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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개편 회오리

친노(親盧)의 궤적으로 본 친박(親朴)의 미래

친박당(親朴黨), TK 외 지역 지지 난망(難望)… 친노의 안희정·이광재 같은 ‘구세주’ 없는 한 지방선거도 고전할 듯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thegood@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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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희정, “친노는 폐족… 용서 구해야 할 사람들”(2007년)
⊙ 친노, 2010년 지방선거로 부활 성공 후 7년 만에 정권 탈환
⊙ ‘미래 권력’ 김무성의 귀환 이후 친박과 비박 사이 내분 본격화
⊙ 친노는 이념(理念)집단… 친박은 이익(利益)집단
⊙ 홍준표, “당권 갖고 싸울 생각은 없지만, 친박은 빠져라!”
⊙ 홍준표 찍은 유권자 중 60%는 자유한국당 지지 안 해… 도로 친박당 되면 이탈할 수도
⊙ 노무현(盧武鉉) 없는데도 집권한 친노와 박근혜(朴槿惠) 흔들리자 무력화된 친박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 세력인 ‘친노(親盧·친노무현계)’의 시대가 다시 왔다는 얘기다. 2007년의 대선 패배 후 안희정 충남지사가 ‘폐족(廢族)’이라고 표현할 만큼 몰락한 지 10년 만의 일이다.
 
  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따르던 ‘친박(親朴·친박근혜계)’은 파산 일보 직전이다. 국민들은 친박의 구심점인 박 전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 과정에서 친박은 ‘적폐(積弊) 세력’으로 규정됐고 집권여당의 최대 계파인데도 대선 후보를 내지 못했다.
 
  10년 전의 친노와 지금의 친박이 처한 상황이 유사한 셈이다. 그렇다면 친박도 향후 지금의 친노처럼 부활해 재집권할 수 있을까. 친노의 궤적으로 친박의 미래를 전망했다.
 
 
  안희정의 금강팀과 문재인의 부산팀
 
  ‘친노’를 정의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넓게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그의 이념과 정책을 계승하는 이들 전부가 친노다. 친노 중 핵심 세력은 노 전 대통령의 부산 인맥, 국회의원 시절부터 함께하거나 대선 과정에서 함께한 사람들이다.
 
  이 중 노 전 대통령의 부산 인맥, 소위 ‘부산팀’은 문재인 대통령,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이다. 정계 입문 후 보좌진과 야인 시절 만든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연구진으로 구성된 참모 조직엔 안희정 충남지사,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서갑원 전 의원, 백원우 전 의원, 윤태영 전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 여택수 전 청와대 행정관, 고성규 전 청와대 행정관 등이 있다. 이들은 지방자치실무연구소가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금강빌딩에 있었던 이유로 ‘금강팀’으로 불린다.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염동연 전 열린우리당 사무총장,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송인배 전 청와대 사회조정2비서관,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경우엔 노 전 대통령의 보좌진 또는 연구진으로 일했지만, 부산 인맥이므로 ‘부산팀’으로 분류된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친박 형성… ‘원조 친박’은 김무성, 유승민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한나라당 이재오(좌), 이방호(우) 의원을 비롯한 친이는 친박을 공천에서 배제했다.
  ‘친박’은 박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4~2006년 등장한 용어다. 박근혜 당시 의원이 대표직을 맡고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기용한 김무성, 유승민, 전여옥 의원과 함께 박 대표를 지원하는 당내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내 계파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친박,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친이(親李·친이명박계)로 양분됐다. 당시 이들은 치열한 경선을 치렀다. 특히 박 후보는 이 후보의 BBK 실소유 의혹을, 이 후보는 박 후보의 최태민과의 관계에 대해 파고들었다. 사실상 당내에서 전면전을 치른 셈이라 서로 감정이 많이 상했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된 이후 이재오, 이방호 의원 등의 친이는 친박 중진들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공천 학살’을 감행했지만, 친박은 생환했다.
 
  노무현 정부는 5년 동안 이어졌지만, 친노의 전성기는 ‘노무현 신당’인 열린우리당이 생긴 2003년 11월부터 2004년 말까지다. 당시까지만 해도 열린우리당 내 친노와 다른 계파 간 갈등은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소위 ‘정국 장악’과 ‘개혁’이란 목표 아래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립학교법·과거사 진상 규명법·언론관계법 개정 등 소위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하면서 한나라당과 대치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시도에 대해 한나라당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4대 개악 입법’이라며 반발했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여당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행하면 정상적인 정치 활동은 힘들 것이며, 상생과 대화·타협의 정치도 끝날 것”이라며 “(여당이) 무리수를 둔다면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나설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 등 좌파 진영은 열린우리당의 개정안들이 개혁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열린우리당의 ‘개혁’은 좌우 진영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셈이다.
 
  국민들도 ‘개혁 피로증’을 호소했다. 민생을 외면한 채 자신들만의 ‘개혁’에 매몰된 집권여당에 대한 민심은 싸늘했다.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친박, 19대 총선 후 100명으로 증가… 당권 접수 후 ‘박근혜 대통령’ 만들어
 
  2010년 6월,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부결을 이끌어내 현직 대통령과의 파워 게임에서 이긴 ‘미래 권력’ 박 의원과 친박은 당권을 노렸다. 이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파문’ 등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무너지자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만들어 당권을 장악했다.
 
  박근혜 비대위는 당명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색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꿨다. 2012년에 실시된 19대 총선에선 상당수의 친이계를 배제하고 친박을 공천했다. 친이를 비롯한 비박(非朴)은 총선 이후를 기약했지만 당초 120석을 겨우 건질 것이라던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과반인 152석을 차지했다. 이 중 100석은 친박이란 분석이 있었다.
 
  명실상부 당내 다수파로 자리매김한 친박은 한 달 뒤 황우여 의원을 당 대표에, 이한구 의원을 원내대표로 선출했다. 사무총장도 ‘친박’ 서병수 의원이 맡았다. 비박은 ‘반박(反朴)’으로 태세를 전환해 ‘박근혜 사당화’를 비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2012년 8월 새누리당은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열어 박근혜 의원을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박 후보는 그해 12월 대선에서 득표율 51.6%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무현당’의 비주류 친노와 정동영·김근태계의 대립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계승하는 친노의 핵심은 그의 부산 시절과 국회의원 시절, 대선 과정에서 함께한 사람들이다.
  열린우리당 내 계파들의 갈등은 2005년부터 표면화됐다. ‘4대 입법’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과반 의석을 차지한 당 지지율이 추락하고, 향후 선거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당내 계파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는 주장도 나왔다.
 
  2005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 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 개편을 전제로 총리 지명권, 조각권 등을 한나라당이 행사하는 대연정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반(反)한나라당 정서가 강한 호남 민심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당장 다음해에 있을 지방선거에 큰 차질이 생겼다.
 
  열린우리당 내부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있으면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며 탈당을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정동영계와 김근태계로 이뤄진 비노와 친노 사이의 내분이 본격화됐다.
 
  2006년 2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열린우리당 내 계파 갈등은 심화됐다. 정동영계, 김근태계가 2강 체제를 구축해 경쟁을 벌였고, 친노 분파는 각기 다른 인물을 당 의장(대표) 후보로 추대했다. 노무현 대통령 참모 출신 의원들이 주도한 의정연구센터는 김혁규 전 경남지사, 유시민 의원의 개혁당 출신들이 만든 참여정치실천연대는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출신 인사가 주축인 ‘국민참여 1219’에선 정동영 지지세가 우세했다. 전당대회 결과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당 의장이 됐다. 김근태 의원, 김두관 전 장관, 김혁규 전 지사는 상임중앙위원(최고위원)이 됐다.
 
  계파 다툼에 사분오열된 열린우리당은 2006년 5월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광역단체장 1명, 기초단체장 19명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이는 원내 의석이 9석에 불과한 민주당이 광역단체장 2명, 기초단체장 20명을 당선시킨 것보다도 저조한 성적이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한나라당은 광역단체장 11명, 기초단체장 155명이 당선됐다.
 
  지방선거 참패 이후 열린우리당 내부에선 정계 개편이 거론됐다. 노 대통령에 적대적이고 한나라당에 비판적인 ‘반노비한’, 노 대통령에겐 비판적이면서 한나라당엔 적대적인 ‘비노반한’이란 두 방향이 제시됐다. 이에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만나 “열린우리당은 큰 배다. 이 배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민주당과 고건 전 총리 측과의 통합 논의가 당내에서 계속되자 노 대통령은 그해 12월 신당을 하고 싶으면 당에서 나가서 하라는 취지로 말했다.
 
  친노도 노 대통령을 거들며 김근태 체제를 흔들었다. 노 대통령 최측근인 이광재 의원은 “당의 무기력한 상황을 개선하기는커녕 당이 어디로 갈지 아무런 지향점과 노선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며 “김 의장의 지도력에 한계가 왔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제는 사퇴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2006년 12월 27일, 열린우리당 의원 워크숍에서 정동영계와 김근태계 등 ‘신당파’와 ‘사수파’인 친노 진영이 6시간 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통합신당 창당을 결의했다. 물론 친노는 당 사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다음날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은 긴급 회동을 갖고 노 대통령의 ‘신당 개입 금지’ 취지의 합의문을 발표했다.
 
  창당·사수 논쟁은 해를 넘겼다. 2007년 1월, 친노였던 염동연, 천정배 의원이 통합신당의 발판이 되겠다며 탈당을 시사했다. 정동영 전 의장도 ‘중대 결단’을 언급했다.
 
  결국 연쇄 탈당 사태가 벌어졌다. 2007년 1월, 임종인 의원을 시작으로 2007년 6월까지 소속 의원 79명이 탈당했다. 탈당파는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최종적으로는 2007년 8월 5일 출범한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모였다. 2월 14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정세균 의장 및 지도부는 통합신당 추진권을 위임받아 대통합민주신당과 8월 20일 합당했다. 열린우리당 소멸 후 친노는 지리멸렬했다.
 
 
  김무성, “친박 비주류, 비박 역량 결집하겠다”
 
  2012년, 18대 대선 과정에서 ‘진박(眞朴)’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진박은 원박을 비롯한 구 친박, 2012년 총선·대선 때 편입된 신 친박 중 박 후보의 신임을 받는 ‘진짜 친박’을 가리킨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진박은 자신들만의 패권을 공고히 하려 했지만 김무성 의원이 복귀하면서 권력 지형에 변화가 왔다. 2013년 4월, 부산 영도 재선거에서 당선된 김무성 의원은 “소외감을 느끼는 친박, 상실감을 느끼는 비박과 친이의 역량을 결집해 윤활유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비박을 규합해 차기 당권을 확보하고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2014년 7월, 친박의 서청원 의원을 누르고 당 대표가 된 김무성 의원은 “대선 이후 소수 친박 핵심들이 친박, 비주류 친박, 비박 등으로 편 가르기를 하고 당을 독단적으로 운영한 결과 당이 위기에 빠졌다”며 “이제 친박 핵심들은 좀 쉬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 “대표가 되면 탕평 인사를 통해 그동안 소외된 사람들을 전면에 등장시키겠다”고 했다.
 
  김무성 대표 등장 후 친박 비주류와 비박 상당수는 친김무성계로 분류됐다. 친박은 김무성 체제 흔들기에 나섰지만 이듬해 2월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가 되면서 전세는 불리해졌다. 당권이 ‘비박’ 김무성 대표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원내대표마저 비박인 유 의원이 차지하자 청와대와 친박의 공세가 거세졌다.
 
  유 의원은 2015년 4월 취임 후 첫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을 비판했다. 같은 해 5~6월, 청와대는 유 의원이 공무원연금법·국회법 개정안 협상 과정에서 청와대 방침에 따르지 않았다고 몰아세웠다. 박근혜 대통령은 6월 25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사실상 유 의원을 ‘배신의 정치’라고 규정하며 “반드시 선거에서 심판해 달라”고 성토했다. 새누리당은 7월 8일 의원총회를 열어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권고’를 결의했고 유 의원은 물러났다.
 
 
 
안희정, “친노는 폐족… 죄짓고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

 
  17대 대선 후 안희정 당시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친노는 폐족”이라는 반성문을 올렸다. 다음은 그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친노!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서 자신의 가족을 폐족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예! 친노라고 표현되어 온 우리는 폐족입니다. 죄짓고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중략) 민주개혁세력이라 칭해져 왔던 우리 세력이 우리 대에 이르러 사실상 사분오열, 지리멸렬의 결말을 보게 했으니 우리가 어찌 이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새로운 시대로, 새로운 세력으로 우리를 이끌고 정립시켜야 할 책임을 우리는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중략) 우리 모두를 변화시켰어야 했지만, 우리는 우리 모두의 변화와 개혁에 실패했습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2008년 1월 11일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대표로 선출했다. 이해찬, 유시민 의원은 이에 반발해 탈당했다. 손 대표 체제의 대통합민주신당은 같은 해 2월 11일 민주당과 합쳐 통합민주당을 만들고 두 달 뒤에 있을 18대 총선 공천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 실패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친노는 공천 배제 대상이란 주장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명숙 의원을 비롯한 친노 17명이 공천을 받았다. 유시민 의원과 김두관 전 장관은 각각 대구 수성을, 경남 남해·하동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2008년 4월 9일 18대 총선 결과 한명숙, 유인태, 유시민, 김두관, 윤호중, 유기홍, 전해철, 이화영 의원은 낙선했다. 친노 중 ‘생존자’는 이광재, 백원우, 서갑원 의원 등 일부에 불과했다.
 
 
  수뢰 의혹에 분노했던 민심… 노무현 자살 후 애도 분위기로 돌변
 
  정치적으로 심판을 받은 친노가 부활한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이다. 2009년 3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정관계에 전방위 로비를 하면서 이광재, 서갑원 의원 등에게 돈을 줬고, 안희정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은 상품권 5000만원어치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실제 이광재, 서갑원 두 사람은 대법원으로부터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고, 안희정 현 충남지사도 상품권 수령 사실을 인정했다.
 
  당시 소위 ‘박연차 리스트’ 수사 도중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 아들 건호씨, 딸 정연씨 등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4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노 전 대통령은 그 돈은 권양숙씨가 받아 쓴 것이며 자신은 퇴임 후에 알게 됐다면서 연관성을 부인했다. 이와 달리 박연차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집 장만을 위한 10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박 회장은 또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통해 ‘아들(노건호)과 조카사위(연철호)를 도와주라’는 대통령의 말을 전해 듣고 500만 달러를 송금한 것”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로 4월 30일 노 전 대통령을 소환해 10시간 동안 조사했다. ‘도덕성’ ‘청렴’ 등을 앞세운 노 전 대통령과 친노에 대한 여론은 폭발 직전이었다. 노 전 대통령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비판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회원 탈퇴를 하겠다는 사람들도 나왔지만, 노 전 대통령이 5월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소재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후 일주일 동안 전국에서 400만명이 봉하마을에 찾아와 그를 추모했다. 전국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발매된 저서 《성공과 좌절》 《운명이다》 등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친노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민심을 등에 업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약진했다. 안희정, 이광재 민주당 후보가 각각 충남지사, 강원지사에 당선됐다. 무소속으로 나선 김두관 후보는 경남지사 선거에서 이겼다. 서울시장 선거에선 한명숙 민주당 후보가, 경기도지사 선거에선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가 상대 후보와 접전을 벌였다. 김정길 민주당 후보도 부산시장 선거에서 선전했다.
 
  ‘노무현 정권 실패’ ‘노무현 일가 뇌물수수 의혹’ 등으로 궁지에 몰렸다가 부활한 친노는 정권 탈환을 위해 2011년 9월 ‘혁신과 통합’을 결성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와 함께 이 단체의 상임대표를 맡았다. 혁신과 통합이 주축이 된 시민통합당과 민주당,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같은 해 12월 16일 민주통합당을 창당했다.
 
  민주통합당은 2012년 1월 9~13일 모바일·현장 투표와 2012년 1월 15일 대의원 투표를 통해 한명숙 전 총리를 대표로 선출했다. 한 대표는 2012년 19대 총선 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에 따라 민주통합당은 그해 6월 9일 전당대회에서 대선 관리를 맡을 당 대표로 이해찬 의원을 선출했다. 이 대표 체제의 민주통합당은 2012년 8월 25일~9월 16일 전국 순회 경선에서 과반을 득표한 문재인 후보를 대선 후보로 선출했지만 18대 대선의 승자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였다.
 
 
  친문, 더불어민주당 장악 후 ‘박근혜 탄핵’과 ‘조기 대선’ 주도
 
  18대 대선 패배 후 친노는 2선으로 물러나고, 김한길 의원이 대표가 돼 당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민주통합당은 민주당으로 개명했다가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연합과 합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 사고의 여파로 지방선거에선 선전했지만, 7·30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해 공동대표였던 김한길, 안철수 의원이 사퇴했다. 이후 ‘박영선 비대위’ ‘문희상 비대위’를 거친 새정치민주연합은 2015년 2월 8일 제1차 정기 전국 대의원 대회를 열고 문재인 의원을 새로운 대표로 선출했다. 이때부터 당내 친노는 ‘친문(친문재인)’으로 재편됐다.
 
  친문 세력의 힘이 커지자 자신의 대권 가도에 위협을 느낀 안철수 의원이 ‘제3정당 창당’을 내세우며 2015년 12월 탈당했다. ‘친문 패권주의’를 지적하며 문재인 대표 퇴진을 요구하던 비주류·호남 세력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은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 천정배 의원이 이끌던 국민회의, 박주선 의원의 통합신당으로 흩어졌다가 2016년 20대 총선 직전 국민의당으로 통합됐다.
 
  새정치민주연합은 탈당한 안 의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바꿨다. 당내 혼란상을 잠재우기 위해 김종인 전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해 안정시키고서 2016년 4월 13일 20대 총선을 치렀다. 그 결과 더불어민주당은 123석을 얻어 원내 1당이 됐다.
 
  이를 바탕으로 더불어민주당은 2016년 하반기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고, 박 대통령 파면에 따라 조기 실시된 19대 대선에 문재인 후보를 내세워 당선시켰다.
 
 
  옛 새누리당의 총선 참패 원인은 친박·비박의 ‘공천 파동’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우) 후보는 이명박(좌) 후보의 BBK 실소유 의혹을, 이 후보는 박 후보와 최태민의 관계에 대해 파고들었다.
  친박과 비박이 회복 불가능한 사이가 된 건 ‘공천권’ 때문이다. 김무성 대표는 수없이 국민이 후보를 뽑는 상향식 공천을 주장해 왔지만 지난해 20대 총선 공천은 친박의 지지를 받아 공천관리위원회 위원장이 된 이한구 의원이 전권을 행사했다.
 
  그 과정에서 비박 다수가 공천에서 배제되고 유승민 의원 등의 지역구엔 친박 인사들이 단수 추천됐다. 김무성 대표는 공천장에 대표 직인을 찍지 않는 방법으로 공천관리위원회의 공천 결과를 거부했다. 거듭하는 계파 갈등을 지켜본 국민들은 새누리당을 지지하지 않았다.
 
  당초 145석을 예상했던 것과 달리 선거 결과 새누리당은 122석을 얻어 원내 2당으로 전락했다. 새누리당이 20대 총선 참패 원인을 진단한 《국민백서, 국민에게 묻고 국민이 답하다》에 따르면 역시 ‘공천 파동’이 가장 큰 패인으로 지목됐다.
 
  총선 직후 선거 참패 책임 공방이 시작됐다.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는 총사퇴했다. 새누리당은 2016년 8월 9일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친박’ 이정현 의원을 선출했다. 최고위원엔 역시 친박인 조원진, 이장우, 최연혜 의원과 ‘비박’ 강석호 의원이 선출됐다.
 
  친박과 비박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완전히 갈라서게 됐다. 비박과 일부 친박이 야당과 동조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며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는 데 힘을 보탰다. 이들은 그 후 이정현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며 당권을 노렸다. 이 대표는 12월 21일에 물러나겠다고 했다가, 대표 대행이 될 원내대표에 ‘친박’ 정우택 의원이 선출되자 즉각 물러났다.
 
  비박은 유승민 의원을 ‘전권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천하고 친박이 이를 거부할 경우 탈당하겠다고 선언했다. 정우택 대표 권한대행은 “유승민 의원이 비대위원장이 되면 당이 풍비박산 날 것”이라며 거부했고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 29명은 12월 27일 탈당 선언을 하고 바른정당을 만들었다.
 
  새누리당은 이후 비대위원장에 인명진 목사를 영입해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꾸고 대선 후보 경선을 진행했다. 친박에선 이인제 전 의원, 김관용 경북지사, 안상수 의원, 김진태 의원이 후보로 나섰지만 대선 후보는 소속 계파가 없는 홍준표 경남지사가 됐다. 집권여당 주류인데도 대선 후보를 내지 못한 친박은 홍준표 후보의 개인기에 의존해 지지층이 결집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자유한국당, ‘도로 친박당’ 된다면 ‘TK 자민련’ 될 수도
 
  지금까지 친노와 친박의 궤적을 살핀 결과 두 집단은 비슷한 경로를 밟아 왔지만, 친노 사례를 통해 친박의 미래를 전망하는 건 무리다. 두 집단의 성격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친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념과 정책을 계승하는 정치 집단이다. 대다수가 ‘운동권’ 출신이어서 사상적으로 동질성을 갖는다. 이념적으로 뭉쳤기 때문에 친노는 노 전 대통령이 없더라도 유지·확대되고 집권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친박은 대구·경북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기대 정치적 특혜를 받아 온 이익집단 성격이 강하다. 이념과 경력이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이 ‘박근혜’란 인물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연결돼 있었다. 구심점이 사라지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이 파면·구속되는 과정에서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수수방관했다. 박 전 대통령의 유무죄 여부를 떠나 탄핵 정국을 야기한 데 대해 사과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 친박은 없었다. 친노의 이해찬 의원처럼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다든지 안희정 지사처럼 반성문을 쓴 친박도 없었다. 다들 “나는 최순실을 몰랐다”며 발뺌만 했다.
 
  탄핵 정국, 대선 기간에 침묵하던 친박은 현재 자유한국당 당권을 잡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친박 핵심 홍문종 의원은 당 대표에 도전하겠다고 나섰다. 역시 친박인 정우택 대표 권한대행도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이들은 현재 홍준표 전 지사에게 당권이 넘어가는 걸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홍 전 지사는 “모처럼 무너진 보수정당이 재건되는데 작은 욕심을 가지고 그런 짓 하면 안 된다. 처신하는 게 옳지 않다”며 “친박은 좀 빠져줬으면 한다”고 했다.
 
  친박이 자유한국당 당권을 잡는다면 대선 때 겨우 끌어모은 지지층 상당수는 이탈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최근 5개월간 자유한국당의 평균 지지도는 10%다. 이는 홍 전 지사가 대선에서 득표한 24%보다 14%포인트 낮다. ‘홍준표 지지’ 또는 ‘문재인 반대’ 등을 이유로 ‘기호 2번’을 찍은 사람이 기존 자유한국당 지지자보다 많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자유한국당이 ‘도로 친박당’이 된다면 대선 때 ‘홍준표’를 찍은 유권자의 60%는 지지를 철회할 가능성이 크고 ‘친박당’은 ‘대구·경북(TK)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 될 수도 있다. 자민련의 경우엔 김종필 전 총리가 있었지만 현재 자유한국당엔 그런 인물이 없다. 지역당 존속도 힘들다는 얘기다.
 
  친박의 경우 친노처럼 선거를 통해 부활하는 것도 어려울 듯하다. 친박이 되살아나려면 ‘좌희정, 우광재’로 불릴 만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안희정 충남지사나 이광재 전 강원지사와 같은 비중의 친박 인사들이 내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돼야 한다. 특히 서울처럼 여당 지지율이 높고, 박원순 시장과 같은 인지도 있는 경쟁자를 꺾어야 하지만, 현재 친박의 면면을 봤을 때 이는 실현 가능성이 작다. 친박은 어떤 상황을 가정해도 친노의 경우처럼 부활하긴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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