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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민주의 逆襲’과 근대화의 후퇴

‘민주팔이 양반’이 지배하는 ‘양반-상놈’ 세상이 돌아왔다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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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당 합당 했지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융합 실패
⊙ 박정희 근대화 부정… 산업화를 이해하지 못한 민주화는 그 자체가 퇴행
⊙ 양반들에겐 백성이란 개·돼지… ‘민주팔이 양반’들에게도 民이란 광장에 불러내 ‘짖어대게’ 만들 수 있는 존재에 불과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 現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2016년 12월 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의 1차 청문회에 출석한 대기업 총수들. 사진=조선DB
  근대화(近代化)가 된 줄 알았다. 한국은 산업화(産業化) 성취의 바탕 위에 정치적으로도 민주화(民主化)라는 성숙을 이룩하여 드디어 근대화를 완수한 줄 알았다. 1987년에는 그랬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모범적 사례라 했다. 세계인들이 그렇게 말했고 한국인들도 그렇게 믿었다. 1987년 체제, 이제 전근대(前近代)의 질곡(桎梏)은 끝났고 21세기라는 미래를 향해 질주(疾走)할 일만 남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30여 년 21세기가 된 지금,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퇴행(退行)의 난장(亂場)을 목도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한반도 역사상으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성취로 일컬어지는 위업(偉業)이 흔들리고 있다. 민주화를 뒷받침하고 민주주의를 떠받쳐온 산업화의 성취가 그 민주의 역습(逆襲)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데 흔들리는 것은 경제만이 아니다. 산업화의 성취를 우습게 알며 위세를 떨쳐온 민주화의 성취 자체도 사실은 난장판이 돼가고 있다.
 
 
  난장판
 
  ‘난장판’이란 말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에서 유래했다. 들끓는 소음과 무질서 정도가 아니었다. 몸싸움이 난무했다. 오로지 과거급제 하나만을 보고 매달려온 유생(儒生)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싸움박질 때문이었다. 시제(試題)를 잘 보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답안을 빨리 내기 위해서도 앞자리를 차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시험을 치는 유생 혼자만이 아니라 4~5인이 한 조가 되어 과장(科場)에 진입해야 했다.
 
  “유생이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오고, 힘센 무인들이 들어오며,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 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이치가 어디에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1778년 정조 2년 박제가(朴齊家)가 청(淸)나라에서 돌아온 뒤 저술한 《북학의(北學議)》의 한 대목이다.
 
  정약용(丁若鏞)이 1808년(순조 8년) 쓰기 시작해 1817년(순조 17년) 집필을 마친 《경세유표(經世遺表)》의 묘사는 더욱 적나라하다. ‘자리, 우산, 쟁개비(야전삽처럼 쓸 수 있는 냄비) 등의 기구를 나르는 종들’이 앞장을 서 진입하고 그중 한 명이 앞자리를 맡아 잡는다. 그리고 시제가 제시되면 ‘문장에 능숙한 거벽(巨擘)’이 내용을 궁리하고, 이어 ‘글씨에 능숙한 사수(寫手)’가 시권(試券·답안지)을 써 내려간다. 대리(代理)시험·대리작성 운운은 시빗거리도 못 되는 상황이었다.
 
  정조 시대는 흔히 조선조 후기 부흥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그 정조 시대의 한복판을 살아온 박제가와 정약용의 눈에 비친 조선은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수치를 보면 더욱 놀랍다. 1800년(정조 24년) 3월 21일에 시행된 정시(庭試) 초시의 응시자 수는 11만1838명이었고, 그날 거둬들인 시권은 3만8614장이었다. 이튿날인 3월 22일 창덕궁 춘당대에서 열린 인일제(人日製·성균관 유생에 한해 응시 자격을 주는 시험) 응시자는 10만3579명, 수거 답안지는 3만2884장이었다. 이틀에 걸쳐 21만5417명이 한양에서 과거를 보았으며 답안지만도 도합 7만1498장이었다.
 
  당시 한양 인구는 20만명 남짓으로 추정한다. 그 인구수만큼이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몰려든 것이다. 지금 서울 인구가 1000만명이니 요즘으로 보면 시험을 치러 1000만명이 서울로 몰려든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그럴 만했다. 조선시대 사회적 성취・성공의 유일한 잣대는 출세(出世)였으며, 그 출세의 유일한 길은 과거급제였다. 그 귀결이 바로 과장(科場)의 난장판이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난행의 시대를 일컬어 ‘난장판’이라 하는 것은 그냥 비유적 한탄이 아니다. 지금 한국의 난장판에는 그 어원대로의 조선조적 퇴행이 있다.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
 
그레고리 헨더슨과 그의 명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사진=조선DB
  민주화는 산업화와 함께 한국 근대화의 위대한 정치적 성취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 민주화가 신성(神聖)한 깃발로 행세를 해오더니 어느덧 정치적 위세가 다른 모든 것을 짓밟고 군림하는 양상이 심화되고 있다. 타락이다. 하지만 이 타락은 농익음 뒤에 으레 따라올 수 있는 타락이 아니다. 미처 성장과 성숙을 제대로 이룩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엎친 데 덮친 격의 전근대적 전도(顚倒)가 나타나고 있다.
 
  민주화는 단순히 이른바 ‘독재’라는 권력 집중의 종언(終焉)만이 아니다. 기능적으로 보자면 민주화는 정치 영역이 불가피하게 떠맡아야 했던 역할을 성장한 사회 각 부문과 영역으로 이양하는 정치 과잉의 해소 과정이기도 하다. 민간화・민영화다. 한국도 그래야 한다고들 했고, 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거꾸로 가고 있다. 정치 과잉은 더 심화되고 있으며 다른 전 부문을 집어삼키고 있다.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 son·1922~1988)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는 저서를 통해 한국의 정치적 특성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에선 개인이든 집단이든 모든 단위들이 중앙의 정치권력을 향해 돌진하고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소용돌이를 치게 된다는 것이다. 헨더슨은 한국의 이런 정치문화가 별도의 사회적 응집력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과거와 양반관료제를 통해 중앙권력만을 향해 질주했던 조선조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968년이었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판은 2000년에야 처음으로 나왔다. 32년이라는 한 세대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 사이 한국은 박정희(朴正熙) 시대와 전두환(全斗煥) 시대를 거치고 1987년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도 13년이 지난 이후였다. 그런데 헨더슨의 지적은 지금도 현재적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는 여전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날로 더 심화돼가고 있다.
 
 
  前近代的 정치 과잉
 
  선거 시즌이 오면 정치가 분주하게 각 분야에 손짓을 하며 그 갖은 분야의 인물들이 타진을 받는다. 율사(律師)들이나 공직 경력의 인물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그렇다. 연예인은 물론이요 강아지 조련사가 출마 권유를 받는 일도 있었다. ‘영입’이라는 이벤트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펼쳐진다. 그리고 그럴 때면 정치 진입을 갈망하는 이러저러한 분야의 지망생들은 그에 맞추어 여차저차의 ‘경력’을 내세우게 된다.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조짐이 있었지만 지금의 양상은 완전히 양식(良識)의 선을 넘었다. 정치판사들이 숨을 고르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은 채 정치권에 뛰어들고 있다. 창업 경력을 내세운 청년사업가라는 어떤 인물이 알고 보니 경력 스펙을 만들기 위해 창업과 폐업을 반복한 경우였던 사례도 있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짐짓 삼가는 척하는 분위기라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최소한의 낯가림도 없다. 사법(司法) 세계의 위엄은 이미 땅바닥이다. 수많은 분야가 꾼들의 기만으로 신뢰에 흠집이 나고 있다. 양식이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팽개쳐지고 있다.
 
  한국의 사회구조는 이미 단순하지 않다. 농경사회가 아니며 단순한 촌락공동체의 연쇄가 아니다. 고도화된 산업사회이며 그에 동반하여 온갖 분야가 형성돼 있으며, 각종 영역과 유형의 직업군이 분화되고 또 얽혀 있다. 일상의 때에는 모두가 그 각 분야에서 나름의 성취와 성공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러나 정치 시즌이 돌아오면 그 각 분야에서의 성취와 위신은 온데간데없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성취를 했든 최종적으로 정치적 지위로서 인정받으려는 경향이 압도적 위세를 부린다.
 
  한국의 이 같은 정치 과잉은 결코 현대적 병리(病理)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극복하고 청산하지 못한 전근대적 유습(遺習)의 문제가 있다.
 
 
  돌아오지 않은 陶工들
 
  조선시대는 과거급제를 통한 입신양명(立身揚名) 외에는 존중받는 다른 직업적 성취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했지만 농자(農者)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성취를 존중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자연과 결합돼 있는 본질적·직접적 계급으로서의 농업계급에는 그 직접적 조건을 넘어서는 개별적 성취가 미덕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西歐)도 그러했지만 조선은 더욱이 그랬다.
 
  직업적 성취는 자연적·직접적 조건의 바깥에 놓여 있는 계급의 것이다. 상업이 그러했고, 그 외 여타 각종의 비(非)농업적 수공업들이 그러했다. 그런 부문들이 성장하여 비중 있는 독립적 영역이 돼가면서 주어진 조건 이상의 성취가 중요한 미덕이 되게 된다. 그게 바로 근대적 의미의 산업 성장과 직업 분화(分化)이며, 그 같은 새로운 성장과 함께 직업적 성취가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된다. 즉 직업적 성취는 그 현상도 의식도 근대적 산물이다.
 
  크든 작든 농업이 아닌 산업의 발생과 분화가 있어야 직업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래야 직업적 성취에 대한 의식도 존재할 수 있다. 서구 역사에서 봉건제 시대의 정치는 농지를 지배하는 세습신분 귀족의 독점 영역이었다. 그래서 정치는 아예 별도의 성취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바깥에는 다른 분야들이 있었다. 상업과 각종 수공업들이 길드를 조직해 독립적 성장을 계속했다. 거기에서 산업이 성장하고 직업적 성취가 자라났다.
 
  조선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인 농업 외에 다른 전 분야를 억눌렀다. 상업은 억제되었고, 수공업은 관(官)의 장악 아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납치’돼 일본의 도자기 산업 성장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는 조선의 도공(陶工)들이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에서 조선 도공들은 사족(士族·사무라이 계급) 대우를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대우는 조선에선 불가능한 일이었고, 부(富)의 축적이라는 경제적 성취도 가능치 않았다. 그런 상황에선 근대적 산업과 직업의 성장 그리고 그 성취에 대한 관념이 자라날 수 없다.
 
 
  ‘직업적 명예’가 없던 조선
 
막스 베버.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직업적 성취의 정신을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설명했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선 목사나 사제(司祭) 같은 성직만이 아니라 장사를 하고 물건을 만드는 등의 모든 일반 직업이 신의 거룩한 부름에 의한 소명(召命)으로 여겨졌으며, 그런 정신이 자본주의의 정신적 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베버뿐 아니라 헤겔(Hegel)도 또 다른 각도에서 그 같은 직업적 성취라는 근대적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헤겔은 산업계급이 시민사회를 이루는 근간이 되며, 그 정신이 장차 국가적 차원의 공적 가치의 기반이 됨을 말했다. 시민사회는 그 자체로는 곧장 공적 가치의 담지자(擔持者)가 될 수 없는 ‘욕구의 체계’이지만, 그 기초가 되는 가치관이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우선 산업계급은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해 노동, 성찰, 지성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개인들에게 문화와 품위, 지성의 형성을 부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특히 직업단체(길드)의 역할이 중요한데, 근대사회의 미덕인 성실성과 직업적 명예는 길드 속에서 자라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관념을 통해 시민사회에 욕구의 체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객관적 인륜성’이 도입되게 된다는 것이다.
 
  베버와 헤겔의 설명에 비추어보자면 조선시대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근대적인 ‘직업적 명예’ 부재(不在)의 시대였다. 잉태하지도 낳을 수도 없었다. 조선조적 정신문화에서 유일하게 인정되는 명예의 존재는 ‘먹물 양반’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산업화 성취는 결코 단순한 수치상의 경제적 성취 차원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 근대화’라고 갈파한 그대로 총체적 의미에서 근대화의 핵심이다. 산업화의 성장이 있어야 산업계급이 자라나고, 그래야 직업적 성취와 명예가 자리를 잡는다. 장인정신의 소중함을 말하지만 산업과 직업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면 그 어떤 ‘장인’도 명예와 위엄은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선 자유도 민주도 결코 자리 잡지 못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융합 실패
 
1990년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 창당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진정한 융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사진=조선DB
  한국의 민주화 퇴행은 그냥 진행된 타락이 아니다. 한국의 민주화는 끊임없이 산업화를 공격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박정희 시대는 더욱이 극명했으며, 그런 가운데 그 행태는 한국의 민주 패거리들의 속성이 돼버렸다. 1987년 체제가 출발하게 되었을 때 적어도 한국의 민주 진영은 그 속성을 극복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1990년, 당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가 3당 합당(合黨)에 참여한 것은 그 내면의 동기가 ‘대통령병(病)’이든 말든 올바른 선택이었다. 1987년 대선(大選)의 결과는 민주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에도 불구하고 ‘구(舊)세력’을 결코 일방적으로 퇴장시킬 수 없는 것임도 보여주었다. YS와 DJ(김대중)가 단일화했다면 ‘민주진영’의 승리 가능성이 컸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YS와 DJ의 표가 그대로 산술적으로 결합했을 것이라고 보는 건 선언적 주장에 지나지 않으며, 민정당이 설사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표를 획득할 가능성이 분명했다.
 
  더욱이 1987년 대선은 이미 민정당이 승리했다. YS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YS와 DJ가 분열돼 있는 한 단독으로 집권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재결합은 이미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정치적 욕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YS는 민주화를 제외하고는 DJ에 몰려 있던 급진 세력과 공통점이 없었다.
 
  YS는 결국 산업화 세력과의 결합을 택했다. 그것은 사적(私的) 욕심 차원에서도 현명했지만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옳은 결단이었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서로를 인정하고 하나로 융합된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재탄생된다면 대한민국은 장기적 안정 속에서 한층 더 도약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산업화 세력은 민주화 세력을 인정했지만 민주화 세력은 산업화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YS는 자신을 점령군으로 간주했다. YS는 당선된 뒤 ‘하나회’ 척결을 앞세워 군부(軍部) 엘리트 세력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다. 그리고 JP(김종필)도 쫓아냈다. 산업화 세력을 대표하는 양대 축이 무너지고 쫓겨났다. 남은 것은 상도동 그룹의 주도에 의한 기계적 결합뿐이었다. DJ는 쫓겨난 JP와 손잡고 당선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산업화를 이해하지 못한 민주화는 그 자체가 퇴행이다. 김대중-노무현이라는 10년의 좌익 정권은 그 대가였다.
 
 
  ‘양반-상놈의 시대’의 부활
 
  이명박의 당선은 거의 전적으로 노무현의 실패 덕분이었다. 박근혜의 당선은 그 개인의 힘도 있었지만 급진 세력 대두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 컸다. 이명박-박근혜 시대는 다시 찾아온 기회였다. 무너진 산업화와 민주화의 융합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민주화 쪽이 박정희로 대표·상징이 되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산업화 성취의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민주를 빙자하면서 늘 그 성취를 부정하며 도전해온 좌익 급진 세력을 제압해야 했다.
 
  그러나 10년 좌익 정권을 초래했던 잘못을 또 반복했다. 좌익 급진 세력을 제압할 기회를 안이하게 흘려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여당 내 정쟁(政爭) 때문에 탄핵 난동 세력에 부역(附逆)하는 치명적 과오를 범했다.
 
  탄핵 난동에 뒤이은 문재인 정권 등장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 과오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금배지 완장’들의 마당으로 갖은 분야의 인물들이 불려가 호통을 들어야 했다. 기업인이라는 공상인(工商人)들은 특히 더 그러했다. 그들의 결사(結社)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선의의 지원은 뇌물이 되었다. 그 죄로 공상인들은 쇠고랑을 차야 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근대적 언론이 아니라 21세기판 상소장(上疏狀) 노릇을 했다. 아무렇게나 갈겨쓰기만 하면 바로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마치 ‘양반-상놈의 시대’가 되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과연 그랬다. 드디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386운동권 출신들이 포진하여 국정 전 분야를 주무르며 사회 전 영역에 호령하기 시작했다. ‘민주팔이 사림(士林)’ ‘좌빨 사림’의 군림이었다. 역사가 거꾸로 갔다.
 
  광장에 도취된 자들은 “국민의 승리”라고 환호했지만 사실은 국민의 패배였다. 국민은 법치국가의 국민다운 양식을 잃고 민심(民心)이라는 굴레로 묶이는 백성(百姓)이 됐을 뿐이다. 사림 양반들은 늘 민심(民心)을 들먹였다. 그렇듯 ‘신판 좌빨 사림’들도 “사람이 먼저다”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양반들이 ‘백성의 마음’을 진정으로 존중한 적이 없었듯이 이 ‘민주팔이 양반’들도 국민을 진정으로 존중한 적이 없다.
 
  양반들에겐 백성이란 목민(牧民)의 대상일 뿐이었고, 그래서 백성은 잘해야 가축이요 못하면 개·돼지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팔이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민(民)이란 기회만 나면 광장에 불러내 ‘짖어대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이건 진보도 아닐뿐더러 아예 근대에 대한 모독이다.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가 이루어져 근대화도 완수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되살아난 전근대적 악습이 근대화를 유린하는 꼴을 목도하고 있다.
 
 
  보수우파, 이제야 눈을 뜨나
 
  경제는 압축성장이 가능해도 의식과 정신문화의 근대적 성장은 그렇게 이룩되는 것일 수 없다. 정치는 단지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민주정치는 대중의 정신문화와 불가분이다. 근대적 성숙은 산업화라는 물질적 성취가 곧바로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물질적 성취가 뒷받침하기는 하지만 성숙은 물질적 조건 이상의 것이다. 정신문화와 정치의 성숙에는 그럴 만한 지식인과 정치인, 정치 세력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 요컨대 의식과 문화라는 인간적 영역에는 인간 자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보수우파 진영은 그런 노력이 매우 부족했다. 좌익 세력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나름의 일을 그야말로 집요하고 지독하게 했다. 하지만 보수우파 진영은 안이했다. 보수우파 진영도 이제 그 문제점을 절감하게 됐다. ‘역대급’ 패악의 정치와 맞닥뜨린 덕분이기도 하다.
 
  총선이 눈앞이다. 이번 총선은 중요하다. 어떻든 이 정권의 패악질의 난장을 제압해야 한다. 하지만 표에서만 이기는 데 만족해선 안 된다. 그게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아니 가장 중요하다 해도 좋다. 하지만 그에 동반해 이념과 정신이라는 내용상의 승리도 이루는 걸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그래야 승리가 더욱 굳건해지고 더 큰 힘을 갖는다. 정치는 최종적으로는 결국 이념과 정신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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