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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亡國病’ 포퓰리즘

아르헨티나, 포퓰리즘과 국가부도의 역사

아르헨티나 국민 자신이 포퓰리스트

글 : 김정호  김정호의경제TV 대표, 前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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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20세기 초 선진국 대열 진입… 1958년 이후 IMF 구제금융 22회, 국가부도 선언 8회
⊙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 받은 페론, 反기업·親노동 포퓰리즘 정책
⊙ 페론주의 정권이 포퓰리즘으로 나라 망치면 新자유주의 정권 들어서 개혁 추진하지만, 국민들이 못 참고 페론주의로 복귀… 열두 번의 대선 가운데 페론주의자가 아홉 번 승리

金正浩
1956년생.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美 일리노이대학 경제학 박사, 숭실대 법학 박사 / 자유기업원장,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역임. 現 김정호의경제TV 대표 / 저서 《대한민국 기업가열전》 《법, 경제를 만나다》 《누가 소비자를 가두는가》
지난 4월 25일 아르헨티나의 전국노동자연맹과 시민단체들은 대통령궁 앞에서 정부의 경제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진=뉴시스/AP
  2018년 아르헨티나는 외채(外債)를 갚지 못하는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다. IMF(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려서 5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IMF 구제금융 사상 최대의 금액이라고 한다. 1998년 한국이 IMF로부터 받은 구제금융 액수는 210억 달러였다.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구제금융으로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이자율에 반영되어 있다. 아르헨티나의 금리(金利)는 연(年) 60%에 달한다. 그나마 작년에 비해서 조금 낮아진 편이다.
 
  국가부도 사태는 이 나라의 고질병이다. 2001년에는 아예 모라토리엄(moratorium・지불유예기간)을 선언해야만 했다. ‘우리는 빚을 갚을 수 없으니 알아서들 하라’는 선언이었다. 은행은 마비되었다. 자본은 대규모로 탈출했다. 무역이 중단되다시피 해서 생필품 부족 사태까지 빚어졌다. 그렇게 고생한 기억이 채 지워지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같은 사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우리나라 문서들에는, 아르헨티나의 이런 사태가 1970년대 군부정권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틀린 말이다. 아르헨티나는 1958년에 이미 빚을 갚지 못해 IMF로부터 1억 달러를 구제금융 받은 것을 시작으로 작년까지 무려 22회에 걸쳐 IMF 신세를 졌다. 부도를 선언한 것도 8회나 된다. 이 정도면 염치가 없어서 얼굴을 들지 못할 만한데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IMF와 미국의 소위 신(新)자유주의 반대를 외친다.
 
 
  널뛰기 경제 70년
 
  이번에도 구제금융은 그저 임시방편일 뿐일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 성향이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고질적인 문제는 정부가 수입보다 더 많은 돈을 쓰는 것, 즉 재정적자다. 2018년에도 재정적자는 GDP(국내총생산)의 7%에 육박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연간 130조원 정도의 재정적자가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모자라는 돈은 외국에서 빌려오거나 돈을 찍어서 조달해왔다. 국가부도가 반복되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랐다. 2018년의 물가상승률은 48%에 달했다.
 
  소위 ‘신자유주의자’라고 비난받는 마우리시오 마크리 현 대통령은 긴축을 해서 재정적자를 줄이고 물가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국민의 반발로 결국 포기했고, 재정적자는 다시 늘어났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포퓰리즘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그 구조를 보면 국민이 중심에 있다. 출발은 포퓰리스트 정권이 노동자와 빈민들에게 선심을 쓰는 것이다. 당장은 경기가 좋아지고 국민의 삶의 질도 높아진다. 문제는 돈이다. 그러다 보면 돈이 모자라기 마련이고 돈을 찍어내고 빚을 얻어서 충당한다. 그 결과 물가가 오르게 되고 임금을 올려봤자 구매력은 오히려 줄어들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우파정권이 등장해서 긴축정책을 편다. 하지만 국민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다시 포퓰리스트 정책과 포퓰리스트 정권으로 돌아간다. 이런 ‘널뛰기 경제’가 70년간 이어져왔다. 이 글은 아르헨티나의 널뛰기 경제 이야기다.
 
 
  ‘엄마 찾아 3만 리’
 
  1910년대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프랑스나 이탈리아보다 잘살았다. 미국・캐나다・호주 등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중 하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지하철이 개통된 것이 1913년이다. 참고로 도쿄지하철은 14년 뒤인 1927년에 개통되었다.
 
  독자 중에 〈엄마 찾아 3만 리〉라는 만화영화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주인공인 소년 마르코가 외국에 돈 벌러 간 엄마를 찾아가며 겪는 이야기다. 이 만화영화에서 마르코가 사는 곳은 이탈리아의 제노아였다. 엄마가 돈 벌러 간 곳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가난한 이탈리아 여성이 선진국인 아르헨티나에 가정부로 일하러 간 것이다. 그만큼 아르헨티나는 부자 나라였다.
 
  이 나라가 본격적인 어려움에 처한 것은 1930년대 세계대공황이 닥치면서다. 아르헨티나의 비약적 성장은 수출 때문에 가능했다. 주(主) 수출품은 곡물과 동물의 가죽이었다.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시작됐다. 아르헨티나 제품에 대한 수요도 줄어서 수출이 격감했다. 설상가상, 미국의 관세인상으로 시작된 보호무역주의 물결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아르헨티나의 수출은 더욱 줄어들었다. 모든 나라가 힘들었지만 수출 비중이 높았던 아르헨티나는 타격이 매우 심각했다.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위기는 쿠데타의 기폭제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에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다. 총인구의 60%가량이 이탈리아와 어떤 식으로든 혈연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1920년대부터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즘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 속에서 득세하고 있었다.
 
  파시즘은 조합주의(corporatism)를 국가운영의 원리로 삼는다. 사회의 각 직업을 몇 개의 조합으로 조직한 후, 그들 간의 타협과 협의를 통해서 국가를 운영하고 이익을 나눠 가지자는 개념이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노사정(勞使政)위원회 같은 것을 통해 정책을 결정한다고 보면 된다. 그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지도하는 것은 당연히 지도자의 역할이 된다. 무솔리니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파시즘과 조합주의에 대한 열망은 아르헨티나로도 번졌다. 파시즘으로 나라를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대공황으로 분노가 극에 달했다.
 
 
  파시즘의 전파
 
  1930년 12월 일단의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저항 없이 정권을 잡았다. 쿠데타를 지지하는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많은 국민의 환영을 받았다. 아르헨티나는 본격적으로 파시스트 국가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에는 나치가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나치 전범(戰犯)들이 아르헨티나로 숨어들었던 것은 후안 도밍고 페론을 비롯한 파시스트나 나치 동조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노동조합의 힘이 커졌고 수출지향적 개방경제는 내수(內需) 지향 경제로 개편되기 시작했다. 수출에 대해 매긴 세금으로 내수산업을 키워나갔다.
 
  국민들은 이런 정책을 반겼다. 그러나 지속가능하지 않은 국가운영 방식이었다. 결국 또 다른 쿠데타가 이어졌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1930년을 시작으로 1943년, 1955년, 1962년, 1976년까지 모두 다섯 번의 쿠데타를 겪게 된다. 평화적 정권 교체가 가능해진 것은 1980년대부터다.
 
  페론은 1943년의 쿠데타 주역 중 하나였다. 거사가 성공하자 그는 새 정권에서 노동부 장관이 되었다. 그가 편 정책은 자본가·수출기업가들의 것을 노동자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페론의 인기는 치솟았다. 그 인기에 힘입어 페론은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이 편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반(反)기업・친(親)노동 정책이었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급격히 올렸고, 정부가 나서서 노동조합의 결성을 이끌었다. 민간기업들은 국유화(國有化)해나갔다.
 
  두 번째는 반(反)수출・친(親)내수 정책이었다. 수출품을 저가(低價)로 국가가 수매해서 수출한 후 그 차익(差益)을 정부가 챙겼다. 그 돈은 노동자와 빈민을 돕고 내수산업을 육성하는 데에 쓰였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이 정책을 페론은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페론의 포퓰리즘
 
후안 도밍고 페론과 그의 아내 에비타. 두 사람은 포퓰리즘이라는 나쁜 씨앗을 아르헨티나에 뿌려놓았다.
  노동자들은 페론에게 열광했다. 후안 페론과 그의 부인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서민의 절대적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국민이 열광한다 해도 경제법칙을 비켜갈 수는 없다. 선심성 정책이 지속되다 보면 결국 파탄으로 끝이 나기 마련이다.
 
  페론도 정부의 수입보다 더 많은 돈을 베풀려다 보니 돈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이를 메우기 위해 수출산업을 쥐어짰고, 외국에서 빚을 얻어 썼다. 그것도 모자라자 중앙은행을 장악한 후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윤전기가 부족해서 이탈리아에서 돈을 찍어 수입해올 정도였다고 한다. 당연한 결과로서 물가 폭등이 닥쳐왔다.
 
  물가가 오르니 실질임금이 떨어졌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기업가들도 시장개척 등 미래에 대한 투자보다는 사재기에 열중하기 마련이다. 국민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페론도 결국 긴축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물가를 잡기 위해 통화남발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의 지지자들에게 선심을 쓸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55년 해군 폭격기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를 폭격했다. 페론에 반대하는 장교들의 반란이었다. 페론은 분노했다. “우리 편 한 명이 죽임을 당할 때마다 적 다섯 명을 죽이자”며 내전(內戰)을 독려했지만, 결국 반대파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페론은 파라과이로 망명했다.
 
  페론이 떠난 아르헨티나는 군부 독재 상태에 들어간다. 사회가 얼어붙는 듯했다. 거의 모든 정치활동이 멈추었다. 그러나 1959년 쿠바 공산혁명이 성공을 거두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노조의 저항이 극렬해졌고 무장단체들이 생겨났다. 페론주의자도 주요 저항세력이었다. 군부의 지원을 받는 우파 무장단체들도 생겨나 대립했다. 페론주의자 중에서도 좌파와 우파가 서로 대립했다. 나라가 거의 내전 상태에 빠져들게 된 셈이다. 혼란을 감당하지 못한 군부는 결국 정권을 포기하고 페론의 귀국을 요청하게 된다.
 
  대중은 귀국하는 페론에 환호했다. 페론은 1973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노환(老患)으로 사망했다. 나라는 다시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지경에 빠져들었다. 페론의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계승한 이사벨 페론은 실정(失政)을 거듭했다.
 
 
  메넴의 실패
 
  1976년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군부는 좌파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살해되고 사라졌다. 아르헨티나인들은 당시 군부가 벌인 일을 ‘더러운 전쟁’이라고 부른다.
 
  경제정책에 있어서 군부 정권은 시장주의에 가까웠다. 페론은 국가가 경제의 모든 국면에 개입하고 높은 관세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내수산업을 지원했지만, 군부 정권은 관세를 낮추고 규제를 줄여나갔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었어도 페론 시대와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재정적자와 통화남발이다. 실업대책이라는 명분으로 재정적자는 지속되었다. 공기업들의 적자도 지속되었다. 재정적자는 여전히 외채와 통화남발로 충당했다. 1975년에 80억 달러이던 대외채무는 1981년에 360억 달러로 증가했다. 인플레이션율은 통치 기간 내내 연평균 100%를 웃돌았다.
 
  1982년, 군부 정권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을 상대로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지만 패했다. 결국 군부는 정권을 내놓았다. 1983년 아르헨티나에서도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민주선거로 선출된 첫 대통령 라울 알폰신은 페론의 정책으로 복귀했다. 수출 및 기업규제, 국유화, 재정확대 및 통화남발이었다. 결과는 예외 없이 불황과 하이퍼인플레이션이었다. 1975년부터 1990년 동안 평균 물가상승률이 325%이고, 1989년에는 무려 5000%에 달했다. 통상 7~8% 수준이던 도시 빈곤 인구의 비율이 1990년에는 거의 50% 수준에 육박했다.
 
  1989년 카를로스 메넴이 대통령이 되었다. 스스로 페론주의자임을 자처하던 메넴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페론과는 정반대의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수출에 대한 규제를 풀고 많은 정부 기능을 민영화했다. 외국 자본들의 투자가 밀려들었다.
 
  그는 통화정책도 바꿔서 페그제(peg・고정환율제도)를 도입했다. 아르헨티나의 페소를 미국달러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원하면 페소를 미국달러와 교환해주기로 했다(실제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최소한 원칙은 그랬다). 물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25%로 떨어졌고, 1996년부터는 1% 밑으로 인플레이션이 잡혔다.
 
  그러나 달러화 페그제는 또 다른 재앙이 되었다. 1999년 브라질 헤알화의 가치가 폭락하자 페그제로 인해 평가절하를 할 수 없었던 아르헨티나 제품들은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었다. 국제수지가 막대한 적자로 돌아섰다. 달러에 대한 페그제 덕분에 통화남발의 유혹을 막아내고 물가를 잡을 수 있었지만, 경상수지 적자라는 새로운 문제를 불러온 것이다.
 
  결국 IMF 구제금융을 다시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아서 2002년 결국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로 일컬어지는 과정이다.
 
 
  부부 대통령 키르치네르
 
2015년 10월 대통령궁 발코니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치네르 대통령. 뒤에는 그의 전임자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사진이 보인다. 사진=뉴시스/AP
  분노한 국민은 2003년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던 메넴을 버리고 다시 페론주의자를 선택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좌파 페론주의 진영이 정권을 잡았다. 자유무역을 거부하고 1990년대에 민영화했던 기업들을 다시 국유화했다.
 
  페그제를 포기한 결과 30~40%에 달하는 페소화의 평가절하가 가능해졌다. 수출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이 급증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도 좋아지고 실업률도 낮아졌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뒤를 이어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크리스티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폈다. 일자리를 늘린다며 공무원을 증원했고, 연금도 너그럽게 베풀었다. 키르치네르 정권 출범 전인 2005년 230만명이던 공무원은 2014년 390만명으로 70%가 늘었다. 연금 수급자는 360만명에서 800만명으로 두 배도 더 넘게 증가했다. 2014년 현재 아르헨티나의 총인구는 4300만명으로, 인구의 5분의 1이 대부분 놀고 먹는 상태가 된 것이다. 부족한 돈은 통화남발로 메웠고, 통계조작으로 문제를 은폐했다. 2014년 7월 아르헨티나는 다시 디폴트(default・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2015년, 우파 정치인인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대통령이 되는 데 성공했다. 마크리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는 작업에 나서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적자는 외채로 충당해야만 했다. 부채상환 능력을 의심한 외국 자본들이 빠져나갔다. 2019년 5월 아르헨티나는 다시 한 번 570억 달러의 IMF 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국민이다!
 
  “민중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느낄 뿐이다. 그들은 직관이 이끄는 대로 그 느낌에 반응한다. 누가 그 반응을 이끌어낼 것인가. 바로 지도자의 역할이다.”
 
  페론이 1951년에 선언한 내용이다. 그는 생각 없이 느끼는 아르헨티나 민중을 위해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내세우는 비전은 ‘자주독립’ ‘사회정의’ ‘노동자 우대’ 같은 것들이다. 그것을 위해서 돈이 없으면 빌리고, 그래도 안 되면 돈을 찍어서 조달했다. ‘절약’ ‘생산성’ ‘절제’ 같은 것은 페로니즘에 들어 있지 않다.
 
  아르헨티나의 국민은 페론이 말하는 그 민중이 된 듯하다.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페론당 후보가 입후보할 수 있었던 대통령선거는 열두 번이 있었다. 군부 통치 기간 중에는 페론주의자의 출마가 금지되었다. 열두 번의 대통령 선거 중에서 페론주의자는 아홉 번 승리했다. 페론주의자가 아닌 후보가 승리한 민주선거는 세 번에 불과하다. 이는 아르헨티나 국민들 자신이 페론주의자임을 시사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비(非)페론주의자가 집권하더라도 결국 국민이 원하는 대로 페론주의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가장 비근한 예는 현 대통령 마우리시오 마크리다. 그는 소위 신자유주의자로 불린다. 전 정권에서 쌓아놓은 외채를 갚기 위해 IMF의 처방들을 따라왔다. 하지만 그런 마크리도 선거가 다가오자 페로니즘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급등하는 가격에 대해 가격통제를 실시하고 페론주의자인 미구엘 피케토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영입했다. 마크리 현 대통령의 타협은 아르헨티나 국민들 자신이 페론주의자임을 말해준다. 페론주의자 유권자에게는 페론주의자 정치인만 지지를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는 또 아르헨티나 경제가 왜 포퓰리즘과 긴축정책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 구조를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출발은 포퓰리즘이다. 원래 페론이 했던 대로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주고 빈민들에게는 복지혜택을 늘려준다. 그 덕분에 경제가 좋아지는 듯하지만 늘어나는 빚과 통화남발로 늘어난 통화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가가 오르고 노동자의 실질소득은 줄어든다. 또 외채를 갚지 못해 국가부도 위기에도 몰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국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다. 비(非)페론주의 정권이 집권해서 긴축정책을 편다. 하지만 국민은 긴축정책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다시 페론주의 정당이 집권을 한다. 악순환은 반복되고 경제는 끝없이 추락한다. 국민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페론주의 → 단기적 호황 → 재정적자・부채증가・통화남발 → 하이퍼인플레이션 → 실질소득 감소・국가부도 위기 → 긴축정책 → 국민의 반발 → 페로니즘으로 회귀
 
  아르헨티나가 왜 페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워낙 이민자가 많다 보니 사람들이 장기적 시각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고, 대토지 소유자들이 많아서 빈부격차가 크고 그 때문에 국민이 재분배에 집착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국민이 당장의 편안함에만 탐닉하고 저축과 절약과 노력을 멀리하는 나라는 포퓰리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아르헨티나의 지난 100년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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