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단독 입수

문재인의 ‘검찰 不信’ 담은 《사건으로 본 검찰사-2018》

문재인 대통령의 ‘검찰에 대한 생각’ 일단 엿볼 수 있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법무연수원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제작
⊙ 검찰의 치욕 담은 2002년 서울중앙지검 고문치사 사건 포함
⊙ 문재인 대통령, 전두환·노태우의 12·12 및 5·18 사건 불기소를 “검찰 권한을 남용”
⊙ 법무부 장관 지휘권·인권·정치 공안 등 12사건 포함
문재인 대통령이 작년 7월 25일 청와대에서 문무일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며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검찰 60년사의 주요 사건을 정리한 《사건으로 본 검찰사》가 최근 법무연수원에서 간행됐다. 문무일 검찰총장의 검찰개혁 일환으로 ‘검찰의 정체성 확립과 미래의 역할 정립’을 위해 쓰였다는 것이 검찰 측 설명이다. 책 형태로 볼 때 본격적인 서술이라기보다 검찰 내부용 토론자료집에 가깝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사건으로 본 검찰사》에는 검찰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건으로 본 검찰 망신사’이자 검찰 과거사에 대한 아픈 독백이다.
 
  검찰이 자랑할 만한 수사 성과나 업적 이야기는 없이, 권력과 기득권 지키기를 위해 존재하는 괴물 정치검찰의 모습을 184쪽에 걸쳐 담고 있다. 또 검찰 공안부에 대한 불신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1949년 발생한 임영신 상공부 장관 독직 사건 정도다.
 
  이 책에 언급된 사건은 모두 12가지다.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과 관련이 있는 ▲임영신 상공부 장관 독직 사건 ▲강정구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또 인권과 관련된 사건인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중앙지검 고문치사 사건이 다뤄졌다. 검찰의 치욕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대표적인 정치, 공안 사건인 ▲인혁당 사건과 ▲부산 미문화원 사건 ▲전두환·노태우 12·12 및 5·18 사건도 비중 있게 소개한다.
 
  기타 중요 사건으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이태원 살인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이 포함됐다.
 
  검찰은 《사건으로 본 검찰사》를 통해 당시 검찰이 어떻게 검찰권을 행사했는지, 당시 검사들이 어떤 수사를 했는지 따져 그 공과가 현재 검찰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다. 한 관계자는 “법무부, 대검 등 유관기관에 책자를 배포해 인식을 공유, 법무연수원 교육이나 토론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검찰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은…
 
검찰 법무연수원이 발행한 《사건으로 본 검찰사》.
  《사건으로 본 검찰사》에는 검찰을 불신하는 대통령의 속마음이 담겼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책에 실린 상당수 사건이 문재인 대통령과 김인회 인하대 교수가 공저(共著)한 《검찰을 생각한다》(2011년 11월 출간)에 꼭 집어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김인회는 노무현 정부 당시 대통령 자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기획추진단 간사로 일했고 이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상임운영위원을 역임한 인물이다.)
 
  예를 들어 《검찰을 생각한다》에는 전두환·노태우 12·12 및 5·18 사건 당시 검찰이 기소유예의 불기소 처분을 언급한 대목이 나오는데 문 대통령은 이 사건을 “검찰의 권한을 정치적으로 남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한다.
 
  〈… 검찰의 불기소 결정문은 마치 전두환과 노태우 등 피고인들을 사면하는 대통령의 특별성명처럼 보인다. 불기소 결정문 어디에도 법률적 판단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수준의 정치적 감각만이 보일 뿐이다. 이런 사례는 검찰의 권한을 정치적으로 남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법률가가 아닌 정치인의 감각으로 사건을 처리한 것이다. 검찰은 이미 정치화되어 사실상 정치를 하고 있다.…〉(p184, 《검찰을 생각한다》)
 
  또 2005년 발생한 법무부 장관의 강정구 교수 불구속 수사 지휘 사건에 대해서도 문 대통령은 ‘검찰의 기득권 지키기’로 본다. 이 사건은 강 교수가 2005년 7월 한 인터넷 매체에 한국전쟁을 후삼국 시대의 전쟁에 빗대어 “북한의 지도자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고 쓴 것이 발단이 됐다. 천정배 당시 법무장관은 강 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를 지시했는데 김종빈 검찰총장이 반발, 사표를 제출하면서 이 사건은 법무부와 검찰의 힘겨루기, 청와대와 검찰의 대결로 바뀌어 버렸다.
 
  문 대통령은 당시 검찰을 비판하며 “검찰이 지키고자 한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이었다”(p262, 《검찰을 생각한다》)고 했다. “정치권의 부당한 개입·간섭으로부터 검찰을 지킨다는 소극적인 의미의 정치적 중립을 검찰의 기득권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거부하는 적극적인 의미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조계 내부에선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당시 검찰 내부에선 ‘정권의 검찰 장악’ 차원으로 보는 기류가 드셌기 때문이다. 일선 검사들은 ‘검찰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이 사건을 보는 이가 적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법무장관을 통해 검찰수사에 직접 ‘개입’하려 한 것은 강정구 사건이 처음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의 첫 법무장관인 강금실 장관도 송두율 교수에 대한 검찰수사 때 ‘송 교수를 불구속하라’며 수사 지휘권 발동을 검토한 바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월간조선》은 《사건으로 본 검찰사》에 언급된 사건들을 관련 신문기사와 논란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임영신 상공부 장관 독직 사건
 
  이승만 대통령 시절인 1949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검찰이 구속하려 하자, 법무장관(이인)이 임 장관을 구속하지 못하도록 ‘구두(口頭) 지휘권’을 발동했다. 그러나 권승렬 검찰총장은 기소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했다.
 
  감찰위원회가 파악한 임 장관의 비위내용은 불법 선거자금 수수(149만원)와 뇌물수수, 향응제공 등 무거운 것이었다. 또 최대교 서울지검장 역시 대통령의 압력에도 임 장관을 법대로 처리하고 말았다. 그의 생각은 이랬다.
 
  “기소·불기소 결정은 검사의 고유권한으로 법무부 장관이 간여해선 안 된다.”
 
  당시 검찰은 정권의 하명(下命)을 거부할 수 있는 소신과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954년 조선의옥(造船疑獄) 사건 수사 때, 법무대신(법무장관)이 ‘집권당 실세를 체포하지 말라’고 검사총장(검찰총장)에게 최초로 지휘권을 발동했다가 검사총장이 “부당하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 야당과 비판 여론에 밀려 ‘요시다 내각’이 붕괴된 일이 있다.
 
  최대교는 이후 1955년 검찰을 떠났다가 60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서울고검장으로 복귀했다. 62년 정부에서 그를 고등고시 위원으로 임명하려 하자 자신의 아들이 응시원서를 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고시위원을 맡을 수 없다며 고사한 일화가 전해진다.(참고 《조선일보》 1992년 10월 22일 30면)
 
 
  강정구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강정구 교수가 2006년 5월 26일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유죄 선고를 받고 법원을 나섰다.
  천정배 법무장관은 2005년 10월 12일 오후 6시50분쯤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강정구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관련 수사 지휘서’를 보내, 강 교수에 대한 검찰의 구속수사 의견을 반려하고 “불구속 수사하라”는 지휘권을 발동했다.
 
  당시 강 교수는 “6·25전쟁은 통일전쟁” “맥아더 장군은 우리의 원수”라고 발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경찰 수사에 이은 검찰의 수사를 받아왔다.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은 ‘구속수사’ 입장인 검찰·경찰에 맞서 ‘불구속수사’나 ‘처벌 불가’를 주장해 온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김 총장이 구속수사 의지를 끝내 굽히지 않자 지휘권을 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선 검사들은 “장관의 부당한 정치적 개입에 대해 총장은 당연히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검찰 중립을 위해 만든 지휘권 발동 조항을 거꾸로 검찰 중립을 해치는 조항으로 악용하는, 개탄스런 일이 벌어졌다”며 강력 반발했다.
 
  이에 대한 문 대통령의 생각은 다르다. 《검찰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천 장관의 불구속 지휘는 검찰의 법무부 장관에 대한 보고 내용에 근거해 이뤄졌고, 장관이 새로운 근거를 마련해 불구속수사를 지휘한 것도 아니었다”고 했다.(참고 《조선일보》 2005년 10월 13일 자 A3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1986년 7월 17일 자 《조선일보》 사회면 11면. 검찰은 부천서 사건수사를 발표하며 “당시 성적 모욕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1986년 여름 서울대에 대자보가 나붙었다. ‘경찰이 T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만지면서 바지 지퍼를 내리고 옷을 벗겼다’…. 서울대 의류학과를 다니다 부천의 한 공장에 위장취업 한 여학생이 그해 6월 부천경찰서에 연행돼 경찰관에게 성고문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권양’으로만 알려진 여학생이 이 경찰을 형사고소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부천서 사건을 수사한 인천지검은 그해 7월 16일 성적 모욕행위 부분은 사실이 아니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문귀동(39) 경장의 옆 조사실에서 조사를 한 경찰관 김해성·권오성·박경천씨 등 동료 경찰관들이 날씨가 더워 문을 열어놓은 채 문 경장의 조사실 앞을 왔다 갔다 했으나 성적 폭행을 목격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한 점에 비추어 성적 모욕행위 부분은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그러나 문귀동의 폭언·폭행 부분은 “조사에 집착한 나머지 우발적으로 저지른 과오였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하면서 성실하게 근무했다는 여러 정상을 참작, 불구속 입건해 기소유예했다. 반면 위장취업을 위해 남의 주민등록증을 변조했다며 권양은 구속하고 말았다. 좌파 혁명을 위해 성(性)까지 도구화한 사건이라 여론전을 폈다.
 
  서동권 검찰총장은 그해 8월 국회 법사위가 부천서 사건 수사자료 제출을 요구하자 응하지 않았다. “과거 이철·장영자 사건 때도 검찰이 국회의 수사자료 제출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전례를 들었다.
 
  검찰은 경찰관을 기소도 하지 않고 묻어버리려 했지만 대법원이 나서면서 사건이 뒤집혔다. 대법원이 권양 변호인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특별검사가 임명됐으며 1989년 문귀동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공권력의 횡포와 부도덕성, 인권탄압의 실상을 폭로한 대표적인 사례가 됐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문 대통령은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정치권력과 검찰의 부도덕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라며 “검찰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사건 중 하나”라고 했다.(참고 《조선일보》 1986년 7월 17일 자 11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1987년 1월 15일 저녁 경찰청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카메라 플래시를 뒤로하고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종철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져… 1월 14일 오전 8시10분경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되었다. 10시51분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하고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박처원 치안감이 강 본부장의 말을 거들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세상은 들끓었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흘 뒤인 1월 19일에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무거운 얼굴로 다시 ‘진상’을 발표하기 위해 섰다.
 
  “박종철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 두 사람에게 물고문을 당했으며 그 도중에 ‘사고’로 사망했다. 지나친 공명심 때문에 두 경찰이 멋대로 벌인 일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고 몇 달 뒤 진실이 밝혀졌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는 5월 18일 광주항쟁 7주년 추도 미사가 열리던 명동성당에서 이렇게 폭탄선언을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축소·조작되었다. 지금 구속된 경찰관들은 종범에 불과하며 현장에는 상급자 세 사람(황정웅·반금곤·이정호)이 더 있었다.”
 
  불빛을 잃어 가던 박종철 사건이 다시 점화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수사팀을 교체하고 원점에서 재수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결국 5월 29일,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이 은폐와 축소 과정을 지휘했으며 처음 범인으로 구속된 두 경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대가로 1억원의 돈을 안겼다’는 검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검찰은 이미 오래전부터 축소·은폐 사실을 알았고 은폐에 가담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사건 재조사를 검찰에 맡길 수 없다. 공신력이 있는 대한변협이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박처원 치안감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구속됐다. 군사정부는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김성기 법무장관, 정호용 내무장관을 퇴진시키며 사태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서울지방검찰청 고문치사 사건
 
2002년 10월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발생한 ‘피의자 사망 사건’으로 11월 5일 이명재 검찰총장이 퇴임하자 검찰 관계자들이 침통해 하고 있다.
  2002년 11월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발생한 ‘피의자 사망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숨진 살인용의자 조천훈씨의 공범인 박모씨가 법원의 구속영장 실질심사 과정에서 외부로 알려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박씨는 “물고문과 구타로 인해 몇 차례 실신하기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윤락가인 속칭 파주 ‘용주골’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파주S파’ 조직원인 박씨는 두목 신모(수배 중)씨의 지시로 조씨(검찰 조사 중 사망), 최모(29·검찰 조사 중 도주)씨와 함께 지난 1998년 6월엔 같은 조직원이던 박모(32)씨, 1999년 10월엔 박씨 살인사건 폭로를 빌미로 3000만원을 요구한 이모(35)씨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됐었다.
 
  당시 검찰 수사관 홍모씨와 채모씨는 “물고문은 없었다”고 부인했고 검찰은 “현장 검증에서 물고문에 사용한 바가지와 수건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얼마 후 검찰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던 입장에서 180도 선회, 물고문 사실을 인정했다.
 
  검찰에 따르면, 2002년 10월 25일 밤 12시~26일 오전 1시 사이 특별조사실에서 10여 분간 물고문이 행해졌다. 수사관 홍·채씨는 박씨의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운 뒤 특조실 안 화장실 출입문 쪽으로 끌고 갔다. 상반신은 화장실 안쪽, 하반신은 화장실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반듯이 눕힌 뒤 직원 중 한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고 다른 한 명은 얼굴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바가지로 물을 부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김정길 법무부 장관과 이명재 검찰총장이 물러났고 주임 검사였던 홍경령 검사가 법정 구속됐다. 이 사건은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사건의 악몽을 떠올리기에 충분했고 고문수사 관행에 대한 검찰 비난이 쇄도했다. 한편으론 범죄자에 대한 인권보호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비화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을 생각한다》에서 “피의자가 검사 수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은 준사법기관이라고 주장하는 검찰 내부에서 고문이 자행되고 있었던 증거”라고 주장했다.(참고 《조선일보》 2002년 11월 9일 자 A1면)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1983년 8월 12일 자 《조선일보》 1면.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구속된 최기식 신부가 특별사면 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쯤 부산 용두산공원 뒤편 대청동에 위치한 부산 미국문화원이 화염에 휩싸였다. 대낮에 그것도 혈맹이요 맹방이라는 미국의 공관(公館)에서 벌어진 믿기지 않는 사건이었다. 방화범의 구호는 3가지였다. “미국은 물러가라!” “전두환은 살인마!” “북침준비 완료!”
 
  전두환 정권은 입이 떡 벌어졌다. 이북의 평양방송을 제외하고 누구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반미(反美) 구호에다 방화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됐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 이처럼 대담한 반미 투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주범 김현장(당시 32세)과 부산 고신대 4학년생이던 문부식(당시 23세)에겐 사형이 선고됐고, 김은숙(고신대)·최인순(부산대 약대)·이미옥(고신대 의대)·김지희(부산여대) 등에겐 중형이 내려졌다.
 
  사실 이 사건은 김현장도 모르게 사건이 터져 버렸다. 문부식이 김현장 몰래 단독 결행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 원주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도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곤욕을 치른다. 법원은 “성직자라 하여 초법규적 존재일 수 없다”고 했지만 성직자의 양심과 현행법과의 충돌이 사회적 이슈가 됐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위원장 김수환 추기경)는 “(검찰이) 최 신부를 방화의 배후인물 또는 좌경 의식화 교육의 주관자로 부각시켰다”고 반발하면서 “최 신부는 교회를 찾아와 보호를 받던 이의 자수를 주선했다”고 했다. 구속된 최 신부는 이듬해 8·15 특사로 풀려났다.
 
  김현장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반미는 미국의 그릇된 대한(對韓) 외교정책을 반대한 것이지 미국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며 “요즘 반미는 무조건 반미다. 그때 부르짖었던 반미에 책임감을 느낀다. ‘미국놈’이라 욕하면 애국자가 되는 풍조가 돼 버렸다.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린 소고기를 먹게 됐다며 국민을 혼란에 빠뜨린 이들 중에 책임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혀를 찼다.(참고 《월간조선》 2012년 5월호)
 
 
  전두환·노태우 12·12 및 5·18 사건
 
1994년 10월 29일 12·12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조준웅 당시 서울지검 1차장과 장윤석 부장검사(오른쪽).
  1994년 10월 검찰은 ‘12·12’ 관련자 38명에 대해 모두 불기소 처분을 결정하며 1년 4개월에 걸친 수사를 마무리했다. 12·12사태는 “군 명령체계를 무시한 채 병력을 동원, 군권을 무력 장악한 반란행위로 인정되지만 국가 지도층 인사로서 공적을 쌓은 정상을 참작해 형사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5·18 역시 공소권 없음의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전두환 등 피의자를 기소할 경우 재판 과정에서 과거사가 반복되고 법적 논쟁이 계속되어 국론분열과 대립양상을 재연, 불필요하게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검찰 측 입장이었다.
 
  검찰의 이런 입장에 각계 비난이 들끓었고 결국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해 12·12 및 5·18 사건의 재조사에 착수했다. 당시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 권한을 정치적으로 남용한 대표사례”라고 했다.
 
  그러나 12·12 및 5·18 사건 판결은 “정치적 재판이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전두환이 광주 민간인 학살의 원흉이라는데 강경진압,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5·18특별법과 관련한 수사·재판조차 계엄군의 투입과 작전지휘에 전두환이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는 상태다.
 
  5·18 사건에 대한 재판은 현재 진행형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을 증언한 조비오 신부(1938~2016)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기소 돼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재판은 광주지법 형사8단독 김호석 판사 심리로 진행되고 있다.
 
 
  인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은 1964년과 1974년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으로 인혁당을 지목하자, 검찰이 관련자들을 기소하고 법원도 연루자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한의 노선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 인사들을 포섭해 당 조직을 확장하려다 발각됐다”고 발표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피의자들이 검찰에서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한 뒤 일부 검사들이 기소를 거부하는 등 파문을 겪었다.
 
  1974년의 ‘제2차 인혁당 사건’은 유신반대 시위가 격화되던 도중 “민청학련이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의 조종을 받아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고 중정이 발표한 사건이다. 이해찬 전 총리, 유인태 전 의원 등 민청학련 연루자 253명이 구속됐고 재건위 관련자 23명 중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사형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18시간 만인 1975년 4월 9일 전격 집행됐다.
 
  2002년 노무현 정부 시절,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이 사건을 중정이 조작했다”고 했고, 국정원 과거사위도 2005년 “(박정희) 정부의 짜 맞추기와 과장이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2007년 서울중앙지법은 재심을 통해 사형당한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인혁당 관련자인 박범진 전 국회의원은 “1차 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1차 인혁당 사건은 저 자신의 체험으로 볼 때 실재했던 사건이었으나 정부 당국이 객관화하는 데 실패해서 조작 사건처럼 계속 논란이 됐다”며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때인 1963년 입당할 때 문서로 된 당의 강령과 규약을 직접 봤고 북한산에 올라가서 오른손을 들고 입당 선서도 했다”고 말했다. 또 “인혁당 강령은 ‘민족 자주적인 정권을 수립해 북한과의 협상으로 통일을 시도한다’는 내용이었다”며 “젊은 날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유혹에 빠졌던 일은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라고 했다.(참고 《조선일보》 2017년 8월 9일 자 A10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사건이 있었다. 시위는 확대됐고,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당시 26세)씨가 5월 8일 유서 2장을 남기고 서강대에서 분신해 숨졌다.
 
  김씨가 숨진 지 열흘 뒤 검찰은 “유서를 다른 사람이 썼다”고 했다. 전민련 총무부장인 강기훈씨가 썼다는 거였다. 명동성당에서 37일간 농성을 한 강씨는 검거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른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이다. 당시 1·2·3심은 유서가 강씨 필적이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에 따라 강씨가 유서를 대신 써준 것으로 결론짓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진실화해위’가 국과수에 유서 필적을 재감정한 결과, 유서의 필적이 강기훈이 아닌 김기설임을 확인해 재심을 권고했고 서울고등법원이 재심을 결정했다. 검찰이 불복해 항고했고 지난한 법정 투쟁 끝에 2015년 5월 최종 무죄 선고를 받았다.
 
  강씨와 가족은 국가 등을 상대로 31억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내 6억8600여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7부(재판장 김춘호)는 “국가와 1991년 필적 감정을 했던 국과수 문서실장 김모씨는 함께 강씨와 그 가족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참고 《조선일보》 2017년 7월 7일 자 A10면)
 
 
  이태원 살인 사건
 
2015년 9월 23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는 ‘이태원 살인 사건’의 범인인 아서 패터슨.
  대법원이 ‘이태원 살인 사건’의 진범 아서 패터슨에게 작년 1월 25일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1997년 사건이 발생한 지 꼭 20년 만이었다. 진범을 놓쳐버린 검찰의 실수로 진실이 규명되고 정의가 실현되는 데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사건은 1997년 4월 3일 서울 이태원의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벌어졌다. 여자친구를 기다리다 화장실에 들렀던 대학생 조중필(당시 23세)씨가 목과 가슴 등 9군데를 흉기에 찔려 쓰러졌다.
 
  현장에서 검거된 용의자는 둘이었다. 17세 동갑내기 아서 패터슨과 에드워드 리. 미군속의 자녀들이었던 둘은 서로 상대방이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초동수사를 맡았던 CID(미 육군 범죄수사대)는 패터슨을 범인으로 봤다. 그가 자책하는 것을 들었다는 친구의 진술도 있었고 범행에 사용한 칼, 그가 불태우려 한 피 묻은 셔츠도 발견됐다.
 
  그런데 검찰로 넘어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서울지검에서 이 사건을 수사한 박모 검사(현재 변호사)는 “흉기에 찔린 각도를 볼 때 키가 큰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부검의사의 소견에 집착했다. 에드워드 리는 키 180cm의 거구, 아서 패터슨은 키 172cm에 날렵한 체구였다. 박 검사는 에드워드 리가 176cm가량에 보통 체구였던 피해자 조중필씨를 위에서 누르듯 제압하며 흉기를 휘둘렀다고 결론지었다.
 
  1심과 2심은 검찰의 판단을 수용해 에드워드 리가 범인이라고 했지만 1998년 대법원은 “(리가 범인이라는) 패터슨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검찰이 손 놓고 있던 사이 출국 금지도 돼 있지 않았던 패터슨은 1999년 미국으로 도주해 버렸다. 그리고 16년 만인 2015년 9월 범죄인 인도 협약에 따라 한국으로 송환됐다.
 
  ‘이태원 살인 사건’의 피해자 유족들은 “검찰의 잘못된 초동수사로 20여 년 동안 진범이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참고 《조선일보》 2017년 1월 26일 자 A10면)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피살 사건은 2000년 8월 전북 익산시 약촌오거리에서 택시기사가 흉기에 찔려 사망한 사건이다. 경찰이 처음 잡은 용의자는 다방 배달원으로 일하던 16세 최모 군이었다. 확실한 유죄 증거 없이 구타로 얻은 자백이 유일한 증거였다. 경찰은 많은 무죄 증거를 묵살했다. 소년은 법정에서 10년형을 받았다.
 
  경찰이 진범을 붙잡은 건 3년 후였다. 범행 일체를 자백받은 경찰은 친구들의 확실한 증언도 확보했다. 경찰은 구속영장을 법원에 올려달라고 검찰에 요구했다. 진범이 이때 법정에 섰다면 최군의 고난은 3년 만에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진실규명보다 검찰의 잘못을 덮기에 급급했다. 이 사건에서 검찰은 수사지휘권만이 아니라 영장청구권까지 방기했다. 소년은 10년 후 만기 출소했다. 26세 때였다. 최씨는 출소 3년 만인 2013년 광주고법에 “경찰의 강압에 못 이겨 허위자백했다”고 재심을 청구,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작년 5월 대법원은 진범으로 잡힌 피의자 김모씨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참고 《조선일보》 2018년 3월 28일 자 A12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
 
2014년 12월 26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서 유우성씨에게 불리한 허위 증언을 한 탈북자와 검사 2명을 고소한 유우성씨가 고소인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하고 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은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중국 국적의 화교로 서울시 계약직 공무원이었던 유우성(본명 류자강)씨를 2013년 2월 검찰이 국내 탈북자 200여 명의 정보를 북한에 넘긴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하면서 불거졌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국정원이 유씨가 간첩이라며 증거로 제출한 중국 공안 당국의 문서가 ‘위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공안국 명의의 중국-북한 간 출입경 기록, 화룡시 공안국 명의의 출입경 기록 발급사실 회신 공문, 삼합 변방검사참 명의의 출입경 기록 정황 설명에 대한 회신 공문이 위조됐다는 것이었다. 검찰 수사력이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씨가 간첩이 맞다”고 했던 동생 유가려씨도 진술을 바꿨다. 결국 유우성씨는 2015년 10월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는 유씨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검찰 관계자는 “유씨 실체에 대한 공안당국의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지난 1월 법무부 인사에서 이상호 대전지검장도 상대적으로 한직인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전보됐다. 검찰 내 대표적 공안통인 이 검사장은 2013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때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으로 간첩 혐의를 받던 유씨를 구속기소 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가 보호해야 할 국민을 간첩으로 만들어 정권 유지에 활용하는 간첩 사건 조작은 가장 비열한 방법”이라고 했다.
 
  (참고 《조선일보》 2017년 12월 8일 자 A12면)⊙
조회 : 14191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807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