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과 고향 광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후회 없다”
⊙ “기껏 고생해 의사가 됐는데, 왜 하필 우리 아들이 총대를 메야 하나라고 생각”(어머니 조현정씨)
⊙ 선거 치른 다음 날에는 취직할 병원 면접 보고 출근 준비해
⊙ “나가 찍을 테니 할 말은 꼭 하고 사쇼”(60대 남성)
⊙ 빨간 옷 입은 박 후보가 다가가자 “워메, 왜 나한테 오는 것이여”
⊙ “아들 같아서 더 열심히 선거운동했다”(선거사무원들)
⊙ “(여당)비대위원이 꽃길만을 걷지 않고 희생했다는 것도 기억해달라”
⊙ “10%는 꼭 넘기고 싶었다. 비대위원 지낸 사람이 10%도 받지 못하면 도대체 어떤 청년이 도전하겠나?”
⊙ “호남엔 두 개의 눈물 있어. 민주당 지지할 수밖에 없는 다수의 눈물과 보수 정당 지지하는 소수의 눈물”
박은식(朴銀湜)
1984년생. 광주 문성고, 한양대 의대, 고려사이버대 법학과 졸업 / 세브란스병원, 혜민병원(코로나19 전담) 근무, 《조선일보》 《중앙일보》 칼럼리스트, 前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인재영입위원), 現 상식과 정의를 찾는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 “기껏 고생해 의사가 됐는데, 왜 하필 우리 아들이 총대를 메야 하나라고 생각”(어머니 조현정씨)
⊙ 선거 치른 다음 날에는 취직할 병원 면접 보고 출근 준비해
⊙ “나가 찍을 테니 할 말은 꼭 하고 사쇼”(60대 남성)
⊙ 빨간 옷 입은 박 후보가 다가가자 “워메, 왜 나한테 오는 것이여”
⊙ “아들 같아서 더 열심히 선거운동했다”(선거사무원들)
⊙ “(여당)비대위원이 꽃길만을 걷지 않고 희생했다는 것도 기억해달라”
⊙ “10%는 꼭 넘기고 싶었다. 비대위원 지낸 사람이 10%도 받지 못하면 도대체 어떤 청년이 도전하겠나?”
⊙ “호남엔 두 개의 눈물 있어. 민주당 지지할 수밖에 없는 다수의 눈물과 보수 정당 지지하는 소수의 눈물”
박은식(朴銀湜)
1984년생. 광주 문성고, 한양대 의대, 고려사이버대 법학과 졸업 / 세브란스병원, 혜민병원(코로나19 전담) 근무, 《조선일보》 《중앙일보》 칼럼리스트, 前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인재영입위원), 現 상식과 정의를 찾는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 2024년 3월 20일 오전 광주 동구 학동거리에서 국민의힘 박은식 후보가 출근길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제22대 총선에서 광주(光州)광역시 동구·남구을[이하 동남을, 유권자 수 13만1509명(동구 9만2553명, 남구 3만8956명)]에 출마한 박은식(39)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인재영입위원 겸직). 1984년생으로 고향 광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한양대 의대를 졸업하고 소화기내과 전문의가 됐다. 그도 호남 출신 대다수가 갖는 ‘호남=민주당=진보’라는 정서 속에 성인이 됐다.
2016년 군의관이 돼 최전방인 강원도 철원 3사단(백골부대) GOP부대에서 복무했다. 철책선을 바로 앞에 두고 북한군을 지켜봤다. 평화의 소중함만이 강조된 세태에서 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안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호남에서 나고 자라며 몸에 밴 생각과 관념이 현실과 충돌할 때면 무엇이 맞는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사이버대에 등록해 법학과 경영학도 공부했다. 그러면서 보수(保守)의 가치, 정신을 알게 됐다.
사회로 복귀하고는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며 호남의 맹목적 민주당 지지를 비판했다. 시민단체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를 맡아 ‘호남 보수’를 재조명하며 “호남이 변해야 한다”고 외쳤다. 특히 정율성 기념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기념 사업 반대 운동도 했다. 그러던 중 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의 권유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됐다.
칼럼 쓰고 시민단체 조직해 호남 보수 再建 활동
박 전 비대위원은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 참여하며 이번 총선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희생하겠다”며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다. 그 대가는 7936표. 득표율 8.62%, 3위. 경제적 손실도 컸다.
공식 선거운동 시작일인 지난 3월 28일 광주를 찾았다. 박은식 후보의 선거사무실은 옛 전남도청 광장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빌딩의 5층이었다. 5·18 당시 시민군이 최후 저항한 곳이 전남도청이다. 이날 오전 6시20분 아침 출근 인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후 5시 조선대병원 인근 남광주역 5번 출구 앞 교차로에서 공식 선거운동 출정식을 가졌다. 이곳은 동구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빨간 옷을 입은 선거운동원(선거사무원) 사이에 키가 185cm쯤 돼 보이는 훤칠한 젊은이가 야구 점퍼를 입고는 행인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박 후보를 실물로 본 건 처음이었다.
오거리 교차로엔 이번 선거에 출마한 이들의 공약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박 후보는 ‘무등산 케이블카 설치’를 적었다. 선거운동원, 박 후보 지지자, 선관위 직원 등 약 40명이 모였다. 비를 피해 일부는 고가도로 아래서 출정식을 지켜봤다.
유세차에 오른 송기석 전 의원은 “박은식 후보는 어느 정당에서든 비례대표 당선권에 들어가는 후보다. 하지만 동남을에 출마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광주의 정치 구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신념을 갖고 나왔다. 보수 정당 불모지인 광주의 변화를 위해 박은식 후보를 선택해달라. 우리가 박은식 후보를 잘만 쓰면 호남을 대표하는 보수 대권 주자로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제가 당선되면 역사교과서에 실릴 일”
이어 박은식 후보가 마이크를 잡았다. 후보 오른편에는 어머니 조현정씨가 서 있었다.
“광주의 아들 박은식입니다. 대성초, 금남중, 문성고 나왔습니다. 저는 광주에 있을 때 김대중과 노무현의 민주당을 좋아했습니다. 그때의 민주당은 도덕적으로 앞서갔고 지지층의 반대에도 국익(國益)을 위해 한미(韓美)FTA를 추진하고 이라크에 파병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어떻습니까. 당대표부터 전과(前科) 4범입니다.
서울에서 의사로 일하며 광주 시민이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광주의 변화를 위해 언론에 칼럼을 쓰고 시민단체도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이를 인정받아 국민의힘 비대위원이 됐습니다. 광주를 바꾸고 발전시키기 위해 쉽고 편한 길보다는 직접 지역구로 출마해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광주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충장로에는 공실(空室)이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광주를 떠나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을 피 흘리게 한 공산주의자 정율성을 위해 광역시 재정자립도 꼴찌인 광주가 세금을 퍼붓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정율성 기념 사업도 완전히 폐지하겠습니다.
저는 실현 가능한 공약을 말씀드립니다. 아름다운 무등산 경치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케이블카를 설치하겠습니다. 충장로에서 케이블카가 출발하도록 해 많은 사람이 충장로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광주 시민이 저 멀리 대전까지 쇼핑 가는 일 없도록 이케아(IKEA), 코스트코를 반드시 유치하겠습니다. 전남대·조선대병원을 증축해 광주 시민 건강도 챙기겠습니다. 광주 정신,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겠습니다.
광주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선되면 이는 역사교과서에 실릴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는 김대중을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큰 정치인이 될 수 있도록 저를 찍어주십시오. 그래야만 광주가 발전하고 민주당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1 학생, “이-조 연합 걱정”
출정식이 끝나고 한 40대 부부가 노란색 꽃을 사 들고 박은식 후보에게 왔다. 양림동에 거주하는 민주당 당원 출신 장모씨(남)였다. 장씨는 “민주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게 광주에도 좋지 않아 최근 국민의힘에 입당했다”고 했다.
교복을 입은 고1 남학생도 박 후보와 사진을 찍었다. 지역구 내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조모씨는 “이재명·조국 연합이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할까 봐 걱정”이라며 “과거 전북에서 보수당 후보가 당선된 것처럼 광주에서도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은식 비대위원의 어머니 조현정씨는 점퍼 뒷면에 흰색으로 ‘엄마’라고 적었다. 조씨는 “온 가족이 아들의 출마를 말렸다”면서도 “아들 덕분에 생전 처음 선거운동을 하고 유세차에도 올랐다”고 말했다.
박 후보에게 공식 선거운동에 나서는 각오를 물었다. 그는 “선거운동원들에게 ‘완주(完走)가 곧 승리다. 법을 어기거나, 다치지 말자. 안전하게 선거를 치르자’고 했다”고 했다. 어젯밤 무슨 꿈을 꿨는지 물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마치 모델 같은 신체 비율에 키가 몇인지도 물었는데 182cm라고 답했다.
박은식 후보는 공식 선거운동 첫날을 맞아 지지 요청 문자 메시지를 주민들에게 보냈는데 욕설이 담긴 답장도 받았다.
박은식 후보는 호남에서 보수 정당, 국민의힘은 “무관심 그 자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힘에 관심 자체가 없어요. 이곳에선 제2당이 진보당이에요. (안철수 의원이 이끌었던) 국민의당도 보수 정당이라고 생각해요. 국민의힘과 국민의당도 잘 구분하지 못해요. 아직도 ‘국민의힘’보다는 ‘한나라당’이라는 명칭이 입에 익어요. 행사장에 가면 진보당 사람이 앉을 자리는 있어도 국민의힘은 없어요. 으레 국민의힘은 참석을 안 해왔으니 그렇게들 생각하는 거죠. 직접 경험해보면 ‘참 쉽지 않구나’를 느낍니다.”
박 후보의 선거운동은 광주광역시 시의회(23명)에서 유일한 국민의힘 소속인 김용임 시의원이 돕고 있다. 김 시의원은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의 선임비서관(5급 상당)을 지냈다. 4선을 한 박 전 부의장은 이 지역에서 3번 당선됐다.
김용임 시의원은 박 후보에 대한 반응이 경로당에서 가장 좋다고 말했다. 젊고 훤칠한 사내가 찾아와 살갑게 대하니 노인들이 반가워한다고 했다.
저녁 일정으로 지역 기업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했다. 빨간색 잠바를 입고 행사장에 갔지만 무관심이었다. 양복 입은 중년 남성들이 포도주잔과 포크를 들어 올릴 때 박 후보는 테이블을 돌며 명함을 돌렸다. 곧이어 300명가량이 참석하는 행사에도 참석해 허리를 굽히고 한 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춰 자신을 알렸다.
“여의도연구원, 여론 조사 안 해줘”
— 왜 하필 지역구가 동남을입니까.
“동남을은 제가 나고 자란 곳이에요. 부모님도 사시고요. 정율성 문제도 거론하고 싶었습니다. 득표율만을 놓고 보면 동남갑이 더 유리하지만요.”
지난 대선에서 동남갑 지역의 윤석열 후보 득표율은 광주 내 다른 지역보다 높았다.
정율성 생가 앞을 지날 때였다.
— 정율성을 알리는 시설과 표지가 많네요.
“바로잡아야죠. 광주 시민을 피 흘리게 한 공산주의자를 광주 시민의 혈세로 기념할 순 없잖아요.”
박은식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3수를 해 대학에 갔고 그 뒤로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해왔어요. 코로나19가 유행할 땐 코로나19 전담 병원에서 일했죠. 호남의 변화를 위한 문제 제기를 열심히 한 덕분에 현실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죠. 당장 감당해야 할 손해 같은 건 생각지 않고 ‘3개월 동안은 나라를 위해, 고향을 위해 한번 부딪혀보자’는 각오로 출마한 겁니다.”
— 자체 여론조사는 해봤습니까.
“선거비용 보전 때문에 여의도연구원에 요청했는데 안 해주더라고요. 득표율을 알아야 선거비용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 계획할 수 있거든요. 다행인 건 후원금은 채웠어요.”
득표율 15%를 넘겨야 선거운동비(사용총액 제한 있음, 일부 항목 보전 제외)를 전액 보전받는다(10% 이상 15% 미만은 절반). 다만 사무실 임차료 등은 보전 대상이 아니다. 15%를 넘기면 대체로 선거 기간 쓴 돈의 80~90%는 돌려받는다. 박은식 후보는 ‘10% 이상’을 득표해 반액(半額)을 보전받는다는 가정하에 예산을 짰다.
이날 아침 한동훈 위원장이 ‘국회 세종 완전 이전’ 발언을 했다. 이를 두고 박 후보는 “감동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세종으로 내려간 행정부처를 서울로 되돌리고 세종에는 다른 걸 해준다고 말했어야 해요. 지금 공무원들이 서울과 세종을 오가며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면 수도를 완전히 세종으로 옮기든가요. 국민을 위해 행정효율성을 올리겠다고 주장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오후 9시쯤 선거사무실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는 명함을 돌리기 위해 남구 백운동으로 갔다. 백운동은 박 후보가 태어난 동네다. 술집과 식당을 돌며 인사했다. 명함을 돌리기 전에는 업주나 종업원의 허락을 받았다. 대체로 명함 돌리는 걸 허락했는데 거절하는 곳도 있었다. 매장이 바쁘거나 적대적인 곳은 명함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나누시는데 죄송합니다.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박은식입니다. 고향 발전시켜보고자 서울에서 의사 그만두고 내려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화나 식사 흐름이 끊기길 원치 않는지 명함만 받고는 절반쯤은 본체만체한다. ‘지역구 유권자가 아니다’고 밝힌 이에게도 “주변에 꼭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오후 9시20분쯤 동구 양림동 한 교회 앞에서 선거 벽보를 처음 만났다. 박 후보는 반가운 듯 창문을 내리곤 휴대전화로 이를 촬영했다.
곧이어 정율성 거리에 있는 고깃집에 들어갔다. 50대 여성 3명이 앉은 한 테이블에 다가가 박 후보가 명함을 건네자 한 여성은 “국민의힘이냐?”고 묻고는 명함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10분 뒤 한 카페에서 만난 중년 여성 3명은 명함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박 후보에게 “젊고 미남”이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당구장에서 만난 60대 남성 두 명은 “프랑(플래카드)으로만 봤는디 인물 좋네” “나가 찍을 테니 할 말은 꼭 하고 사쇼”라고 했다.
“잘생긴 청년이 어찌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나”

《조선일보》를 27년째 보고 있다는 횟집 여주인은 박 후보를 반갑게 맞으며 격려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라며 손짓했다. 한창 술기운이 도는 40대 남성 7명이 앉은 테이블 앞에서 박 후보는 ‘이케아’ ‘코스트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테이블에선 ‘우리는 쇼핑 난민이다’는 말이 나왔다.
명함을 돌리며 민주당 당원부터 조국혁신 당원까지 다양한 이들을 만났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특히 저녁 시간대에 술집을 돌며 인사를 할 때면 박 후보는 ‘욕받이’가 돼야 했다.
박 후보는 “100명 중 2명은 ‘빨간색 싫다’며 적대적이다. 눈앞에서 명함을 버리는 사람, 찢는 사람도 있다. 내게 침을 뱉는 사람, 손가락으로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100명 중 3명은 응원해 주는데 정말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선거운동 첫날 저녁 인사에서 양림동과 백운동 일대를 돌며 200명가량을 만났다. 첫날 선거운동은 밤 10시경 끝났다.
2일 차(3월 29일)에는 계림오거리에서 오전 7시30분부터 출근 인사를 했다. 수도권은 주로 지하철역에서 출퇴근 인사(유세)를 한다. 광주는 지하철역과 실거주 지역 간에 거리가 있어 버스를 많이 탄다. 이에 아침 인사도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에서 주로 한다.
등굣길 여고생 두 명 중 한 명이 유세차 뒤를 지나며 “국민의당에서 나왔네”라고 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국민의힘”이라고 바로잡아줬다.
이날 아침 유세에서 박 후보는 보수의 유산인 건국, 호국, 산업화, 민주화를 주제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성수, 송진우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설은 15분씩 두 차례 반복했다.
“제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를 하다가 군의관이 돼 최전방에서 북한군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는 깨달았습니다. 안보의식이 갖춰지지 않으면 국가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요. 역사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이승만은 암흑 시기에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노예제 국가 조선, 군국주의 일본,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1인 독재 북한과 싸웠습니다. 미국에도 당당한 자세로 맞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습니다.
예전에 기생충이 너무 많아 학교에 채변(採便) 봉투를 갖고 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받은 돈으로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이 덕분에 기생충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우리 광주 5·18을 기억해준 대통령을 김대중 대통령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5·18특별법을 마련하고 망월동 묘역과 민주공원을 조성하는 데도 힘썼습니다.
우리 호남인들은 일제강점기 이승만을 도왔습니다. 김성수와 송진우 같은 분들이 학교를 짓고 기업을 만들고 신문사를 세워 건국에 기여했습니다.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산업화 때는 호남의 인재들이 기아자동차, 금호타이어, 정유 산업 단지에서 활약했습니다. 민주화 시기에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이런 광주가 어떻게 이재명, 조국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저는 비례대표 출마 제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광주에 출마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민 여러분을 직접 만나 한분 한분의 생각을 바꾸고 제 득표율을 올려놓는다면 제 동생 세대들은 선거비 보전을 걱정하지 않고 광주에서 보수정당 후보로 출마해 자기 의견을 당당히 밝힐 수 있게 됩니다.
광주는 보수당 후보가 당선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당선되면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기록됩니다. 여러분이 저를 한번 키워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후에는 경로당을 찾았다. 노인들은 젊은 청년을 만나 반가우면서도 박 후보를 걱정했다.
“잘생긴 청년이 어찌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나… 의사나 할 것이지… 하필 왜 2번으로….”
그러면 박 후보는 “고향을 발전시키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라며 “제가 표를 많이 받아야 민주당도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일부 시민은 박은식 후보의 젊은 외모로 인해 후보 본인이 아닌 선거운동원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30대 여성, “이케아!”

경로당 네 곳을 찾은 뒤 박 후보는 정율성로와 대남대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퇴근 유세를 했다. 유세차에 올라 정율성 동상 자리를 마주 보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동상까지는 약 45m 거리인데 현재 동상은 훼손된 후 철거돼 기단(基壇)만 남아 있었다.
중국 공산당 당원이었던 정율성은 6•25 남침 당시 중(中)•북(北) 군가를 작곡했다. 북한의 ‘조선인민해방군가’도 정율성이 지었다.
박 후보의 팬을 자처하는 73세 이부용(여)씨가 유세 현장으로 찾아왔다. 광주에 온 지는 2년이 됐다. 노무현‧문재인을 지지했으나 조국 사태 이후 민주당에 대해 지지를 철회했다고 했다. 이씨는 “박 후보가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건실하다. 민주당 사람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정율성 동상을 마주하고 벌인 유세는 오후 6시 40분에 끝났다. 쌀쌀한 날씨에 황사까지 있었다. 박 후보는 선거운동원들이 마음에 걸렸는지 “오늘도 고생 많았다”며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라”고 했다. 이에 옆에 있던 유세팀장인 서양길씨가 “10분만 더 하고 가자”고 했다. 선거운동원은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활동한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지를 호소했다. 박 후보에게 호감을 느낀 이들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며 한 다리씩 건너 건너는 소개하는 방식 박 후보에게 지역 유권자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직접 전화한다고 이들이 박 후보에게 투표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박 후보는 이것저것 다 해보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 선생님이시죠? 저는 이번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박은식이라고 합니다. □□□ 선생님 아시죠? 이 분이 꼭 ○○○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라고 하셔서 전화했습니다. 고향 발전 한 번 시키려고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꼭 좀 투표해 주십시오. 기호 2번 박은식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 후보는 밥을 먹을 때도 “회장님~”하며 전화를 걸고 받았다. 한창 바쁠 때는 밥 한 끼를 먹을 동안에도 소속을 알 수 없는 ‘회장님’ 네댓 명과 통화했다. 여기에 수시로 기자들이 전화를 해왔다. 선거 운동하기도 바쁜데, 의료대란에 대한 해법을 밝혔다. 이와 함께 의료계의 입장을 정부와 당에 전달하는 역할도 해야 했다.
저녁에는 동구 동남동으로 갔다. 이곳은 식당과 카페, 주점이 많아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광주의 젊은이들이 모인 곳이라 동남을 유권자 비중은 적다. ‘어디 사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두 명함을 전했다. ‘(박 후보) 지역구가 아니다’고 밝히면 박 후보는 “주변에 좀 많이 알려달라”고 말했다.
카페 야외 좌석에서 명함을 받은 이는 “우리 동네네. 근데 나는 빨간색은 안 뽑아”라고 했다.
술집으로 들어가 대학생 8명이 앉은 한 테이블에서 명함을 돌렸다. 전남대 의예과에 다니는 한 남성이 ‘의대 증원’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물리적으로 2000명은 수용할 수 없어요. 전남대병원에서도 한 해 받을 수 있는 인턴이 70~80명쯤 될 텐데 나머지는 서울로 가 수련을 받아야 해요. 보건복지부도 1000명 이상은 불가하다고 했죠. 대통령이 고집을 부렸어요”
8명이 모인 테이블에 지역구 유권자는 1명뿐이었다.
한 족발집에선 30대 여성 두 명이 명함을 유심히 본 뒤 공약 중 하나인 “이케아!”라고 말했다. 광주에 사는 젊은층의 소비 기반 시설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른바 MZ세대는 소비 형태를 SNS 등에 과시하며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광주에는 소비 욕구를 해소할 만한 마땅한 곳이 없다. 이에 대전까지 ‘원정 쇼핑’을 가는 이들도 많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광주에 복합쇼핑몰을 만들겠다는 공약은 광주 젊은이들이 윤석열 후보에게 투표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박 후보는 호남에 출마하는 후보치고는 선거운동원(약 28명)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간 광주에 출마한 보수정당 후보들은 득표율이 저조해 선거 운동 비용 보전도 힘들었다. 지출을 최소화하고자 선거운동원을 고용하지 않는 출마자도 있었다. 선거 운동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인건비와 식비 등이기 때문이다. 인력과 자금이 부족하니 선거 조직도 탄탄치 못했다.
유세팀장인 서양길씨는 “선거운동원이 부족하면 후보가 유세차에 올라 연설할 때 초라해 보인다”며 “선거운동원이 많을수록 후보에게 심리적으로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피로회복제는 22개월 딸과의 영상 통화
빨간 옷 입은 박은식 후보가 다가가니 “워메, 왜 나한테 오는 것이여”라고 하며 몸을 뒤로 빼거나 손사래를 치는 일도 있었다.
힘든 선거운동에서 박 후보에게 가장 큰 위로이자 피로회복제는 서울에 있는 22개월 딸 제이와의 영상통화다. 아내는 “아빠”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고 딸에게 ‘제이는 누구 딸?’ ‘제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제이가 보고 싶은 사람은?’과 같은 질문 두세 개를 계속 물었다.
박 후보의 선거를 돕기 위해 어머니 조현정씨도 지역구를 누비며 인사했다. 조씨는 2023년 2월 한 중학교의 교감으로 정년 퇴임했다.
“아들의 명함을 줄 때면 반드시 90도로 인사해요. 국민의힘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아들이라고 소개하면 반응이 좀 부드러워지죠.
‘엄마가 예쁘니 아들도 예쁘다’ ‘아들이 엄마를 영락없이 닮았다’고 하셔요. 그러면서 ‘(국민의힘 후보가) 한 사람이라도 돼야 쓸 것인디’라고 말해요. ‘의사나 하지 왜 2번으로 나왔어…’라고도 하시고요.”
박 후보는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고대 동양사를 전공한 박사다. 장남인 박 후보는 위로 누나가 있다. 조씨는 “만화 〈슬램덩크〉가 유행할 때는 은식이가 농구 선수가 되려고 농구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저는 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쳤어요. 문과인이 갖는 사고를 잘 이해하지 못하죠. 정치랑은 거리가 멀어요. 아직도 아들이 정치를 한다는 게 낯설죠. 광주 사람들은 선택권이 없어요. 어차피 민주당이 당선되니까요. 남편이 몸이 좋지 않아 한 달에 1~2번씩 아들이 광주에 내려왔어요. 아들은 광주가 처한 현실을 보고는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저는 얼굴이 팔리는 걸 싫어하는데 ‘아들을 위해 내 얼굴을 팔아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소수(少數)지만 보수 정당을 지지해온 것을 숨긴 채 살아온 유권자도 많이 만났어요.”
조씨에게 ‘왜 광주 사람들은 5‧18에 민감하느냐’고 물었다. 5‧18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조씨는 “광주 시민만이 겪은 독특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며 “다른 지역 사람들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이 때문에 호남 사람들은 정부의 공권력 행사를 항상 비판적으로 바라본다”고 했다.
“어머니가 마음을 굳게 먹으쇼!”
조씨는 차를 운전해 무등산 입구로 갔다. 등산로 2차선 도로를 가운데 두고 지그재그로 오가며 등산객에게 아들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선거운동하러 왔습니다. 동구에 멋진 후보가 나왔습니다. 제 아들입니다.”
등산을 마치고 막걸리를 마시는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탁자를 돌며 명함을 돌렸다.
“어짜쓰까. 우린 민주당인디. 무등산 케이블카 공약은 좋다.”
“의사나 할 것이지…. 어머니가 마음을 굳게 먹으쇼!”
“아이고 엄니가 열심이네. 안 되는 거 뭣 하러 나왔는지 모르것소. 15%는 받아야 쓰는디.”
명함을 건네고자 다가가니 “나는 민주당 당원이오”라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씨는 “자기 생각을 밝혀주면 오히려 고맙다”며 명함을 받지 않는 이들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 아들이 정치를 한다고 했을 때 어떠셨습니까.
“‘기껏 고생해 의사가 됐는데 왜 하필 우리 아들이 총대를 메야 하나’라고 생각했죠. 정치를 한번 시작하면 계속 정치를 해야 하니까 걱정도 됐고요.”
—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아들이 출마한 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아들의 선거 포스터로 바꿨어요. 10명 중 8명은 응원을, 2명은 ‘굳이 (국민의힘으로) 출마했느냐’며 걱정 섞인 반응이었죠.”
— 땅에 버려진 아들 명함을 보면 어떻습니까.
“속상하지만 그대로 놔둡니다. 그것도 아들을 알리는 방법이니까요.”
“민주당이 잘돼야 광주가 잘돼”
조씨는 자신이 다니는 무등산의 한 사찰도 들러 아들을 소개했다. 민주당 이탄희 의원의 팬이라는 50대 여성은 이런 반응이었다.
“국민의힘은 역적인디. 의사 허지 왜 전라도서 국민의힘이여. 지역감정은 대대손손 안 없어질 거요. 우리 자식도 서울 사는디 민주당만 뽑아. 민주당도 하는 짓이 똑같아서 난 선거 안 해부러요. 그래도 어머니 힘내쇼.”
3일 차 주말에는 박 후보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장인과 처제, 동서가 광주를 찾았다. 주중에는 직장에 다니는 박 후보의 아내와 딸 제이도 함께했다. 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에서 어머니 조씨가 명함을 건네면 다른 이들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조씨만 선거운동원으로 등록돼 있어 행인들에게 명함을 전했다.
장인은 대구 출신이다. 그는 “출마하는 것을 내심 반대했다. 굳이 하겠다면 비례대표나 서울에 출마하길 권했다”며 “그런데도 (사위는) 당선이 목적이 아니라 도전에 목적을 뒀다. 기백이 대단하다. 양분된 정치 지형을 타파하려는 사위의 도전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주말에는 지역구에서 걷기 행사가 있었다. 뒤늦게 일정을 파악해 현장에 도착하니 행사는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30명쯤 되는 파란색 복장 선거운동원 사이에서 홀로 빨간 옷을 입은 박 후보가 행인들에게 명함을 돌렸다.
이런 모습에 한 선관위 직원이 박 후보에게 “(여긴 사람이 없으니) 위로 올라가 보라”고 했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다 벤치에 앉은 70~80대 여성 3명을 만나 인사했다. 박 후보가 지지를 호소하자 “윤석열이가 나라를 망하게 해부렀는디 뭔 이야기를 혀”라고 했다. 이에 박 후보가 “경쟁해야 민주당도 발전한다”고 했지만 “그런 소리 하지 말어. 민주당이 잘돼야 광주가 잘돼”라는 답을 들었다.
박은식 후보를 수행했던 박지호씨는 “광주는 모두 민주당과 연계돼 있다”며 “민주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박씨도 6년 전에는 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4월 2일에는 여론조사 결과가 두 곳에서 발표됐다. 한 곳은 지지율 5%, 다른 곳은 8%였다. 박 후보의 예상보다 훨씬 낮은 수치였다. 4월 3일에는 TV 토론회가 있었다. 박 후보가 민주당 안도걸, 무소속 김성환 후보보다 잘했다는 평이 나왔다.
“득표율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
선거 후반부로 갈수록 박 후보는 지쳐 보였다. 그는 “여론조사 결과가 예상보다 좋지 않아 힘이 빠진다”고 했다. 명함을 주고 이야기 좀 하려고 다가가면 ‘이미 사전투표를 했다’고 밝히는 이들도 많았다.
선거운동 시작 후 두 번째 맞은 주말부터 목 상태도 나빠졌다. 일상적인 대화는 괜찮았지만 고음을 내기 힘들었다. 목이 잠기는 바람에 힘겹게 연설했다. 몸이 좋을 때는 한 번 유세할 때 15분씩 2번을 했던 것도 5분씩 하는 걸로 줄였다.
어머니 조씨는 “어제(7일)부터 아들에게 꿀물을 먹이고 있다”고 했다.
선거 조직이 탄탄한 후보는 이른바 찬조 연설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박은식 후보는 많은 부분을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박 후보는 “사전투표로 자신을 찍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힘이 된다”면서도 “지역구에선 민주당이 싫어 저를 찍고, 비례는 조국혁신당에 투표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선거 후반부가 될수록 박 후보의 선거운동은 ‘하소연’으로 바뀌었다.
“도와주십시오. 어차피 민주당 후보가 당선됩니다. 득표율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 한 번만 눈 딱 감고 저를 뽑아주십시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지지한 변호사에게도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다. 한 슈퍼에 들어가니 그 주인은 “어머니가 좀 전에 들러 이미 명함을 주고 갔다”고 말했다.
4월 9일 선거운동 마지막 날 유세는 집 근처 삼거리에서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머리카락도 다소 정리가 덜된 모습이었다. 유세차에 올라 양 손가락을 V자로 만들고 들어 올려 좌우로 흔들었다. 선거운동 초기와 비교하면 손의 높이도 점점 내려갔다. 연설도 4분40초 만에 끝냈다. 그 뒤로 김용임 시의원, 양혜령 전 시의원, 어머니 조현정씨가 이어갔다.
다른 이가 연설을 하는 동안 박 후보는 유세차에서 내려 거리를 돌며 명함을 돌렸다. 유동 인구가 적어 의미가 없어 보였지만 박 후보는 T자형 교차로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려고 했다.
“박 후보, 최선 다했다”

공식 선거 운동 마지막 합동 유세는 오후 6시 계림오거리에서 열렸다. 선거 운동 기간 중 가장 많은 지지자(약 40명)가 모였다.
민생당 비대위원으로 활동했던 한 연사는 찬조연설에서 “옷을 살 때도 가격, 색깔, 디자인을 본다. 하지만 광주는 한 정당만 무조건 지지했다. 불량식품이어도 먹어야 했다”며 “꽃길 대신 험한 길을 택한, 유능한 젊은 후보를 선택해달라”고 했다.
조선대 4학년 정현로씨가 유세차에 올라 찬조연설을 했다.
“정권을 심판하면 광주가 나아집니까? 제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바로 왔겠습니까. 박은식 후보에게 한 표 부탁드립니다. 광주 청년들은 광주에서 살고 싶습니다.”
박 후보 옆에서 스쳐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배꼽인사를 하던 어머니도 마이크를 들고 “박은식은 소박하고 부지런하며 광주 시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박은식 후보는 “9대 1인 정치 구도를 8대 2, 7대 3으로 바꿔야 젊은이들이 민주당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 합동 유세를 마친 유세단은 산수동 문화마당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박 후보는 버스킹(야외 공연)을 하며 노래 3곡을 불렀다. 선거운동원들의 선거운동은 오후 8시부로 종료됐다. 선거운동을 마치고 선거사무소에 모인 운동원들은 13일 동안 입고 썼던 외투, 빨간 모자, 장갑, 선거사무원 표찰을 반납하고 뒤풀이를 가졌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자와 마스크가 미처 가리지 못한 광대 부위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운동원들은 “고생했다”고 서로 격려했고 박 후보는 선거사무소를 떠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선거운동원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후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며 “아들 같아서 더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여러 차례 선거운동원 경험이 있는 A씨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박 후보는 충분치 않은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했다”면서 “곧장 당선되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니라면 15%를 넘겨 선거비용이라도 보전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들 덕분에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어머니)
뒤풀이를 마친 모자(母子)는 마지막까지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오후 9시30분경 단둘이 선거사무소를 나왔다. 이때 안도걸 후보 측은 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에 모여 일종의 전야제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백운동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를 하는 동안 박 후보는 한 카페로 들어가 “어차피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다. 제가 한 표라도 더 받아야 중앙정부에 할 말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어 어머니 조씨도 카페로 와 “제가 은식이를 백운동에서 낳았습니다. 초등학교 때까지 여기서 살았어요”라고 했다. 카페 손님은 “어머니가 나이 드셔서 아들 때문에 고생이다. 한 표라도 더 받으쇼. 오늘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하쇼”라고 했다.
30분쯤 인사를 하니 손에 쥔 명함이 다 떨어졌다. 어머니는 약 500m 떨어진 차로 뛰어가 명함을 갖고 왔다. 오후 10시24분에는 명함이 동났다. 조씨는 지나가는 이들에게 육성으로 아들을 뽑아달라고 했다.
박 후보는 이날 오후 11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비대위원들은 선거 당일 한데 모여 개표 방송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조씨는 광주송정역에 아들을 데려다주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 덕분에 새로운 걸 많이 배웠습니다. 흔히들 ‘소중한 한 표’라고 말하는데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선거운동하는 이들을 보곤 형식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알게 됐죠. 정년 이후 좁게 살았던 제게 아들이 공동체를 위해 사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가르쳐줬어요. 정년 후 느꼈던 우울감이 사치였던 거죠.”
조씨는 “과거에는 광주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면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아주 부족한 사람’ ‘생각을 안 하는 사람’ ‘정부 편에 붙어 돈을 탐내는 사람’으로 취급했다”며 “하지만 아들이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출마했으니 사람들에겐 신기했을 것이다. 선입견으로 뭔가 허울을 씌우고 싶은데 그게 안 됐다. ‘의사인데 왜 출마했을까?’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고 했다.
— 어머니가 더 고생한 것 같습니다.
“교사로 지내면서 아들 운동회도 못 가고, 소풍 갈 때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줬어요. 졸업식도 갈 수 없었고요. 이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선거운동을 하며 한 3분의 1은 갚은 거 같아요.”
“정말 정치하겠다면 밑바닥부터 배우는 게 맞다”
—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면 어땠을까요.
“쉽게 정치를 시작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얼마나 교만해지겠습니까? 사람을 직접 만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선거운동원들이 얼마나 힘들게 선거운동을 하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정말로 정치를 하겠다면 밑바닥부터 배우는, 지금 이 방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걸었으면 합니다.”
어머니 조씨는 예비 후보 기간을 포함해 명함 약 1만 장을 돌렸다. 그는 아들의 도전을 계속해서 응원하겠다고 했다.
박 후보는 총선 다음 날인 지난 11일 오후 5시 광주에 도착했다. 4시간 동안 운전을 했다. 피곤한지 입술이 하얗게 떠 있었다. 아버지가 입원한 요양병원에 들른 뒤 곧바로 선거를 도운 이들을 만나 위로했다.
통상 선거 캠프에선 소셜미디어(SNS) 전담 직원을 둔다. 박은식 후보는 인건비를 아끼고자 선거운동 기간 소셜미디어를 본인이 관리했다. 이 때문에 활동상이 실시간으로 전파되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 뒤에나 이틀 치를 한 번에 몰아서 올리기도 했다. 4월 7일 활동을 8일 오후 8시45분에 올린 게 마지막 선거운동 게시물이다. 지난 4월 8~9일의 활동상은 올리지도 못했다.
— 9일 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무슨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어요. 그날 밤도 마지막까지 투표 독려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선거운동 기간에 매일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날도 문자에 받는 분의 이름을 일일이 입력해 한 통씩 총 200통을 썼어요. 정성을 담고 싶어 전체 문자는 안 보냈어요.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리더군요.”
—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있습니까.
“대의(大義)를 위해서죠. 한 표라도 더 받고 싶었습니다. 비대위원을 지낸 사람이 10%도 받지 못하면 도대체 어떤 청년이 도전하겠습니까? 10%는 꼭 넘기고 싶었어요.”
— 출구 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 당 지도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여의도연구원도 자체 조사를 했어요. ‘크게 지지는 않는다’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방송 3사가 실시한 출구 조사 결과 ‘국민의힘이 100석도 건지기 힘들다’고 발표되자 다들 크게 당황했죠.”
“국힘, 적어도 뻔뻔하진 않았다”
— 총선 결과를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죠. 이번 선거를 통해 지도자의 중요성, ‘대권(大權)’이 왜 대권인지 알게 됐어요. 지역에서 피라미가 물결을 일으키려 해도 중앙에서 고래가 움직이면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대통령의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이른바 집토끼도 잘 챙겨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자기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투표장에 가는 게 굉장히 수고로운 겁니다. 이분들이 투표장까지 나갈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 당의 선거 전략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중도층의 선택을 받으려면 이성(理性)보다는 감성에 호소해야 합니다. 저 역시 말이 너무 길었어요. ‘광주가 이래선 안 된다’ ‘10%는 받아야 할 말이 있다’고 말했는데 통하지 않았어요.”
—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내세운 ‘뉴타운’처럼 선거판을 관통하는, 보수우파의 가치를 대변하는 세 음절 이하의 단어가 필요해요. ‘민생’? 너무 막연해요. 민생은 어차피 ‘대파’로 깨졌잖아요. ‘586 청산’? 민주당은 친명(親明)으로 이미 대체했고요. 이조심판? 검사들 특유의 사고방식이 담겼죠.”
— ‘시스템 공천’이었다고 말합니다.
“동의하지 않아요. 그 ‘시스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후보자를 점수화한 뒤 사심(私心)을 배제한다’는 뜻인 듯한데…. 선거는 이기는 게 우선입니다. 억지로 감동을 주려고 하는 순간 실패합니다.”
—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민주당보다 나았던 점은요.
“이재명, 양문석, 김준혁 같은 이들은 공천에서 배제했습니다. 적어도 뻔뻔하진 않았습니다.”
— 현실 정치를 겪어본 소감은요.
“‘인생은 실전’이라는 말이 있죠. 관찰자와 행위자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절감했어요. 마음을 다하면 광주에서도 통할 줄 알았는데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나이브(naive·순진)’했어요.”
박 전 비대위원은 “무관심할 때 가장 힘들다”고 했다.
— 비례대표를 권유받았는데 순번은요.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광주로 올 생각이었으니까요. 서울에 좋은 곳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 이번에 당선된 곳입니까?
“네.”
— 인요한 혁신위원장에 앞서 위원장을 제의받았는데 거절했습니다. 총선 참패를 예상한 것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 왜 거절했습니까.
“이제 막 정치를 경험하는 제겐 너무 큰 자리였죠.”
“보수의 가치 담긴 호남의 상징 발굴해야”
박 전 비대위원은 “5·18을 초월하는 주제를 호남에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5·18은 반미(反美)운동이 아닙니다. 친미(親美)운동이었습니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미국이 광주에 개입해 신군부를 견제하고 자신들을 보호해주길 원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이러함에도 좌파 운동권은 5·18에 반미를 덧칠했습니다. 여기에 우파는 좌파가 왜곡해놓은 5·18과 호남을 향해 ‘인종주의적’ 비난을 일삼고 있습니다.”
—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결정권자라면 ‘국민의힘은 5·18묘지가 아니라 광주의 산업단지로 가자’고 할 겁니다. 기아자동차, 금호타이어를 찾아가 현장의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해주는 겁니다. 이게 혁신입니다. 물론 5·18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에는 당연히 참석해야죠.
보수의 가치가 담긴 새로운 호남의 상징을 발굴해야 합니다. 김성수와 송진우 생가(生家)에 들러야 합니다. 호남인들이 독립을 위해 재산을 헌납하고, 학교를 세우고 공장을 만들고 민족 계몽을 위해 언론사를 차린 역사를 기려야죠. 좌파가 5·18로 우파를 공격할 때면 주눅 들지 말고 ‘망월동을 누가(김영삼) 만들어줬느냐’고 당당하게 따져야 합니다.”
박 전 비대위원은 “1965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을 15만 표 차로 이겼다. 호남 유권자의 60%, 35만 표가 박정희를 찍었다”며 “호남 보수, 호남 우파를 재조명하고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 보수우파의 가치를 강조하는데 보수는 무엇입니까.
“전통을 존중하며 점진적 발전을 추구합니다. 반공주의, 경제적 자유(시장경제), 작은 정부를 지향하죠. 헌신·희생도 중시합니다. 하지만 이 중 어느 특정 가치에만 매몰돼선 안 돼요. ‘반공이면 다 좋다’는 식의 접근은 우리 안의 파시즘을 키울 뿐이죠. 5·18 폄훼가 대표적이죠.”
“일터로,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 보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무(尙武)정신으로 스스로 채찍질해야만 합니다. 한반도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충돌하는 곳입니다. 지정학적 숙명이죠. ‘셰셰(謝謝·고맙다)’라고 말하며 대륙에 종속되길 자처하는 이들이 의회를 장악했어요.
오늘날 정치적 불안의 뿌리는 남북 분단입니다. 북한을 해방시킬 때까지 잘 버텨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보수우파는 좀 더 희생, 헌신해야 합니다.”
— 현실 정치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과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기에 후회하지 않아요. 역설적으로 선거비용 보전도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내 호남의 보수우파 청년들의 정치 도전을 주저하게 만든 것 같아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 의료대란, 어떻게 수습해야 합니까.
“저는 의료보험으로 먹고 사는 내과 봉직의(페이닥터)입니다. 현실을 매일 체감합니다. 2000명은 불가능합니다. 350~500명 선에서 더 이상 환자가 피해보지 않도록 하루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해요. 350명은 의약분업 당시 줄였던 인원인데 상반된 이해당사자들(의사‧환자 단체)도 500명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일터로,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오늘(4월 11일) 아침에 취직할 병원에서 면접을 봤어요. 곧 출근합니다.”
박 전 비대위원은 4월 11일 오전 비대위원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비대위원이 꽃길만을 걷지 않고 희생했다는 것도 기억해달라”고 했다.
“호남 위한 햇볕정책 필요”
선거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나 박은식 전 비대위원의 어머니 조현정씨와 통화를 했다. 정신 없었던 선거를 마치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조씨는 “광주에는 다수(多數)가 흘리는 눈물, 소수(少數)의 눈물이 각각 따로 있다. 이 두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보수가 노력해야 한다. ‘호남을 위한 햇볕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광주(호남)시민은 오래전부터 국가, 정부로부터 ‘소외당했다’는 서운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민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눈물이죠. 이들에게 유일한 선택지는 민주당이었습니다.
이 눈물이 그칠만하면 민주당은 다시 광주 시민을 이용했어요. 선거철만 되면 한(恨), 5·18로 호남을 정서적으로 인질 삼았죠.
또 다른 눈물은 국민의힘, 보수당을 지지하는 소수의 눈물입니다.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이들은 호남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이 두 눈물을 극복하려면 보수가 ‘광주, 호남을 위한 햇볕정책’을 펴야 해요. 호남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듣고, 유능한 사람도 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중앙에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식이 없는 거 같아 아쉬워요. 쉽진 않겠지만 머리를 맞대 서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2016년 군의관이 돼 최전방인 강원도 철원 3사단(백골부대) GOP부대에서 복무했다. 철책선을 바로 앞에 두고 북한군을 지켜봤다. 평화의 소중함만이 강조된 세태에서 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안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호남에서 나고 자라며 몸에 밴 생각과 관념이 현실과 충돌할 때면 무엇이 맞는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사이버대에 등록해 법학과 경영학도 공부했다. 그러면서 보수(保守)의 가치, 정신을 알게 됐다.
사회로 복귀하고는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며 호남의 맹목적 민주당 지지를 비판했다. 시민단체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를 맡아 ‘호남 보수’를 재조명하며 “호남이 변해야 한다”고 외쳤다. 특히 정율성 기념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기념 사업 반대 운동도 했다. 그러던 중 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의 권유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됐다.
칼럼 쓰고 시민단체 조직해 호남 보수 再建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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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남도청이 내려다보이는 박은식 후보의 선거사무소. 5층에 자리했다. 오른쪽 표지판에는 정율성 생가(동그라미)를 알리는 표시가 있다. |
공식 선거운동 시작일인 지난 3월 28일 광주를 찾았다. 박은식 후보의 선거사무실은 옛 전남도청 광장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빌딩의 5층이었다. 5·18 당시 시민군이 최후 저항한 곳이 전남도청이다. 이날 오전 6시20분 아침 출근 인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후 5시 조선대병원 인근 남광주역 5번 출구 앞 교차로에서 공식 선거운동 출정식을 가졌다. 이곳은 동구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빨간 옷을 입은 선거운동원(선거사무원) 사이에 키가 185cm쯤 돼 보이는 훤칠한 젊은이가 야구 점퍼를 입고는 행인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박 후보를 실물로 본 건 처음이었다.
오거리 교차로엔 이번 선거에 출마한 이들의 공약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박 후보는 ‘무등산 케이블카 설치’를 적었다. 선거운동원, 박 후보 지지자, 선관위 직원 등 약 40명이 모였다. 비를 피해 일부는 고가도로 아래서 출정식을 지켜봤다.
유세차에 오른 송기석 전 의원은 “박은식 후보는 어느 정당에서든 비례대표 당선권에 들어가는 후보다. 하지만 동남을에 출마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광주의 정치 구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신념을 갖고 나왔다. 보수 정당 불모지인 광주의 변화를 위해 박은식 후보를 선택해달라. 우리가 박은식 후보를 잘만 쓰면 호남을 대표하는 보수 대권 주자로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제가 당선되면 역사교과서에 실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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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공식 선거운동 첫날 박은식 후보가 조선대병원 앞에서 출정식 유세를 하고 있다. 왼편에는 조씨의 어머니 조현정씨. |
“광주의 아들 박은식입니다. 대성초, 금남중, 문성고 나왔습니다. 저는 광주에 있을 때 김대중과 노무현의 민주당을 좋아했습니다. 그때의 민주당은 도덕적으로 앞서갔고 지지층의 반대에도 국익(國益)을 위해 한미(韓美)FTA를 추진하고 이라크에 파병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어떻습니까. 당대표부터 전과(前科) 4범입니다.
서울에서 의사로 일하며 광주 시민이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광주의 변화를 위해 언론에 칼럼을 쓰고 시민단체도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이를 인정받아 국민의힘 비대위원이 됐습니다. 광주를 바꾸고 발전시키기 위해 쉽고 편한 길보다는 직접 지역구로 출마해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광주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충장로에는 공실(空室)이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광주를 떠나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을 피 흘리게 한 공산주의자 정율성을 위해 광역시 재정자립도 꼴찌인 광주가 세금을 퍼붓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정율성 기념 사업도 완전히 폐지하겠습니다.
저는 실현 가능한 공약을 말씀드립니다. 아름다운 무등산 경치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케이블카를 설치하겠습니다. 충장로에서 케이블카가 출발하도록 해 많은 사람이 충장로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광주 시민이 저 멀리 대전까지 쇼핑 가는 일 없도록 이케아(IKEA), 코스트코를 반드시 유치하겠습니다. 전남대·조선대병원을 증축해 광주 시민 건강도 챙기겠습니다. 광주 정신,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겠습니다.
광주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선되면 이는 역사교과서에 실릴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는 김대중을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큰 정치인이 될 수 있도록 저를 찍어주십시오. 그래야만 광주가 발전하고 민주당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1 학생, “이-조 연합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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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 한 지지자가 골목 인사를 하는 박은식 후보를 찾아왔다. 박 후보는 응원해주는 분을 만날 때 가장 힘이 난다고 했다. |
교복을 입은 고1 남학생도 박 후보와 사진을 찍었다. 지역구 내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조모씨는 “이재명·조국 연합이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할까 봐 걱정”이라며 “과거 전북에서 보수당 후보가 당선된 것처럼 광주에서도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은식 비대위원의 어머니 조현정씨는 점퍼 뒷면에 흰색으로 ‘엄마’라고 적었다. 조씨는 “온 가족이 아들의 출마를 말렸다”면서도 “아들 덕분에 생전 처음 선거운동을 하고 유세차에도 올랐다”고 말했다.
박 후보에게 공식 선거운동에 나서는 각오를 물었다. 그는 “선거운동원들에게 ‘완주(完走)가 곧 승리다. 법을 어기거나, 다치지 말자. 안전하게 선거를 치르자’고 했다”고 했다. 어젯밤 무슨 꿈을 꿨는지 물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마치 모델 같은 신체 비율에 키가 몇인지도 물었는데 182cm라고 답했다.
박은식 후보는 공식 선거운동 첫날을 맞아 지지 요청 문자 메시지를 주민들에게 보냈는데 욕설이 담긴 답장도 받았다.
박은식 후보는 호남에서 보수 정당, 국민의힘은 “무관심 그 자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힘에 관심 자체가 없어요. 이곳에선 제2당이 진보당이에요. (안철수 의원이 이끌었던) 국민의당도 보수 정당이라고 생각해요. 국민의힘과 국민의당도 잘 구분하지 못해요. 아직도 ‘국민의힘’보다는 ‘한나라당’이라는 명칭이 입에 익어요. 행사장에 가면 진보당 사람이 앉을 자리는 있어도 국민의힘은 없어요. 으레 국민의힘은 참석을 안 해왔으니 그렇게들 생각하는 거죠. 직접 경험해보면 ‘참 쉽지 않구나’를 느낍니다.”
박 후보의 선거운동은 광주광역시 시의회(23명)에서 유일한 국민의힘 소속인 김용임 시의원이 돕고 있다. 김 시의원은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의 선임비서관(5급 상당)을 지냈다. 4선을 한 박 전 부의장은 이 지역에서 3번 당선됐다.
김용임 시의원은 박 후보에 대한 반응이 경로당에서 가장 좋다고 말했다. 젊고 훤칠한 사내가 찾아와 살갑게 대하니 노인들이 반가워한다고 했다.
저녁 일정으로 지역 기업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했다. 빨간색 잠바를 입고 행사장에 갔지만 무관심이었다. 양복 입은 중년 남성들이 포도주잔과 포크를 들어 올릴 때 박 후보는 테이블을 돌며 명함을 돌렸다. 곧이어 300명가량이 참석하는 행사에도 참석해 허리를 굽히고 한 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춰 자신을 알렸다.
“여의도연구원, 여론 조사 안 해줘”
— 왜 하필 지역구가 동남을입니까.
“동남을은 제가 나고 자란 곳이에요. 부모님도 사시고요. 정율성 문제도 거론하고 싶었습니다. 득표율만을 놓고 보면 동남갑이 더 유리하지만요.”
지난 대선에서 동남갑 지역의 윤석열 후보 득표율은 광주 내 다른 지역보다 높았다.
정율성 생가 앞을 지날 때였다.
— 정율성을 알리는 시설과 표지가 많네요.
“바로잡아야죠. 광주 시민을 피 흘리게 한 공산주의자를 광주 시민의 혈세로 기념할 순 없잖아요.”
박은식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3수를 해 대학에 갔고 그 뒤로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해왔어요. 코로나19가 유행할 땐 코로나19 전담 병원에서 일했죠. 호남의 변화를 위한 문제 제기를 열심히 한 덕분에 현실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죠. 당장 감당해야 할 손해 같은 건 생각지 않고 ‘3개월 동안은 나라를 위해, 고향을 위해 한번 부딪혀보자’는 각오로 출마한 겁니다.”
— 자체 여론조사는 해봤습니까.
“선거비용 보전 때문에 여의도연구원에 요청했는데 안 해주더라고요. 득표율을 알아야 선거비용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 계획할 수 있거든요. 다행인 건 후원금은 채웠어요.”
득표율 15%를 넘겨야 선거운동비(사용총액 제한 있음, 일부 항목 보전 제외)를 전액 보전받는다(10% 이상 15% 미만은 절반). 다만 사무실 임차료 등은 보전 대상이 아니다. 15%를 넘기면 대체로 선거 기간 쓴 돈의 80~90%는 돌려받는다. 박은식 후보는 ‘10% 이상’을 득표해 반액(半額)을 보전받는다는 가정하에 예산을 짰다.
이날 아침 한동훈 위원장이 ‘국회 세종 완전 이전’ 발언을 했다. 이를 두고 박 후보는 “감동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세종으로 내려간 행정부처를 서울로 되돌리고 세종에는 다른 걸 해준다고 말했어야 해요. 지금 공무원들이 서울과 세종을 오가며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면 수도를 완전히 세종으로 옮기든가요. 국민을 위해 행정효율성을 올리겠다고 주장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오후 9시쯤 선거사무실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는 명함을 돌리기 위해 남구 백운동으로 갔다. 백운동은 박 후보가 태어난 동네다. 술집과 식당을 돌며 인사했다. 명함을 돌리기 전에는 업주나 종업원의 허락을 받았다. 대체로 명함 돌리는 걸 허락했는데 거절하는 곳도 있었다. 매장이 바쁘거나 적대적인 곳은 명함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나누시는데 죄송합니다.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박은식입니다. 고향 발전시켜보고자 서울에서 의사 그만두고 내려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화나 식사 흐름이 끊기길 원치 않는지 명함만 받고는 절반쯤은 본체만체한다. ‘지역구 유권자가 아니다’고 밝힌 이에게도 “주변에 꼭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오후 9시20분쯤 동구 양림동 한 교회 앞에서 선거 벽보를 처음 만났다. 박 후보는 반가운 듯 창문을 내리곤 휴대전화로 이를 촬영했다.
곧이어 정율성 거리에 있는 고깃집에 들어갔다. 50대 여성 3명이 앉은 한 테이블에 다가가 박 후보가 명함을 건네자 한 여성은 “국민의힘이냐?”고 묻고는 명함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10분 뒤 한 카페에서 만난 중년 여성 3명은 명함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박 후보에게 “젊고 미남”이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당구장에서 만난 60대 남성 두 명은 “프랑(플래카드)으로만 봤는디 인물 좋네” “나가 찍을 테니 할 말은 꼭 하고 사쇼”라고 했다.
“잘생긴 청년이 어찌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나”

《조선일보》를 27년째 보고 있다는 횟집 여주인은 박 후보를 반갑게 맞으며 격려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라며 손짓했다. 한창 술기운이 도는 40대 남성 7명이 앉은 테이블 앞에서 박 후보는 ‘이케아’ ‘코스트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테이블에선 ‘우리는 쇼핑 난민이다’는 말이 나왔다.
명함을 돌리며 민주당 당원부터 조국혁신 당원까지 다양한 이들을 만났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특히 저녁 시간대에 술집을 돌며 인사를 할 때면 박 후보는 ‘욕받이’가 돼야 했다.
박 후보는 “100명 중 2명은 ‘빨간색 싫다’며 적대적이다. 눈앞에서 명함을 버리는 사람, 찢는 사람도 있다. 내게 침을 뱉는 사람, 손가락으로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100명 중 3명은 응원해 주는데 정말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선거운동 첫날 저녁 인사에서 양림동과 백운동 일대를 돌며 200명가량을 만났다. 첫날 선거운동은 밤 10시경 끝났다.
2일 차(3월 29일)에는 계림오거리에서 오전 7시30분부터 출근 인사를 했다. 수도권은 주로 지하철역에서 출퇴근 인사(유세)를 한다. 광주는 지하철역과 실거주 지역 간에 거리가 있어 버스를 많이 탄다. 이에 아침 인사도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에서 주로 한다.
등굣길 여고생 두 명 중 한 명이 유세차 뒤를 지나며 “국민의당에서 나왔네”라고 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국민의힘”이라고 바로잡아줬다.
이날 아침 유세에서 박 후보는 보수의 유산인 건국, 호국, 산업화, 민주화를 주제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성수, 송진우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설은 15분씩 두 차례 반복했다.
“제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를 하다가 군의관이 돼 최전방에서 북한군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는 깨달았습니다. 안보의식이 갖춰지지 않으면 국가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요. 역사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이승만은 암흑 시기에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노예제 국가 조선, 군국주의 일본,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1인 독재 북한과 싸웠습니다. 미국에도 당당한 자세로 맞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습니다.
예전에 기생충이 너무 많아 학교에 채변(採便) 봉투를 갖고 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받은 돈으로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이 덕분에 기생충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우리 광주 5·18을 기억해준 대통령을 김대중 대통령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5·18특별법을 마련하고 망월동 묘역과 민주공원을 조성하는 데도 힘썼습니다.
우리 호남인들은 일제강점기 이승만을 도왔습니다. 김성수와 송진우 같은 분들이 학교를 짓고 기업을 만들고 신문사를 세워 건국에 기여했습니다.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산업화 때는 호남의 인재들이 기아자동차, 금호타이어, 정유 산업 단지에서 활약했습니다. 민주화 시기에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이런 광주가 어떻게 이재명, 조국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저는 비례대표 출마 제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광주에 출마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민 여러분을 직접 만나 한분 한분의 생각을 바꾸고 제 득표율을 올려놓는다면 제 동생 세대들은 선거비 보전을 걱정하지 않고 광주에서 보수정당 후보로 출마해 자기 의견을 당당히 밝힐 수 있게 됩니다.
광주는 보수당 후보가 당선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당선되면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기록됩니다. 여러분이 저를 한번 키워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후에는 경로당을 찾았다. 노인들은 젊은 청년을 만나 반가우면서도 박 후보를 걱정했다.
“잘생긴 청년이 어찌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나… 의사나 할 것이지… 하필 왜 2번으로….”
그러면 박 후보는 “고향을 발전시키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라며 “제가 표를 많이 받아야 민주당도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일부 시민은 박은식 후보의 젊은 외모로 인해 후보 본인이 아닌 선거운동원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30대 여성, “이케아!”

경로당 네 곳을 찾은 뒤 박 후보는 정율성로와 대남대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퇴근 유세를 했다. 유세차에 올라 정율성 동상 자리를 마주 보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동상까지는 약 45m 거리인데 현재 동상은 훼손된 후 철거돼 기단(基壇)만 남아 있었다.
중국 공산당 당원이었던 정율성은 6•25 남침 당시 중(中)•북(北) 군가를 작곡했다. 북한의 ‘조선인민해방군가’도 정율성이 지었다.
박 후보의 팬을 자처하는 73세 이부용(여)씨가 유세 현장으로 찾아왔다. 광주에 온 지는 2년이 됐다. 노무현‧문재인을 지지했으나 조국 사태 이후 민주당에 대해 지지를 철회했다고 했다. 이씨는 “박 후보가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건실하다. 민주당 사람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정율성 동상을 마주하고 벌인 유세는 오후 6시 40분에 끝났다. 쌀쌀한 날씨에 황사까지 있었다. 박 후보는 선거운동원들이 마음에 걸렸는지 “오늘도 고생 많았다”며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라”고 했다. 이에 옆에 있던 유세팀장인 서양길씨가 “10분만 더 하고 가자”고 했다. 선거운동원은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활동한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지를 호소했다. 박 후보에게 호감을 느낀 이들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며 한 다리씩 건너 건너는 소개하는 방식 박 후보에게 지역 유권자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직접 전화한다고 이들이 박 후보에게 투표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박 후보는 이것저것 다 해보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 선생님이시죠? 저는 이번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박은식이라고 합니다. □□□ 선생님 아시죠? 이 분이 꼭 ○○○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라고 하셔서 전화했습니다. 고향 발전 한 번 시키려고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꼭 좀 투표해 주십시오. 기호 2번 박은식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 후보는 밥을 먹을 때도 “회장님~”하며 전화를 걸고 받았다. 한창 바쁠 때는 밥 한 끼를 먹을 동안에도 소속을 알 수 없는 ‘회장님’ 네댓 명과 통화했다. 여기에 수시로 기자들이 전화를 해왔다. 선거 운동하기도 바쁜데, 의료대란에 대한 해법을 밝혔다. 이와 함께 의료계의 입장을 정부와 당에 전달하는 역할도 해야 했다.
저녁에는 동구 동남동으로 갔다. 이곳은 식당과 카페, 주점이 많아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광주의 젊은이들이 모인 곳이라 동남을 유권자 비중은 적다. ‘어디 사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두 명함을 전했다. ‘(박 후보) 지역구가 아니다’고 밝히면 박 후보는 “주변에 좀 많이 알려달라”고 말했다.
카페 야외 좌석에서 명함을 받은 이는 “우리 동네네. 근데 나는 빨간색은 안 뽑아”라고 했다.
술집으로 들어가 대학생 8명이 앉은 한 테이블에서 명함을 돌렸다. 전남대 의예과에 다니는 한 남성이 ‘의대 증원’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물리적으로 2000명은 수용할 수 없어요. 전남대병원에서도 한 해 받을 수 있는 인턴이 70~80명쯤 될 텐데 나머지는 서울로 가 수련을 받아야 해요. 보건복지부도 1000명 이상은 불가하다고 했죠. 대통령이 고집을 부렸어요”
8명이 모인 테이블에 지역구 유권자는 1명뿐이었다.
한 족발집에선 30대 여성 두 명이 명함을 유심히 본 뒤 공약 중 하나인 “이케아!”라고 말했다. 광주에 사는 젊은층의 소비 기반 시설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른바 MZ세대는 소비 형태를 SNS 등에 과시하며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광주에는 소비 욕구를 해소할 만한 마땅한 곳이 없다. 이에 대전까지 ‘원정 쇼핑’을 가는 이들도 많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광주에 복합쇼핑몰을 만들겠다는 공약은 광주 젊은이들이 윤석열 후보에게 투표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박 후보는 호남에 출마하는 후보치고는 선거운동원(약 28명)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간 광주에 출마한 보수정당 후보들은 득표율이 저조해 선거 운동 비용 보전도 힘들었다. 지출을 최소화하고자 선거운동원을 고용하지 않는 출마자도 있었다. 선거 운동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인건비와 식비 등이기 때문이다. 인력과 자금이 부족하니 선거 조직도 탄탄치 못했다.
유세팀장인 서양길씨는 “선거운동원이 부족하면 후보가 유세차에 올라 연설할 때 초라해 보인다”며 “선거운동원이 많을수록 후보에게 심리적으로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피로회복제는 22개월 딸과의 영상 통화
빨간 옷 입은 박은식 후보가 다가가니 “워메, 왜 나한테 오는 것이여”라고 하며 몸을 뒤로 빼거나 손사래를 치는 일도 있었다.
힘든 선거운동에서 박 후보에게 가장 큰 위로이자 피로회복제는 서울에 있는 22개월 딸 제이와의 영상통화다. 아내는 “아빠”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고 딸에게 ‘제이는 누구 딸?’ ‘제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제이가 보고 싶은 사람은?’과 같은 질문 두세 개를 계속 물었다.
박 후보의 선거를 돕기 위해 어머니 조현정씨도 지역구를 누비며 인사했다. 조씨는 2023년 2월 한 중학교의 교감으로 정년 퇴임했다.
“아들의 명함을 줄 때면 반드시 90도로 인사해요. 국민의힘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아들이라고 소개하면 반응이 좀 부드러워지죠.
‘엄마가 예쁘니 아들도 예쁘다’ ‘아들이 엄마를 영락없이 닮았다’고 하셔요. 그러면서 ‘(국민의힘 후보가) 한 사람이라도 돼야 쓸 것인디’라고 말해요. ‘의사나 하지 왜 2번으로 나왔어…’라고도 하시고요.”
박 후보는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고대 동양사를 전공한 박사다. 장남인 박 후보는 위로 누나가 있다. 조씨는 “만화 〈슬램덩크〉가 유행할 때는 은식이가 농구 선수가 되려고 농구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저는 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쳤어요. 문과인이 갖는 사고를 잘 이해하지 못하죠. 정치랑은 거리가 멀어요. 아직도 아들이 정치를 한다는 게 낯설죠. 광주 사람들은 선택권이 없어요. 어차피 민주당이 당선되니까요. 남편이 몸이 좋지 않아 한 달에 1~2번씩 아들이 광주에 내려왔어요. 아들은 광주가 처한 현실을 보고는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저는 얼굴이 팔리는 걸 싫어하는데 ‘아들을 위해 내 얼굴을 팔아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소수(少數)지만 보수 정당을 지지해온 것을 숨긴 채 살아온 유권자도 많이 만났어요.”
조씨에게 ‘왜 광주 사람들은 5‧18에 민감하느냐’고 물었다. 5‧18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조씨는 “광주 시민만이 겪은 독특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며 “다른 지역 사람들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이 때문에 호남 사람들은 정부의 공권력 행사를 항상 비판적으로 바라본다”고 했다.
“어머니가 마음을 굳게 먹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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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박은식 후보의 어머니 조현정씨가 광주의 문화와 정체성의 상징인 무등산에서 아들을 알리는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
“안녕하세요. 선거운동하러 왔습니다. 동구에 멋진 후보가 나왔습니다. 제 아들입니다.”
등산을 마치고 막걸리를 마시는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탁자를 돌며 명함을 돌렸다.
“어짜쓰까. 우린 민주당인디. 무등산 케이블카 공약은 좋다.”
“의사나 할 것이지…. 어머니가 마음을 굳게 먹으쇼!”
“아이고 엄니가 열심이네. 안 되는 거 뭣 하러 나왔는지 모르것소. 15%는 받아야 쓰는디.”
명함을 건네고자 다가가니 “나는 민주당 당원이오”라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씨는 “자기 생각을 밝혀주면 오히려 고맙다”며 명함을 받지 않는 이들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 아들이 정치를 한다고 했을 때 어떠셨습니까.
“‘기껏 고생해 의사가 됐는데 왜 하필 우리 아들이 총대를 메야 하나’라고 생각했죠. 정치를 한번 시작하면 계속 정치를 해야 하니까 걱정도 됐고요.”
—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아들이 출마한 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아들의 선거 포스터로 바꿨어요. 10명 중 8명은 응원을, 2명은 ‘굳이 (국민의힘으로) 출마했느냐’며 걱정 섞인 반응이었죠.”
— 땅에 버려진 아들 명함을 보면 어떻습니까.
“속상하지만 그대로 놔둡니다. 그것도 아들을 알리는 방법이니까요.”
“민주당이 잘돼야 광주가 잘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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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9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비상대책위원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은식 비대위원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국민의힘은 역적인디. 의사 허지 왜 전라도서 국민의힘이여. 지역감정은 대대손손 안 없어질 거요. 우리 자식도 서울 사는디 민주당만 뽑아. 민주당도 하는 짓이 똑같아서 난 선거 안 해부러요. 그래도 어머니 힘내쇼.”
3일 차 주말에는 박 후보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장인과 처제, 동서가 광주를 찾았다. 주중에는 직장에 다니는 박 후보의 아내와 딸 제이도 함께했다. 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에서 어머니 조씨가 명함을 건네면 다른 이들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조씨만 선거운동원으로 등록돼 있어 행인들에게 명함을 전했다.
장인은 대구 출신이다. 그는 “출마하는 것을 내심 반대했다. 굳이 하겠다면 비례대표나 서울에 출마하길 권했다”며 “그런데도 (사위는) 당선이 목적이 아니라 도전에 목적을 뒀다. 기백이 대단하다. 양분된 정치 지형을 타파하려는 사위의 도전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주말에는 지역구에서 걷기 행사가 있었다. 뒤늦게 일정을 파악해 현장에 도착하니 행사는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30명쯤 되는 파란색 복장 선거운동원 사이에서 홀로 빨간 옷을 입은 박 후보가 행인들에게 명함을 돌렸다.
이런 모습에 한 선관위 직원이 박 후보에게 “(여긴 사람이 없으니) 위로 올라가 보라”고 했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다 벤치에 앉은 70~80대 여성 3명을 만나 인사했다. 박 후보가 지지를 호소하자 “윤석열이가 나라를 망하게 해부렀는디 뭔 이야기를 혀”라고 했다. 이에 박 후보가 “경쟁해야 민주당도 발전한다”고 했지만 “그런 소리 하지 말어. 민주당이 잘돼야 광주가 잘돼”라는 답을 들었다.
박은식 후보를 수행했던 박지호씨는 “광주는 모두 민주당과 연계돼 있다”며 “민주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박씨도 6년 전에는 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4월 2일에는 여론조사 결과가 두 곳에서 발표됐다. 한 곳은 지지율 5%, 다른 곳은 8%였다. 박 후보의 예상보다 훨씬 낮은 수치였다. 4월 3일에는 TV 토론회가 있었다. 박 후보가 민주당 안도걸, 무소속 김성환 후보보다 잘했다는 평이 나왔다.
“득표율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
선거 후반부로 갈수록 박 후보는 지쳐 보였다. 그는 “여론조사 결과가 예상보다 좋지 않아 힘이 빠진다”고 했다. 명함을 주고 이야기 좀 하려고 다가가면 ‘이미 사전투표를 했다’고 밝히는 이들도 많았다.
선거운동 시작 후 두 번째 맞은 주말부터 목 상태도 나빠졌다. 일상적인 대화는 괜찮았지만 고음을 내기 힘들었다. 목이 잠기는 바람에 힘겹게 연설했다. 몸이 좋을 때는 한 번 유세할 때 15분씩 2번을 했던 것도 5분씩 하는 걸로 줄였다.
어머니 조씨는 “어제(7일)부터 아들에게 꿀물을 먹이고 있다”고 했다.
선거 조직이 탄탄한 후보는 이른바 찬조 연설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박은식 후보는 많은 부분을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박 후보는 “사전투표로 자신을 찍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힘이 된다”면서도 “지역구에선 민주당이 싫어 저를 찍고, 비례는 조국혁신당에 투표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선거 후반부가 될수록 박 후보의 선거운동은 ‘하소연’으로 바뀌었다.
“도와주십시오. 어차피 민주당 후보가 당선됩니다. 득표율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 한 번만 눈 딱 감고 저를 뽑아주십시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지지한 변호사에게도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다. 한 슈퍼에 들어가니 그 주인은 “어머니가 좀 전에 들러 이미 명함을 주고 갔다”고 말했다.
4월 9일 선거운동 마지막 날 유세는 집 근처 삼거리에서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머리카락도 다소 정리가 덜된 모습이었다. 유세차에 올라 양 손가락을 V자로 만들고 들어 올려 좌우로 흔들었다. 선거운동 초기와 비교하면 손의 높이도 점점 내려갔다. 연설도 4분40초 만에 끝냈다. 그 뒤로 김용임 시의원, 양혜령 전 시의원, 어머니 조현정씨가 이어갔다.
다른 이가 연설을 하는 동안 박 후보는 유세차에서 내려 거리를 돌며 명함을 돌렸다. 유동 인구가 적어 의미가 없어 보였지만 박 후보는 T자형 교차로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려고 했다.
“박 후보, 최선 다했다”

공식 선거 운동 마지막 합동 유세는 오후 6시 계림오거리에서 열렸다. 선거 운동 기간 중 가장 많은 지지자(약 40명)가 모였다.
민생당 비대위원으로 활동했던 한 연사는 찬조연설에서 “옷을 살 때도 가격, 색깔, 디자인을 본다. 하지만 광주는 한 정당만 무조건 지지했다. 불량식품이어도 먹어야 했다”며 “꽃길 대신 험한 길을 택한, 유능한 젊은 후보를 선택해달라”고 했다.
조선대 4학년 정현로씨가 유세차에 올라 찬조연설을 했다.
“정권을 심판하면 광주가 나아집니까? 제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바로 왔겠습니까. 박은식 후보에게 한 표 부탁드립니다. 광주 청년들은 광주에서 살고 싶습니다.”
박 후보 옆에서 스쳐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배꼽인사를 하던 어머니도 마이크를 들고 “박은식은 소박하고 부지런하며 광주 시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박은식 후보는 “9대 1인 정치 구도를 8대 2, 7대 3으로 바꿔야 젊은이들이 민주당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 합동 유세를 마친 유세단은 산수동 문화마당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박 후보는 버스킹(야외 공연)을 하며 노래 3곡을 불렀다. 선거운동원들의 선거운동은 오후 8시부로 종료됐다. 선거운동을 마치고 선거사무소에 모인 운동원들은 13일 동안 입고 썼던 외투, 빨간 모자, 장갑, 선거사무원 표찰을 반납하고 뒤풀이를 가졌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자와 마스크가 미처 가리지 못한 광대 부위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운동원들은 “고생했다”고 서로 격려했고 박 후보는 선거사무소를 떠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선거운동원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후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며 “아들 같아서 더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여러 차례 선거운동원 경험이 있는 A씨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박 후보는 충분치 않은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했다”면서 “곧장 당선되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니라면 15%를 넘겨 선거비용이라도 보전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들 덕분에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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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4월 9일 오후 10시경 어머니와 아들은 마지막 인사를 백운동 일대에서 했다. |
어머니는 백운동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를 하는 동안 박 후보는 한 카페로 들어가 “어차피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다. 제가 한 표라도 더 받아야 중앙정부에 할 말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어 어머니 조씨도 카페로 와 “제가 은식이를 백운동에서 낳았습니다. 초등학교 때까지 여기서 살았어요”라고 했다. 카페 손님은 “어머니가 나이 드셔서 아들 때문에 고생이다. 한 표라도 더 받으쇼. 오늘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하쇼”라고 했다.
30분쯤 인사를 하니 손에 쥔 명함이 다 떨어졌다. 어머니는 약 500m 떨어진 차로 뛰어가 명함을 갖고 왔다. 오후 10시24분에는 명함이 동났다. 조씨는 지나가는 이들에게 육성으로 아들을 뽑아달라고 했다.
박 후보는 이날 오후 11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비대위원들은 선거 당일 한데 모여 개표 방송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조씨는 광주송정역에 아들을 데려다주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 덕분에 새로운 걸 많이 배웠습니다. 흔히들 ‘소중한 한 표’라고 말하는데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선거운동하는 이들을 보곤 형식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알게 됐죠. 정년 이후 좁게 살았던 제게 아들이 공동체를 위해 사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가르쳐줬어요. 정년 후 느꼈던 우울감이 사치였던 거죠.”
조씨는 “과거에는 광주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면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아주 부족한 사람’ ‘생각을 안 하는 사람’ ‘정부 편에 붙어 돈을 탐내는 사람’으로 취급했다”며 “하지만 아들이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출마했으니 사람들에겐 신기했을 것이다. 선입견으로 뭔가 허울을 씌우고 싶은데 그게 안 됐다. ‘의사인데 왜 출마했을까?’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고 했다.
— 어머니가 더 고생한 것 같습니다.
“교사로 지내면서 아들 운동회도 못 가고, 소풍 갈 때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줬어요. 졸업식도 갈 수 없었고요. 이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선거운동을 하며 한 3분의 1은 갚은 거 같아요.”
“정말 정치하겠다면 밑바닥부터 배우는 게 맞다”
—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면 어땠을까요.
“쉽게 정치를 시작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얼마나 교만해지겠습니까? 사람을 직접 만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선거운동원들이 얼마나 힘들게 선거운동을 하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정말로 정치를 하겠다면 밑바닥부터 배우는, 지금 이 방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걸었으면 합니다.”
어머니 조씨는 예비 후보 기간을 포함해 명함 약 1만 장을 돌렸다. 그는 아들의 도전을 계속해서 응원하겠다고 했다.
박 후보는 총선 다음 날인 지난 11일 오후 5시 광주에 도착했다. 4시간 동안 운전을 했다. 피곤한지 입술이 하얗게 떠 있었다. 아버지가 입원한 요양병원에 들른 뒤 곧바로 선거를 도운 이들을 만나 위로했다.
통상 선거 캠프에선 소셜미디어(SNS) 전담 직원을 둔다. 박은식 후보는 인건비를 아끼고자 선거운동 기간 소셜미디어를 본인이 관리했다. 이 때문에 활동상이 실시간으로 전파되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 뒤에나 이틀 치를 한 번에 몰아서 올리기도 했다. 4월 7일 활동을 8일 오후 8시45분에 올린 게 마지막 선거운동 게시물이다. 지난 4월 8~9일의 활동상은 올리지도 못했다.
— 9일 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무슨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어요. 그날 밤도 마지막까지 투표 독려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선거운동 기간에 매일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날도 문자에 받는 분의 이름을 일일이 입력해 한 통씩 총 200통을 썼어요. 정성을 담고 싶어 전체 문자는 안 보냈어요.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리더군요.”
—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있습니까.
“대의(大義)를 위해서죠. 한 표라도 더 받고 싶었습니다. 비대위원을 지낸 사람이 10%도 받지 못하면 도대체 어떤 청년이 도전하겠습니까? 10%는 꼭 넘기고 싶었어요.”
— 출구 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 당 지도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여의도연구원도 자체 조사를 했어요. ‘크게 지지는 않는다’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방송 3사가 실시한 출구 조사 결과 ‘국민의힘이 100석도 건지기 힘들다’고 발표되자 다들 크게 당황했죠.”
“국힘, 적어도 뻔뻔하진 않았다”
— 총선 결과를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죠. 이번 선거를 통해 지도자의 중요성, ‘대권(大權)’이 왜 대권인지 알게 됐어요. 지역에서 피라미가 물결을 일으키려 해도 중앙에서 고래가 움직이면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대통령의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이른바 집토끼도 잘 챙겨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자기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투표장에 가는 게 굉장히 수고로운 겁니다. 이분들이 투표장까지 나갈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 당의 선거 전략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중도층의 선택을 받으려면 이성(理性)보다는 감성에 호소해야 합니다. 저 역시 말이 너무 길었어요. ‘광주가 이래선 안 된다’ ‘10%는 받아야 할 말이 있다’고 말했는데 통하지 않았어요.”
—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내세운 ‘뉴타운’처럼 선거판을 관통하는, 보수우파의 가치를 대변하는 세 음절 이하의 단어가 필요해요. ‘민생’? 너무 막연해요. 민생은 어차피 ‘대파’로 깨졌잖아요. ‘586 청산’? 민주당은 친명(親明)으로 이미 대체했고요. 이조심판? 검사들 특유의 사고방식이 담겼죠.”
— ‘시스템 공천’이었다고 말합니다.
“동의하지 않아요. 그 ‘시스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후보자를 점수화한 뒤 사심(私心)을 배제한다’는 뜻인 듯한데…. 선거는 이기는 게 우선입니다. 억지로 감동을 주려고 하는 순간 실패합니다.”
—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민주당보다 나았던 점은요.
“이재명, 양문석, 김준혁 같은 이들은 공천에서 배제했습니다. 적어도 뻔뻔하진 않았습니다.”
— 현실 정치를 겪어본 소감은요.
“‘인생은 실전’이라는 말이 있죠. 관찰자와 행위자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절감했어요. 마음을 다하면 광주에서도 통할 줄 알았는데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나이브(naive·순진)’했어요.”
박 전 비대위원은 “무관심할 때 가장 힘들다”고 했다.
— 비례대표를 권유받았는데 순번은요.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광주로 올 생각이었으니까요. 서울에 좋은 곳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 이번에 당선된 곳입니까?
“네.”
— 인요한 혁신위원장에 앞서 위원장을 제의받았는데 거절했습니다. 총선 참패를 예상한 것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 왜 거절했습니까.
“이제 막 정치를 경험하는 제겐 너무 큰 자리였죠.”
“보수의 가치 담긴 호남의 상징 발굴해야”
박 전 비대위원은 “5·18을 초월하는 주제를 호남에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5·18은 반미(反美)운동이 아닙니다. 친미(親美)운동이었습니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미국이 광주에 개입해 신군부를 견제하고 자신들을 보호해주길 원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이러함에도 좌파 운동권은 5·18에 반미를 덧칠했습니다. 여기에 우파는 좌파가 왜곡해놓은 5·18과 호남을 향해 ‘인종주의적’ 비난을 일삼고 있습니다.”
—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결정권자라면 ‘국민의힘은 5·18묘지가 아니라 광주의 산업단지로 가자’고 할 겁니다. 기아자동차, 금호타이어를 찾아가 현장의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해주는 겁니다. 이게 혁신입니다. 물론 5·18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에는 당연히 참석해야죠.
보수의 가치가 담긴 새로운 호남의 상징을 발굴해야 합니다. 김성수와 송진우 생가(生家)에 들러야 합니다. 호남인들이 독립을 위해 재산을 헌납하고, 학교를 세우고 공장을 만들고 민족 계몽을 위해 언론사를 차린 역사를 기려야죠. 좌파가 5·18로 우파를 공격할 때면 주눅 들지 말고 ‘망월동을 누가(김영삼) 만들어줬느냐’고 당당하게 따져야 합니다.”
박 전 비대위원은 “1965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을 15만 표 차로 이겼다. 호남 유권자의 60%, 35만 표가 박정희를 찍었다”며 “호남 보수, 호남 우파를 재조명하고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 보수우파의 가치를 강조하는데 보수는 무엇입니까.
“전통을 존중하며 점진적 발전을 추구합니다. 반공주의, 경제적 자유(시장경제), 작은 정부를 지향하죠. 헌신·희생도 중시합니다. 하지만 이 중 어느 특정 가치에만 매몰돼선 안 돼요. ‘반공이면 다 좋다’는 식의 접근은 우리 안의 파시즘을 키울 뿐이죠. 5·18 폄훼가 대표적이죠.”
“일터로,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 보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무(尙武)정신으로 스스로 채찍질해야만 합니다. 한반도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충돌하는 곳입니다. 지정학적 숙명이죠. ‘셰셰(謝謝·고맙다)’라고 말하며 대륙에 종속되길 자처하는 이들이 의회를 장악했어요.
오늘날 정치적 불안의 뿌리는 남북 분단입니다. 북한을 해방시킬 때까지 잘 버텨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보수우파는 좀 더 희생, 헌신해야 합니다.”
— 현실 정치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과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기에 후회하지 않아요. 역설적으로 선거비용 보전도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내 호남의 보수우파 청년들의 정치 도전을 주저하게 만든 것 같아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 의료대란, 어떻게 수습해야 합니까.
“저는 의료보험으로 먹고 사는 내과 봉직의(페이닥터)입니다. 현실을 매일 체감합니다. 2000명은 불가능합니다. 350~500명 선에서 더 이상 환자가 피해보지 않도록 하루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해요. 350명은 의약분업 당시 줄였던 인원인데 상반된 이해당사자들(의사‧환자 단체)도 500명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일터로,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오늘(4월 11일) 아침에 취직할 병원에서 면접을 봤어요. 곧 출근합니다.”
박 전 비대위원은 4월 11일 오전 비대위원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비대위원이 꽃길만을 걷지 않고 희생했다는 것도 기억해달라”고 했다.
“호남 위한 햇볕정책 필요”
선거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나 박은식 전 비대위원의 어머니 조현정씨와 통화를 했다. 정신 없었던 선거를 마치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조씨는 “광주에는 다수(多數)가 흘리는 눈물, 소수(少數)의 눈물이 각각 따로 있다. 이 두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보수가 노력해야 한다. ‘호남을 위한 햇볕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광주(호남)시민은 오래전부터 국가, 정부로부터 ‘소외당했다’는 서운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민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눈물이죠. 이들에게 유일한 선택지는 민주당이었습니다.
이 눈물이 그칠만하면 민주당은 다시 광주 시민을 이용했어요. 선거철만 되면 한(恨), 5·18로 호남을 정서적으로 인질 삼았죠.
또 다른 눈물은 국민의힘, 보수당을 지지하는 소수의 눈물입니다.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이들은 호남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이 두 눈물을 극복하려면 보수가 ‘광주, 호남을 위한 햇볕정책’을 펴야 해요. 호남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듣고, 유능한 사람도 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중앙에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식이 없는 거 같아 아쉬워요. 쉽진 않겠지만 머리를 맞대 서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