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李長勳의 World News] 美·러·中의 中央亞 자원 쟁탈전 : 월간조선

세계 상위 10大(대) 油田(유전) 중 계속 原油(원유) 생산량이 늘어나는 곳은 어디일까. 정답은 카스피海(해) 동쪽에 있는 카자흐스탄의 텡기즈 유전이다. 추정 매장량이 150억~260억 배럴인 텡기즈 유전은 현재 하루 54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한다. 단일 유전에서 원유가 생산되는 규모로는 세계 최대인 이 유전에선 앞으로도 10년 동안 원유 생산량이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유전은 미국의 석유 메이저 셰브런이 15년이란 시간과 엄청난 자금을 들여 개발했다. 셰브런은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 이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셰브런은 애초 이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를 유조선에 싣고 카스피海(해)를 건너 아제르바이잔의 바쿠로 운송한 후 그루지야의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세이한까지 수송할 계획이었다.

미국은 지난 2006년 바쿠~트빌리시~세이한을 연결하는 총 길이 1776km의 BTC 송유관을 개통시켰다. BTC 송유관은 현재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러시아의 영토를 거치지 않고 유일하게 서방으로 직접 연결되는 수송 통로다. BTC 송유관은 하루 약 100만 배럴의 원유를 유럽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만약 러시아가 BTC 송유관이 지나는 그루지야를 통제하면, 셰브런은 원유를 수송할 다른 방법이 없는 상태다.

러시아는 그동안 셰브런에 텡기즈 유전에서 黑海(흑해)의 自國(자국) 항구도시 노보로시스크로 연결되는 CPC(Caspian Pipeline Consortium)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수송할 것을 제의해왔다. 이를 거절해왔던 셰브런은 러시아의 제안을 마지못해 검토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러시아의 침공으로 비롯된 그루지야 전쟁 기간 중 自國(자국)의 원유를 아제르바이잔으로 수송하는 것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루지야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둘러싼 미국과의 경쟁에서 잃어버렸던 영향력을 복원하고 있다. 이에 맞서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차지했던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에너지가 부족한 중국은 러시아의 일방적인 독주를 우려하면서 견제에 나서고 있다.

이들 3국이 벌이고 있는 이 지역의 경쟁 구도는 21세기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국제질서의 향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 3국의 헤게모니(지배권) 다툼은 마치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와 대영제국이 인도를 차지하기 위해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대결한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영국의 소설가 루디야드 키플링은 소설 <킴(Kim)>에서 대영제국과 제정 러시아의 치열한 쟁탈전을 ‘거대한 게임(The Great Game)’이라고 표현했다. 때문에 미국·러시아·중국이 현재 이 지역에서 벌이는 다툼을 ‘새로운 거대한 게임(The New Great Game)’, 또는 ‘新三國志(신삼국지)’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파이프라인스탄’

이들 3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이유는 무엇보다 에너지 때문이다.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에 있는 中央亞(중앙아)의 옛 소련 공화국들과 카스피해 연안국들을 흔히 ‘파이프라인스탄(pipelinestan)’이라고 부른다. ‘스탄’(‘땅’이라는 뜻으로 古代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에서 비롯됐음)이라는 단어에 이 지역 도처에 묻혀있는 석유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합쳐져 나온 파생어다. 이 지역에는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카자흐스탄 등의 국가들이 있다. 이 지역에는 최소 2000억 배럴의 석유와 6조6000억㎥의 천연가스(현재 기준으로 약 5조 달러어치)가 매장되어 있어 ‘제2의 中東(중동)’이라는 말을 듣고도 남을 정도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이 지역은 러시아·중국·인도·이란·터키·파키스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미국으로선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할 경우,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 눈엣가시인 이란까지 견제할 수 있다. 반대로 러시아와 중국도 이 지역을 절대 미국에 넘길 수 없는 입장이다.

옛 소련이 붕괴된 직후, 이 지역은 한동안 無主空山(무주공산)으로 남아 있었다. 호시탐탐 이 지역을 노리던 미국은 9·11 테러를 계기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우즈베키스탄의 하나바드 공군기지와 키르기스스탄의 마나스 공군기지를 임차했다. 미국이 당시 이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미국은 이와함께 이 지역에서 가장 자원이 풍부한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독재체제를 인정하면서 새로운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미국은 항상 각국에 민주주의와 인권 확대를 촉구하지만, 두 국가들은 예외였다.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미국은 독재자로 악명 높았던 게이다르 알리예프 대통령이 2003년 사망하자 플레이보이로 유명한 그의 아들 일함 알리예프가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또 장기 집권하고 있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에도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美(미) 국무부는 연례적으로 발표하는 인권보고서에서 이들 국가의 명단을 아예 삭제했다. 엑손모빌·셰브런 등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이 파이프라인 건설과 유전 탐사 등을 위해 이들 국가에 투자한 금액만도 500억 달러가 넘는 만큼 부시 행정부가 이들 국가에 ‘二重(이중)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그동안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 위기를 느끼고 서로 손을 잡고 미국에 대항해왔다. 양국은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 등과 함께 상하이 협력기구(SCO)를 결성해 미국의 공세에 맞섰다. 양국은 이슬람 극단세력의 테러에 공동 대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등 SCO를 일종의 ‘反美(반미) 동맹’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海 해양油田. 中央亞와 카스피해 연안국들의 석유 매장량은 2000억 배럴에 달한다.

‘反美의 軸’

지난 8월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빌리로 진격하는 러시아군 탱크부대.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의 입김으로 이 지역에서 최초로 전략적 패배의 쓴맛을 봤다. SCO는 지난 2005년 7월 정상회의에서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 주둔 중인 미군에 대해 철수 일정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특히 러시아의 使嗾(사주)를 받은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미군 철수 이후 러시아와 상호 군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한쪽 국가가 외부로부터 공격 받을 경우 다른 국가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 이 조약에는 우즈베키스탄이나 러시아 둘 중 한 국가에 대한 제3국의 공격은 양국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며, 피해 국가에 군사적 수단을 포함한 모든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양국은 이와함께 안보와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경우 상대방 군사기지를 이용할 수 있는 조약까지 맺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 국가들 중 인구(2600만명)가 가장 많은 국가로, 고대 실크로드 시절부터 지금까지 교통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금(세계 7위)과 천연가스(세계 10위) 및 우라늄(세계 4위)을 비롯해 각종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까지 탐사된 자원의 총 가치는 1조300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된다. 목화 생산량도 세계 4위다.

미국은 지금도 알토란 같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철군한 것을 상당히 아쉬워하고 있다. SCO는 앞으로 회원국들을 확대하는 등 명실공히 미국이 배제된 아시아 최대의 안보 및 경제 협력기구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과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맞설 ‘동방의 나토’창설을 구상하고 있다. SCO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대표적인 反美(반미) 국가인 이란은 SCO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을 신청한 상태다. 만약 이란이 SCO에 가입하면 러시아~중국~이란으로 연결되는 ‘반미의 軸(축)’이 형성될 수도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핵 개발 문제를 놓고 이란 입장을 두둔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옛 소련 공화국들을 묶어서 창설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를 SCO와 연계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CSTO는 지난 2002년 러시아·벨로루시·아르메니아·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 등 6개국으로 구성된 안보협력기구다.

푸틴, 그루지야의 사카슈빌리 대통령 증오

지난 8월 24일 그루지야 주민들에게 전달할 식량 등 구호물품을 싣고 흑해의 항구도시 바투미에 도착한 미국 해군 구축함 맥폴호.

이들 3국이 벌이는 패권 쟁탈전에서 현재 가장 우세한 위치를 점령한 국가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그루지야 전쟁의 승리를 바탕으로 힘의 균형을 깨뜨렸다. 지난 8월 8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날, 그루지야는 자국 內(내) 自治(자치)공화국인 南(남)오세티야를 공격했다. 러시아는 남오세티야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루지야를 전격 침공했다. 전쟁의 결과는 러시아의 일방적 승리였다.

인구 450만의 小國(소국) 그루지야는 북쪽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남동쪽으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서쪽으로 흑해와 터키를 접하고 있는 카프카스(영어로는 코카서스)산맥 지역의 중심지다. 그루지야에선 석유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고 있지만 地經學(지경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다.

중앙아와 카스피해 연안 국가들이 석유와 천연가스를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수출하려면 반드시 그루지야를 거쳐야만 한다. 그루지야에는 중앙아와 카스피해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흑해나 터키를 통해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에 공급할 수 있는 BTC 송유관이 지나고 있다.

또 천연가스를 나르는 BTE(바쿠-트빌리시-터키 에르주름) 파이프라인도 있다.

지난 2006년 완공된 이 파이프라인은 ‘남코카서스 천연가스관’이라고 부르는데, 길이 692km로 연 66억㎥의 천연가스를 공급하고 있다. BTE의 그루지야 구간은 248km나 된다. 미국은 BTE라인을 카스피해 해저를 통해 천연가스가 풍부한 투르크메니스탄과 연결하는 계획을 추진해왔다.

그루지야는 또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과 러시아가 대치하는 ‘경계 국가’다. 미국은 오일 머니에 힘입어 冷戰(냉전) 시절 위상을 회복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 턱밑에 위치한 그루지야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왔다.

미국은 그루지야를 발판으로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 대한 정치·군사적 영향력 확대를 모색해왔다. 미국이 특수부대를 파견, 군사지원을 하는 등 그루지야 군의 현대화를 적극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 2004년 反(반)정부 시위로 촉발된 장미혁명으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이 물러나자, 이 혁명을 주도한 미하일 사카슈빌리를 적극 지원해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러시아 대통령(현 총리)은 사카슈빌리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로버트 레그볼드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푸틴은 사카슈빌리를,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를 싫어하는 것과 똑같이 혐오했다”고 지적했다.

사카슈빌리의 미국 짝사랑

지난 8월 수도 트빌리시에서 러시아군의 침공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는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

푸틴은 사카슈빌리를 제거하기 위해 교묘하게 덫을 놓고 수년간 기다렸다. 푸틴은 지난 2004년 남오세티야 주민들 대부분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부여했다. 당시만 해도 푸틴이 다른 나라 국민에게 이런 조치를 취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루지야가 남오세티야를 공격하자, 러시아 정부가 “외국 군대에게 공격당하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고 주장한 것을 볼 때 이미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 정부는 또 체첸 반군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카프카스 지역에 배치됐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도록 준비해왔다. 러시아는 이번 사태가 나자마자 수백대의 탱크와 장갑차를 비롯해 공수부대 등 지상군을 그루지야로 파견했다. 이런 기동력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동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그루지야의 도발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사카슈빌리의 誤判(오판)도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사카슈빌리는 독립을 주장해온 남오세티야를 점령하고, 버티기만 하면 러시아가 국제 여론을 의식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사카슈빌리는 또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개입하면, 미국이 지원할 것이라고 믿어왔다. 실제로 사카슈빌리의 집무실에는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을 정도로 親美派(친미파)다. 미국 컬럼비아대와 조지워싱턴대에서 법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고 뉴욕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했던 그는 미국이란 든든한 후원자를 믿었다. 그는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라크에 영국 다음으로 많은 2000명의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가 오판한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과도한 지원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 4월 나토 정상회의에서 그루지야를 나토에 가입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미국은 지난 7월 병력 1000명을 그루지야에 파견, 그루지야 군과 합동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푸틴, “소련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地政學的 재앙”

지난 8월 시베리아 우수리강 인근의 호랑이 서식지를 돌아보는 푸틴 러시아 총리(가운데). 그는 에너지 자원을 바탕으로 러시아 패권의 회복을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는 그루지야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오세티야와 또 다른 자치공화국인 압하지야의 독립을 공식 인정하고, 우호 협력 및 상호 지원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군사 협력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이번 조약을 근거로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에 각각 3800명의 병력을 장기 주둔시킬 방침이다. 또 이 조약은 상대국 영토 안에 군사기지를 설치할 수 있도록 명기하고 있다.

러시아가 그루지야에 대한 지배권을 이처럼 강화하고 있는 이유는 푸틴의 야심에서 비롯됐다. 푸틴은 연방보안국(FSB, 옛 소련의 KGB 후신) 국장 시절인 1998년 10월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광업대학에서 <시장경제제도 형성기의 천연자원 再(재)개발을 위한 전략>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논문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이 국가 경제발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러시아의 미래는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푸틴이 생각한 러시아의 발전과 覇權(패권) 회복 전략은 에너지 자원의 國有化(국유화)와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의 에너지 통제권을 거머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중앙아와 카스피해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찾는 것이었다.

푸틴은 2000년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불구, 에너지 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러시아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러시아는 국영에너지 기업이 벌어오는 엄청난 오일 머니 덕분으로 외환보유고(8월 말 현재 5683억 달러)에서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가 1998년 400억 달러의 대외채무를 갚지 못해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했던 것과 비교할 때, 이 같은 발전은 격세지감이다.

푸틴의 목표는 국제질서를 러시아·미국·중국의 ‘3强(강) 체제’로 정립시킨다는 것이다. 푸틴은 지난 2005년 4월 연례 국정연설에서 “옛 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었다”고 선언했다. 소련의 붕괴로 미국이 영향력과 지배력을 넓혀가면서 세계를 전략적 불균형 상태로 빠뜨렸다는 것이다.

푸틴이 말한 ‘지정학적 재앙’의 무대가 바로 중앙아와 카스피해 지역이다. 때문에 이 지역의 병목(bottleneck) 역할을 해오던 그루지야는 푸틴의 제1 목표가 된 셈이다.

푸틴의 야심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KGB 요원으로 동독에서 활동하면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직접 목격했던 푸틴으로선 옛 소련의 영광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에너지 통제로 패권 부활 노리는 푸틴

KGB는 과거 ‘국가 속의 국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때문에 많은 엘리트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이 기관에 들어갔다. 푸틴도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대를 다니다 KGB 요원으로 特採(특채)됐다. 푸틴을 포함한 이들 KGB 엘리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아침에 소련이 몰락하는 상황을 보면서 이들의 가슴속에는 응어리가 맺힐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언젠가 소련이 부활해 다시 미국과 힘 겨루기를 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KGB 엘리트들의 대표인 푸틴이 ‘강한 러시아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크렘린궁을 비롯해 국가 최고 권력기관의 실세들을 모두 KGB 출신 엘리트인 ‘실로비키’(siloviki·제복을 입은 남자들이란 뜻)로 갈아치웠다. 푸틴은 지난 2005년 크리스마스 직전 실로비키를 크렘린궁에 불러모아 놓고 “러시아는 에너지 자원을 통해 국제사회의 리더가 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푸틴이 러시아의 달라진 힘을 최초로 과시한 것은 2006년 새해 첫날인 1월 1일 나토에 가입하려던 우크라이나에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한 것이다. 이는 ‘오렌지 혁명’을 통해 親(친)서방 정책을 추진해온 우크라이나에 대한 보복인 동시에 미국과 유럽연합(EU)에 대한 일종의 시위였다.

푸틴이 영향력의 수단으로 천연가스를 선택한 결정도 탁월했다. 천연가스는 석유보다 파괴력이 강한 에너지 자원이다. 천연가스는 석유보다 공급이 제한돼 있고 수송하기가 어려워 대체가 힘들다. 유럽으로 공급되는 천연가스 대부분이 파이프로 제공된다. 천연가스는 수요자가 결정된 후 개발되기 때문에 부족한 천연가스를 당장 구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또 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때문에 청정에너지인 천연가스의 수요는 갈수록 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 세계에 매장된 천연가스 중 30%가 러시아에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로부터 전체 가스 소비량의 25% 정도를 공급 받는 유럽연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 중단 조치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해 마음만 먹으면 유럽을 궁지에 몰 수 있고, 유럽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EU는 2020년까지 총 에너지 수요의 6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며, 특히 천연가스의 수입 의존도는 70%에 이를 전망이다. 때문에 러시아의 ‘가스 밸브’는 과거 냉전시대의 核(핵)탄두와 똑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푸틴도 에너지의 무기화를 실험해본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러시아+중앙아 OPEC 구상

푸틴이 현재 적극 추진하고 있는 전략은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묶어 러시아의 영향하에 두는 일종의 ‘러시아＋중앙아 OPEC’구상이다. 푸틴 총리는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6년 SCO 정상회의에서 OPEC와 유사한 에너지 관련 기구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푸틴의 구상은 현재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는 그루지야 전쟁 이후 그동안 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이 미국과 맺어온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과 카자흐스탄은 흑해의 노보로시스크로 이어지는 러시아 송유관을 통해 석유 수출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러시아는 투르크메니스탄 정부와 천연가스에 대한 독점 공급권을 체결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중앙아 최대의 천연가스 생산국으로, 확인된 가스 매장량은 2조9000억㎥나 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BTE 가스관이다. 아제르바이잔의 가스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이 가스관의 수송 능력을 현재 연 60억㎥에서 2014년까지 연 200억㎥까지 늘리고 이를 오스트리아까지 연결하는 이른바 ‘나부코’가스관 건설계획도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EU가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송하기 위해 BTE와 나란히 건설하려던 가스관(연 300억㎥ 운송 규모) 프로젝트도 물 건너 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충격을 받은 미국은 아제르바이잔을 설득하기 위해 나섰으나 별 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딕 체니 부통령은 지난 9월 3일 아제르바이잔을 방문, 알리예프 대통령에게 나부코 가스관 건설사업 지지를 요청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화가 난 체니 부통령은 자신의 방문을 환영하는 알리예프 대통령 주최 만찬에 불참했다.

인구 800만의 아제르바이잔은 그루지야의 前轍(전철)을 밟기를 원치 않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그루지야와 마찬가지로 나토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러시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결국 러시아를 배제하기 위해 새 송유관과 가스관을 건설했던 미국 등 서방과 중앙아와 카스피해 에너지 생산국들이 어쩔 수 없이 러시아의 파이프라인에 다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중국, 러시아의 패권 추구에 제동

지난 9월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한 딕 체니 미국 부통령(오른쪽)이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점은 러시아의 거침없는 행보를 동맹 관계나 다름없던 중국이 견제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8월 28일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에서 열린 SCO 6개국 정상회의에서 그루지야 전쟁에 대한 회원국들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실패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그루지야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회원국 정상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독립국가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러시아의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개최를 지지한다”는 말만 했을 뿐 두 자치공화국의 독립을 러시아가 인정한 것에 지지한다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다른 회원국들도 중국 편에 섰다. 이에 따라 당시 SOC 회원국들은 공동성명에서 “회원국들은 그루지야에서 발생한 긴장 국면에 우려를 표명하며 관련 당사자들이 대화와 평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길 호소한다”는 原論的(원론적)인 내용만을 발표했다.

중국이 러시아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대만 문제와 티베트,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 등 少數(소수)민족의 분리 독립 문제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속내는 러시아의 중앙아와 카스피해 지역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중국은 자칫하면 러시아가 이 지역의 에너지를 모두 통제할 경우, 自國(자국)의 경제는 물론 안보까지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국으로선 ‘러시아＋중앙아 OPEC’구상이 실현될 경우, 러시아에 에너지를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 생산국 중심의 OPEC 모델은 러시아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는 구조다. 에너지가 부족한 중국은 그동안 러시아의 시베리아 송유관을 자국으로 통과시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왔다. 러시아로부터 겨우 시베리아 송유관의 支線(지선)을 통해 자국으로 석유를 보낸다는 약속을 받아낸 중국으로선 이미 러시아가 갖고 있는 ‘에너지의 힘’을 실감한 바 있다.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準(준)동맹 수준까지 관계를 발전시켰지만, 러시아의 일방적인 에너지 패권을 인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러시아와 중국은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同床異夢(동상이몽)의 관계다.

중국은 러시아에 맞서 이 지역 국가들을 철도와 도로망으로 연결하는 이른바 ‘新(신)실크로드(新絲綢之路)’ 전략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올 연말까지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카스(喀什)에서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까지 연결하는 길이 937㎞의 고속도로를 완공한다. 옛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던 시안(西安)과 란저우(蘭州)~우루무치(烏魯木齊)~카스를 잇는 중국 내 구간은 이미 중국 정부가 고속도로를 만들어 놨다. 카스~타슈켄트 구간이 완공되면 과거 중국 시안을 출발해 西域(서역)이라 불리던 중앙아 지역을 잇는 옛 실크로드의 주요 구간이 고속도로로 다시 연결되는 셈이다.

中, 新실크로드 전략 추진

중국은 또 같은 구간을 철도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앞으로 중국과 중앙아 간에 고속도로와 철도가 연결되면 중국은 공산품을, 중앙아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손쉽게 수출할 수 있다.

중국이 러시아의 이 지역 패권을 저지하기 위해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국가는 카자흐스탄이다. 카자흐스탄엔 “화학 교과서의 멘델레예프 주기율표에 나오는 모든 원소가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풍부한 천연자원이 묻혀있다. 매장량 322억 배럴로 세계 7위인 석유를 비롯해 세계 2위의 우라늄 및 텅스텐과 크롬, 세계 3위의 망간은 물론 금·은·구리·아연·철·석탄도 세계 10위 안에 든다. 천연가스의 확인 매장량은 세계 16위다.

중국은 자국에서 카자흐스탄을 관통해 카스피해까지 갈 수 있는 송유관과 철도망을 구축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2005년 12월 자국의 서부인 아라산커우(阿拉山口)에서 카자흐스탄 내륙 유전지대인 아타수까지 966㎞의 송유관을 연결해 하루 20만 배럴의 원유를 공급 받고 있다. 중국은 이 송유관을 2011년까지 카자흐스탄 서부 켄키악 유전지대와 카스피해의 항구 아티라우까지 연장할 계획이다. 카스피해 유전지대에도 빨대를 꽂겠다는 심산이다. 이 송유관이 완성되면 중국이 카자흐스탄 전역에서 생산하는 원유는 물론 아제르바이잔의 원유까지 안정적으로 수입할 수 있게 된다.

상하이협력기구 가입 국가들.

中央亞 국가들, 中에 대해서도 경계심

중국이 현재 추진중인 것은 카자흐스탄을 관통해서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유럽으로 직접 갈 수 있는 철도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다. 후진타오 주석과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이미 양국을 잇는 철도 건설에 합의한 바 있다. 양국은 또 신장위구르자치구와 카자흐스탄의 국경도시 하르고스를 연결하는 지역에 2013년까지 자유무역지대를 건설할 예정이다.

최근 5년 간 중국과 중앙아 5개국의 교역 규모는 연평균 50% 이상의 빠른 증가를 보이고 있다. 신실크로드 전략이 이처럼 효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행보는 신중하다. 그 이유는 이 지역 국가들이 대부분 중국에 경계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 국가들은 고대부터 대결과 문화교류, 정복과 被(피)정복으로 점철된 과거사를 잊지 않고 있다. 특히 이 지역 국가들은 거대 중국이 또 다시 자국을 옛 소련처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 지역 국가들은 이미 그루지야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상당한 반감을 보이고 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중국은 이 지역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조하는 등 포용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라나 미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중국은 현재 이 지역에서 長期戰(장기전)을 펼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으로선 미국과 러시아의 다툼에서 일단 漁夫之利(어부지리)를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미국·러시아·중국 중 어느 국가가 중앙아와 카스피해 지역을 놓고 벌이는 헤게모니 싸움에서 승리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21세기 중반까지 이 다툼은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신냉전(The New Cold War)>의 저자 에드워드 루카스 前 영국 이코노미스트誌(지) 모스크바 총국장의 지적처럼 이 지역을 놓고 벌이는 패권쟁탈전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