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만명 정도로 추정되던 왕징 거주 한국인들 작년 10월 이후 2만~3만명 정도 줄어들어
⊙ 왕징의 집세 비싼 곳에 살던 한인들, 싼 집세 찾아 교외로 탈출
⊙ 한인들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조선족들도 대거 베이징 떠나
⊙ 왕징의 집세 비싼 곳에 살던 한인들, 싼 집세 찾아 교외로 탈출
⊙ 한인들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조선족들도 대거 베이징 떠나
- 베이징의 ‘코리아 타운’ 왕징(望京). 환율폭등으로 7만명에 달하던 왕징 거주 한국인들의 숫자가 급속히 줄고 있다.
‘한국인이 투자한 베이징 시내 한복판의 마트가 많은 사람이 오가는 가운데 돌연 문을 닫았다.’
지난해 말 12월 30일 베이징에서 한창 권위지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조간신문 <신경보(新京報)>에 이런 기사가 났다. 신경보는 뻥튀기 기사나 오보를 잘 싣지 않는 신문이다. 그 마트는 그냥 수퍼마켓이 아니라 스마오 톈제(世貿天階)라고, 중국 정부가 베이징 올림픽 때 과시용으로 조성한 최고급 쇼핑몰 지하에 자리잡은 대규모 마트다. 넓이가 1000㎡가 넘는 규모다. 그 마트가 돌연 문을 닫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투자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는 터라 그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아, 나도 아침에 신문에서 봤어요…. 근데 난 6개월 전에 누구에게 팔아넘겼는데…, 실제로 그 사람들이 한국으로 도망갔다고 그러데…. 중국 위안(元)화 가격이 올라 한국 돈 갖고 와서 중국 물건 사서 진열하려니 가랑이가 찢어졌다고 하데. 츳츳츳 안됐어. 나라 망신은 나라 망신대로 하고….”
신경보가 전한 내용이 맞다는 이야기였다. 이 마트에 물건을 공급해 주고 받을 돈이 있는 중국 측 거래선이 대낮에 마트로 가보니 셔터 문이 내려져 있더라는 것이었다. 마트 주인인 한국인 사장과는 휴대전화 연결도 안 되고, 마트 점원들은 닫힌 문 밖에서 두 달치 월급을 못 받았느니, 세 달치 월급을 못 받았느니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고, 셔터 한쪽 귀퉁이에는 12월 24일 내붙인 것으로 되어 있는 종이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물건을 공급한 분들은 1월 10일에 오시면 결제를 해 드리겠습니다. 연락전화번호는 ○○○ ○○○○ ○○○○― 진 샤오제(金小姐)’
물론 진 샤오제 것이라는 전화는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았다. 화가 난 마트 상품 공급업자들이 베이징 동쪽의 퉁셴(通縣)에 있다는 이 마트의 물류창고로 달려갔으나 창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無影無踪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해서 중국 정부와 베이징市(시) 당국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해외 고급제품 쇼핑몰의 지하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한국 마트의 야반도주는 이때부터 두 달 넘게 베이징에서 발행되는 많은 신문과 잡지, 그리고 TV에 돌아가며 보도됐다. 금융과 외환위기에 처한 한국의 형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베이징 시민들과 중국 전역의 중국인들의 입과 귀를 통해 퍼져 나갔다.
2월 18일 베이징에서 가판이 제일 많이 팔리는 신문 <북경청년보(北京靑年報)>는 마침내 이런 제목의 기사를 한 면을 통털어 실었다.
‘한국 투자 대형 마트 중국 H그룹이 투자한 정품 마트로 재탄생’
‘미국발 금융위기 폭발 이후 환율문제로 중국에서 도망간 베이징시 최초의 대형 사건’이던 한국 마트 사장의 도주사건은 그렇게 정리돼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금융위기 폭발 이후 베이징시에서 도망간 외국 기업에 대한 첫번째 소송제기 사건으로 발전했다’고 북경청년보는 전했다. 이와 함께 이 마트의 한국인 경영주이던 K씨, H씨, 또다른 K씨 등의 한국인 이름들을 지면에 나열했다. 커다란 제목으로 ‘한국인 점주는 그림자도 발자취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無影無踪(무영무종)’이라는 제목도 달았다.
지난해 10월 이후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본격적으로 불어닥친 금융과 외환위기라는 거센 寒風(한풍)에 중국 내 한국인들의 체면을 형편 없이 깎아내린 것은 베이징 북동쪽의 코리아 타운 왕징(望京)에 사는 한국인들의 수가 갑자기 줄어든 것이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7만명 정도로 추정하던 왕징 거주 한국인들의 숫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작년 10월 이후 2만~3만명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在中(재중) 한국인회, 駐中(주중) 한국대사관, 중국사회과학원과 공안당국이 정확한 집계를 내보려 하지만 워낙 인구이동이 심해 대체로 3분의 1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물론 이들 2만~3만명이 다 귀국한 것은 아니고, 일부는 보다 생활비가 싼 베이징 현대자동차 공장 부근의 순이(順義)시로 이동해 간 것으로 재중 한국인회는 파악하고 있다.
베이징 시내 한복판 대형 마트의 한국인 사장을 도망가게 하고, 왕징 거주 한국인들의 숫자를 줄어들게 한 主犯(주범)은 환율이다. 지난해 8월만 해도 1위안에 120~130원 선이던 중국 위안화에 대한 한국 원화의 교환비율은 한국 원화와 미 달러화의 환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치솟았다. 3월 초 현재 1위안에 235원까지 치솟았으니 거의 두 배가 된 셈이다.
그런 환율상승이 대부분 한국에서 받는 월급을 중국으로 가져와 위안화로 바꾸어 생활하는 왕징 거주 한국 기업 주재원들이나 한국의 투자자금을 중국으로 가지고 와서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 업자들에게 치명타를 안겨준 것이다. 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중국의 신문과 방송은 커다란 흥미를 갖고 여러 가지 사례들을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해서 소개하고 있다.
한국인들 왕징을 떠나고 있다
◇‘경제위기 폭발로 한국 원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한국인들이 왕징을 떠나가고 있다’(2008년 11월 15일 <경제관찰보>)=베이징 북동쪽의 왕징 신도시의 한쪽 귀퉁이에 ‘한오시상(韓娛時尙)’ ‘순한풍상(純韓風尙)’ 등 한국인들이 보는 오락잡지들이 키 높게 쌓여 있다. 이 오락잡지들은 가져가는 사람이 없는지 먼지가 잔뜩 쌓여 있다. 신문잡지 판매대 주인 노인네는 “매일같이 트렁크를 끌고 어딘가로 도망가는 한국인들이 눈에 뵈니, 이 잡지들은 사갈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중국 사회과학원 한국연구센터 朴光海(박광해) 연구원은 “왕징에는 5만~7만명의 한국인이 살았었는데 지금은 3만~3만5000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 배용준을 흉내낸 옷차림을 하고 있는 L씨는 베이징 중의약대학 1학년생이다. 그는 그전에는 시간이 남으면 친구들과 모여 앉아 잡담을 하는 것이 즐거움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럴 시간이 없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가게에 가서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중국인들에게 1시간에 30위안을 받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개인교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이유를 묻자 “작년에만 해도 한국 돈 1만원이면 중국 돈 70~80인민폐로 바꾸어 생활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50위안밖에 안 된다”고 대답한다.
L씨는 “3개월 만에 한번씩 내는 방세가 그전에는 한국 돈으로 150만원 정도면 됐는데 지금은 200만원으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0월 말 이후 친구 두 명이 수료증서만 받고 귀국했고, 한 명은 휴학계를 내고 귀국했다”고 전했다.
… 유학생이나 왕징 거주 한국인들의 수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이들 한국인의 집에서 일하던 조선족 가정부들도 속속 왕징을 떠나고 있다. 왕징 신도시 주민위원회 솽춘링(雙存玲) 서기는 “한국인들이 왕징에 거주하면서 한국어 구사가 가능한 점을 살려 가정부나 식당 서비스를 해서 생계를 꾸리던 조선족 사람들이 왕징의 지하 셋방을 얻어 살기 시작했는데, 최근 들어 한국인들이 왕징을 떠나면서 이들 조선족이 쓰던 지하 셋방도 하나 둘씩 비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왕징의 한국인 수가 늘어난 것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여건이 나빠진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시작된 흐름인데 이제 썰물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
싼 셋방 찾아 나서
◇‘한국 원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왕징을 지키는 한국인들이 싼 셋방을 찾아 나서고 있다’(2008년 12월 17일 <法制晩報(법제만보)>)=“왕징 말고 다른 지역에는 괜찮은 방이 없어요?” 최근 왕징의 부동산 소개소를 찾는 한국인들이 단골로 묻는 질문이다. 주로 외국인용으로 지어진 왕징의 비싼 집 말고 다른 지역의 싼 집 가운데 살 만한 집이 어디 없느냐는 질문이다. 금융위기로 한국 원화의 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진 후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떠나고, 왕징을 떠나는 가운데 왕징에 살던 많은 한국인들이 비교적 값이 싼 라이광잉(來廣營·왕징의 북쪽 변두리), 주셴차오(酒仙橋·왕징의 남동쪽 변두리) 등지의 중국인 주택을 찾아나서고 있다.
… 왕징의 괜찮은 아파트를 세 얻어 살던 한국인 유학생 L양은 한 달에 2500위안(약 50만원)이나 하는 집세를 더 이상 낼 수 없어 최근 시장통의 일반 중국인 가정에 방을 얻어 옮겼다. 한국에서 부모가 보내주는 돈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환율 때문에 인민폐로 바꾸어 놓은 액수는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집에 가정부로 일하는 조선족 H양은 “내 주변의 한국인들 대부분이 집을 옮기고 있다. 큰 집은 작은 집으로, 아파트는 보통 주택으로 옮기고 있다”고 말한다. 왕징에서 부동산 소개업을 하는 업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왕징에 사는 한국인들의 90%가 최근 들어 집을 줄여서 이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한국인은 왕징에서 멀리 떠나지는 못하고 한국음식점과 왕징의 한국적 분위기 때문에 왕징 인근의 라이광잉이나 주셴차오의 싼 집을 찾아 이사를 하고 있다.
… 일부 한국인들은 이번에 싼 집을 찾아 옮기는 김에 한국인들이 별로 살지 않았지만 지하철 5호선이 통과하고 시내 출퇴근이 편리한 톈퉁위안(天通苑·왕징에서 북서쪽으로 10㎞ 떨어진 지역)이란 지역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톈퉁위안이 왕징을 대신하는 새로운 코리아 타운이 될지 모르는 흐름도 보이고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눈물만 흐른다’(2009년 2월 27일 <남방인물 주간>)= 1994년부터 베이징에 와서 살기 시작한 한국인 C양은 한동안 눈물을 흘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주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매일 밤 속이 상해서 방성대곡(放聲大哭·원문은 放聲哭泣)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중국에 와서 치어리더의 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베이징 차이나 월드 호텔 동남쪽의 소호(SOHO)에 작년 2월 사무실을 얻어 정식으로 치어리더의 춤을 유료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 베이징 올림픽의 바람을 타고 그녀의 사업은 잘돼 가는가 했다. 인기가 높아져 1년 수업료가 4800위안(약 100만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작년 10월 금융위기가 몰아친 이래 그녀의 치어리더 수업료는 4800위안에서 2000위안으로 떨어졌고, 지난 1월 말의 춘제(春節·우리의 설날) 이후에는 등록생 숫자가 ‘0’이 됐다.
추악한 한국인
더구나 그녀에게 투자했던 한국 기업도 금융위기 바람에 사업이 어려워져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15년 전 한 푼 지니지 않고 인천에서 베이징으로 온 그녀는 그동안 어떻게든 자립할 길을 찾아왔고, 이제 자립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물만 흐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금융위기의 바람에 치어리더의 춤을 가르치는 교습 같은 것은 생존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중국 신문들이 큰 화제를 만났다며 너도나도 특집으로 전하는 중국 내 한국인들의 곤란한 처지는 1905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황성신문 주필 韋庵(위암) 장지연 선생이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을 쓰던 때의 비장한 분위기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20년 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그 사는 모습이 중국인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에게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잘사는 나라 사람들’인 것으로 비쳤다. 그러던 것이 20년 만인 2008년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곧 이어 밀어닥친 금융과 외환위기로 한국이 휘청거리자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보는 시각을 교정하고 있는 중이다.
때맞춰 중국 속의 3세대 조선족 金文學(김문학)이 쓴 <추악한 한국인(丑陋的韓國人)>이란 한국인의 결점 고발서가 중국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어,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호감은 급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 김문학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국인들은 ‘우리’ 의식이 너무 강하다. 그들은 ‘우리’ 의식이 국제화에 큰 방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친족 친척 의식에 도취해 있는 한국인들은 이제 국제화 세계에서 유급생으로 21세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동안 100달러짜리 달러를 흔들어 보이면서 잘난 척하고, 중국인들을 깔보던 한국인들이 금융위기의 바람에 어깨가 축 처진 채 기가 죽어서 왕징 거리를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위로의 말을 던지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왕징을 오가는 한국인들의 숫자 자체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한국인들로 붐비던 한국어 간판 식당들이 속속 문을 닫거나, 주인이 야반도주했다는 이야기가 왕징 여기저기에 퍼지는 가운데 중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이 ‘비정상적으로’ 중국을 떠나는 경우 형사사법 공조를 통해 국제적으로 한국 기업에 대한 소송제기가 가능한 법적절차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해 말 12월 30일 베이징에서 한창 권위지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조간신문 <신경보(新京報)>에 이런 기사가 났다. 신경보는 뻥튀기 기사나 오보를 잘 싣지 않는 신문이다. 그 마트는 그냥 수퍼마켓이 아니라 스마오 톈제(世貿天階)라고, 중국 정부가 베이징 올림픽 때 과시용으로 조성한 최고급 쇼핑몰 지하에 자리잡은 대규모 마트다. 넓이가 1000㎡가 넘는 규모다. 그 마트가 돌연 문을 닫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투자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는 터라 그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아, 나도 아침에 신문에서 봤어요…. 근데 난 6개월 전에 누구에게 팔아넘겼는데…, 실제로 그 사람들이 한국으로 도망갔다고 그러데…. 중국 위안(元)화 가격이 올라 한국 돈 갖고 와서 중국 물건 사서 진열하려니 가랑이가 찢어졌다고 하데. 츳츳츳 안됐어. 나라 망신은 나라 망신대로 하고….”
신경보가 전한 내용이 맞다는 이야기였다. 이 마트에 물건을 공급해 주고 받을 돈이 있는 중국 측 거래선이 대낮에 마트로 가보니 셔터 문이 내려져 있더라는 것이었다. 마트 주인인 한국인 사장과는 휴대전화 연결도 안 되고, 마트 점원들은 닫힌 문 밖에서 두 달치 월급을 못 받았느니, 세 달치 월급을 못 받았느니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고, 셔터 한쪽 귀퉁이에는 12월 24일 내붙인 것으로 되어 있는 종이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물건을 공급한 분들은 1월 10일에 오시면 결제를 해 드리겠습니다. 연락전화번호는 ○○○ ○○○○ ○○○○― 진 샤오제(金小姐)’
물론 진 샤오제 것이라는 전화는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았다. 화가 난 마트 상품 공급업자들이 베이징 동쪽의 퉁셴(通縣)에 있다는 이 마트의 물류창고로 달려갔으나 창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無影無踪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해서 중국 정부와 베이징市(시) 당국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해외 고급제품 쇼핑몰의 지하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한국 마트의 야반도주는 이때부터 두 달 넘게 베이징에서 발행되는 많은 신문과 잡지, 그리고 TV에 돌아가며 보도됐다. 금융과 외환위기에 처한 한국의 형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베이징 시민들과 중국 전역의 중국인들의 입과 귀를 통해 퍼져 나갔다.
2월 18일 베이징에서 가판이 제일 많이 팔리는 신문 <북경청년보(北京靑年報)>는 마침내 이런 제목의 기사를 한 면을 통털어 실었다.
‘한국 투자 대형 마트 중국 H그룹이 투자한 정품 마트로 재탄생’
‘미국발 금융위기 폭발 이후 환율문제로 중국에서 도망간 베이징시 최초의 대형 사건’이던 한국 마트 사장의 도주사건은 그렇게 정리돼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금융위기 폭발 이후 베이징시에서 도망간 외국 기업에 대한 첫번째 소송제기 사건으로 발전했다’고 북경청년보는 전했다. 이와 함께 이 마트의 한국인 경영주이던 K씨, H씨, 또다른 K씨 등의 한국인 이름들을 지면에 나열했다. 커다란 제목으로 ‘한국인 점주는 그림자도 발자취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無影無踪(무영무종)’이라는 제목도 달았다.
지난해 10월 이후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본격적으로 불어닥친 금융과 외환위기라는 거센 寒風(한풍)에 중국 내 한국인들의 체면을 형편 없이 깎아내린 것은 베이징 북동쪽의 코리아 타운 왕징(望京)에 사는 한국인들의 수가 갑자기 줄어든 것이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7만명 정도로 추정하던 왕징 거주 한국인들의 숫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작년 10월 이후 2만~3만명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在中(재중) 한국인회, 駐中(주중) 한국대사관, 중국사회과학원과 공안당국이 정확한 집계를 내보려 하지만 워낙 인구이동이 심해 대체로 3분의 1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물론 이들 2만~3만명이 다 귀국한 것은 아니고, 일부는 보다 생활비가 싼 베이징 현대자동차 공장 부근의 순이(順義)시로 이동해 간 것으로 재중 한국인회는 파악하고 있다.
베이징 시내 한복판 대형 마트의 한국인 사장을 도망가게 하고, 왕징 거주 한국인들의 숫자를 줄어들게 한 主犯(주범)은 환율이다. 지난해 8월만 해도 1위안에 120~130원 선이던 중국 위안화에 대한 한국 원화의 교환비율은 한국 원화와 미 달러화의 환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치솟았다. 3월 초 현재 1위안에 235원까지 치솟았으니 거의 두 배가 된 셈이다.
그런 환율상승이 대부분 한국에서 받는 월급을 중국으로 가져와 위안화로 바꾸어 생활하는 왕징 거주 한국 기업 주재원들이나 한국의 투자자금을 중국으로 가지고 와서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 업자들에게 치명타를 안겨준 것이다. 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중국의 신문과 방송은 커다란 흥미를 갖고 여러 가지 사례들을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해서 소개하고 있다.
한국인들 왕징을 떠나고 있다
◇‘경제위기 폭발로 한국 원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한국인들이 왕징을 떠나가고 있다’(2008년 11월 15일 <경제관찰보>)=베이징 북동쪽의 왕징 신도시의 한쪽 귀퉁이에 ‘한오시상(韓娛時尙)’ ‘순한풍상(純韓風尙)’ 등 한국인들이 보는 오락잡지들이 키 높게 쌓여 있다. 이 오락잡지들은 가져가는 사람이 없는지 먼지가 잔뜩 쌓여 있다. 신문잡지 판매대 주인 노인네는 “매일같이 트렁크를 끌고 어딘가로 도망가는 한국인들이 눈에 뵈니, 이 잡지들은 사갈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중국 사회과학원 한국연구센터 朴光海(박광해) 연구원은 “왕징에는 5만~7만명의 한국인이 살았었는데 지금은 3만~3만5000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 배용준을 흉내낸 옷차림을 하고 있는 L씨는 베이징 중의약대학 1학년생이다. 그는 그전에는 시간이 남으면 친구들과 모여 앉아 잡담을 하는 것이 즐거움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럴 시간이 없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가게에 가서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중국인들에게 1시간에 30위안을 받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개인교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이유를 묻자 “작년에만 해도 한국 돈 1만원이면 중국 돈 70~80인민폐로 바꾸어 생활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50위안밖에 안 된다”고 대답한다.
L씨는 “3개월 만에 한번씩 내는 방세가 그전에는 한국 돈으로 150만원 정도면 됐는데 지금은 200만원으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0월 말 이후 친구 두 명이 수료증서만 받고 귀국했고, 한 명은 휴학계를 내고 귀국했다”고 전했다.
… 유학생이나 왕징 거주 한국인들의 수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이들 한국인의 집에서 일하던 조선족 가정부들도 속속 왕징을 떠나고 있다. 왕징 신도시 주민위원회 솽춘링(雙存玲) 서기는 “한국인들이 왕징에 거주하면서 한국어 구사가 가능한 점을 살려 가정부나 식당 서비스를 해서 생계를 꾸리던 조선족 사람들이 왕징의 지하 셋방을 얻어 살기 시작했는데, 최근 들어 한국인들이 왕징을 떠나면서 이들 조선족이 쓰던 지하 셋방도 하나 둘씩 비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왕징의 한국인 수가 늘어난 것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여건이 나빠진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시작된 흐름인데 이제 썰물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
싼 셋방 찾아 나서
◇‘한국 원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왕징을 지키는 한국인들이 싼 셋방을 찾아 나서고 있다’(2008년 12월 17일 <法制晩報(법제만보)>)=“왕징 말고 다른 지역에는 괜찮은 방이 없어요?” 최근 왕징의 부동산 소개소를 찾는 한국인들이 단골로 묻는 질문이다. 주로 외국인용으로 지어진 왕징의 비싼 집 말고 다른 지역의 싼 집 가운데 살 만한 집이 어디 없느냐는 질문이다. 금융위기로 한국 원화의 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진 후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떠나고, 왕징을 떠나는 가운데 왕징에 살던 많은 한국인들이 비교적 값이 싼 라이광잉(來廣營·왕징의 북쪽 변두리), 주셴차오(酒仙橋·왕징의 남동쪽 변두리) 등지의 중국인 주택을 찾아나서고 있다.
… 왕징의 괜찮은 아파트를 세 얻어 살던 한국인 유학생 L양은 한 달에 2500위안(약 50만원)이나 하는 집세를 더 이상 낼 수 없어 최근 시장통의 일반 중국인 가정에 방을 얻어 옮겼다. 한국에서 부모가 보내주는 돈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환율 때문에 인민폐로 바꾸어 놓은 액수는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집에 가정부로 일하는 조선족 H양은 “내 주변의 한국인들 대부분이 집을 옮기고 있다. 큰 집은 작은 집으로, 아파트는 보통 주택으로 옮기고 있다”고 말한다. 왕징에서 부동산 소개업을 하는 업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왕징에 사는 한국인들의 90%가 최근 들어 집을 줄여서 이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한국인은 왕징에서 멀리 떠나지는 못하고 한국음식점과 왕징의 한국적 분위기 때문에 왕징 인근의 라이광잉이나 주셴차오의 싼 집을 찾아 이사를 하고 있다.
… 일부 한국인들은 이번에 싼 집을 찾아 옮기는 김에 한국인들이 별로 살지 않았지만 지하철 5호선이 통과하고 시내 출퇴근이 편리한 톈퉁위안(天通苑·왕징에서 북서쪽으로 10㎞ 떨어진 지역)이란 지역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톈퉁위안이 왕징을 대신하는 새로운 코리아 타운이 될지 모르는 흐름도 보이고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눈물만 흐른다’(2009년 2월 27일 <남방인물 주간>)= 1994년부터 베이징에 와서 살기 시작한 한국인 C양은 한동안 눈물을 흘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주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매일 밤 속이 상해서 방성대곡(放聲大哭·원문은 放聲哭泣)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중국에 와서 치어리더의 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베이징 차이나 월드 호텔 동남쪽의 소호(SOHO)에 작년 2월 사무실을 얻어 정식으로 치어리더의 춤을 유료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 베이징 올림픽의 바람을 타고 그녀의 사업은 잘돼 가는가 했다. 인기가 높아져 1년 수업료가 4800위안(약 100만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작년 10월 금융위기가 몰아친 이래 그녀의 치어리더 수업료는 4800위안에서 2000위안으로 떨어졌고, 지난 1월 말의 춘제(春節·우리의 설날) 이후에는 등록생 숫자가 ‘0’이 됐다.
추악한 한국인
더구나 그녀에게 투자했던 한국 기업도 금융위기 바람에 사업이 어려워져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15년 전 한 푼 지니지 않고 인천에서 베이징으로 온 그녀는 그동안 어떻게든 자립할 길을 찾아왔고, 이제 자립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물만 흐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금융위기의 바람에 치어리더의 춤을 가르치는 교습 같은 것은 생존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중국 신문들이 큰 화제를 만났다며 너도나도 특집으로 전하는 중국 내 한국인들의 곤란한 처지는 1905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황성신문 주필 韋庵(위암) 장지연 선생이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을 쓰던 때의 비장한 분위기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20년 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그 사는 모습이 중국인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에게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잘사는 나라 사람들’인 것으로 비쳤다. 그러던 것이 20년 만인 2008년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곧 이어 밀어닥친 금융과 외환위기로 한국이 휘청거리자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보는 시각을 교정하고 있는 중이다.
때맞춰 중국 속의 3세대 조선족 金文學(김문학)이 쓴 <추악한 한국인(丑陋的韓國人)>이란 한국인의 결점 고발서가 중국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어,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호감은 급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 김문학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국인들은 ‘우리’ 의식이 너무 강하다. 그들은 ‘우리’ 의식이 국제화에 큰 방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친족 친척 의식에 도취해 있는 한국인들은 이제 국제화 세계에서 유급생으로 21세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동안 100달러짜리 달러를 흔들어 보이면서 잘난 척하고, 중국인들을 깔보던 한국인들이 금융위기의 바람에 어깨가 축 처진 채 기가 죽어서 왕징 거리를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위로의 말을 던지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왕징을 오가는 한국인들의 숫자 자체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한국인들로 붐비던 한국어 간판 식당들이 속속 문을 닫거나, 주인이 야반도주했다는 이야기가 왕징 여기저기에 퍼지는 가운데 중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이 ‘비정상적으로’ 중국을 떠나는 경우 형사사법 공조를 통해 국제적으로 한국 기업에 대한 소송제기가 가능한 법적절차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