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차의 망령으로 15년 동안 골머리 앓은 삼성그룹, 마침내 웃음
⊙ 김용철 변호사 ‘폭로’의 최대 수혜자는 이건희 회장?
⊙ 김용철 변호사 ‘폭로’의 최대 수혜자는 이건희 회장?
- 서울 중구 태평로에 있는 삼성생명 본관 입구.
5월 12일 오전 9시.
“11만9500원이다!”
한국거래소의 게시판에 개장(開場)을 알리는 붉은 불이 들어왔다.
삼성생명은 당초 공모가(11만원)를 크게 상회하는 11만9500원에 시초가(始初價)를 형성했다. 장 초반 12만1000원까지 올랐다가 결국 시초가보다 떨어진 11만4000원에 거래가 마감됐다.
이날 증권가 관계자들의 시선은 온통 삼성생명에 쏠려 있었다. 20여 년 동안 상장(上場) 가능과 불가(不可)를 거듭해 온 회사가 마침내 거래소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주식이 통상 액면가 5000원을 기준으로 한다고 보면, 삼성생명의 주당 가격은 114만원(현재는 액면가 500원)인 셈이다.
흐뭇하게 지켜봤을 이건희 회장
삼성생명은 개장과 동시에 시가총액 4위(22조8000억원대)의 회사가 됐다. 같은 날 종가(終價)를 기준으로, 시가총액 1위는 삼성전자(116조2000억원대), 2위 포스코(39조7500억원대), 3위 현대차(29조500억원대) 순(順)이었다.
이날 거래된 삼성생명의 주식은 총 949만 주. 유가증권 시장 전체 거래액(7조1000억원대)의 7분의 1 정도다. 1995년 공식 집계를 시작한 이후, 신규 상장 종목 중 역대 최고 기록이다. 삼성생명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삼성생명의 상장을 누구보다 흐뭇한 심정으로 지켜봤을 사람은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이다. 삼성생명 상장으로 이 회장은 주식부자 1위였던 정몽구(鄭夢九) 현대차 회장을 제치고, 우리나라 최고 주식부자가 됐다. 이 회장 보유 주식의 지분 가치는 이날, 총 8조7000억원대였다. 삼성생명이 4조5000억원대다. 또 이 회장은 지난 십수 년 동안 마음의 빚으로 남았던 삼성자동차의 부채 문제를 삼성생명의 상장으로 말끔하게 잊을 수 있게 됐다.
이 회장이 ‘앓던 이’를 뽑게 된 것은 지난 몇 년간 이 회장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김용철 전 삼성그룹 변호사의 ‘덕’이 컸다. 정말 아이로니컬한 얘기다.
김용철 변호사는 2007년 10월, 삼성그룹이 차명계좌를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해 왔다며 폭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 변호사 탓에 삼성그룹의 도덕성은 도마에 올랐고, 이건희 회장은 특검팀에 불려 다녔다. 김 변호사 주장은 일부 맞는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었다. 본인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사실인 양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오랜 법정공방 끝에 이 회장은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삼성생명에 대한 이 회장의 애착
김 변호사의 ‘폭로’ 이후 31개월이 지난 지금 무엇이 어떻게 변했을까. 삼성을 그만둔 뒤 ‘폭로’를 했던 김 변호사는 ‘폭로’ 뒤 〈삼성을 생각한다〉는 책을 썼고 변호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럼 이건희 회장은 어땠을까. 법원 판결과 함께 회장직에서 물러났다가 작년 12월 31일 사면을 받았고, 지난 3월 회장에 복귀했다. 엄청난 마음고생을 거쳤지만 31개월 만에 원위치로 돌아온 셈이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생명을 유독 챙겼다.
2008년 7월 1일,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있었던 대화다.
판사: “계열사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입니까?”
이건희: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이 제일 중요합니다. 삼성생명은 그룹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회사이고, 삼성전자는 열한 개의 제품이 세계 1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회사를 또 만들려면, 10년, 20년을 노력해도 힘들 겁니다.”
이 회장은 울먹거렸다. 그가 64개의 삼성 계열사(2010년 3월 기준) 중에서, 삼성생명에 애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길성(朴佶成)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삼성생명은 건축물로 비교하자면, 삼성그룹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하는 지지대 같은 회사입니다. 삼성은 외부에서 충격을 받아도 내부적으로 소화를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사업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캐시카우(cash cow·수입창출원) 역할을 하는 금융회사인데, 삼성의 금융 계열사 중 핵심이 삼성생명입니다. 삼성이 금융과 전체의 계열사를 아우르는 완결성을 갖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삼성생명입니다.”
자산 130조, 매출 19조6000억원
삼성생명의 정확한 명칭은 ‘삼성생명보험주식회사’다. 1957년 5월, ‘동방생명보험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회사는 63년 7월에 삼성그룹 계열사로 편입됐다. 2009년 말을 기준으로, 자산은 130조여 원, 매출 약 19조6000억여 원, 순익 6500억여 원을 기록했다.
삼성생명의 최대주주는 이건희 회장 개인으로, 전체 지분의 20.76%(4,151,918주)를 갖고 있다. 삼성에버랜드 19.34%(3,868,800주), 신세계 13.57% (2,714,400주), 삼성문화재단과 삼성생명공익재단이 각각 4.68%(936,000주), 삼성광주전자 0.66%(131,588주), 삼성전기 0.6%(120,638주), 삼성정밀화학 0.47% (94,409주), 삼성SDS 0.35%(70,891주), 제일기획 0.21%(42,556주)를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 본인과 삼성 계열사의 지분을 합하면 전체의 51.75%이고, 우호 지분인 신세계의 지분까지 합하면 무려 65.32%를 점유하고 있다. 삼성전자, 삼성SDS, 삼성SDI 등 다른 계열사와 비교하자면, 외국인들에 의해 휘둘릴 이유가 없는, 사실상 이건희 회장의 개인 회사로 봐도 무방하다.
삼성생명은 거래소에 상장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상장의 요건을 갖추지 못해서가 아니다. 국내 모든 생명보험회사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국내 생보사들의 상장사(上場史)는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보생명은 1989년 4월, 기업공개를 전제로 자산 재평가를 시행했다. 삼성생명은 1990년 2월 자산 재평가를 받고, 상장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재무부가 주식시장의 침체 등을 이유로 이들의 상장을 보류시켰고, 이후 10년 동안 생보사 상장은 거론되지 않았다.
생보사 상장 문제가 다시 거론된 것은 이건희 회장 때문이었다. 이는 이 회장이 사활을 걸고 추진했던 삼성자동차와 궤를 같이한다.
삼성그룹은 94년 승용차 사업에 진출했다. 삼성자동차주식회사(1995년 3월)를 설립했고, 부산에 생산시설을 완공(1996년 11월)했다.
삼성그룹은 “기존 업체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출 비율을 늘리고, 기존업계에서 인력을 스카우트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각서를 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이 기아차와 이면 주식계약을 체결한 문건이 공개돼 파문에 휩싸이는 등 논란을 빚었다. 결국 삼성은 1999년 6월, 대우그룹과 전자-자동차 빅딜을 선언하며,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자동차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한 것이다. 삼성이 ‘SM5’라는 준중형 자동차를 생산한 지 1년4개월, 법인을 설립한 지 4년3개월 만이었다. 삼성차는 이건희 회장으로서는 떠올리기 싫은 치욕의 역사다.
이 회장 소유의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 삼성차 채권단 손에
당시 삼성차는 총 4조4920억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삼성차는 자동차 공장을 프랑스 회사 ‘르노’에 파는 등의 방법으로 빚을 갚았다. 남은 빚은 2조4500억원. 삼성그룹은 “나머지 빚은 이건희 회장이 갖고 있던 삼성생명 주식(350만주)을 현금화해서 갚겠다”고 했다. 기한은 2000년 12월 31일로 잡았다.
채권단은 삼성차의 법정관리를 받아들이고, 이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을 담보로 잡았다. 삼성생명은 상장되지 않은 주식이어서, 주가를 얼마로 추산하느냐가 이슈였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 외국계 신용평가 회사가 주당 71만원으로, 국내의 신용평가회사는 69만원으로 산정해서 평균값인 70만원으로 산정했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은 채권단에 조건을 달았다. 만약 삼성생명이 상장해서 주가가 70만원이 되지 않으면, 이 회장이 추가로 삼성생명 주식을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주가가 70만원을 넘으면, 삼성이 그 이익을 가져간다고 합의했다. 그리고 약속한 기일까지 갚지 않으면, 채권단(우리은행, 서울보증보험 등)은 연간 19%의 ‘지연이자’를 청구하기로 했다.
채권단의 핵심 관계자는 “삼성생명이 우량주라고 해도 주식이 상장돼 현금화를 하지 않으면 채권단 입장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채권단은 어떻게든 현금을 손에 쥐는 것이 목적인데, 삼성생명의 주식 상장이 계속 미뤄졌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삼성그룹은 그동안 부단히 삼성생명 상장을 위해 노력했다. 상장의 문턱까지 간 적도 있다. 이헌재(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은 99년 7월, “생보사 상장으로 인한 자본 이득의 상당부분은 사회로 환원하고 공익(公益)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생보사의 상장 여부는 기업 공개 요건을 갖췄는지를 검토하고 공청회를 거쳐 결정하겠다”고 했다.
당시 재계에서는 삼성그룹과 금융감독당국 간 모종의 합의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시민단체의 반발 등으로 무산됐고, 결국 채권단은 ‘현금화할 수 없는 우량주’ 삼성생명을 손에 쥐고 2001년을 맞이했다. 삼성이 약속한 2000년 12월 31일을 넘겼고, 채권단은 이날부터 ‘지연이자’(연체이자)를 매기기 시작했다.
삼성생명 상장을 미룬 두 가지 이유
노무현 정부 들어, 생보사의 상장 논란은 마침표를 찍었다. 윤증현(尹增鉉) 당시 금감위원장은 2007년, “생보사는 상법상 주식회사로 상장 차익의 배분 없이 상장할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상장의 길이 열린 것이다.
삼성그룹의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상장을 서두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삼성생명의 관계자는 “상장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며 “첫 번째는 삼성의 순환 출자구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채권단과의 소송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 걸림돌은 그룹의 기묘한 경영구조였다. 삼성그룹은 ‘삼성에버랜드→ 삼성생명→ 삼성전자 → 삼성카드→ 삼성에버랜드’로 연결되는 순환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회장 일가는 삼성에버랜드에 대한 경영권을 가지고 삼성그룹 전체에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고리가 하나라도 끊어진다면 삼성그룹이 계열사에 대한 경영권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이건희 회장은 2007년 당시 삼성생명 지분이 4.54%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삼성생명의 최대주주(19.34%)는 삼성에버랜드였다(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이 중 대다수가 이건희 회장의 주식으로 나중에 밝혀진다).
삼성생명이 상장 차익(差益)을 얻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 이득은 당연히 대주주인 삼성에버랜드가 제일 많이 가져가게 된다. 그런데 공정거래법이 문제가 된다. 삼성에버랜드 자산 중 절반 이상이 삼성생명 주식에서 발생하면 법에 따라 삼성에버랜드는 지주(持株)회사가 돼야 한다. 거기까진 문제가 없을 듯한데 금융지주회사법은 ‘금융회사는 제조회사를 소유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결국 삼성생명 상장의 이득을 삼성에버랜드가 많이 가져가 삼성에버랜드 자산의 절반 이상을 삼성생명이 차지하면 삼성에버랜드는 지주회사가 돼야 하고, 그럴 경우 삼성전자를 소유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삼성 지배구조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삼성그룹은 삼성차 부채를 시급하게 처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삼성생명의 상장을 시도할 수 없었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송사
삼성생명 상장의 두 번째 걸림돌은 채권단과 삼성그룹의 소송이었다. 삼성그룹은 삼성차 부채 처리문제로 지난 6년 동안 수조 원대 소송을 하고 있었다.
삼성차 채권단(우리은행, 서울보증보험 등 14개 금융회사)은 2005년 12월, 이건희 회장과 삼성 계열사(28개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었다. 채권단은 “삼성차의 부채 2조4500억원과 그에 따른 연체이자 2조2880억원 등 총 4조7380억원을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채권단이 소송을 위해 법원에 납부한 수수료만 182억원이었던지라, 업계에서는 이 소송을 두고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송사(訟事)’라고 불렀다.
삼성은 “말도 안된다”며 “채권단과 작성한 합의서를 무효로 해달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1부(재판장 김재복)는 2008년 1월 1심 판결을 내렸다.
<삼성 측과 채권단이 맺은 합의서는 유효하다. 삼성은 채권단의 손실액을 보전해 주기 위해 채권단에 넘긴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처분해 줘야 할 의무가 있다. 삼성생명이 처분해야 하는 주식 중에 일부는 이미 채권단이 자산유동화 방식으로 처분했기 때문에 상관없고, 나머지(233만여 주)에 대해서는 삼성이 처분해야 한다. 다만 채권단이 주장하는 연체이자율 19%는 부당하게 높다고 판단되며 6%대가 타당하다. 삼성은 채권단에 손실금 2조4500여억원과 지연이자 6800억원 등 3조1500만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며 이 가운데 이미 지급한 돈을 제외하고 앞으로 약 2조3500억원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
채권단과 삼성 측의 손을 반반씩 들어준 셈이다.
2심 진행 중
채권단과 삼성은 모두 항소했다. 채권단은 “연체이자율을 19%에서 6%대로 낮춘 금액으로 채무를 변제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고, 이건희 회장이 추가로 출연키로 한 삼성생명 주식 50만 주에 대해 ‘즉시 출연요구’를 했으나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아 항소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 측은 “채권단은 삼성생명 주식을 처분해 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다. 합의서가 작성된 1999년과 2000년은 외환위기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계열사들이 어쩔 수 없이 사인했기 때문에 19%의 연체이자를 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고 반박했다.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민사 16부는 한 차례 조정을 시도했다. 재판부는 양측에 “삼성 측이 채권단에 지급해야 하는 연체이자를 1심이 인정한 6800억여 원에서 2000억여 원으로 70% 삭감하는 대신 이 회장이 삼성생명 주식 50만 주를 추가로 내라”는 조정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삼성과 채권단은 모두 거부했다.
이후 양측은 삼성생명 상장 이후에 주식가치를 살펴보고 다시 법정에서 논의하자고 합의했다.
1999년 당시 채권단과 삼성의 평가가 한 주당 70만원이었지만, 실제 삼성생명 주식은 한 주당 114만원 정도로 시장에서 평가받고 있다. 이만큼의 차익(주당 44만원×채권단의 233여만주)은 1999년 합의서대로라면 삼성이 가져가야 하지만 삼성이 지연이자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삼성과 채권단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 차익 배분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양측이 조금씩 양보해 법정에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의 두 번째 상장 걸림돌은 1심 판결로 사실상 해소됐다. 재판부가 연체이자 부분에 있어 삼성 측의 손을 들어줬으니 말이다. 이로써 상장의 마지막 남은 문제는 삼성의 순환 출자 구조 해소가 됐다.
여기서 이 문제와 김용철 변호사의 아이로니컬한 작용·반작 용이 벌어졌다. 김 변호사는 “삼성 비상장 회사 주식은 대부분 차명이다. 지모 전 부사장이 삼성생명 주식을 차명으로 가지고 있다고 시인했다. 실소유주는 이건희 회장이다”고 주장했다. 조준웅(趙俊雄) 삼성비자금 특별검사도 최종 수사 결과 발표에서 “이건희 회장 명의의 삼성생명 지분은 약 16%”라고 밝혔다. 김용철 변호사 ‘폭로’ 이전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은 4.54%에 불과해 삼성생명의 제1대 주주가 삼성에버랜드였는데, 김용철 변호사 ‘폭로’ 이후에는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이 20.76%가 돼 삼성생명의 제1대 주주는 이건희 회장이 됐다. 이 얘기는 결국 삼성생명이 상장하더라도 삼성에버랜드의 자산 중 절반 이상이 삼성생명에서 발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성에버랜드는 지주회사로 전환할 필요가 없고, 그에 따라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전자 지분을 계속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생명 상장은 김용철의 작품?
이건 한마디로 말하면 삼성 전 계열사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영향력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을 뜻한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손대지 않고 코를 푼 격이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삼성 입장에서는 삼성생명을 상장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삼성에버랜드의 금융지주회사로의 전환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 덕분에 특검이 꾸려졌고, 또 특검이 이건희 회장의 차명 주식을 전부 밝혀냈습니다.”
순전히 결과만 놓고 보면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코너에 몰기 위해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의 비리를 ‘폭로’했는데, 이건희 회장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고민’을 일거에 털어내 버린 모양새가 됐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런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예측이나 했을까.
기자는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해 다양한 경로로 접촉을 시도했다. 김 변호사는 그러나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김 변호사의 한 지인은 “김 변호사가 본인도 예측하지 못했고, 또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전했다.⊙
“11만9500원이다!”
한국거래소의 게시판에 개장(開場)을 알리는 붉은 불이 들어왔다.
삼성생명은 당초 공모가(11만원)를 크게 상회하는 11만9500원에 시초가(始初價)를 형성했다. 장 초반 12만1000원까지 올랐다가 결국 시초가보다 떨어진 11만4000원에 거래가 마감됐다.
이날 증권가 관계자들의 시선은 온통 삼성생명에 쏠려 있었다. 20여 년 동안 상장(上場) 가능과 불가(不可)를 거듭해 온 회사가 마침내 거래소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주식이 통상 액면가 5000원을 기준으로 한다고 보면, 삼성생명의 주당 가격은 114만원(현재는 액면가 500원)인 셈이다.
흐뭇하게 지켜봤을 이건희 회장
삼성생명은 개장과 동시에 시가총액 4위(22조8000억원대)의 회사가 됐다. 같은 날 종가(終價)를 기준으로, 시가총액 1위는 삼성전자(116조2000억원대), 2위 포스코(39조7500억원대), 3위 현대차(29조500억원대) 순(順)이었다.
이날 거래된 삼성생명의 주식은 총 949만 주. 유가증권 시장 전체 거래액(7조1000억원대)의 7분의 1 정도다. 1995년 공식 집계를 시작한 이후, 신규 상장 종목 중 역대 최고 기록이다. 삼성생명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삼성생명의 상장을 누구보다 흐뭇한 심정으로 지켜봤을 사람은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이다. 삼성생명 상장으로 이 회장은 주식부자 1위였던 정몽구(鄭夢九) 현대차 회장을 제치고, 우리나라 최고 주식부자가 됐다. 이 회장 보유 주식의 지분 가치는 이날, 총 8조7000억원대였다. 삼성생명이 4조5000억원대다. 또 이 회장은 지난 십수 년 동안 마음의 빚으로 남았던 삼성자동차의 부채 문제를 삼성생명의 상장으로 말끔하게 잊을 수 있게 됐다.
이 회장이 ‘앓던 이’를 뽑게 된 것은 지난 몇 년간 이 회장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김용철 전 삼성그룹 변호사의 ‘덕’이 컸다. 정말 아이로니컬한 얘기다.
김용철 변호사는 2007년 10월, 삼성그룹이 차명계좌를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해 왔다며 폭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 변호사 탓에 삼성그룹의 도덕성은 도마에 올랐고, 이건희 회장은 특검팀에 불려 다녔다. 김 변호사 주장은 일부 맞는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었다. 본인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사실인 양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오랜 법정공방 끝에 이 회장은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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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3월에 열린 삼성자동차 대구공장 기공식. |
삼성생명에 대한 이 회장의 애착
김 변호사의 ‘폭로’ 이후 31개월이 지난 지금 무엇이 어떻게 변했을까. 삼성을 그만둔 뒤 ‘폭로’를 했던 김 변호사는 ‘폭로’ 뒤 〈삼성을 생각한다〉는 책을 썼고 변호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럼 이건희 회장은 어땠을까. 법원 판결과 함께 회장직에서 물러났다가 작년 12월 31일 사면을 받았고, 지난 3월 회장에 복귀했다. 엄청난 마음고생을 거쳤지만 31개월 만에 원위치로 돌아온 셈이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생명을 유독 챙겼다.
2008년 7월 1일,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있었던 대화다.
판사: “계열사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입니까?”
이건희: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이 제일 중요합니다. 삼성생명은 그룹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회사이고, 삼성전자는 열한 개의 제품이 세계 1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회사를 또 만들려면, 10년, 20년을 노력해도 힘들 겁니다.”
이 회장은 울먹거렸다. 그가 64개의 삼성 계열사(2010년 3월 기준) 중에서, 삼성생명에 애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길성(朴佶成)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삼성생명은 건축물로 비교하자면, 삼성그룹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하는 지지대 같은 회사입니다. 삼성은 외부에서 충격을 받아도 내부적으로 소화를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사업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캐시카우(cash cow·수입창출원) 역할을 하는 금융회사인데, 삼성의 금융 계열사 중 핵심이 삼성생명입니다. 삼성이 금융과 전체의 계열사를 아우르는 완결성을 갖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삼성생명입니다.”
자산 130조, 매출 19조6000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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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11월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을 방문중인 이건희 회장과 부인 홍라희 여사. |
삼성생명의 최대주주는 이건희 회장 개인으로, 전체 지분의 20.76%(4,151,918주)를 갖고 있다. 삼성에버랜드 19.34%(3,868,800주), 신세계 13.57% (2,714,400주), 삼성문화재단과 삼성생명공익재단이 각각 4.68%(936,000주), 삼성광주전자 0.66%(131,588주), 삼성전기 0.6%(120,638주), 삼성정밀화학 0.47% (94,409주), 삼성SDS 0.35%(70,891주), 제일기획 0.21%(42,556주)를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 본인과 삼성 계열사의 지분을 합하면 전체의 51.75%이고, 우호 지분인 신세계의 지분까지 합하면 무려 65.32%를 점유하고 있다. 삼성전자, 삼성SDS, 삼성SDI 등 다른 계열사와 비교하자면, 외국인들에 의해 휘둘릴 이유가 없는, 사실상 이건희 회장의 개인 회사로 봐도 무방하다.
삼성생명은 거래소에 상장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상장의 요건을 갖추지 못해서가 아니다. 국내 모든 생명보험회사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국내 생보사들의 상장사(上場史)는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보생명은 1989년 4월, 기업공개를 전제로 자산 재평가를 시행했다. 삼성생명은 1990년 2월 자산 재평가를 받고, 상장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재무부가 주식시장의 침체 등을 이유로 이들의 상장을 보류시켰고, 이후 10년 동안 생보사 상장은 거론되지 않았다.
생보사 상장 문제가 다시 거론된 것은 이건희 회장 때문이었다. 이는 이 회장이 사활을 걸고 추진했던 삼성자동차와 궤를 같이한다.
삼성그룹은 94년 승용차 사업에 진출했다. 삼성자동차주식회사(1995년 3월)를 설립했고, 부산에 생산시설을 완공(1996년 11월)했다.
삼성그룹은 “기존 업체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출 비율을 늘리고, 기존업계에서 인력을 스카우트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각서를 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이 기아차와 이면 주식계약을 체결한 문건이 공개돼 파문에 휩싸이는 등 논란을 빚었다. 결국 삼성은 1999년 6월, 대우그룹과 전자-자동차 빅딜을 선언하며,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자동차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한 것이다. 삼성이 ‘SM5’라는 준중형 자동차를 생산한 지 1년4개월, 법인을 설립한 지 4년3개월 만이었다. 삼성차는 이건희 회장으로서는 떠올리기 싫은 치욕의 역사다.
이 회장 소유의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 삼성차 채권단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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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서울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에서 삼성차의 법정관리 신청을 발표하는 삼성자동차 이대원 부회장. |
채권단은 삼성차의 법정관리를 받아들이고, 이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을 담보로 잡았다. 삼성생명은 상장되지 않은 주식이어서, 주가를 얼마로 추산하느냐가 이슈였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 외국계 신용평가 회사가 주당 71만원으로, 국내의 신용평가회사는 69만원으로 산정해서 평균값인 70만원으로 산정했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은 채권단에 조건을 달았다. 만약 삼성생명이 상장해서 주가가 70만원이 되지 않으면, 이 회장이 추가로 삼성생명 주식을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주가가 70만원을 넘으면, 삼성이 그 이익을 가져간다고 합의했다. 그리고 약속한 기일까지 갚지 않으면, 채권단(우리은행, 서울보증보험 등)은 연간 19%의 ‘지연이자’를 청구하기로 했다.
채권단의 핵심 관계자는 “삼성생명이 우량주라고 해도 주식이 상장돼 현금화를 하지 않으면 채권단 입장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채권단은 어떻게든 현금을 손에 쥐는 것이 목적인데, 삼성생명의 주식 상장이 계속 미뤄졌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삼성그룹은 그동안 부단히 삼성생명 상장을 위해 노력했다. 상장의 문턱까지 간 적도 있다. 이헌재(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은 99년 7월, “생보사 상장으로 인한 자본 이득의 상당부분은 사회로 환원하고 공익(公益)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생보사의 상장 여부는 기업 공개 요건을 갖췄는지를 검토하고 공청회를 거쳐 결정하겠다”고 했다.
당시 재계에서는 삼성그룹과 금융감독당국 간 모종의 합의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시민단체의 반발 등으로 무산됐고, 결국 채권단은 ‘현금화할 수 없는 우량주’ 삼성생명을 손에 쥐고 2001년을 맞이했다. 삼성이 약속한 2000년 12월 31일을 넘겼고, 채권단은 이날부터 ‘지연이자’(연체이자)를 매기기 시작했다.
삼성생명 상장을 미룬 두 가지 이유
노무현 정부 들어, 생보사의 상장 논란은 마침표를 찍었다. 윤증현(尹增鉉) 당시 금감위원장은 2007년, “생보사는 상법상 주식회사로 상장 차익의 배분 없이 상장할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상장의 길이 열린 것이다.
삼성그룹의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상장을 서두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삼성생명의 관계자는 “상장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며 “첫 번째는 삼성의 순환 출자구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채권단과의 소송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 걸림돌은 그룹의 기묘한 경영구조였다. 삼성그룹은 ‘삼성에버랜드→ 삼성생명→ 삼성전자 → 삼성카드→ 삼성에버랜드’로 연결되는 순환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회장 일가는 삼성에버랜드에 대한 경영권을 가지고 삼성그룹 전체에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고리가 하나라도 끊어진다면 삼성그룹이 계열사에 대한 경영권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이건희 회장은 2007년 당시 삼성생명 지분이 4.54%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삼성생명의 최대주주(19.34%)는 삼성에버랜드였다(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이 중 대다수가 이건희 회장의 주식으로 나중에 밝혀진다).
삼성생명이 상장 차익(差益)을 얻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 이득은 당연히 대주주인 삼성에버랜드가 제일 많이 가져가게 된다. 그런데 공정거래법이 문제가 된다. 삼성에버랜드 자산 중 절반 이상이 삼성생명 주식에서 발생하면 법에 따라 삼성에버랜드는 지주(持株)회사가 돼야 한다. 거기까진 문제가 없을 듯한데 금융지주회사법은 ‘금융회사는 제조회사를 소유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결국 삼성생명 상장의 이득을 삼성에버랜드가 많이 가져가 삼성에버랜드 자산의 절반 이상을 삼성생명이 차지하면 삼성에버랜드는 지주회사가 돼야 하고, 그럴 경우 삼성전자를 소유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삼성 지배구조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삼성그룹은 삼성차 부채를 시급하게 처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삼성생명의 상장을 시도할 수 없었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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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 조준웅 삼성 특별검사가 최종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삼성차 채권단(우리은행, 서울보증보험 등 14개 금융회사)은 2005년 12월, 이건희 회장과 삼성 계열사(28개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었다. 채권단은 “삼성차의 부채 2조4500억원과 그에 따른 연체이자 2조2880억원 등 총 4조7380억원을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채권단이 소송을 위해 법원에 납부한 수수료만 182억원이었던지라, 업계에서는 이 소송을 두고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송사(訟事)’라고 불렀다.
삼성은 “말도 안된다”며 “채권단과 작성한 합의서를 무효로 해달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1부(재판장 김재복)는 2008년 1월 1심 판결을 내렸다.
<삼성 측과 채권단이 맺은 합의서는 유효하다. 삼성은 채권단의 손실액을 보전해 주기 위해 채권단에 넘긴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처분해 줘야 할 의무가 있다. 삼성생명이 처분해야 하는 주식 중에 일부는 이미 채권단이 자산유동화 방식으로 처분했기 때문에 상관없고, 나머지(233만여 주)에 대해서는 삼성이 처분해야 한다. 다만 채권단이 주장하는 연체이자율 19%는 부당하게 높다고 판단되며 6%대가 타당하다. 삼성은 채권단에 손실금 2조4500여억원과 지연이자 6800억원 등 3조1500만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며 이 가운데 이미 지급한 돈을 제외하고 앞으로 약 2조3500억원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
채권단과 삼성 측의 손을 반반씩 들어준 셈이다.
2심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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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5월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삼성생명 상장 기념식에서 김봉수 한국거래소 이사장으로부터 상장기념패를 받는 이수창(오른쪽)삼성생명 대표이사. |
이에 대해 삼성그룹 측은 “채권단은 삼성생명 주식을 처분해 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다. 합의서가 작성된 1999년과 2000년은 외환위기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계열사들이 어쩔 수 없이 사인했기 때문에 19%의 연체이자를 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고 반박했다.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민사 16부는 한 차례 조정을 시도했다. 재판부는 양측에 “삼성 측이 채권단에 지급해야 하는 연체이자를 1심이 인정한 6800억여 원에서 2000억여 원으로 70% 삭감하는 대신 이 회장이 삼성생명 주식 50만 주를 추가로 내라”는 조정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삼성과 채권단은 모두 거부했다.
이후 양측은 삼성생명 상장 이후에 주식가치를 살펴보고 다시 법정에서 논의하자고 합의했다.
1999년 당시 채권단과 삼성의 평가가 한 주당 70만원이었지만, 실제 삼성생명 주식은 한 주당 114만원 정도로 시장에서 평가받고 있다. 이만큼의 차익(주당 44만원×채권단의 233여만주)은 1999년 합의서대로라면 삼성이 가져가야 하지만 삼성이 지연이자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삼성과 채권단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 차익 배분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양측이 조금씩 양보해 법정에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의 두 번째 상장 걸림돌은 1심 판결로 사실상 해소됐다. 재판부가 연체이자 부분에 있어 삼성 측의 손을 들어줬으니 말이다. 이로써 상장의 마지막 남은 문제는 삼성의 순환 출자 구조 해소가 됐다.
여기서 이 문제와 김용철 변호사의 아이로니컬한 작용·반작 용이 벌어졌다. 김 변호사는 “삼성 비상장 회사 주식은 대부분 차명이다. 지모 전 부사장이 삼성생명 주식을 차명으로 가지고 있다고 시인했다. 실소유주는 이건희 회장이다”고 주장했다. 조준웅(趙俊雄) 삼성비자금 특별검사도 최종 수사 결과 발표에서 “이건희 회장 명의의 삼성생명 지분은 약 16%”라고 밝혔다. 김용철 변호사 ‘폭로’ 이전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은 4.54%에 불과해 삼성생명의 제1대 주주가 삼성에버랜드였는데, 김용철 변호사 ‘폭로’ 이후에는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이 20.76%가 돼 삼성생명의 제1대 주주는 이건희 회장이 됐다. 이 얘기는 결국 삼성생명이 상장하더라도 삼성에버랜드의 자산 중 절반 이상이 삼성생명에서 발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성에버랜드는 지주회사로 전환할 필요가 없고, 그에 따라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전자 지분을 계속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생명 상장은 김용철의 작품?
이건 한마디로 말하면 삼성 전 계열사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영향력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을 뜻한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손대지 않고 코를 푼 격이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삼성 입장에서는 삼성생명을 상장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삼성에버랜드의 금융지주회사로의 전환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 덕분에 특검이 꾸려졌고, 또 특검이 이건희 회장의 차명 주식을 전부 밝혀냈습니다.”
순전히 결과만 놓고 보면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코너에 몰기 위해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의 비리를 ‘폭로’했는데, 이건희 회장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고민’을 일거에 털어내 버린 모양새가 됐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런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예측이나 했을까.
기자는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해 다양한 경로로 접촉을 시도했다. 김 변호사는 그러나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김 변호사의 한 지인은 “김 변호사가 본인도 예측하지 못했고, 또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전했다.⊙
| ▣ 생명보험사 상장은 ‘양날의 칼날’ 그럼 그동안 생명보험회사의 상장은 왜 번번이 막혔을까. 생명보험회사 관계자는 “생보사는 상장을 통해 덩치가 더 커지고 튼실한 회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상장사를 거느린 일부 그룹들이 자신들의 채무를 변제하는 용도로, 상장 차익금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늘 논란이 되어 왔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상장한 법인은 이익이 나면 회사의 주인인 주주(株主)에게 배당금을 주는 등으로 혜택을 줘야 한다. 그런데 생보사는 고객들이 보험금으로 맡긴 돈(남의 돈)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수익을 얻는다. 보험 가입자들이 오랫동안 계약을 유지하면서 꼬박꼬박 보험료를 내면 생보사들은 그 돈을 기반으로 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생보사가 얻는 수익은 주주뿐 아니라, 고객에게도 돌아가야 한다. 회사의 매출 근거가 ‘고객들이 맡긴 돈’이기 때문이다. 상장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상장하게 되면 그에 따른 이익을 보험 가입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회사의 이익이 ‘주주’ 몫이냐, 회사의 매출 근거인 ‘고객’의 몫이냐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하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해당 회사가 자신이 맡긴 돈(만기시 되돌려받는 조건)을 잘 굴려 수익을 얻는 것이니, 몫을 달라고 요구할 근거가 있다. 반면 생보사 입장에서는, 상장으로 인한 이익을 수많은 가입자에게 돌려주면 손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대신 상장으로 인한 회계, 감사, 공시 등의 귀찮은 의무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그동안 삼성생명, 대한생명, LIG생명, 교보생명 등은 상장 요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절차를 미뤄왔다. 미국의 경우는 두 가지 방식이 혼용되고 있다. 보험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 보험사의 경우 상호(mutual)보험사와 공공(public)보험사가 있다”며 “상호보험사는 계약자끼리 만들어 그 이익을 나누는 회사이고, 공공보험사는 주주들이 이익을 나누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
| ▣ 채권단과 삼성그룹 소송의 쟁점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쟁점은 채권단과 삼성의 ‘합의서 유효 여부’다. 채권단은 “삼성은 2000년 12월 말까지 빚을 갚기로 했는데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이 담보로 맡긴 삼성생명 주식의 처분금이 2조4500억원에 미치지 못하면, 이 회장이 가진 삼성생명 주식 중 50만 주를 추가로 내놓기로 합의서를 작성했다. 그래도 부족하면 삼성그룹의 계열사가 부족액을 보전키로 했지만, 삼성 측이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삼성그룹은 “합의서 체결은 당시 정부의 강압과 채권단의 우월적·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작성케 한 것이므로 무효다. 설사 합의서가 유효하더라도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출연하면 끝나는 것이지, 현금을 지급할 의무는 없다”고 반박했다. 두 번째 쟁점은 ‘연체이자’ 부분이다. 채권단은 삼성이 돈을 갚기로 한 기한 다음 날(2001년 1월 1일)부터 2005년 12월까지 연 19%의 지연이자(연체이자)를 매겼다. 이자율(19%)은 당초 삼성과 약정한 것이고, 우리은행의 전신인 한빛은행의 일반 대출 연체이자율로 책정했다고 한다. 채권단이 소송을 제기할 당시인 2005년 12월, 삼성이 물어야 할 지연이자는 총 2조2880억원이었다. 업계에서는 이 이자율을 계속 적용하면, 2010년까지 7조원, 소송이 대법원으로 넘어갈 경우 10조원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채권단은 “합의서대로 연체이자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삼성 측은 “채권단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정도의 연체이자를 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소송은 2심이 진행 중인데, 막판에 극적인 조정이 이뤄질지 관심이 모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