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발굴 비화

남북 ‘싱가포르 접촉’ 10주년, 그때의 敎訓

‘싱가포르 밀사’ 임태희 장관의 ‘의문의 발자취’ 추적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논란의 핵심인 ‘양해각서’는 어떤 경위로 작성됐나?
⊙ “MB도 임태희 장관에게 격노했다더라”
⊙ 남북 대화 주도권 회수한 통일부, “北, 뻔뻔하게 ‘양해각서’ 들고 나와”
⊙ 임태희 전 장관의 ‘對北 메신저’ 노릇한 B씨는 누구?
⊙ 임태희 전 장관의 反論: “金大中 前 대통령 조문단 訪南, B씨와 무관… 그가 조총련과 사업했는지 몰랐다”
⊙ “싱가포르 접촉 때는 견제와 균형 이뤄져… 현 정부는 異見 허용치 않는 분위기”
  2019년은 남북 비선(秘線)라인이 싱가포르에서 접촉한 지 10년째 되는 해이다. 이명박(MB) 정부 시절인 2009년 10월 중순, 임태희(任太熙)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이후 대통령 비서실장 역임)이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2015년 사망)과 싱가포르에서 극비리에 만난 것이다.
 
  《월간조선》은 싱가포르 접촉 10주년을 맞아 임태희-김양건 접촉의 전말을 다시금 복기(復棋)해 봤다. 10년 전의 일을 취재하면서 몇 가지 비화(秘話)도 발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싱가포르 접촉이 남북 대화에 ‘올인’하는 문재인 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임태희 전 장관의 행적 검증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엔 2009년 싱가포르 접촉 당시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설명돼 있다.
  지금부터 10년 전 그때의 상황으로 시곗바늘을 돌려 본다. 먼저 임태희 전 장관의 설명을 검증해 보자. 임 전 장관이 싱가포르 접촉의 ‘주연’이었기에 그동안 접촉의 전말에는 그의 시각이 많이 반영된 게 사실이다. 《월간조선》(2013년 2월호)도 싱가포르 접촉과 관련해 임태희 전 장관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었다.
 
  이 인터뷰에서 임 전 장관은 “만일 정상회담이 열렸으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정부는 정상회담에 대가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협상은 하되 대가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줄 것인가 고민했다”며 “‘프라이카우프’ 원칙에 따라 진행시켰다”고 회고했다. 프라이카우프(Freikauf)란 ‘자유를 산다’는 의미의 독일어로, 옛 서독의 동독 반(反)체제 인사 석방사업을 뜻한다. 통일 전 서독은 동독의 정치범들을 서독으로 데려올 목적으로 현금과 현물을 동독 측에 제공했다. 이와 관련해 《월간조선》과 임 전 장관의 일문일답 내용을 살펴보자.
 
  〈 ― 비선 접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략) 당시 정부는 정상회담에 대가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협상은 하되 대가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줄 것인가 고민했어요. 그래서 프라이카우프 원칙에 따라 진행시켰습니다. 냉전시대 독일처럼 납북자, 국군포로 생사확인·서신교환, 이산가족 상봉, 한국전쟁 전몰자 유해 발굴, 고향방문을 정례화하되, 그것을 패키지로 쌀과 비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양해각서에 서명했나요.
 
  “양측의 논의과정을 정리했습니다. 북측이 초안을 가지고 왔어요. 읽어 보고 잘못된 부분을 가필(加筆)해 주고 이것이 내 의견이라고 사인으로 확인해 줬어요. 우리 측 의도 역시 명확히 해야 하잖아요. 북측 역시 돌아가서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밖에 못했다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걸 안 해 주면 나중에 연락이 되지 않죠. 이면합의를 했다거나 섣부르게 서명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안 해 주면 창구가 없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게 임태희 전 장관이 가필해 줬다는 ‘양해각서’다. 이 양해각서를 둘러싸고 정부 내부에서 논란이 일었다. MB가 사전에 임 전 장관에게 주었던 지침과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MB는 정상회담에 임하는 네 가지 조건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 골자는 ▲남북 정상회담을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회담 성사를 조건으로 북한을 선(先)지원할 수 없고 ▲앞으로의 남북 정상회담은 납북자, 국군포로 등 우리의 인도(人道)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임 전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전해 온 중간 협의 결과는 당초의 지침과는 거리가 있었다. 2015년에 발간된 MB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는 이 부분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북한 핵 문제는 ‘폐기’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공동 노력’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핵 문제가 남북 정상회담 의제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진전된 일이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국군포로 한두 명을 ‘영구 귀환’이 아닌 ‘고향 방문’으로 할 수 있다고 했고, 무엇보다도 정상회담 분위기 조성을 위해 남한으로부터 쌀과 비료 등 대규모 경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태희에 의구심 가진 MB
 
  MB는 싱가포르에서 임 전 장관이 무리하게 협상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북측과의 협의를 중단시켰다. MB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에게 ‘앞으로 남북 대화는 공식 라인인 통일부-통일전선부(이른바 통통 라인)가 맡으라’는 취지의 지시도 내렸다. 아울러 싱가포르에 있는 임 전 장관에게는 ‘통통 라인 회담 날짜만 받아 오라’고 지시했다.
 
  싱가포르 접촉이 열린 지 약 한 달 후인 2009년 11월 7일, 개성에서 통일부와 통일전선부 실무 접촉이 열렸다. 여기서 사달이 났다. 북한은 임 전 장관의 서명이 날인된 양해각서를 들고 나와 ‘합의를 이행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양건이 가지고 온 양해각서 초안에는 정상회담 성사 조건으로 쌀과 비료 지원, ‘국제개발은행 설립자본금 100억 달러’까지 우리 정부가 지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개성에서 다시 열린 ‘통통 회담’에서도 북측은 싱가포르 접촉에서 논의된 내용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정형화한 ‘정상회담’ 계산서 느낌”
 
2014년 2월 12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접촉 전체회의에 참석한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왼쪽). 오른쪽은 김규현 당시 국가안보실 제1차장. 사진=뉴시스
  회고록을 기반으로 했을 때, MB는 통통 회담 전까지는 임 전 장관이 양해각서에 서명한 사실은 물론, 그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개성 접촉 과정에서 그 사실을 안 MB가 임 전 장관을 불러 전후 사정을 물어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내용을 보고 받고 “무슨 정형화한 ‘정상회담’ 계산서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MB는 임 전 장관을 불러 싱가포르에서 한 양해각서(합의문)에 관한 이야기를 청취했다. 임 전 장관의 해명을 MB 회고록에서 옮긴다.
 
  〈합의서를 써 준 적은 없습니다. 회담이 중단된 후 통통 회담 날짜를 잡자고 하니 김양건이 그동안 어떤 내용이 논의되었는지를 확인만 해 달라고 해서 확인해 준 것은 있습니다. 김양건이 그대로 가면 죽는다고 해서…. 북한 측이 정리한 두 장짜리 회담 내용을 가지고 오기에 제가 잘못된 몇몇 부분은 두 줄로 지우고, 옆에다 새로 덧붙이기도 하고. (중략) 합의문은 분명히 아닙니다.〉
 
  싱가포르 접촉 당시 현인택 통일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을 지낸 김승(현 한국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씨는 “‘100억 달러’ 지원 등이 포함된 양해각서 내용을 듣고 통일부 장관을 비롯한 간부들이 깜짝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개성 접촉 당시 북측에서는 원동연이 나왔습니다. 원동연이 ‘싱가포르에서 임태희 장관이 사인한 것’이라며 생전 처음 보는 합의서를 들이밀었다고 합니다. 그러고선 아주 뻔뻔하게 그 합의서의 이행을 촉구하더랍니다. 그 자리에 있던 김천식 통일부 정책실장(훗날 통일부 차관)이 당황했다고 들었습니다.”
 
  원동연은 2009년 싱가포르 접촉 당시 김양건의 직계 인사다. 이명박 정부 시절 통통 회담(통일부-통전부)의 대표적인 ‘일꾼’이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 노동당 라인인 통전부의 김양건-원동연-맹경일로 이어지는 3인의 고위직이 당시의 비밀접촉과 대남협상을 거의 주도했다. 원동연은 2016년 조평통 서기국장을 마지막으로 현재 공식석상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다.
 
  김승씨는 “당시 임 전 장관은 ‘정상회담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우리(통일부)는 그렇지 않았다”며 이런 말을 했다.
 
  “MB가 임 전 장관에게 내린 지침의 요지는 ‘일단 싱가포르에 가서 북한의 얘기를 들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MB도 북한의 속성을 알았기 때문에 경계했던 거지요. 그 양해각서에 (임 전 장관이) 사인을 해 주는 바람에 일이 꼬인 겁니다. 제가 듣기론 MB도 임태희 전 장관의 경솔함에 매우 격노했다고 합니다.”
 
 
  “임 전 장관, 北의 기만전술에 넘어가”
 
  MB 측 핵심 관계자 A씨의 설명도 김승씨의 그것과 비슷했다. A씨는 “나중에 임 전 장관이 들은 바에 따르면 ‘통통 회담’에서 북측이 내놓은 문서는 자신이 수정한 내용이 아니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북한이 처음에 제안했던 초안을 통통 회담장에서 그대로 제시한 것 같다는 설명이다. A씨는 “임 전 장관은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싱가포르 접촉에 나섰겠지만, 보기에 따라선 ‘오버’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훗날 임 전 장관은 자신이 ‘비선’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공식 루트는 아니었기에 비선이 맞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처럼 비선을 통해 이뤄지는 남북 대화에는 국가정보원이 간여하는 게 관례다. 북측의 의도를 분석하는 역할은 물론, 비선을 견제하는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확인 결과, 싱가포르 접촉 당시엔 국정원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일부와 마찬가지로 회담 진행 상황 정도만 보고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임태희 장관이 접촉한다는 걸 듣고는 있었지만, 전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개입하지 않은 게 아니라 개입하기가 어려웠죠.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임 전 장관이 움직인 건데 우리가 끼어들어갈 여지가 있었을까요. 다만, 우리 쪽(국정원)에서 ‘북한과의 접촉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차원의 귀띔 정도는 해 줬겠죠. 어쨌든 임 전 장관이 단독으로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임 전 장관은 북한의 ‘기만전술’에 속아 넘어간 거고요.”
 
 
  임태희 전 장관이 대북 밀사로 등장한 배경
 
  이 지점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남북 대화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임태희 전 장관이 갑자기 대북 밀사로 나선 까닭이다.
 
  싱가포르 접촉이 있기 두 달 전인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운명(殞命)했다. 임 전 장관이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A씨는 “이때 서울을 방문한 북한 조문단이 임태희 전 장관을 통해 MB를 접견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고 말했다. 조문단으로는 김양건 통전부장과 함께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 왔다. 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임 전 장관은 이때 서울의 모 호텔에서 김양건과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만큼 임 전 장관은 북측 인사들과 각별했던 모양이다.
 
 
  임 전 장관의 ‘對北 라인’ B씨, 조총련과 사업 벌여
 
싱가포르 접촉 당시 임태희 전 장관의 대북 라인 역할을 한 B씨. 그는 지금도 남북 경협 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A씨는 북한이 임 전 장관을 통해 조문 의사를 밝혀 온 것을 계기로, 싱가포르 접촉이 구체화한 것 같다는 취지의 설명을 했다. 그러면서 임태희 전 장관이 별도의 대북 라인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도 했다. 김승씨도 “MB 취임식을 앞두고 북한 측이 우리 쪽에 취임식 참석 여부를 타진했는데, 그 루트가 임 전 장관이었다는 얘길 들었다”고 말했다.
 
  취재 과정에서 임 전 장관의 대북 라인으로 추정되는 어느 사업가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남북 경협(經協) 관련 사업을 하는 B씨다. 그에 관한 정보가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B씨는 2000년대 초반, I사를 운영하면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합작해 일본에서 Y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Y사는 북한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을 했다. B씨의 회사는 현재 남북경제협력 컨설팅을 하면서 ‘남북 경제협력 최고경영자 과정’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을 근거지로 대남 공작을 벌이는 조총련과 사업을 벌인 점, 남북 경협에 활발히 나서는 것으로 보아 B씨는 북한 내부에서 신뢰를 받고 있는 듯하다.
 
  B씨는 2013년 3월 한 인터넷 매체와 인터뷰를 가졌다. 매체는 “2009년 10월 임태희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간의 이른바 ‘싱가포르 비밀접촉’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B씨를 소개했다. 그는 당시 갓 출범한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처음으로 ‘싱가포르 비밀접촉’ 관련 인터뷰에 응했다고 밝혔다.
 
 
  B씨와 연락 시도해 봤지만…
 
  B씨는 “임태희 전 실장은 남북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북측과의 접촉에서 있었던 많은 얘기들이 북측으로부터 공개됐지만, 결국 임 전 실장과 협의했던 내용에 대해서는 북측이 아직까지 어떤 말도 없었다는 것은 그쪽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B씨는 임태희 전 장관이 비밀 접촉에 나서게 된 계기를 설명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 특사조문단이 왔을 때 임태희 전 실장이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인터뷰의 맥락상 그는 임 전 장관의 대북 접촉을 민간인치고는 매우 상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B씨와 임 전 장관이 어떻게 연(緣)이 닿았는지 궁금했다. 《월간조선》은 현재 해외에 체류하는 B씨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기사 마감 시일까지 어떠한 연락도 받을 수 없었다.
 
  임태희 전 장관이 조문단과의 만남을 MB에게 주선해 줬지만, MB는 곧바로 그들을 만나지는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만나 주면 북한이 오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문단은 MB의 일정에 맞춰 하루 더 체류하며 기다린 끝에 접견에 성공했다. 국내 언론은 ‘조문단이 청와대에서 홀대를 받았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냈다.
 
  MB를 만난 조문단은 줄곧 저(低)자세를 취했다. 김기남은 “우리 장군님께서는 대통령 각하를 만나게 되면 따뜻한 인사를 전하라고 하셨다. 경애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이명박 대통령 각하께 보내는 따뜻한 인사를 정중히 드린다”라고 한껏 추어올렸다. 그러면서 “장군님께서는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이 잘 실천되면 북남(北南) 수뇌들이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했다”고 전했다.
 
  당시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김정일은 뇌졸중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절박한 북한이 붙잡을 ‘유일한’ 끈은 남한밖에 없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MB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MB는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며 남북 대화를 요구하는 김기남에게 핵문제가 제외된 대화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심지어 “이제 앞으로 좀 잘하세요”라며 김기남의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남북 대화에 있어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싱가포르 접촉 이후 상황은 180도 바뀌고 말았다.
 
 
  “‘의도적인 거리두기’로 北 조바심 나게 만들어야”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8월 23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차 방남한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전부장, 원동연 아태위 실장 등 북한 사절단을 접견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임태희 전 장관은 싱가포르 접촉 테이블에 ‘비핵화’를 비롯해 국군포로 문제, 인도적 지원(쌀·비료) 등이 의제로 올라간 데 대해 성과라고 자부해 왔다. 앞서 말한 ‘프라이카우프’를 강조한 것이다. 이 역시 MB 정부 내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다수였다고 한다. 특히 통일부의 반대가 강했다고 한다. 싱가포르 접촉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관계자의 말이다.
 
  “협상의 스킬(skill·기술)로 봤을 때, 프라이카우프가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순 없습니다. 조건부이기 때문에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대북 지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죠. 중요한 건 상대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닌, 북한이라는 점입니다. 북한 정권은 조건부나 유화책으로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단 얘기죠.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북한을 조바심 나게 만드는 게 기본 기술입니다. 그래야 말을 듣죠. MB가 정상회담에 시큰둥하니까 북한이 계속 매달린 게 이를 방증합니다.”
 
  실제로 조문단이 다녀간 닷새 뒤인 8월 28일, 김양건 통전부장은 현인택 통일부 장관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원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 왔다. 청와대 관계자의 말처럼, MB가 조문단 접견 시 정상회담에 절박한 모습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북측이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이때 북한은 정상회담의 대가로 쌀과 비료 등 상당량의 경제지원도 함께 요구해 왔다. 그러나 MB를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은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일부 좌경 성향의 인사들은 이런 MB 정부의 태도가 북한을 자극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이 우리 측의 ‘자극’ 때문에 빚어진 도발이라는 얘기다. 기자가 접촉한 청와대 관계자는 “한마디로 결과론적인 궤변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임태희 “양해각서 아니다… 논의 내용 정리한 것에 불과”
 
  이제 임태희 전 장관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임 전 장관은 ‘싱가포르 접촉’과 관련해 기존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에 B씨의 역할이 있었음을 시인하기도 했다.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 당시 ‘양해각서’ 논란이 빚어졌습니다.
 
  “양해각서라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합의문은 더더욱 아니고요. 싱가포르 접촉에서 논의하던 걸 나중에 ‘통통 라인’으로 넘기지 않았습니까. 통통 회담에서 논의할 때 ‘제로’에서 시작할 순 없잖아요. 그때까지 논의된 내용을 이견은 이견대로, 일치된 내용은 일치된 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걸 정리한 것에 불과한 겁니다.”
 
  —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아시겠지만, 그 당시 북한이 초안을 준비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건 이렇게 쓰면 안 된다’고 해 ‘지금까지 논의 상황이 이렇다’는 식으로 수정을 해 줬습니다. 북측이 자기들도 보고를 해야 한다고 그러고요. 그래서 ‘그 상태로 보고해선 안 된다’며 수정을 해 준 거죠. 그러곤 수기(手記)로 사인을 해 준 겁니다. 나중에 북한이 양해각서라고 주장했다고 해요.”
 
  — ‘양해각서’가 나중에 열린 ‘통통 회담’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북한에 발목 잡힌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발목 잡혔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이 회담에 더 절실해했으니까요. 우리가 싱가포르에 갈 때 국군포로 송환 문제 등 상당한 분량의 훈령(訓令)을 가지고 갔습니다. 정상회담에 대한 조건이나 날짜, 시기도 있었고요. 북한도 정상회담에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싱가포르에 왔는데 중간에 결렬이 된 거죠. 우리도 그렇지만 그 당시 북한도 군부 등 강경파의 입김이 강했나 봅니다. 중간에 정리하는 차원에서 나온 게 양해각서입니다.”
 
  — 통일부의 입장은 조금 다르던데요.
 
  “제가 통일부에 설명해 줬습니다.”
 
  — 김양건이 ‘합의문 갖고 가지 않으면 돌아가서 죽는다’는 식으로 읍소했다던데요.
 
  “그건 과장입니다.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 MB는 왜 장관님을 대북 밀사로 발탁한 겁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저를 통해서 (북측이) 연락이 왔기 때문이죠. 조문단 관련해서요.”
 
  — 그때 중간다리 역할을 한 게 혹시 기업인 B씨입니까.
 
  “아닙니다. 조문단이 왔을 때에는 그 사람이 주도한 게 아닙니다. 전혀 다른 루트를 통했습니다. 과거 정부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 과거 정부 인사라면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남북 접촉을 했던 전직 직원(공무원을 의미하는 듯-기자 주)이라고 해 둡시다.”
 
 
  “B씨가 조총련과 사업했는지 몰랐다”
 
  — B씨는 과거 조총련과 사업도 벌였던데 대북 접촉에 적합한 인물이었다고 보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B씨는 김대중 대통령 때 여러 역할을 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그 사람(B씨)이 싱가포르 접촉을 주선한 게 아니고 메신저로 몇 번 심부름한 정도입니다. 부분적으로 메신저 역할한 건 맞습니다. 죽 우리 쪽에서 활동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 임 장관께서 《월간조선》 등과 한창 인터뷰를 하던 2013년 초, B씨도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 접촉 전체를 배후에서 추진한 것처럼 주장하던데요.
 
  “그렇지 않아요. 남북 관계가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자기가 주도한다는 식으로 얘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B씨는 북한에 대한 내부 정보를 크로스체크하기 위해 활용한 겁니다. B씨만큼 북한 쪽에 지속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 사람은 현 정부에서도 남북 현안과 관련한 역할을 맡을 겁니다.”
 
  — MB 취임식을 앞두고 북측이 취임식 참석 의사를 장관님을 통해 타진했다는 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때 연변과기대를 통해 북한이 그런 의사를 전해 왔습니다. 근데 (북한은) 결국 불참했죠.”
 
  남북 정상회담을 상정한 채 이뤄진 싱가포르 접촉은 결과적으로 무위(無爲)로 끝났다. 임태희 전 장관은 싱가포르 접촉의 의미와 성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했지만, 대차대조표는 냉정할 수밖에 없다. 전직 청와대 관계자는 싱가포르 접촉의 교훈을 다음과 같은 요지로 정리했다.
 
 
  ‘싱가포르 접촉’이 文 정부에 주는 敎訓
 
  〈첫째, 북한의 본질을 모른 채 접근한 남북 대화는 반드시 실패로 귀결된다. 대북 지원을 매개로 한 대화는 특히 더 위험하다. 두 번째는 남북 대화의 주도권을 비선이 쥐면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 비선 라인의 수장(首長)이 자칫 그릇된 판단을 내릴 경우, 대화 자체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른 견제장치가 작동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역대 정부 중 남북 대화에 가장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문재인 정부도 상기 교훈 중에서 참고할 만한 게 있지 않을까. 문(文) 정부는 남북 문제에 정권의 명운(命運)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8년 한 해에만 모두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게 이를 방증한다.
 
  이와 함께 ‘북한의 비핵화가 선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정상회담’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목소리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북한의 비핵화는 남북 대화의 기본 전제다. 문 정부도 이를 인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간의 합의나 정부 측의 입장을 면밀히 살피면 대북 유화(對北宥和) 쪽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에 대한 사과가 뒤따르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됐다.
 
  전직 청와대 관계자는 “싱가포르 접촉을 전후(前後)해 남북 관계가 100도쯤 바뀌었다면, 지금은 180도에 다다랐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싱가포르 접촉 때에는 그나마 MB 정부 내에 다양한 의견이 있어 대북 정책에 있어 견제와 균형이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현 정부 관료들은 대북 정책에 있어 이견을 허용치 않는 것 같아요. 거의 모든 의제가 북한 중심으로 흘러가잖아요. 이러다가 나라가 180도로 넘어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조회 : 1985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901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