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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는 21대 국회의원 인터뷰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1번 윤주경 당선인

“품위 있는 보수 되고 싶다”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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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史 정립이 정치인으로서 첫 번째 목표, 아직도 독립운동사 연구 인력과 예산 부족해
⊙ 어린 시절 할머니와 아버지는 늘 “할아버지(윤봉길)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 당부
⊙ 아버지 윤종, 신채호 아들(신수범)-김구 아들(김신)과 가족처럼 지내
⊙ 평범한 직장생활 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윤봉길 기념사업회 참여, 2012년 박근혜 캠프에서 도움 요청해 정치 입문
⊙ 독립기념관장 사퇴 종용은 문재인 정부가 처음이자 유일, 누가 사표를 원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
⊙ 황교안, 지난해 6월 영입 제의… 오랜 기간 고민 끝에 참여 결심
⊙ 1호 법안은 독립운동사 연구지원 관련 법안 될 것, 상임위는 독립기념관 속한 정무위 희망

尹柱卿
1959년생. 이화여대 화학과 졸업 / 18대 대통령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청와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민간위원, 제10대 독립기념관장 역임 / 독립기념관 이사, 매헌 윤봉길 월진회 이사
사진=조준우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 1932) 의사의 장손녀, 독립기념관장, 보훈처의 사퇴종용 논란, 황교안의 1호 인재영입, 보수정당의 상징적인 비례대표 1번…. 윤주경 미래한국당 당선인을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그를 만나기 전엔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를 예상했다. 그러나 윤 당선인의 첫인상은 소녀 같은 모습에 발랄한 목소리를 지닌, 의욕 넘치는 야당 초선 의원이었다.
 
  5월 13일 서울 상암동 조선뉴스프레스를 찾은 윤 당선인에게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인상”이라고 했더니 “어떤 행사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가 온다하니 (고령인 줄 알고) 휠체어를 준비한 적도 있었다”며 웃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면 어려운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윤 당선인은 할머니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7남매(6녀 1남) 사이에서 밝고 구김 없이 자라 대학생활과 직장생활까지 지내며 반듯하게 자란 사람으로 보였다.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지만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가어떻게 보수정당의 비례대표 1번 국회의원이 됐을까. 새로운 막을 올리는 그의 인생이 궁금했다.
 
 
  윤봉길 의사 장남의 장녀
 
지난 2월 7일 자유한국당 입당 인사·환영식에서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가운데)이 당 지도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 그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다. 1932년 4월 29일 일본이 중국 상하이를 점령한 후 전승기념 및 일왕 탄생일 기념식을 가진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비밀항일결사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단원인 윤봉길이 사열대 위에 폭탄을 투척해 일본군 요인을 폭살시켰다. 당시 일본군사령관 대장을 비롯한 다수의 간부가 사망했다. 이 사건은 한국은 물론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중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했다.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이뤄진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적극 지지했고, 이는 조선 독립의 계기 중 하나가 됐다. 윤 의사는 2남 1녀를 뒀지만 1남 1녀는 일찍 사망했고, 장남 윤종씨만이 후사를 남겼다. 윤주경 당선인은 윤종씨의 6녀 1남 중 첫째다.
 
  윤 당선인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제사로 접했다. 충남 예산에 살았던 할머니(윤봉길 의사의 아내 배용순)와 아버지 윤종씨는 윤씨가 결혼하면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윤 당선인의 집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부모님까지 제사를 지냈다.
 
  “서울 상도동에서 할머니와 부모님, 동생들까지 한집에서 살았어요. 장남이라 제사가 많았는데, 할머니와 아버지가 제사 때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할아버지의 이름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 너희로 인해서 할아버지의 이름이 빛나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 상도동에 자리 잡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원래 제가 태어난 곳은 신촌 굴다리 근처인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상도동으로 갔어요. 당시 서울시에서 20여 평의 작은 주택을 분양했는데, 아버지와 친하게 지낸 (신채호 선생님 아들인) 신수범 아저씨가 같이 분양 신청을 하자고 했죠. 그때 우리는 떨어지고 그분은 두 채를 받은 거예요. 두 채 중 한 채를 우리한테 주신 거죠.”
 
  ― 두 분이 그 정도로 친한 사이였나요. 같은 어려움과 자긍심을 갖고 있었을까요.
 
  “아버지는 신수범 아저씨와 친구처럼 아주 친했고, 김구 선생님 아들인 김신 회장님과도 형제처럼 친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김신 회장님께 상의하기도 할 정도로 친하셨어요. 형제가 없는 아버지에게 좋은 친구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려웠다던데요.
 
  “제가 중3 때부터 어머니가 김신 회장님 배려로 김포공항에서 작게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웠죠.”
 
  ― 독립유공자 후손들 상당수가 어렵게 지내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사 때 어른들 얘기하시는 걸 들어보면 정말 어렵게 지내는 분들이 많다고 했어요. 독립운동가의 후손에 대한 보훈이 있긴 하지만 부인이 재가한 경우엔 전혀 받을 수 없고, 예우가 남성 위주여서 양자를 들이는 분도 있고 정작 친딸은 너무 어렵게 살고… 그런 얘기들을 들었습니다.”
 
  ― 본인은 그래도 형편이 괜찮은 편이었습니까.
 
  “저는 대학 가기 전에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대학등록금 지급 규정이 생겨서 저와 동생들은 학비 걱정 없이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죠. 또 저희 때는 대학에서 학점이 B 이상이면 등록금 외에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어요. 아르바이트를 안 하고도 등록금과 생활비 걱정은 안 하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 학창 시절 ‘윤봉길의 손녀’라는 사실이 주변에 알려져 있었나요.
 
  “중·고등학교 때 등록금을 원호처(현재 국가보훈처)에서 받아 와야 하니까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알았는데, 학생들은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주변 어른들이 할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말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셔서 우리 형제는 모범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죠.”
 
 
  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추억
 
윤주경 당선인을 비롯한 미래한국당 당선인들이 지난 4월 29일 서울 양재동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찾아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88주년을 기념해 합동 참배를 하고 있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어린 시절 큰 어려움을 겪어서인지 말이 없고 진중한 분이었어요. 어릴 때 학교에 가면 교사들이 ‘조선에서 제일 나쁜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대요. 아이가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또 교사가 그렇게 얘기하니 친구들도 그렇게 놀리고…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고, 그때 ‘내 자식에게는 나쁜 사람의 아이라는 말을 절대 듣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원칙주의자로 강직하게 살아오셨죠. 어느 자리에서 만난 분이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아버지가 농림부 양정국에서 근무했는데, 정미소의 쌀 도정량을 정해주는 그런 업무였죠. 그걸 좀 늘리고 싶어 했던 분이 그렇게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는데 아버지가 절대 만나주지도, 연락을 받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그분은 서운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에 그런 공무원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 이런 원칙주의와 강직함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아버지는) 부친과 형제를 일찍 잃었고 본인은 투병 끝에 돌아가셨습니다.
 
  “원칙주의자던 아버지가 투병생활 중에 지치셔서 의사 말도 잘 안 듣던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형제가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했는데, 그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아버지가 없이 자라서 아버지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늘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고요. 말이 없으셨던 것도 우리 형제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 아버지가 될지 깊이 고민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단칸방에서 살 때 아버지가 퇴근해 오시면 우리 가방을 열어서 숙제는 다 했는지 확인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자식들에게 관심이 많았지만 표현을 잘 못 하셨어요. 돌아가시고 나니 일찍 아버지를 여읜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더 와닿습니다.”
 
  ― 윤봉길 의사 관련 사업에 아버지가 나서지 않아서인지 한때 윤 의사의 직계자손이 없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작은할아버지 중 한 분과 그 자녀들이 강하게 추진해서 아버지가 설 자리는 거의 없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 할머니는 어떤 분이었나요.
 
  “10대에 시집와서 일찍 남편을 잃고 남편 없는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하면서 힘들게 살았지만 한 번도 불평이나 남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으셨어요. 할머니는 세 자녀 중 둘을 일찍 잃고 시댁에서 시동생들과 조카들을 키우면서 사셨어요. 할아버지는 동생이 6명이고, 아버지보다 어린 작은할아버지도 계실 정도로 대가족이었죠. 그래서 할머니는 ‘내가 손주를 보면 정말 예쁘게 잘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셨다며 우리 7남매를 애지중지하면서 키우셨어요. 어머니가 장사하느라 바쁘실 때 우리를 키워준 분은 할머니였죠. 옛날 분인데도 아들딸 차별 같은 건 전혀 없었고요. 제가 대학 들어가서 미팅하고 그런 얘기하면 할머니가 너무 재미있어 하면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냐고 계속 물어보시곤 했어요. 젊은 시절을 그렇게 지내셨으니 아쉬움이 남았을 것 같아요.”
 
  ― 다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군요.
 
  “그래서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어렵게 살거나 심지어 집안이 풍비박산난 얘기를 들으면 사실 전 미안함을 느껴요. 저는 부모님과 할머니, 형제가 있는 울타리 속에서 컸는데 그렇지 못한 분들은 얼마나 어려움이 컸을까요.”
 
  ―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가 당선인의 성격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까.
 
  “두 분은 말이 많은 분은 아니었는데, 절대로 부정적인 얘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우리의 어려운 형편과 독립운동가를 예우하지 않는 국가와 사회 등에 불만이 있을 법한데, 전혀 그런 게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분이다, 너희가 할아버지의 이름을 빛내는 사람이 돼야 한다며 늘 긍정적인 이야기만 하셨어요. 사실 두 분은 얼마나 힘들게 사셨겠어요. 일제시대엔 세상 나쁜 사람으로 취급받다가 광복이 되니 다들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고, 역사에 대한 평가도 계속 혼란이 있었잖아요. 훙커우공원 의거 기념행사 때 ‘사람 하나 죽이고 이렇게 대접받나’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그런 말에 할머니와 아버지는 많이 괴로워하셨습니다. 마음속에 갈등이 많으셨겠지만 남의 비난을 하지 않고 불만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도 않으셨어요. 저는 어린 시절 긍정적인 말을 많이 듣고 자라서 지금 긍정적인 성격이 형성됐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
 
윤 당선인은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시절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 대학생활과 직장생활(편집자 주: 윤 당선인은 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에 들어가 2014년 독립기념관장이 되기 전까지 근무했다)은 평범하게 했습니다.
 
  “평범하게 산 것 같으면서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죠. 독립운동가 후손 중에서는 평범한 편이에요.”
 
  ―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1999년이었어요. 윤경빈(편집자 주: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위대 대장 출신으로 전 광복회장, 전 독립기념관 이사장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의 장인) 회장님이 광복회 회장인데 제게 연락을 해오셨어요. 아버지 지인이 광복회에 계셔서 저를 기억하고 계셨던 거죠. 그해가 3·1운동 80주년이어서 상하이 임시정부 기념관을 방문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상하이 날씨는 정말 음울하고 축축해서 골병든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될 정도였죠.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이런 곳까지 와서 나라를 찾기 위해 절실하게 노력했다는 걸 그때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후손으로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기념사업회에 조금씩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윤 당선인은 이후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이사, 매헌 윤봉길 월진회 이사, 독립기념관 이사(2006~2012) 등을 지내며 직장생활을 계속했다.
 
  ― 그러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에게서 참여 제안을 받은 건가요.
 
  “2012년 대선 전에 연락이 와서 알겠다고 하고 선거캠프-인수위-청와대로 이어지는 동안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100%대한민국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18대 대통령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청와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민간위원을 맡았습니다.”
 
  ― 처음 정치에 참여하게 된 건데 어떤 마음으로 수락했습니까.
 
  “처음엔 도와주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내부 갈등이 심하니까 대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취지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화해해야 한다는 얘기도 마음에 와닿았죠. 그래서 참여하겠다고 했습니다.”
 
  ― 박근혜 후보와 원래 안면이 있었습니까.
 
  “안면이 있는 건 아니었고, 어떤 출판기념회에서 한 번 직접 본 적이 있어요. 말을 참 또박또박하게 하고, 이 사람은 대한민국의 지도자로서 존경받기 위해 노력하고 준비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대통합을 위해 이분이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화해와 통합이 된다면 대한민국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돕게 된 거죠.”
 
  ― 대통합위원회는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한광옥 위원장을 모시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들으러 다녔습니다. 그때 우리 국민들이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한다는 점을 생생하게 느꼈어요.”
 
  ― 독립기념관장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박근혜 캠프에 참여해서 특혜를 받은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는데요. 청와대에서 ‘한번 해봐라’라는 얘긴 없었습니까.
 
  “독립기념관 이사직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2014년 독립기념관장 공모가 났어요. 주변에서 신청해보라고 권해서 신청하고 면접 보고 통보받았어요. 평범한 공모 과정이었죠. 독립기념관 이사를 계속해왔으니 신청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청와대에서 연락 온 건 없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첫 번째 목표는 독립운동사 정립
 
독립기념관장 시절 국회 국정감사에 참석한 윤주경 당선인(왼쪽에서 두 번째).
  윤 당선인은 독립기념관장으로 취임한 후 《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을 시작하는 등 독립운동사 정립에 나섰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2000년대 후반에는 윤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가 ‘테러’라는 얘기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독립운동사가 덜 연구돼 있었고, 우리 국민의 의식도 정립돼 있지 못했던 겁니다. 2010년대 이후 독립운동사가 정리되면서 그런 얘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죠.”
 
  ― 독립운동사 연구는 계속 진행 중이죠.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입니다. 계속 기록해나가야 잊히지 않는 역사가 되는데, 국내 독립운동사 연구자는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연구자들이 ‘우리는 계속 줄어들고 일본은 계속 연구를 하고 있으니 식민시대 연구자료는 일본인 것을 가져다 써야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어요. 제가 독립기념관장일 때 중국의 한 사회과학연구소를 방문했는데, 동북3성의 항일투쟁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자가 우리 독립기념관의 해당 연구자보다 많은 겁니다.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바로 우리의 실정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런 실정을 개선하는 데 역할을 하고 싶어요. 주변에서도 그런 역할을 해달라고 합니다.”
 
  ― 국내에 국사학자가 그렇게 없습니까.
 
  “제가 독립기념관장 시절 《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을 시작했는데, 원고 써줄 연구자가 100명이 안 되는 거예요. 독립운동사 전공자가 50명이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연구자 수가 적으니 원고의 질도 장담할 수가 없잖아요. 독립기념관 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이 10여 명에 불과해요. 법적・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직접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나요.
 
  “독립기념관장 시절 (국정감사로) 국회에 갈 일이 많잖아요. 가면 늘 ‘왜 이렇게 부족하냐, 잘 못하냐’는 지적을 받고, 저는 ‘잘 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은 화가 나는 거예요. 충분한 예산과 인력을 주고 잘못했다고 하면 이해하겠는데 그게 아니잖아요. 예를 들면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가 20여 개국에 있는데, 방문조사와 탐방을 1년에 한두 번밖에 갈 수 없게 돼 있어요. 그러면 한 곳에 대한 자료는 10년 전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왜 이렇게 옛날 자료를 갖고 오냐’고 하면 할 말이 없죠.”
 
  ― 독립운동 관련 예산을 챙길 사람이 없었군요.
 
  “독립기념관장이 기재부에 요청한다고 예산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법적인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을동 의원 등 많이 도와주신 분들은 있는데, 지속적으로 잘 되지 않았어요. 누군가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임기 만료를 몇 달 앞두고 보훈처에서 사퇴 압박을 한 일이 논란이 됐는데요.
 
  “보훈처 모 국장이 와서 BH(청와대)의 뜻이라며 사표를 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임기가 3개월 남았는데 공모 절차를 밟다 보면 3개월이 금방 지나갈 상황이었어요. 왜 굳이 사표를 내라고 하냐고, 이제부터 공모 절차를 시작하면 되지 않냐고 했더니 안 된다고, 보훈처 개혁을 위한 조치이니 가능하면 지금 사직 여부를 결정해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제 입장은 저 하나 사표 내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이런 선례를 남겨선 곤란하다는 거였어요.”
 
  ― 피우진 처장에게 전화해 그렇게 얘기했습니까.
 
  “사실 사정해보려고 전화했는데 피 처장 얘기를 들어보니 사정해도 안 되겠더라고요. 다른 부처도 다 사표를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버텨야 하나, 사표를 내야 하나 고민하면서 저를 도와주신 어르신들께 여쭈어봤는데 여러분이 ‘버티면 기념관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은 더 커졌고요.”
 
  ― 그런데 피 처장이 결국 ‘항복’을 했죠.
 
  “피 처장이 전화로 ‘여기저기서 전화가 너무 많이 온다, 사표를 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이후 제가 사퇴 종용 받은 사실을 아는 국회의원(자유한국당 백승주)께 얘기했더니 그분이 국회에서 질의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피 처장이 숨기지 않고 대답을 하더군요.”
 
  ― 왜 그런 일이 생겼다고 봅니까.
 
  “아직도 진짜 BH의 뜻이었는지, 피 처장의 뜻이었는지, 중간에서 말을 이상하게 옮긴 건지 그건 제가 모르겠어요. 누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든, 독립기념관장이 사퇴 종용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역대 독립기념관장은 한 명도 임기를 채우지 않고 나간 분이 없어요. 정권이 바뀌면 정부 일부 부처가 산하기관 일괄사표를 받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독립기념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왜 저에게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황교안, 작년 6월 영입 제안
 
  ―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영입 제안은 언제 받은 겁니까.
 
  “2017년 말 독립기념관장직에서 물러나고 이 경험을 토대로 뭘 해야 할까 생각했어요. 대한민국 독립기념관장이라는 자리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이 경험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제안이 온 겁니다.”
 
  ― 그 시점이 언제인가요.
 
  “지난해 6월쯤이었어요. 저는 시간을 좀 달라고 했고, 황 대표는 충분히 기다려주셨죠.”
 
  ― 황 대표는 자신이 공들여 영입한 인재라고 강조했습니다.
 
  “직접 연락하고 만나서 영입한 사람이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만나자고 하는데 제가 여러 사정으로 못 만날 일도 있고 해서 시간이 좀 걸렸죠. 직접 제안을 받고 나서 고민이 많았어요. 현실정치 영역에 처음 발을 딛는 건데 어떻게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 자신이 정치할 성격이라고 생각합니까.
 
  “제가 정치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 알죠. 그래서 영입 제안을 받고 독립기념관에 계셨던 분들, 지인들, 주변 어르신들 등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내가 정치를 하고 싶은 건 아닌데 이런 기회가 있으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여쭤봤어요. 다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국회에 들어가는 것이 좋은 일이고 해야 할 일도 많을 거라고 말씀해주셨죠.”
 
  ― 어머니(윤봉길 의사의 며느리 김옥남 여사, 89세)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야당으로 가는 데 대한 걱정은 없었습니까.
 
  “독립운동가들이 여야가 어디 있으며 오로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하지 않았느냐, 너도 대한민국을 위해 일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독립기념관장이라는 경험을 살려서 좋은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머니의 말씀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 ‘친일 정당’이 기존 이미지를 벗기 위한 수단으로 윤 전 관장을 영입한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런 얘기도 들었죠. 보수정당의 친일 프레임을 어떻게 깰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런 비판과 앞날에 대해 각오를 해야 한다,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라. 이런 얘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의 숙제라고 생각해요.”
 
  ― 비례대표 1번이 될 것이라는 주변의 예상과 달리 처음에 21번을 받았는데요. 심정이 어땠습니까.
 
  “덤덤했어요. 공천 심사하는 분들이 당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생각했는데 저는 그쪽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했죠.”
 
  ― 그런데 황교안 대표를 비롯해 여론에서 ‘윤주경이 왜 비당선권이냐’라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사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렇게 독립운동을 사랑하고 독립운동가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자긍심이 느껴졌어요. 국민의 독립운동에 대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 야당 의원을 하기엔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건 맞아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상대방이 마음이 아플 게 먼저 느껴져서 잘 못 해요. 하지만 제가 지켜야 할 가치가 어떤 것인지는 확실히 알기 때문에 그걸 지키는 데는 물러섬이 없을 겁니다.”
 
 
  초선 의원 윤주경의 계획은
 
  ― 국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뭡니까. 초선의원에게 1호 법안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생각하는 법안이 있는지요.
 
  “독립운동사 정립을 위한 법안을 만들고 싶습니다. 예산과 인원을 차근차근 늘리고 꾸준히 연구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립기념관은 계속 사료를 확보하고 있는데 연구하기는커녕 아직 번역도 못 한 사료도 많습니다.”
 
  ― 독립운동가 예우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죠.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예우가 아직도 부족해요. 분야별로 경로우대증보다도 못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전에 한 분이 혜택을 받으려면 경로우대증을 내밀 수도 있는데 자존심 때문에 내밀지 못했다는 얘기를 하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예우를 받는 분도 일정 수준 이상의 대접을 받도록 하고 싶어요.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예우가 조금씩 나아지긴 하는데 제가 국회에 들어가서 좀 더 확대하고, 제 다음 분이 더 확대하도록 하는 식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 상임위원회는 역시 독립기념관이 속한 정무위원회를 희망합니까.
 
  “네. 일단 독립운동사 정립에 대한 일을 해야 하니 그렇게 희망하고 있어요.”
 
  ― 당선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요즘 생활은 어떻습니까.
 
  “공부하는 중입니다. 다른 당선인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공부는 함께하고 있고요. 각자의 전문성도 계속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은 헌법기관’이라고 해서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당선인들의 단체대화방에서는 주로 무슨 얘기를 합니까.
 
  “품위 있는 보수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또 우리가 좀 더 국민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고 있어요.”
 
 
  독립운동가의 후손 정치인 많이 나와야
 
훙커우공원 의거 이틀 전 폭탄을 손에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윤봉길 의사. 윤 당선인은 윤 의사의 장손녀다.
  ― 최근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 출신) 비례대표 당선인인 윤미향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 논란이 뜨겁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저도 안타깝고 걱정이 많이 됩니다. 윤미향이라는 사람이 해온 업적은 대단하지요. 위안부 문제를 이 정도로 국제적인 관심을 갖게 한 공로는 인정하는데, 그 단체는 투명해야 합니다. 회계의 투명성 때문에 그동안 해온 일이 모두 무너질까 봐, 본질이 흐려질까 봐 걱정돼요.
 
  정의연은 자신들이 했던 일을 정당하게 평가받을 필요가 있고, 동시에 이용수 할머니의 소망과 주장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할머니의 소망은 우리가 전쟁으로 이유 없이 부당한 희생을 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과 전 세계가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공감하고 좋은 세상을 열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 소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이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이라는 든든한 나라가 할머니들을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지켜줘야 해요. 정의연은 오해가 있으면 밝히고 투명하게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 미래통합당이 진상규명 TF팀을 구상하고 있는데요.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이 공동으로 TF팀을 만들 계획이고, 저도 참여합니다.”
 
  미래통합당은 친일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이었던 조태용 당선인과 윤봉길 의사 장손녀인 윤주경 당선인 등도 참여시킨다는 방침이다.
 
  ― 미래한국당이 미래통합당과 합당 여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원유철 대표는 당원들의 총의를 모으겠다고 했는데요.
 
  “합당하는 데 이의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 부분은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 앞으로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습니까.
 
  “저는 제 분야에서, 그리고 국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려고 하고요, 저를 시작으로 더 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정치에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독립기념관장 시절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하는 일을 했는데, 제가 매달 해당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가능한 한 만났어요. 한 분이라도 더 알고 싶어서 만났던 건데, 후손들을 만나 보니 이분들 중 전문성을 갖고 있는 분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역사라든가 IT라든가 자신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정치를 하면 대한민국 발전에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애국이라는 기본 정신을 갖고 있는 분들이잖아요. 예전에 김구 선생님 며느리가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국회에 독립운동가 후손 5명만 있으면 이 나라의 모습이 많이 달랐을 거라고요.”
 
  ― 외국에서는 독립운동가나 혁명가의 후손이 정치를 하는 경우가 많죠.
 
  “중국 정부에는 항일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많아요.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떳떳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1970년대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범죄자로 취급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해요. 전과자라는 거죠. 전과자 낙인이 찍히는 게 두려워서 독립운동한 사실을 숨긴 분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독립운동사가 정립되면서 그런 일이 없어졌고 독립운동 사실을 당당하게 드러내지만 이게 오래된 일이 아니에요.”
 
 
  “독립기념관 사랑해달라”
 

  윤 당선인은 21대 국회 개원 후 독립기념관 이사직을 맡게 될 전망이다. 독립기념관 이사회에는 여야 국회의원이 1명씩 참여하게 되는데, 야당은 윤 당선인을 독립기념관 이사로 내정한 상태다.
 
  ― 독립기념관과는 계속 인연을 이어가겠군요.
 
  “많은 국민이 독립기념관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독립기념관은 우리 국민이 힘을 모아 만든 곳이잖아요. 이런 100만 평짜리 별장을 가진 국민이 어디 있겠어요. 저는 관장 시절 ‘독립기념관은 전 국민의 별장이고, 나는 별장지기’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국방부와 MOU를 맺어 군인이 독립기념관을 방문하면 휴가를 하루씩 더 주는 제도도 만들었어요. 그 군인들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독립기념관에 데리고 올 걸로 기대해요. 봄에는 꽃이, 가을엔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국민들이 나들이로도 자주 오셨으면 합니다.”
 
  ― 독립기념관장으로 재직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있습니까.
 
  “독립기념관을 편안하고 친근한 장소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아요. 어떤 지인은 제가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한다고 하니까 ‘묫자리 하나 만들어달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그만큼 독립기념관을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는 거죠. 총 7개 전시관 중 4관을 ‘평화누리관’으로 만들어서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전시를 꾸몄습니다. 독립운동은 투쟁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와 평화 운동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우리의 평화를 어떻게 도와줬는지에 중점을 두고 전시관을 꾸몄어요. 완전히 새로운 시도였고, 그 이후 사람들이 독립기념관을 좀 더 친근한 곳으로 인식하게 됐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 2019년 3·1운동 100주년은 비교적 조용하게 지나갔는데요.
 
  “선진국에선 미국 독립선언이나 프랑스혁명 기념 같은 큰 사건의 100주년, 200주년은 관련기관이 10년 전부터 준비한다고 합니다. 독립기념관도 제 선대 관장님부터 특별법 제정도 시도하고 많은 노력을 했는데 잘 되지 않았어요. 그때 독립운동가 후손 국회의원이 한두 명만 있었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남북이 함께하는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려 했는데, 북한은 우리와 독립운동에 대한 시선이 좀 달라요. 여러 이유로 100주년이 조용했던 것 같아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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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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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형진    (2020-06-06) 찬성 : 0   반대 : 0
품위따위 개나 줘버리고 몸 낮춰 종으로 일해라... 품위 찾는 것들이 국민 등골 빼먹고 권위만 찾더라.
  우정환    (2020-06-06) 찬성 : 1   반대 : 0
품위는지금까지 실컷보았다.
배부른오렌지 웰빙돼지들의 품위는 그만 보여주고 제발 싸울줄이나 알거라.
아직도 왜 그렇게 지지를 못받는지 모르는 한심한 종자들.
  이상우    (2020-05-21) 찬성 : 3   반대 : 1
품위있는 보수요? 지금 이런 시국에요? 자기 할아버지 처럼 수류탄 까서 돌격 앞으로 해도 누구하나 너무 나갔다고 흉볼 사람 없습니다. 순수보수 우파라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진짜 몰라서 그런 건가요? 품위 그거 찾아봐야 뒤통수만 까입니다. 박근혜가 제대로 쥐어진 권력을 사용 할 줄 몰라서, 또 너무 약해 빠져서, 짜여진 틀 속에서 하는 정치는 많이 봐 왔지만, 죽기살기로 의식화 훈련 받아온 좌익 붉은 학생 출신 파워를 우습게 보다고 당했어요. 부디 환상에 들떠서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를 저지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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