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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한미동맹의 산파역 월터 로버트슨이 본 정치가 이승만

“1940년 영국에 처칠이 있었듯 1950년 한국에 이승만이 있었다”

글 : 신용석  언론인·로버트슨기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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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젠하워·덜레스, 이승만을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애국자로 인식”
⊙ “미국이 상대한 전 세계 동맹국 지도자 중 가장 힘든 인물이었지만 많은 존경을 받았다”
⊙ 월터 로버트슨,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 정부를 접수하나”라며 이승만 축출 작전 반대
⊙ 국무부-합참, 로버트슨의 반대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분위기 급선회
⊙ 이승만, 로버트슨 특사 방한 받아들인 다음 날 반공포로 석방 단행
⊙ 이승만과 20일간 12차례 회담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길 열어
⊙ “이승만은 동양과 서양의 고전들을 폭넓고 깊게 읽은 학자, 매력적 화술을 지닌 지식인, 낚시의 대가, 위대한 철학자”

愼鏞碩
1941년생. 서울대 농생명대 화학과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수료,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프랑스 특파원·국제부장·사회부장·논설위원, 한국인권재단 초대 이사장, 인천 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 現 인천개항박물관 명예관장, 인천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국제협력특보 / 국민훈장 동백장, 체육훈장 맹호장,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 《특권이 통하지 않는 사회》, 《현장에서 본 프랑스 교육》 《영국사》(역서), 《미국사》(역서), 《프랑스사》(역서)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 미 국무부 극동차관보.
  1953년 5월 29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 연석회의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운명과 대한민국 현대사의 결정적 갈림길이 되는 중대한 모임이었다. 이날 회의는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뿐 아니라 백악관과 국방부 및 중앙정보부(CIA) 등 5개 부처에서 총 19명이 모인 범(汎)부처 고위급 합동회의였다. 한국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한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개성에서 시작된 휴전회담이 2년이나 경과되었으나 한국 정부의 휴전 반대와 포로송환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을 때였다.
 
 
  ‘에버레디’ 작전
 
  따라서 아이젠하워 새 행정부로서는 휴전회담 진척을 방해하는 요인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마련한 것이 에버레디(Ever-ready) 작전이었다. 이 계획은 1952년 7월 트루먼 대통령 때 터졌던 부산 정치 파동의 막바지에서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기획했다가 발췌개헌안이 통과되면서 폐기되었던 이승만 정부 전복 계획을 보완한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 백선엽(白善燁) 참모총장이 미국 정부 초청으로 워싱턴에 와 있었다는 사실은 새로 만들어진 에버레디 작전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구금한 후 백선엽 참모총장을 내세우려는 미국의 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좌였다.
 
  고위급 합동회의가 시작되자 J. 로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이 첫 번째 발언에서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대통령 이승만을 감금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극단적인 비상조치 계획을 마련했고 우리와 협력할 수 있는 백선엽 한국 육군참모총장이 미국에 와 있다”고 말했다. 콜린스의 발언에 이어서 국무부의 긴급대책 담당관 매튜스 부차관보와 동아시아 담당 존슨 부차관보의 발언이 이어졌고 CIA 부국장인 찰스 캐벌 장군의 한국 현지 정세 보고가 있었다. 위클리어 클라이드 에들먼 육군본부 기획국장이 에버레디 작전의 세부사항을 브리핑하면서 긴급사태에 대처하는 유엔군이 취할 제반 조치들을 열거했다. 가장 중요한 핵심 조치는 이승만 대통령을 구금하고 계엄을 선포한 후 한국 육군으로 하여금 계엄을 시행하고 불복종하는 민간 지도자들과 군사령관들을 미국 8군 사령관에 충성하는 세력이 구금하여 유엔사령부 휘하의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로버트슨 차관보의 폭탄선언
 
  에들먼 기획국장의 에버레디 작전 실시를 전제로 한 세부 작전 계획 브리핑이 끝나자 국무부의 동아시아 담당 월터 로버트슨 차관보가 발언을 시작했다.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으로부터 동아시아 담당으로 임명된 지 한 달 조금 지난 시기여서 위싱턴 고위 관료들에게는 낯선 인물이었다. 로버트슨은 버지니아 출신 기업가로 제2차 세계대전 시 미국 정부의 렌드 리스 프로젝트(Lend-Lease·무기대여) 담당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근무했다. 이후 중국 주재 미국대사관의 차석과 대리 대사를 역임하면서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는 과정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던 증인이기도 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 정부를 접수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입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저는 순전히 군사적인 관점에서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일련의 행동을 고려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승만에게 한국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충분한 기간 동안에는 어떤 행동을 유보하는 조건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날의 회의 목적이나 분위기로 미루어볼 때 로버트슨의 발언은 폭탄선언과 같았다. 클라크 사령관이 마련한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는 에버레디 작전의 부당성을 직설화법으로 갈파한 로버트슨의 발언을 계기로 연석회의 분위기와 방향은 확연히 달라졌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급선회
 
이승만 대통령과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사진=대통령기록관
  미합중국 정부 고위급 연석회의에서 문관(국무부)의 견해가 무관(국방부)의 계획을 재고(再考)하게 만들면서 휴전의 전제조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갈망했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대안(代案)으로 제시하게 된 것이다. 해군참모차장 던캔 제독은 “이승만 대통령을 정상 위치에 남아 있게 하기 위해서는 안보조약을 체결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참석자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는 회의 결론으로 에버레디 작전을 포함한 복수안(複數案)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서 에버레디 작전 계획이 채택되지 않은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었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기획하여 군부(軍部)가 추진하려던 에버레디 작전이 그대로 실현되었더라면 대한민국에서는 대혼란이 일었을 것이다. 공산군과의 전쟁 수행에도 혼전이 야기되어 대한민국이 소멸할 수 있는 극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월터 로버트슨의 냉철하고 올바른 판단과 주장은 이승만 대통령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대한민국의 안전과 이를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국무부와 사전에 충분한 협의 없이 마련된 에버레디 작전이 로버트슨 차관보의 문제 제기로 논란이 빚어지고 대통령에게 복수의 건의안을 올리기로 한 다음 날인 5월 30일에는 한미방위조약 체결 토의를 위한 회의가 국무부 장관실에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는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을 위시하여 합참을 대표해서 육군참모총장, 국무차관, 국방부 국제안보차관보, 국무부 극동차관보, 육군본부 G-3(작전·계획참모) 담당 참모차장, 국무부의 존슨 부차관보, 국방부 해외군사국 북동아시아과장 찰스 설리번 총 9명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 분위기는 전날 열렸던 국무부와 합참 연석회의와는 달라져서 한국 정부가 휴전협정 체결과 시행에 동의하고 한국군을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둔다는 조건으로 미국과 필리핀 간의 방위조약과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간에 맺은 ANZUS 조약과 같은 수준의 안보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을 한국 측에 제안하도록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회의가 끝난 후 국무차관을 제외한 참석자들은 백악관으로 가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다.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건의하고 대통령이 즉석에서 이를 재가(裁可)했다. 역사적 사건이 현실화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만나보지도 못했던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과 미국 국무부 로버트슨 극동차관보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이뤄내는 역사적인 동반자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승만, 미국을 힐난
 
  한국과 미국 간에 상호방위조약 체결 방안을 재가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주일이 지난 1953년 6월 6일자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통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휴전협정 체결에 협조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유를 보존하고 공산 침략에 저항하는 한국의 희생과 투쟁에 찬사를 보낸다”면서 “한반도에서 침략자들을 격퇴하고 평화를 회복하는 것은 휴전에 의해서 달성될 것”이라고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에 회신을 보내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브릭스 주한미국대사를 통해서 “20세기 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 후 분단되었고 궁극적으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침략을 받게 된 것은 미국의 실책(失策) 때문이었다”고 지적하면서 현 상태에서 휴전을 서두르고 있는 미국을 간접적으로 힐난했다.
 
  휴전과 함께 상호방위조약, 한국군 증강, 경제원조 등을 언약했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송환 문제와 인도 등 중립국 감시단 입국 불가 등을 거론하면서 미국을 계속 당황하게 만들었다. 미국 국방부는 폐기했던 에버레디 작전 계획을 수정하여 또다시 비상대책을 수립했고 국무부는 이승만의 미국 공식 방문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로버트슨 특사 수용한 다음 날 반공포로 석방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실린 《조선일보》 1953년 6월 20일 자 1면이다.
  1953년 6월은 이같이 긴박한 기류가 한미 간에 팽배했던 시기였다. 자신의 미국 방문은 전시(戰時) 중이어서 불가(不可)하다면서 대신 덜레스 장관의 한국 방문을 제의했던 이 대통령에게 미국은 월터 로버트슨 차관보를 특사(特使)로 파견한다고 통보했다.
 
  로버트슨의 특사 발탁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를 위한 묘수였다. 덜레스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신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신뢰를 받고 있고 중국 공산당에 확고하게 반대했던 로버트슨이 휴전 이후 미국의 정책에 관해서도 명확하게 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이 이를 흔쾌히 수락함으로써 에버레디 작전 취하로 운명적인 관계가 맺어졌던 두 인물의 서울 상봉이 현실화되었다.
 
  로버트슨 차관보를 특사로 맞겠다는 결정을 미국 측에 통보한 다음 날인 6월 18일 새벽 5시를 기해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논산·부산·마산·광주(光州) 4개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있던 2만7000명의 반공포로가 석방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게 반공포로 석방의 불가피성과 사전에 예고하지 않은 이유를 알렸다. 이 대통령은 사전통고했다면 클라크의 입장만 난처하게 만들고 반공포로 석방 계획이 전면 와해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미국은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경악했다. 워싱턴에서 개최된 국가안보회의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런 행동을 계속한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만이 아니라 서방 세계 전역과 유엔에도 충격을 주었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한국 정부에 공문을 보내 항의하기도 했다.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가 끝난 후 국무부에서는 덜레스 장관과 로버트슨 차관보가 양유찬(梁裕燦) 주미대사와 방미(訪美) 중이었던 백두진(白斗鎭) 국무총리를 초치해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을 비난하면서 귀국 후 대통령에게 미국 정부의 입장을 보고하고 앞으로 이 같은 불행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최후통첩’ 논의한 도쿄 회의
 
  이런 상황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특사로 결정된 월터 로버트슨 차관보는 6월 23일 워싱턴을 떠나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전쟁 중인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 향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서울로 가기 전에 일본 도쿄(東京)에서 관계자들과 회합을 가졌다. 유엔군 총사령관실에서 열린 전략 모임에는 그와 함께 한국으로 가는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매카들 국무부 차관보, 케네스 영, 존 칼훈, 밀번 장군, 트록모스와 코닌 대령 등 국무부와 국방부 간부들 및 일본 현지에서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브릭스 주한대사, 머피 휴전 담당 특별고문 총 11명이 참석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로버트슨의 방한(訪韓) 중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이승만이 미국에 대해 비타협적인 정책을 지속한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하는 길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하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워싱턴에 요청하기로 합의했다. 한마디로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을 조속히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뜻에 따라 휴전협정을 가급적 조속히 체결하는 것을 급선무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에 대한 최후통첩 카드가 필요했던 것이다.
 
 
  로버트슨과 이승만의 첫 대면
 
  북한 공산군의 기습공격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꼭 3년째 되던 1953년 6월 25일 저녁시간에 로버트슨 일행은 서울에 도착했다. 여의도의 서울공항에서 로버트슨 특사는 “미국과 한국 두 나라의 목적은 동일하며 이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수단이 무엇인가를 조정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6월 26일 오전 9시25분 로버트슨 특사와 일행은 대통령 관저 경무대에 도착해서 한국군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하여 백두진 국무총리,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 신태영(申泰英) 국방장관, 손원일(孫元一) 해군참모총장 등 한국 정부 수뇌부의 환영을 받았다. 약 한 달 전인 5월 29일 워싱턴에서 열렸던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 연석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퇴진시키는 에버레디 작전을 무효화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월터 로버트슨과 이승만이 최초로 상면하는 역사적인 자리였다. 이승만으로서는 에버레디 작전을 모르고 있었고 로버트슨으로서는 이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운명적으로 엮인 이승만-로버트슨의 첫 만남은 확대회담과 단독회담으로 연속되었지만 회담의 앞길이 험난할 것 같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제1차 회담을 1면 머리기사로 내보내면서 ‘로버트슨 특사의 침통한 표정과 외교 소식통의 낙관을 불허하는 전망으로 볼 때 한미 두 나라의 견해차가 크다’고 분석했다.
 
  제1차 회담이 끝난 후 로버트슨이 세 차례에 걸쳐 국무부에 올린 보고서를 보더라도 제1차 회담이 결코 순조롭지 못했고 앞길도 순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을 갖게 만든다. 미국 국무부 문서에 의하면 로버트슨 특사는 한국 정부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으로 워싱턴과 자유세계에서 조성된 불안한 여론에 대해 언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측이 초안한 휴전협정 조항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불만을 표명했다.
 
  로버트슨의 제의에 따라 대통령 집무실에서 50분간의 단독회담이 열렸다. 확대회의 때와는 달리 이승만 대통령은 이 시점에서 한미 양국의 분열은 있을 수 없으며 계속적인 협력을 위해 두 나라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단독회담에서도 로버트슨 특사가 휴전을 위한 미국 정부의 입장을 거듭 설명하고 설득하자 이 대통령은 휴전만 주장하지 말고 한국이 요청하는 전제조건에 대해서 보다 심도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휴전을 위해 제기했던 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증강 및 경제지원 문제는 합의된 사항이지만 휴전 후 개최되는 정치회담의 시한과 포로 문제에 협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승만, 상황 판단 빠르고 지략 있지만 감정적”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은 20일 동안 12차례 만난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합의했다.
  이승만-로버트슨 담판은 일요일인 6월 28일에도 계속되면서 원칙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시점까지도 쟁점이 되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틀 뒤인 30일의 제5차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이 끝난 후 개인적인 의견과 관찰이라고 전제하고 로버트슨 차관보가 국무부에 보낸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첫 만남이지만 예리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읽힌다.
 
  〈① 이승만 대통령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지략이 있지만 자기 나라를 자살로 몰고 갈 수 있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논리적인 광신자이다.
 
  ② 그는 휴전협정안을 공산주의자들이 군사행동으로 달성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협상으로 쟁취하려는 능숙한 계책이라는 깊은 확신을 갖고 있다.
 
  ③ 그는 미국과 동맹국들의 계속적인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고 미국과 세계 각국에서 비판을 받는 것을 알고 있다.
 
  ④ 그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이 그가 일생을 바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야 한다.
 
  ⑤ 그의 협력은 아직도 가능하지만 그를 돕는 동시에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⑥ 이승만은 그의 나라를 미국을 포함한 여타 국가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공산주의와 싸울 결의와 의지를 지니도록 각성시켜놓았다. 이 같은 정신과 용기는 보존되어야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1945년부터 중국 주재 미국대사관의 공사와 대리 대사직에 있으면서 마오쩌둥(毛澤東)과 만나서 휴전협상에 참여했던 로버트슨은 미국의 무원칙적인 중국 정책이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던 외교관이었다. 로버트슨 특사는 인간 이승만의 생애와 통일 한국에 대한 열망, 그리고 공산주의와 그에 못지않게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증오감을 충분히 이해하였다. 그럼에도 휴전을 위한 전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국무부에서는 7월 3일 협상을 중단하고 귀국해도 좋다는 훈령을 로버트슨 특사에게 하달하였다. 그러나 로버트슨 특사는 협상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대신 이승만과 협의를 계속해나갔다.
 
 
  20일 동안 12차례의 험난한 협상
 
1953년 8월 3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假)조인식 후 악수를 나누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 두 사람 사이로 이승만 대통령이 보인다. 오른쪽 끝 나비넥타이 맨 사람이 로버트슨 차관보.
  그해 7월 11일에 열린 제12차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에서는 그동안 이견을 보였던 정치회담, 포로 문제, 상호방위조약 조속 체결 등에 합의해 12차례 계속된 회담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드디어 7월 12일에는 서울과 워싱턴에서 상호방위조약, 포로 문제, 정치회담 조건, 한국의 자유·독립·통일을 위한 공동 노력 등에 합의했다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던 에버레디 작전을 취소시킨 당사자인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극동차관보 자신이 대통령 특사로 한국으로 와서 20일간 머물면서 이룩한 힘든 합의였고 한미동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8월 3일 덜레스 국무장관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다. 처음 한국에 와서 이승만 대통령과 12차례의 긴박했던 협상을 할 때와는 달리 다소 여유 있는 분위기 속에서 4차례에 걸쳐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 등을 협의하고 8월 8일 경무대 홀에서 방위조약 가(假)조인식을 거행했다.
 
 
  이승만-로버트슨, 동지적 관계로
 
  다음 해인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공식 방문했을 때는 로버트슨 차관보가 와병(臥病) 중이어서 아쉽게도 상면할 기회가 없었다. 이런 와중 1956년 12월 로버트슨 차관보는 그의 배우자와 함께 동북아시아 제국(諸國)을 순방하면서 한국에 와서 이 대통령을 만났다. 귀국 직후 이승만에게 보낸 서신(12월 29일 자)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3년여 만에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며 협력하는 동지적 관계로 승화된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대통령 각하: 지난번 장기간 힘든 여행 중에서 각하와 영부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보람 있는 기회였습니다. 본인은 특히 각하와 한미 두 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공동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던 것을 매우 뜻있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각하의 견해는 미국의 신뢰하는 동맹국이며 자유를 위한 용맹한 투쟁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본인과 저의 배우자는 우리의 소중한 우정을 상기하면서 각하의 우아한 영접과 아름다운 선물에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부부는 각하 내외분께 깊은 감사와 함께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1956년 12월 29일 월터 S. 로버트슨(서명)〉
 
  1957년 6월 로버트슨 차관보는 배우자를 동반하고 반년 만에 또다시 한국을 찾았다. 1953년 6월 특사 자격으로 방한한 지 4년 만에 네 번째로 서울을 찾은 것이고 그의 마지막 방한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보낸 친서를 보면 국무부 극동차관보로서 휴전 후 한국군의 증강과 경제원조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로버트슨 귀하: 미국이 한국에 현대식 무기를 제공하는 결정을 접하면서 귀하의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우선 상기했습니다. (중략) 이 기회에 귀하의 현 상태에 대한 우려와 함께 지속적인 지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 국민은 미국의 경제원조 없이도 생존할 수 있겠지만 미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자유국가국민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자유를 위해서 귀하의 우정과 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와 함께 귀하의 배우자를 동반한 방문을 즐겁고 기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가까운 장래에 다시 방문해주시기를 소망하면서 제 배우자도 로버트슨 여사께 따듯한 인사를 보냅니다. 1957년 6월 28일 이승만(서명)〉
 
 
  로버트슨, 6년 만에 극동차관보 퇴임
 
  월터 로버트슨 차관보는 덜레스 국무장관이 1959년 4월 22일 건강상 이유로 장관직에서 물러나 워싱턴의 월터 리드 미군병원에 입원 후 한 달 후인 5월 22일 세상을 떠난 후 자신도 6월 30일 6년여 동안 맡았던 극동담당차관보 자리에서 물러났다. 고향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로 돌아간 로버트슨은 격동기에 미국의 동아시아 담당 최고위 외교관으로서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레일리아와 중국의 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현장에서 축적된 방대한 개인 자료들을 정리하여 버지니아 역사학회에 보존 자료로 기증했다. 그는 미국 각지에서 열리는 학회와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실시하는 강연 구술 역사 녹취 대담에도 진지하게 응하면서 미합중국의 의식 있는 시민으로 또한 공직자로서 자신의 경험이 국가와 사회에 활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1965년 7월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월터 로버트슨은 덜레스 장관의 출신 대학인 명문 프린스턴대학교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구술 역사 프로젝트의 하나로 기획된 필립 크로월(군사 역사 전문가) 교수와의 대담에 장시간 임했다. 6년간에 걸친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 시절과 제2차 세계대전과 중국 내전 당시 자신의 경험과 역할은 물론 만났던 인물들에 대한 가감 없는 솔직한 평가는 그의 안목과 인품 그리고 미합중국을 대표하는 공인으로서의 자세를 돋보이게 만든다.
 
  특히 이날은 국무부 차관보가 된 지 한 달여 만에 한국으로 와서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난 지 12년째가 되며 이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나 유해가 김포공항에 도착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생전에 한 국가와 그 지도자의 운명이 뒤바뀔 뻔했던 과정과 순간의 주인공이던 인물이 역사를 구술하던 날이 1965년 7월 23일이었다는 것도 운명적인 일치로 읽힌다.
 
  로버트슨 프린스턴대학교 구술 자료는 총 112페이지에 이른다. 그중 한국 관계는 13페이지에 불과하지만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을 위해 서울에 와서 긴박했던 협상 기간과 인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그 어떤 기록보다도 생생하고 인상적이다. 대담 내용을 정독해보면 로버트슨이라는 인물이 이승만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을 받고 있던 신생 독립국에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다음은 로버트슨 구술 자료의 내용이다.
 
 
  덜레스 장관 대신 한국서 회담
 
1953년 휴전을 앞두고 전국에서는 휴전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조선DB
  〈▲크로월: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로 취임했을 때는 한국 문제가 매우 긴박한 시점이었는데 그때 상황을 말해주십시오.
 
  ▲로버트슨: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취임 후 첫 번째 과제는 한국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후보 시절 대통령은 지루하고 인기 없던 한국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한국에 다녀왔고 취임 후에는 휴전을 첫 번째 당면 목표로 삼았습니다.
 
  휴전협상은 중국 공산당군이 참전하여 아군이 압록강까지 진군한 후 다시 후퇴했다 서울을 탈환한 후인 1951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전선에서는 밀고 당기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38선 이북으로의 진군을 억제하고 공산 측으로부터도 휴전 분위기가 감지되면서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휴전에 대한 합의를 보고 포로교환 문제도 해결될 즈음인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기습적으로 2만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습니다. 그는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발표했고 한국 국회도 만장일치로 휴전 반대를 결의했습니다. 한국 군대가 전선의 2/3을 맡고 있는 현실에서 이 같은 상황은 미국뿐 아니라 휴전을 추구하는 쪽에는 급박한 상황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휴전 반대 시위가 한국 전국에서 벌어지고 이 대통령은 휴전을 통해서 공산군들은 북한에 계속 자리 잡고 증강되면 한국으로서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한국을 또다시 멸망시키려는 공산군에 기회를 줄 수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백악관에서 열린 긴급회의에서 덜레스 국무장관은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신랄한 항의 각서를 보냈고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도 규탄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심각함을 인식한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서울로 특사 파견을 타진한 결과 이 대통령은 덜레스 장관의 파견을 요망했으나 결론적으로 본인이 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단독회담 제의
 
  6월 23일 워싱턴을 떠나 도쿄를 경유해서 25일 서울에 도착하니 1945년 중국에서 알게 된 브릭스 씨가 주한미국대사로 있어서 이승만 대통령과 첫 번 만남에 동행했습니다. 브릭스 대사와는 여러 차례 만났겠지만 나는 처음 만남이었습니다.
 
  일행과 회의실에 들어서니 이승만은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을 보는 순간 그가 발표했던 끔찍했을 반공포로 석방 규탄 성명에 대해 근 반시간에 걸쳐 장황하게 비난을 퍼부었는데 간질로 발작을 일으킨 사람 행태처럼 보였습니다. 이승만은 그 후 매우 절친하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했지만 브릭스 대사와 좋지 않은 관계였는데 당시에는 많은 사람과도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그는 우호국가들 특히 미국에 대해서 그 당시에는 반감을 지니고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휴전을 모색하고 공산군을 강화시키는 것을 극구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대면에서 모든 사안과 많은 사람에 대한 불만을 장광설조로 분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의전 절차를 무시하더라도 그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브릭스 대사나 클라크 사령관의 배석 없이 단독회담을 제의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양해와 이해를 구했습니다. 클라크 장군은 곧 이해했으나 브릭스 대사는 한국 주재 대사로서 곤혹스러워했지만 본인의 임무가 의전 원칙 이상으로 막중함으로 끊임없는 비난과 여러 사안에 대한 이승만의 불만을 잠재우고 피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후 12차에 걸친 회담 끝에 제반 사항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본인은 이 대통령과 단독회담에 임했습니다. 본인은 전략적으로 그의 불만과 불안을 모두 경청하기 이전에는 그에게 본인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무용지물이라는 확신에 도달했습니다. 매일 아침 대통령 관저로 향하는 대로에서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또는 “공산군과 휴전 결사반대” 같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군중을 보면서 관저에 도착해서는 한두 시간 협상을 계속했습니다. 본인은 이 대통령의 말을 경청하기로 결심했고 회담이 시작된 지 7~8일 동안 주로 듣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그는 할 말을 모두 한 것 같았고 그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승만, 휴전협정 서명 거부
 
  그때 본인은 대화를 시작하면서 미국이 그를 버리고 떠난다는 두려움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확약한 대로 휴전 후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경제원조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미국이나 유엔은 한국 통일을 목표로 계속 전쟁을 할 수 없으며 남침 이전의 상태로 복원하기 위해 협력했고 공산군들이 38선 이북으로 퇴각했기 때문에 휴전 후 정치회담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정치회담을 통해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의 통일을 모색해야 하며 군사력으로 통일을 시도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이승만은 당시 우리를 궁지로 몰기 때문에 미국이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것을 지원할 수 없다고 해도 북진을 감행한다면 공산군들에 의해 전선 2/3가 전멸될 테고 그렇게 되면 우리 미국 군대의 철수가 난관에 봉착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설혹 미국이 그와 함께 압록강까지 진군한다고 해도 미군도 유엔군 산하에서 유엔 결의안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우방 참전국들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대통령에게 한국군을 계속 유엔군 산하에 소속되게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한국군의 일방적인 북진은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야만 했습니다.
 
  본인과 이승만의 회담은 12차례 계속되었고 끝내는 그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은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라면서 끝내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에게 보내는 친서를 준비했습니다.
 
  그 친서 내용은 그의 요청에 따라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휴전협정을 준수하고 한국군을 유엔군 산하 소속으로 존치시키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가 친서 내용 발표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알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대통령은 항상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데 그들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계속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고 우리는 그의 말을 존중했으며 본인은 그의 뜻대로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신승일 로버트슨기념사업회 회장이 본 로버트슨 차관보
  “중국에서의 경험 바탕으로 국제 공산당의 속성 인식”

 
신승일
1938년생. 서울대 화학과 졸업, 미 브랜다이스대 이학박사(생화학, 세포생물학) / 네덜란드 라이덴국립대 인류유전학연구소 연구원, 스위스 바젤면역학연구소 연구원, 미 알버트아인슈타인의과대 유전학과 교수, 서울대 교환교수, UNDP 수석보건자문관, 국제백신연구소 설립 총괄대표, 한국어린이재단 이사·대표이사
  첫째, 로버트슨 씨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인도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인사였다.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의 고위급 인사들이 일반적으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을 휴전협정에 결사반대하는 “고집이 세고 비타협적인 나이 든 노인” 정도로 치부하고 있을 때, 로버트슨 씨는 이승만 박사가 조국의 독립과 안보를 보장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진정한 애국자로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분 사이에 인간적인 유대가 쉽게 형성되고 또 오래 계속될 수 있었다.
 
  둘째, 로버트슨 씨의 진보적인 입장은 그분이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의 다른 신생 독립국가들을 지지하고 독립을 이끈 지도자들을 존중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1950년대에 서양 강국들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대부분 백인 우월주의와 식민 시대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로버트슨 씨는 예외적인 경우다.
 
  셋째로, 로버트슨 씨는 시대에 앞서 나가는 글로벌 안목을 가진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교육, 종교와 중국에서 외교관으로 중국 공산당을 상대했던 경험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분은 국제 공산당의 속성을 일찍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많은 서양 지식인들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사회주의 전통 속에서 극히 순진하고 낭만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로버트슨 씨는 공산주의 정치 세력의 위험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 앞장서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한국에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에 로버트슨 씨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국무부의 극동문제담당 차관보로 있었다는 것이 큰 행운이었다.
 
  국무부, ‘희망 없으면 귀국하라’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부인과 함께 장기간의 회담이 끝난 후 미국대사관에서 마련한 리셉션에 참석했으며 다음 날 아침 본인이 한국을 떠나 워싱턴에 귀임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거리에는 수많은 시민이 성조기를 흔들며 작별해주었습니다. 그는 시위대를 좌우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운집한 보도진에게 짧고 간단한 출발성명을 발표하자 기자 중 한 명이 건네준 신문을 보니 이승만과 회견한 짐 루카 특파원의 기사가 크게 실려 있었는데 휴전협정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휴전에 동의한다는 이 대통령의 친서를 공표하는 것이었지만 운집해 있는 보도진에게 귀국해서 미국 대통령에게 이 대통령과의 회담 결과를 보고할 것이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 세계 언론에서는 특히 친서의 내용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지만 그 후 언론인 도노반 씨가 백악관의 내부 이야기를 쓰면서 친서에 대해서도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크로월: 덜레스 장관은 자주 훈령을 보냈습니까.
 
  ▲로버트슨: 아닙니다. 아무도 본인의 전술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매일 이 대통령 관저에서 회담을 끝내고 나오면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취재기자들이 운집해 있었으며 본인에게 발표를 요청했으나 항상 “노 코멘트”로 일관했습니다. 본인이 기자들에게 회담 내용을 발표하는 순간 나이 많은 대통령이 격노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회담 첫 번째 주에는 아무 소득이 없었지만 기자들에게 우리 연합군들이 협상이나 휴전 시도에 대해 두 시간에 걸친 반대말만을 듣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 코멘트”를 연발했으며 국무부에 대해서도 같은 대답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국무부로부터 희망이 없으면 귀국하라는 훈령을 받고는 “때가 되면 협상을 파기할 준비는 하고 있지만 아직은 파기할 생각이 없다”고 회신했습니다. 본인은 대통령과 국무장관으로부터 완벽한 훈령을 받고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훈령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의 친서도 가지고 왔었습니다. 따라서 본인의 훈령은 명백했으며 별도의 훈령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없었으면 오늘날 대한민국 없었을 것”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참석을 위해 방한한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이승만 대통령. 사진=대통령기록관
  ▲크로월: 귀국 후 덜레스 장관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로버트슨: 그는 본인의 임무가 성공적이어서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그는 각료회의와 백악관에서도 본인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데 대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덜레스 장관과 본인은 텔레비전 방송에 함께 출연해서 미국 국민들에게 이 대통령과의 협상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크로월: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습니까.
 
  ▲로버트슨: 우리는 기본적으로 유사한 조약이 있었기 때문에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월터 S. 로버트슨(1893~1970) 약력
 
   1893        버지니아주 노토웨이 출생(부친 연초 사업자)
  1910        헤지(Hedge) 군사아카데미 수료
  1912        윌리엄·매리 대학 중퇴 후 은행업 종사
  1914        제1차 세계대전 때 육군 전투기 조종사 출전
  1918        버지니아 리치먼드 은행 근무
  1943        제2차 세계대전 시 호주 무기 대여 사절단 책임 맡음
  1945        워싱턴 국무부 경제고문
  1945        샌프란시스코 유엔 회의서 존 포스터 덜레스 만남
  1945        충칭(重慶) 소재 미국대사관 공사 취임
  1946        미국대사관 대리 대사로 근무
                국공(國共) 합작 협상 위해 옌안에서 마오쩌둥 만나 회담
  1947        미국 귀환 후 버지니아 투자은행과 역사학회 근무
  1953. 4월   국무부 극동(동아시아) 차관보 취임(월터 저드 의원 추천)
  1953. 5월   워싱턴 국무부·합참 연석회의서 에버레디 작전 비판
  1953. 6월   휴전협정 타결 위해 특사로 한국행
  1953. 7월   이승만 대통령과 20일간 12차례 회담 후 상호방위조약 합의
  1953. 8월   덜레스 국무장관과 방한,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1954        클리블랜드 국제 학회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 강연
  1956        동북아 순방 중 배우자와 함께 한국 방문, 경제 원조 협의
  1957        배우자와 함께 한국 방문, 한국군 증강 협의
  1959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 사임, 리치먼드로 귀향
                4만여 점에 달하는 개인 소장 자료, 버지니아 역사학회 기증
  1970        고향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영면
 
  “정치인 이승만은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애국자”
 
  ▲크로월: 한국과의 관계에 불필요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덜레스 장관은 한 인간으로 또한 정치인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어떻게 보고 평가했는지요.
 
  ▲로버트슨: 덜레스 장관은 물론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또한 나이 많은 한국의 정치인 이승만을 가깝게 아는 많은 사람은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애국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 생애를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인물도 아니며 자신을 위해서 권력을 추구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수많은 난관을 거치면서 투옥당하기도 했습니다. 왕조 시대에는 한국을 개혁하는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구금당했고 일본인들에 의해서 국외로 추방당해서 3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크로월: 그는 고문도 받았지요.
 
  ▲로버트슨: 고문을 당했던 흔적이 아직도 그의 손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전 생애를 그의 나라의 자유를 찾기 위해 헌신한 사람입니다. 본인은 나이 많은 그분에게 매료당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협상을 위한 만남이었지만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그가 과격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을 때는 완벽하고 매혹적인 성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을 함께 아우르는 고전학자이며 동양과 서양의 고전들을 폭넓고 깊게 읽은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한국의 미래와 관련된 정치적 대화가 아닐 때에는 매력적인 화술을 지닌 지식인입니다. 그는 낚시의 대가이기도 한데 고기를 잡는 것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며 휴식을 취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같은 매혹적인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완고하고 반항적이며 힘겨운 또 다른 성품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는 또한 실패 후에도 포기할 줄 모르는 의연한 정신을 지닌 인간이기도 합니다. 북한은 1950년 기습공격을 가해서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파괴와 혼란 그리고 파멸을 초래했으며 이 작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14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열정과 설득 그리고 불굴의 정신이 없었다면 한국 국민들은 단결해서 침략군들을 퇴각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인 판단으로는 1940년에 영국에 처칠이 있었듯 1950년에 한국에 이승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40년 영국에서 처칠의 포기할 줄 모르는 불화 같은 감동적인 연설과 의연한 정신이 없었다면 사태는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이승만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는 독재자였고 결점도 있었습니다. 그는 협의할 사람이 없을 때에는 홀로 결정하고 침략군에 밀리고 있을 때는 국회에 나가서 토론할 수도 없었기에 독재적인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계속 많아지면서 이 같은 결점이 더욱 심화되었고 판단이 흐려지면서 부도덕한 정치인들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일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간의 비극이었고 선거 부정과 부도덕한 일에 연루되는 나이 많고 노망 든 사람으로 이용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듣기 좋은 말만을 듣는 구금된 권력자였고 부정직한 정치인들은 그의 이름을 이용하기만 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비극이었으며 그가 미리 은퇴했어야 했기에 수년 전 미국은 이 같은 징조를 감지하고 자신의 조국과 자유세계에 최상의 기여를 한 연로한 지도자에게 정권을 포기하고 은퇴할 것을 소망했습니다. 이승만 같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불가능한 지도자는 없었으며 그는 공산주의자들 다음으로는 일본을 증오했으며 결코 일본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크로월: 덜레스 장관은 이 같은 사실들을 알면서도 그를 존경하고 있었습니까.
 
  ▲로버트슨: 물론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함께 두 사람은 이승만을 크게 존경했습니다. 그는 휴전협상을 엉망으로 힘들게 만들었지만 이것은 오로지 통일 한국을 염두에 두고 다른 측면은 도외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국이 상대한 전 세계 동맹국 지도자 중 가장 힘든 인물이었지만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본인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덜레스 장관으로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성미 고약하고 어려운 사람이라는 비판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그에 대한 존경하는 말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은퇴 시점 놓친 것이 말년의 비극”
 
  크로월 교수와의 대담 후반부에서 로버트슨은 4·19 학생혁명으로 퇴진하여 또다시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5년간을 지내다가 서거한 인간 이승만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에버레디 작전을 무효화시키는 데 앞장섰고 급박하던 1953년 6월과 7월에 한국에 와서 힘든 협상을 매듭지을 수 있었던 월터 로버트슨이 없었다면 한반도 상황은 또다시 혼란해졌을 것이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한 한미동맹의 탄생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휴전 71주년을 맞아 선진 대열에 진입한 대한민국이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공헌을 제대로 평가하고 인식하자는 시점에서 로버트슨의 존재와 역할 또한 재인식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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