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정보] 현대·기아차의 세계 최초 상생 경영 현장을 가다 : 월간조선

현대·기아차에 부품을 공급하는 ‘동희산업’의 이수철 과장은 지난 6월에 일주일간 남양에 있는 현대자동차그룹 기술연구소로 출근했다. 이 과장이 자신이 몸담은 중소기업이 아니라 현대자동차그룹 기술연구소로 출근을 한 이유는 ‘게스트 엔지니어(guest engineer)’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현대·기아차는 신차를 개발할 때 자사(自社) 직원 이외에 협력업체 직원 중 일부를 초청해 공동으로 개발 업무를 진행한다. 이때 초청되는 직원을 부르는 호칭이 ‘게스트 엔지니어’인데, 이수철 과장은 현대차가 주관하는 프로젝트의 일원이었다. 그는 지난 6월 현대차그룹 기술연구소가 진행 중인 중국 소비자를 겨냥한 저가(低價) 차량 개발에 참여했다.

이 과장은 “막상 다른 회사로 출근을 하자니 조직원들과 서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한마음으로 차량 개발 프로젝트를 같이 하다 보니 현대차 직원이 우리 회사 직원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이 과장은 연구소와 협업(協業)을 한 뒤 요즘엔 일상처럼 ‘동희산업’으로 출근을 하고 있고, 종종 비슷한 일이 생기면 현대차그룹 기술연구소로 출근을 한다. 부품 개발 경력 10년차인 그에게 이런 ‘경험’은 새롭기만 하다.

그는 “10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완성차 업체가 협력사에 문을 쉽게 열지 않았는데 요즘은 함께 성장해야 한다며 먼저 찾아온다. 해외 완성차 업체는 우리에게 부품을 납품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만 묻지만 현대차는 우리와 함께 고민한다”고 했다.

현대차그룹 기술연구소 연구개발업체기술지원팀의 조성운 파트장은 요즘 일주일에 2~3번은 협력업체로 출근한다. ‘새시설계’가 전문인 23년차의 이 베테랑 파트장은 현대·기아차 협력업체들에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 요즘 업무다.

현대·기아차에 납품하는 협력업체 중에서 중요 부품 업체를 선정하고, 이들 회사의 문제점을 냉정하게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다.

조 파트장은 “처음에는 협력회사에서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완성차 업체인 현대·기아차가 먼저 중소기업들에 문제점이 없느냐며 다가서자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요즘은 이런 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경력 10년차 베테랑 엔지니어 260여 명이 중소기업 지원

현대·기아자동차가 지난해 연말부터 야심 차게 시작한 중소기업과의 상생 방안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12월에 ‘싱크탱크’ 격인 현대차그룹 기술연구소 안에 ‘R&D 기술지원단(이하 기술지원단)’이라는 신규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대기업인 현대·기아차가 중소기업체인 협력업체들과 함께 성장을 하자는 취지로 설립했다. 자동차의 제조는 크게 외관용 껍데기인 ‘차체’와 범퍼 등 내장(內裝) 파트인 ‘의장’, 타이어 등과 관련 있는 ‘새시’, 엔진ㆍ변속기 파트인 ‘파워트레인’, 전기계통의 부품들인 ‘전장’ 등으로 나뉜다.

현대·기아차는 이들 해당 분야에서 최소 10년 이상씩 근무한 베테랑 엔지니어들 260여 명으로 지원단을 꾸렸다. 이들 중 37명은 부서 일을 전담하고, 나머지 220여 명의 엔지니어들은 수시로 이 부서에 투입된다.

구성한 지 불과 9개월 남짓한 신규 조직이지만, 이들이 일군 업적은 눈부시다.

현대·기아차의 기술지원단은 지난 9월까지 국내 800여 건, 미국 500여 건, 중국 1000여 건 등 국내외 400여 개의 협력사에 총 4000건 이상의 R&D기술을 지원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에 납품을 하는 중소업체의 기술력이 훌륭해야 더 좋은 성능의 완성차가 나온다고 생각한다”며 “남양연구소가 가진 기술과 경험을 나눠 협력회사들의 R&D 역량을 강화하고, 다 같이 글로벌 메이커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

완성차 업체가 자신들에게 납품하는 중소업체에 기술을 지원하는 경우는 전(全)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제품의 품질이나 구매 부문에서 협업을 종종 했지만, 협력사의 기술 개발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세계 최초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중소기업에서 1년간 고민한 문제를 이틀 만에 풀어

현대·기아차 기술지원단이 협력사에 분해용 부품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모습.

현대·기아차 기술지원단이 협력회사를 지원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은 기술지원단에서 중요업체를 선정하고, 이들 회사를 찾아가 직접 기술을 이전하는 방법이다.

지원단이 한 회사를 선정하고 나면 최소 2주일 동안 협력사에 대한 문제점을 종합 분석하고, 데이터를 모은다. 이후 협력회사를 찾아가 한두 시간에 걸쳐 브리핑을 하고, 구체적인 일정을 정해 이들에게 기술 노하우를 전달한다.

조성운 기술지원팀 파트장의 얘기다.

“우리와 협력사의 엔지니어가 질의응답을 통해 협력사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 분야의 요구사항을 먼저 접수합니다. 이후 해당 회사를 직접 방문하거나 화상회의 등을 통해 현대·기아차의 노하우를 협력사별로 맞춤형 지원을 하죠.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한 회사에 5~6번 이상씩 갑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지원을 하나 꼽는다면.

“워셔액 리저버 탱크를 만드는 협력사 지원 때입니다. 방문 취지를 설명했지만 반응이 시큰둥했어요. 그 회사가 자체적으로 1년 동안 개선 활동을 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지원단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일단 한 번 해봅시다’ 정도였습니다. 그때 이틀을 꼬박 밤을 새며 문제점을 찾고, 세팅 조건을 반복 시운전해서 문제점을 해결했습니다. 그 회사는 1년 동안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했다며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그 회사와의 우호적 협력이 더욱 돈독해진 것은 물론입니다. 무척 보람을 느꼈습니다.”

현대·기아차의 기술지원단 팀원들은 요즘 해외 출장이 잦다. 지원단의 업무 중에 해외 지원활동이 있어서다.

강창기 기술지원단장의 얘기다.

“해외에 진출한 협력업체 중에는 사정이 열악한 곳이 많습니다. 해외 주재원을 파견할 경우 체재비며, 비용이 추가로 들어가기 때문에 최소의 인원만 파견하는 협력회사가 많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들이 현지인들을 교육시키고, 신기술을 연구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현대·기아차가 직접 이들이 진출한 지역을 방문해서 현장을 점검하고, 개선할 것은 개선을 했습니다.”

지원단은 우선 지난 3월 중순부터 4월 초에 걸쳐 미국의 45개 협력사를 살폈다. 1000여 건의 기술 지원 항목을 점검한 결과, 이 중 500여 건이 개선해야 할 사항으로 판명됐다. 지원단은 협력사와 협업 끝에, 지난 6월까지 이 중 95%를 개선했다.

지원단은 이후에 중국, 인도, 유럽을 잇달아 방문하며 총 230개 협력사의 애로사항을 직접 점검했다.

현대·기아차 기술지원단 관계자는 “현지 작업자들이 부품 사양을 잘 구분하지 못해서 잘못 장착하는 부품들은 사양을 단순화하도록 했고, 생산라인에서 혼류(混流) 생산해 어려움을 겪는 협력사에는 부품 사양을 통일하고 단순화하도록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양사 모두에 이득

‘게스트 엔지니어’ 제도를 운영한 결과, 여태까지 총 50여 개의 협력회사에서 400여 명을 파견했다. 신차의 부품을 설계하는 단계에서부터 협력사들이 조기 참여하는 것이 차량 개발 기간을 단축시킨다는 생각에서 이런 제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게스트 엔지니어’들에게는 약 750평 규모의 사무실과 회의실, 샘플실, 휴게실 등 별도의 공간과 개인PC, 통근버스 등을 지원하고 있다.

‘동희산업’의 이수철 과장은 “완성차 업체로의 출근은 자동차 기술 동향을 알 수 있어 부품 설계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 회사 차원에서는 신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이를 분석하는 경비가 줄어든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다”고 했다.

현대·기아차가 중소기업과 ‘상생경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중소기업만 혜택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현대·기아차 관계자들 역시 이로 인한 혜택이 크다고 했다.

조성운 현대차그룹 기술연구소 파트장은 “중소기업을 지원하러 갔다가 오히려 배우는 것이 많다. 협력사에서 부품에 대해 자세한 피드백을 해주고, 새로운 정보를 공유한다. 자칫 완성차 업체에 부메랑으로 날아올 수 있는 사소한 잘못들을 협력회사에서 잡아내 서로 도움이 된다”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R&D 모터쇼

현대차 연구소에서 열리는 R&D 모터쇼에 전시된 차량.

지난 10월 5일에 찾은 현대차 남양연구소의 한쪽 잔디밭 풍경은 흥미로웠다. 현대자동차의 대표 차종인 ‘그랜저’, ‘소나타’는 물론이고, ‘BMW 5시리즈’, ‘벤츠 E클래스’, ‘아우디 A8’, ‘렉서스’ 등 해외의 내로라하는 자동차들이 낱낱이 분해된 채 풀밭 위에 전시돼 있었다. 자동차 문짝과 엔진, 변속기 등이 분해된 것은 물론이고, 핸들 커버, 컵홀더 부분까지 뼈대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낱낱이 해부된 자동차들이 100대가 넘었다. 현대차그룹 기술연구소에서 지난 2006년부터 열고 있는 ‘R&D 모터쇼’ 행사였다. 프랑크푸르트, 디트로이트 등에서 매년 자동차 쇼가 열리지만, 이렇게 자동차를 해부한 ‘R&D쇼’를 하는 곳은 현대·기아차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

올해의 콘셉트는 ‘보고, 만지고, 즐기는, 소통과 상생의 R&D모터쇼’였다. 현대·기아차는 여기에 자차(自車) 25대와 주요 경쟁차 80대 등 완성차 105대와 절개차 8대, 차량골격 5대 등을 전시 중이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개막일에 진행된 경쟁차 분해 이벤트에는 협력사 엔지니어 12명 등 총 20여 명이 참여해 세계적인 명차를 직접 분해하고 최신 부품 트렌드를 눈으로 확인했다”고 했다.

현대·기아차는 이 행사와는 별도로 매년 평균 자동차 17대분에 해당하는 부품을 협력사에 지원하고 있다.

이 외에도 현대·기아차 기술지원단은 고장이 나는 모드별로 기술 세미나를 열고, 협력사에 차량개발을 위한 기술정보를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상생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도요타의 리콜 사태 보며 일찌감치 준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이라는 보여주기 식(式)의 행사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강창기 기술지원단장은 크게 웃었다. 강 단장의 얘기다.

“연구소 내에 조직을 발족시키고 협력업체를 찾았을 때 그런 식의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두 번 찾아오고 말 거면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는 투였죠. 자동차 산업은 최첨단으로 고도화된 복합 산업입니다. 완성차 업체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현대·기아차는 최고의 자동차 회사였던 ‘도요타’의 리콜 사태를 지켜보면서 협력사와 그야말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정부에서 상생을 말하기에 앞서 미리 준비했던 일입니다. 협력사가 잘돼야 우리가 잘될 수 있고, 부품회사의 성장 없이 우리가 톱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해외에 진출한 협력사를 돕다 보면 현대·기아차의 고유 기술이 유출될 위험이 없습니까.

“기술 유출에 대한 보안은 그 어느 때보다 강화시켰습니다. 우리가 협력사와 함께 고민하고, 그들에게 우리가 미리 경험한 일들에 대한 노하우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중요 기술이 유출될 염려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미국, 중국, 인도 현장에 나가서 협력사와 대화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가령 미국 작업자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손가락이 크고 두껍습니다. 그들에게 같은 공정 조건을 주면 당연히 불량률이 높을 수밖에 없죠. 이런 점들을 개선하고, 우리의 기존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입니다.”

―협력사를 지원하는 것보다 지원단 엔지니어들이 다른 업무에 매진했으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가령 세계 최초의 자동차 신기술 같은.

“전담 직원이 있고 서로 순환 근무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업무상 공백이 많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기술을 하나 만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지원하고, 그에 걸맞은 위상을 갖춘 협력사들이 많이 생겨야 결과적으로 글로벌 브랜드가 될 수 있어요.”

―앞으로 지원단의 업무를 어떤 식으로 진행할 예정입니까.

“올해는 태동기로 지금까지의 업무를 계속할 것입니다. 발전, 성숙기로 갈 것이고, 향후에는 현재처럼 1차 협력업체들에 지원하는 것을 2, 3차 업체로 확대시켜 나갈 것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서로 신뢰를 쌓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