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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집권 한 달

문재인 인사 및 80년대 운동권 계보 정밀분석

“문재인 정부, 청와대 핵심 요직 전대협(全大協), 민청련 등 운동권 출신이 장악”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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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출신 아니면 명함 내밀기 어려운 시절이 돌아왔다

⊙ 전대협 출신만 5명(임종석 비서실장·신동호 연설비서관·백원우 민정비서관·한병도 정무비서관·
    유행렬 자치분권비서관실 행정관)
⊙ 문재인 정부 실세 3인방(윤건영 국정상황실장·송인배 제1부속실장·유송화 제2부속실장)
    모두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
⊙ 정치인 출신 장관 후보자 5명(김상곤·김부겸·김영춘·도종환·김현미) 학생운동에 앞장서
⊙ 전대협은 최초의 전국 단위 학생운동 조직 … 해체 후 한총련→한대련으로 이어져
⊙ 전대협 발족 전 대표적 운동권 조직은 민청련·전학련·삼민투위·민민투·자민투 등
1989년 6월 30일 전대협 주체로 한양대에서 열린 ‘모의평양축전’ 행사장에서 참가한 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지며 진압경찰에 맞서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노무현 정부 때는 운동권 출신이 아니면 명함도 내밀기 어려웠다. 당시 마흔 전후의 소장파였던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 운동권 인사들은 핵심 요직에 포진했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의 정치적 상속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오십을 넘긴 중년이 된 운동권 주역들을 중용하고 있다. 《월간조선》이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6월 14일까지 시행한 초대 청와대·내각·정부 요직 인사를 분석한 결과 67명(공무원 출신 제외) 중 절반에 가까운 32명이 운동권 출신(노동·시민 운동 등 포함, 운동권이란 명확한 증거 없는 경우 제외)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대협 출신
 
왼쪽부터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신동호 청와대 연설비서관, 백원우 청와대 민정비서관, 한병도 청와대 정무비서관, 유행렬 청와대 자치분권비서관실 행정관.
  임종석 비서실장은 전라남도 장흥 출신으로 한양대학교(86학번) 총학생회장이던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3기 의장을 맡아 ‘임수경 방북 사건’을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받아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3년 6개월 복역했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 피 수혈’ 방침에 따라 전대협 출신인 이인영·우상호 의원 등과 함께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그해 16대 총선에서 최연소(만 34세·서울 성동을)로 당선됐고, 17대 때 재선됐다. 그러나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선했고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 사무총장에 임명됐지만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 제기돼 불출마했다. 이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14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내면서 박원순 시장 측근으로 꼽혔다. 작년 4월 20대 총선에서 서울 은평을에 도전했지만 당내 경선에서 탈락한 뒤 ‘문재인 대통령 캠프’에 합류했다. 과거 전력 때문에 ‘운동권’ ‘주사파’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5월 10일 취임사, 5·18 기념사, 노무현 대통령 추도식 인사말, 그리고 현충일 추념사 등을 통해 지금까지의 틀을 넘어 ‘애국’ ‘산업화’ ‘통합’ 등을 강조하며 보수층에도 일정 부분 공감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문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한 신동호 연설비서관도 운동권 출신이다.
 
  임 비서실장 대학 1년 선배(한양대학교 국문학과 85학번)인 신 비서관의 영역은 정치가 아니라 ‘문화’였다. 당시 운동권 용어로 ‘문화 통일 일꾼’이었던 그는 전대협 문화국장을 지냈다. 1980년대 전대협 문화국은 ‘문화를 변혁의 도구’로 생각했던 이들의 집합소였다. 석사논문도 북한 문학이 주제였다. 2004년에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위원장으로 남북 저작권 교류 사업에 참여했다.
 
  백원우 민정비서관은 1988년 2기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지냈다. 88년 전대협 2기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했었다. 1985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85학번)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과 재야운동 등을 경험했고, 1994년 고 제정구 의원 비서관으로 정계와 인연을 맺었다.
 
  한병도 청와대 정무비서관은 원광대(86학번)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전북지역에서 전대협 활동을 했다. 전대협 3기 전북지역 조국통일위원장이었다.
 
 
  실세 3인방
 
1990년 국가보안법 등 위반사건에 대한 5차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가고 있는 전 전대협의장인 임종석 비서실장. 사진=조선일보
  유행렬 자치분권비서관실(청와대 정무수석실 산하) 행정관은 전대협 3기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충북대 총학생회장(82학번) 출신인 그는 1987년 6월항쟁 당시 충북 시위를 주도했다.
 
  1989년 11월 15일 자 《동아일보》에는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지명수배 중인 전대협의장 임종석 군이 14일 오전 9시 청주 충북대에 나타나 유행렬 충북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충북대학보사 기자 등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갖고 행방을 감췄다.〉
 
  요직에 진출하는 전대협 출신은 더욱 늘어날 수도 있다. 1987년 전대협 1기부의장이었던 우상호 민주당 의원 등 몇몇의 전대협 출신 정치인들의 입각 가능성이 점쳐지는 까닭이다.
 
  권력 세계에서 문고리 잡은 사람이 최고라는 개념에서 ‘실세’로 꼽히는 3인방(윤건영 국정상황실장, 송인배 제1 부속실장, 유송화 제2부속실장)도 모두 운동권 출신이다.
 
  윤건영 국정상황실장은 국민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을 지낸 윤 실장은 문 대통령의 19대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을 지냈다.
 
  송인배 제1부속실장은 부산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부산·울산지역 총학생협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부산참여연대 조직부장을 거쳐 199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유송화 제2부속실장 또한 1988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유 실장은 ‘8·15 남북청년 학생회담 성사투쟁’에 앞장섰다가 구속돼 5개월여 동안 복역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재야단체에서 일했던 그는 1992년 대통령 선거 이후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행정관의 운동권 경력
 
왼쪽부터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조국 민정수석, 김수현 사회수석, 하승창 사회혁신수석.
  문재인 정부 첫 인사 뒤 SNS에서 화제가 된 책자가 있다. 《21세기 한국의 희망 386리더》라는 제목의 책이다. 진보성향의 월간지 《말》지가 1999년 5월호에 낸 별책부록이다. 여기에 실린 인사 중 15명은 문재인 정부의 핵심 실세로 요직에 진출했다. 책은 윤영찬 국민소통수석비서관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학내 시위의 단골 멤버였지만 앞줄에 서지는 않았다.”
 
  1990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주로 정치부 기자로 활동한 윤 수석은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관련 특종 보도로 1995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민주당 출입 시절엔 당시 총재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차에 동승시켜 국회의원 공천 내용을 알려줄 정도로 동교동계 야권 인사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낙연 국무총리와는 《동아일보》 정치부에서 선후배로 손발을 맞췄다.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난 조국 민정수석은 1982년 혜광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받은 뒤 울산대 조교수로 재직 중이던 1993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 산하 ‘남한사회주의과학원’ 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개월간 구속 수감됐었다. 법원에서는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인권단체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는 그를 ‘올해의 양심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조 내정자는 이후 사면·복권돼 미국 UC버클리대 유학을 다녀왔고, 동국대 법대 조교수를 거쳐 2001년 말 서울대 법대 조교수로 임용됐다. 2000~2005년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부소장·소장으로 일했다.
 
  김수현 사회수석은 대학가의 낭만과 담을 쌓고 철거민들과 고락을 함께한 빈민 활동가였다. 서울대 도시공학과 4학년 재학 중이던 1983년부터 주거문제와 빈곤문제에 천착했다. 그는 서울 목동과 상계동 등 현재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에서 철거의 광풍과 맞서다 구속되기도 했다.
 
  김 수석의 지인은 “1980년대와 90년대, 서울의 목동, 사당동, 상계동, 오금동 등 지금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은 철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며 “비정한 개발논리 앞에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들 곁에는 김 수석이 항상 있었다”고 했다.
 
  서울 출신인 하승창 사회혁신수석은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다가 1990년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삼민동맹) 사건으로 구속됐었다. 이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함께하는 시민행동’ 등의 시민단체에서 활동했다.
 
  황인성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사무처장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1974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사형 7명을 포함해 민청학련 관련자 180여 명이 사법처리된 사건, 민청학련은 1972년 10월 유신반대에 나서 1974년 결성된 전국 학생조직)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운동권 출신이다. 경남 사천 출신으로 진주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고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노영민 주중 대사의 대학시절은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의혈청년의 모습이었다. 연세대 경영학과(76학번)에 입학한 노 대사는 연세대 구국 선언서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죄명은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다.
 
  그는 서대문구치소와 홍성교도소 등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출 거부 옥중투쟁을 벌이다가 추가 기소되기도 했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 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성수동 작은 전기업체 노동자로 취업해 현장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노 대사는 청주지역에서 청주시민회(현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의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 시민단체 활동을 이어 갔다. 그가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정권교체 민주개혁 충북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으면서다. 충북 청주 출신의 3선 의원이다. 지난해 총선에선 아마추어 시인으로 냈던 시집 강매 논란이 불거지자 불출마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82학번인 정태호 정책기획비서관(정책실장 직속)은 대학 4학년 때인 지난 1985년 미 문화원 점거사건 당시 ‘광주사태 토론회’ 개최를 둘러싼 미 대사관 쪽과 서울대 학생회 간의 협상대표로 참가했다. 같은 해 9월 ‘서울대 삼민투 사건’으로 구속돼 1988년 2월까지 복역했다. 1989년에는 노동운동을 하다 또다시 구속돼 10개월간 형을 살기도 했으며, 1990년부터 1991년 ‘이해찬 의원 보좌관’이라는 직업을 갖기 전까지는 공장 노동자로 노동운동에 투신한 적도 있었다.
 
  진성준 정무기획비서관은 1985년 전북대학교 법학과 입학과 동시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진 비서관은 법대 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총학생회장으로 시위 선두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3년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박종철이 고문받다 죽고 이한열이 시위하다 죽는 시대였다.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나만 살자고 몸을 사릴 수는 없었다”고 회고한다. 진 비서관은 1995년, 민청학련 최장기수 장영달 전 의원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김금옥 시민사회비서관은 전북대(국문과) 총여학생회장 출신이다. 총여학생회장으로 당선된 그는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눈을 떴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전북지역 여성운동의 기틀을 다진 ‘전북 민주여성회’에서 일했다. 여성인권과 여성평등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대학시절 학생운동 동지로 만난 남편과 1994년 결혼한 그는 노동운동 현장에도 관심이 높아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연세대 출신인 조한기 의전비서관은 ‘한때 시인을 꿈꿨으나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문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문화운동에 투신했다. 진보 성향 문화예술인 단체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0년 이미경 의원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문대림 제도개선 비서관은 1986년에는 제주대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때 정치에 입문한 그는 2006년 지방선거에 출마해 서귀포시 대정읍 선거구에서 제주도의회 의원으로 처음 당선됐다. 이어 전국 최다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고 제9대 제주도의회 전반기 의장을 지냈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서울대 서양사학과(83학번)에 진학했지만 6월항쟁이 있던 1987년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중퇴했다. 학생운동으로 인해 군대에 끌려갔던 그는 제대하자마자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권혁기 춘추관장은 국민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청와대 국내언론비서실 행정관, 해양수산부 장관 정책보좌관, 민주당 전략기획국장, 국회 부대변인을 거쳤다. 대선 국면에서는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수석부대변인을 맡았다.
 
  오종식 정무기획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은 제주도 출신으로 고려대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주사파였던 그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출범을 주도했다. 이 단체는 북한 민주화, 말하자면 김정일 정권 교체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는 1999년 11월 15일 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이야기했다.
 
  “한때 주체사상가를 자처했다. 그러다 보니 북한체제도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북한에 대한 정보로부터 차단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의문이 생겼다.”
 
  여준성 청와대 사회수석실 행정관은 상지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1998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가의 길을 걷던 그는 17대 국회 정봉주 전 의원실에 들어가면서 정치권과 연을 맺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 당시 대통령비서실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을 역임한 김용익 전 의원의 보좌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정치인 출신 장관들도 학생운동 주도
 
1989년 연세대에서 전대협 임종석(현 청와대 비서실장) 군 구속에 항의하는 전대협 소속 학생들이 집회와 시위를 하고 있다.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후보자는 서울대 경영학과(69학번)에 입학해 총학생회장에 올랐고, ‘후진국사회연구회’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한 학번 아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게 ‘의식화 학습’을 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던 1986년에는 ‘6월항쟁 교수선언’을, 1989년 전교조 창립 때는 교수위원회 결성을 주도했다. 교수 시절의 다양한 외부활동은 그가 ‘친북 좌파’라고 공격당하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가 ▲2002년 마르크스 이론을 긍정하는 ‘맑스코뮤날레’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했고 ▲2005년 총장으로 취임한 사이버노동대학의 모집광고에 ‘노동자여 단결하라’ ‘민족해방의 날이 왔다’는 표현이 들어 있으며 ▲2008년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 당시 토론회에 참석해 ‘정부가 재협상을 추진하지 않으면 촛불은 정권퇴진 운동으로 바뀔 것’이라고 발언했다는 것 등이 비판의 소재로 오르곤 한다.
 
  이와 관련 김 후보자는 “나는 자본주의 경영학자로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존중한다”며 “일부 탐욕스러운 기업가에 의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지를 표명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촛불시위 때 토론회에 나간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김 후보자를 옆에서 지켜봐 온 사람들은 대체로 그를 ‘온화하고 점잖은 인물’로 평가한다. 다만 중요한 사안에서는 끝까지 원칙을 고수하는 고집스러운 면모도 강하다. 1995년 민교협 공동의장 시절 주변에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운동은 무모하다고 말렸지만, 김 장관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 후보자는 재야 운동권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76학번·서울대 농업경제학회 회장 역임) 시절부터 회의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명연설로 ‘아크로폴리스의 사자후(獅子吼)’라는 별명을 가졌다. 1977년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고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1988년 한겨레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했고, 1995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주축이 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에 몸담았다. 1997년 통추가 해체할 때 한나라당에 합류했지만 대북송금 특검법안에 반대해 탈당했고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여권의 유력 대권 주자였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를 꺾고 단숨에 잠룡으로 부상했다.
 
  고려대학교(82학번)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는 86그룹의 맏형으로 불린다. 그는 1984년 ‘민정당사 점거농성’을 주도했다. 당시 민정당은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전위부대 역할을 하던 막강 여당이었다. 민정당사 점거 사건은 1980년대 학생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물론, 이듬해 치러진 2·12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는 데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농성의 목적은 당시 폭압 정치의 현실과 전두환 정권이 내놓은 학원자율화 조치의 허구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것이었다”며 “민정당사 점거농성으로 송영길 의원(연세대 81학번)과 나는 구속됐지만 억눌려 있던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분출시키는 촉매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농성은 애초 목표를 200% 달성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이끈 그는 1987년 초 김영삼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 비서로 임명되며 정치권에 입문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는 시인이다. 충북 청주 출신으로 원주고와 충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충남대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바치는 시 ‘운명’을 읽으며 오열하는 모습으로 국민에게 각인돼 있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진압부대의 일원이었으나 소총의 실탄을 거꾸로 장전했다고 알려졌으며 이를 자신의 에세이에 소개하기도 했다. 탄창 맨 위 실탄을 거꾸로 넣어 장착하면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 도 장관 후보자는 진천 덕산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중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으로 해직됐다. 전교조 충북지부장을 맡으면서 교육운동을 하다가 해직 10년 만인 1998년 진천 덕산 중학교로 복직했다. 이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전북 정읍 출신인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는 1남7녀 딸부잣집의 둘째 딸로, 어려서부터 골목대장을 도맡았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민청련에서 활동하다 인천 부평의 형광등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김 장관의 남편도 학생운동을 했다. 둘은 학생운동하며 동지로 만났다.
 
  1987년 평민당 홍보위원회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그는 2004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17대 국회의원이 됐고, 경기 고양에서 19·20대 의원에 당선되며 3선을 했다. 국회 정무위원회와 기획재정위원회 간사를 역임하며 ‘경제통’을 지향했고, 20대 국회 출범 후 지난해 6월부터 1년간 최초의 여성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2015년 당시 문재인 당대표 비서실장을 지냈고 지난 대선 때는 민주당 선대위 미디어본부장으로 활동했다. 김 장관 후보자의 조부는 제헌의원을 지내고 6·25전쟁 때 순국한 김종문 전 의원이다.
 
  김은경 환경부 장관 후보자는 1991년 낙동강 불법 페놀 유출 사건에 대항하여 시민대표로 활동하며 ‘페놀아줌마’ ‘환경정책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사회분과에서 자문위원을 역임해 왔다. 김 후보자는 기후변화 대응과 미세먼지 저감 대책 등을 통하여 국민의 생존권을 지키고, 물관리 일원화, 4대강 재자연화 등 문재인 대통령 정부의 기조에 맞는 업무를 수행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병옥 환경부 차관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을 지낸 국내 환경운동 1세대다.
 
  조대엽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는 민주노총과 가까운 대표적인 친 노동계 인사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여성문제, 노동정의 등에서 꾸준히 활동해온 시민운동가다,
 
 
  전대협 임수경 방북 지휘
 
1989년 8월 20일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전 국회의원) 양이 밀입북 혐의로 서울 중부경찰서에 수감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요직에 임명된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이력에는 유독 ‘전대협’이란 단체의 이름이 많이 보인다. 전대협은 전국대학생대표협의회의 줄임말이다. 전대협은 최초의 전국 단위 학생운동 조직이다. 각 대학 총학생회의 협의체적 성격이 강했다. 기치는 ‘구국의 강철대오(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선 강철과 같은 무리라는 뜻)’였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 열망이 최고조에 이른 가운데, 전국 단위의 대학생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만들어졌다. 8월 19일 충남대에서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이던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의장으로 1기 발족식을 했다.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조국의 평화통일, 민중연대, 학원자주화, 백만 학도의 통일단결을 활동 목표로 내걸었다. 핵심 간부에 대한 구속과 수배가 잇따르는 등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학생들 사이에선 큰 호응을 얻었다. 학생들의 시위나 경찰의 진압 모두 과격했던 탓에 집회 현장에는 화염병과 쇠파이프, 최루탄이 난무했다.
 
  전대협은 1989년 ‘임수경 방북 사건’과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을 겪으며 논란이 커졌다. 결국, 1993년 3월 대의원 총회를 통해 해체를 결정했고 1993년 5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재발족했다.
 
  한총련은 1993년 고려대에서 8만명이 모인 가운데 출범했다. 각 대학 총학생회장단의 협의체 수준이었던 전대협을 확대해 전국 모든 대학 단과대 학생회장까지를 대의원으로 했다. 전대협과 비교하면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했다. ‘남북통일’ ‘노동운동’ 등을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등록금 등 일반 학생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문제점도 화두로 던졌다.
 
  창립 당시 기치는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 하지만 다수파에 의해 과격한 운동방식이 지지를 받으면서 1995년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로 기치가 바뀌었다. 1996년 연세대 통일축전 폭력 사태, 1997년 이석 프락치 치사 사건 등으로 도덕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대법원은 1997년 4월 한총련을 ‘북한을 찬양·고무하고 국가 변란을 선전·선동할 목적으로 결성된 조직’으로 인정,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이후 상당수 학교가 한총련에서 탈퇴했다. 공식해체 선언을 하진 않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조직의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하다.
 
  2005년 출범한 ‘한대련(한국대학생연합)’은 생활 이슈를 내세웠다. 통일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다가 지지기반을 잃고 몰락한 한총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등록금, 청년실업 문제, 대학생 주거문제’ 등 대학생 현실을 내세웠고, 시위 방식도 문화제, 1인 시위 등 과거보다 온건한 방식으로 바꿨다. 하지만 2012년 5월 통진당 중앙위원회 폭력사태에 한대련 전·현직 간부들이 연루되면서 정치성·도덕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재연 전 통진당 의원은 정치권 입성 전 한총련 대의원을 거쳐 한대련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80년대 좌경 폭력혁명 내세웠던 학생운동 조직
 
1985년 급진좌경 유인물로 규정돼 검찰에 압수된 ‘이화언론’ 4호. 당시 검찰은 이 유인물이 삼민투위 관련학생을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의 학습교재로 사용돼 왔다고 밝혔다.
  ‘전대협’이 만들어진 1980년대에는 수많은 학생운동 조직이 생겨났다. 민주화운동이 거셌던 당시에는 최루탄 사용량도 최고였다. 1987년에는 역대 최고인 67만3588발이 발사됐다. 특히 6월 10일부터 보름 동안 무려 35만 발이 사용됐다. 그 덕에 최루탄 생산업체였던 S화학 사장은 1988년 전국 개인 소득세 납세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린 김근태 전 의원은 1983년 재야세력들을 한데 모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초대 의장에 취임,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섰다. 유신체제 아래의 대규모 학내시위였던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수배돼 7년 동안이나 잠행을 계속했던 그가 얼굴을 내밀고 일약 재야운동의 리더로 나선 것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당시 민청련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고 장영달 전 의원이 부의장이었다. 1983년 9월 출범한 ‘민청련’은 발기 취지문에서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오늘의 현실 상황은 뿔뿔이 흩어진 민주 청년들이 다시 한데 모여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서 양심적인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 노동자, 농민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 건설에 온몸으로 매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창립 선언문에서는 〈고통과 희망을 한몸에 안고 억압받는 제3세계 민중의 일원으로서, 민족사의 전진에 앞장서야 할 청년으로서, 민주 통일을 위한 민주정치의 확립, 민족자립경제의 확립,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교육체계의 형성, 냉전체제 해소와 핵전쟁 방지를 위해 매진한다〉고 밝혔다.
 
  이후 1985년 4월 17일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이 결성됐다. 1기 의장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김민석 전 의원이었다. 전학련은 창립 선언문에 〈민족사의 대광장에 통일된 민주조국의 건설을 지향하는 미완의 4월혁명과 광주민중대항쟁의 전통을 계승하고 한 몸으로 장엄한 투쟁의 대열을 형성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전학련은 미국 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주도했다. 1985년 5월 23일 전학련 소속 서울시내 5개 대학 학생들이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미국 문화원 건물을 기습 점거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에 다니던 학생 73명은 “미국이 1980년 5월 계엄군의 광주 투입을 묵인 내지 방조했다”고 주장하며 72시간 동안 농성을 벌이면서 미국의 사과와 해명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미국을 우방국가로만 인식하던 일반 국민에게 ‘반미(反美)’라는 용어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학생운동에 ‘반미 운동’과 ‘점거 농성’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85년 5월 6일 결성한 ‘삼민투위’는 ‘삼민(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을 위해 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삼민투위는 전학련의 하부조직이었다. 삼민투위는 1985년 4월 서울 중구 을지로 6가 등지에서 서울대생 1900명이 경찰 순찰차에 화염병을 투척하고 방범초소를 습격하는 폭력투쟁을 벌인 사건을 시발로 약 2개월 동안 전국 각 대도시에서 11건의 폭력시위를 일으켰다.
 
  삼민투위 산하에는 ‘광주항쟁계승 특별위원회’ ‘광주학살원흉 처단위원회’ ‘광주학살 진상규명위원회’의 3개 단체가 있었다. 폭력시위를 일삼던 삼민투위는 1985년 사법당국에 의해 용공이적 단체로 단죄되어 해체됐다. 사라진 삼민투위란 이름은 2006년 일심회 사건에서 거론됐다.
 
  ‘일심회’ 사건은 미국 시민권자 장민호(미국명 마이클 장)가 북한 공작원의 지령에 따라 최기영 전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과 이정훈 민노당 전 중앙위원 등 민노당 간부 및 386 운동권 출신들을 만나 민노당 간부 300여 명의 명단을 북한에 넘기는 등 간첩활동을 한 사건이다. 이정훈 중앙위원은 고려대 삼민투 위원장이었다.
 
  1986년 3월 21일 조직된 ‘민민투(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는 당시(1985년) 정세를 총체적 위기상황 또는 혁명운동의 ‘전술적 고양기’라고 판단했다. 이에 혁명역량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소위 기층민중을 선동 규합하여 폭력혁명으로 미국을 축출하고 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 민중에 의한 민중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 후 급진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목표 아래 만들어졌다. 당시 이들의 주장은 용공 이적성이 농후한 좌경 폭력혁명을 내세우고 있을 뿐 아니라 반미, 반제 및 주한미군 철수 요구 등 북한의 대남적화전략 전술노선에 부합했다.
 
  ‘구학련’은 구국학생연맹의 줄임말이다. 1986년 3월 29일 결성됐다. 이 단체의 주장 및 목표는 미제 식민주의와 파쇼정권 타도, 민중 생존권 쟁취, 조국의 자주적 통일 등이었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였던 구학련은 자민투의 상부조직으로 학원가 극렬시위 배후조종, 서울을 4개 지역(동부·서부·남부·북부)으로 나누어 대학 소재지 중심으로 4개 지역 평의회를 구성했다.
 
  1994년 8월 29일 김두희 당시 법무부 장관은 국회 법사위에 나와 현안보고를 통해 〈주사파의 실상과 대책〉을 공개했다. 이 문건에는 “주사파의 뿌리는 1986년 결성된 지하조직 구국학생연맹으로 파악된다. (중략) 1985년 10월부터 서울법대, 서울공대의 운동권 학생들이 ‘구국의 소리’방송에서 보내는 ‘정치사상강좌’ ‘정치철학강좌’ 등을 집중적으로 듣고 북한의 대남(對南)혁명노선인 민족해방인민 민주주의혁명론(NLPDR)을 학습하면서 주사파의 실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자민투(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는 민민투의 미온적 투쟁노선에 반발해 결성된 과격투쟁 조직이다. 자민투가 내세운 투쟁이론은 반제민중민주주의혁명론(AIPDR) 또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이었다. 자민투의 혁명이념은 북한의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이념과 부합했다.
 
  이들은 이 같은 혁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전반핵 평화수호투쟁, 민주제권리쟁취투쟁, 88올림픽의 남·북한 공동개최투쟁, 경제침략 저지투쟁, 민중지원 연대투쟁 등 5대 투쟁과제를 내세웠다. 당시 자민투의 기관지인 해방선언은 노동자를 자본가의 피수탈자로 규정하는 등 공산주의 경제이론을 그대로 대입했다.
 
  ‘애학투련(애초 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은 1986년 10월 18일 와해된 전학련 재건을 위해 결성됐다. 애학투련은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발족식을 열었다. 전국 대학교 29곳의 학생 20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화형식을 거행하며 “반공(反共) 이데올로기 까부수자”고 외쳤다. 수천 명의 전투경찰은 집회를 막기 위해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농성자 1525명을 연행, 1288명을 구속하는 사상 최대의 구속사례를 남겼다.
 
 
  쉰 넘긴 운동권 인사들 진영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쉰을 넘긴 중년의 운동권 인사들이 새 정부의 주축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뉴스가 아니다. 노무현 정권에서 실패를 맛본 이들은 절치부심해 왔다. 가장 궁금한 것은 이들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의 진영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다. 노무현 정권 때 이들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입장이 다른 상대를 타도 대상인 적(敵)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지만 그들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진행 중인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운동권 참모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와의 차별을 위해 ‘고위 공직 배제 5대 비리’를 제시했다. 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논문 표절, 위장 전입이다.
 
  그런데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자녀의 위장 전입과 미국 국적 보유가 논란이 됐다. 강 후보자 장녀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고교 시절 한국으로 전학하면서 강 후보자가 나온 여고에 진학하기 위해 친척집에 위장전입했다 한다. 또 이중국적이다가 성년이 되면서 한국 국적을 버렸다고 한다.
 
  청와대는 이 사실을 미리 밝히면서 “그럼에도 적임이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그러나 미리 밝힌다고 그들이 약속한 ‘고위 공직 배제 원칙’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요직에 있는 86세대 운동권 인사들은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 후보자에게 강 후보자 같은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사퇴하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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