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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0·26 40주년 - 朴正熙, 오해와 진실

韓日 국교 정상화로 한국은 무엇을 얻었나?

남북 간 國力 역전 계기 마련

글 : 이춘근  이춘근국제정치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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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冷戰에서 解氷으로 가는 시기… 약소국 국가안보는 위태로워지던 상황
⊙ 한일 국교 정상화로 미국의 東北亞 전략에 기여, 對美 발언권 확보하고 안보
⊙ 일본의 기술력과 결합, 국제協業 구조 속 편입하면서 경제발전

이춘근
195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 국 텍사스대학 정치학 박사 /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연구실장, 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부원장, 한국경제연구원 외교안보연구실장 역임. 現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 저서 《미·중 패권경쟁과 한국의 국가전략》 《격동하는 동북아시아》 《현실주의국제정치학》 등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야당과 학생들은 ‘굴욕외교’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 이를 제압했다. 사진=조선DB
  한국과 일본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만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나라를 완전히 잃어버렸던 한국인들은 감정적으로 일본을 용서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현실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일본을 감정적으로 미워하고 일본과 적대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한국의 생존을 위해 대단히 불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한국인들은 번민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한국은 그 이후 20년 이상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지 않고 살았다. ‘외교의 신(神)’이라고까지 불리는 국제정치학자인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조차 일본과 수교를 할 수 없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민족적 감정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진영의 세계적인 힘이 점차 강해지는 1960년대의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보다 오히려 더욱 중시하는 일본과 적대관계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한국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이성적으로 합당한 상황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1960년대 한국의 지도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문자 그대로 정치적 명운을 건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이 바로 한일 국교(國交) 정상화였다.
 
 
  冷戰에서 解氷으로
 
1965년 6월 22일 한일 외무장관은 한일기본협정에 서명, 양국 간 국교를 정상화했다. 사진=조선DB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지 않은 채로 아시아 대륙의 한 귀퉁이에 위태롭게 붙어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막강한 미국도 한국을 일본과의 안보협력 관계에 엮어놓기 위해서 애썼던 것이다. 그러나 온 국민이 반일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일본과는 무슨 일도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한국인들의 감정을 거슬러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고 일본과의 안보협력 관계를 체결한다는 것은 보통 강심장의 정치인이 아닌 한 감히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역설적(逆說的)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한국이나 북한은 후원국인 미국과 소련이 열정적으로 싸우는 경우 오히려 안보 상황이 더욱 좋아지곤 했다. 두 강대국이 치열하게 충돌할 때 그들은 자신의 후견국들을 열정적으로 지원했고,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들은 긴장감은 높았을지 몰라도 국가안보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50년대가 그런 시대였다. 미국과 소련이 심각하게 갈등을 벌이는 동안 두 초(超)강대국은 각각 자신의 진영을 결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대 당시 한국과 북한은 각각 미국과 소련에 내팽개쳐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국제정치에 변화가 일어났다. 1962년 쿠바위기라는 핵(核)전쟁 직전까지 다가가는 위기를 겪었던 미국과 소련 사이에 서서히 해빙(解氷) 무드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핵전쟁이 벌어져 둘 다 죽는 것보다는 심각한 견해 차이를 잠깐이나마 묻어두고 공존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상호 간 직접 충돌하는 일은 회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인식 변화가 제3세계에도 평화를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간접적 방법을 통해 공산주의를 세계에 확산하려 했다. 그 표적 중 하나가 동남아시아(東南亞)의 베트남이었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기는 했지만 국제공산 세력의 지원을 받는 북(北)베트남의 호찌민(胡志明)은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南)베트남에 대해 게릴라 전쟁을 확대하고 있었다. 소련과의 쿠바위기에서 표면적으로는 승리했지만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점차 동남아 정글의 수렁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즉 미국의 관심이 동북아(東北亞)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6·3사태
 
1964년 1월 19일 박정희 대통령과 만난 로버트 케네디 미 법무장관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촉구했다. 사진=조선DB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한반도 안전장치 보강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미국은 진작부터 동북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 한일관계 정상화를 정책의 주요 목표로 삼고 있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기피하고 이승만 외교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이승만 외교에서는 한일관계 개선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한국은 1951년 10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시작하였다. 회담이 타결되는 1965년 6월까지 14년 동안 무려 1200회에 달하는 본회담과 부속회담 끝에 한일협정이 타결되었다. 이는 세계 외교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마라톤 회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일관계는 워낙 감정적 요인이 많이 작동하기 때문에, 국내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채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킬 방법이 없었다. 이승만 정권의 뒤를 이은 장면(張勉)의 민주당 내각도 한일 국교 정상화의 의향은 있었지만 한일회담이 타결될 수는 없었다.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특히 한국 국민의 반일 감정은 정치적 명운을 걸지 않는 한 어떤 지도자도 감히 성취할 엄두를 낼 수 없는 뜨겁고 무거운 주제였다. 박정희만큼 결단력이 있는 정치인이 아닌 한 한일 국교 정상화는 이룩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시도할 때 한국의 지식인과 대학생들은 가히 거국적(擧國的)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이룩한 지 20년이 다 돼가는 1960년대 중반 당시,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일본 통치하에 직접 살던 사람들이었다. 반일을 국시(國是)처럼 생각하고 살던 당시 한국의 지식인과 대학생들은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고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3일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반대시위를 진압해야 했다. 6월 3일 저녁 10시에 선포한 계엄령은 7월 29일 해지되었다.
 
 
  국제적 協業 구조 속으로 편입
 
  한국인들은 국제정치에 대해 정서적(情緖的)·감정적(感情的) 관점을 갖고 있지만 국제관계는 사실 냉혹한 이익(利益)의 영역일 뿐이다. 그래서 영국의 파머스톤 경은 “영국은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후배 대통령들에게 남기는 고별사에서 “영원한 적과 영원한 친구를 만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한국인들의 극심한 반일 감정은 일본 관련 문제가 야기될 때 한국이 냉혹한 국가 이익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대단히 어렵게 만든다. 역대 대통령 중 이 문제를 극복한 사람은 아마 박정희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경제적 측면에서 큰 이익이 되었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기대되는 경제적 이익도 대단히 컸다. 박정희 대통령이 임기 초반부터 급속히 추진한 경제개발정책 덕에 한국 사회의 가장 동태적(動態的) 계층으로 출현한 기업가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일본과 조속한 국교 정상화를 추진해달라고 요구했다. 한일 수교는 한국의 풍부한 노동력과 일본의 우수한 기술을 결합하여 외국 시장에 경쟁력 있는 상품을 수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한국이 보유한 국제경쟁력은 극대화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상황이지만 일본의 소재 산업을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중간재를 만들어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은 우리의 중간재를 활용해서 완성품을 만드는 국제적 협업(協業) 구조를 만들게 된 것이다.
 
 
  한·미·일 3각 동맹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일 국교 정상화가 한국에 가져다준 큰 이익은 국가안보에 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한일관계 전문가인 고(故) 이기택 연세대 교수는 “한일 국교 정상화는 한국 외교사상 대미(對美)관계 못지않게 중요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가 한국 외교사에 기여한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는 한일기본조약에서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반도에서 유일 합법정부임을 명시, 일본의 대북(對北) 접근을 차단한 점이었다. 일본과 손잡은 대한민국은 동북아에서의 힘의 관계를 극적으로 대한민국에 유리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한국전쟁 이후 경제적·군사적으로 북한보다 열세에 있던 대한민국이 북한을 추월하는 일대 계기가 됐다.
 
  미국이 비록 꿈을 꾸었지만 이룩하지 못한 것이 한·미·일 3각 동맹 체제의 형성이다. 이 같은 3각 동맹이 현실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면, 미국은 중국의 도전을 비롯해 동북아에서 당면할 국제적인 문제들을 별 부담 없이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세력으로 부상(浮上)한 현재, 미국의 대중봉쇄 작전이 본질적으로 한·미·일 3각 동맹 관계라는 틀 위에서 구상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박정희는 한국 국내정치의 험악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룩해냄으로써 미국의 세계 전략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대한민국의 안전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일본은 자신의 안보에 한국이 대단히 긴요하다고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한일관계는 군사적·정치적 차원에서도 연계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은 서양인들의 눈에는 서양의 강대국을 군사적으로 격파한 최초의 아시아 국가요, 서양의 대표적인 강대국과 일대일 결전을 벌인 아시아 유일의 국가다. 일본은 20세기 초반 러시아를 격파하고, 20세기 중반 미국과 3년 반을 처절하게 싸운 나라다. 이런 막강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한 강대국을 같은 편으로 묶어두는 것은 전략적으로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五面楚歌 속 한국
 
  2019년 가을 한반도의 국제정치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고 있다. 일부 지식인은 한국이 처한 국제 상황을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고사성어에 비유, 오면초가(五面楚歌) 상황이라고 말할 정도다. 사면초가란 중국 고대 전쟁사에 나타난 한(漢)나라의 포위를 받아 초(楚)나라가 누구의 도움도 청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처절한 상황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보다 한술 더 떠 오면초가라고 말함은 한국의 현 정권이 주변국인 미국·중국·일본·러시아, 그리고 북한까지 5개국 모두가 적이 되도록 만든 외교정책적 파탄 상황에 빠져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010년대 동북아시아 국제정치는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해양 중심 세력과 이에 대항해서 중국과 러시아가 그럴 수 없음에도 서로 가까워짐으로써 미일 세력에 대항하는 형국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전체주의-사회주의-대륙 세력을 상징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물론 한국전쟁 종식 직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비록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미국의 동맹국이 되어 자유주의 해양동맹의 전초국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고, 궁극적으로 미국이 소련을 붕괴시키고 냉전에 승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나라가 되었다. 냉전(冷戰)시대(1945~1989) 동안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데 성공한 대한민국은 2000년대 이후 미국에 의해 ‘동북아시아 안보의 린치핀(linchpin·핵심축)’이라는 평가를 얻을 정도로 그 힘과 가치를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
 
  그랬던 대한민국이 지난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점차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지정학적·정치사상적으로 결코 우리 우호국이 될 조건을 갖고 있지 않은 중국에 편향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현상은 박근혜·문재인 정부하에서 좀더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해, 급기야 미국이 ‘한국이 과연 미국의 동맹국이 맞는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그러다가 지난 8월 22일 한국의 청와대는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 같은 조치는 향후 대일(對日)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게 될 것이다.
 
 
  최고의 國益은 안보이익
 
  이미 나타난 바와 마찬가지로 한미 관계 역시 파탄의 위기로 몰아갈지 모른다.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협정을 폐기한 것에 대해 미국이 오히려 일본보다 더욱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한일 관계의 악화가 크게는 미국의 대(對)세계 전략, 좀 더 구체적으로 미국의 대중(對中) 전략에 심각한 위해를 입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과 패권(覇權)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미국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미·일의 양호한 안보협력 관계가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벌이려면, 한국은 물론 주일미군의 효과적 활용은 필수적 요소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한일 군사협력 관계는 필수 불가결의 요인인 것이다. 랜들 슈라이버 미국 국방부 인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연구소 주제발표 형식을 빌려, 지소미아가 종료되는 11월 23일 이전에 지소미아 폐기 재고를 한국 정부에 요구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을 잠재적 적국 혹은 한국 안보에 무관심한 나라로 만드는 우(愚)를 범하면 안 된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을 거치면서 한미관계가 상호 신뢰할 수 없는 관계로 바뀐 때가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미 문제점이 노정되었던 한미관계가 최근 와서 더욱 악화일로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모든 국가 이익 중에서 최고·최대의 이익은 국가안보 이익이다. 우리는 지금 국가안보 이익을 스스로 저해하는 행동을 별 생각 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가안보와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정치적 위험까지 마다하지 않던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과 지혜가 더 없이 필요한 시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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