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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시대 - 역대 대통령들에게 배워라

노태우의 경청하는 리더십

“여소야대 13대 총선 이후 사사건건 발목잡은 3김(金) 수시로 만나”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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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청와대 최병렬 수석, 박철언 보좌관 등이 “보수세력 합쳐야 한다” 주장
⊙ DJ “노 대통령 심중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
⊙ YS 만난 뒤 ‘보통 고집이 아니구나’ 생각
⊙ JP, 노 대통령에게 “국정을 소신껏 이끌어 가라”고 당부
1990년 1월 25일 가칭 민주자유당 공동대표인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김종필 대표가 만나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귀가 크다. 민주화 열기로 뜨겁던 1980년대 말 그는 큰 귀로 ‘전성기 시절’ 3김(金)과 경청·소통, 혹은 대결하면서 여소야대의 거대한 태풍을 건넜던 인물이다. ‘무결정의 결정’이라는 나름의 경청 리더십으로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김종필(金鍾泌) 총재 간 3당 합당을 이뤄 낸 점도 빼놓을 수 없다. 3당 합당은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타협이 만든 산물이었다. 출신·배경은 물론 이념·정책마저 달랐으나, 한국정치사에 가장 이질적인 빅뱅 중 하나로 꼽힌다. 반면 ‘군정(軍政) 종식과 반민주 투쟁’으로 일관한 한국 야당사에 오점을 남겼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13대 대선(1987년 12월 16일) 직후 치러진 13대 총선(1988년 4월 26일)에서 224석 중 민정당 87석, 평민당 54석, 민주당 46석, 공화당 27석, 무소속 10석으로 여당이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민정당은 노태우 당선의 여세를 몰아 총선에서도 압승을 낙관했었다. 노 대통령은 대선 중 시종 “3김 시대의 종말”을 외쳤었다. 정보기관 보고는 어김없이 2/3 내외의 민정당 압승을 예상했고, 못해도 과반은 넘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국민은 3김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길 원치 않았다.
 
  총선 패배를 접한 노 대통령은 3김씨와의 대화에서 ‘필요할 때는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3김을 만날 계획을 세웠고 4월 총선 이후에는 여야총재 회담을 수시로 가졌다.
 
  노 대통령은 민주당 김영삼(이하 YS) 총재, 공화당 김종필(이하 JP) 총재와 취임 전부터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YS를 만나 보니 사고방식과 판단기준, 시각이 노 대통령과 너무 달랐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내심 ‘극복해야 할 난제가 많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YS 쪽의 노력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힘들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대선 결과도 YS는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YS는 “나는 패배할 수도 없고 패배할 이유도 없으며 틀림없이 승리했다고 확신했는데 개표 결과 왜 패배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식의 대답이었다.
 
  노 대통령은 ‘보통 고집이 아니구나’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YS를 위로하고 국정 동반자로 협력하기로 다짐했다.
 
 
  JP와 DJ와의 만남
 
  그러나 JP와는 시국관에서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 JP는 노 대통령에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유신(維新)의 불가피성을 언급했다고 한다. JP의 말이다.
 
  “유신 전에 있은 대선에서 박 대통령은 김대중씨에게 승리했다. 그 차이가 너무 근소했다. 1960년대 한국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위해 박 대통령이 바친 노력은 엄청난 것이다. 온갖 정성을 다 바쳤다. 1971년 대선 결과는 박 대통령에게 패배와 다름없는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JP는 박 대통령이 선거 이후 여러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다, 1972년 유신 조치를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JP는 노 대통령에게 “(노 대통령은)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으니 이를 기반으로 국정을 소신껏 이끌어 가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과 평민당 총재 김대중(金大中·이하 DJ)과의 대화는 서울올림픽의 협조를 요청하기 위한 차원에서 시작됐다. 막상 만나고 나니 ‘다른 야당 지도자들과는 다르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난한 정치투쟁을 몸으로 겪으며 얻은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다. 관찰력이 예리한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 이야기를 한 대목도 놓치지 않았다. 준비해 온 서류 봉투에서 노트를 꺼내 대화 내용을 일일이 메모하고 그것을 보면서 확인하곤 했다. 노 대통령은 속으로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구나’고 생각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DJ에게 서울올림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 민족의 도약의 계기로 삼는 데 앞장서 달라고 당부했다. DJ는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양심수와 구속 학생을 석방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구했다”는 내용을 회담 발표문에 꼭 삽입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대화를 통해 과거에는 가져 보지 못했던 새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흑백논리, 대립관계에서 이제는 야당과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있겠다 싶었다는 것이다.
 
 
  13대 총선과 여소야대 상황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후인 1988년 5월 28일 야당대표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4자 회담을 가졌다.
  13대 총선 이후 당시 여권에서는 “여소야대로 정국을 이끌기 어렵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청와대 최병렬 수석, 박철언 보좌관 등은 “보수세력을 합쳐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 정치지도자 성향을 보아 YS와 JP는 보수성향이다. “민정·민주·공화 3당이 합당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YS는 어려울 것이니, 공화당만이라도 합당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YS는 들어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예단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정책보좌관(후에 정무장관)이 노 대통령에게 이렇게 진언을 했다고 한다.
 
  “각하, 상심할 것 없습니다. 위기(여소야대)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각 당, 급진 좌파세력을 분리해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 대통합을 하십시오. 그러려면 3김씨와의 통합을 꾀하는 큰 정치를 구상해야 합니다.”
 
  노 대통령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박 보좌관에게 “비밀리에 접촉해 보라. 특히 YS, DJ 의중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일단 JP는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났는데, 예상대로 쉽게 동의해 주었다. 야당의 두 총재는 박 보좌관이 접촉했는데 YS는 할 듯 말 듯 애를 먹였고, DJ는 여러 번의 접촉에도 불구 “협조할 일은 할 테지만 통합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부정적이었다.
 
  YS와의 교섭과정에서 YS의 통일민주당 측에서는 황병태 정책위의장과 김덕룡 의원, 당청(黨靑) 쪽에서는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이 관여했다.
 
  1990년 1월 3일 노 대통령은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대국민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사흘 전인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으로 5공 청산 문제가 종결됐으니 더는 과거 문제를 재론하지 말자는 취지였다. 다음 날 YS가 기자회견을 통해 “지방자치제에 앞서 정계개편이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 3당 통합의 물꼬를 텄다.
 
  노 대통령은 3김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개별회담을 갖고 정계개편을 포함한 정국운영 전반에 관해 솔직한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여권의 당직을 개편, 민정당 대표위원에 박태준 의원, 사무총장에 박준병 의원, 원내총무에 정동성 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YS, JP는 이틀 뒤인 1월 6일 골프회동을 갖고 정계개편이 이뤄져야 한다는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보도됐다. DJ만이 정계개편에 반대의사를 갖게 됐다.
 
 
  “어디 합쳐 볼 생각이 없으십니까”
 
1992년 8월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노태우 대통령이 자신의 회갑오찬에 김대중 민주당 대표를 초청, 악수를 나누고 있다.
  노 대통령은 1990년 1월 11일 DJ를 청와대로 초청, 오찬을 겸한 단독회담을 갖고 광주보상문제, 민생문제 등 광범위한 주제들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DJ는 노 대통령의 말에 일일이 메모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를 제시했다.
 
  대화 중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디 합쳐 볼 생각이 없으십니까”라고 웃으면서 가볍게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DJ는 “대통령 심중은 이해하지만 여당과 합친다는 말이 나오면 내 입장이 아주 어려워질 것입니다. 비록 여소야대의 4당 체제지만 협조할 것은 해 드릴 테니 이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원래 보수와 혁신은 합치기 힘든 것이지만 DJ가 사사건건 모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쨌든 노 대통령이 중간평가를 유보하는 과정에서 DJ가 국정을 편하게 펼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일도 있다.
 
  다음 날인 12일과 13일 YS, JP를 만나 정계개편, 지자체 선거 실시, 선거 공영제, 경제사회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보수 대연합’, ‘온건 중도세력 총망라’ 등에 대해 인식을 함께했다.
 
  그러나 합당을 추진하는 데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난점은 신뢰의 문제였다. 수십 년간 깊어진 여야 불신의 골을 어떻게 해소하고 신뢰관계를 구축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합당과정에 진통도 많았다.
 
  YS가 “안 돼, 안 돼. JP를 넣으면 이미지가 나빠지므로 넣으면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박철언 장관의 끈질긴 설득에 “그러면 이야기해 보고, 본인이 흔쾌히 하겠다고 하면 끼워 주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끼워 주는 것이지 주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양보했다고 한다.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YS 측이 “며칠만 여유를 달라”면서 시간을 끌었다. “참모들에게 충분한 이야기가 안 됐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3당 합당의 결과
 
  민주당과는 그해(1990년) 1월 19일 호텔신라에서 만나 여당서는 박준병 사무총장과 박철언 장관, YS 쪽에서는 황병태·김덕룡 의원이 서명했다.
 
  1월 20일에는 공화당의 김용환 사무총장과 각서를 작성했다. 이틀 뒤인 22일 노 대통령과 YS, JP가 청와대에서 9시간의 장시간 회동 끝에 3당 통합 차원의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각 당별로 5명씩 15명으로 창당준비위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내각제 합의는 국민들의 거부와 제1야당인 평민당의 반대를 감안, 비밀리에 추진키로 했다.
 
  1월 25일 가칭 민주자유당 공동대표인 노 대통령과 YS, JP 그리고 15인 창당준비위원들이 청와대에 모여 창당 일정을 협의하고 창당 전에 단일 교섭단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예상했던 대로 DJ(평민당 총재)는 3당 합당을 반대하면서 반대투쟁을 평화적으로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발표에는 내각제를 지향한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그 내용을 짐작한 평민당은 내각제 개헌 반대 100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이기택 원내총무, 김현규 부총재 등이 3당 합당 참여 거부를 선언했다.
 
  2월 9일 민정 민주 공화 3당은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합당수임기구 합동회의를 열고 통합 신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이로써 민자당은 216석(민정계 127석, 민주계 54석, 공화계 35석)의 의석을 보유하는 거대 여당으로 재탄생했다. 3당 합당은 정국의 안정은 물론 대선 공약사업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국민에게 약속한 민주화와 자율화, 주택 200만호 건설을 비롯한 큼직큼직한 국책사업, 방대한 SOC 투자 등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물론 ‘무결정의 결정’이란 노 대통령의 독특한 수동적 리더십이 한국 정치학계의 연구 주제가 된 일이 있다. ‘노태우·김영삼 정부가 군부 정권이 점진적으로 철수할 수 있는 퇴로를 만들어 줌으로써 민주화 과정을 비교적 순탄하게 이끌었다’(강정인 서강대 교수)는 평가가 나온다. 또 노 대통령은 ‘전환기적 상황에서 내부적으로 민주화와 과거청산, 외부적으로 탈냉전 질서에 대응하고자 노력했고, 권위주의 시대의 지배 정치세력이 민주화라는 새로운 질서에 적응할 수 있게 만들었다’(서울대 강원택 교수의 《노태우 시대의 재인식》)는 주장도 있다.⊙
 
  (《노태우 회고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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