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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시대 - 역대 대통령들에게 배워라

박정희의 경제 리더십

못하는 자가 아니라 잘하는 자를 지원하라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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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개혁 실패 등 시행착오를 통해 배워 …, 전(前) 정권의 경제엘리트 과감하게 기용
⊙ 기업인들의 의견 경청, 현장 중시
⊙ 소성(小成)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
⊙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면 정치적 부담도 감수
1976년 5월 31일 포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 이후 40년 동안 대한민국이 먹고살 거리를 마련했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이 이룩한 경제적 업적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비판자들조차 “박정희의 경제발전 업적은 인정하지만 …”이라는 전제를 깔고 그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18년 동안 연평균 9.2%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이에 따라 1962년 8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그가 세상을 떠나던 1979년에는 1747달러로 뛰어올랐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자신이 죽은 뒤에도 한 세대 이상 국민들이 먹고살 거리를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조선,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 전자산업 등이 그것이다.
 
  사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 이후 3저 호황 등에 힘입어 한국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그 기반을 마련한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사태 이후에는 ‘경제를 살리는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갈망과 함께 박정희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최근 들어 다소 하락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물을 때마다, 박정희는 늘 수위를 차지하곤 했다.
 
  박정희의 정책이나 정책추진 방식들이 지금도 유효한 것은 아니다. 수출진흥정책, 보호주의적 산업정책, 정부의 기업에 대한 지원 등은 요즘 같으면 국제무역기구(WTO) 규정 등에 가로막혀 현실에 옮기기 힘들 것이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노조활동을 제한하는 일이나, 정치·경제적 반대를 무릅쓰고 중화학공업 건설을 밀어붙였던 것 같은 일도 이제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제 리더십 가운데는 아직도 배울 만한 점들, 정권의 색깔을 떠나서 참고할 부분들이 적지 않다.
 
 
  유연하게 사고하라
 
  첫째는 박정희가 보여준 사고(思考)의 유연성이다.
 
  박정희가 처음부터 경제 전문가는 아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기성체제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농민들의 빈곤에 가슴 아파하며, 자립경제를 희구하는 ‘제3세계형 민족주의 군인’이었다. 5·16혁명 이후 군사정권이 추진했던 부정축재자 구속, 농어촌 고리채(高利債) 정리, 화폐개혁 등은 그러한 사고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런 정책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62년 군사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는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7.1%로 잡았다. 하지만 이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동안에 국민소득을 배증(倍增)시키겠다는 생각에서 역산(逆算)해서 만들어 낸 수치일 뿐이었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없었다. 당시 박정희정권의 정책은 이승만(李承晩)·장면(張勉)정권과 마찬가지로 수입대체산업 육성을 통한 내포적 근대화였다. 이는 당시 제3세계의 유행이기도 했다.
 
  그런데 1963년부터 의도치 않게 섬유·합판·철강(함석 등 낮은 수준의 철강제품) 등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62년 5480만 달러였던 수출액이 1963년에는 8680만 달러로 급증했다. 특히 공산품 수출이 계획치보다 4.4배나 많은 281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일본 등 선진국들의 산업구조가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한국에 기회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 이들 분야에 대한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기존의 경제정책이나 자신의 생각에 교조적으로 얽매이지 않았다.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김정렴·장기영 등도 그러한 방향으로의 정책을 전환하라고 조언했다. 박정희는 경제정책의 중심을 수출 제1주의로 전환하고, 1965년의 수출목표를 1억 달러로 제시했다. 기왕에 추진하던 한일 국교정상화를 서두른 것도 그러한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군정 초기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대학교수들을 최고회의 의장 고문으로 데려다 놓고, 누가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내면 따라갔다. 하지만 5·16 혁명 이후 2년 반 동안 화폐개혁 등 시행착오에서 교훈을 얻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방의 얘기를 듣고 정책을 결정하는 일이 없어졌고, 대학교수들 대신에 1, 2공화국 시절의 경제 엘리트들을 쓰기 시작했다.”
 
  김정렴 전 실장의 말처럼 박정희는 자신이 무너뜨린 민주당 정권의 각료 출신인 태완선(민주당 정권의 부흥부·상공부 장관, 건설부·경제기획원 장관 역임), 김영선(민주당 정권의 재무부 장관,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주일대사 역임), 이승만 정권의 부흥부 장관으로 자신이 감옥에 보냈던 신현확(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 보건사회부·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중용했다.
 
  다만 대학 교수는 잘 쓰지 않았다. 이는 혁명정권 초기에 교수 출신을 각료로 기용했다가 실패한 경험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경제과학심의회, 평가교수단 등을 통해 검증을 한 다음에 교수 출신을 장관으로 기용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재무부·경제기획원 장관 역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기업인의 의견을 경청하라
 
1968년 청와대에서 제5차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1966~1979년 147회의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열었다.
  둘째, 박정희는 기업인의 의견을 경청했고, 현장의 목소리를 중시했다.
 
  5·16 군사정권은 혁명 직후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잡아넣었다. 박정희 앞으로 붙잡혀 온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은 이렇게 항변했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면서 그 생계를 보장해 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 운용, 국민교육, 도로·항만 시설 등 국가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면 당장 세수(稅收)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이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안다.”
 
  박정희는 이 항변을 받아들여 구속한 기업인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이석제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이 반발하자, 박정희는 이렇게 설득했다.
 
  “이 사람아, 이제부터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면 국민을 배불리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닌가. 우리가 이북만도 못한 경제력을 가지고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대로 드럼통 두드려서 다른 거라도 만들어 본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아닌가. 그만치 정신 차리게 했으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국가의 경제부흥에 그 사람들이 일 좀 하도록 써먹자.”
 
  실제로 박정희는 18년 동안 경제건설을 하면서 기업인들을 잘 써먹었다. 그리고 기업인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1965년부터 1979년 9월까지 146회 개최했던 월례경제동향보고회의나 1966년부터 1979년 9월까지 147회 개최했던 수출진흥확대회의는 기업인들의 애로사항을 듣는 장(場)이기도 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고 하지만, 이는 경제발전을 위한 정부와 기업 간의 소통이자 협력이었다.
 
  박정희는 현장의 국장·과장급 공무원들과도 수시로 소통했다. 각 부처 연두순시 때 브리핑을 잘하는 유능한 공무원들을 눈여겨보고, 그들을 키웠다.
 
 
  잘나갈 때 미래를 준비하라
 
  셋째, 박정희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했다. 박정희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보세가공무역. 경공업제품 수출에 힘입어 잘되고 있을 때부터, 종합제철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에는 “차도 얼마 없는 나라에서 무슨 고속도로냐? 국도(國道)를 보수·확장하는 걸로 충분하다”라고 말하는 세계은행 관계자들에게 “차가 없는 지금 고속도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가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한 1973년은 한국이 먹고사는 문제를 막 해결했을 때였다. 1960년대부터 추진해 온 보세가공무역에 의존한 수출정책으로 10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한 것이 1971년이었다. 일부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 경공업제품 수출로 몇 년은 더 먹고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소성(小成)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는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 등 현장 중심 테크노크라트들의 조언이 있었다.
 
  당시 경제정책의 본산이었던 경제기획원 관료들은 중화학공업정책에 회의적이었다. 박정희는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중화학공업기획단장으로 임명, 청와대에서 직접 중화학공업 건설을 지휘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는 비교우위의 국제적 배치가 지극히 유동적인 세계경제에 과감히 뛰어들어 한국 나름의 비교우위를 모색한 것”이라면서 “몇 년을 더 지체했다면 선진국과의 격차가 너무 벌어져 한국인의 자력(自力)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못하는 자가 아니라 잘하는 자를 지원하라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를 내는 마을을 더 지원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넷째, 잘하는 기업, 잘하는 집단을 지원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이나 집단은 도태시켰다. 이는 못하는 기업과 집단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오늘날의 일반적인 정부지원 방식과는 반대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새마을사업이다. 박정희 정부는 1971년 새마을가꾸기사업을 시작하면서 전국 3만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5부대씩을 내려보냈다. 그 시멘트를 사용할 10개의 사업을 예시하고, 마을이 자율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이 시멘트를 마을 공공시설 구축 등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어떤 마을은 집집마다 나누어 가졌다. 아무 데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가 시멘트를 못 쓰게 만든 마을도 있었다.
 
  이듬해 정부는 실적이 양호한 1만6600개 마을을 선별,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을 내려보내 마을 환경구조 개선에 쓰도록 했다. 하지만 실적이 나쁜 나머지 마을에 대해서는 일절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원대상에서 탈락한 마을들은 자기들이 노력과 재원을 투자해서 사업에 나섰다.
 
  이후 정부는 각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분류하고, 자립마을과 자조마을은 차등 지원을 했지만, 기초마을은 지원을 하지 않았다. 여당인 공화당은 선거를 의식, 이러한 방식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번은 김종필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균등하게 농촌마을을 지원하는 안(案)을 통과시켰지만, 박정희는 이를 번복시켰다.
 
  그러자 기초마을은 자조마을로, 자조마을은 자립마을로 올라서기 위해 경쟁적으로 노력했다. 그 결과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1979년 말까지 전국 3만4871개 마을 가운데 97%가 자립마을로 승격했다. 기초마을은 모두 사라졌다.
 
  새마을운동뿐이 아니었다.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이나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에서도 잘하는 기업을 지원한다는 원칙이 적용됐다. 수출기업은 각종 금융·세제상의 혜택을 받으려면 해외에서 신용장을 취득해다가 제시해야 했다. 현대자동차는 정부의 금융지원을 받기 위해 국산차를 만들고 수출을 해야만 했다. 정부의 그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이후 지원대상에서 탈락했다. 미국의 아시아경제 전문가인 조 스터드웰은 이를 ‘수출규율’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시장의 힘도 적절히 활용했다. 시장규모가 연간 3만대 수준이던 1973년 정부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신진자동차 세 개의 자동차 회사에 사업을 허가했다. 세 자동차 회사는 작은 내수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후일 신진자동차는 탈락하고 그 자리를 대우자동차가 물려받았다. 기아자동차는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다. 이는 국민차를 만들겠다며 하나의 국영자동차 회사를 만들어 국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면서도 수출을 강제하지 않았던, 그래서 결국 내세울 만한 자동차공업 육성에 실패한 말레이시아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당장의 정치적 이익에 매달리지 말라
 
  다섯째, 박정희는 당장의 정치적 이익보다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했다. 1977년 부가가치세를 도입할 때의 일이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 복잡한 세제를 정비하기 위해 이미 1971년부터 부가가치세 제도 도입을 연구해 왔다. 하지만 막상 부가가치세제를 실제로 도입하려 하자 기존 개별소비세제 아래서 과세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사업자들의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부가가치세 도입이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을 1년 앞둔 마당에 야당은 물론, 여당인 공화당도 반대했다.
 
  부가가치세 도입을 두 주 앞두고 열린 당정협의회에서 박정희는 김용환 재무부 장관에게 “부가가치세를 지금 꼭 도입해야 하느냐?”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냐?”고 물었다. 김 장관이 부가가치세 도입의 당위성을 다시 설명하자, 박정희는 부가가치세제를 예정대로 실시하는 것으로 결단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내가 걱정할 테니, 장관은 경제를 잘 챙기도록 하시오.”
 
  결국 이듬해 총선에서 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보다 득표율에서 1.1% 뒤지는 사실상의 패배를 당했다. 공화당, 중앙정보부, 언론은 여당 패배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부가가치세 도입을 꼽았다. 제10대 총선 결과는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기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하지만 부가가치세제 덕분에 정부재정은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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