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특집 | ‘民族’을 다시 생각한다

삼국통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3국 간에 민족의식은 없었다

글 : 박순교  역사 저술가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백제는 국제정세에 대한 무관심, 고구려는 내분으로 자멸… 신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100년 전쟁에서 승리
‌⊙ 고구려, 백제, 신라에 상대는 唐이나 倭와 같은 외세에 불과
‌⊙ 고려는 遼가 발해 멸망시키자 축하사절 보내… 고려·조선엔 대륙 수복 의지 없어

朴淳敎
1964년생. 경북대 사학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역사), 경북대 박사(사학) / 팩션(Faction) 작가, 경북대 인문학술원 연구원 / 저서 《김춘추의 집권과정 연구》 《역사 속 경북의 혁신 인물, 김춘추》 《김춘추는 왜 당나라와 손잡았을까》 《외교의 승부사, 김춘추》 등
태종무열왕 김춘추. 고구려, 唐, 일본을 넘나드는 외교활동을 통해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항상 7세기 신라 통일을 논하는 장(場)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신라가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同族)을 멸하였고, 그로 인해 대륙 상실의 불행한 역사가 점철되었으며, 사대(事大) 의식에 물들게 되었다는 깊은 한탄이 그것이다. 이른바, 1400년 전의 그 일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의 모든 불행과 좌절이 배태되었다는 비난 섞인 자조인 셈이다.
 
  약소국에다 반도국, 게다가 분단국가로 전락해 버린 지금, 쌓인 현실의 문제와 모순이 커질수록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과거의 고구려 영광에 기대어 자기만족을 얻으려거나,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점에 통한의 원망을 쏟아내어 비난하려는 흐름의 일단이 공존한다고 보인다. 이야말로 현재의 민족 정서에 함몰되어 과거를 재단(裁斷)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에 당시 동북아(東北亞) 정세는 과연 어떠했으며, 역사의 물줄기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사실의 진위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진지하게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백제의 멸망
 
  660년 음력 7월 18일, 신라와 당(唐)의 창칼에 700년 왕조 백제가 멸망했다. 백제 멸망은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사비성에 이른 지 8일, 의자왕이 웅진으로 몸을 피한 지 5일 만이었다. 백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 전격적으로 멸망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라의 김춘추(金春秋)는 648년 당을 방문하였고,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포함하여 당 태종과 군사 동맹을 의논하였다. 이로부터 따지면 백제 멸망은 12년 만의 일이었다. 이는 백제 멸망이 오랜 시간 준비를 거쳐 이루어졌고, 그간 신라와 당 사이 적잖은 변화 혹은 삐걱거림이 있었음을 함께 암시한다. 그만큼 백제 멸망은 오래전부터 기획된 일이었다. 김춘추가 당에서 돌아올 당시 고구려 수군의 급습을 받을 만큼 김춘추의 행보가 알려져 있었기에, 고구려는 물론이고 백제 역시 신라와 당의 동향을 십분 주시하고 유념할 필요가 있었다. 말 그대로, 백제는 왕조를 수호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660년 음력 5월 26일, 김춘추는 백제 친정(親征)에 나섰다. 당시 신라 친정군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총공세였던 것이 확실하다. 김유신(金庾信)을 주장(主將)으로 신라 5만의 군사는 음력 7월 9일 백제군과 황산벌에서 조우하였다. 서라벌을 떠난 지 43일 만이었다. 이처럼 대규모의 군세가 서라벌을 떠나 움직이는데도 백제의 수뇌부가 달포 가까이 신라의 동향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경계의 실패, 백제의 명징한 망조(亡兆)이자 국가의 위기관리시스템이 붕괴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황산벌 전투 이전 신라군을 제어하려는 백제의 여하한 움직임조차 포착되지 않는다. 당의 출병은 이보다 훨씬 빠른 660년 정월부터였다. 만일 백제가 김춘추의 행적에 주목하여 나당(羅唐) 동맹의 본질을 꿰뚫고, 세작(細作)을 신라와 당의 요로에 포진했다면 바다 건너 당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을 리 없었고, 적을 방어할 전수(戰守)의 방도를 놓고서도 갈팡질팡하진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자멸
 
  그로부터 8년 뒤 북방을 호령했던 고구려가 패망했다. 고구려 역시, 일견 백제 멸망의 연장선에서 신라와 당의 창칼하에 멸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구려 정복을 의논했던 당태종이 사망한 지 19년, 김춘추가 죽은 지 7년,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은 지 2년의 일이었다. 1세대의 시대가 저물고 2세대의 세상 속에서 고구려 멸망은 실행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고구려 멸망은 백제 멸망과는 또 다른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물들에 의해 이뤄진 역사의 산물이었다.
 
  그 중심에는 연개소문의 맏이 연남생(淵男生)이 있었다. 연개소문 사후(死後) 권력을 승계한 연남생이 일선 순시를 나간 사이, 두 동생 남건(男建), 남산(男産)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남생을 살해하는 데 실패하자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였다. 형제 사이의 권력 다툼이 돌이킬 수 없는 골육상쟁(骨肉相爭)으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형제는 아비 연개소문 무덤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외적을 막아야 할 군사들을 동원해 권력과 사사로운 복수심을 위해 싸웠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조카들의 싸움을 조정해야 할 삼촌으로서의 역할은 포기한 채 신라로 투항했다. 이후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군대의 길잡이를 자처했다. 고구려의 적은, 고구려가 되고 말았다.
 
  죽을힘을 다해 외적을 막아도 부족한 상황에, 고구려의 최고 집권자가 자기 나라를 공격하는 선봉으로 둔갑한 셈이었다. 철옹성처럼 뚫리지 않던 요하 방어선이 속수무책 무너졌다. 남생은 당나라 군사를 평양 도성까지 안내했다. 또 선봉의 역할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평양성을 지키던 신성과 내통해 성문까지 열게 했다. 고구려인이 적군을 인도했고, 고구려인의 손에 의해 성문이 열렸다. 그것도 당대 집권자의 아들이자 한때 고구려를 이끌던 인물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주역이 됐다. 이른바, 고구려의 국운이 다했음을 알리는 망조였다. 수십만의 강병이 굳건한들 내부 분열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다. 고구려의 영광은 찬란했을지 모르나 마지막은 비참했다. 고구려는 스스로 멸망했다.
 
 
  100년 전쟁
 
  신라는 국가 발전 단계를 놓고 보면, 삼국 중 가장 후진국이었다. 신라는 동서 1000리, 남북 2000리라 칭했으나, 남과 동으로는 드넓은 망망대해가 가로막고, 북서로는 소백산맥이 버티고 있어 고요와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 나라였다. 중국과 관계를 맺으려 해도 육지에는 고구려가, 바다에는 백제가 가로막고 있었다. 남쪽의 왜 역시 신라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사면초가의 한계 상황에서 신라는 새로운 활로가 절실했다.
 
  백제가 4세기, 고구려가 5세기 각기 전성기를 구가했건만, 신라는 여전히 야만과 미몽의 소국(小國)에 머물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에 저항하여 백제와 신라는 연합했다. 6세기 두 나라는 연합하여 왕위계승 분쟁에 시달리던 고구려의 배후를 쳤다. 나아가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은 백제와의 맹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한강 일대를 독차지했으며, 반발하던 백제 성왕(聖王)까지 살해했다. 분노한 고구려와 백제는, 이후 7세기 자신들의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100년에 걸쳐 신라를 거세게 압박했다. 이른바, ‘한국판 10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한편 대륙에서는 369년간의 위·진(魏·晉) 남북조(南北朝) 분열 시대가 마감되고 수·당(隋·唐)의 통일 왕조가 들어섰다. 통일된 중국의 힘은 고구려를 압박하며 국제전의 양상으로 가열됐다. 삼국과 왜(倭)를 포함하여 동북아 정세는 혼미를 거듭했다. 신라의 통일을 전후한 7세기는 이렇듯 병사의 흘린 피로 방패가 뜨는 난세였다.
 
  660년 음력 7월, 5만의 신라 주력군은 백제로 내달렸다. 계백은 황산벌을 사지(死地)로 삼아 고슴도치와 올빼미처럼 진영을 꾸렸다. 계백은 싸우기에 앞서 군사들에게 죽음을 맹세하였다. 비장한 죽음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계백의 목소리를 들은 군사들 모두 찬란했던 백제의 영화(榮華)가 종지부를 찍고, 그 마지막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는 서글픈 감회에 젖어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드디어 힘을 다해 죽기로 싸우니, 김유신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나아가 네 번 싸웠으나 모두 이기지 못했다. 계백이 거느린 5000 군사가 신라 5만의 군사를 4번 싸워 모두 이긴 데서 보듯 백제는 일당백(一當百)의 전투력을 갖춘 군사강국이었다.
 
  기록상 백제는 고구려보다 8만여 호(戶)나 많게 나타날 만큼 대국이었다. 만일 백제 전역(全域)의 200여 성이 당 군사의 노략질 이후에 저항을 시작하는 대신 백제의 마지막 전투에서 합심하였다면, 또 험로(險路)를 지키고 시간을 벌며 지방 세력과 심지어는 고구려와 왜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국면을 전환했더라면, 백제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충성심으로 무장된 우수한 군인, 풍부한 물산, 천혜의 방어 조건을 갖추고서도, 왕과 신하, 지방 세력의 이반(離反)과 분열, 공(公)과 사(私)의 경중을 헤아리지 못한 결과, 백제는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化身 김유신.
  황산벌 전장에서, 신라의 희생은 컸다. 좌장군 품일(品日), 우장군 김흠춘(金欽春)은 자신의 아들들을 통일 전쟁의 희생양으로 내놓았다.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은 아비들의 요구로 사지(死地)로 나아갔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전황을 반전(反轉)시켰다.
 
  지금껏 화랑 관창만 얘기되었을 뿐, 아비의 아픔과 희생, 지도층의 헌신은 부각되지 못했다. 그들은 화랑이기에 앞서, 엄연히 신라의 귀족, 장군의 아들이었다. 지도층이 아들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은 위국헌신(爲國獻身)의 행위, 곧 ‘노블레스 오블리주’야말로 신라의 승인(勝因)이었다. 신라를 통일의 길목으로 이끈 원동력은 화랑정신(한 집단의 역할)이 아니라 지도층의 솔선수범, 희생과 헌신이었다. 김유신은 아들 원술(元述)이 당과의 싸움에서 불가항력으로 패하고 돌아오자 아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원술을 상종하지 않았다. 김유신의 부인 지소 역시, 나중 당과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 설욕한 이후조차 원술을 끝내 만나지 않았다. 일가의 이 서릿발 같은 정신, ‘살아 있는 염치(廉恥)’야말로 당시 신라를 이끌던 지도층의 ‘시대정신’이었다. 만일 현재 한국의 지도층이 통일 당시 신라의 지도층을 흉내 낼 수 있다면, 통일은 단석(旦夕·아침과 저녁)에 이뤄질 것이다.
 
  구진천(仇珍川)은 나당전쟁 당시 신라의 목노(木弩) 기술자였다. 나당전쟁이 개시된 669년, 구진천은 당에 끌려갔다. 그는 신라를 위해 1000보의 사거리를 지닌 목노의 원천 기술을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지킨 위대한 선택의 대가로, 신라는 당과의 원거리 전투에서 우세를 점했다.
 
  혹자는 신라의 승인을 당의 기마병에 맞선 장창(長槍)의 활용, 당의 배후를 견제한 유목 민족의 대두와 발흥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작은 일부일 뿐, 신라가 생존한 원동력은 정신의 힘이었다. 적의 위협이 상존함에도 사방을 내달린 김춘추의 외교의 힘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안온한 궁정의 뜨락이 아닌 춥고 고단한 사방의 세계를 향해 줄달음쳤다. 목숨을 걸고 적정을 훑었던 저돌적이고 살아 있는 이런 외교의 모습은 불행히도 이전, 이후의 우리 역사에서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문무왕 법민(文武王 法敏)이 자신의 뼈를 동해에 뿌리게 했던 희대(稀代)의 사건 역시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신라는 지도층에서 남녀노소, 일반 백성, 장인(匠人)에 이르기까지 외교와 군사, 정신의 총화로 뭉쳐져 하나였다.
 
 
  3국 간에 민족의식은 없었다
 
태종무열왕릉비. 삼국통일을 달성한 신라인들의 웅혼한 기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위정자(爲政者)가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한 고구려와 백제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절치부심(切齒腐心), 나라의 에너지를 모아야 할 부흥운동마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내분으로 자멸했다. 웅혼한 기상이 사라진 고구려와 백제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멸망했다. 멸망 이전은 물론 멸망 이후조차, 고구려와 백제는 통일을 이룰 능력, 자각이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통일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신채호를 비롯한 많은 이가 신라의 외세 동원을 비난한다. 고구려가 통일의 주인공이 되지 못함으로써 대륙의 땅이 상실당했다고도 한다. 주체와 독립의 기상이 사라지고 사대와 타율의 틀에 갇혔다고도 한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래로 이 땅엔 여러 나라가 나타났다. 이들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지만, 이후 단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었다. 한 민족이란 혈육의 정이 없었다. 삼국이 서로를 한 민족이라 여겼다면 피비린내 나는 살벌한 전쟁의 역사가 800년이나 계속되었을 리 없다. 삼국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기치 아래, 서로를 타도의 대상이나 잠시 이용할 대상으로만 여겼다. 삼국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중국이나 왜와도 손잡았다. 백제는 수나라에 하루빨리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는 갑옷과 식량을 보내기까지 했다. 고구려도 둘로 나눠진 중국의 북조, 남조와 모두 손잡은 적이 있었다.
 
  신라 역시 백제, 고구려, 당을 다 같은 외세로 보았다. 신라가 이후 수년간 당과 창칼을 겨누며 싸웠듯. 신라와 당은 맹목적 사대관계가 아니었다. 신라에 있어 당은 또 다른 적을 멸하기 위해 끌어들일 수단과 대상이었다. 이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이이제이(以夷制夷)의 병법과 부합된다. 생존이 목적인 상황에서 진행된 대국과의 교류는, 사대가 아닌 효율적 전략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당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존심을 지켰다면, 신라는 그 대신 멸망당했을 것이다.
 
 
  발해를 외면한 고려
 
  민족·대륙의 문제는 고려·조선과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고려가 고구려를 이었다고 칭했으나(918년), 북쪽에는 실제 고구려를 이은 발해가 따로 있었다. 왕건(王建)이 고구려를 내세우고 평양을 중시한 것은 호족(豪族)의 입김이 닿지 않는 지역을 확보하고, 일대의 민심을 얻기 위한 정치적 수사(修辭)였다. 발해 멸망을 앞둔 시점,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인 발해의 구원 요청에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대신 고려는 목숨 걸고 국경을 지켜야 할 발해의 장군들을 속속 받아들였다. 고려는 발해의 저항 정신을 허물고 멸망으로 몰고 간, 또 하나의 숨은 주역이었다. 거란의 역사책 《요사(遼史)》에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을 때, 왕건이 거란에 축하 사절을 보냈다고 적혀 있다. 발해가 멸망한 지 불과 보름 만이었다.
 
  왕건은 처음 ‘계림을 잡고 압록으로 진출’할 것을 표방했다. 압록강 너머의 땅은 왕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왕건의 ‘훈요(訓要) 10조’에도 대륙의 실지(失地)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다. 왕건이 거란의 낙타를 굶겨 죽인 사건(942년) 역시 거란 강경책을 표방했던 중국 후진(後晋)의 2대 제왕 출제(出帝·942~946)의 즉위와 거란 공세에 맞물려 나타난 것이었다. 당시는 발해가 멸망하고 16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후진의 곽인우(郭仁遇)가 간파했듯, 당시의 고려에는 거란의 동쪽 변방을 흔들어 세력을 분산시키거나, 거란의 한쪽 귀퉁이를 깨트릴 힘이 없었다.
 
  고려 왕조에서 권력에 탐닉한 임금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발해를 추상(追想)한 이는 찾을 수 없다. 고구려 멸망 이후 불과 30년의 시간만이 주어진 신라와 달리(제2의 고구려, 발해가 건국), 발해 멸망 이후 고려는 466년이나 더 존속했다. 발해를 거두어 대륙의 땅을 보전할 책임은 고려에 있었다. 이제 그 오랜 시간 단 한 줄의 발해 역사조차 고려조에서 남기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조선 역시 문약(文弱)에 빠져 여러 차례 국난(國難)을 겪었다. 반도의 땅조차 지키지 못해 강토는 남김없이 유린당했고, 수백만의 백성이 비운에 죽어갔다. 전란이라도 일어나면 조선 왕들은 생령(生靈·백성)의 안위는 돌아보지 않은 채, 강도(江島)로, 산성(남한)으로, 반도의 귀퉁이(의주)로, 남의 나라 공관(러시아)으로 아녀자처럼 숨어다니며, 웃음거리가 되었다. 간혹 북벌(北伐)의 주창이 있었으나 말뿐인 표방이었다. 고구려 땅을 지배하거나 차지했던 요·금(金)·원(元)·명(明)·청(淸)에 맞서, 강토를 찾고 지켜낼 웅혼한 기상과 민족의식은 고려·조선에선 안개처럼 희미했다.
 
 
  신라 통일을 보는 눈
 
울산 대왕암.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이가 신라 통일을 비난한다. 이후의 역사에서 나라는 쪼개지고 약해졌으며 반도의 정신에 갇혔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멸망의 원인은 그들에게 있었다. 또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던들 고려와 조선 왕조가 그 땅을 지켜낼 수 없었음이 자명하다. 민족·대륙의 개념은 고려·조선에서도 없었다. 이를 1400년 전 당시 신라인이 가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자 궤변이다. 삼국은 대내외 상황, 실익에 따라 무궁하게 변화하였다. 왜 신라가 이겼고 백제·고구려는 진 것인지, 왜 적정(敵情)을 훑고 목숨을 내던진 신라의 희생과 헌신의 정신이 우리 역사에서 면면히 계승되지 못했는지, 현재 그러한 정신을 우리가 갖추고 있는지, 자성(自省)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역사를 귀감으로 삼는 진정한 태도라 여겨진다. 삼국의 백성들은 다 같이 피 흘리며 희생했으나, 신라는 남고 나머지는 사라졌다. 그 이유는 지도층에 있다.
 
  신라 통일은 동맹국 백제를 공격한 진흥왕에서 비롯되어, 그 정점에는 사해(四海)를 주유한 김춘추가 있었고, 동맹국 당마저 격멸한 문무왕을 거치며, 100년에 걸쳐 마무리된 신라 생존 투쟁의 과정이었다. 또 왜(倭)·중국까지 망라된 동북아 국제 전쟁의 차원이기도 했다. 마침내 백제·고구려·왜·당과 모두 겨루면서, 이 모든 동북아 전쟁 최종 승자의 영예는 신라의 차지가 되었다. 통일은 진흥왕의 결단, 김춘추의 외교, 문무왕의 전쟁, 3박자가 어우러져 100년에 걸쳐 빚어낸 눈물의 금자탑(金字塔)이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오늘날 한민족(韓民族)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 나라의 흥망에는 필히 그 까닭이 있다. 5000의 군사가 제 몸을 버리고, 계백이 처자(妻子)를 아끼지 않는 의열(義烈)을 보였어도 백제는 망하였다. 수십만 강병이 굳건했어도 고구려는 망하였다. 260년 뒤, 국망여망(國亡與亡)의 기상을 잃자 신라도 사라졌다.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짓는 8할은 지도층의 역할, 몸가짐이다. 잘못된 지도자의 등장은 백성이 불행의 늪에 빠지는 데에서 끝나는 것만 아니라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비단 이것이 어찌 과거만의 일이겠는가.⊙
조회 : 4186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1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민족의 반역자 척결    (2018-09-27)     수정   삭제 찬성 : 4   반대 : 8
민족의 반역자를 처단하라

201810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 조선뉴스프레스 선정 초청작가 특별기획전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