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에서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는 한 주재원, 700만 엔 모아 최근 원/엔 환율이 16배로
뛰었을 때 1억1000만원을 한국으로 송금해 6000만원 차액 챙겨
⊙ 규슈·히로시마의 한국인 대상 호텔들, 호텔방 ‘땡처리’ 중
뛰었을 때 1억1000만원을 한국으로 송금해 6000만원 차액 챙겨
⊙ 규슈·히로시마의 한국인 대상 호텔들, 호텔방 ‘땡처리’ 중
- 엔고 특수를 누리면서 부산지역 호텔 등 관광업계의 매출이 큰 폭으로 오른 가운데 JR규슈여행사 임직원 300여 명이 2008년 12월 20일 부산 롯데호텔 아트홀에서 ‘해외 송년회’를 갖고 있다.
한국식당이 밀집한 도쿄 신주쿠(新宿) 쇼쿠안(職安) 거리. 이곳에서 최근 문을 연 한국 식료품 수입판매점이 ‘신라면’ 하나에 ‘57엔’ 가격표를 붙였다. 최근 환율을 적용해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860원 정도다. 한국 양판점 가격보다는 비싸지만, 일본의 물가 감각에선 파격적인 떨이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상점가는 구조적 디플레이션(물가하락) 현상으로 10여 년 전부터 ‘가격파괴’란 말에 익숙하다. 하지만 아무리 ‘파괴했다’고 주장해도 한계는 ‘100엔’이었다. 용량은 한국보다 다소 많지만 일본에선 껌 한 통도 100엔이 있어야 살 수 있다. 50엔짜리를 들고 상품을 찾으면, 상점 선반 아래에 틀어박힌 어린이용 눈깔사탕 정도만 발견할 수 있다.
신주쿠의 대표적 한국식품 양판점인 ‘한국광장’은 요즘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 손님은 물론, 한국식품에 인이 박인 일본 손님들로 연일 북적인다. 원화가치 하락으로 한국 수입품 가격을 파격적으로 내렸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싸게 사서 신나고, 가게는 많이 팔아서 신난다.
自嘲(자조)적인 뜻이지만, 요즘 한국 주부들은 서로 “곱하는 버릇을 버리라”고 말한다. 곱하지 않고 100엔을 100엔으로 받아들이면 물건 값이 내렸으니 쇼핑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하지만 곱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물건에 손을 대기 힘들 정도로 겁이 난다. 작년 초까지 ‘8’을 곱하다 요즘 ‘16’을 곱하니 모든 물건값이 두 배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근 한국 식당가. 한국 숫불갈비집에 해당하는 야키니쿠(?肉)점이 대부분이지만, 요즘엔 불판에 불을 올리는 일이 드물다. 매상을 올려주던 한국 손님들이 발길을 끊었기 때문이다. 가게를 찾아도 고기 대신, 파전이나 잡채로 안주를 삼다가 냉면 한 그릇 먹고 물러나는 것이 요즘 풍경이다.
일본의 한국 야키니쿠점은 주인이 한국인이라고 해도 고기는 일본산을 사용한다. 아무리 환율이 올랐다고 해도 일본 고급육인 와규(和牛)에 필적하는 가격과 운송비를 감안하면 한우를 들여다 파는 것은 이윤이 남지 않는다. 손님들 주머니는 비어 가는데 환율이 올랐다고 고기값을 내리지 못하니 매출은 내리막길이다.
대형 식당일수록 고통이 더 심하다. 도쿄를 찾는 단체 관광객이 줄었기 때문이다. 신주쿠 대형 식당들은 직장인이 찾지 않는 휴일 매출을 주로 한국의 단체 관광객들에게 의존해 왔다. 작년 중반까지 한국 식당가인 신주쿠 쇼쿠안 거리나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는 휴일 밤이면 단체 관광객을 실은 대형 버스로 교통 체증이 심했었다. 지금은 한적하다.
도쿄 아카사카(赤坂)의 아카사카미쓰케(赤坂見附)역 뒤편.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클럽(업태는 다르지만 한국 룸살롱에 해당)이 산재한 지역이다. 최근 이곳 한국클럽에 갔다온 知人(지인)은 “한국의 예쁜 여자들이 모두 아카사카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재작년 말까지 “호스티스들이 짐 싸서 모두 한국 룸살롱으로 돌아갔다”는 얘기가 돌았다. 한 달에 30만~40만 엔 수입은 당시 환율로 250만~300만원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가게를 운영해야 하는 한국 마담들은 수시로 한국을 찾아가 아가씨들을 ‘모셔오는’ 것이 큰 일 중 하나였다. 이 고민을 치솟은 환율이 싹 없애준 것이다.
한국클럽은 보통 손님의 80%가 일본인. 매출 20%를 해결해 주던 한국인 손님은 크게 줄었지만 속된 말로 ‘가게 물’이 좋아지면서 일본 손님들이 기존의 한국 손님의 매출을 상당 부분 커버해 주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돈을 못 끌어다 쓰는 한국 유학생들이 아카사카 (술집) 문턱을 넘고 있다”는 한 한국클럽 마담의 말은, 나라의 경제력이 국민들의 삶을 어떻게 굴절시키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환율이 100엔당 700원대로 떨어진 2년 전쯤엔 “조만간 한국 강남 룸살롱에서 기모노 입은 일본 여자를 보게 될 것”이란 얘기가 있었지만, 결국 술자리 농담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 열도를 횡단해 보니
지난 2월 말 후쿠오카(福岡)에 갔을 때 일이다. 44㎡(13평) 크기의 하얏트 레지던스 더블룸을 하루 1만2000엔에 이용했다. 요즘 환율로 따지면 체감하기 힘들지만, 이 가격은 일본 비즈니스호텔의 숙박료 수준이다.
예를 들어 약간 등급이 높은 비즈니스호텔 ‘루트인’의 경우 16㎡(5평) 넓이의 방값이 1만1000엔 정도. 고급 호텔의 대명사인 하얏트가 비록 하얏트 중에서도 등급이 낮은 ‘레지던스’급이라고 해도 1만2000엔에 하룻밤을 빌려준 것은 손님이 없어 자존심 다 내버리고 방을 떨이로 팔아치웠다는 얘기다. 같은 날, 하얏트의 상위 등급인 후쿠오카 하얏트그랜드호텔도 1만6000엔에 방을 팔았다.
후쿠오카 인근 오이타(大分)현 벳푸(別府). 일본에서 손꼽히는 온천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다. 3월 초 벳푸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 코스인 ‘地獄(지옥) 순례’를 돌았다. ‘이래서야 관광산업이 유지될 수 있나?’ 하고 의문이 들 정도로 한산했다.
순례 코스 중 한 곳인 ‘피의 연못’ 안내원에게 묻자 “한국인이 안 오는 것은 외국인 관광객이 안 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벳푸는 일본 관광지 가운데에도 유난히 한국 의존도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재작년 오이타현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의 70%가 한국인이었다고 하니 그 위력을 실감할 만하다.
2007년 벳푸의 대형 숙박업소 27곳에 묵은 한국인의 수는 20만7000명. 이 숫자가 작년 17만800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것도 환율이 급상승한 6월부터 격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해를 넘겼어도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타격을 입은 곳은 한국인 의존도가 높았던 규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히로시마(廣島)시를 찾았다. 히로시마시 자체는 외국인을 부르는 유명 관광지라고 볼 수 없지만 일본의 3대 관광명소로 꼽히는 ‘이쓰쿠지마(嚴島) 신사’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어 관광객 숙박 수요가 많았던 곳이다. 이곳의 고급 대형 호텔인 그랜드프린스호텔. 세이부(西武) 그룹이 운영하는 일본 최대 호텔체인이다.
이 호텔 56㎡(17평) 크기의 더블룸을 하룻밤에 7200엔 지불하고 이용했다. 일본 비즈니스호텔 중에서도 방이 좁기로 유명한 ‘도요코(東橫)인’의 12㎡(3.6평) 더블룸 숙박료가 8000엔 수준임을 감안하면 역시 자존심을 내다버린 ‘땡처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땡처리 방들이 전국적으로 일본 호텔 예약 사이트에 넘쳐나고 있다.
일본 관광산업의 일각을 지탱해 주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격감하면서 호텔산업의 수급 사정이 ‘공급 부족’에서 ‘공급 과잉’으로 뒤바뀐 결과다. 프린스호텔의 예약 담당 직원은 “한국 관광객의 빈 자리를 메워줄 단체 손님을 찾기 힘들다”며 “환율이 다시 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은 일본 혼슈(本州)의 북단 동북지방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많은 겨울이 되면 온천과 스키장으로 먹고 사는 지역이다. 지난 1월 말 한국의 설날 연휴를 이용해 아오모리(靑森)현의 유명 온천인 고마키(小牧)온천을 찾았다.
예년 설날 연휴엔 밀려드는 한국인 손님으로 ‘한국인지, 일본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라는 이야기를 듣던 곳이다. 하지만 만 24시간을 이곳에서 지내면서 한국 단체 관광객을 한 팀 만났다. 반면 ‘여기가 일본인지, 중국인지’란 생각이 들 정도로 중국인(대만인 포함)이 많았다.
하지만 온천에 병설된 호텔의 아침과 저녁 뷔페 식당의 메뉴판에는 일본어 밑에 한글만 적혀 있었다. 레스토랑 관리 직원은 “최근 중국과 대만 여행사를 통한 홍보로 중국 손님들이 크게 늘었다”며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중국어를 병용하든지, 한글을 중국어로 대신해야 할 듯하다”고 말했다.
이틀 후 찾아간 야마가타(山形)현 자오(藏王)스키장은 이미 전망대 레스토랑의 외국어 메뉴를 중국어로 교체한 상태였다. 이 스키장은 작년 겨울까지 한국 스키어들 덕분에 먹고 살던 곳이다.
계획을 잘못 세웠다가 위기를 맞은 곳도 있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미야기(宮城)현 나루코(鳴子)온천의 오니코베스 스키장은 올 겨울 한국인 스키어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한국인 직원을 고용하고 레스토랑 메뉴와 토산품 매장의 간판에 한글을 병용했다. 작년 중순 한국을 상대로 관광객 유치 노력을 기울여 1500여 명의 예약을 받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6월부터 환율이 치솟으면서 예약취소가 잇따랐다. 실제로 스키장을 방문한 한국인 스키어는 100명 미만. ‘1년 장사’를 망쳐버린 것이다.
기업 주재원들은 희비 엇갈려
한국 기업의 일본 지사는 대부분 수출과 수입을 병행한다. 일본 삼성의 경우, 한국에서 일본으로 들여오는 한국 제품(수입)과 일본에서 한국으로 내가는 일본 제품(수출)의 비중이 금액을 기준으로 비슷했다.
따라서 환율이 급등하면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올라가지만 반대로 일본 제품은 가격이 치솟아 한국 본사에 큰 부담을 준다. 한국 기업이 수입하는 일본 제품은 주로 전자·기계 부품과 원자재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환율이 급등한다고 수출선을 쉽게 바꾸기 힘들다.
환율 변화는 언제나 유리한 점과 불리한 환경을 함께 가져다 주는 것이다. 한 한국 대기업의 일본 지사 직원에게 “어느 쪽이 더 강하냐?”고 묻자, “한국에 가져가는 일본 제품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어려움이 더 크다”고 말했다.
기업 주재원들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주재원들 가운데에는 교육 문제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느슨한 교육으로 유명한 일본 학교에 아이를 맡겼다가 살벌한 서울로 돌아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중학교 고학년이면 부임 당시부터 애당초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는다. 김포~하네다공항 노선이 정착돼 있어 주말마다 아내가 도쿄에 올 수 있는 환경도 한몫했다.
한국 기업 주재원은 본사로부터 두 갈래로 돈을 받는다. 월급은 한국 은행의 월급통장으로 이체되고, 해외지사 근무에 따른 체재비는 일본 은행의 통장으로 송금된다. 즉 월급은 한화로, 체재비는 엔화로 받는다. 따라서 가족을 동반하면 엔화로 들어오는 체재비를 거의 다 쓰고, 가족을 서울에 남기면 월급을 다 쓰는 식으로 지출 형태가 정착된다. 반대로 말하면 가족을 서울에 남기면 엔화 저축이 늘어나고, 가족을 동반하면 원화 저축이 늘어난다.
도쿄에서 상당 기간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한 한 주재원은 그렇게 700만 엔을 모아, 최근 환율이 16배로 뛰었을 때 1억1000만원을 한국으로 송금했다. 만약 2년 전에 송금했다면 5200만원에 불과했을 것이다. 비교하기 나름이지만 환율이 급등해 6000만원 정도를 번 셈이다. 반면, 초등학생 두 자녀를 도쿄의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킨 주재원은 작년 초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난 학비를 감당하느라 서울의 적금까지 허물고 있다. “가족들을 먼저 한국에 보낼까 고민하지만, 살던 집을 전세를 주고 왔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체감환율
일본의 한국 주재원들에게 종종 ‘체감 환율’을 묻는다. ‘환율이 어느 정도일 때, 한국과 일본의 물가 수준이 비슷하게 느껴지냐’는 질문이다. “같은 상품이라도 서비스의 질이나 상품의 마무리 수준을 감안하면 9~10배 정도가 적당하다”는 대답이 주류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생맥주 한 잔이 500엔 정도 하는데 서울의 4000~5000원짜리 고급 생맥주와 질이 비슷하다는 얘기다. 환율이 10배 아래로 떨어지면 일본의 상품과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싸게 느껴지고, 환율이 그 위로 올라가면 반대로 비싸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원/엔 환율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은 1997년 12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장기간 9~10배 수준을 유지해 왔다. 이 환율이 2005년 11월부터 하강하기 시작해 2007년 6월에는 7.5배까지 내려갔다. 당시 한·일 상품들의 물가 비교를 한 일이 있는데, 식료품의 60~70%가 일본이 저렴했다. 한국 관광객이 벳푸온천을 먹여 살리고, 한국 스키어들이 자오스키장을 먹여 살린 것도 그때였다.
물론 소득 1만~2만 달러 나라의 국민들이 3만~4만 달러 선진국의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 기현상이 외환시장의 왜곡 탓에 몇 년 동안 일어났고, 한국인은 외환거품을 몇 년 동안 즐겼다. 지금은 그 왜곡이 바로잡히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반대의 왜곡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환율은 정답이 없고 법칙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株價(주가)가 ‘기업의 가치’에 수렴되듯이 환율도 통화의 ‘구매력’에 수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500엔에 먹을 수 있는 생맥주를 한국에서 5000원에 먹을 수 있다면, 통화의 구매력에 어울리는 환율은 10배 수준이다. 올해 말이든, 내년이든 세계 경제가 격한 출렁임을 멈출 때 환율은 결국 이 선에서 안정될 것이다.⊙
일본 상점가는 구조적 디플레이션(물가하락) 현상으로 10여 년 전부터 ‘가격파괴’란 말에 익숙하다. 하지만 아무리 ‘파괴했다’고 주장해도 한계는 ‘100엔’이었다. 용량은 한국보다 다소 많지만 일본에선 껌 한 통도 100엔이 있어야 살 수 있다. 50엔짜리를 들고 상품을 찾으면, 상점 선반 아래에 틀어박힌 어린이용 눈깔사탕 정도만 발견할 수 있다.
신주쿠의 대표적 한국식품 양판점인 ‘한국광장’은 요즘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 손님은 물론, 한국식품에 인이 박인 일본 손님들로 연일 북적인다. 원화가치 하락으로 한국 수입품 가격을 파격적으로 내렸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싸게 사서 신나고, 가게는 많이 팔아서 신난다.
自嘲(자조)적인 뜻이지만, 요즘 한국 주부들은 서로 “곱하는 버릇을 버리라”고 말한다. 곱하지 않고 100엔을 100엔으로 받아들이면 물건 값이 내렸으니 쇼핑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하지만 곱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물건에 손을 대기 힘들 정도로 겁이 난다. 작년 초까지 ‘8’을 곱하다 요즘 ‘16’을 곱하니 모든 물건값이 두 배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근 한국 식당가. 한국 숫불갈비집에 해당하는 야키니쿠(?肉)점이 대부분이지만, 요즘엔 불판에 불을 올리는 일이 드물다. 매상을 올려주던 한국 손님들이 발길을 끊었기 때문이다. 가게를 찾아도 고기 대신, 파전이나 잡채로 안주를 삼다가 냉면 한 그릇 먹고 물러나는 것이 요즘 풍경이다.
일본의 한국 야키니쿠점은 주인이 한국인이라고 해도 고기는 일본산을 사용한다. 아무리 환율이 올랐다고 해도 일본 고급육인 와규(和牛)에 필적하는 가격과 운송비를 감안하면 한우를 들여다 파는 것은 이윤이 남지 않는다. 손님들 주머니는 비어 가는데 환율이 올랐다고 고기값을 내리지 못하니 매출은 내리막길이다.
대형 식당일수록 고통이 더 심하다. 도쿄를 찾는 단체 관광객이 줄었기 때문이다. 신주쿠 대형 식당들은 직장인이 찾지 않는 휴일 매출을 주로 한국의 단체 관광객들에게 의존해 왔다. 작년 중반까지 한국 식당가인 신주쿠 쇼쿠안 거리나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는 휴일 밤이면 단체 관광객을 실은 대형 버스로 교통 체증이 심했었다. 지금은 한적하다.
도쿄 아카사카(赤坂)의 아카사카미쓰케(赤坂見附)역 뒤편.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클럽(업태는 다르지만 한국 룸살롱에 해당)이 산재한 지역이다. 최근 이곳 한국클럽에 갔다온 知人(지인)은 “한국의 예쁜 여자들이 모두 아카사카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재작년 말까지 “호스티스들이 짐 싸서 모두 한국 룸살롱으로 돌아갔다”는 얘기가 돌았다. 한 달에 30만~40만 엔 수입은 당시 환율로 250만~300만원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가게를 운영해야 하는 한국 마담들은 수시로 한국을 찾아가 아가씨들을 ‘모셔오는’ 것이 큰 일 중 하나였다. 이 고민을 치솟은 환율이 싹 없애준 것이다.
한국클럽은 보통 손님의 80%가 일본인. 매출 20%를 해결해 주던 한국인 손님은 크게 줄었지만 속된 말로 ‘가게 물’이 좋아지면서 일본 손님들이 기존의 한국 손님의 매출을 상당 부분 커버해 주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돈을 못 끌어다 쓰는 한국 유학생들이 아카사카 (술집) 문턱을 넘고 있다”는 한 한국클럽 마담의 말은, 나라의 경제력이 국민들의 삶을 어떻게 굴절시키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환율이 100엔당 700원대로 떨어진 2년 전쯤엔 “조만간 한국 강남 룸살롱에서 기모노 입은 일본 여자를 보게 될 것”이란 얘기가 있었지만, 결국 술자리 농담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 열도를 횡단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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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벳푸의 대형숙박업소 27곳에 묵은 한국인 관광객 수는 20만7000명. 이 숫자가 작년 17만8000명으로 격감했다. 사진은 일본 벳푸의 계단식 논 형태의 온천탕 ‘타나유’. |
예를 들어 약간 등급이 높은 비즈니스호텔 ‘루트인’의 경우 16㎡(5평) 넓이의 방값이 1만1000엔 정도. 고급 호텔의 대명사인 하얏트가 비록 하얏트 중에서도 등급이 낮은 ‘레지던스’급이라고 해도 1만2000엔에 하룻밤을 빌려준 것은 손님이 없어 자존심 다 내버리고 방을 떨이로 팔아치웠다는 얘기다. 같은 날, 하얏트의 상위 등급인 후쿠오카 하얏트그랜드호텔도 1만6000엔에 방을 팔았다.
후쿠오카 인근 오이타(大分)현 벳푸(別府). 일본에서 손꼽히는 온천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다. 3월 초 벳푸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 코스인 ‘地獄(지옥) 순례’를 돌았다. ‘이래서야 관광산업이 유지될 수 있나?’ 하고 의문이 들 정도로 한산했다.
순례 코스 중 한 곳인 ‘피의 연못’ 안내원에게 묻자 “한국인이 안 오는 것은 외국인 관광객이 안 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벳푸는 일본 관광지 가운데에도 유난히 한국 의존도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재작년 오이타현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의 70%가 한국인이었다고 하니 그 위력을 실감할 만하다.
2007년 벳푸의 대형 숙박업소 27곳에 묵은 한국인의 수는 20만7000명. 이 숫자가 작년 17만800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것도 환율이 급상승한 6월부터 격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해를 넘겼어도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타격을 입은 곳은 한국인 의존도가 높았던 규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히로시마(廣島)시를 찾았다. 히로시마시 자체는 외국인을 부르는 유명 관광지라고 볼 수 없지만 일본의 3대 관광명소로 꼽히는 ‘이쓰쿠지마(嚴島) 신사’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어 관광객 숙박 수요가 많았던 곳이다. 이곳의 고급 대형 호텔인 그랜드프린스호텔. 세이부(西武) 그룹이 운영하는 일본 최대 호텔체인이다.
이 호텔 56㎡(17평) 크기의 더블룸을 하룻밤에 7200엔 지불하고 이용했다. 일본 비즈니스호텔 중에서도 방이 좁기로 유명한 ‘도요코(東橫)인’의 12㎡(3.6평) 더블룸 숙박료가 8000엔 수준임을 감안하면 역시 자존심을 내다버린 ‘땡처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땡처리 방들이 전국적으로 일본 호텔 예약 사이트에 넘쳐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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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가타현의 자오스키장. 작년 겨울까지 한국 스키어들 덕분에 먹고 살던 이곳은 한국 손님의 발길이 끊기자 전망대 레스토랑의 외국어 메뉴를 한국어에서 중국어로 교체했다. |
사정은 일본 혼슈(本州)의 북단 동북지방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많은 겨울이 되면 온천과 스키장으로 먹고 사는 지역이다. 지난 1월 말 한국의 설날 연휴를 이용해 아오모리(靑森)현의 유명 온천인 고마키(小牧)온천을 찾았다.
예년 설날 연휴엔 밀려드는 한국인 손님으로 ‘한국인지, 일본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라는 이야기를 듣던 곳이다. 하지만 만 24시간을 이곳에서 지내면서 한국 단체 관광객을 한 팀 만났다. 반면 ‘여기가 일본인지, 중국인지’란 생각이 들 정도로 중국인(대만인 포함)이 많았다.
하지만 온천에 병설된 호텔의 아침과 저녁 뷔페 식당의 메뉴판에는 일본어 밑에 한글만 적혀 있었다. 레스토랑 관리 직원은 “최근 중국과 대만 여행사를 통한 홍보로 중국 손님들이 크게 늘었다”며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중국어를 병용하든지, 한글을 중국어로 대신해야 할 듯하다”고 말했다.
이틀 후 찾아간 야마가타(山形)현 자오(藏王)스키장은 이미 전망대 레스토랑의 외국어 메뉴를 중국어로 교체한 상태였다. 이 스키장은 작년 겨울까지 한국 스키어들 덕분에 먹고 살던 곳이다.
계획을 잘못 세웠다가 위기를 맞은 곳도 있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미야기(宮城)현 나루코(鳴子)온천의 오니코베스 스키장은 올 겨울 한국인 스키어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한국인 직원을 고용하고 레스토랑 메뉴와 토산품 매장의 간판에 한글을 병용했다. 작년 중순 한국을 상대로 관광객 유치 노력을 기울여 1500여 명의 예약을 받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6월부터 환율이 치솟으면서 예약취소가 잇따랐다. 실제로 스키장을 방문한 한국인 스키어는 100명 미만. ‘1년 장사’를 망쳐버린 것이다.
기업 주재원들은 희비 엇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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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고 현상으로 쇼핑을 위한 일본 관광객이 밀려오는 가운데 2009년 3월 6일 명동 일대에서 일본 여성들이 지도를 들고 물건이 싼 가게와 맛난 음식점을 찾고 있다. |
따라서 환율이 급등하면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올라가지만 반대로 일본 제품은 가격이 치솟아 한국 본사에 큰 부담을 준다. 한국 기업이 수입하는 일본 제품은 주로 전자·기계 부품과 원자재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환율이 급등한다고 수출선을 쉽게 바꾸기 힘들다.
환율 변화는 언제나 유리한 점과 불리한 환경을 함께 가져다 주는 것이다. 한 한국 대기업의 일본 지사 직원에게 “어느 쪽이 더 강하냐?”고 묻자, “한국에 가져가는 일본 제품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어려움이 더 크다”고 말했다.
기업 주재원들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주재원들 가운데에는 교육 문제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느슨한 교육으로 유명한 일본 학교에 아이를 맡겼다가 살벌한 서울로 돌아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중학교 고학년이면 부임 당시부터 애당초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는다. 김포~하네다공항 노선이 정착돼 있어 주말마다 아내가 도쿄에 올 수 있는 환경도 한몫했다.
한국 기업 주재원은 본사로부터 두 갈래로 돈을 받는다. 월급은 한국 은행의 월급통장으로 이체되고, 해외지사 근무에 따른 체재비는 일본 은행의 통장으로 송금된다. 즉 월급은 한화로, 체재비는 엔화로 받는다. 따라서 가족을 동반하면 엔화로 들어오는 체재비를 거의 다 쓰고, 가족을 서울에 남기면 월급을 다 쓰는 식으로 지출 형태가 정착된다. 반대로 말하면 가족을 서울에 남기면 엔화 저축이 늘어나고, 가족을 동반하면 원화 저축이 늘어난다.
도쿄에서 상당 기간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한 한 주재원은 그렇게 700만 엔을 모아, 최근 환율이 16배로 뛰었을 때 1억1000만원을 한국으로 송금했다. 만약 2년 전에 송금했다면 5200만원에 불과했을 것이다. 비교하기 나름이지만 환율이 급등해 6000만원 정도를 번 셈이다. 반면, 초등학생 두 자녀를 도쿄의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킨 주재원은 작년 초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난 학비를 감당하느라 서울의 적금까지 허물고 있다. “가족들을 먼저 한국에 보낼까 고민하지만, 살던 집을 전세를 주고 왔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체감환율
일본의 한국 주재원들에게 종종 ‘체감 환율’을 묻는다. ‘환율이 어느 정도일 때, 한국과 일본의 물가 수준이 비슷하게 느껴지냐’는 질문이다. “같은 상품이라도 서비스의 질이나 상품의 마무리 수준을 감안하면 9~10배 정도가 적당하다”는 대답이 주류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생맥주 한 잔이 500엔 정도 하는데 서울의 4000~5000원짜리 고급 생맥주와 질이 비슷하다는 얘기다. 환율이 10배 아래로 떨어지면 일본의 상품과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싸게 느껴지고, 환율이 그 위로 올라가면 반대로 비싸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원/엔 환율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은 1997년 12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장기간 9~10배 수준을 유지해 왔다. 이 환율이 2005년 11월부터 하강하기 시작해 2007년 6월에는 7.5배까지 내려갔다. 당시 한·일 상품들의 물가 비교를 한 일이 있는데, 식료품의 60~70%가 일본이 저렴했다. 한국 관광객이 벳푸온천을 먹여 살리고, 한국 스키어들이 자오스키장을 먹여 살린 것도 그때였다.
물론 소득 1만~2만 달러 나라의 국민들이 3만~4만 달러 선진국의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 기현상이 외환시장의 왜곡 탓에 몇 년 동안 일어났고, 한국인은 외환거품을 몇 년 동안 즐겼다. 지금은 그 왜곡이 바로잡히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반대의 왜곡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환율은 정답이 없고 법칙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株價(주가)가 ‘기업의 가치’에 수렴되듯이 환율도 통화의 ‘구매력’에 수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500엔에 먹을 수 있는 생맥주를 한국에서 5000원에 먹을 수 있다면, 통화의 구매력에 어울리는 환율은 10배 수준이다. 올해 말이든, 내년이든 세계 경제가 격한 출렁임을 멈출 때 환율은 결국 이 선에서 안정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