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을 통한 국가·국민 생활 향상이 자민당 1강 장기체제의 기반이자 근본 이념
⊙ 아베노믹스 시행 과정에서 자민당의 지역 지지 기반인 ‘풀뿌리 경제단체’와 긴밀한 협의
⊙ 자민당 지지자들은 대를 이어가는 ‘族당원’들… 민주당은 풀뿌리 기반 약해
⊙ 한국 좌파, 이권 카르텔 구축 성공… 보수도 “어떤 이익 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 아베노믹스 시행 과정에서 자민당의 지역 지지 기반인 ‘풀뿌리 경제단체’와 긴밀한 협의
⊙ 자민당 지지자들은 대를 이어가는 ‘族당원’들… 민주당은 풀뿌리 기반 약해
⊙ 한국 좌파, 이권 카르텔 구축 성공… 보수도 “어떤 이익 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 2016년 7월 10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다음 날 기자회견을 하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최근 5년 만에 서울에 들렀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과거에는 들을 수 없었던 기묘한 질문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었다. “우(右)인가 좌(左)인가, 보수인가 진보인가”라는 단도직입형 물음이다. 30여 년 전 미국에 처음 갔을 당시 자주 들었던 “당신은 공화당, 민주당, 어느 쪽인가”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기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국에서처럼, 상대의 의견을 듣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이냐, 적(敵)이냐’를 가늠하기 위한 테스트로서의 질문일 뿐이다. 한국 정치의 상식이지만,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다. 중간은 없다. ‘우리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으로 취급된다. 우리 편이 아닌 이상, 서로 얘기를 나눌 이유도 목적도 사라진다. ‘소통’이란 단어는 신문·방송의 키워드일 뿐, 현실은 ‘단절’ 그 자체다.
미국인의 정치 성향은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나타난다. 총기 보유, 동성애, 이민, 낙태, 정부의 역할, 무역 정책, 자유와 공정 등에 관한 개개인의 판단이 정치 성향의 기준점이다. 부분적으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보수, 리버럴, 중도로 구분한다. 한국에서 접한 좌우의 개념은 칼로 가르듯, 흑백으로 확연히 나누어져 있다.
한국 보수의 활력 재생·재구성에 관한 얘기가 많다. 여기저기서 대안(代案)도 많고 논의도 활발하다. 필자까지 거들자면, ‘좌우를 넘어선, 국민 전체에 맞춰진 정책 발굴’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너무나 뻔한 답으로 들릴 듯하다.
정답은 ‘돈’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가 좌우 모두를 만족시킬 만병통치 정책이 될 수 있을까? 2024년 글로벌 차원에서 본 정답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다. 바로 돈, 즉 경제다. 부연하자면, 당장 내 손안에 꽉 잡히는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현실로서의 돈’이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머릿속에 떠도는 이념·이상(理想)’이 아니다.
정치인 아니 정치에 관심 있는 한국인치고, 필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달라진다. ‘돈과 경제’가 핵심이라고 말하지만, 내막으로 들어가면 ‘이념과 이상을 전제로 한 돈과 경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순서를 바꿔야 한다. ‘돈과 경제를 전제로 한 이념과 이상’이다.
“돈은 교환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단순히 이익을 축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400여 년 전 고대(古代)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말이다. 경제학 기본서에도 나오는 상식적인 얘기지만, 한국에서 통하는 돈의 개념은 다르다. 개인 축적의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교환 수단으로서의 돈의 기능이나 효능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통계로 보면, 한국은 이미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선 국가다. 그러나 실제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한국인의 일상은 사뭇 다르다. 실업급여 수령자만도 수십만 명 단위에 오른 지 오래다. 청년실업도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반면 1만 달러가 넘는 명품 브랜드 가방이 오픈 런 상태에서 팔리고, 수억원대 자동차 판매도 수직상승 상태다. 부(富)의 균형점이 깨지면서, 모두를 위한 교환이 아닌, 소수(少數)에 집중된 ‘축적으로서의 돈’이 대세가 되고 있다.
좌파 카르텔 구축 성공한 한국 좌파
좌파 세력 또한 마찬가지다. 2024년 현재 한국의 좌파는 계급·계층·지역 이해(利害)에 공헌하는 ‘안티(Anti) 이념’에 기초한 이권(利權) 카르텔 구축(構築)에 성공했다. 대상이 국가와 국민 전체가 아니다. 카르텔은 실업급여 같은 단기적 차원의 지원만이 아닌, 장기적 차원의 직업적 관계를 통해 완성도를 높여간다. 한번 맺어지면 장기간 함께하는 구조다.
이런 카르텔이 본격화된 것은 문재인(文在寅) 정권 때부터다. 워낙 급하게 카르텔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인 불법과 집단 부패가 판을 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되고 풍부한 재원(財源)으로 무장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카르텔로 진화(進化)하고 있다.
중국·러시아에서 보듯, ‘돈+이념’은 ‘장수만세(長壽萬歲)’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순간 무너질 수도 있지만, 돈이 공급되는 한 공산당과 올리가르히(신흥 재벌)의 수명도 계속될 것이다. 국가·국민은 망해도 공산당·올리가르히, 나아가 한국의 좌파는 살아남을 수 있다.
의료 대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저런 이유를 달지만, 결론은 자신만의 이해관계에 올인하는 것이 2024년 한국의 대세다. 형이하학으로서의 돈을 내세우는 것을 공산당과 올리가르히가 행하는 식의, ‘악마와의 타협’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보수와 우파는 계급·계층·지역을 넘어선, 국가·국민 차원의 ‘이해관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좌우 정치를 넘어선, 국가·국민 모두의 행복을 위한 대국적(大局的) 차원의 정책이자 이념이란 점에서 ‘전혀’ 다르다. 보수와 우파의 정통성·품격·권위는 국가·국민 전체에 주목하는 세계관에서부터 시작된다. 계급·계층·지역을 앞세우며, 내 편 네 편으로 나눈 뒤 결국 자신의 밥그릇에 눈이 먼 내로남불 세계와 다르다. 도덕과 윤리의 승리이자, 사상과 철학이란 측면에서 우위에 서 있다.
그러나 한국 보수와 우파는 스스로의 정당성과 권위에 만족하는 동안, 국민들에게 연결돼야만 하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에는 무심하다. 정신승리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손안에 들어올 구체적인 빵이 제공되지 않는 한, 정신승리도 오래가지 못한다.
‘빵의 승리’
일본 보수 정당, 즉 자유민주당(자민당)은 정신만이 아닌, 빵의 승리에도 성공한 대표적인 본보기다. 필자가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곳곳에서 들었던, ‘한국 보수의 활력 재생·재구성’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자민당이다.
자민당 집권 역사는 창당한 1955년 이래 지금까지 무려 65년에 달한다. 자민당이 야당 생활을 한 것은 2009년 8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33개월간에 그친다. 공산당 1당 독재를 제외할 경우 보수 자민당 장기 집권 역사는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로 장구하다.
자민당의 33개월 야당 체험은 시련에 빠진 한국 보수와 우파를 위한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왜 졌는가’라는 점보다 33개월 야당 생활 이후 ‘자민당이 어떻게 부활했는가’에 관한 부분이다.
2009년 8월 총선에서 자민당이 참패할 당시, 정치평론가 대부분은 민주당 장기 집권과 자민당 대분열을 예언했다. 자민당은 전후(戰後) 20세기 정치 무대의 주역이었을 뿐, 21세기 정치는 좌파의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구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 같은 어두운 예측에도 불구하고 33개월 야당 생활 뒤 자민당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1강(强)’이란 수식어와 함께 출발한 ‘자민당 1강 체제’가 2024년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자민당 부활과 장기 집권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의 관점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어떻게 33개월간의 야당 생활을 끝내고, 참의원·중의원 모두 대승리를 거두면서 자민당 재집권에 들어설 수 있었는가?
둘째, 재집권 이후 2024년 4월까지 무려 12년 동안 자민당 1강 체제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는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두 가지 사안에 걸쳐진 공통분모는 돈, 즉 경제다. 돈을 통한 국가·국민 생활 향상이 자민당 1강 장기체제의 기반이자 근본 이념이다.
‘자민당=평화·안정’
한국 신문·방송만 본다면 일본은 우익(右翼) 광신도들이 날뛰는, 당장이라도 험한 상태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한 나라로 느껴진다. 개헌(改憲)에 혈안이 돼 있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 지지율도 20%대에 그치는, 뭔가 과격하면서도 어두운 나라다. 통일교 스캔들과 파티 티켓을 둘러싼 금품수수 문제에서 보듯, 자민당 내부 모순도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다. 목표를 잃은 젊은이, 엔저(円低)로 떠밀려가는 일본 경제에 이르기까지, 당장이라도 공황이나 혁명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 것이 한국 미디어에 나타나는 일본의 초상화다.
현실은 어떨까? 한국 미디어가 분석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잃어버린 30년’이었다고 하지만, 실업률이 3% 이하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해외에서 일본을 찾는 여행객 규모가 팬데믹 이전에 매년 2000만 이상에 달했다. 해외투자금이 3조 달러로 매년 3000억 달러 정도의 이자가 보장되는 금융 대국이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한국인조차 전체 국민 15%인 700만 명 정도가 지난해 ‘공황 또는 혁명 전야 나라’로 관광길에 올랐다.
정치와 사회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에 해당된다. 정치를 보면 사회가, 사회를 이해하면 정치도 파악할 수 있다. 일본 사회의 특징인데, 평화와 안정이 기본이다. 이 같은 평화와 안정을 이끄는 중심이 바로 자민당이다. 평화와 안정은 자민당이란 정당에 배인 이미지 그 자체다. ‘자민당=부패=금수저 족벌(族閥) 정치 집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평균 일본인의 정서는 ‘자민당=평화·안정’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평화와 안정은 경제적 번영을 기반으로 할 때 의미를 갖는다. 간단히 말해 돈이다. 이것이 바로 2012년에 자민당이 33개월 공백을 허물고 1강 체제에 컴백한 근본적인 원인이자 배경이다. 이런 부활극(復活劇)을 만들어낸 1등 공신은 아베 전 총리다. 그는 2024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본 경제 부활의 주춧돌이 된 지도자이다. 바로 2012년 말 집권 즉시 시행한 아베노믹스 정책 기안자이기 때문이다. 과감한 금융 완화와 재정지출 확대, 마이너스 금리를 기반으로 한 구조개혁 경제구조가 아베노믹스의 핵심이다.
필자가 아는 한 한국에서 아베노믹스를 긍정적으로 얘기한 사람은 제로에 가깝다.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 반(反)트럼프 관련 분석과 평가가 그러하듯, 반일 정서와 더불어 일본 리버럴 미디어의 편견에 기초해 ‘아베노믹스=일본 침몰’로 몰아간 곳이 한국 미디어다. 특히 좌편향 한국 미디어의 경우, ‘아베=극우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직계’라 보면서 전쟁광에다 경제도 망칠 정치가로 비하했다. 희극적 상황이지만, 좌파 문재인 정권은 아베노믹스 정책을 120% 흉내 낸, 금융 완화 퍼주기 정책에 몰입했다. 아베를 비판한 좌편향 한국 미디어 그 누구도 ‘문재인 경제 정책=아베노믹스 짝퉁’이라 비난하지 않았다.
‘세기적 기회’ 맞은 일본
일본 경제계는 2024년을 100년 만에 맞이한 ‘세기적 기회’로 보고 있다. 미·일 경제안보 일체화가 구체화되면서 일본의 역할과 기능이 급신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은 미국의 원칙에 따르는 것만이 아닌, 원칙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글로벌 룰(rule)’을 직접 만들고 있다. 미국은 원칙을, 일본은 룰을 제정하는 식이다. 중국 전기 자동차(EV)가 아무리 대단해도, 일본이 만드는 글로벌 룰 하나만으로도 간단히 사라질 수 있다. ‘중국 폭망=일본 급부상’인 셈이다.
기시다 총리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지만, 사실 진짜 공헌자가 죽은 아베 전 총리라는 사실을 의심할 일본인은 극히 드물다. 12년 전에 구축한 아베 전 총리의 유산들이 열매를 맺으면서 나타난 결과가 ‘세기적 기회’의 배경이다.
2024년 일본 급부상은 글로벌 정치 플레이어로서의 일본의 재등장인 동시에, 보수 자민당 체제의 장기화를 의미한다.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20%대라고 하지만, 당장 총선이 실시될 경우 자민당 패배를 전망하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글로벌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아 지금 당장 장수(將帥)를 바꿀 수는 없다. 더불어 야당인 민주당과 소수 정당들에 일본의 오늘과 내일을 맡기려는 일본인도 거의 없다. 아무리 부패하고 늙은 자민당이라 해도, 특별한 대안도 없다는 점에서 자민당 1강 체제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 같은 상황과 관련해, 아베의 최대 유산인 아베노믹스의 ‘정치적 의미와 가치’에 주목한다. 금융정책·재정정책·구조개혁이란 3개의 화살에 기초한 아베노믹스의 ‘경제적 의미와 가치’가 아닌, 정치적 차원의 관점이다.
대대로 이어지는 자민당 후원 조직
일본 자민당 당원은 약 112만 명 정도다(2022년 기준). 일본 인구로 보면, 110명 중 한 명인 셈이다. 한국의 경우, 국민의힘이 410만 명, 더불어민주당이 480만 명의 당원을 갖고 있다고 한다. 5명 중 한 명이 정당 가입자인 셈이다. ‘비밀 당원’들이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필자 주변을 보면 정당 당원이 거의 없다.
자민당 당원 112만 명은 명실상부 똘똘 뭉친 정치 집단이다. 선거 때만 만났다가 사라지는 유령 단체가 아니다. 자민당 정치의 특징이지만, 각종 명목의 후원회가 많다. 지역 내 원로들과 자영업자와 중소상인들로 연결된 후원회가 곳곳에 존재한다. 자민당 후원회는 할아버지-아버지-손자 3대(代), 대대손손(代代孫孫) 이어지는 조직이다. 자민당 당원 112만 명은 이들 후원회를 통해 단단히 연결돼 있다. 정치적 지지는 물론, 각종 명목의 기금을 통한 물적(物的) 지원도 확실히 한다. 정치가 돈이고, 돈이 정치다.
한국 정치도 여기저기 후원회가 많다. 그러나 질적·양적, 심적·물적으로 보면 일본 정치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필자가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에서 공부할 당시 체험한 것인데, 정치인으로 나선 숙생(塾生)들을 보면 ‘주말 라이프 제로’가 기본이다. 주말 일정은 후원회와의 만남이 기본이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매주 인사를 한다. 지방 출신 정치인의 경우 신칸센(新幹線)으로 지역구에 내려간 뒤, 후원회 사람들이나 지역구 경제인들과의 만남에 매달린다. 주말에 지역구 후원회와 만나지 않는 정치인에게는 낙선만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중앙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도, 지역 내 후원회와 당원을 멀리할 경우 차기 당선에서 멀어진다.
지역구에 자주 안 내려가도 당선이 보장된 의원들도 있기는 하다. 바로 ‘족(族)의원’으로 불리는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지역구에 내려가는 대신 반대로 도쿄에 후원회 관계자들을 초대한다. 도쿄 내 유명인사들과 연결시켜주면서 후원회 사람들을 상전 모시듯 접대한다.
‘마쓰리 정치’
한국에서는 ‘족의원’들을 부정적으로 본다. 일본, 특히 지방정치에서는 정치인 ‘장인[職人]’이란 차원에서 대한다. ‘세습정치’라고 비난하기보다, 장인이 대대손손 직업을 이어가듯 정치도 계속해서 이어가는 직업으로 여긴다.
정치인만이 아니라, 후원회 대표들도 ‘족(族)당원’들이다. 하루 이틀이 아닌, 수십 년, 백 년 이상 함께하는 관계다. 족의원은 대를 이어 연결된 후원회를 통해 한층 더 심화된다. 일본 풍경 중 하나지만, 주기적으로 크고 작은 마쓰리(祭り), 즉 축제가 곳곳에서 열린다. 자민당 정치가는 이들 마쓰리에도 반드시 참가한다. 수백 년 이어온 마쓰리 운영회 대부분이 자민당 후원회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기시다 총리가 참석할 경우, 마쓰리도 살고 마쓰리 운영회는 물론 자민당 후원회의 권위도 올라간다.
마쓰리 정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장려하고 응원해야 할 풍경이다. 야당인 민주당은 자민당식 풀뿌리 네트워크가 약하다.
자민당 후원회 입장에서 볼 때 자민당 1강 체제는 어떤 의미일까? 보수 이념에 기초한 평화·안정·구현이란 점도 있겠지만, 역시 핵심은 돈에 있다. 자민당 후원회 대부분은 지역 경제단체장들이다. 지지하는 자민당 의원의 당선은 자신의 이익 보장으로 직결된다. 나쁘게 말하면 정경유착(政經癒着)이지만, 좋게 보면 소통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로 해석할 수 있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아베노믹스를 거시 경제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지방 경제에 기초한 미시 경제로 이해하면, 마쓰리 운영회나 자민당 후원회와의 경제소통이란 식으로 볼 수 있다. 국가·국민적 차원에서의 아베노믹스만이 아니라, 자민당 정권을 지지하는 지역 내 풀뿌리 경제단체와의 협력 기반으로서의 경제 정책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될지에 관한 논의는 아베노믹스 발표 전부터 이미 시작된다. 후원회를 통해 서로 논의를 하기 때문이다. 불법·특혜·정경유착과 같은 단어들이 난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이나 기존의 룰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시행하는 것이 자민당 후원회와 112만 당원의 수완이자 능력이다.
‘내 주머니에 뭐가 떨어지는가’
‘일본 재생, 강한 정치’는 2012년 아베 재등장 당시의 자민당 슬로건이다. 아베노믹스는 일본 재생과 강한 정치를 동시에 구현할 수단이다. 출발은 아베노믹스를 통한 경제 활성화의 단맛을 실감할 자민당 112만 당원에서부터 시작됐다.
필자는 2024년 4월 총선에 즈음한 한국 보수와 우파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내가 보수 정당을 지지할 경우, 내 주머니에 구체적으로 뭐가 떨어지는가? 대한민국 정통성 재확립과 같은 보수 이념 실현만이 아니라, 형이하학적으로 떨어지는 구체적인 이익이 과연 무엇인가?”
이해(理解)는 해도 나의 이해(利害)와 맞아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멀어지게 된다. 자민당은 이해(理解)와 이해(利害)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국민 모두에게 제시하고 있다. 112만 당원은 이해(理解)와 이해(利害)를 동시에 체감(體感)하는 자민당 1강 체제의 창이자 방패다.
500년 주자학(朱子學)의 전통과 세계관은 21세기 한국 보수 정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손과 발이 아니라 ‘머리로서의 정치’에 매달린다. 한국 보수의 활력 재생·재구성을 얘기할 때, 정신·이념이란 단어보다 돈·경제·경영이란 단어부터 떠올리길 기대한다.
트럼프 식으로 설명하자면, 하루 만에 세계 500대 부자로 등극시켜준 소셜 네트워킹 ‘트루스 소셜(Truth Social)’ 상장(上場)이나, 날개 돋친 듯 팔린 399달러 황금 스니커가 최적의 본보기다. 트럼프도 지지하지만, 돈도 벌 수 있다. 건국 대통령 기념사업이나 한국 전쟁 희생자와 천안함 부상자 돕기는 기본이다. 하지만 숭고한 이상과 희생을 한층 더 기리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돈·경제·경영적 비즈니스 사고가 필요하다.
팬데믹 이후 정치와 비즈니스가 동전의 양면처럼 나아가는 상황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일본에서 아베노믹스의 그림자와 영향력은 아베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층 더 강해지고 있다. 정치를 정치로 풀어나가는 것이 정도(正道)이던 시대도 있었다. 2024년 글로벌 시대정신은 정치를 비즈니스로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기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국에서처럼, 상대의 의견을 듣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이냐, 적(敵)이냐’를 가늠하기 위한 테스트로서의 질문일 뿐이다. 한국 정치의 상식이지만,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다. 중간은 없다. ‘우리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으로 취급된다. 우리 편이 아닌 이상, 서로 얘기를 나눌 이유도 목적도 사라진다. ‘소통’이란 단어는 신문·방송의 키워드일 뿐, 현실은 ‘단절’ 그 자체다.
미국인의 정치 성향은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나타난다. 총기 보유, 동성애, 이민, 낙태, 정부의 역할, 무역 정책, 자유와 공정 등에 관한 개개인의 판단이 정치 성향의 기준점이다. 부분적으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보수, 리버럴, 중도로 구분한다. 한국에서 접한 좌우의 개념은 칼로 가르듯, 흑백으로 확연히 나누어져 있다.
한국 보수의 활력 재생·재구성에 관한 얘기가 많다. 여기저기서 대안(代案)도 많고 논의도 활발하다. 필자까지 거들자면, ‘좌우를 넘어선, 국민 전체에 맞춰진 정책 발굴’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너무나 뻔한 답으로 들릴 듯하다.
정답은 ‘돈’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가 좌우 모두를 만족시킬 만병통치 정책이 될 수 있을까? 2024년 글로벌 차원에서 본 정답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다. 바로 돈, 즉 경제다. 부연하자면, 당장 내 손안에 꽉 잡히는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현실로서의 돈’이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머릿속에 떠도는 이념·이상(理想)’이 아니다.
정치인 아니 정치에 관심 있는 한국인치고, 필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달라진다. ‘돈과 경제’가 핵심이라고 말하지만, 내막으로 들어가면 ‘이념과 이상을 전제로 한 돈과 경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순서를 바꿔야 한다. ‘돈과 경제를 전제로 한 이념과 이상’이다.
“돈은 교환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단순히 이익을 축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400여 년 전 고대(古代)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말이다. 경제학 기본서에도 나오는 상식적인 얘기지만, 한국에서 통하는 돈의 개념은 다르다. 개인 축적의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교환 수단으로서의 돈의 기능이나 효능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통계로 보면, 한국은 이미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선 국가다. 그러나 실제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한국인의 일상은 사뭇 다르다. 실업급여 수령자만도 수십만 명 단위에 오른 지 오래다. 청년실업도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반면 1만 달러가 넘는 명품 브랜드 가방이 오픈 런 상태에서 팔리고, 수억원대 자동차 판매도 수직상승 상태다. 부(富)의 균형점이 깨지면서, 모두를 위한 교환이 아닌, 소수(少數)에 집중된 ‘축적으로서의 돈’이 대세가 되고 있다.
좌파 카르텔 구축 성공한 한국 좌파
좌파 세력 또한 마찬가지다. 2024년 현재 한국의 좌파는 계급·계층·지역 이해(利害)에 공헌하는 ‘안티(Anti) 이념’에 기초한 이권(利權) 카르텔 구축(構築)에 성공했다. 대상이 국가와 국민 전체가 아니다. 카르텔은 실업급여 같은 단기적 차원의 지원만이 아닌, 장기적 차원의 직업적 관계를 통해 완성도를 높여간다. 한번 맺어지면 장기간 함께하는 구조다.
이런 카르텔이 본격화된 것은 문재인(文在寅) 정권 때부터다. 워낙 급하게 카르텔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인 불법과 집단 부패가 판을 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되고 풍부한 재원(財源)으로 무장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카르텔로 진화(進化)하고 있다.
중국·러시아에서 보듯, ‘돈+이념’은 ‘장수만세(長壽萬歲)’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순간 무너질 수도 있지만, 돈이 공급되는 한 공산당과 올리가르히(신흥 재벌)의 수명도 계속될 것이다. 국가·국민은 망해도 공산당·올리가르히, 나아가 한국의 좌파는 살아남을 수 있다.
의료 대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저런 이유를 달지만, 결론은 자신만의 이해관계에 올인하는 것이 2024년 한국의 대세다. 형이하학으로서의 돈을 내세우는 것을 공산당과 올리가르히가 행하는 식의, ‘악마와의 타협’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보수와 우파는 계급·계층·지역을 넘어선, 국가·국민 차원의 ‘이해관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좌우 정치를 넘어선, 국가·국민 모두의 행복을 위한 대국적(大局的) 차원의 정책이자 이념이란 점에서 ‘전혀’ 다르다. 보수와 우파의 정통성·품격·권위는 국가·국민 전체에 주목하는 세계관에서부터 시작된다. 계급·계층·지역을 앞세우며, 내 편 네 편으로 나눈 뒤 결국 자신의 밥그릇에 눈이 먼 내로남불 세계와 다르다. 도덕과 윤리의 승리이자, 사상과 철학이란 측면에서 우위에 서 있다.
그러나 한국 보수와 우파는 스스로의 정당성과 권위에 만족하는 동안, 국민들에게 연결돼야만 하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에는 무심하다. 정신승리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손안에 들어올 구체적인 빵이 제공되지 않는 한, 정신승리도 오래가지 못한다.
‘빵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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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민주당은 2009년 8·30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장기 집권이 점쳐졌으나 33개월 만에 정권을 내놓고 말았다. 사진=신화/연합뉴스 |
자민당 집권 역사는 창당한 1955년 이래 지금까지 무려 65년에 달한다. 자민당이 야당 생활을 한 것은 2009년 8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33개월간에 그친다. 공산당 1당 독재를 제외할 경우 보수 자민당 장기 집권 역사는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로 장구하다.
자민당의 33개월 야당 체험은 시련에 빠진 한국 보수와 우파를 위한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왜 졌는가’라는 점보다 33개월 야당 생활 이후 ‘자민당이 어떻게 부활했는가’에 관한 부분이다.
2009년 8월 총선에서 자민당이 참패할 당시, 정치평론가 대부분은 민주당 장기 집권과 자민당 대분열을 예언했다. 자민당은 전후(戰後) 20세기 정치 무대의 주역이었을 뿐, 21세기 정치는 좌파의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구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 같은 어두운 예측에도 불구하고 33개월 야당 생활 뒤 자민당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1강(强)’이란 수식어와 함께 출발한 ‘자민당 1강 체제’가 2024년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자민당 부활과 장기 집권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의 관점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어떻게 33개월간의 야당 생활을 끝내고, 참의원·중의원 모두 대승리를 거두면서 자민당 재집권에 들어설 수 있었는가?
둘째, 재집권 이후 2024년 4월까지 무려 12년 동안 자민당 1강 체제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는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두 가지 사안에 걸쳐진 공통분모는 돈, 즉 경제다. 돈을 통한 국가·국민 생활 향상이 자민당 1강 장기체제의 기반이자 근본 이념이다.
‘자민당=평화·안정’
한국 신문·방송만 본다면 일본은 우익(右翼) 광신도들이 날뛰는, 당장이라도 험한 상태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한 나라로 느껴진다. 개헌(改憲)에 혈안이 돼 있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 지지율도 20%대에 그치는, 뭔가 과격하면서도 어두운 나라다. 통일교 스캔들과 파티 티켓을 둘러싼 금품수수 문제에서 보듯, 자민당 내부 모순도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다. 목표를 잃은 젊은이, 엔저(円低)로 떠밀려가는 일본 경제에 이르기까지, 당장이라도 공황이나 혁명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 것이 한국 미디어에 나타나는 일본의 초상화다.
현실은 어떨까? 한국 미디어가 분석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잃어버린 30년’이었다고 하지만, 실업률이 3% 이하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해외에서 일본을 찾는 여행객 규모가 팬데믹 이전에 매년 2000만 이상에 달했다. 해외투자금이 3조 달러로 매년 3000억 달러 정도의 이자가 보장되는 금융 대국이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한국인조차 전체 국민 15%인 700만 명 정도가 지난해 ‘공황 또는 혁명 전야 나라’로 관광길에 올랐다.
정치와 사회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에 해당된다. 정치를 보면 사회가, 사회를 이해하면 정치도 파악할 수 있다. 일본 사회의 특징인데, 평화와 안정이 기본이다. 이 같은 평화와 안정을 이끄는 중심이 바로 자민당이다. 평화와 안정은 자민당이란 정당에 배인 이미지 그 자체다. ‘자민당=부패=금수저 족벌(族閥) 정치 집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평균 일본인의 정서는 ‘자민당=평화·안정’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평화와 안정은 경제적 번영을 기반으로 할 때 의미를 갖는다. 간단히 말해 돈이다. 이것이 바로 2012년에 자민당이 33개월 공백을 허물고 1강 체제에 컴백한 근본적인 원인이자 배경이다. 이런 부활극(復活劇)을 만들어낸 1등 공신은 아베 전 총리다. 그는 2024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본 경제 부활의 주춧돌이 된 지도자이다. 바로 2012년 말 집권 즉시 시행한 아베노믹스 정책 기안자이기 때문이다. 과감한 금융 완화와 재정지출 확대, 마이너스 금리를 기반으로 한 구조개혁 경제구조가 아베노믹스의 핵심이다.
필자가 아는 한 한국에서 아베노믹스를 긍정적으로 얘기한 사람은 제로에 가깝다.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 반(反)트럼프 관련 분석과 평가가 그러하듯, 반일 정서와 더불어 일본 리버럴 미디어의 편견에 기초해 ‘아베노믹스=일본 침몰’로 몰아간 곳이 한국 미디어다. 특히 좌편향 한국 미디어의 경우, ‘아베=극우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직계’라 보면서 전쟁광에다 경제도 망칠 정치가로 비하했다. 희극적 상황이지만, 좌파 문재인 정권은 아베노믹스 정책을 120% 흉내 낸, 금융 완화 퍼주기 정책에 몰입했다. 아베를 비판한 좌편향 한국 미디어 그 누구도 ‘문재인 경제 정책=아베노믹스 짝퉁’이라 비난하지 않았다.
‘세기적 기회’ 맞은 일본
일본 경제계는 2024년을 100년 만에 맞이한 ‘세기적 기회’로 보고 있다. 미·일 경제안보 일체화가 구체화되면서 일본의 역할과 기능이 급신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은 미국의 원칙에 따르는 것만이 아닌, 원칙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글로벌 룰(rule)’을 직접 만들고 있다. 미국은 원칙을, 일본은 룰을 제정하는 식이다. 중국 전기 자동차(EV)가 아무리 대단해도, 일본이 만드는 글로벌 룰 하나만으로도 간단히 사라질 수 있다. ‘중국 폭망=일본 급부상’인 셈이다.
기시다 총리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지만, 사실 진짜 공헌자가 죽은 아베 전 총리라는 사실을 의심할 일본인은 극히 드물다. 12년 전에 구축한 아베 전 총리의 유산들이 열매를 맺으면서 나타난 결과가 ‘세기적 기회’의 배경이다.
2024년 일본 급부상은 글로벌 정치 플레이어로서의 일본의 재등장인 동시에, 보수 자민당 체제의 장기화를 의미한다.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20%대라고 하지만, 당장 총선이 실시될 경우 자민당 패배를 전망하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글로벌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아 지금 당장 장수(將帥)를 바꿀 수는 없다. 더불어 야당인 민주당과 소수 정당들에 일본의 오늘과 내일을 맡기려는 일본인도 거의 없다. 아무리 부패하고 늙은 자민당이라 해도, 특별한 대안도 없다는 점에서 자민당 1강 체제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 같은 상황과 관련해, 아베의 최대 유산인 아베노믹스의 ‘정치적 의미와 가치’에 주목한다. 금융정책·재정정책·구조개혁이란 3개의 화살에 기초한 아베노믹스의 ‘경제적 의미와 가치’가 아닌, 정치적 차원의 관점이다.
대대로 이어지는 자민당 후원 조직
일본 자민당 당원은 약 112만 명 정도다(2022년 기준). 일본 인구로 보면, 110명 중 한 명인 셈이다. 한국의 경우, 국민의힘이 410만 명, 더불어민주당이 480만 명의 당원을 갖고 있다고 한다. 5명 중 한 명이 정당 가입자인 셈이다. ‘비밀 당원’들이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필자 주변을 보면 정당 당원이 거의 없다.
자민당 당원 112만 명은 명실상부 똘똘 뭉친 정치 집단이다. 선거 때만 만났다가 사라지는 유령 단체가 아니다. 자민당 정치의 특징이지만, 각종 명목의 후원회가 많다. 지역 내 원로들과 자영업자와 중소상인들로 연결된 후원회가 곳곳에 존재한다. 자민당 후원회는 할아버지-아버지-손자 3대(代), 대대손손(代代孫孫) 이어지는 조직이다. 자민당 당원 112만 명은 이들 후원회를 통해 단단히 연결돼 있다. 정치적 지지는 물론, 각종 명목의 기금을 통한 물적(物的) 지원도 확실히 한다. 정치가 돈이고, 돈이 정치다.
한국 정치도 여기저기 후원회가 많다. 그러나 질적·양적, 심적·물적으로 보면 일본 정치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필자가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에서 공부할 당시 체험한 것인데, 정치인으로 나선 숙생(塾生)들을 보면 ‘주말 라이프 제로’가 기본이다. 주말 일정은 후원회와의 만남이 기본이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매주 인사를 한다. 지방 출신 정치인의 경우 신칸센(新幹線)으로 지역구에 내려간 뒤, 후원회 사람들이나 지역구 경제인들과의 만남에 매달린다. 주말에 지역구 후원회와 만나지 않는 정치인에게는 낙선만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중앙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도, 지역 내 후원회와 당원을 멀리할 경우 차기 당선에서 멀어진다.
지역구에 자주 안 내려가도 당선이 보장된 의원들도 있기는 하다. 바로 ‘족(族)의원’으로 불리는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지역구에 내려가는 대신 반대로 도쿄에 후원회 관계자들을 초대한다. 도쿄 내 유명인사들과 연결시켜주면서 후원회 사람들을 상전 모시듯 접대한다.
‘마쓰리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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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참의원 선거 당시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도쿄에서 자민당 소속 후보 지원 유세를 하는 모습. 자민당은 풀뿌리 조직이 강하다. 사진=로이터/뉴스1 |
정치인만이 아니라, 후원회 대표들도 ‘족(族)당원’들이다. 하루 이틀이 아닌, 수십 년, 백 년 이상 함께하는 관계다. 족의원은 대를 이어 연결된 후원회를 통해 한층 더 심화된다. 일본 풍경 중 하나지만, 주기적으로 크고 작은 마쓰리(祭り), 즉 축제가 곳곳에서 열린다. 자민당 정치가는 이들 마쓰리에도 반드시 참가한다. 수백 년 이어온 마쓰리 운영회 대부분이 자민당 후원회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기시다 총리가 참석할 경우, 마쓰리도 살고 마쓰리 운영회는 물론 자민당 후원회의 권위도 올라간다.
마쓰리 정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장려하고 응원해야 할 풍경이다. 야당인 민주당은 자민당식 풀뿌리 네트워크가 약하다.
자민당 후원회 입장에서 볼 때 자민당 1강 체제는 어떤 의미일까? 보수 이념에 기초한 평화·안정·구현이란 점도 있겠지만, 역시 핵심은 돈에 있다. 자민당 후원회 대부분은 지역 경제단체장들이다. 지지하는 자민당 의원의 당선은 자신의 이익 보장으로 직결된다. 나쁘게 말하면 정경유착(政經癒着)이지만, 좋게 보면 소통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로 해석할 수 있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아베노믹스를 거시 경제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지방 경제에 기초한 미시 경제로 이해하면, 마쓰리 운영회나 자민당 후원회와의 경제소통이란 식으로 볼 수 있다. 국가·국민적 차원에서의 아베노믹스만이 아니라, 자민당 정권을 지지하는 지역 내 풀뿌리 경제단체와의 협력 기반으로서의 경제 정책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될지에 관한 논의는 아베노믹스 발표 전부터 이미 시작된다. 후원회를 통해 서로 논의를 하기 때문이다. 불법·특혜·정경유착과 같은 단어들이 난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이나 기존의 룰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시행하는 것이 자민당 후원회와 112만 당원의 수완이자 능력이다.
‘내 주머니에 뭐가 떨어지는가’
‘일본 재생, 강한 정치’는 2012년 아베 재등장 당시의 자민당 슬로건이다. 아베노믹스는 일본 재생과 강한 정치를 동시에 구현할 수단이다. 출발은 아베노믹스를 통한 경제 활성화의 단맛을 실감할 자민당 112만 당원에서부터 시작됐다.
필자는 2024년 4월 총선에 즈음한 한국 보수와 우파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내가 보수 정당을 지지할 경우, 내 주머니에 구체적으로 뭐가 떨어지는가? 대한민국 정통성 재확립과 같은 보수 이념 실현만이 아니라, 형이하학적으로 떨어지는 구체적인 이익이 과연 무엇인가?”
이해(理解)는 해도 나의 이해(利害)와 맞아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멀어지게 된다. 자민당은 이해(理解)와 이해(利害)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국민 모두에게 제시하고 있다. 112만 당원은 이해(理解)와 이해(利害)를 동시에 체감(體感)하는 자민당 1강 체제의 창이자 방패다.
500년 주자학(朱子學)의 전통과 세계관은 21세기 한국 보수 정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손과 발이 아니라 ‘머리로서의 정치’에 매달린다. 한국 보수의 활력 재생·재구성을 얘기할 때, 정신·이념이란 단어보다 돈·경제·경영이란 단어부터 떠올리길 기대한다.
트럼프 식으로 설명하자면, 하루 만에 세계 500대 부자로 등극시켜준 소셜 네트워킹 ‘트루스 소셜(Truth Social)’ 상장(上場)이나, 날개 돋친 듯 팔린 399달러 황금 스니커가 최적의 본보기다. 트럼프도 지지하지만, 돈도 벌 수 있다. 건국 대통령 기념사업이나 한국 전쟁 희생자와 천안함 부상자 돕기는 기본이다. 하지만 숭고한 이상과 희생을 한층 더 기리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돈·경제·경영적 비즈니스 사고가 필요하다.
팬데믹 이후 정치와 비즈니스가 동전의 양면처럼 나아가는 상황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일본에서 아베노믹스의 그림자와 영향력은 아베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층 더 강해지고 있다. 정치를 정치로 풀어나가는 것이 정도(正道)이던 시대도 있었다. 2024년 글로벌 시대정신은 정치를 비즈니스로 풀어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