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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위기의 민주주의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

위선적인 민주팔이들이 한국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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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퓰리즘뿐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이라는 허위의식도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
⊙ 트럼프의 당선이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라 한다면 그 원인은 ‘정치적 올바름’ 이라는 문화적 病理현상에 있어
⊙ “민주공화정에서 폭정은 신체는 내버려두고 곧바로 영혼을 노린다”(토크빌)
⊙ 국가가 국민들의 삶을 책임진다는 保姆국가가 自助정신 파괴… 自助가 죽으면 自由·民主도 죽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인 2016년 11월 10일 미국 곳곳에서는 反트럼프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AP/뉴시스
  ‘원하는 것’과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개인도 그렇지만 다수(多數)일 때도 마찬가지다. 다수가 원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다수를 위해 좋은 일이라는 보장은 없다. 정치적 영역에선 특히 그러하다. 세계 도처에는 그런 사례들이 즐비하다. 반복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 10월 27일 치른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주의’ 부활을 앞세운 후보가 당선됐다. 페론주의는 포퓰리즘으로 나라를 망친 대표적인 경우로 악명이 높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 세계 5대 부국(富國) 중 하나로 꼽혔다. 1880년대 쓰인 이탈리아 단편동화 〈엄마 찾아 3만 리〉는 가난한 이탈리아 소년이 부자 나라 아르헨티나로 일자리를 구해 떠난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랬던 아르헨티나가 1940년대 페론주의 등장 이래 구제불능의 가난뱅이 나라로 곤두박질했다. 70여 년간 국가부도만 8차례 반복했다. 그럼에도 아르헨티나 국민은 또다시 그 길을 선택했다. 이쯤 되면 중독이다.
 
  그럼에도 국민 다수가 선택했기에, 민주주의니까 아무튼 존중돼야 하는 것일까? 그 나라 국민이 선택한 것이니 지구 반대편 사람이 간섭할 일은 아니겠다. 그러나 그런 일이 우리의 문제가 된다면 그냥 그러려니 할 수는 없다.
 
 
  포퓰리즘과 ‘정치적 올바름’
 
  물론 민주주의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성취다.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한국에선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지상의 모든 제도가 그렇듯 민주주의도 완벽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다수’를 기본 원리로 하지만 ‘옳고 그름’과 ‘현명함’은 쪽수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딜레마다. 이를 간과하면 결국에는 민주주의 자체도 집어삼키는 짐승이 풀려난다. 포퓰리즘이다. 현대사에는 그 난장(亂場)의 기록이 줄을 잇는다.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는 건 그런 포퓰리즘만이 아니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이라는 허위의식의 문제도 있다. ‘올바름’이라 내세우지만 사실은 위선(僞善)의 체계다. 포퓰리즘은 대중에 대한 감성적 선동으로 작동한다. 반면 PC는 포퓰리즘과는 또 다른 작동기제가 있다. 좀 더 체계적 기만으로 심층에 깃들어, 영혼을 겁박(劫縛)해 민주주의를 포박(捕縛)한다.
 
  지금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말은 포퓰리즘으로 파탄의 길을 간 기왕의 나라들만을 두고 나오는 말이 아니다. 근대 민주주의의 본고장으로 일컬어지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소리가 높다. 그런데 유럽과 미국에서의 민주주의 위기론은 사실은 역설(逆說)을 보여준다. 문제제기한 쪽이 오히려 PC정치의 문제점을 보여준다는 역설이다.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난민수용 반대 등을 내건 정당들이 2014년에 이어 또 크게 약진했다. 난민, 특히 이슬람 난민 문제로 인한 몸살이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왕의 관성(慣性)에 젖은 이들은 그 정당들을 ‘극우(極右)’라 부르고, 그 약진을 ‘유럽 민주주의 위기’라 했다.
 
 
  英美 민주주의의 위기?
 
브렉시트를 주도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반대자들로부터 ‘히틀러’에 비유된다. 사진=AP/뉴시스
  2016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도 그랬다. 영국은 유럽연합(EU) 분담금이 2위였지만 그만한 이득은 없었다. 오히려 EU의 갖가지 규제가 경제활동만 위축시켰다. 일자리 부족에 더해 이슬람 난민이 이미 사회문제인데도 난민 수용을 더 할당받아야 했다. 브렉시트는 그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럼에도 반대파들은 그것을 ‘영국 민주주의의 위기’라 하고, 2019년 총리가 된 브렉시트파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스트’라 했다.
 
  미국은 어떨까? 하버드대학 정치학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랫(Daniel Ziblatt)이 트럼프 당선 직후 《뉴욕타임스》에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책도 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2018)라는 제목이었다. 책은 《뉴욕타임스》와 ‘아마존’의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워싱턴포스트》 등 여러 매체가 강력하게 추천했다.
 
  저자들은 트럼프를 히틀러, 페루의 후지모리,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등의 포퓰리스트 반열에 함께 올리며, ‘트럼프 현상’이 민주주의의 파괴라 했다. 그리고 정파(政派) 간 극단적 대립이 민주주의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과 예의 그 매체들이야말로 트럼프와 공화당에 대한 극단적인 파당적(派黨的) 대립의 선두에 서 있는 당사자들이었다. 정당한 비판이 아니었다. PC를 앞세운 당파적 비난일 뿐이었다.
 
  미국은 사회 전 영역이 PC로 곪아온 지 오래였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2017·홍지수)는 그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각종 PC적 이념이 학계·문화계·언론계·정치계를 장악하고 위력을 행사했다. 그 덕분에 오바마와 힐러리는 갖은 실정(失政)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PC 언론의 비호를 누렸다. 그러면서 PC 이념의 정당인 민주당은 소수자·이민자 우대, 퍼주기 복지를 계속 되뇌었다.
 
 
  힐빌리의 분노
 
러스트 벨트의 몰락한 백인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J.D.밴스의 《힐빌리의 노래》.
  그런데 정작 다른 한편에는 ‘전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불공정’을 감내해야 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트럼프를 지지한 이들은 그런 불공정에 넌더리를 낸 사람들이었다.
 
  J.D. 밴스(J.D. Vance)의 자조적(自嘲的)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2017)는 그 사연을 처연하게 보여준다. 애팔래치아산맥 일대 ‘백인 촌뜨기’의 지칭에서 유래된 힐빌리들, 이들은 미국 제조업이 융성하던 시절에는 공업지대 노동자로 제법 괜찮은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번성하던 그곳들이 제조업 쇠락으로 러스트 벨트(rust belt)가 되면서 이들은 하루하루 삶을 허덕이는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바로 그 출신인 저자는 회고한다.
 
  고교 시절 꼬박 2주를 일한 아르바이트 급료가 티본스테이크 하나 값이 안 됐다. 하지만 이웃 집 마약중독자는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실업수당으로 2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스테이크를 사 먹고 있었다. 앞집의 놀고먹던 흑인 여성은 정부가 준 푸드 스탬프(food stamps)로 산 탄산음료 두 박스를 들고 와 할머니에게 현금을 받고 팔려 했다. 저자는 말한다.
 
  “정부의 복지제도에 기대 놀고먹는 사람들이 사회를 비웃는다. 우리같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매일 일터에 나간다는 이유로 조롱받고 있다.”
 
  기괴한 역설이었다. 힐빌리들은 한때는 민주당의 견고한 지지층이었다. 그러던 이들이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자로 바뀌었다. 이것은 포퓰리즘에 유혹당한 것과 같은 범주일 수 없다. 트럼프의 당선이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라면 그 원인은 PC라는 문화적 병리(病理)현상에 있는 것이지 반대가 아니다. 유럽 경우도 마찬가지다.누적된 문제의 결과요, 비정상에 대한 정상화 요구의 분출일 뿐이었다.
 
  PC에 사로잡힌 언론과 ‘먹물’들은 그 당연한 반발에 극우니 포퓰리즘 하는 프레임을 씌웠다.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말하면 궤변(詭辯)이 된다. 이런 궤변의 행태가 위세를 떨치는 게 오히려 민주주의 위기다.
 
 
  토크빌의 경고
 
  “내가 알기로는 미국만큼 사상의 독립과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전반적으로 결여된 나라도 없다.”
 
  마치 현재 미국의 PC 주류 언론에 대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힐난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것은 두 세기 가까이 전 프랑스 정치철학자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이 미국을 여행하고 관찰한 뒤 1835년 펴낸 《미국의 민주주의》 1권에서 한 말이다.
 
  토크빌은 저서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민주주의의 속성상 다수의 횡포라는 위험이 늘 동반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토크빌은 그와 함께 또 다른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한 사람이 지배하는 절대정부 치하에서 폭정(暴政)은 잔인하게 신체를 구타해 영혼까지 구타하려고 했다. 그러자 영혼은 그 주먹을 피해 위로 의연하게 솟아올랐다. 그러나 민주공화정에서 폭정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신체는 내버려두고 곧바로 영혼을 노린다.”
 
  토크빌의 이 언급은 요즘 표현으로 말하면 PC 위세에 대한 지적에 다름 아니다. 직접적 폭정은 아니지만 ‘올바름’을 앞세워 다른 생각을 배제하고, 사회적 따돌림으로 영혼을 겁박하는 ‘민주적 배제(排除)’, 이게 바로 PC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토크빌은 그 문제점을 예견하고 분석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토크빌은 1840년 발간한 《미국의 민주주의》 2권에서 이 문제를 좀 더 심도 깊게 다룬다. 민주주의는 대중을 조종당하기 쉽게 만드는 측면이 있는데, 이런 속성이 행정권력의 강화 경향과 결합하면 새로운 전제정치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크빌은 이를 ‘민주적 전제(專制)정치’라 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2권에서 자국의 국민들을 영원히 정치적 미성년 상태로 묶어두는 이 새로운 전제정치의 권력을 ‘거대 후견권력’이라 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폭정을 휘두르지는 않지만 국민을 약화시키고 (…) 우둔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침내 각각의 국민은 한 무리의 겁 많고 부지런한 동물로 전락하게 되며 정부는 그 목자(牧者)가 되는 것이다.”
 
  토크빌은 1856년 펴낸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 이어 준비하던 2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 관한 노트’ (토크빌의 사후 프랑수아 퓌레(1927~1997) 등이 토크빌의 메모를 기초로 편집한 것)에서도 이와 관련된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행정적 전제정치 아래서 자유는 발전은커녕 태어나지도 못한다. 폭정은 자유주의적인 국민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행정적 전제정치는 혁명가와 노예만 만들어낼 뿐이다.”
 
 
  保姆국가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오크숏.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 1권에서 걱정했던 다수의 횡포보다는 이제 ‘민주적 전제정치’가 궁극적으로 자유에 더 위협이 되리라 여겼다.
 
  이 지적은 복지국가의 문제점과 관련해서도 예언적이다. 영국 보수당 정치가 이언 매클라우드(Iain Macleod・1913~1970)는 1965년 위세를 자랑하던 복지국가 노선을 일컬어 보모국가(保姆國家·Nanny State)라 했다. 그리고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오크숏(Michael Oakeshott·1901~1990)은 보모국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국가는 같은 질병에 걸린 환자들이 공통의 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연합체에 불과하다. (…) 통치자는 곧 치유자로서 스스로 선택해서 그곳을 떠나는 환자가 한 명도 없는 요양원의 원장이다.”
 
  한국인은 북유럽 복지국가를 낙원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때 성가(聲價)를 자랑하던 그 시스템이 그 나라에서도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은 잘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탄을 한다. 정부가 베풀어주는 복지와 보조금에 길들어서 ‘치열한 경쟁을 통한 독립적 성공’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돼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길든, 야생의 삶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가축 같은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덧씌워져 있는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토크빌이라면 ‘민주적 전제정치’라 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하느님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최악(最惡)의 정부 형태다.”
 
  처칠의 말이다. 이렇게 덧붙이기는 했다.
 
  “단, 지금껏 시도된 모든 제도를 논외로 한다면.”
 
  처칠이 이런 말을 했다 해서 그를 반(反)민주적이라 하지는 않는다. 그저 민주주의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처칠의 말은 민주주의의 약점(弱點)에 대한 신랄한 지적 또한 품고 있다. 요컨대 ‘민주주의가 소중하기는 하지만 우상화(偶像化)시키지 말라’는 얘기다.
 
  하지만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가 하느님은 아니다”고 했을 때, 당시 한국의 소위 민주인사들 가운데 그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독재를 합리화시키는 강변일 뿐이라 여겼다. 그러나 박정희의 언명은 처칠의 신랄한 조크나 토크빌과 오크숏의 경고와 다른 맥락의 얘기가 아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했다. 종교만의 얘기가 아니다. 어떤 영역이든 우상화는 인간의 지성과 양식을 좀먹고 지켜야 할 가치 자체를 파괴한다. 우상(偶像)이 실상(實像)을 내쫓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의 우상화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간다.
 
  민주주의를 장식으로 내걸지 않은 좌익이념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전제정치였을 뿐이다. 정작 ‘자유’는 소홀히 하면서 ‘민주’만을 우상화하다 보면 결국 그렇게 된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함께하고 자유를 지킬 수 있어야 생명력을 갖는다.
 
  그런데 자유는 개개인으로 보면 삶의 치열함을 스스로 감내하는 ‘책임’의 다른 표현이다. 바로 ‘자조(自助)’다. 박정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自助)의 정신을 역설(力說)했다. 자조의 강조는 곧 자유에 대한 실질적 의지다. 새마을운동이 바로 그랬다. 그것은 근대적 자유와 그것을 감당할 만한 자유민다움을 갖추기 위한 운동이었다.
 
 
  自助가 죽으면 자유도 죽는다
 
1971년 5월 대선에서 김대중 신민당 후보는 “분배만 잘 된다면 성군의 시대”라고 주장했다. 사진=조선DB
  박정희 시대를 적폐라고 하면서도 동남아(東南亞)에 가서는 ‘한강의 기적’ 팔이를 하던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얼마 전에는 난데없이 새마을운동에 젓가락을 얹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은 그가 끼어들 주제가 더더욱 아니다. 새마을운동은 퍼주기 포퓰리즘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 성공의 요체(要諦)는 성과에 따른 ‘차등(差等)지원’의 원칙을 철저히 지킨 것이었다. 박정희의 이 방식에 대해서는 공화당에서조차 우려했다.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끝까지 그 원칙을 고수했다. 이것은 일찍이 토크빌이 경고하고 오크숏이 비판한 ‘후견(後見)권력’이나 ‘보모국가’의 방식과는 정반대였다.
 
  어차피 아직은 퍼주기 할 만한 경제력은 없어서였을까? 그럼에도 퍼주자고 떠든 사람이 있었다. 김대중이었다. 그는 ‘대중경제’를 내건 1971년 대선 당시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무명베옷을 입고 산천지를 걸어 다녀도 분배만 잘 된다면 성군(聖君)의 시대”라 했다. 그대로 갔다면 ‘한강의 기적’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에는 국민을 가축처럼 길들여 군림하는 후견권력의 시대를 맞게 됐을 것이다. 그게 민주주의일 수 있는가? 자조가 없으면 자유는 없다. 자조가 죽으면 자유도 죽고 결국 민주도 죽는다.
 
  1973년 지방 연두순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10월유신의 정신은 새마을 정신과 통하는 것이며, 새마을 정신은 곧 10월유신의 기본정신인 것이다.”
 
  박정희는 또한 유신은 “우리 민주체제에 그 스스로를 지켜나가며,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고 (…)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단행”하는 개혁이라고 했다. 이것은 ‘국민을 정치적 미성년 상태에 묶어두는 후견적 전제정치’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자유를 위한 자조의 정치’다.
 
 
  양심팔이·정의팔이·민주팔이
 
  민주주의는 삶의 치열함을 감당할 수 있는 양식 있는 국민이 있어야 건강성이 유지된다. 민주팔이들은 민주를 떠들기는 했지만 그 건강성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만 ‘양심’과 ‘정의’를 독점하는 것처럼 행세했다.
 
  하지만 양심과 정의는 그렇게 정치적으로 팔아먹어도 되는 말이 아니다. 무거운 말을 입에 가벼이 달고 다니며 설치는 자들은 그 말과 반대편이기 일쑤다. 무지몽매하고 철딱서니 없어서 그렇든, 아니면 뻔뻔한 위선자라서 그렇든 대개 그렇다. 그런데 ‘철딱서니 없음’과 ‘뻔뻔함’은 늘 ‘더불어’ 간다. 사기꾼이 언제나 정직을 가장하듯, ‘양심팔이’는 양심이 없고 ‘정의팔이’는 정의롭지 않다. 그리고 그렇듯 ‘민주팔이’는 궁극적으로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한국 민주팔이의 정치는 PC정치의 한국형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일종의 미명(美名)이다. 그런데 명(名)과 실(實)의 상부(相符)는 쉽지 않다. 미명일수록 더 그렇다. 미명을 앞세우는 자일수록 뒤로는 사리(私利)를 위해 공리(公利)를 농단하기 일쑤다. 그래서 PC정치는 결국 허위와 위선의 정치가 된다. ‘박정희의 정치’와 ‘민주팔이의 정치’, 과연 어느 쪽이 진짜 민주주의를 위한 길인가?
 
  나폴레옹은 영국인을 돈만 아는 천박한 상인이라 했으며, 히틀러는 미국인을 또 그렇게 욕했다. 그 말대로 그들은 돈에 투철했다. 농업도 상업적으로 했다. 젠트리(gentry)들이 그랬다. 그런데 이들은 실력과 품격도 함께 갖춘 존재였다. 바로 ‘신사(gentleman)’였다. 이들이 도시의 상공(商工) 부르주아와 함께 19세기 영국 정치의 주역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신사문화도 공통의 전통으로 자리 잡아 갔다. 미국은 처음부터 자유민의 나라로 시작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또 다른 영국이었다.
 
  지금은 많은 진통을 겪고 있지만 어떻든 영미(英美) 민주주의의 전통에는 늘 신사도가 함께했다. 적어도 영미의 의회에는 생떼를 부리는 양아치는 있을 수 없었다.
 
 
  민주팔이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팔이에겐 ‘신사’란 매우 낯선 이야기다. 이들에겐 투쟁성과 선명성을 보여줄 수 있는 생떼 근성이 오히려 중요한 덕목이다.
 
  그럴 만했다.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등 한국의 소위 민주화 세력은 조선시대적 한량(閑良)에 매우 가까운 부류였다. 상공(商工)을 우습게 알았으며, 실력은 부족했지만 숭문주의적(崇文主義的)이었다. 이런 한계는 반(反)유신 세대와 이후의 386세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들은 산업화 세대의 자녀 세대이면서도 반대로 상업천시와 숭문주의에 젖어갔다. 거기에 좌익성향이 더해졌다. 세월을 거치면서 전근대적 한량 근성과 좌익 성향이 융합해버렸다. 한국 민주팔이들의 속성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들은 땀 흘려 일한 경험은 없어 매우 건달적이다. 끊임없이 완장을 자랑하고 군림하려는 속성도 숨기지 못한다.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다는 걸 증거하려는 듯, 끊임없이 돈과 부자에 대해 욕을 퍼부어댄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裏面)은 더없이 부패했다. 한편 좌익혁명의 발자취를 흠모하는 만큼이나 언행이 매우 거칠다. 그래서 생떼를 서슴지 않는다.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 위기가 가장 심한 나라는 다름 아닌 한국이다. 모든 측면에서의 위기가 한꺼번에 겹쳤다. 헌정(憲政)과 법치(法治)의 무력화(無力化), 포퓰리즘 행태, ‘대깨문’이라는 신종 홍위병(紅衛兵) 등 갖은 문제가 난무한다. 그런데 이 모든 파괴적 위기는 다른 누구에 의한 게 아니다. 민주팔이들이 바로 민주를 파괴하고 있다. 그들이 위선과 기만과 생떼의 정치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물론 그들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 쪽도 그에 못지않은 책임이 있다. 그런데 책임 있게 맞서야 할 쪽이 아직도 안이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이래서야…’라는 탄식이 나오게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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