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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70주년

建國의 조력자들1

臨政 요인부터 전향 공산주의자까지 다양한 인사들 참여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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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영·신익희·이범석·지청천 등 臨政 요인들, 대한민국에 法統 더해
⊙ 포용력으로 우익을 하나로 묶어낸 ‘건국의 어머니’ 김성수
⊙ 조병옥·장택상은 경찰 맡아 좌익과 투쟁
⊙ 일제하 ‘인권변호사’ 김병로·이인은 초대 대법원장과 법무부 장관으로 司法의 기초 다져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이승만(왼쪽)과 초대 내각의 면면을 알리는 선전물.
  미국의 국부(國父)는 조지 워싱턴이다. 대륙군을 이끌고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독립전쟁을 이끌었고, 연방헌법을 제정한 필라델피아제헌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초대(初代) 대통령으로 국기(國基)를 다진 그가 미국의 국부라는 데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을 조지 워싱턴 혼자서 세운 것은 아니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대륙회의의 의원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했으며, 연방헌법 제정에 참여하고, 건국 이후 정치의 주역으로 활동한 인물들이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제2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제3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제4대 대통령), 알렉산더 해밀턴(초대 재무장관)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일러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국부는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다. 구한말(舊韓末) 이래 평생을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해방 후에는 좌익 세력과 맞서 싸우고 미국과 수많은 갈등을 빚으면서 대한민국을 세웠다. 농지개혁을 단행했고, 교육을 진흥했으며, 문맹을 타파했다. 6·25 때는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했다. 마땅히 ‘국부’로 존숭되어야 하지만, 건국 초기의 시행착오들과 자유당의 실정(失政)과 부패, 부정선거 때문에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다. 좌익은 기세등등하고 미국은 한반도에서 발을 뺄 궁리만 하는 상황에서 국내 민족세력(우익세력)을 결집하고 미국을 잡아끌어 대한민국을 세운 것은 전적으로 이승만의 공로였다. 대한민국은 그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아무리 거인이라고 해도 그 혼자서 한 나라를 세울 수는 없었다. 그를 도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臨政세력에서 左派까지 다양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자들이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제2대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이범석(李範奭), 초대 무임소 장관 지청천(池靑天)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참여 덕분에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둘째, 국내 민족주의 세력이다. 한국민주당 당수 김성수(金性洙),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초대 법무부 장관 이인(李仁), 미군정(美軍政)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미군정 수도관구경찰청장이자 초대 외무부 장관 장택상(張澤相), 조선민주당 부당수 이윤영(李允榮), 초대 주미대사 장면(張勉)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해방공간에서 국내 정치기반이 전무(全無)했던 이승만의 확고한 지지기반이 되어주었으며, 일관되게 반공(反共)과 대한민국 건국 지지의 입장을 고수했다.
 
  셋째, 이승만의 측근 그룹이다. 윤치영(尹致暎·초대 내무부 장관), 임영신(任永信·초대 상공부 장관), 임병직(林炳稷·제2대 외무부 장관), 이승만의 홍보 고문 로버트 올리버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비서로서 이승만의 대미(對美) 외교를 지원했다.
 
  넷째, 좌파 출신 인사들이다.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曺奉岩), 초대 기획처장 이순탁(李順鐸) 등을 꼽을 수 있다. 초대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도 넓게 보면 이 부류에 넣을 수 있다. 이들은 새 정부에 ‘진보적’ 색깔을 더해주었다.
 
  다섯째,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있다. 국학자(國學者) 정인보(鄭寅普·초대 감찰위원장), 철학자 안호상(安浩相) 등이다.
 
  물론 이들을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에 비견하기는 어렵다. 조지 워싱턴, ‘건국의 아버지들’과 비교해 보면 이들은 이승만과 나이, 경력, 지적(知的) 능력, 건국 과정에서의 역할 등에서 현저히 차이가 났다. 하지만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승만의 건국사업은 훨씬 더 고단했을 것이다. 이들은 ‘건국의 아버지들’까지는 아니더라도 ‘건국의 조력자들’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日帝)하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했던 분들도 대한민국 건국에 결과적으로 이바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소앙(趙素昻)·안재홍(安在鴻)처럼 건국 후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거나 정부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결국 대한민국을 인정하게 된 분들도 있다. 여기서는 우선 해방 후 적극적으로 건국 과정에 기여하거나 초대 정부에 참여해 족적을 남긴 분들만을 ‘건국의 조력자들’로 소개하기로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系〉
 
  李始榮
  臨政의 法統을 대한민국에 接木시킨 初代 부통령
 
   이시영(李始榮·1868~1953)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원로(元老)였다. 대한제국 말기 평남 관찰사, 중추원 칙임의관(議官), 한성재판소장, 법무 민사국장, 고등법원 판사 등을 지냈다. 형인 이회영·안창호·이동녕·전덕기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단체인 신민회에 관계했다.
 
  1910년 망국을 당하자 형 이회영 등 7형제와 함께 현재 화폐 가치로 수백억 원이 넘는 가산(家産)을 처분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후일 무장독립운동가들의 산실이 된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는 이들 형제가 만든 것이었다.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에 참여, 임시헌장 기초위원, 법무총장을 맡았다. 이후 그는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재무부장, 국무위원 등으로 임시정부를 지켰다.
 
  이시영은 임시정부 시절은 물론 해방 후에도 줄곧 김구(金九)와 정치노선을 같이했으나, 1947년 9월 26일 돌연 임시정부 국무위원·임시의정원 의원 사임을 선언, 김구와 갈라섰다. 이듬해 1월에는 “우리의 주권을 세워놓고 동포 구제와 군정(軍政·미군정) 철폐의 긴급성을 전제 삼아 재남(在南) 2000만 대중의 멸절(滅絶)을 만회함에 급선 착수하는 것이 현실에 적합한 조처라고 본다”는 성명서를 발표, 5·10총선을 지지했다. 6월 10일에는 평양에서 돌아온 김구와 만나 “남북협상 추진이니 강화니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10번 되풀이해야 호응할 사람이 몇이나 되며, 군소(群小)단체의 잡음과 학생들의 선동 등등, 이 뉘가 조종한 바는 아니라 할지라도 은연중 지목하는 것이 뉘에게로 가는 것인지를 모르는가?”라고 야단쳤다. 그는 김구에게는 “마음을 돌려 반쪽 정부나마 세우는 데 협력”할 것을, 이승만에게는 “양보심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시영은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통령 이승만은 이시영을 ‘성재장(省齋丈·성재는 이시영의 호)’ ‘형님’이라며 예우했다. 하지만 헌법상 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는 “헌법상 보좌의 임(任)밖에 없으니 의사를 표시하여도 효과가 없다. 국무위원에게는 책임자에게만 끊임없이 의견을 제공하였으나 반향 여하는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결국 이시영은 1951년 5월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양민학살 사건 등 이승만 정부의 비정(秕政)을 비판하면서 “시위소찬(尸位素餐)하느니 이 자리를 물러가서 국민 앞에 깨끗이 사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에는 김성수·장면 등과 함께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구국선언을 하려 했으나 정부의 방해로 실패했다. 제2대 대선에 야당인 민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이승만·조봉암에 이어 3위에 그쳤다. 1963년 4월 피란 수도 부산에서 별세했다. 대종교(大倧敎) 원로원장을 지냈다. 경희대학교는 그가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후 세운 신흥대학의 후신이다.
 
 
  申翼熙
  한국 야당의 뿌리가 된 초대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1894~1956)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장(少壯)세력의 핵심 인물로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분이었다.
 
  대한제국 시절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3·1운동 후인 1919년 3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해 4월 임시정부에 참가, 임시헌장 기초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무차장으로 국내와의 연락조직인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했다. 1920년 12월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자 국무원 비서장으로 그를 보필했다. 이후 한국혁명당,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위동맹,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하면서 무장독립투쟁노선을 지지했다. 1944년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이 되어 충칭 내 독립운동가 가족 및 교민들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했다.
 
  1945년 12월 임정 요인 2진으로 귀국한 신익희는 임정 내무부장 자격으로 임정 하부조직인 정치공작대를 만들었다. 신익희가 만들어 준 신임장을 소지한 정치공작대 대원들은 이듬해 2월 백의사 요원들과 함께 김일성·최용건·김책 등 북한 요인들의 암살을 시도했다. 신익희는 다른 한편 일본 총독부에서 일하던 한국인 중견 관리들을 모아 행정연구회를 만들어 건국 후에 필요한 헌법 등을 연구하게 했다.
 
  신익희가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임정 내 일부 인사들은 “이제 천하는 신익희의 천하이지, 백범의 천하는 벌써 옛말”이라면서 그와 김구 사이를 이간질했다. 임정은 정치공작대를 해체하도록 했다.
 
  신익희는 1945년 12월 반탁(反託)운동 과정에서 미군정청에서 근무하는 관리·경찰 등에게 임정 지시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포고문을 냈다.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로 간주, 신익희를 미군 CIC본부로 연행해 조사했다. 한편 좌익세력이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贊託)으로 돌변하는 것을 보며, 그는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첫 국무회의에 참석한 초대 내각의 각료들. 제일 안쪽에 이승만 대통령(가운데)과 이범석 총리(왼쪽)의 모습이 보인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신익희는 임정과 멀어지는 한편,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이 힘을 행사하는 국제 정세에 눈을 뜨게 됐고, 반공주의자가 됐다. 19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발언 후 이에 대해 지지 의사를 피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어 신익희는 정치공작대를 이끌고 이승만 진영에 가담했다. 이 무렵 건국사업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그가 세운 학교가 오늘날의 국민대학교이다.
 
  1948년 5·10총선거를 앞두고 신익희는 “민주건설의 전도를 위하여 축하할 일로 우리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제1단계”라며 환영했다. 5·10총선에서 그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에서 출마, 무투표 당선됐다. 제헌의회에서는 부의장을 맡았고,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에는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신익희는 입법부를 맡아야 한다며 그를 총리 후보에서 제외했다. 실제로 신익희는 이승만의 뒤를 이어 8월 4일 제헌국회의장이 됐다. 이후 그는 제헌국회 1·2기, 제2대 국회 1·2기 등 네 차례에 걸쳐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949년 신익희는 자신이 이끌던 대한국민당과 김성수의 한민당을 합당, 민주국민당을 만들어 위원장이 됐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 후에는 호헌동지회를 만들어 반독재투쟁을 벌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음해 민주당을 창당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선거를 열흘 앞둔 그해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급서(急逝)했다.
 
 
  李範奭
  초대 국무총리·국방장관이 된 청산리전투의 영웅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이범석(李範奭·1900~1972)은 10대 때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한 혁명가였다. 1915년 독립운동에 투신할 청년학생들을 물색 중이던 여운형의 권고로 중국으로 망명, 이듬해 윈난성 군벌 탕지야오(唐繼堯)가 세운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에 입학했다. 운남강무당 기병과를 수석 졸업하고 기병장교로 임관했으나, 3·1운동 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됐다. 1920년 4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로 옮겨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 활약했다.
 
  만주 지역의 여러 독립군 부대가 소련으로 이동해 창설한 대한독립군단이 소련 정부의 배신으로 와해된 후에는 만주로 돌아와 1928년 군벌 마잔산(馬占山) 휘하에서 중국군 소장(少將) 계급을 받고 그의 참모가 됐다. 이후에도 한동안 중국군 장교로 일하다가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에 참여, 광복군 참모장,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국 OSS와 합작해 국내로 침투시킬 특수요원들을 훈련시켰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1946년 6월 귀국한 이범석은 이승만이 이끌던 민족통일총본부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그해 10월에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창설했다. ‘국가지상 민족지상(國家至上 民族至上)’을 모토로 한 족청은 비판자들로부터는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때 이범석과 인연을 맺은 각계 지식인, 정치인(김정례 전 보건사회부 장관 등), 군인(박병권 전 국방부 장관 등)들은 후일 ‘족청계’라고 칭해졌다.
 
  정부 수립 과정에서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됐던 이윤영이 낙마한 후, 이승만은 이범석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그를 추천한 사람은 이인, 장택상, 미군정 장관 대리 찰스 헬믹 등이었다고 한다. 이윤영에 이어 이범석마저 낙마시키기가 부담스러웠던 김성수는 12명의 각료 가운데 6자리를 할애해 주는 것을 조건으로 총리 인준을 약속했다.
 
  총리가 된 후 기자회견에서 이범석은 “나는 본래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가 민족의 현실을 떠나서 개인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는 피동적이었지만 금후로는 주동적 입장에서 오직 나의 충성, 나의 정력, 나의 시간, 나의 생명을 이 국가 민족을 위하여 다만 하루라도 바치고자 한다”고 말했다.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이범석은 국방부에 정훈국과 대북(對北)정보공작을 담당하는 제4국을 설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정훈장교를 소련식 정치장교로 오해한 미 군사 고문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1950년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후 잠시 주중국(대만)대사를 지내다가 6·25가 터지자 급거 귀국했다.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에는 내무부 장관으로 이승만을 위해 봉사했다. 이 때문에 한때 정권의 2인자로 인식되었으나,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과 그를 ‘과격파’로 보는 미국의 견제로 1953년 자유당에서 축출됐다. 1960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됐고, 1960년대 중반에는 국민의당 등 야당에서 활동했다.
 
 
  池靑天
  제헌의회에서 ‘대한민국’ 국호 역설한 독립군의 대부
 
   지청천(池靑天·1888~1957)도 이범석과 더불어 광복군 출신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 대한민국의 법통을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지청천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1909년 무관학교가 문을 닫은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일찍부터 기회가 오면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있다가, 1919년 3·1운동 후 일본군 대위 신분으로 만주로 망명했다. 1920년 서로군정서 사령관으로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대한독립군의 홍범도 등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이끌었다. 1921년 만주의 여러 독립군 세력과 함께 소련으로 건너가 고려혁명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자유시참변 등을 겪으면서 소련에 의해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후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등으로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했다. 193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이 됐고,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사령관을 맡았다.
 
  해방 후 지청천은 중국에 머물면서 만주군·일본군 출신을 포함한 중국 내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10만명의 국군을 편성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1947년 미국 방문 후 중국에 들른 이승만의 권유로 그해 4월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낸 ‘건군계획서’를 통해 국방경비대 내에 좌익세력이 많아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1년 반 후 여순반란으로 실증됐다.
 
  1947년 9월 지청천은 건군의 전(前) 단계로 난립해 있는 청년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대동청년단을 조직했다. 미군정도 지청천을 통해 우익의 힘, 특히 청년단체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대동청년단을 탐지하기 위해 간첩들을 내려보낼 정도로 북한도 대동청년단을 주시했다.
 
  유엔 관리하의 총선거가 결정되자 대동청년단은 1948년 3월 “이번 선거로 국회를 구성하고 중앙정부를 수립함은 남북통일의 본격적 운동을 전개하는 제1단계”라며 이를 지지했다. 그 바람에 지청천은 같은 임정 요인 출신으로 남북협상을 추진하던 김구와 멀어지게 됐다. 지청천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했다가 쓴맛을 보았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남북협상이 실패할 것이며, 이 때문에 김구가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경우 이승만을 견제할 만한 지도자가 없게 될 것을 걱정했다.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5·10총선거 때 지청천은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 대동청년단은 정당이 아닌 청년단체였음에도 12명의 당선자를 냈다.
 
  제헌의회에서 지청천은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새 공화국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강력히 주장, 관철시켰다.
 
  초대 내각 조각 시 지청천은 국방부 장관으로 유력시됐으나, 결국 무임소 장관에 그쳤다. 지청천은 “대국적 견지에서 국내외의 위신을 보지(保持)하고 우리 국가 민족의 크나큰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급무(急務)”라면서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는 과정이 끝나면 사임한다’는 조건으로 입각했다. 지청천은 약속대로 그해 9월 말 무임소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지청천은 이후 야당인 민주국민당 결성에 참여,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국회의원으로서 지청천은 병역법을 발의하는 등 국방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육군 소위이던 아들 정계는 1948년 10월 여순반란 진압작전 중 전사했다.
 
 
  〈국내 민족운동계〉
 
  金性洙
  ‘건국의 어머니’
 
   〈내가 귀국하면서부터 이분들이 나를 위하여서 개인적으로나 조직을 통해서 분투 노력해 준 것은 지금도 내가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군정(軍政)시대 미인(美人·미국인)들이 미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서 우리를 권하여서 공산당과 합작하여 연립정부를 세워야 한다느니, 혹은 신탁통치를 받아야 된다고들 할 때, 임시정부 측의 여러분은 거의 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합동을 할 적에, 김공(金公)이 나를 도와서 지지하여 준 것과 공개적으로 구호한 것은 그 당시 우리 입장을 백절불굴(百折不屈)하고 나가는 자리에 막대한 힘을 주었던 것이다.…〉
 
  1955년 김성수(金性洙·1891~1955)가 서거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그를 추도하며 한 말이다. 이미 정치적으로는 결별한 사이였지만, 이 말 속에는 건국 과정에서의 김성수의 업적이 그대로 녹아 있다.
 
  김성수는 전북 고창의 대지주 김경중의 아들로 태어났다(3세 때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입적). 김성수의 집안은 당대 최고의 지주 중 하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성수는 이런 재력을 바탕으로 1915년에는 중앙학원, 1917년에는 경성직뉴를 인수했다. 1919년에는 경성방직주식회사,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설립했다. 김성수는 일제시대 내내 민족의 경제적·문화적 실력을 배양하는 데 중점을 둔 ‘실력양성론자’였다. 이는 일제의 통치질서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에게는 ‘친일’의 혐의가 따라다녔고, 결국은 건국훈장을 사후(死後) 60여 년이 지나서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해방을 앞두고 여운형(呂運亨)이 일제가 제안한 권력이양을 받아들여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자 김성수는 이렇게 말했다. “밥상은 몽양이 차려놓고 그걸 먹을 사람은 공산당이야.”
 
  김성수는 일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열심히 돕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해방 후 국내 민족주의자들이 한국민주당을 창당했을 때에도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던 송진우(宋鎭禹)를 내세웠다. 하지만 1945년 12월 한민당 수석총무(당수)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한민당 수뇌부는 강권하다시피 김성수를 수석총무로 옹립했다. 한민당 수석총무로 있는 동안 그는 한민당과 임정계열 인사들이 주축인 한국독립당 등 범(汎)우익정당의 대동단결을 추진했으나 성사를 보지는 못했다.
 
5·10총선 포스터. ‘총선거로 독립문은 열린다’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김성수의 한국민주당은 일찍부터 이승만의 건국노선을 지지했다.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1948년 1월 입국한 유엔한국위원단 관계자들과 만난 김성수는 “우리는 지금 외력(外力)에 의하여 사지(四肢)를 결박당하고 있으니, 반신(半身)만이라도 속박에서 벗어나 전신(全身)의 자유스러운 활동을 하여야 할 것이고, 더구나 조선의 독립은 유엔총회에서 절대다수로 가결된 것이니 소수(少數) 국가의 보이콧으로 남북을 통한 총선거를 못 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유엔한국위원회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거부한 국가가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거부하자, 김성수는 반발하는 한민당 정치인들을 설득해 대통령중심제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모시지 않으면 독립이 늦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한 혼란이 올 것이 분명한데, 지금 우리의 내외정세는 그런 혼란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한민당은 대통령제를 받는 대신 김성수가 국무총리를 맡게 되기를 희망했으나, 이승만은 이북 출신인 무명(無名)의 이윤영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한민당이 이윤영을 국회 표결로 거부하자 이승만은 이범석을 지명했다. 이승만은 “총리보다 더 중요한 자리”라며 김성수에게 재무부 장관 자리를 제안했다. 흔히 이를 두고 이승만이 김성수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평생을 보낸 이승만으로서는 국무총리보다 재무부 장관을 정말로 더 중요한 자리로 생각했다는 시각도 있다.
 
  결국 한민당은 1948년 8월 8일 “신정부에 대하여 시시비비주의(是是非非主義)로 임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정부로 하여금 화급한 민생을 해결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도록 책선적(責善的) 편달과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민주국민당-민주당-신민당 등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정통야당이 여기서 탄생했다.
 
  1951년 5월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한 후 김성수는 국회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시영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재임 중 국정에서 소외되었다. 결국 그는 1년 후 부산정치파동의 와중에 부통령직을 던져버렸다.
 
  이후 김성수는 야당세력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는 조봉암 같은 혁신세력들까지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조병옥 등 보수세력의 반발로 좌절했다. 노심초사하던 그는 1955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7개월 후 민주당이 창당됐다.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은 생전에 김성수를 두고 “인촌(仁村·김성수의 호) 선생의 덕망이 아니었다면, 해방 후 국내 우익 인사들이 하나로 모여 건국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인촌 선생은 ‘건국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분이었다”고 말했다.
 
 
  趙炳玉
  건국으로 가는 길을 닦은 미군정청 경무부장
 
   “내가 미군정의 책임자로서 한민족(韓民族)의 개인의 행복과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었다면 이것은 오로지 군정부의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 박사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조 박사의 공로가 아니었던들 한국의 독립은 쉽사리 전취하지 못하였으리라 생각한다.”
 
  1948년 8월 24일 송별연에서 미군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존 하지 중장이 한 말이다. 하지 장군의 말처럼 조병옥(趙炳玉·1894~1960)은 미군정기 치안 총수로서 좌익을 소탕하고 치안을 확보하여 건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조병옥은 독립운동가 조인원(조택원)의 아들이다. 조인원은 3·1운동 때 유관순 및 그의 아버지 유중권과 함께 충남 천안 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조병옥은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 배재전문학교를 나왔는데, 이때의 스승이 독립운동가 김규식이었다. 당시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승만의 영향을 받아 미국 유학을 결심, 1925년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9년 4월 서재필이 개최한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는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귀국 후에 조병옥은 5년간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5년 신간회에 참여, 재정부장·총무부장을 맡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에는 일제를 비판하는 민중대회를 주도했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2년에는 조만식과 함께 경영난에 시달리던 《조선일보》 인수에 참여, 전무와 영업국장을 지냈다. 1937년에는 수양동지회 사건으로 체포됐다. 일제 말에는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조를 지켰다.
 
  해방 후 한민당에 참여, 총무 중 한 명으로 있다가 송진우의 추천으로 미군정 경무부장이 됐다. 그는 좌파가 수립한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해산을 미군정에 건의해 성사시켰고, 좌익청년단체인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도 해산시켰다. 미군정은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서북청년회 해산을 요구했으나, 경찰만으로는 치안을 유지하는 데 역부족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반대했다. 조선정판사 사건, 학병동맹 사건, 10·1대구폭동 사건 등을 처리했으며, 4·3사건 때에도 강경진압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조병옥은 일제시대의 경찰관들을 등용, ‘친일파 옹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Pro-Jap(professional pro japanese·직업적인 친일파)과 생계를 위해 경찰관을 직업으로 택한 Pro-job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건국 후 반민특위법을 제정할 때에도 그는 “특별법 제정을 하되, 신중을 기하여 극소수 친일파만을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8년 4월 은사인 김규식이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차 북행(北行)하려 하자 이를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5·10총선을 앞두고는 보조경찰로 30만명의 향보단(鄕保團)을 만들어 좌익의 선거방해 책동을 저지했다.
 
  정부 수립에 즈음해 이승만은 그에게 외무부 장관, 문교부 장관을 제안했다가, 정부특사로 내보냈다. 그해 10월 파리유엔총회에서 소련 대표 안드레이 비신스키가 그를 보고 “저기 싱만 리(이승만)의 개가 앉아 있다!”고 외치자 “저기 스탈린의 개가 짖고 있다!”고 받아쳤다.
 
  6·25 직후인 1950년 7월 내무부 장관 당시 함락 위기에 처한 대구를 떠나지 않고 공무원과 시민들을 격려, 대구 방어에 크게 이바지했다.
 
  1951년 5월 거창양민 사건에 항의해 사임한 후, 조병옥은 야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 최고위원이 됐으며 당내 구파(舊派)의 리더로 활약했다. 야당을 하면서도 이승만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접지 않았고, 이기붕 등 자유당 인사들과도 교유를 계속했다. 호방한 성품으로 풍류를 즐겼다. 이승만은 조병옥의 애국심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못마땅해하고 걱정했다. 1960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으나, 신병(身病)으로 미국 월터리드육군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張澤相
  수도경찰청장으로 좌익 소탕한 초대 외무부 장관
 
   장택상(張澤相·1893~1969)은 경북 칠곡의 갑부이자 조선 말기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낸 장승원의 아들이다(박정희 대통령의 아버지 박성빈은 장택상의 형 장직상의 소작농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영국 에든버러대학에 입학, 경제학을 전공했다. 영국 유학 시절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에 온 김규식을 도왔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청구구락부 사건 등에 연루되어 구속 조사를 받았다. 일제 말기 총독부로부터 여러 차례 친일단체 가입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고향에 은거했다.
 
  해방 후 그가 미군정 시기에 경찰에 투신하게 된 것은 미군정 경기도 고문단장 김동성의 추천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송진우는 “창랑(滄浪·장택상의 호)은 외교를 맡을 사람인데, 경기도 경찰부장을 하라니 웬 말이요”라며 김동성을 타박했다.
 
  장택상도 처음에는 이를 마다했으나, 1945년 12월 27일 송진우가 암살되자 생각을 바꾸었다.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장에 취임한 그는 이후 제1관구경찰청장, 제1경무총감부장 겸 수도관구경찰청장으로 서울·경기·강원 지역의 치안을 책임졌다.
 
  장택상은 취임 일주일 만에 좌익무장집단인 학병동맹 회원 600여 명을 체포하고, 학병동맹을 해산시켰다. 1946년 5월에는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을 적발했다. 정판사 사건은 해방 후 정국을 주도하던 조선공산당의 평판을 일거에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장택상은 수도관구경찰청장직을 수행하면서 친일경찰을 중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해방 공간에서 좌익세력을 단호하게 소탕해서 1948년 5·10총선이 평온하게 치러지게 하고 대한민국 건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때문에 좌익으로부터 10차례나 테러 위협을 당했다.
 
  건국 후 초대 외무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나, 이승만 대통령과의 인사 갈등으로 4개월 만에 사임했다. 이후 국회부의장을 거쳐 1952년 제3대 국무총리가 되어 발췌개헌안 통과를 주도했다. 이 시절 그의 비서관이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다. 1959년 진보당 사건 때에는 제2대 국회 때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조봉암 구명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제2공화국 시절에는 폐가(廢家)나 다름없게 된 자유당 당수를 맡아 당의 간판을 지켰다. 이승만 환국(還國)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제3공화국 시절에는 야당의 원로로 활동했다. 그의 맏딸 장병민과 그 남편은 6·25 때 월북(越北)했다.
 
 
  金炳魯
  사법부의 독립 위해 분투한 초대 대법원장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1888~1964)는 법조인의 사표(師表)로 지금까지도 존경받고 있는 분이다.
 
  10대 때 최익현・김동신의 의병부대에 가담해 의병전쟁에 참여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일본 니혼대학, 메이지대학, 주오대학 등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귀국 후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판사로 임용됐으나, 1년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1923년 허헌・김용무・김태영・이인 등 항일변호사들과 함께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창설했다. 형사변호공동연구회는 사실상 독립운동가들을 전문적으로 변호하는 단체였다. 우리나라 ‘인권변호사’의 효시였던 셈이다. 김상옥 의사 사건, 김시현 등의 제2차 의열단 사건,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 사건 등 100여 건이 넘는 항일 사건을 변호했다. 허헌・이인과 함께 일제시대 3대 항일변호사로 꼽힌다.
 
  김병로는 좌우합작단체인 신간회가 만들어지자 이에 참여, 1929년 중앙집행위원 겸 회계장으로 선임됐다. 이듬해에는 집행위원장이 됐다. 이 무렵 전북 지역에서 발생한 소작쟁의 사건들의 변호를 맡으면서 토지개혁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변호사 직무가 정지되자 1932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낙향했다. 이후 13년간 송진우・정인보・홍명희 등 지사들과 교유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해방 후 김병로는 좌익세력이 주도하던 조선인민공화국 사법부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한국민주당에 참여했으나, 한민당이 토지개혁에 소극적이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 쪽으로 기우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1946년 탈당했다. 미군정이 수립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미군정청 사법부장 등을 지내는 한편,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에 동조했다. 하지만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가 소련과 북한의 거부로 어렵게 되자, 대한민국 건국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돌렸다.
 
  건국 후 김병로는 초대 대법원장이 됐다. 일제시대 때 줄곧 항일변호사로 함께 활동했던 이인이 그를 강력히 추천했다. 이승만은 ‘김규식 사람’이라고 껄끄러워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9년 동안 김병로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는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심받는다면 그 자체가 최대의 명예손상이 되는 것이며, 한 사람의 명예실추는 법관 전체의 명예실추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번은 이승만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에게 “헌법은 안녕하시냐?”고 물은 적이 있다. 장관이 무슨 소린지 몰라 의아해하자, 이승만은 “법원에 헌법이 한 분 계시지 않느냐?”고 했다.
 
  김병로는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했고, 청렴과 절약을 강조했다. 6・25 때에는 피란을 가면서 “정부가 피란 다니는 마당에 집사람을 관용차에 태우고 다닐 수 없다”며 부인을 전남 담양의 친정집으로 보냈다. 부인은 그 후 공비들에게 살해됐다.
 
  1957년 퇴임 후에는 자유당 정권의 독재화와 사법부 장악 시도에 맞서 싸웠다.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시에는 이를 위헌・위법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1963년 민정(民政) 이양을 앞두고는 군정(軍政) 연장 반대와 야당 통합을 위해 진력했다.
 
 
  李仁
  일제하 인권변호사 출신 초대 법무부 장관
 
   이인(李仁·1896~1979) 초대 법무부 장관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과 함께 일제시대 때 지조를 지켰던 대표적인 법조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18년 일본 니혼대학 고등전공과와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 정과(正科)를 졸업했고, 1923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의열단 사건, 정의부 군사위원장 오동진 사건, 광주학생의거, 수양동우회 사건 관계자들을 변호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조선발명학회, 조선과학보급회를 창립해 국민들에게 과학정신을 보급하는 일에 앞장섰고, 임영신과 함께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한글 연구에도 관심이 많아 조선어사전편찬후원회에 참여, 조선어학회를 지원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됐으며, 2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후일 그는 효자동 자택을 판 돈 3000만원을 한글학회 건립기금으로 희사했고, 죽기 전에는 논현동 자택을 팔아 전액 한글학회에 기부하도록 유언했다.
 
  해방 후 이인은 1945년 8월 말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10월 미군정의 수석대법관 겸 특별범죄심사위원장이 되면서 당을 떠났다. 이후 미군정하에서 대법원장 서리, 검찰총장 등을 지냈다.
 
  1946년 조선정판사 사건이 터지자 이인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좌익세력에 대한 엄정한 사법처리를 요구했다. 이인은 “현하의 치안 확보와 국내 안정은 한국의 독립정부 수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므로 치안교란의 근원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상의 자유를 내세우며 하지가 망설이자 이인은 “자유가 민주주의의 요체나 국헌과 치안을 문란케 하고 국가를 파괴하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검찰총장으로서 이인은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관구경찰청장의 좌익 소탕을 일관되게 뒷받침했다.
 
  이인은 이승만과 한민당 모두와 가까웠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미국 망명길에 일본에 들른 이승만의 강연을 들은 후 늘 이승만을 존숭해 왔다.
 
1963년 1월 3일 야권 통합을 위해 모인 야당 지도자들. 좌로부터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이인(초대 법무장관), 윤보선(제4대 대통령), 전진한(초대 사회부 장관).
  이런 위치를 활용해 이인은 이윤영 총리 후보가 낙마한 후 이범석을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 김병로를 대법원장으로 추천한 사람도 이인이었다.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후에는 미군정 시기 좌익과 싸우면서 발생한 살상행위들 때문에 미군정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은 김두한의 사면을 이승만에게 건의, 실현시켰다. 난립해 있던 청년단체들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도록 이승만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측근 임영신 상공부 장관의 독직 사건이 일어나자 이의 엄정한 처리를 주장하다가 이승만과 갈등을 빚어 1949년 6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7월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장이 되어 반민특위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1960년 4·19가 일어나자 김병로·서상일 등 재야 정치인 80여 명과 함께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제3공화국 시절에는 야당 단일화 운동에 참여 민정당 최고위원, 국민의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한일굴욕외교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다.
 
 
  張勉
  유엔의 승인 얻어낸 건국 외교의 주역
 
   5·16으로 무너진 제2공화국의 총리를 지낸 장면(張勉·1899~1966)은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미국 메리놀신학교와 뉴욕맨해튼가톨릭대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맨해튼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장면 박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 명예박사 학위 덕분이었다. 귀국 후에는 가톨릭에서 세운 동성상업학교 교장, 계성초등학교 교장 등을 맡아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친일강연을 하는 한편 창씨개명에도 응했다 하여 후일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친일은 가톨릭 교계의 요구에 따라 교계를 위한 것이었으며 적극적인 친일행위는 하지 않았다는 옹호도 있다. 1942년에 계성초등학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나 해방이 될 때까지 교계 일에만 주력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내고 싶어했던 장면이 해방 후 정계로 나오게 된 것도 가톨릭 교계의 요구 탓이 컸다. 1946년 2월 이승만·김구가 반탁투쟁을 위해 만든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가톨릭 대표로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의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등을 지냈다. 과도입법의원 의원을 지내면서 그는 국립서울대학교 설치안(국대안)과 공창 폐지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1948년 5·10총선 때에는 서울 종로을(乙) 선거구에서 출마, 당선됐다.
 
  건국 후에는 제3차 유엔총회(1948년 12월) 수석대표로 임명돼 프랑스 파리로 파견됐다. 많은 외국인이 코리아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 그는 은사인 패트릭 번 신부를 비롯한 가톨릭계 인사들의 추천장을 무기로 대한민국 승인 외교를 벌였다. 그는 총회 연설에서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한 바 있는 한국 정부가 곧 본인이 대표하는 대한민국 정부임을 재확인하고 우리 정부를 이 자리에서 공식으로 승인하는 동시에 모든 회원 국가가 또한 개별적으로도 승인하도록 권장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12월 12일 열린 회의에서 대한민국은 48대 6, 기권 1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
 
  이후 장면은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돼 미국으로 건너갔다. 6·25가 발발하자 미국 조야(朝野)에 한국에 대한 파병과 지원을 호소했다. 1951년 11월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4월 건강이 악화되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부산정치파동 때에는 이용문 장군 등이 미군의 양해 아래 쿠데타를 일으켜 장면을 옹립하려 했는데, 이때 실병(實兵) 지휘관으로 내정됐던 사람이 박정희 대령이었다.
 
  1955년 민주당의 창당에 참여, 신파(新派)의 지도자가 됐다. 1956년 부통령으로 당선됐으나, ‘야당 부통령’으로서 국정에서는 철저히 소외됐다. 1960년 4·19로 수립된 제2공화국에서 내각책임제하의 실권(實權) 국무총리가 됐으나, 9개월 만에 군부쿠데타로 실각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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