산을 동산화하는 사이클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병철 대표 역시 부동산 신탁회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IMF 때 해외 자금이 국내로 급속히 유입되면서 서울법대를 나온 바로 위 형의 친구 몇몇이 외국인에게 법률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그때 프랑스 회사인 ‘까르푸’가 국내 진출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마땅한 파트너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까르푸’로서는 한국에서 사기를 당하지 않을 신뢰도가 높은 파트너가 필요했고, 이렇게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은 것이 이병철 대표였다.
“부모님께 매달 생활비를 보내야 했고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무슨 일이든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부동산의 ‘부’자도 몰랐죠. ‘까르푸’에서 일거리를 준다기에 무작정 회사를 만들고 직원 한 명을 뽑았습니다. 바를 정(正), 도울 우(佑) 자를 써서 ‘정우앤컴퍼니’라고 이름을 짓고, 지인들에게 자금을 빌려 회사를 만들고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까르푸’의 요구는 구체적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내의 부동산 시장을 매력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언어 소통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요, 토지를 매입하는 모든 과정을 버거워했다. 이병철 대표는 땅을 찾고, 가격을 협상하고, 토지의 인허가를 받는 과정, 시공사 선정 등 모든 과정을 맡았다. 계약금을 받지 않는 대신 ‘까르푸’가 성공적으로 론칭을 하면 그에 따른 성공보수를 받기로 했다. ‘까르푸’를 대신해 전국 방방곡곡 여관방을 전전하며 땅을 봤다.
첫 번째 고객은 ‘까르푸’
이병철 대표는 인터뷰 초기부터 “회사 얘기만 하고 싶다”고 했다. “훨씬 힘들게 사업 한 사람들에게 송구하지만, 제게는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아팠던 시절”이라며 말이다.
그는 그렇게 생면부지의 ‘까르푸’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 했습니다. 이른 아침이든, 오밤중이든, 서울이든, 지방이든 뭐든지요.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들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이 없었지요. 제게는 그 길이 벼랑 끝이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해달라는 것은 아무 토를 달지 않고 다 했습니다.”
첫 프로젝트는 넉 달 만에 성공으로 끝났다. 이병철 대표는 성공보수로 8억원 정도를 받았다. 맨손으로 회사를 차린 지 넉 달 만에 자본금의 4배를 벌어들였지만 마음은 편치 못했다. ‘체인스모커’였지만, 담배 사는 돈이 아까울 정도로 불안했단다. ‘일회성에 그치는 일이면 어떡하나’ 우려했지만 다행히 일감은 계속 들어왔다. 그는 ‘까르푸’, ‘월마트’의 국내 진출 업무를 대행하면서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땅을 보러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어느 날, 경기도 부천 시청 옆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동아건설의 백화점인 동아시티백화점이 공사를 하다가 자금난으로 중단한 땅이었다. 그는 덜컥 이 땅을 400억원대에 매입기로 하고 계약을 했다. 물론 이때까지 누구에게 투자를 받을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너무 무모한 것 아닙니까. 땅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괜히 계약금만 날릴 텐데요.
“그렇죠. 그런데 사업을 하다 보니 시각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 무조건적 자신감이라고나 할까요. 성공시키겠다는 긍정적 생각만으로 덜컥 저질렀습니다.”
그의 ‘뚝심’ 덕분인지, ‘운’이 따랐는지 알 수 없으나 네덜란드 연기금을 운용하는 로담코사(社)가 선뜻 1200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현대백화점과 CGV 극장이 입점키로 했고, 로담코 프로젝트의 대행 업무를 이병철 대표가 맡게 됐다.
그는 “제 사업 영역이 블루오션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큰물에서 놀아야 큰돈을 벌 수 있잖습니까. 부동산은 최소 몇백억 원이니까 성공보수를 받으면 몇억 원이 떨어집니다. 물론 중간에 잘못되면 보수가 일절 없지만요. 성실해야 하고 어떻게든 일을 성공시켜야 하지요. 모든 사업에 1, 2등은 있지만 부동산 투자 대행업은 시작이어서 경쟁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주식, 채권은 글로벌화(化)가 진행됐지만 부동산은 로컬(local)성이 강합니다. 땅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살 수가 없잖습니까. 아무리 큰 다국적 기업이라도 현지에 믿을 만한 파트너가 없으면, 선뜻 현지 부동산에 투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적절한 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였으니 블루오션이죠.”
무일푼에서 시작해 매년 사세 확장
사업을 조금씩 확대하던 때 언론에 ‘IMF 때 국부(國富)가 해외로 유출됐다’는 기사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주식 시장을 외국인 투자자에게 개방하고, 은행·빌딩을 매각한 것이 문제가 됐다.
2001년, 국토해양부는 ‘리츠법’을 도입했다. 부동산 리츠는 부동산에 투자해 그 투자금으로부터 나온 이익을 투자자들에게 되돌려주는 시스템이다. 일반인들이 주식에 투자하는 것처럼 100만원, 200만원의 소액을 부동산에 투자하는 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이병철 대표는 국내 1호 ‘리츠회사’를 만들었다. 당시 법적 최저 자본금은 70억원. 그동안 정우앤컴퍼니가 벌어들인 돈에, 나머지는 하나은행·교보생명으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그와 하나금융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 이때다. 정우앤컴퍼니의 이니셜을 따서 ‘JW에셋’이라고 리츠회사 이름을 붙였다. 회사 인지도가 낮아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설움도 겪었다.
“지인 소개로 최고 재벌 회사에 투자 유치를 갔을 때입니다. 중역과 부서 담당자들에게 한 시간 내내 열변을 토하며 투자해 줄 것을 요청했죠. 그 중역은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고, 한 시간 내내 제 말을 단 한마디도 듣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줄곧 다른 일을 했거든요. 그 회사 사옥을 나오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두고 봐라, 언젠가는 너희보다 큰 회사를 만들겠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JW에셋’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즈음이던 2004년, 그는 ‘부동산 신탁회사’로 관심을 돌렸다. 부동산 신탁회사는 부동산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할 수 있는 회사다. 설립 자본금만 100억원이 필요했다. 주위에서는 “이병철이 좀 잘나간다 싶더니 턱없는 욕심을 부린다”고 했다.
“부동산 신탁회사가 공공기관처럼 인식됐을 때였습니다. 장성급 군인이나, 고위 관료들이 신탁회사 사장으로 임명됐고 토지를 소유한 건설사나 개발업자가 그들에게 사정사정하며 업무 대행을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신탁회사 사장은 꽤 높은 사람으로 인식되던 때였는데 일개 개인인 제가 신탁회사를 차린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헛소리를 한다고 했죠.”
36세 부동산 신탁회사 사장
하지만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그는 우선 기존의 리츠회사에 투자했던 하나은행을 설득했다. ‘민간인’인 그가 ‘공기업’이나 다름없는 부동산 신탁회사를 차리기 위해서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였다. 결국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이 각각 15%, 신한은행이 7%를 투자키로 했다. 나머지 자본금은 ‘JW에셋’과 개인 주주들로부터 투자받았다. 그리고 2004년 7월, 국내 최초로 개인이 대주주인 부동산 신탁회사가 생겨났다. 회사 이름은 ‘다올신탁’으로 정했다. ‘다올’은 순수 한국어로, 베틀에서 씨줄, 날줄이 왔다갔다하면서 직물을 짤 때, 중간에 감기면 풀었다 감는 일을 하는 긴 막대기 ‘다올대’에서 따왔다.
이 대표는 “부동산과 금융의 막힌 곳을 풀어주는 다올대 같은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사명을 이렇게 지었다”고 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생판 모르는 업계에 뛰어들어서 겁없이 사세를 넓혔네요.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니고요.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목표한 것을 이루면 또 다른 일이 하고 싶었습니다. 매순간 최선을 다하되, 후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병철 대표의 이런 저돌적 성격은 부동산 신탁 업계 자체를 뒤흔들었다. 그는 기존의 딱딱했던 업계 관행을 깨고 스스로 건설회사나 금융기관을 찾아가 그들 소유의 토지·빌딩을 운용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직원들에게는 “나는 대표이사가 아니라 제1호 영업사원”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톱 20위권의 건설회사를 전부 고객으로 만들었다.
‘영업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꽤 건방진 성격이 아니었나 싶어요. 하지만 집안의 어려운 사정을 겪으면서 남 앞에서 머리 숙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머리를 숙여 보니 침 뱉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들 도와줍니다. 저는 지금도 영업 최전방에 나가 있고 직접 사람을 만나 일을 수주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여태까지 그래 왔고, 제 자식들에게도 고개 숙이는 법을 가르칠 겁니다.”
이병철 대표는 부동산 신탁회사를 차린 지 2년 만인 2006년, ‘다올자산운용’ 회사를 론칭했다. 신탁회사는 부동산과 관련된 서비스업을 할 수 있는 곳이고, 자산운용회사는 직접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는 회사다.
이병철 대표는 ‘다올자산운용’을 만든 이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州)에 있는 ‘웰스파고(Wells Fargo)’ 은행 건물을 4000억원에 매입했다. 또 말레이시아의 공항과 고속철도를 잇는 중앙역 근처의 사무실 빌딩 3개를 잇달아 매입하는 등 해외 부동산에 직접 투자하고 있다. 과거 싱가포르 투자청이 우리나라 핵심 빌딩들을 매입했듯이, 우리나라 회사가 세계 곳곳의 알토란 같은 부동산을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금융지주, 전문가 150여 명 전면 내세워 부동산 사업
그즈음 하나금융지주는 부동산업으로의 사업 진출을 선언하고, 이병철 대표의 신탁회사를 사들이게 된다. 마침 이 대표 스스로도 개인 대주주로서 회사를 성장시키는 데 한계를 느꼈던 시점이었다고 한다.
“미국에는 ‘블랙스톤’ 같은 부동산 펀드, 싱가포르에는 투자청이 있습니다. 중국 최고 갑부인 리카싱도 부동산으로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도널드 트럼프 같은, 또 블랙스톤 같은 부동산 펀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오던 터였습니다. 개인이 하기는 역부족이었는데 하나금융지주가 나선다고 하니 잘됐다 싶었습니다.”
하나금융지주는 국내 금융그룹으로서는 최초로 부동산사업그룹을 출범시켰다. 은행·증권·신탁·자산운용 등 그룹 관계사의 부동산 전문가 150명으로 구성돼 있다. 운용자산은 은행 2조5000억원, 부동산펀드 1조4000억원 등 현금성 자산 4조원, 부동산신탁자산 10조원이다.
이병철 대표는 “하나금융의 부동산사업은 철저히 고객 중심주의 원칙으로 이뤄진 조직으로 부동산의 모든 업무를 한곳에서 해결하는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부동산 시장이 계속 침체기에 있는데 어떻게 수익을 냅니까.
“시장이 좋을 때는 좋을 때대로, 나쁠 때는 나쁠 때대로 수익을 내야 하는 것이 저희 업무입니다. 침체기인 지금 시점이 실물 부동산을 싸게 살 수 있는 시기라 판단해 투자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여의도 하나대투증권 빌딩과 SK서린빌딩을 펀드로 편입시켰습니다. 해외에서도 잇달아 빌딩을 매입, 지난 1년 동안 총 1조4000억원 규모의 실물 부동산을 매입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습니다.”
―하나금융 부동산사업의 미래는 어떤가요.
“중장기 비전은 글로벌 플레이어들과 경쟁할 수 있는 종합 부동산 회사를 만드는 겁니다. 해외에는 시가총액만 수조 원에 이르는 종합 부동산 회사들이 있지만 국내에는 없습니다. 부동산을 테마로 하는 큰 회사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미국의 리먼 사태로 인해 부동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변화가 요구됩니다. 국내 시장에서는 PF 대출 등에 국한돼 있던 기존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앞으로 부동산 시장은 어떻게 변할까요.
“고령화, 1~2인 가구 폭증이 대세입니다. 과거에 노인들이 시골로 떠났다면 이제 도심으로 회귀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지 않습니다. 수요자가 주도하는 시장에서, 목적형으로 개발해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부동산 투자, 집은 딱 한 채만
‘부동산 전문가’인 그는 어떻게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아파트는 현재 살고 있는 곳 한 채만 보유하고 있고, 나머지 자산의 20%는 금융 부문에, 나머지는 부동산 펀드나 수익형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과거처럼 건물을 짓기만 하면 팔렸던 양적 팽창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또 아파트를 사기만 하면 집값이 올랐던 성장의 시기 역시 지났습니다. 불행히도 집으로 돈 버는 시대는 끝났다는 얘깁니다. 저는 지인들에게 집은 지금 살고 있는 집 한 채면 충분하다고 조언합니다. 나중에 자식들 출가시키고 두 분이 살기 적당한 집 한 채만 남기고 처분하라고요. 남는 자산 중 일부는 주식, 채권 등 금융에, 나머지는 부동산 관련 펀드에 관심을 가져보세요. 과거처럼 큰돈이 없어도 부동산에 투자해서, 거기에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많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