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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70주년

建國의 조력자들1

臨政 요인부터 전향 공산주의자까지 다양한 인사들 참여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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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영·신익희·이범석·지청천 등 臨政 요인들, 대한민국에 法統 더해
⊙ 포용력으로 우익을 하나로 묶어낸 ‘건국의 어머니’ 김성수
⊙ 조병옥·장택상은 경찰 맡아 좌익과 투쟁
⊙ 일제하 ‘인권변호사’ 김병로·이인은 초대 대법원장과 법무부 장관으로 司法의 기초 다져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이승만(왼쪽)과 초대 내각의 면면을 알리는 선전물.
  미국의 국부(國父)는 조지 워싱턴이다. 대륙군을 이끌고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독립전쟁을 이끌었고, 연방헌법을 제정한 필라델피아제헌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초대(初代) 대통령으로 국기(國基)를 다진 그가 미국의 국부라는 데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을 조지 워싱턴 혼자서 세운 것은 아니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대륙회의의 의원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했으며, 연방헌법 제정에 참여하고, 건국 이후 정치의 주역으로 활동한 인물들이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제2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제3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제4대 대통령), 알렉산더 해밀턴(초대 재무장관)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일러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국부는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다. 구한말(舊韓末) 이래 평생을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해방 후에는 좌익 세력과 맞서 싸우고 미국과 수많은 갈등을 빚으면서 대한민국을 세웠다. 농지개혁을 단행했고, 교육을 진흥했으며, 문맹을 타파했다. 6·25 때는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했다. 마땅히 ‘국부’로 존숭되어야 하지만, 건국 초기의 시행착오들과 자유당의 실정(失政)과 부패, 부정선거 때문에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다. 좌익은 기세등등하고 미국은 한반도에서 발을 뺄 궁리만 하는 상황에서 국내 민족세력(우익세력)을 결집하고 미국을 잡아끌어 대한민국을 세운 것은 전적으로 이승만의 공로였다. 대한민국은 그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아무리 거인이라고 해도 그 혼자서 한 나라를 세울 수는 없었다. 그를 도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臨政세력에서 左派까지 다양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자들이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제2대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이범석(李範奭), 초대 무임소 장관 지청천(池靑天)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참여 덕분에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둘째, 국내 민족주의 세력이다. 한국민주당 당수 김성수(金性洙),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초대 법무부 장관 이인(李仁), 미군정(美軍政)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미군정 수도관구경찰청장이자 초대 외무부 장관 장택상(張澤相), 조선민주당 부당수 이윤영(李允榮), 초대 주미대사 장면(張勉)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해방공간에서 국내 정치기반이 전무(全無)했던 이승만의 확고한 지지기반이 되어주었으며, 일관되게 반공(反共)과 대한민국 건국 지지의 입장을 고수했다.
 
  셋째, 이승만의 측근 그룹이다. 윤치영(尹致暎·초대 내무부 장관), 임영신(任永信·초대 상공부 장관), 임병직(林炳稷·제2대 외무부 장관), 이승만의 홍보 고문 로버트 올리버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비서로서 이승만의 대미(對美) 외교를 지원했다.
 
  넷째, 좌파 출신 인사들이다.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曺奉岩), 초대 기획처장 이순탁(李順鐸) 등을 꼽을 수 있다. 초대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도 넓게 보면 이 부류에 넣을 수 있다. 이들은 새 정부에 ‘진보적’ 색깔을 더해주었다.
 
  다섯째,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있다. 국학자(國學者) 정인보(鄭寅普·초대 감찰위원장), 철학자 안호상(安浩相) 등이다.
 
  물론 이들을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에 비견하기는 어렵다. 조지 워싱턴, ‘건국의 아버지들’과 비교해 보면 이들은 이승만과 나이, 경력, 지적(知的) 능력, 건국 과정에서의 역할 등에서 현저히 차이가 났다. 하지만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승만의 건국사업은 훨씬 더 고단했을 것이다. 이들은 ‘건국의 아버지들’까지는 아니더라도 ‘건국의 조력자들’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日帝)하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했던 분들도 대한민국 건국에 결과적으로 이바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소앙(趙素昻)·안재홍(安在鴻)처럼 건국 후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거나 정부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결국 대한민국을 인정하게 된 분들도 있다. 여기서는 우선 해방 후 적극적으로 건국 과정에 기여하거나 초대 정부에 참여해 족적을 남긴 분들만을 ‘건국의 조력자들’로 소개하기로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系〉
 
  李始榮
  臨政의 法統을 대한민국에 接木시킨 初代 부통령
 
   이시영(李始榮·1868~1953)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원로(元老)였다. 대한제국 말기 평남 관찰사, 중추원 칙임의관(議官), 한성재판소장, 법무 민사국장, 고등법원 판사 등을 지냈다. 형인 이회영·안창호·이동녕·전덕기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단체인 신민회에 관계했다.
 
  1910년 망국을 당하자 형 이회영 등 7형제와 함께 현재 화폐 가치로 수백억 원이 넘는 가산(家産)을 처분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후일 무장독립운동가들의 산실이 된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는 이들 형제가 만든 것이었다.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에 참여, 임시헌장 기초위원, 법무총장을 맡았다. 이후 그는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재무부장, 국무위원 등으로 임시정부를 지켰다.
 
  이시영은 임시정부 시절은 물론 해방 후에도 줄곧 김구(金九)와 정치노선을 같이했으나, 1947년 9월 26일 돌연 임시정부 국무위원·임시의정원 의원 사임을 선언, 김구와 갈라섰다. 이듬해 1월에는 “우리의 주권을 세워놓고 동포 구제와 군정(軍政·미군정) 철폐의 긴급성을 전제 삼아 재남(在南) 2000만 대중의 멸절(滅絶)을 만회함에 급선 착수하는 것이 현실에 적합한 조처라고 본다”는 성명서를 발표, 5·10총선을 지지했다. 6월 10일에는 평양에서 돌아온 김구와 만나 “남북협상 추진이니 강화니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10번 되풀이해야 호응할 사람이 몇이나 되며, 군소(群小)단체의 잡음과 학생들의 선동 등등, 이 뉘가 조종한 바는 아니라 할지라도 은연중 지목하는 것이 뉘에게로 가는 것인지를 모르는가?”라고 야단쳤다. 그는 김구에게는 “마음을 돌려 반쪽 정부나마 세우는 데 협력”할 것을, 이승만에게는 “양보심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시영은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통령 이승만은 이시영을 ‘성재장(省齋丈·성재는 이시영의 호)’ ‘형님’이라며 예우했다. 하지만 헌법상 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는 “헌법상 보좌의 임(任)밖에 없으니 의사를 표시하여도 효과가 없다. 국무위원에게는 책임자에게만 끊임없이 의견을 제공하였으나 반향 여하는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결국 이시영은 1951년 5월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양민학살 사건 등 이승만 정부의 비정(秕政)을 비판하면서 “시위소찬(尸位素餐)하느니 이 자리를 물러가서 국민 앞에 깨끗이 사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에는 김성수·장면 등과 함께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구국선언을 하려 했으나 정부의 방해로 실패했다. 제2대 대선에 야당인 민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이승만·조봉암에 이어 3위에 그쳤다. 1963년 4월 피란 수도 부산에서 별세했다. 대종교(大倧敎) 원로원장을 지냈다. 경희대학교는 그가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후 세운 신흥대학의 후신이다.
 
 
  申翼熙
  한국 야당의 뿌리가 된 초대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1894~1956)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장(少壯)세력의 핵심 인물로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분이었다.
 
  대한제국 시절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3·1운동 후인 1919년 3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해 4월 임시정부에 참가, 임시헌장 기초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무차장으로 국내와의 연락조직인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했다. 1920년 12월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자 국무원 비서장으로 그를 보필했다. 이후 한국혁명당,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위동맹,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하면서 무장독립투쟁노선을 지지했다. 1944년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이 되어 충칭 내 독립운동가 가족 및 교민들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했다.
 
  1945년 12월 임정 요인 2진으로 귀국한 신익희는 임정 내무부장 자격으로 임정 하부조직인 정치공작대를 만들었다. 신익희가 만들어 준 신임장을 소지한 정치공작대 대원들은 이듬해 2월 백의사 요원들과 함께 김일성·최용건·김책 등 북한 요인들의 암살을 시도했다. 신익희는 다른 한편 일본 총독부에서 일하던 한국인 중견 관리들을 모아 행정연구회를 만들어 건국 후에 필요한 헌법 등을 연구하게 했다.
 
  신익희가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임정 내 일부 인사들은 “이제 천하는 신익희의 천하이지, 백범의 천하는 벌써 옛말”이라면서 그와 김구 사이를 이간질했다. 임정은 정치공작대를 해체하도록 했다.
 
  신익희는 1945년 12월 반탁(反託)운동 과정에서 미군정청에서 근무하는 관리·경찰 등에게 임정 지시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포고문을 냈다.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로 간주, 신익희를 미군 CIC본부로 연행해 조사했다. 한편 좌익세력이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贊託)으로 돌변하는 것을 보며, 그는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첫 국무회의에 참석한 초대 내각의 각료들. 제일 안쪽에 이승만 대통령(가운데)과 이범석 총리(왼쪽)의 모습이 보인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신익희는 임정과 멀어지는 한편,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이 힘을 행사하는 국제 정세에 눈을 뜨게 됐고, 반공주의자가 됐다. 19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발언 후 이에 대해 지지 의사를 피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어 신익희는 정치공작대를 이끌고 이승만 진영에 가담했다. 이 무렵 건국사업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그가 세운 학교가 오늘날의 국민대학교이다.
 
  1948년 5·10총선거를 앞두고 신익희는 “민주건설의 전도를 위하여 축하할 일로 우리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제1단계”라며 환영했다. 5·10총선에서 그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에서 출마, 무투표 당선됐다. 제헌의회에서는 부의장을 맡았고,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에는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신익희는 입법부를 맡아야 한다며 그를 총리 후보에서 제외했다. 실제로 신익희는 이승만의 뒤를 이어 8월 4일 제헌국회의장이 됐다. 이후 그는 제헌국회 1·2기, 제2대 국회 1·2기 등 네 차례에 걸쳐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949년 신익희는 자신이 이끌던 대한국민당과 김성수의 한민당을 합당, 민주국민당을 만들어 위원장이 됐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 후에는 호헌동지회를 만들어 반독재투쟁을 벌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음해 민주당을 창당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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