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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0·26 40주년 - 朴正熙, 오해와 진실

박정희 경제모델은 종속적이었나?

‘박정희 경제모델’ 비판자들의 주장은 ‘잠꼬대’였다

글 : 주익종  이승만학당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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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권, 1963년부터 예기지 않은 수출 증대 보면서 수출주도성장으로 전환
⊙ 야당, 1967년 大選에서도 ‘대중경제론’ 주장…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빨치산 출신 박현채의 작품
⊙ 박현채·변형윤 등 비판적 경제학자들, ‘내포적 공업화’ 주장했지만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성공과 1980년대 무역흑자 달성으로 허구 드러나
⊙ ‘사람 중심 경제’ ‘소득주도성장론’은 21세기판 대중경제론에 불과

朱益鐘
1960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同 대학원 경제학 박사 /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실장 역임. 現 이승만학당 교사 / 저서 《대군의 척후》 《고도성장시대를 열다》
1976년 5월 포철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수출주도경제와 중화학공업화 노선을 통해 경제발전에 성공했다.
  1965년 1월 16일 오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국회에서 새해 시정(施政)방침이 담긴 연두교서(年頭敎書)를 발표하면서, “나는 이 해에 있어서의 3대 목표를 증산, 수출, 건설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박정희 정부가 수출주도 공업화 전략을 정식 선포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3일 뒤인 1월 29일 야당 민주당의 박순천(朴順天) 대표는 ‘대통령 연두교서를 비판하고 당 정책을 밝히는’ 국회 기조연설을 했다. 거기서 박 대표는 중산층의 육성 방안으로 ‘100만 안정농가 창설’을 제창하고, 공업화를 위한 ‘국내자본 동원’ 방안을 제시했다. 이로써 ‘수출공업 대 농업’ ‘외자(外資) 대 내자(內資)’ 구도로 박정희 경제개발론과 야당의 경제개발론이 맞서기 시작했다.
 
  그 몇 년 전만 해도 양측의 인식은 거의 같았다. 쿠데타로 나라를 장악한 박정희 군부(軍部)에 무슨 독자적인 경제개발 구상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장면(張勉) 정부가 내부적으로 거의 완성했던 제1차 5개년계획을 넘겨받았다. 그 연간 성장률 수치를 5%에서 7%로 높이는 정도의 수정만 해서 1962년 초에 발표했다. 농업과 공업을 균형 있게 개발하고, 생산재(生産財) 공업을 빨리 건설하며, 국내의 분업(分業) 관련을 중시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연평균 7%의 성장을 위해서는 투자율을 10%대 초반에서 23%로 높여야 했다. 높은 투자율을 통해 높은 성장률을 달성한다는 구상은 이승만(李承晩) 정부 이래 그대로였다. 박정희 군부의 인물들이 그와 다른 경제개발론을 배우거나 창안할 수는 없었다.
 
 
  계획에 없던 수출주도 경제로 전환
 
구로공단준공식. 구로공단과 공단의 여공들은 수출제일주의 시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의도치 않게 독자의 경제개발 구상으로 나아가게 됐다. 제1차 5개년계획안(案)대로 실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62년부터 투자를 늘리니 외환(外換)이 고갈되고 인플레가 왔다. 외환보유고는 1961년 말 2억5000만 달러에서 1963년 6월 말 1억 달러 수준으로 줄었다. 압력 수단으로 원조를 줄인 미국 정부는 재정 긴축을 요구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한미 간 치열한 교섭을 통해 민정(民政) 전환이 추진되는 다른 한편에선 재정안정화와 환율현실화 등이 추진되었다. 5개년계획도 축소 조정해서, 1964년 2월 발표된 보완계획에선 목표 성장률을 7%에서 5%로 낮추고, 사업수를 대폭 줄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1963년부터 공산품(工産品) 수출이 증가하였다. 1963년 공산품 수출 계획 치는 640만 달러였는데 실적은 주로 아연도철판, 목재가공품(단판·합판), 섬유의류 등 2810만 달러였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던 박정희 정부는 이 공산품 수출 증가를 놓치지 않았다.
 
  1964년 1월 10일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박정희는 “공산품을 중심으로 한 수출의 증대는 혁명정부하의 특기할 만한 발전”이라 자부했다. 전택보(全澤珤·천우사 창립자)·이원만(李源万·코오롱그룹 창립자) 등 기업가들은 정부에 수출제일주의 채택을 건의했다. 이에 1964년 하반기부터 박정희 정부는 수출제일주의와 수출입국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해 수출이 공산품 수출액 4200만 달러를 포함해 1억 달러를 돌파한 기념으로 박정희 정부는 ‘수출의 날’을 제정했다. 1965년 1월 대통령 연두교서는 이런 흐름에서 나왔다.
 
  이렇게 박정희 정부는 새로 수출주도 공업화(export-led industrialization) 전략을 세웠다. 강조점은 공산품 수출 장려, 외자도입을 통한 투자 확대, 특히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한 일본 자본의 도입, 대기업 육성 등에 두었다. 이 전략은 당시 경제개발론에는 없었다. 제1차 5개년계획 원안에도, 보완계획에도 없었다. 또 미국이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다. 미국은 한국의 무모한 투자계획을 비판했고, 공산품 수출에 주력하라고 권고하지도 않았다. 이는 극단의 상황에 몰리니 해결 방법이 생긴다(窮卽通·궁즉통)는 식으로, 박정희 정부가 개척한 경제개발의 새 길이었다. 훗날 한국과 대만 등이 성공하자 개발경제학자들이 그를 수출주도 공업화 전략이라 불렀다.
 
 
  유진오, 中南美식 ‘대중경제정책’ 주장
 
  야당은 그에 반대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65년 초 박순천의 ‘100만 안정농가 창출론’이 나왔다. 민정당과 민주당, 두 야당은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위해 1965년 5월에 민중당으로 통합했다. 그러나 곧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 조인과 국회 비준 처리를 둘러싸고 강온(强穩) 투쟁론으로 갈렸다. 윤보선(尹潽善)을 필두로 한 강경파 10여 명의 의원이 신한당을 만들었고, 온건파는 민중당에 남았다.
 
  민중당 대표 박순천은 다시 1966년 1월 20일 국회 연설에서 대중자본주의론을 제창했다. 중소기업의 우선 육성, 외화가득률이 높은 농수산물 등 국산원료의 가공특화 방향의 수출산업 발전, 농업경제 발전을 위한 이중곡가제(二重穀價制) 실시, 환율 금리 세제 등의 현실화, 안정 기반 위의 성장 추구, 대일(對日) 예속화 방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196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66년 10월 민중당은 고려대 총장 출신의 유진오(兪鎭午)를 대통령 후보로 영입한다. 유진오는 자신이 기초한 제헌헌법에 나와 있는 대로 이익 균점(均霑)을 실현하겠다면서, 중소기업에 대한 저리(低利) 융자, 봉급생활자 세금 감면, 농민들에겐 농산물값 보장과 비료값 인하 등을 내용으로 한 대중경제를 제창했다. 유진오는 1967년 1월 12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나의 대중경제론’이란 글에서 “외자 의존 경제와 재벌과 정상배만 위하는 경제로부터 탈피하여 농민, 노동자, 봉급생활자, 중소기업가 등을 망라하는 대중이 본위가 되는 경제를 확립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중남미(中南美)에서 대두된 대중경제정책(populist economic policy)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중당과 신한당이 1967년 2월에 통합한 신민당은 ‘대중경제론’을 경제강령으로 삼았다. 그들이 보는 한국 경제는 재벌과 정상배(政商輩)만 특권(特權)을 누리고, 공업에만 우선을 두며(공업제일주의), 대일 예속을 가속화하는 외자 의존 체제였다. 신민당은 대안(代案)으로서, 대중경제 체제, 농업과 공업이 균형 있게 발전하는 농공병진 내지 농공합작, 외국 자본에 대한 통제, 대일 자주(自主)를 내세웠다.
 
  신민당은 그해 5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재벌에 대한 특혜투자의 지양과 대중투자의 실현, 외자 도입의 지양과 합작투자로의 전환, 공업제일주의의 지양과 농공합작의 실현, 대일 예속 체제의 지양과 자주 체제로의 전환 등을 경제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는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67년 대선과 총선에서 신민당은 공화당에 참패했다.
 
 
  ‘대중경제론’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집단 창작물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빨치산 출신 박현채 등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야당은 이 노선을 견지했다. 김대중(金大中)이 이걸 넘겨받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공약으로 내세웠다. 이 작업을 도운 게 당시 좌파 경제학자인 박현채(朴玄埰·전 조선대 교수)·정윤형(鄭允炯·전 홍익대 교수) 등이었다(故 김일영 교수의 지적).
 
  김대중이 〈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란 제목으로 1969년 경희대에 제출한 석사 논문은 박현채가 대리 집필한 것이었다. 박현채는 1934년생으로 전남 영암 출신인데 6·25전쟁 중이던 10대 때 빨치산 활동을 한 특이 경력자다. 그는 195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학부를 거쳐 석사까지 마쳤는데, 그 후 대놓고 마르크스주의 주장은 못 하고, 한국 경제를 에둘러 비판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박현채는 대통령 선거 직전인 1971년 3월에 김대중의 이름으로 포켓북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라는 책을 썼다. 이후 대중경제론 하면 김대중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실상 대중경제론이란 1960년대 중엽 이후 야당과 비판적 지식인의 집단 창작물이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서는 한국 경제에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산업구조의 파행성(跛行性)이었다. ‘파행’이란 절뚝거리면서 간다는 의미다. 소비재 산업이나 서비스업은 과대 발달하고, 사회의 기간이 될 농업이나 생산재 산업은 현격하게 떨어지는 식으로 산업 발달이 고르지 못한 것을 말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원조나 차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대외 의존성이었다. 그다음은 외국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관료 주도 매판(買辦)독점자본주의였다. 그로 인해 중소기업의 성장이 차단되고, 지역·산업·계층 간 격차가 벌어지고, 체념과 불만의 대중사회가 생긴다고 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서는 혼합경제 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중경제란 자유경제를 원리로 하되 우리의 실정에 맞게 적용되는 경제체제에서 대중의 생산참여, 종업원지주제 실시, 노사공동위원회 설치, 매판적 외자도입의 배격, 국가투자의 사회간접자본에의 집중, 농업발전의 경제개발의 최기본 순위로의 제고, 중산층의 육성 등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생산재 공업 부문은 민간에 맡기지 않고 국가가 운영하기로 해서, 국가 자본주의가 윗부분에 있고, 나머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소재라든가 일반 소비재 생산 공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협력 분업을 하게 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리고 이 경제는 국내 시장 또는 국내 분업이 중심이고, 해외와의 관계는 최소화시킨다고 했다. 당시 이런 박정희 정부의 공업화를 ‘외향적(外向的) 공업화’라 비판하면서, 이를 ‘내포적(內包的) 공업화’ 전략이라고 불렀다.
 
 
  종속이론 영향받은 ‘대중경제론’
 
  그렇다면 대중경제론은 박정희 경제개발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었을까.
 
  우선, 대중경제론이 강조하는 국내 분업과 박정희 경제개발이 중점을 둔 국제 분업을 비교해보자. 후진 단계에 있던 한국 경제는 해외에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야 했는데, 이는 당연히 국내 분업보다는 국제 분업을 통해서 더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시장 면에서도 국내 시장은 협소한 반면, 해외 시장은 경공업제품 시장이든 중화학제품 시장이든 훨씬 더 넓었다. 한국은 비교우위가 있는 산업을 수출산업으로 크게 키울 수 있었다. 생산 규모가 커질수록 생산비가 싸져서 제품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는 ‘규모의 경제’도 국제 분업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었다.
 
  대중경제론은 당시 ‘종속이론(從屬理論)’의 영향을 받아, 세계 경제 속의 국제 분업을 예속의 길이라 하면서 그와 단절할 것을 주장했다. 대안으로 제시된 내포적 공업화란 16세기부터 18세기의 영국 고전적 자본주의 발전에서 따온 개념이다. 대중경제론자들은 농촌을 기반으로 한 국지적 시장에서 중소공업이 발달하고, 그것이 전국 시장으로 통합됨에 따라 거기서 대기업이 발달하는 이상형(理想型)을 상정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을 세계 경제 체제 안에 있는 20세기 후발국(後發國)에 적용하는 것은 난센스였다. 20세기 후반 세계 시장이 열려 있고 각국 경제가 긴밀히 연결돼 있는 상태에서, 후발국이 굳이 문을 닫고 농업-중소기업-대기업 순으로 자생적(自生的) 발전의 길을 걷는 게 가능했을까.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선진국에 오른다(catch-up)는 말인가. 이들은 그때 공공연하게 캐치업 이론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세계 시장이 제공하는 기회를 포착해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의 후진국의 비교우위를 적극 활용하되, 기술학습을 통해 정책적으로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추진하는 게 후진국이 나아갈 길이었다.
 
  또 대중경제론은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골고루 잘살게 하겠다’며 균등경제를 내걸었는데, 실상 이는 실현될 수 없는 허언(虛言)이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 유세 때 이미 박정희는 “우리가 놓인 현 시점과 제반 사정을 생각할 때 당장 모든 사람을 잘살게 하겠다고 공약을 내거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비판한 바 있었다.
 
 
  유신과 중화학공업화
 
  그렇지만 1971년 4월 대선에서 김대중은 선풍을 일으켰다. 94만6000여 표 차이로 승리하기는 했으나, 박정희가 고전(苦戰)한 선거였다. 한 달 뒤 치른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이 약진했다. 의석수를 그 전 45석의 두 배 가까운 89석으로 늘린 신민당은 112석을 얻은 여당 공화당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특히 신민당은 도시의 의석 64석 중에서 47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처럼 야당과 김대중이 국민의 지지를 얻었고, 더불어 대중경제론도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박정희는 1967년 대선과 총선에서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으나, 1971년 두 선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1967~70년의 4년간 연평균 10%의 경이로운 고도성장을 이룩했음을 감안하면 의외의 결과였다. 아니 오히려 이는 ‘성공의 역설(逆說)’이라 할 만했다. 당시의 한국 국민, 특히 도시 중산층(中産層)은 고도성장의 혜택을 가장 잘 누리면서도 박정희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교육을 받은 그들은 장기집권을 부당한 것으로 간주했다. 또 그들은 예비군 폐지와 부유세(富裕稅) 신설, 근로자 권익 향상, 대중의 복지 확대라는 인기영합주의(populist) 정책에 현혹되었다.
 
  그만큼 박정희의 개발 체제는 대중적 지지라는 추동력(推動力)을 잃었다. 박정희는 1971년 대선 구호처럼 스스로 ‘중단 없는 전진’을 택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은 더 이상 대중의 지지에 호소하지 않고 강압으로라도 대중을 이끌고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대의제(代議制)는 껍데기만 남았고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에는 재갈을 물렸다. 그렇게 열린 공간에서 박정희는 중화학공업화로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창출하는 일대 과업에 착수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는 국제 부가가치 흐름에서 한국의 위치를 일거에 더 상류(upstream)로 끌어올리려는 큰 모험이었다. 조선업, 자동차공업, 전자공업, 석유화학공업 등에서 획기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한국 경제는 봉제·가발·신발 등 저임금 노동자를 활용한 가공공업 단계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그들은 한국 경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박정희 경제모델의 대표적 비판자였던 박현채 전 조선대 교수(왼쪽)와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고, 그를 인정할 마음도 없었다. 박현채는 1978년에 《민족경제론》을 냈다. 그 내용은 1971년에 나온 김대중 대중경제론과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었다. 이 책은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판매금지를 당했지만, 암암리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그 밖에도 김윤환(金潤煥·전 고려대 교수)·박현채·박찬일(전 한국외국어대 교수) 등이 쓴 《한국 노동문제의 구조》(1978)와 변형윤(邊衡尹·전 서울대 교수), 유인호(兪仁浩·전 중앙대 교수) 등이 쓴 《한국농업문제의 인식》(1977), 유인호의 포켓북 《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1979) 등이 역시 대학가에서 널리 읽혔다.
 
  이 저자들은 한국 경제가 저(低)곡가-저임금으로만 지탱되는 만성적 저부가가치 생산의 조립가공형 경제이며, 수출이 늘어도 수입은 더 늘어나 무역적자(赤字)가 확대되어 외채(外債)가 누적될 뿐이라는 인식을 퍼뜨렸다. 이 저자들은 박정희 경제개발이 “저임금·저곡가로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한 허울뿐인 성장”이며 “시시한 조립가공형 공업은 외채 누적으로 조만간 파탄난다”고 폄훼했다. 유신체제에 불만을 품은 많은 대학생이 이러한 주장에 동조했다. 1979년 유신체제의 종말과 1980년 신군부의 집권,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경제 위기를 겪으며 이들의 인식은 더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큰 반전(反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전반에 안정화 정책을 통해 내실(內實)을 다진 후 국제경제환경의 호전(好轉)을 맞아 도약했다. 1985년 300억 달러던 수출액이 1988년에는 600억 달러가 되어 3년 만에 100% 증가하였다. 중화학공업품 수출이 급증하였다. 5대 수출 품목도 1980년 섬유류·전자제품·철강제품·신발류·선박에서 1990년 전자전기·섬유류·철강제품·선박·화공품으로 바뀌었다. 이는 1970년대에 건설된 중화학공업이 자리를 잡았음을 뜻했다.
 
  1986~88년 3년간 한국의 무역수지가 흑자(黑字)로 돌아섰다. 1876년 조선왕조가 개항한 이후 110년간 한국 경제는 무역수지 적자를 면치 못하였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외국에서 원조와 차관을 얻고 직접투자를 유치하였다. 그러나 이 3년에 걸친 250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로 외채도 감소하였다. 외채 총액은 1980년 112억 달러에서 1985년 275억 달러까지 증가하였으나,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간 매년 감소하여 160억 달러로 되었다.
 
  대중경제론자들은 외채 누적을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腱)처럼 강조했다. 그러나 거액의 무역수지 흑자 및 외채 감소를 보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들은 실상 박정희 시대, 특히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기에 한국 경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몰랐다. 그들은 한국 경제가 전태일의 청계천 피복공장과 YH무역의 가발공장 단계를 급속히 통과했다는 것, 포항제철이 일본 신일본제철에 배워서 급속히 기술자립을 했다는 것, 현대조선소가 영국·덴마크·일본 3개국의 조선(造船) 기술을 학습해 독자의 조선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것, 삼성전자가 급속히 기술학습과 추격을 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자립적 기반의 ‘내포적 공업화’ 운운은 현실에서 눈감은 잠꼬대에 불과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21세기판 대중경제론
 
  김대중도 견해를 수정했다.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미국 러거스대학 유종근 교수의 도움을 받아서 《대중참여경제론》을 영문으로 발간했는데, 이제는 성장·분배·안정이나 성장·형평·안정을 내세웠다. 과거처럼 분배에만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경제 성장의 중요성도 인정했다. 또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과 수출주도공업화를 인정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후 세계화 흐름 속에서 양극화(兩極化)가 진행되면서 대중경제론이 부활하였다. 세계화(世界化)가 진전되면 그 기회를 활용한 승자(勝者)와 그렇지 못한 패자(敗者) 간 격차가 확대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중경제론의 21세기 후예들은 ‘신판 대중경제론’을 들고나왔다. 20대는 비정규직으로 고용 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88만원 세대론’, 구조적으로 격차가 계속 확대되는 사회라는 ‘격차사회론’에 이어, 마침내 ‘사람 중심 경제’ ‘함께 잘사는 포용국가’ ‘단 한 사람도 차별받지 않는 나라’ 등의 달콤한 수사(修辭)를 내건 소득주도성장론이 나왔다. 20세기의 대중경제론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21세기 ‘신판 대중경제론’은 국가 정책이 되어 한국 경제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20세기에는 한 철권 통치자가 이 사기술을 막았지만, 21세기에는 국민이 스스로 이 사기술에 현혹되지 않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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