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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역사

불발 쿠데타 후 오히려 민주주의 후퇴한 튀르키예

5만여 명 투옥, 180여 개 언론 기관 폐쇄

글 :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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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도안, 쿠데타 진압 후 개헌 통해 ‘제왕적 대통령’ 돼
⊙ 행정부가 판사 임명·승진에 영향력 행사, 사법 제도 공정성 훼손
⊙ 쿠데타 연루 장교 등 337명 종신형 선고
⊙ 13만 명 이상 공무원 해고·정직, 언론인 120여 명 투옥
⊙ 에르도안의 政敵 귈렌 지지자 51만 명 구금, 약 3만 명 구속
⊙ 정부, 언론 매체의 약 90% 통제… ‘대통령 모욕’ 3만 건 이상 민사소송 제기(2020년)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학 이슬람연구소 이슬람학 석사, 同 박사과정 수료, 이란 테헤란대학 이슬람학 박사 /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역임. 現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 저서 《이슬람교를 위한 변명》 《벌거벗은 세계사–사건편 2》(공저) 《벌거벗은 세계사–권력자편》(공저)
2016년 8월 7일 이스탄불에서 열린 쿠데타 규탄 집회에 참석한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쿠데타 불발 이후 그는 ‘제왕적 대통령’이 됐다. 사진=AP/뉴시스
  2016년 7월 15일 튀르키예(터키) 현지 시각으로 오후 10시경 쿠데타가 발생했다. 수도 앙카라 상공에서 전투기와 헬리콥터가 저공비행하고,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해협의 주요 교량이 차단됐다. ‘국가평화위원회’를 자칭한 일부 군부(軍部) 세력은 국영방송을 통해 “세속주의(世俗主義), 민주주의, 인권을 저버리고 국제 사회에서 국가신인도를 상실한 에르도안 정부를 단죄하고자 정부를 장악했다”며 계엄령과 통행금지령을 선포한 후 새 헌법을 빨리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국가평화위원회’라는 이름은 튀르키예공화국의 국부(國父) 케말 아타튀르크의 ‘국가의 평화, 세계의 평화’라는 말에서 따온 이름이다. ‘위대한 아타튀르크의 지도력 아래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튀르키예공화국을 건국하고 오늘날까지 지켜온 군대’가 보기에 에르도안 정부는 공화국 건국 이념인 세속주의·민주주의의 가치를 무시하면서 정당성을 상실한 정권이었다. 그러나 쿠데타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30분 만인 이날 오후 10시 30분 이을드름(Binali Yıldırım) 총리가 군부 세력이 불법 쿠데타를 시도했다고 선언했고, 마르마리스에서 휴가 중이던 에르도안 대통령도 11시 CNN 튀르크와의 페이스타임 인터뷰에서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서 쿠데타에 맞서달라고 촉구했다. 이에 시민들이 통행금지령을 무시하고 거리로 나와 군인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발발 약 4시간 만인 16일 새벽 2시경 에르도안은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해 쿠데타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친(親)정부군이 주요 지역을 다시 장악했고, 쿠데타 가담 군인들이 대거 투항하면서 군사정변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에르도안, 政敵을 쿠데타 조종자로 규정
 
2016년 쿠데타 당시 길바닥에 엎으려 쿠데타군 탱크를 가로막은 시민.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저항으로 쿠데타는 무위로 끝났다. 사진=AP/뉴시스
  쿠데타 시도 닷새 뒤인 7월 20일 에르도안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 90일간의 전국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선언문 첫 문단에 에르도안의 오랜 정적(政敵) 페툴라 귈렌(Fethullah Gülen)이 쿠데타를 꾸몄다고 주장한다.
 
  “2016년 7월 15일 튀르키예에서 페툴라 귈렌 테러조직(FETO)이 쿠데타를 시도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와 헌법 질서를 거스른 이 유혈 시도는 튀르키예 국가와 국민과 보안군의 결연한 대응으로 무산됐다. 비열한 살인자들은 민간인을 공격하고, 거리에서 민주주의 수호자들을 탱크로 짓밟았으며, 심지어 의사당마저 폭격했다. 시민 246명이 목숨을 잃고 2185명이 다쳤다.”
 

  귈렌은 이슬람 학자로, ‘히즈메트(Hizmet)’ 운동 지도자다. 히즈메트는 튀르키예어로 봉사를 뜻하는데, 교육, 종교 간 대화, 사회봉사를 강조하며 온건한 이슬람 해석을 가르치는 사회봉사 운동이다. 튀르키예뿐 아니라 100여 개 국가에서 초·중등학교, 대학, 문화, 언론, 기업들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우리나라에도 국제학교가 있다.
 
  에르도안과 귈렌은 모두 이슬람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에 한때 함께 손잡은 동맹이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었다. 에르도안이 이슬람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실행하려는 반면, 귈렌은 개인의 변화를 중시하며 세속 사회에 적응하는 이슬람을 지향했다. 에르도안은 정치적 이슬람 정당인 정의개발당(AKP)을 기반으로 정권을 잡았다. 에르도안 지지자들은 찬란한 과거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영광을 되살려 튀르키예 사회를 궁극적으로 세속주의에서 벗어나 이슬람 중심 체제로 바꾸려고 한다. 그러나 귈렌은 비정치적이고 시민사회에 바탕을 둔 이슬람을 강조했다.
 
 
  ‘세속주의의 수호자’ 군부의 영향력 약화
 
  문제는 사법부, 경찰, 군대 등 국가기관 내에 상당히 깊숙이 자리 잡은 귈렌 지지자들 역시 에르도안과 마찬가지로 세속주의 군부를 불편하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귈렌 지지자들이 비록 정권은 장악하지 못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권력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두려움을 에르도안은 가지고 있었다.
 
  에르도안 정부와 귈렌 지지자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세력은 철저히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군부였다. 1923년 10월 튀르키예공화국 건국 이래 군부는 국시(國是)인 세속주의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해 왔다. 1960년, 71년, 80년, 97년 모두 4차례에 걸친 쿠데타의 명분도 ‘세속주의 보호’였다. 집권 여당이 조금이라도 이슬람을 앞장세우려는 기색을 보이면 여지없이 군부가 나서서 세속주의를 재정립하고 물러났다.
 
  세속주의 군부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에르도안과 귈렌 지지자들은 서로 협력했다. 그 결과 두 번의 군사 쿠데타 음모, 즉 2003년 ‘해머(Sledgehammer)’ 사건과 2008년 군사 비밀조직 ‘에르게네콘(Ergenekon)’ 사건이 발각되어 재판에 회부됐다. 에르도안과 귈렌 지지자들이 서로 협력한 것은 군부를 무력화(無力化)하면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은 훨씬 안정적으로 정치권력을 다질 수 있고, 귈렌 지지자들은 국가기관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많은 고위 장교가 투옥되면서 세속주의 수호자였던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줄었다.
 
 
  에르도안, 경찰·검찰·사법부 장악
 
  그러나 에르도안과 귈렌은 2013년 부패 스캔들을 계기로 완전히 갈라섰다. 튀르키예 경찰은 대형 건설 프로젝트, 이란과 불법 거래 관련 뇌물 수수, 자금 세탁 등의 혐의로 정·재계 인사들과 내무·경제·환경부 장관의 아들들을 체포했다. 그런데 경찰이 압수한 여러 증거물 중 에르도안이 아들에게 “거액의 돈을 숨기라”고 지시하는 내용의 음성 녹음 기록이 담겨 있었다. 에르도안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패 스캔들로 사임한 3명의 장관 중 바이락타르 환경부장관은 에르도안도 연루됐다고 주장하며 사임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에르도안은 이 사건이 자신의 정부를 약하게 만들기 위해 귈렌 지지자들이 조작한 ‘사법 쿠데타’라고 주장하면서, 사건 관련 경찰·검사·판사 수천 명을 해임하거나 다른 곳으로 발령했다. 국가기관 곳곳에 네트워크를 구축해 경찰과 사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귈렌 지지자들이 자신의 정부를 흔들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다며 오히려 숙청 작업으로 반격한 것이다.
 
  이로써 에르도안과 귈렌의 동맹은 완전히 깨졌다. 에르도안은 2013년 부패 스캔들로 정부 전복을 시도한 배후로 귈렌을 지목하고 귈렌 지지자를 표적으로 삼아 적대적인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엄청난 부패 스캔들에도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은 대중의 지지를 받아 2014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부패 수사는 대부분 중단되었고, 피고인들에 대한 소송은 취하되었으며, 수사관들은 오히려 귈렌과 연루됐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귈렌의 에르도안 비판
 
페트라 귈렌.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이러한 상황에서 2016년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이 쿠데타는 군부 내 소수 귈렌 지지자들이 에르도안 정부의 부정부패와 권력 사유화(私有化)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여론의 지지를 얻으리라 오판하고 벌인 듯하다.
 
  에르도안 정부는 쿠데타 이전인 1999년부터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귈렌이 미국의 지원 아래 쿠데타를 배후 조종했다고 비난했지만, 귈렌은 이런 주장을 부인했다.
 
  귈렌이 에르도안의 권위주의적 독재를 비판해 온 것은 사실이다. 특히 에르도안이 의원내각제에서 총리를 3연임(2003~14년)한 후 정의개발당 내부 규정에 따라 2014년 4선 출마가 금지되자 대통령을 간선(間選)에서 직선제(정부 형태는 여전히 내각제)로 바꾸는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반대 의견을 누르고 권력을 사유화하면서 튀르키예를 사적(私的) 권위주의 통치로 이끌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맞서 에르도안은 귈렌과 지지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면서, 귈렌 네트워크를 해체하기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군부, 사법부, 교육계 등 사회 전역에서 귈렌 지지자를 솎아내는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에르도안은 미국에 귈렌의 신병(身柄) 인도를 계속 요구했으나, 미국은 법적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귈렌은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숙청
 
2017년 8월 1일 재판정으로 출두하는 아킨 외즈튀르크 전 공군 사령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진=AP/뉴시스
  쿠데타가 진압된 후 에르도안은 ‘미국 개입설’을 내세워 귈렌과 그의 지지자들을 매국노(賣國奴)라고 몰아붙이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다졌다.
 
  에르도안 정부는 쿠데타 세력을 엄혹하게 처리했다. 법원은 2019년 6월 쿠데타 주동자라는 혐의를 부인하던 전 공군 사령관 아킨 외즈튀르크에게 종신형(終身刑)을 선고했다. 2020년 11월에는 쿠데타에 연루된 군 장교와 조종사 등 337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쿠데타 지휘소인 앙카라 인근 아큰즈 공군기지에서 쿠데타를 모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보스포루스대교(大橋) 봉쇄에 연루된 군인들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아울러 많은 군인들이 대통령 암살 미수, 살인, 헌정 질서 전복 시도 등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귈렌 지지자로 지목된 이들은 여성들도 쿠데타 세력, 테러리스트로 몰려 감옥에 수감됐다. 사진=AP/뉴시스
  에르도안 정부는 쿠데타 관련 요소를 모두 제거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13만 명 이상의 공무원을 해고하거나 정직(停職) 처분을 내렸다. 5만 3000명 이상이 투옥(投獄)됐다. 조금이라도 귈렌과 관계가 된 사람들은 직장을 잃거나 감옥에 갇혔다. 2019년 튀르키예 내무부는 불발 쿠데타 이후 약 51만 명에 이르는 귈렌 지지자를 구금하고, 약 3만 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한국을 비롯해 해외에 거주하는 튀르키예 국민들도 숙청의 여파(餘波)를 피할 수 없었다. 귈렌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튀르키예 국민은 여권이 만료돼도 주재국 튀르키예 대사관에 여권 발급이나 기간 연장 신청을 하지 못하고 일단 튀르키예로 귀국해야 했다. 해외에서 출생한 자녀의 출생 신고도 받아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내외로 난민(難民) 신청을 하는 튀르키예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에르도안의 독재
 
  에르도안의 독주는 계속되었다. 에르도안은 불발 쿠데타 이듬해인 2017년 4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꾼 후 그 이듬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이 국가원수(元首)와 정부 수반을 겸하면서 3권 분립이 약화되었다.
 
  특히 에르도안 정부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행정부가 판사 임명과 승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법 제도의 공정성이 훼손되었다.
 
  또한 약 180개의 언론 기관이 문을 닫았고, 120명 이상의 언론인이 투옥되면서 언론의 자유가 크게 위축되었다. 현재 튀르키예 정부가 언론 매체의 약 90%를 통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받을 리 만무하다. 튀르키예 정부는 대통령 모욕 혐의로 2020년 한 해에만 무려 3만 건 이상의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한마디로 쿠데타 불발 이후 에르도안 정부의 움직임은 행정 권력을 강화하고, 사법부 독립성을 훼손하고, 언론 자유를 억압하고, 반대파를 대거 숙청하는 등 더욱 강력한 권위주의의 길로 매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튀르키예의 대외(對外) 정책도 크게 달라졌다. 에르도안은 2013년 이집트의 세속주의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무슬림형제단을 받아주었다. 이는 세속주의와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해 이슬람 세계에서 튀르키예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에르도안 집권 이후 튀르키예의 외교정책은 ‘신(新)오스만주의’로 부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활동 무대였던 중동,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발칸반도를 종교·문화적으로 지원하여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수단이 올바르지 않은 쿠데타’의 교훈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은 이슬람 세계의 리더로서 튀르키예의 역할을 강조하고, 순니파 이슬람의 맹주(盟主)를 자처한다. 팔레스타인의 대의(大義)를 지지하고, 이집트나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종종 대립각을 세운다. 또 국제 사회나 주변 국가와 충돌을 불사하면서까지 동(東)지중해, 시리아, 리비아, 이라크,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등 지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가자 전쟁과 관련해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나토 동맹국인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문화적으로도 TV 시리즈 등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상기시키려 애쓰고 있다.
 
  결국 세속주의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에르도안 정부에 쿠데타로 대응하려 했던 군부 내 소수 귈렌 지지자들의 오판은 오히려 권위주의를 더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집권 세력이 아무리 부패했다고 한들 민주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하지 않으면 정권 교체를 했다고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수단이 바르지 않으면 결과가 옳을 수 없는 일이다. ‘쿠데타 세력 진압’이라는 명분 아래 튀르키예의 민주주의는 더욱 후퇴했다. 2016년 6시간 만에 미수로 끝난 튀르키예의 군사 쿠데타가 주는 교훈이다. 그래도 쿠데타를 막은 튀르키예 국민의 열정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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