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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시대 - 역대 대통령들에게 배워라

이명박의 실용주의 리더십

CEO 경험 바탕으로 국제 금융위기 잘 넘겨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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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국제 금융위기 터지자 “위기 때에는 현금부터 챙겨야 한다”면서 미국·일본·중국과
    9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
⊙ 2009년 1월~2012년 12월 매주 경제각료, 기업인 등 참석하는 비상경제대책회의 145회 개최
⊙ 애견가인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형식적인 선물 아닌 개(犬) 목줄 줘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4월 18일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만났을 때 “내가 카트를 운전하면 어떻겠느냐”며 카트의 운전대를 잡아 부시의 마음을 샀다.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이하 이명박)은 성공한 CEO 출신이었다. 현대건설에 입사한 지 5년 만인 28살 때 이사, 35살 때 사장으로 승진했다. 태국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명박은 1970~80년대에는 중동 건설현장 등을 누비면서 ‘신화(神話)’를 만들어 냈다. 그는 개발연대의 성공 스토리를 체현(體現)한 인물이었다.
 
  이명박의 성공담은 1990년 유인촌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극화되기도 했다. 1992년 이명박은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비례대표 의원이 됐다. 하지만 국회의원 이명박은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1996년에는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금배지를 잃었다. ‘정치’는 그에게 걸맞은 옷이 아니었다.
 
  ‘CEO 이명박’의 진가는 그가 서울시장 재임(2002~2006년)할 때 드러났다. 청계천 복원 사업을 성사시킨 것이다. 말도 많았고 반대도 많았지만 복개했던 도로와 고가도로를 걷어 낸 자리에 청계천이 다시 흐르게 됐을 때, 사람들은 “역시 CEO 출신은 다르다”고 감탄했다. 밤에도 인터넷을 하면서 말을 만들어 내는 정치대통령·이념형 대통령에게 질려 있던 국민들은 2007년 그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내가 현대를 해 봐서 아는데 …”
 
  대통령이 된 이명박은 실제로 ‘주식회사 대한민국 CEO’라는 자세로 직무를 수행했다. 취임 초부터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 정부임을 선언했고, 대불공단의 차량운행을 저해하는 전봇대를 뽑아 내라고 호령하기도 했다.
 
  이명박의 CEO 리더십은 2008년 7월부터 발발한 국제 금융위기 때 빛을 발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위기가 시작되고 세계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보다 10년 전 금융위기를 겪었던 한국으로 눈길이 쏠렸다. 그해 10월 14일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침몰하는 한국경제’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사흘 후 이 신문은 〈한국이 아시아 국가 중 세계 금융위기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국내 언론들도 ‘위기설’을 전파하는 데 일조했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있다. 한국 은행들이 먼저 외환수급(外換需給)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국가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 스와프(CDS) 금리가 연초에 비해 14배나 뛰었다. 그해 3/4분기에만 650억 달러의 외국 자금이 빠져나갔다. 환율이 1달러에 1500원을 넘었고, 연초 2000선에 달하던 주가지수는 900대로 폭락했다. 1997년 외환위기(IMF사태) 같은 위기가 다시 닥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국내 언론들도 ‘9월 위기론’이니 ‘10월 위기론’이니 하면서 위기감을 부추겼다.
 
  하지만 이명박은, 비서관이 금융위기가 닥쳐 오는데도 수수방관하다가 “국가부도”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김영삼과는 달랐다. 이명박은 경제각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현대를 해 봐서 아는데 위기 때에는 현금부터 챙겨야 합니다.”
 
  이명박이 곧잘 사용하던 “내가 현대를 해 봐서 아는데 …”라는 말은 종종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이때는 그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유동성이 부족하면 흑자도산한다”
 
  먼저 이명박 대통령은 외환수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을 높은 가산금리 때문에 포기한 기획재정부를 질책했다.
 
  “결국 높은 금리로 외평채를 발행했다는 책임추궁을 당하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니에요? 위기 상황인데 금리가 좀 높다고 그러면 되겠어요? 공직자들은 그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은행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비상 시기에는 정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진 해외 금융자산을 모두 팔아서라도 외환유동성을 확보해야 하는 거잖아요. 기업이나 국가나 흑자(黑字)가 나도 유동성이 부족하면 흑자도산하는 거예요.”
 
  이후 정부는 ‘유동성’ 확보를 위해 총력전을 벌였다. 그 결과가 미국·중국·일본과 체결한 통화스와프 협정이었다. 통화스와프란 약정된 환율에 따라 자국의 통화를 맡겨 놓고 상대국의 통화를 빌려오는 외환거래를 말한다. 통화스와프가 체결되면 약정된 금액만큼 외환을 추가로 보유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중국·일본과 각각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는 ‘거래의 기술’을 발휘했다. 미국은 처음에는 자기들은 유럽연합(EU)이나 일본과 같은 신용등급 AAA 수준의 선진국하고만 스와프 협정을 체결한다면서 스와프 협정 체결에 소극적이었다. 대신 한국이 갖고 있는 미국 국채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자칫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다는 느낌을 국제사회에 줄 우려가 있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국에 “우리가 보유한 미국 국채를 내다팔 경우 한국은 통화스와프 없이도 위기관리가 가능하다”면서 “이 경우 미국의 통화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이 외환조달을 위해 미국 국채를 팔면 미국 국채 가격이 하락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이 호주와는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면서 경제규모가 더 크고 국제통화기금(IMF) 지분이 높은 한국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미국 정부는 한국과의 통화스와프 협정에 동의했다.
 
 
  “한국이 위기를 통제하는 데 만점을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제 금융위기가 터지자 청와대 지하벙커에 비상경제상황실을 설치하고 퇴임할 때까지 145차례의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스와프 협정에만 목을 매지 않았다. 일본·중국과의 통화스와프도 추진했다. 일본이 스와프 규모를 30억 달러니 70억 달러니 하면서 미적거리자 이명박 정부는 중국에 통화스와프 협정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강만수 장관은 “한중통화스와프는 위안화가 기축(基軸)통화로 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셰쉬런 중국 재정부장(재무부 장관)을 설득했다. 중국측이 솔깃해할 얘기였다. 중국은 기존 40억 달러 규모이던 스와프를 300억 달러로 늘리는 데 합의했다. 중국은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입장이었지만, 강 장관은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규모인 300억 달러를 주장해서 관철시켰다. 중국과 거래를 하면서도 미국과의 관계를 배려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은 자기들도 한국과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일본은 한일통화스와프 체결을 한중스와프 체결보다 먼저 발표해 달라는 주문을 덧붙였다.
 
  미국·일본·중국과 도합 9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 위기설은 사라졌다.
 
  2009년 들어서면서 이명박은 ‘비상경제정부’ 구축을 선언했다. 1월 6일에는 청와대에 비상경제상황실을 마련하고, 그해 1월 8일부터는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나중에 경제상황이 안정되면서 국민경제대책회의로 명칭 변경)를 개최했다. 경제부처 장관들은 물론이고 경제5단체장들과 기업인들이 멤버였다. 매주 열린 이 회의는 2012년 12월 말까지 모두 145차례 열렸다.
 
  이러한 노력 결과 한국 경제는 국제 금융위기와 뒤이은 국제 재정위기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평균 2.8% 성장하는 동안 한국은 6.1% 성장했다. 2008년 10월 한국위기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파이낸셜 타임스》는 2010년 4월 28일 자에서는 〈한국이 위기를 통제하는 데 만점을 받았다. 한국은 교과서적인 경기회복을 달성했다〉고 보도했다. 2008년 〈한국이 아시아에서 인도 다음으로 부도위기가 높다〉고 했던 《블룸버그통신》은 2010년 11월 8일 자 보도에서 〈경기회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과 유럽이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을 겪지 않으려면 한국의 위기대응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보도했다.
 
 
  IMF 사태보다 더 큰 위기 잘 넘겨
 
  2009년 유럽발(發) 국제 재정위기가 발생했다. 이때는 미국과의 통화스와프는 종료되었고, 일본과의 통화스와프 잔고는 130억 달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선제적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2011년 10월 19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와 한일스와프를 700억 달러로 늘리기로 한 데 이어 중국 리커창 부총리와 만나 통화스와프 규모를 560억 달러로 늘리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그해 10월 말에는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이 유럽발 재정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국민들은 2008~2010년 우리가 얼마나 큰 위기를 잘 넘긴 것인지를 모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세계 금융위기로 러시아·한국·브라질 등이 곤경에 빠졌다”면서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는 지금에 비하면 해변가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 시절”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에서 은행들이 파산하고 주택 채무자들이 집에서 쫓겨나던 2008년의 국제 금융위기, PIIG(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등이 ‘국가부도’를 맞았던 2009~2010년의 유럽발 재정위기를 ‘해변가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듯이’ 보냈다. 2012년 9월 미국 신용평가기관 피치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AA- 로 상향했다. 세계 최고의 외환보유국 중국,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보다 높은 등급이었다.
 
  한국이 이렇게 연이어 닥쳐 온 글로벌 금융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던 데에는 CEO 출신 대통령의 기여가 컸다. 이명박은 2013년 2월 14일 퇴임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내가 경제위기를 극복 못했으면 (이를 비판하는) 기사가 어마어마하게 나왔을 텐데 위기 극복이 잘됐으니까 기사가 안 나오는 것”이라며 웃었다.
 
 
  부시, “내 친구 이명박”
 
  이명박의 실용주의는 외교에서도 발휘됐다. 2008년 4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頂上)회담을 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할 때의 일이다. 부시에게 줄 선물을 정해야 했다. 외교통상부에서는 늘 하던 대로 자기(瓷器) 복제품, 한류 드라마 CD, 전통 공예품 등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이명박은 부시가 늘 곁에 두고 쓸 수 있는 물건을 선물하기를 원했다. 이명박은 부시가 개를 좋아한다는 데 착안해서 개 목줄을 선물했다. 미국에서는 모든 공직자들이 20달러 이상 선물을 받으면 국고에 귀속시켜야 한다. 그걸 갖기를 원할 경우에는 자기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이명박이 선물한 개 목줄은 20달러 미만이어서 부시가 부담 없이 가질 수 있었다. 부시는 이 선물을 무척 좋아했으며 두고두고 애용했다고 한다.
 
  이명박과 부시는 기업인으로서의 경험, 독실한 기독교 신앙, 자유민주주의적 세계관 등을 공유하고 있었다. 부시는 2008년 7월 G8 확대정상회의 때 외국 정상들에게 ‘내 친구(my friend)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소개했다. 같은 달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의 영문 명칭과 영유권 표기를 변경하려 했을 때 부시는 “내 친구 이 대통령의 입장이 어렵다. 그가 원하는 대로 처리하라”고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지시했다.
 
  한미 정상 간에 축적된 돈독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미국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중단됐던 정보교환을 재개하기로 했다. 대외군사판매(FMS) 지위도 격상됐다. 미국행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과거처럼 세종로 미국대사관 옆에서 길게 줄을 서지 않게 된 것도 이명박이 직접 부시에게 한국의 비자면제프로그램(VWP) 가입을 요구해서 성사시킨 것이다.
 
  이명박의 리더십은 박정희 대통령의 그것과 닮았다. 현장 중심의 리더십, 실용주의, 그리고 ‘내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국민과 역사가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까지 …. 그것은 현대건설 CEO를 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음을 이명박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정책들은 사사건건 ‘시민단체’와 야당, 심지어 당내 반대파들에 의해 발목이 잡혔다. ‘소통부족’이라는 지적이 그를 따라다녔다. 시대가 달라졌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조선시대 선비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나 이념형 정치인들의 눈에 이명박은 ‘장사치’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고 ‘거래의 달인’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명박이 보여주었던 것 같은 실용주의 리더십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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