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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秘話 | 제4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의 정보 오판 연구

최고급 정보 갖고도 침공 가능성 무시? 하마스 기습 허용한 것과 흡사

글 : 김영남  前 조갑제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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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정보당국, 1973년 후세인 왕의 경고, 시리아 군대의 움직임 등 여러 위험 신호가 있었지만 축소 해석
⊙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의 사위 마르완, 개전 이틀 전 모사드 국장에게 전쟁 발발 정보 알려
⊙ 이스라엘, 선제 타격 검토했지만 미국의 지원 못 받을까 봐 실행 못 해
⊙ 미국도 이스라엘의 정보 오판에 동조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집트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파괴된 이스라엘군 전차. 사진=이스라엘 국방부
  지난 10월 7일 가자지구를 장악한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11일 현재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게 한 사건은 제4차 중동전쟁 발발 50주년에 맞추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그때의 정보 오판(誤判)을 되풀이했다. 50년 전 1973년의 정보 오판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핵(核)폭탄 사용을 검토하게 할 정도로 국가 존망의 위기를 불렀다. 이번의 정보 오판은 네타냐후 정부의 강경 대응을 불러 하마스가 위기에 몰리고 있다. 두 정보 오판의 공통점은 적을 얕잡아 보았다는 점이다.
 
  하마스는 이번 공격을 3년간 준비해왔다. 지휘부는 수천 명의 특공대를 훈련시키면서도 이스라엘 측엔 “우리는 이제 전투엔 관심이 없고 민생이 중요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스라엘도 하마스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가자 사람들이 경제에 관심을 가지면 테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들을 도왔다. 웨스트뱅크(요르단 서안)에서 오히려 소요가 자주 일어나 올해는 그곳으로 병력 배치를 많이 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마을 모형까지 만들어놓고 훈련을 했다고 한다. 하마스와 라이벌인 파타 그룹에선 하마스 지도부가 이스라엘에 너무 굴종적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공격 기도(企圖)를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적을 우습게 보는 선입견(先入見)에 국가 지도부가 갇혀버리면 아무리 좋은 정보가 올라와도 묵살된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한 이른바 ‘욤키푸르(Yom Kippur)’ 전쟁이 터졌다. 욤키푸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속죄일(贖罪日)로 이스라엘의 공휴일이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기습을 준비하고 있다는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사전에 수집했음에도 1967년 6일 전쟁의 결과를 감안할 때 전력(戰力)상 약체인 아랍 국가가 쳐들어올 가능성은 낮다는 오판을 했다. 당시 상황을 다큐멘터리처럼 그려나간 논문이 최근 미국의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에서 나왔다.
 
  필자인 브루스 리델은 30년간 중앙정보국(CIA)에서 근무했으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남아시아·중동 담당 선임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는 국방부 근동(近東)·남아시아 담당 부차관보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욤키푸르 전쟁 당시 상황에 관여했던 미국 및 이스라엘 정보당국자들과 여러 차례 당시 상황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고도 한다. 그의 글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오판을 하게 됐는지, 이에 따른 교훈은 무엇인지를 되짚어본다.
 
 
  요르단 왕의 경고
 
후세인 전 요르단 국왕.
  1973년 9월 25일,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이스라엘 텔아비브 인근 모사드의 안가(安家)를 방문했다. 후세인 왕은 이틀 전 ‘긴급한’ 일이 있다며 이스라엘 측에 만남을 요청했다.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가 참석했다.
 
  후세인 왕은 이집트에서 9월 10일부터 12일까지 열린 회담 이야기를 했다.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이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며 이를 논의하고자 이스라엘 측에 만남을 요청한 것이라고 했다. 후세인 왕은 메이어 총리에게 시리아와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훗날 밝혀진 자료들에 따르면 후세인 왕은 사다트와 알아사드 사이의 정확한 대화 내용을 확인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다만 요르단 정보당국은 시리아 육군 소속 사령관 등을 통해 시리아의 전쟁 계획, 나아가 이들이 이집트와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태였다.
 
  후세인 왕의 설명은 간단했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다트와 알아사드가 “요르단도 이스라엘 침공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자신에게 물었다고 했다. 후세인은 이를 거절했다며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렇게 권유할 정도라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명확하다고 했다. 후세인은 ‘시리아의 소식통’을 통해 시리아 군대가 침공 준비를 완료한 상태라는 것도 확인했다고 했다. 후세인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동작전 가능성을 묻는 메이어 총리의 질문에, “그럴 것 같다”고 했다. 총리는 대화를 잠시 중단하고 모세 다얀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얀 장관은 골란고원 지역의 위험에 대해 알고 있다며 바로 내일 병력을 증강하겠다고 했다. 메이어 총리는 안도했다고 한다.
 
 
  ‘그들은 너무 약하다’
 
  회담 다음 날 다얀 장관은 군(軍)정보국의 엘리 제이라 국장 및 아리예 샤레브 부국장 등과 만나 후세인 왕이 전한 경고에 대해 논의했다. 군 정보국은 후세인의 경고가 너무 모호하고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스라엘을 공격하기에는 아랍 국가들이 너무 약하다는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최고급 정보를 간단하게 무시한 것이다.
 
  며칠 뒤, 메이어 총리는 프랑스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다. 그 후 오스트리아 빈을 찾기로 했다.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이 소련을 떠난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탄 기차를 납치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 테러단체는 시리아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확인됐다. 훗날 전문가들은 이 납치 사건이 이스라엘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 한 것일 수 있다며 만약 그런 목적이었다면 매우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후세인 왕의 경고, 시리아 군대의 움직임 등 여러 위험 신호가 있었지만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이를 축소 해석했다. 아랍 국가들이 질 전쟁을 시작할 리가 없을 것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당시엔 정치권, 나아가 일반 대중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요르단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던 정보장교 주시아 케니저 중령만은 상관들에게 후세인 왕의 경고를 쉽게 부정해선 안 된다고 건의했다. 샤레브 부국장은 케니저의 건의 역시 무시했다.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기습공격에 의한 이스라엘의 피해는 컸다. 19일간의 전체 전쟁 기간을 보면 이스라엘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지만 기습공격에 무방비로 당했고 정보전(情報戰)에서 실패했다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남기게 됐다. 이스라엘군은 2656명이 전사하고 7250명이 다쳤다. 약 300대의 탱크가 파괴됐고 100여 대의 전투기가 격추당했다. 전쟁 초기 동원된 예비군 중 대다수는 훈련이 잘 돼 있지 않았고 전투 경험이 없었다. 당시 이스라엘 병력의 80%는 예비군이었다.
 
  예비군을 동원, 전선인 수에즈 운하와 골란고원까지 병력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틀 전에 전쟁이 터질 것을 알았어야 했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몇 시간 전에야 전쟁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했다.
 
 
  모사드에 자진해서 협력한 나세르의 사위
 
아슈라프 마르완.
  역내(域內) 최고의 정보 수집 능력을 갖춘 이스라엘군 정보국과 모사드는 어찌하여 적(敵)의 공격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을까? 이스라엘 정부는 전쟁 이후 ‘아르가낫 위원회’를 발족, 이를 조사했다. 1974년에 공개된 위원회의 예비보고서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다. 모사드가 이집트 고위층 속 ‘정보원’과 접촉했다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이 정보원의 실명(實名)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이 ‘정보원’은 1969년 영국 런던에서 모사드에 자발적으로 협조할 의사를 밝혔고 신뢰를 얻기 위해 이집트 군대의 공격 계획과 구조 등 기밀 자료를 넘겼다.
 
  그는 이집트가 다른 아랍 국가가 동참하지 않고, 공군력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이상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다트가 이스라엘 공군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와 지대지(地對地) 미사일을 원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정보 등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이 최소 몇 년간은 공격을 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
 
  이 소식통의 정체는 약 30년이 지난 2002년에 공개됐다. 언론 등의 취재 결과 그는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의 사위인 아슈라프 마르완으로 확인됐다. 이후 마르완과 모사드의 관계에 대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1973년 당시 모사드 국장이었던 즈비 자미르와 군 정보국장 제이라는 2000년대에 들어서도 욤키푸르 전쟁 때의 정보 오판에 누가 책임이 있는가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둘은 마르완의 이름이 어떻게 공개됐는지에 대해 법정 공방을 벌이기도 했는데, 제이라 장군이 마르완의 실명을 언론에 유출했다는 결론이 2007년에 나왔다.
 
  그 한 달 뒤인 2007년 6월 27일, 마르완은 런던에 있는 5층 아파트 건물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그는 1981년 사다트가 암살된 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이집트 정부는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며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러줬다. 당시 이집트 정보당국 수장(首長)과 대통령의 아들 등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 뒤 마르완이 암살됐을 수도 있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마르완은 죽기 전 회고록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재까지도 그의 원고는 공개된 바 없다. 사망 직후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대통령은 “마르완은 아직까지는 공개돼서는 안 될 애국적 행동에 나섰던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애국자냐 반역자냐?

 
  마르완은 여전히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아 있다. 우선 애국자라는 설(說)과 반역자라는 설이 분분하다. 이중간첩 역할을 하며 이스라엘에 고급 정보를 제공한 뒤 핵심적인 사안에 거짓 정보를 흘린 애국자였다는 평가와 조국을 배반한 이집트의 수치라는 평가로 갈리는 것이다.
 
  그의 죽음 역시 미스터리다. 그는 암살됐을까? 암살됐다면 누구에 의해 암살된 것일까? 아니면 그에 대한 추가 사실이 공개될 것을 우려, 자살한 것일까?
 
  CIA에서 근무했던 브루킹스연구소의 리델 연구원은 이 사건을 조사한 대다수 사람은 그가 이중간첩은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리델은 “나도 이에 동의한다”고 했다. 다만 “다수의 이집트인은 아직도 그를 국가영웅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1969년 말이나 1970년 초 무렵부터 모사드에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는 그의 장인인 나세르가 살아 있을 때였고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이른바 ‘소모전’을 벌일 때였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집트에 공습을 가했고 소련은 이집트에 지대공(地對空) 미사일 등을 제공했다. 소련은 전투기 조종사를 이집트로 보내 이스라엘군과 싸우게까지 했었다.
 
  이 무렵 마르완이 건네준 정보 중엔 나세르와 소련 지도부 사이 대화 내용도 있었다. 마르완은 런던에서 모사드 요원과 접촉했다. 만남 때마다 5만 파운드를 받았다. 모사드는 안전한 장소에서 접촉하기 위해 그에게 고급 아파트를 사주기도 했다. 마르완은 장인 나세르가 사망한 후에도 첩자 역할을 이어갔다. 사다트 정권하에서도 고위 지위를 유지했고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임박했다’
 
즈비 자미르 전 모사드 국장.
  1973년 4월, 마르완은 런던 주재 모사드 직원에게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를 들은 자미르 모사드 국장은 런던으로 향했고 이 자리에서 마르완은 전쟁이 5월 중순에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알제리와 리비아 비행기가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이집트로 배치되고 있다고 했다. 사다트가 간절히 바라던 장거리 폭격기들이었다.
 
  이스라엘군 정보국은 이런 경고가 틀렸으며 공격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소규모 예비군을 동원해 전방 지역에 배치하는 결정을 내리기는 했다. 결과적으로는 5월 중순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군 정보국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당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인근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훈련이 끝난 5월 이후에도 병력과 장비는 철수하지 않았다. 지대공 미사일 역시 전진 배치된 상태를 유지했다.
 
  마르완은 이집트 측에서는 소련이 제공한 지대공 미사일 덕분에, 이집트군이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결론을 내렸음도 모사드에 알렸다. 이스라엘의 공군력이 여전히 우위에 있지만 지대공 미사일로 이를 무력화(無力化)시키고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로 텔아비브를 공격할 역량을 갖췄다는 것이었다.
 
  8월 21일, 시리아 국방장관 등은 이집트를 방문, 공격의 세부 계획을 논의했다. 이들은 10월 초를 공격 개시일로 정했으나 정확한 공격 시각은 확정 짓지 않았다. 당시 회담 내용은 극소수의 인사만이 알고 있었다.
 
  그해 8월, 마르완은 사다트 대통령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국왕을 만났다. 사다트는 파이살 왕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전쟁 계획을 설명하며 사우디로 하여금 석유를 활용,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즉 전쟁 중 미국이 이스라엘에 도움을 주면 대미(對美) 석유 수출을 중단해달라는 것이었다. 사다트는 전쟁이 정확히 언제 시작될지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곧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마르완은 이런 대화 내용을 9월 초 모사드에 전달했다.
 
  9월 말, 시리아는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시리아군은 러시아로부터 지대공 미사일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운용에 익숙해졌다.
 
  9월 30일, 미 CIA는 이스라엘에 요르단의 후세인 왕 말을 인용한 정보를 전달했다. 이는 앞서 후세인 왕이 메이어 총리에게 한 경고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시리아군 3개 보병사단, 2개 기갑사단이 언제든 공격에 나설 준비가 됐다고 했다. 정확한 공격 일자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곧 이뤄질 것이라고도 했다. 후세인 왕은 메이어 총리와의 만남에서 언급한 시리아 정보원을 통해 이런 정보를 확인, CIA에 전달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역시도 기우(杞憂)라며 일축했고 CIA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드디어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인근에서 대규모 훈련에 돌입했다. 이집트 언론은 훈련이 10월 1일부터 7일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공개했다. 사전에 계획된 혼란 작전의 일환이었다. 이집트군 중 실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스라엘군은 전쟁 이후 포로로 잡혔던 이집트군을 심문했다고 한다. 95%는 전쟁이 10월 6일에 발발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날 아침에 알게 됐다고 했다.
 
 
  시리아 군사 태세를 거듭 무시하는 이스라엘
 
골다 메이어 전 이스라엘 총리.
  두 전선(戰線)에서 공격 징후가 포착됐음에도 불구하고 군 정보국은 행동에 나서지 않았고 여전히 전쟁 가능성을 낮게 봤다. 이스라엘 국방군의 정보 책임자 제이라 국장은 분석관 수를 늘리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을 일부 신호정보 시스템의 가동 역시 반대했다.
 
  10월 3일, 이스라엘 총리실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몸이 안 좋았던 제이라 정보국장을 대신해 샤레브 부국장이 참석했다. 모사드 국장은 회의에 초대되지 않았다. 샤레브는 이집트가 군사훈련을 위해 병력을 집중시킨 것이며 전쟁 발발 가능성은 낮다고 거듭 밝혔다. 샤레브는 메이어 총리에게, (마르완이) 5월 중순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했었지만 군 정보국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시리아군의 병력이 전선에 집결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이유에서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9월 13일 지중해에서의 교전으로 13대의 시리아군 미그 전투기가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당시 이스라엘 전투기의 피해는 한 대에 불과했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이 공격할 것을 우려해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스라엘 공군이 골란고원 인근의 시리아 부대를 촬영한 사진은 심각했다. 5월과 비교해 전진 배치된 탱크의 수는 250대에서 850대로, 지대공 포대는 2개에서 31개로 늘어났다. 샤레브는 이 역시도 통상적 준비 태세일 뿐이라고 했다.
 
  앞서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이집트가 군사력에서 시리아를 앞서지만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더 가깝고, 침공 태세를 갖췄기 때문에 더 큰 위협으로 다뤄야 한다”고 충고했었는데 이스라엘 정보관들은 이를 무시한 것이다. 이날 회의가 끝난 뒤 메이어 총리는 샤레브와 악수를 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것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고 한다.
 
 
  “전쟁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이 무렵 이집트의 국방장관은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방문해 알아사드 대통령 및 국방장관을 만났다. 이들은 10월 6일을 디데이(D-day)로, 공격 개시 시각을 오후 2시로 결정했다. 시리아는 더 빨리 공격하길 원했고 이집트는 해가 질 무렵 공격을 시작할 것을 원했기 때문에 일종의 타협안이 나온 것이다.
 
  10월 4일, 이스라엘 국방부에서 또 한 차례 회의가 진행됐으나 추가 병력 동원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사다트와 알아사드는 자국 주재 소련 대사들에게 전쟁이 임박했다고 밝히면서도 디데이는 알리지 않았다. 알아사드가 보다 많은 정보를 소련에 건넸다고 한다. 10월 5일, 소련은 수송기를 동원해 이집트와 시리아에 있는 외교관과 자문관들을 철수시켰다.
 
  이스라엘은, 이를 전쟁 임박 징후로 받아들였어야 했다. 이스라엘 측은 모스크바 주재 이라크 대사의 통화 내용도 포착했다. 이라크 대사는 소련 지도부와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전화였다. 그럼에도 제이라 정보국장은 다얀 국방장관에게, “전쟁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10월 4일, 마르완은 모사드에 긴급 면담을 요청했다. 자미르 모사드 국장은 10월 5일 영국 런던으로 가 마르완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마르완은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현지시각 5일 밤 열두 시 직전이었다. 마르완은 전쟁이 정확히 몇 시에 시작될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이집트항공이, 카이로에 도착 예정인 자사 비행기를 리비아로 돌렸으니 24시간 이내에 전쟁이 터질 것 같다고 했다. 자미르는 이스라엘 현지시각 10월 6일 이른 새벽 이 같은 내용을 1차적으로 본국에 전달했다.
 
 
  “이스라엘,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더 자세하게 보여주는 사료(史料)가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욤키푸르 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아 당시의 자료를 공개하고 있고 일부는 영문으로 번역돼 정부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다.
 
  이스라엘 정부에 따르면 메이어 총리는 10월 6일 오전 3시50분, 군사 보좌관인 리올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깼다. 리올은 자미르 국장이 런던에서 보내온 이야기를 메이어 총리에게 전달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자미르 국장이 보낸 보고서 형식의 전보(電報)가 도착했다. 이 전보는 “이집트 군대와 시리아 군대가 10월 6일 토요일 저녁을 향할 무렵 이스라엘을 공격할 예정이다”라고 시작된다. 자미르 국장은 전보에서, “소식통(마르완)은 10월 6일에 공격이 일어날 가능성이 ‘99%’”라며 1%는 (이집트) 대통령이 마지막에 마음을 바꾸게 될 경우라고 말했다고 했다.
 
  전보에는 소식통을 통해 전해 들은 상당히 구체적인 공격 계획이 담겨 있었다. 공격은 시나이 사막의 이스라엘 목표물에 대한 공중 및 포 공격으로 시작해 해당 지역을 공중, 해상, 특공대 공격으로 점령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같은 시각 시리아군은 골란고원에서 공격을 가해 1967년에 빼앗긴 땅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쳐들어온다. 이스라엘 정부 문건에 따르면 이를 확인한 메이어 총리는 그렇게 놀란 모습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했다.
 
  오전 7시30분, 메이어 총리는 자미르 국장의 최종보고서 내용을 확인한 뒤 미국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들에게 미국 측과 접촉할 것을 지시했다. 8시5분, 메이어 총리는 다얀 국방장관, 데이비드 엘라자르 참모총장, 제이라 정보국장 등과 회의를 했다. 엘라자르 참모총장은 총동원령을 내릴 것을, 다얀 장관은 부분 동원령을 내릴 것을 건의했다. 메이어 총리는 전쟁 상황이니 총동원령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선제 타격의 딜레마
 
모세 다얀 전 이스라엘 국방장관과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엘라자르 참모총장은 선제 타격을 가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시리아 공군을 섬멸하고, 방공(防空) 미사일 시설을 파괴, 이스라엘 공군이 자유롭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얀 장관은 이 역시도 반대했는데 메이어 총리는 이번에는 다얀의 뜻을 따랐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 등이 과거, 이스라엘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는 의혹을 받으면 미국이 지원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조언을 했다는 것이었다.
 
  오전 10시15분, 메이어 총리는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와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미국 대사는 단도직입적으로 선제 타격이 있을 것인지를 물었는데 메이어 총리는 그럴 계획이 없다고 했다. 메이어 총리는 “(선제 타격을 하면) 상황이 우리 쪽에 매우 쉬워지겠지만”이라면서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이 사전에 공격 계획을 알고 있고 세게 반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메이어 총리는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에게 소련으로 하여금 이집트와 시리아가 당장 공격을 멈추게끔 요청해달라고 했다.
 
  이날 정오, 메이어 총리는 긴급 내각회의를 소집했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장관들은 전쟁이 언제 시작할 것인지를 물었고 메이어 총리는 오후 4시경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가운데 사이렌이 울렸다. 리올 군사보좌관은 회의실로 들어와 시리아와 이집트가 사격을 개시했다고 보고했다. 메이어는 “음, 결국 그들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네…”라며 “화가 난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회의 도중인 오후 2시경 울린 이 사이렌은 욤키푸르 의식을 모두 멈추게 만들었다. 욤키푸르 공휴일로 중단됐던 라디오 방송이 재개됐고 예비군 동원령을 알리는 방송이 전국으로 퍼졌다. 그렇게 19일간의 전쟁은 시작됐다.
 
 
  미국도 정보 오판에 동조
 
시나이 반도로 진격하는 이스라엘군. 이들 대부분은 예비군이었다. 사진=이스라엘 국방부
  제임스 슐레진저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훗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모든 단서를 갖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아랍이라는 특성 때문에 무시됐다”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은 아랍이 공중 우위를 점하기 전까지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미국 역시 이스라엘이 이와 관련해서는 가장 잘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브루킹스연구소 리델 연구원은 이 문제를 다뤘던 여러 이스라엘 관계자 등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불완전한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삶의 미래가 달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맞다고 했다. 당시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행동하는, 즉 ‘밤이 올 때마다 울부짖는 늑대’처럼 비치기 싫었다고 했다. 그러나 욤키푸르 전쟁은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최악의 결정을 내린 사례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례는 미국 역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국도 이스라엘과 같은 생각, 즉 이스라엘을 공격하기에 다른 아랍 국가들은 너무 약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미국의 정보당국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견제를 하는 대신 이스라엘의 오판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이번 하마스 사태 때도 미국 정보기관은 이스라엘처럼 오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독립, 군대의 독립은 정보의 독립에 기초해야 한다. 국가 존망의 문제에 대하여 다른 나라에 정보 판단을 의존하는 것은 자살 행위가 될 수 있다. 그 다른 나라가 미국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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