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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0·26 40주년 - 朴正熙, 오해와 진실

박정희는 과연 독재자였나?

南北 대치 상황 속에서 5·16과 유신으로 자유민주주의 수호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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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이념대결 속에서 ‘常時的 비상 체제’는 대한민국과 ‘박정희 정치’의 숙명
⊙ “(김일성의 희망과 대남전략 추진은) 결국 남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수포로 돌아갔다”(美 윌슨센터)
⊙ 586운동권, 인혁당 사건 등을 ‘남한변혁운동의 피어린 발자취’라고 가르쳐
⊙ ‘曺國 사태’ 등은 박정희가 옳았음을 보여줘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1961년 5·16은 민주당 정권 아래서의 혼란을 수습,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했다. 사진=조선DB
  그는 ‘비상대권’을 내세워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수백 개의 신문을 폐간시키고 모든 통신에 대해 검열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반(反)국가 행위자는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공포(公布)하고 군(軍)이 민간인 반대자를 체포하도록 허용했다. 수많은 사람을 영장(令狀) 없이 군교도소에 투옥(投獄)했다.
 
  이 정도면 독재자로 여기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그의 조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거의 성자(聖者)로 대접받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위인(偉人)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이름은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위대한 노예해방자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연설)를 갈파한 사람을 어찌 감히 독재자라 할 것인가? 그러나 링컨은 그 기념비적인 연설 이전에 ‘영장 없는 구금(拘禁)’을 위하여 이미 수차례에 걸쳐 몇 개 주(州)를 대상으로 ‘인신보호영장제도(habeas corpus)’의 유보 조치를 취했다. 1862년 9월 24일에는 전국적으로도 완전 정지시켰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토머스 J. 디로렌조(Thomas J. DiLorenzo)에 따르면 링컨의 통치기간 중 그렇게 투옥된 사람이 1만3000여 명에 이른다. 남북전쟁 중이었다고 하지만 가히 철권(鐵拳)통치였다.
 
  링컨의 이 같은 철권통치는 언론인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북전쟁 막바지 무렵인 1864년 5월 18일, 링컨은 뉴욕시(市) 군사령관에게 명령 하나를 하달했다. 자신의 노선에 계속 딴지를 거는 뉴욕의 두 신문을 폐간시키고 그 발행인, 편집장을 체포하여 군사재판에 회부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미국에선 민주주의의 성자로 추앙받고 있다. 워싱턴DC에는 웅장한 링컨기념관이 있다. 그 정면 한복판에 자리한 높이 6m에 육박하는 그의 좌상(坐像)은 광장을 굽어보고 있다. 그 광장은 미국 민주주의의 성지(聖地)가 돼 있다.
 
 
  ‘민주팔이’의 시대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선포를 알리는 《조선일보》 속보판 앞에 선 시민들.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남북전쟁 중 링컨이 행한 조치들에 비하면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 비슷한 사람이 있다. 그도 ‘긴급조치’를 시행하여 그의 정책에 맞서는 행위를 하는 자들을 단속했다. 그런데 그의 긴급조치로 처벌받은 수는 1000여 명, 링컨의 조치로 투옥된 수의 10분의 1이 안 된다. 그러나 링컨과 달리 이 사람은 그의 나라에서 그냥 ‘독재자’로 치부되곤 한다. 업적은 없이 그저 철권만 휘둘러 댔기에? 아니다. 표현이 그럴 뿐 그의 철권은 링컨의 그것에 매우 못 미친다. 더욱이 그의 업적은 위대할 뿐만 아니라 경이적이다. 그래서 그의 업적은 ‘기적’이라 불린다. 세계적으로 그렇다. 그럼에도 그 자신의 나라에선 폄훼되기 일쑤인 그의 이름은 박정희(朴正熙)다.
 
  박정희에 대한 세계적 평가는 매우 높다. 세계 유수의 석학과 정치지도자들은 그의 경이적인 업적을 하나같이 극찬했다. 헨리 키신저 전(前) 미국 국무장관의 말을 빌려 요약하자면 한마디로 “박정희가 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가 그 기적을 선사한 이 나라에선 정반대의 언설(言說)이 횡행한다.
 
  박정희 시대, 그 위대한 질주에도 불구하고 내내 민주의 깃발을 흔들어대며 맞섰던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늘 박정희를 욕했다. 그리고 지금, 언젠가부터 ‘민주팔이’의 시대가 되고 그에 더해 ‘붉은 민주팔이’의 시대가 된 지금, 이 세력들은 아예 박정희 시대 전체를 적폐(積弊)라고까지 하고 있다. 이들의 이 같은 언동은 단지 박정희를 이해 못 해서만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고의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그의 시대를 능멸하고 있다.
 
 
  박정희 정치와 경제는 분리할 수 없어
 
  반일(反日)소동을 벌이며 일본과의 지소미아(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를 파기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난데없이 동남아(東南亞)로 날아가 태국과 지소미아를 맺었다. 그러더니 동남아 도처를 돌아다니며 희한한 언사를 늘어놓았다. “한강의 기적을 메콩강의 기적으로, 양곤강의 기적으로”라는 것이었다.
 
  나라 안에서는 원전(原電)을 중지시키면서 밖에서는 원전 사업을 수주하겠다고 설치는 행보를 벌이더니, 이번에는 ‘한강의 기적’을 팔고 있다. 해괴하다. ‘한강의 기적’은 그가 청산해야 할 ‘적폐’라 부른 박정희 시대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정희 시대의 정치에 대해선 ‘저주의 염(念)’을 숨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박정희는 정치적으로 그저 두 개의 악한 사건의 주역일 뿐이다. ‘5・16쿠데타’와 ‘10월 유신’이다. 박정희는 그 등장부터가 자유민주헌정의 유린이었으며, 통치 후반기의 10월 유신은 민주주의를 완전 질식시킨 폭거(暴擧)라는 것이다. 단지 편협함의 문제가 아니다. 박정희 시대를 그렇게 규정지어야 그들의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가 확보되기에 그러는 것이다.
 
  그런데 고의적이든 무지몽매해서든 ‘한강의 기적’은 그들이 저주해 마지않는 ‘박정희의 정치’와 분리될 수가 없다. 민주의 깃발이 신성(神聖)의 반열에 오르면서 그 깃발을 휘둘러대는 자들만이 아니라,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을 인정하는 이들도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시대에 대해 아쉬움을 표해야 상식이라 여기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은 ‘그의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링컨의 성스러운 업적이 그의 비상대권의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정희 시대 ‘한강의 기적’은 평화가 만발한 속에서 우아하게 양탄자를 걷듯이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분투(奮鬪)의 장정이었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자유민주 체제의 근본을 부정하고 위협하는 세력과의 근원적인 대결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常時的 비상 체제’는 대한민국의 숙명
 
  그 대결은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피할 수 없이 짊어져야 할 숙명(宿命)이었다. 대한민국의 탄생 자체가 양립(兩立)할 수 없는 이념(理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선택이 남(南)과 북(北)의 운명(運命)을 갈랐다.
 
  운명은 숙명과 다르다. 숙명은 피할 수 없는 짐이지만 운명은 선택이다. 국가도 그러하다. 어떤 국가든 지정학적(地政學的) 조건은 숙명이다. 그러나 이념과 체제는 선택하는 것이며 그 선택이 운명을 가른다. 그런데 운명은 늘 숙명을 동반한다. 피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 운명적 선택을 하고 운명적 선택과 함께 숙명적 짐을 진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자유민주 체제의 이념은 미래의 번영을 약속하는 운명적 예약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李承晩)의 자유민주 대한민국의 건국은 그 자체로 예언적 위업이다. 그러나 운명적 선택에는 반드시 짊어져야 할 숙명적 짐이 있다. 그 선택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이다. 양립할 수 없는 이념 가운데 하나를 택한 이상 그 선택을 부정하는 쪽의 위협과 도전을 피할 수 없다. 그에 맞서 선택을 지켜내지 못하면 예약된 운명이라 해도 미래를 주지 못한다. 따라서 적대적 도전에 맞서는 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체제는 그래서 처음부터 적대적 도전에 늘 맞서야 하는 비상상태에서의 ‘상시적(常時的) 비상 체제’가 숙명일 수밖에 없었다. 그 비상상태의 엄중함은 건국한 지 불과 2년 만에 맞게 된 6・25전쟁으로 확인됐다. 그것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6・25전쟁부터가 종전(終戰)이 아니라 단지 휴전(休戰)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북한은 그 배후에 강력한 국제 공산주의 세력을 두고 여전한 위협으로 존재했다.
 
  이 근원적 긴장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철이 없거나 아니면 불순(不純)하거나이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어리석음과 불순함은 늘 동반한다. 무지(無知)는 불순에 놀아나고 불순은 무지를 숙주(宿主)로 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사에선 암약하는 불순함과 그에 놀아나는 우행(愚行)이 멈춘 적이 없다.
 
  박정희가 이끈 ‘한강의 기적’은 바로 그런 조건 속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박정희의 정치’는 대한민국이 불가피하게 안아야 했던 ‘상시적 비상 체제’로서의 숙명을 짊어진 정치였다. 박정희는 그 숙명의 짐을 지고 ‘피의 골짜기’를 지나온 나라를 ‘땀과 눈물의 강’을 건너 ‘번영의 바다’에 이르게 했다.
 
 
  5·16으로 자유민주주의 수호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에 따라 제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사진=조선DB
  5・16과 10월 유신은 바로 그 ‘박정희의 정치’를 대표한다. 그 점에선 ‘한강의 기적’은 팔아먹어도 ‘박정희의 정치’는 반(反)민주적 악(惡)으로 보는 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뭐라 하든 5・16과 10월 유신은 근본적으로는 결코 한국의 자유민주 체제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5・16 전야(前夜)의 시대, 제2공화국이 어떤 혼란과 위험에 직면해 있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에 더해 “김일성 만세”를 거리낌 없이 외쳐대는 가운데, 어린 국민학생들이 “데모 그만하라”는 데모까지 했던 기상천외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에 더해 김일성(金日成)은 4・19 직후 북한 주도 통일을 노리고 있었다. 김일성은 1960년 8월 14일, 8・15경축사에서 ‘연방제 통일’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의 소위 혁신세력들을 부추기는 작업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한국의 자유민주 체제의 안전에 적신호(赤信號)가 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정권은 그 위험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그 위험천만의 상황을 종식시킨 게 바로 박정희가 이끈 5・16이었다.
 
  미국의 싱크탱크 중 하나인 윌슨센터는 당시 상황에 대한 보고서에서 김일성의 희망과 대남(對南)전략 추진은 “결국 남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수포로 돌아갔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5・16이 위험에 처한 한국의 자유민주 체제를 수호한 것이라는 얘기다.
 
  박정희의 정치는 처음부터 그렇게 한국의 자유민주 체제 방어와 수호로 시작되었다. 그 집약적 표현이 바로 ‘반공(反共)’이었다. 1961년 5・16의 6개 공약 중 2개에 걸쳐 “반공태세의 재정비 강화”와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을 천명했다. 그리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에서 “반공 민주 정신…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라고 언명했다.
 
 
  방어적 민주주의
 
  이것은 상시적 비상 체제로서의 한국의 자유민주 체제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며 동시에 지침이었다. 5・16에 이어 10월 유신은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을 향해 더욱 확고히 나아간 것이었다. 그 10여 년 전의 5・16 연장선상에 있는 또 한 번의 자유민주 체제 방어와 강화를 위한 결단이었다.
 
  유신시대를 암흑으로 여기는 자들에겐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얘기겠다. 희대의 반민주 독재에 자유민주 체제 방어 운운이라니!
 
  과연 박정희는 자유민주 체제 운운에는 어울리지 않는가? 하지만 박정희는 그들이 그렇게 저주해 마지않는 10월 유신을 선포한 1972년 10월 17일의 특별선언에서 자유민주 체제의 본질과 그 수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민주 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 민주 체제처럼 나약한 체제도 또한 없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우리 민주 체제에 그 스스로를 지켜나가며,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고 (중략)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이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박정희의 이 언명은 정론(正論)이다. 박정희가 갈파한 이 문제는 세계적인 역사적 경험으로 거듭 증명되었다. 히틀러를 등장시킨 독일의 바이마르 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자유를 삭제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민주도 폐기 처분한 공산 좌익들도 항상 민주를 내세웠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달고 있는 민주주의가 기만적 장식물에 지나지 않음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자유민주 체제는 소중하지만 늘 그렇게 탈취당할 위험 또한 갖는다. 통일 전 서독(西獨)이 ‘방어적 민주주의 체제’를 강력히 구축한 것은 바로 그 교훈에서였다.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재출발하면서 나치는 물론 공산당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체제를 구축했다. 헌법수호청이라는 정보기관을 운영하고 잠재적 의심분자들에 대해선 끊임없이 사찰을 했다. 공무원에 대해선 자유민주기본질서에 대한 충성서약을 의무화했다. 문제가 있는 단체 조직을 강제해산시킬 뿐 아니라 불순한 활동의 이력이 있는 자는 공직 임용에서 가차 없이 제외했다.
 
  박정희도 그랬다. 그는 자유민주 체제의 본질적 의의에 대해 확신하면서도 그 약점을 헤아리고 그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고자 했다. 그게 10월 유신이고 박정희의 정치였다. 그것은 본질에서 서독의 ‘방어적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서독의 그 체제는 감히 반민주라고 욕하지 않지만 박정희에 대해선 그래야 하는가?
 
 
  민주주의가 ‘양아치’들의 손에 들어갈 때…
 
  유신이 선포될 당시 한국이 맞은 도전은 서독보다 훨씬 엄중했다. 닉슨독트린으로 안보태세 강화가 긴급한 상황이었다. 한편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경제성장을 더욱 본격화해야 할 과제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은 경제발전과 안보태세 강화에 대해선 안목도 능력도 없으면서 오직 독재-민주만을 내걸고 포퓰리즘 선동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10월 유신 전해 있었던 1971년 대선(大選)에서 야당 후보가 내건 노선대로 갔으면 이후 한국은, 안보태세는 급격히 위태로워지는 가운데 경제성장은 그냥 중단되는 상황을 맞았을 것이다. 그게 과연 한국의 자유민주 체제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길일 수 있을까? 박정희는 그 길을 거절하고 ‘중단 없는 전진’의 길을 선택했다. 그 선택을 형식만의 민주론(民主論)으로 단죄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것을 스스로 논박하는 역설적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반유신 민주론’의 화석을 여전히 자신의 신성한 뿌리의 하나로 자랑하던 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죽이는 폭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조국(曺國)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장식과 구호로 전락한 ‘민주론’은 결국 그런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목청 높여 떠들어도 결코 자유민주 체제의 수호를 위한 답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결국에는 그 반대편이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그랬다. 바로 10월 유신 선포 당시와 그 이후 유신시대 내내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는 양식 있는 시민의 손에 있을 때는 자유의 활력을 꽃피우게 하지만 양아치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나라를 해치는 흉기가 된다. 그 양아치가 적색(赤色)일 때는 더욱 그렇다. 박정희는 그것을 단속했다.
 
 
  朴正熙는 알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폭압적(暴壓的) 정치의 대표 격으로 일컬어지는 사건 중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이 있다. 용공(容共)조작 사건이라는 주장이 여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지금 행세를 하고 있는 586세대 운동권의 핵심 분자들이 알고 있는 실상에 비춘다면 기만이다. 586세대 운동권들은 그 사건들이 결코 용공조작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때 운동권들은 박정희 시대의 공안사건들이 “남한 변혁(變革)운동의 피어린 발자취”라고 배웠고 또 가르쳤다.
 
  그러면서도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과거사정리위원회’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등이 나서 용공조작이라며 재심(再審)을 끊임없이 진행했다. 그러나 재심이 이루어진 박정희 시대 1250건의 간첩 및 공안사건들 가운데 무죄(無罪) 인정은 불과 10여 건이다. 0.125%에 불과하다. 더욱이 무죄 판단을 받은 것도 사건의 실체 자체에 대한 게 아니라 절차상 하자(瑕疵)나 가혹행위 등이 이유였을 뿐이다.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였던 건 ‘용공조작’이 아니라 ‘용공조작론’이었다.
 
  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던 그다음 해인 1975년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 여기에는 학생이 있고, 일부 종교인이 있고, 일부 정치인이 있고, 대학교수가 있고, 중・고등학교 교사가 있고, … 과거에 공산주의를 하다가 형무소에 들어가서 징역까지 살고 나온 전직 전과(前科) 공산주의자들도 있다. 복잡한 사람들이 여기 모두 가담이 돼 있다.
 
  그러면 이것이 처음부터 간판을 달아놓고 내놓고 조직을 했느냐, 그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여기 가담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공산주의자도 있고, 비(非)공산주의자도 있고, 내가 볼 때에는 가장 사상 면에 있어서는 반공적인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도 여기에 가담돼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어떻게 모두 야합이 되었느냐, … 공산주의자들이 뒷전에 숨어서 아주 교묘하게 역이용을 했다. 실제 가담한 사람은 내용을 모르고 뛴 사람이 많았다.”
 
  그랬다. 박정희 대통령은 알고 있었다. 불순 세력이 어떻게 자라나고 암약하며, 또 어떻게 결코 빨갱이가 아닌 사람까지도 엮이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가 옳았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듯 당시에는 더욱더, 순박한 민주론자들은 그 내막을 몰랐다. 아니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민주론이 조잡했다. 그들이 아는 수준에서는 박정희는 용납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 박정희도 그의 정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해보려 하지 않았다. 박정희 휘하의 사람들조차 그를 온전히 헤아리지 못했으니 그것은 시대의 숙명이었다.
 
  그게 유신시대였다. 박정희는 그렇게 이해받지 못한 가운데 고독한 질주를 했다. 그의 그 고독한 질주를 고의적 폄훼에서든 몰이해에서든 많은 이가 여전히 독재라고 일컫는다.
 
  10월, 박정희와 관련한 중요한 사건이 2개 있는 달이다.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이 있었다. 그리고 9일 뒤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라는 ‘유신의 심장’은 고동을 멈췄다.
 
  그로부터 40년, 강산이 네 번 변했을 세월이다. 실제로 강산이 변했다. 풍경도 그러하지만 내용은 더 극적으로 변했다. 천지개벽에 가까우리만치!
 
  그러나 지금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그 천지개벽을 누리면서도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욕하기 일쑤다. 아니 많은 이가 욕은 안 해도 고마움을 잊었다. 그리고 그를 헤아리는 자들도 그를 낡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박정희는 과연 낡은 존재인가? 지금 이 나라에서 진행되는 사태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정희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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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EBYUNGMOON    (2019-10-13) 찬성 : 12   반대 : 1
존경합니다 그는 대한민국을 살린 구국의 영원한 영웅 입니다 또 한번 풍전등화의 난세에 쓰레기들을 깨끗하게 쓸어 내버릴 새로운 박정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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