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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난파한 보수,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청년이 보는 한국 보수

인재·이념 파산한 보수 정당의 장기적 쇠락 과정부터 돌아보아야

글 :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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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이념론, 선진국 벤치마킹론 모두 한국 현실에 맞지 않아
⊙ 건국과 근대화 주도했던 튀르키예·인도·이스라엘·한국의 패권 정당들, 1980~1990년대 거치면서 몰락
⊙ 보수, 세계에서 벌어지는 가장 첨예한 논쟁과 민족의 전통을 결합하고자 하는 자세 필요
⊙ 인도·이스라엘·튀르키예에서는 종교적 보수주의와 시장자유주의를 결합한 신우파가 대안 세력으로 등장
⊙ 튀르키예 군부, 國體 수호한다며 2016년 쿠데타 일으켰다가 실패
⊙ 1980년대 이후 등장한 대안 정당도 ‘꼰대정당’이 되어 시대 변화 적응 못 해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2024년 12월 4일 국회에서 철수하는 계엄군. 시대착오적인 ‘친위 쿠데타’는 보수의 자멸을 앞당겼다. 사진=조선DB
  대한민국의 보수(保守)는 2024년 12월 3일 밤에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의 계엄령 선언과 함께 ‘멸망’했다. 45년 동안 유례가 없던 충격적인 계엄령은 선포된 지 2시간 반 만에 끝이 났다. 그리고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대한민국 건국자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보수 세력은 사형(死刑) 선고를 받았다. 헌정(憲政) 체제를 지키겠다는 최소한의 의지마저 포기한 대통령의 난동은, 그 대통령을 후보로 올린 보수 정당과 그를 찍어준 유권자를 체제의 반역자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이 정치적 공백 속에서 보수당이 믿는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과는 사뭇 다른 국가적 서사(敍事)를 지니고, 그 서사를 이미 대한민국 사회의 표준으로 만들어버린 더불어민주당이 견제가 불가능한 압도적 패권(覇權) 정당으로 부상(浮上)할 것이다. 2016년 탄핵으로 등장했던 2017년의 문재인(文在寅)을 뛰어넘는 힘을 지닌 민주당으로 변모할 것이다.
 
  보수가 멸망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 초유의 사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석열의 어이없는 실정(失政)을 되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윤석열 같은 인물에 의지해야만 했을 정도로 인재와 이념이 파산한 보수 정당의 장기적 쇠락 과정을 돌아보아야 한다. 보수 우파는 1987년 이후 치러진 8번의 선거에서 5번을 승리했고, 그중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당선시킨 가장 최근의 대선(大選)도 있었다. 하지만 선거를 거듭할수록 보수의 기반은 계속해서 취약해졌고, 2016년의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 탄핵과 뒤이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을 경험하며 조직적 기반에도 회복이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현재 대한민국 유권자 집단의 중추를 구성하는 수도권의 중산층들은 일관되게 민주당에 표를 던지고, 보수는 설령 대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의회에서는 만년 소수당에 머물며 정국(政局) 주도권을 상실했다.
 
  정국 주도권의 상실보다, 설령 정국을 주도해도 무슨 의제를 추진할지에 대한 합의가 전혀 없다는 것은 상황을 더욱 안 좋게 만든다. 지금 국민의힘은 확고한 보수 지지를 거두지 않고 있는 영남과 강남이라는 양남(兩南)과 노년층에 의지하며, 민주당에는 국정을 맡길 수 없다는 공포심에 기대 간신히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새로운 인물과 의제를 발굴하기보다, 이재명(李在明) 민주당 대표의 사법(司法) 리스크를 현실화하는 법원 판결만 바라보며 기도만 하는 것도 보수 정치의 현주소다. 이런 수준이라면 보수 정당은 집권을 해도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없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실정을 거듭한 끝에 보수 정당 자체가 사실상 영구적으로 궤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폐허에서 나라를 일으킨 기적을 이룬 정치 세력으로서는 정말 허무한 결말이다.
 
 
  ‘탈이념론’과 ‘선진국 벤치마킹론’
 
  보수의 위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위기론이 나올 때마다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이 ‘보수의 혁신’을 외쳤다. 하지만 그 혁신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공허한 단어의 나열만이 난무한다. 보수가 성장 대신 분배도 챙겨야 한다는 ‘따뜻한 보수론’, 중도층을 포용하고 구(舊)시대적인 이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탈(脫)이념론’같이 사실상 보수 정당의 정체성을 지우자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보수 정당이 자신의 이념을 버리고 좌익 정당의 공약을 무분별하게 수용한다면,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원조(元祖) 진보 정당들을 찍지 보수 정당을 찍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까지 정신없이 바뀌는 당명(黨名)은 한국의 보수당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사회를 바라보는 고유의 시선이 없음을 입증하는 상징이나 다름없다.
 
  또 다른 혁신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선진국 벤치마킹론’이다. 선진국의 여러 보수당이 오랜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왔으니, 이 정당을 배우자는 것이다. 독일 기독교민주당과 콘라드 아데나워의 질서자유주의, 영국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와 마거릿 대처, 프랑스의 샤를 드골과 에마뉘엘 마크롱까지, 숱한 유럽 국가의 정당과 지도자 이름을 나열하며 한국도 이제 선진국이니 선진국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핏대를 세워 말한다.
 

  물론 대부분은 예시(例示)로 등장한 국가들의 실제 역사적 맥락에 대한 매우 부박(浮薄)한 이해를 바탕으로 21세기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논의다. 앞선 국가가 있으니 우리는 고민 없이 그것을 따라서 배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정신 자체가 소위 ‘선진국’에 걸맞지 않은데 어떻게 보수가 혁신하겠는가? 보수, 아니 꼭 보수가 아니더라도 책임 있는 정치 세력이라면 무비판적인 선진국 추종이 아니라 자국(自國)이 걸어온 역사 위에서, 고대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세계 각지의 흐름을 탐구한 뒤 지금의 현실에 가장 맞는 방안을 창조해 내는 일을 사명으로 삼아야만 한다.
 
 
  한국도 원래는 취약 국가였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상당수 논의가 좌표 설정에서부터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20세기 들어 한국인의 화두는 언제나 ‘어떻게 우리도 선진국이 될까’였다. 반대로 한국이 이전의 빈곤을 끊어내고 몰라보게 발전한 지금은 ‘우리도 이제는 선진국이다’라는 주장을 쉽사리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20세기 한국은 일본을 필두로 앞선 선진국의 경험을 면밀히 연구했고, 선발주자의 시행착오를 생략하고 최선의 결과물을 흡수하는 후발주자의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이 결과 이제 한국은 1인당 GDP, 군사력, 대중문화, 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G7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러니 한국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한국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는 선진국과 비교하며 참고사례로 삼고자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2020년대인 지금, 이 선진국 전략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문제는 세계적인 대격변기인 지금, 선진국도 자신들의 상황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정치적인 혼란에 빠져 자신들의 사회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랜 기간 쌓아온 그들의 전통 덕분에 선진국 정치라는 후광(後光)이 착시(錯視) 효과를 잠깐 제공해 줄 뿐이지 독일의 메르켈 정권이나 프랑스의 마크롱 정권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명백한 사실은 가릴 수 없다.
 
  두 번째 문제는 이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이 한국과는 너무도 달라서 참고하는 데 그다지 유용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근래의 한국인들은 자국이 선진국 클럽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도 식민지에서 독립하자마자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거친 취약 국가였다는 과거를 망각할 때가 많다. 원래 대한민국은 갑작스럽게 건국을 준비해야 했던 아시아의 숱한 탈식민 독립 국가들과 같은 유대감을 가진 국가였지, 근대 국가의 역사가 최소 2세기는 되는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의 일원이 아니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 대한민국이 현재 서 있는 좌표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참조해 온 선진국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경험과 우리 자신의 체험을 비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장기간 국가를 이끌다가 무력(無力)하게 주저앉는 경향이 나타났다. 우리가 이러한 유사점을 탐구한다면, 한국 보수가 현재 처해 있는 위기를 더 명확히 짚어낼 수 있지 않을까?
 
 
  유혈 낭자했던 건국
 
건국의 지도자들. 왼쪽부터 아타튀르크(튀르키예), 벤구리온(이스라엘), 네루(인도).
  20세기 아시아 국가들은 나름의 찬란한 문명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지만, 근대적인 민족 국가를 일찍부터 건설한 서구 세력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식민지가 되는 굴욕을 겪었다. 이 국가들에서 민족 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은 그래서 민족 국가를 이루어 영국과 프랑스를 뛰어넘겠다는 19세기 독일과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에 강한 영감(靈感)을 받았다. 많은 아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언젠가 민족을 근대 세계에 걸맞게 재생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대중 운동을 일으켰고, 국가 건설에 나섰다. 튀르키예(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이스라엘의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건국자들이다. 아타튀르크는 연합군에 짓밟힌 오스만제국을 구원하고자 일어섰고, 네루는 식민지 인도를 독립시키고자, 벤구리온은 유럽에서 박해받는 유대인이 피신할 국가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건국은 동시에 유혈 낭자한 과정이기도 했다. 국가의 본질은 폭력이고, 어떤 이들을 국민으로 간주해야 할지 선별해 내는 폭력적인 과정이 필요했다. 독립할 국가의 방향성을 둘러싼 논쟁도 치열했다. 위기를 신속히 넘기기 위해서 건국 세대는 어쩔 수 없이 손에 피를 묻혀야만 했다. 아타튀르크는 그리스와 전쟁을 벌이고 쿠르드인을 억압했다. 인도는 무슬림과 힌두교의 갈등 끝에 파키스탄과 갈라지며 무수히 많은 인구가 죽어나갔다. 이스라엘은 1000년간 그 땅에서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을 잔인하게 내쫓으며 유대인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건국에 뒤따르는 혼란과 폭력은 대한민국에서도 극심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무정부적인 폭력으로 시작해 김일성(金日成)의 남침(南侵)으로 절정에 달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반공(反共)으로 삼은 건국 지도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통치기 또한 여타 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건국 과정의 피가 배어 있다.
 
 
  건국 세력의 다음 과제 근대화
 
1976년 5월 31일 포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도 ‘근대화’를 대표하는 지도자였다.
  일단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건국이 이루어지자 건국 세대는 20세기 아시아에 울려 퍼진 국가 주도의 근대화(近代化)를 충실히 수행하고자 했다. 튀르키예의 아타튀르크, 인도의 네루, 이스라엘의 벤구리온은 좌우의 틀로 보자면 모두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좌파로 기운 이유는 소련식 국제공산주의와는 큰 관련이 없었다. 그들은 근대 교육을 받은 국가 엘리트가 국내의 자원을 동원해 전통적 삶을 사는 인구를 빠르게 교육하고, 도시에 거주하는 근대적 경제 주체로 키우는 것이 국가를 잃고 방황하던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할 추격 방법이라 생각했다. 국가는 교육과 보건에 투자하고, 관료들이 경제 계획을 세워 국민을 필요한 산업 영역에 배치하고, 농촌을 현대화하고, 댐, 발전소, 도로를 지어 국토 공간을 변화시켜 민족을 ‘이륙’시켜야 했다. 이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도 모두 공유하고 있던 정신이었다.
 
  한국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도 이러한 시대정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재확립했다는 점에서는 한국 우익의 기둥이지만, 그의 실제 경제 정책은 1930년대 소련, 일본, 독일에서 발전한 국가 주도적인 발전 계획의 계보에 있는 것이었다. 아시아 건국 지도자들의 경제 정책을 보면, 우리의 5개년 계획이나 새마을운동을 연상케 하는 정책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 모든 정책은 국가가 선생을, 국민이 학생의 역할을 맡아 민족 전체가 전력으로 발전에 임해야 한다는 건국 국면의 절박함이 담긴 결과물이었다.
 
 
  권좌에서 밀려난 건국 정당들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외세에 맞서 민족을 지켜내 독립을 이루고,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근대적 발전을 주도한 아시아의 건국 세력은 패권(覇權) 정당을 통해 장기 집권을 이루었다. 민족이 겪었던 굴욕과 고난의 시기를 기억하고, 근대화를 통해 수혜를 입은 세대는 패권 정당에 계속 투표했고, 장기 집권을 지지했다.
 
  튀르키예의 군부(軍部)는 케말주의 정신의 훼손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네 차례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아타튀르크의 공화인민당은 1923년 건국 이래로 80년 가까이 튀르키예 정국을 주도했다. 벤구리온과 노동시온주의자들이 이끄는 이스라엘의 마파이당은 1948년 건국 이후 연이은 중동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1977년까지 30년을 집권했다. 네루의 국민회의당은 딸인 인디라 간디와 손자인 라지브 간디를 후계 총리로 만들며 ‘네루 왕조’를 만들었고, 1947년 독립 당시부터 2014년까지 약 70년간 패권 정당으로 군림했다. 건국 세력이 창립한 패권 정당에 동의하지 않는 반대 세력조차도 건국 국면에서 지도자들이 보인 결단력과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청사진에는 존경을 표할 때가 많을 정도다.
 
  그런데 이 건국 정당들이 어느 순간부터 사회 장악력을 상실하고, 대안(代案) 세력에 정권을 넘겨주기 시작한다. 튀르키예의 경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이 2003년부터 지금까지 연달아 집권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 인도인민당의 총리 모디가 10년 넘게 집권하며 강력한 지도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우익 리쿠드당이 1977년에 최초로 집권한 이래 지금까지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 건국과 근대화를 주도한 찬란한 정당들이 이제는 대안 세력에 밀려 과거의 영광만을 추억하고 있다.
 
 
  신우파의 등장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왼쪽)과 모디 인도 총리. 두 사람 모두 건국 세대의 자리를 대신한 ‘신우파’ 정치인들이다. 사진=AP/뉴시스
  아시아에서 건국 정당들의 위기는 대체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찾아왔다. 이 시기는 건국 정당들이 수십 년에 걸쳐 집권하며 자신들의 과업을 대체로 완수했던 시기였다. 취약했던 신생국은 국제사회에서 어엿한 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근대적 학교를 졸업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 애국심을 지닌 국민으로 거듭났다. 국가 발전 정도는 대성공을 거둔 한국과 이스라엘부터 성과가 상대적으로 저조했던 튀르키예와 인도까지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고, 도시민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얻으며 국가가 조성한 근대적 삶에 적응했다. 그러다 건국 당시 시급했던 국가적 과제가 완수되자, 건국 정당의 한계가 드러났다.
 
  많은 국민이 이에 새로운 비전을 갈망하며 대안 세력이 점차 부상하기 시작했다. 한국과는 다소 다르게,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등장한 대안 세력은 종교적 보수주의와 시장자유주의를 결합한 신우파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세계 경제에 격변이 있던 시기였다. 1971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금태환(金兌換) 금지, 1973년 석유파동, 1979년 폴 볼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금리 인상이 겹치며, 저렴한 석유와 미국이 제공하는 저리(低利)의 차관이 국가 경제의 기초를 다져주던 시기가 끝났다. 세계 각국은 석유를 구매하고 외채(外債)의 높은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어떻게든 달러를 확보해야 했다. 세계 시장의 경쟁은 격렬해졌고, 국가가 시장경쟁력 이외의 여러 정치적 목적을 갖고 육성한 국영기업과 협동조합은 변화에 대처하기에 너무 둔중했다. 이에 국가 기관이 국민 경제를 계획적으로 관리하는 종래의 모델에 도전하고,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경제의 능률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세계 각지에서 발호했다. 그러나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내 시장에 의존하는 기업들 이외에 경쟁력 있는 기업을 육성하지 못했던 많은 신생국은 이 자유주의의 물결에서 특히 더 고통스러운 구조 조정을 경험했다.
 
  문화와 정체성 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건국 세대는 대체로 근대적 교육을 받은 국민이 종교보다는 민족에 충성하는 세속주의를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많은 국가에서 상황은 반대였다. 도시로 갑작스레 이주한 농민들은 과거의 습속을 그대로 유지했고, 농촌 사회의 연결망 없이 도시에서 살아남고자 종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었다. 이 연결망은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보장이 무너지고 시장자유주의에 적응하기까지 고통스러운 이행기를 감내할 수 있게 해주는 물질적 방파제와 도시 공간에서의 실존적 고뇌에 해답을 주는 영적(靈的)인 지지대를 제공했다.
 
  건국 세대가 일군 과거의 성공 공식을 유지할 수도 없고, 종교보수주의와 시장자유주의를 완전히 수용할 수도 없었던 건국 정당의 후계자들은 그렇게 사회에서 패권을 상실해 갔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이나 인도의 모디와 같은 대안 세력 지도자들이 오스만제국과 힌두교의 영광을 이야기하며 기업가들이 활약하는 국가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공화인민당이나 인도국민회의의 지도자들은 건국의 정신을 해친다는 흑색선전 빼고는 대응할 수단이 없었다.
 
 
  국정 주도권 상실한 보수 정당
 
  한국 보수 정당은 사뭇 다르면서도, 또 유사한 경로를 걸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수출 대기업의 건설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여타 아시아 신생국 지도자와 큰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국가 주도 경제는 1979년의 경제위기로 그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한국에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시기에 시작된 경제 자유화는 대안 세력 지도자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1998년 집권하고 IMF의 구조조정안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한편 급속한 도시화가 주는 사회적 스트레스와 실존의 위기는 기독교 교회의 급속한 성장으로 나타나며 보수의 에너지가 되기도 했고, 반대로 유교적 낭만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다양한 학생 운동으로 분출되기도 하며 대안 세력의 기반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세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 보수 정당은 튀르키예, 이스라엘, 인도 등 20세기 아시아 국가의 건국 정당과 핵심적 특징을 공유(共有)하고 있었다. 바로 건국과 국가 정체성의 수립, 경제 발전과 근대화를 이루어내며 과업을 완수해 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死後) 한국의 보수당은 이미 이전에 수립된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며, 국가 경영 능력이 의심스러운 대안 세력에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관성적(慣性的)인 메시지에 집중하며 국가를 이끌었다.
 
  이후 보수 지도자들이 거둔 성과와 별개로, 새로운 의제를 설정하고 기성(旣成) 체제에 불만을 가진 유권자들을 결집하여 도전해 내는 대안 세력에 맞설 수 있는 보수의 에너지는 빠르게 소실되어 갔다.
 
  보수 정당이 마침내 국가 경영 능력마저도 의심을 받게 되자, 그들은 건국 정체성과 한미동맹을 지킨다는 최후의 요새로 도피하여 농성하기 시작했다. 역시 이스라엘 노동당, 튀르키예 공화인민당, 인도 국민회의당도 모두 집권한 대안 세력이 종종 실정을 저지르고 위기에 처할 때 간헐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극적 정당으로 전락하며 국정 주도권을 상실했다.
 
 
  튀르키예 국체의 수호자였던 군부
 
  이 중에서 튀르키예의 건국 주도 세력이었던 군부의 몰락은 한국 보수 정당이 처한 궤멸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좋은 비교 사례가 되어준다. 튀르키예 군부는 아타튀르크가 남긴 세속적(世俗的) 민족주의를 국시로 삼으며, 이 공화국 정신이 위태로워질 때 민주정(民主政)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들은 1960년에 민주당의 아드난 멘데레스가 폭주한다며 첫 쿠데타를 시도했고, 1971년과 1980년에는 좌우익의 정치 갈등으로 국가가 무정부 상태로 흘러갈 것을 우려해 재차 쿠데타를 일으켰다. 1997년에도 군부는 네즈메틴 에르바칸 정부가 이슬람주의를 추진한다는 이유로 사임하라고 종용하며 ‘소프트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건국 정신을 지키기 위해 민주정을 부정하고 계속해서 군이 사태를 정리하는 것은 케말주의의 반대파들은 물론이고, 정치적이지 않은 튀르키예 시민들도 군부에 염증을 느끼게 만들었다.
 
  에르도안은 이슬람의 부활과 시장 개혁을 군부의 방해 없이 추진하기 위하여 유럽연합(EU)이 제시한 가입 조건과 부합하는 정치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군부의 정치 개입을 중단하고, 시민사회와 민간 정당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안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케말주의자들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유럽으로의 합류라는 목표와 결합하자 전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21세기 들어 튀르키예 정치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체계적으로 축소되었고, 반대로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은 튀르키예 사회에 일종의 패권적 영향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케말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하며 2013년 이스탄불의 게지 공원에 모여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시작했고, 에르도안의 집권 후반기는 아타튀르크 이래의 국체(國體)를 지키겠다는 공화인민당의 세속주의자들과 아타튀르크의 정신을 재해석하겠다는 정의개발당과 에르도안 지지자들의 극심한 정치 갈등으로 얼룩졌다.
 
 
  건국 세력의 정통성 무너뜨린 불발 쿠데타
 
2016년 7월 15일 튀르키예 쿠데타 당시 이스탄불 탁심광장에서 쿠데타군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마침내 2016년 튀르키예 군부는 국체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는 군부는 물론이고 공화인민당의 세력에도 궤멸적인 타격을 안겨준 최악의 수가 되었다.
 
  에르도안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킨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긴 하였으나, 여전히 자유선거로 선출된 민선 지도자였다. 과거 유혈이 낭자한 군사 쿠데타의 기억을 여전히 품고 있고, 1990년대 이후 빠르게 발전한 민주적 정치에 익숙해져 있었던 대다수의 튀르키예 시민은 또 다른 쿠데타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설령 에르도안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거리로 뛰쳐나와 탱크의 전진을 막아섰다.
 
  한편 에르도안은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화상(畵像)으로 튀르키예 국민들에게 자신은 여전히 안전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줄 것을 촉구했다. 포퓰리스트 독재자라고 에르도안을 비난하던 야권 공화인민당도 이 순간만큼은 에르도안을 민주주의의 상징이라고 인정하며 쿠데타 세력을 규탄했다.
 
  쿠데타가 허무하게 종식된 뒤, 에르도안은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쿠데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한 종교 지도자 페툴라 귈렌이 쿠데타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하며, 귈렌과 연계된 군, 관료, 언론을 철저히 조사하고 뿌리를 뽑아냈다.
 
  아타튀르크의 건국 이후 오랫동안 주류 정당이었던 공화인민당은 쿠데타 세력과의 연계를 부정하고, 쿠데타를 앞장서서 비판했지만, 케말주의 군부와 함께했던 그들의 역사가 다시 소환되어 격렬한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후 경제난이 찾아와 에르도안의 지도력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이 옛 쿠데타 주모자들과 관련이 없음을 국민들에게 납득시켜야만 하는 힘겨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2016년 불발 쿠데타는 건국 세력이 만든 국체를 지켜내야만 한다는 강박이 발악으로 이어져, 그 세력이 딛고 있던 역사적 정통성과 기반마저 일소된 촌극(寸劇)이었다.
 
 
  튀르키예 쿠데타보다 더한 촌극
 
  그리고 2024년 12월 3일에 한국의 보수는 튀르키예 쿠데타보다 더욱 우스운 촌극을 저질러버렸다. 필자는 계엄령이 선포되자마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유튜브 방송을 켜고 국회로 나아가는 장면에서 에르도안의 화상 연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대한민국 보수는 건국 세대의 업적과 그들이 확립한 국가 정체성을 입에 꺼내는 순간, ‘정신 못 차린 독재 세력’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소극적인 변명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보수 세력이나 건국 세력의 멸망이 곧 대안 세력의 궁극적 승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는 쿠데타 기도로 대안 세력이 확고한 주도권을 쥔 튀르키예를 포함한 여타 아시아 국가 정치의 현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누구도 위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에르도안은 경제난으로 인해 다시 성장하는 야당 연합과 경쟁해야만 했다. 사법부를 장악하려 시도한 네타냐후는 가자 전쟁의 수렁에 빠지며 역시 위기에 처하게 됐다. 집권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경제 성장과 국가 발전의 성과를 여전히 내고 있는 모디조차도 올해 있었던 하원 선거에서 예상외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어쩌면 한국의 보수도, 암중모색의 기간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꼰대’가 된 대안 세력들
 
  먼저, 대안 세력도 패권을 구축하며 건국 정당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성공의 역설에 처했다. 1980년대부터 부상한 대안 세력도 적어도 10년, 길면 30년에 가까운 장기 집권을 해냈고, 자신들의 정책을 통해 국가를 변모시켰다. 시장자유주의하에서 경제가 번창했고, 종교와 문명적 정체성 강조는 세계에서 그들 국가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초기의 목표가 달성되자, 대안 세력 역시 자신들이 거둔 성과를 지키는 데 집중하며 과거의 성공 공식을 반복해 나갔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국내 상황과 세계 질서가 다시 격변을 시작했고, 튀르키예, 이스라엘, 인도 등지에서 새롭게 패권을 형성한 대안 세력은 점점 더 거세지는 야당, 즉 건국 정당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건국 정당들은 종종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성장한 대안 세력의 비전을 너무 낡고 구시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더 젊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모으기도 한다. 당초 40년 전에 대안 세력은 건국 정당을 낡았다고 비판하며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대안 세력들도 여지없이 ‘꼰대’가 된 것이다. 이는 민주화라는 자신들 나름의 사명을 완수한 뒤에, 어떤 의제를 발굴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면서 전통적 지지 그룹인 청년층에 의해 낡았다고 외면받기 시작한 한국 민주당과 겹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건국 정당과 대안 정당을 막론하고, 작금 아시아의 여러 정치 세력은 자신들이 일군 성과와 현재 청년층 유권자들이 느끼는 문제의식에 입각한 대안을 결합해야만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도전은 100년 전에도 있었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을 봐도 이 과업에 제대로 착수한 정치 세력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듯하다. 이는 현재의 세계가 불확실성이 극도로 높아진 세계적 전환기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대결하며 지정학(地政學)이 요동치고 있고, 스마트폰과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정보화 혁명의 질주는 거침이 없다. 특히 정보화는 가족의 해체, 사회의 탈가치화, 국민 정체성의 파편화를 불러오며 전례 없는 심리적 위기를 만들어냈는데, 이 장기적 파급 효과는 아직도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영역이다. 세계가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국가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혁신하고, 무너지는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다시 세울 방안을 기다리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도전은 약 100년 전에 등장한 아시아 각지의 건국 세대가 이미 겪었던 것이기도 하다. 당시 대영제국의 패권이 흔들리며 세계대전의 소용돌이가 시작되었고, 중화학공업과 대량생산 체제가 등장하며 촌락과 농업에 의지하던 인간의 삶은 송두리째 변화를 겪었다. 사람들은 공장과 도시로 향했고, 핵가족과 개인의 탄생은 인간에게 해방감과 공허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건국 세대는, 오늘날 서구 패권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 그 이상으로,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아시아의 전통 문명이 서구의 전함(戰艦)에 무력(無力)하다는 것에 충격과 굴욕을 느꼈다. 이들은 자신들이 목도한 그 모든 변화를 따라잡고자 처절히 노력했고, 자국의 역사는 물론이고, 자신들을 지배하고 학대했지만 동시에 근대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 서구의 제국들을 연구하여 민족을 재생시키고자 했다. 마침내 제국주의가 무너지며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제국의 폐허에서 민족 국가를 건국해 냈다.
 
 
  한국의 보수가 배워야 할 것
 
2024년 12월 7일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사진=조선DB
  오늘날 보수가 건국 세대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면, 필요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어록이나 행적을 그대로 외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안 세력이 설정한 의제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포기하면 보수 정당은 그냥 해산하는 것이 낫다.
 
  보수는 작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가장 첨예한 논쟁과 민족의 전통을 결합하고자 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보수는 어떤가. 세계가 전환기에 있다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고, 옛 행적을 반복한다고 시대착오적인 친위(親衛) 쿠데타를 일으키며 자멸(自滅)이나 앞당기고 있고, 그게 아니면 ‘선진국에서 배우자’는 자신들의 경전만 읊는 이들이 대다수다. 중화(中華) 질서가 천년만년 갈 것이라 믿은 구한말 양반과 비교해 나은 것이 하나 없다. 당시 조선은 가난하고 힘이 약하기라도 했지, 건국 세대가 일으킨 오늘날 부강한 대한민국에 살면서 안주하는 이들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고 해야 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편에는 은(殷)에서 주(周)로 천명(天命)이 옮겨왔음을 상찬하는 구절이 있다. 주나라가 오래되었으나 그 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는 구절이다.
 
  대한민국도 곧 건국 80주년을 맞이하는 오랜 나라다. 필자의 선배 세대들은 자부심을 가져 마땅한 위업도 세웠다. 그러니 혁명이 필요한 나라는 아니다. 다만 명(命)을 새롭게 해야 할 따름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수가 이어받은 명은 완전히 파산했다. 이를 복원해 내는 데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지 알 수 없지만,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절박함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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