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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대선(大選)

안철수 傳奇 - 55개 장면으로 본 그의 55년 인생 (2/3)

“외가도 부자, 처가도 부자 … 1등 인생만 질주해 온 그가 이번에도 1등 할 수 있을까?”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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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이 경남 양산 … 양산서 사는 문재인과 ‘양산(梁山)혈투’
⊙ 아버지는 ‘범천동 슈바이처’, 어머니는 갑부의 딸로 이화여대 출신
⊙ “결혼전까지 양말 아무 데나 던지고 이불 한 번 개 본 적 없어”
⊙ 어릴 적부터 독서광 … 초·중학교 때 성적 하위권이 고교 진학 후 급상승
⊙ 원래 공대 가려다 아버지 가업 이으려 의대로 전환
⊙ 1982년 친구 집에서 처음 컴퓨터 본 후 독학으로 공부
⊙ 서울의대 대학원 나온 뒤 안철수연구소 차려 창업
⊙ 오래전부터 언론 활용, 좋은 이미지 장기적으로 심어
⊙ 무상급식 논쟁 때 정치입문 결심 … 서울시장-대권후보 잇달아 양보
⊙ “금강산 관광-개성공단 즉각 재개 … 개성공단 형태 북에 더 세워야”
⊙ “대미(對美)-대중(對中)외교 균형론”, 노무현의 외교 인식과 비슷
안철수 후보의 부인 김미경씨.
  14. 결혼
 
  안철수는 1988년 4월 김미경씨와 결혼한 과정에 대해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여러 언론이 보도했다.
 
  〈대학생 때 만난 부인 김미경 서울의대 교수는 1년 후배로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이었다. 처음에는 봉사 진료를 하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같이 도서관에서 자리 잡아 주는 사이로 지냈고 쉬는 시간에 커피도 마시면서 사랑을 키웠다. 안철수는 “당시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의과 대학교에서 굉장히 유명한 커플이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함께 대학 생활을 했고 당시 궁핍한 학생이었던 안철수는 아무 것도 없이 같이 살자며 프로포즈를 했다. 생각과 가치관도 비슷했고, 같은 공부에 같은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이를 두고도 거짓말 논란이 일었다. ‘궁핍한 학생’이라는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안철수의 집안은 부산에서 유명한 재력가이고 아내가 된 김미경의 집안도 광주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만한 거부(巨富)였기 때문이다.
 
 
  15. 안철수연구소 설립
 
  안철수는 7년 동안 모아 놓은 모든 백신 자료들을 가지고 비영리 공익법인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려고 정부 부처를 다니며 관계자들을 설득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특히 삼성 소프트웨어 관련 업체에도 찾아가 삼성 로고를 달고 배포한다고 약간의 돈과 인력을 지원해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소프트웨어 업체 관계자가 찾아와 기업을 만들라는 조언을 해 왔고 안철수는 그 의견에 동의하여 1995년 3월 15일 창업을 하게 된다. 이것이 안철수연구소다.
 
  안철수가 의사생활을 그만두고 회사를 차리겠다고 하자 그의 부모는 반대했지만 아내 김미경씨가 “해 보라”고 권하면서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회사 경영자가 됐다.
 
  기업을 만들더라도 백신을 개인에겐 무료로 보급하고, 기업들에만 사용료를 받아 기업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개인 유저들에 한해서 1989년부터 도스용 백신 소프트웨어인 V3+ 네오라는 백신을 무료로 제공했다.
 
  안철수는 사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4년간은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의 월급 날은 매월 25일이었는데 월초부터 직원들의 월급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이었고 자신은 월급을 받지 않고 직원들의 월급을 줄 때도 있었다.
 
  회사를 세우고 몇 개월 지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공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안철수가 미국 유학 중 1997년 미국의 백신업체 맥아피에서 1000만 달러에 인수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맥아피 회장이 안철수 앞에서 직접 인수를 제안했으나 안철수는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회장은 과거 자신에게 매각했던 일본인과 안철수를 통화하게 했다. 일본 대표는 “당시 적자가 났는데 많은 돈을 받고 회사를 팔고 난 후 걱정 없이 잘 지낸다”며 안철수를 설득했으나 뜻을 바꾸지 않았다.
 
  맥아피는 전 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당시 안철수연구소로 인해 한국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인수한 후 안철수연구소를 폐기하고 미국 백신으로 한국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서 이러한 인수 제의를 한 것이었다.
 
  안철수는 회사를 팔면 직원들이 해고돼 직장을 잃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한 한국의 백신이 미국 업체에 의해 장악당하는 결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감정을 소비하는 후회는 원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안철수연구소는 1999년 4월 26일 CIH 바이러스(체르노빌 바이러스) 사건이 일어나면서 흑자로 전환됐다. CIH 바이러스로 인해 30만대가량의 컴퓨터가 파괴돼 수천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역으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바꿨다.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직원이 50명가량이었는데 하루 종일 전화가 걸려와 업무가 마비될 수준이었고 컴퓨터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매출은 급증했고 1999년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업체로는 한글과컴퓨터에 이어 두 번째로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이후 세후순익 100억원 돌파는 안철수연구소가 최초로 달성했다.
 
 
  16. 미국 유학 시절
 
미국 유학 시절의 안철수(오른쪽) 후보와 가족. 안 후보가 MBA 석사 과정을 밟는 동안 아내 김미경씨는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 자격을 땄다.
  2005년 당시 안철수연구소의 사정은 매우 좋았으나 다른 벤처 기업들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안철수는 자신의 능력을 산업 전반에 써 보겠다고 생각했다. 1년간 고민하다 회사 창립 10년이 되는 2005년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이사직을 사임했고 대신 이사회 의장 자리를 맡았다.
 
  발표날까지 직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안철수는 2000년에도 안철수연구소 전 직원 125명에게 각각 650주씩, 자신의 지분에서 총 8만주(전체 발행주식 수의 1.5%)를 나눠 줬다. 그는 “전체가 잘될 수 있다면 개인적 이해타산과 상관없이 어떤 선택도 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갖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CEO를 그만두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에서 MBA 2년 과정을 밟았다. 같은 시기에 딸도 미국에서 유학했는데 그 이유는 안철수의 아내가 나이 마흔에 ‘법’을 배우고 싶다며 의사를 그만두고 미국 로스쿨에 유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5년을 공부한 아내는 캘리포니아 주와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 시기에 안철수도 뒤늦게 미국 MBA 석사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수업을 마치고 나서 가족이 도서관에 모두 모여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그때가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라고 말했다.
 
 
  17. 안철수의 언론활용술
 
  안철수는 언론을 잘 활용하는 인물이다. 언론인 출신과 접촉해 대담집 형태의 책을 내기도 했다.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안철수’라고 치면 91종의 책이 나온다. 이 가운데 ‘안철수 저(著)’라고 나오는 것은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 경영의 원칙》 《안철수의 힘》 《행복 바이러스 안철수》 《CEO안철수》(전 2권, 《CEO 안철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 등이다. 이것을 보면 안철수는 젊은 시절부터 치밀하게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안철수가 스탠퍼드 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나는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이었는데 후배 기자로부터 “안철수가 단독 인터뷰를 하겠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학 간 사람이 왜 한국 신문과 인터뷰를 하자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정말 단독 인터뷰냐”고 몇 차례나 물은 뒤 허락했다.
 
  취재를 다녀온 기자는 얼굴이 흙빛이 돼 있었다. 자신이 인터뷰한 것은 오후였는데 오전에도 한국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전날은?” 하고 물었더니 역시 오전 오후로 나눠 한국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다시 “그럼 당신이 인터뷰한 다음 날은?”이라고 물으니 오전 오후로 또 다른 한국 매체와의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매우 치밀하게 자신을 관리한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단독 인터뷰’라는 말이 안철수의 말인지, 기자가 미국에 가기 위해 지어낸 말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결국 ‘안철수 단독 인터뷰’는 기사화되지 않았다. 미국 출장비만 날린 셈이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한 뒤 비판과 공격을 받자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제가 사실 20년간 언론에 노출됐던 셈인데, 감사하게도 그동안에는 대체로 좋은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기업가로서의 성공, 사회공헌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죠. 그런데 서울시장 선거 이후로 확 달라졌어요.”
 
 
  18. KAIST-서울대 교수 시절
 
  유학 생활을 마치고 2008년 4월 30일 귀국한 안철수는 KAIST 경영학과 교수로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다가 2011년 6월부터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대학원장으로 부임해 2012년 9월까지 역임했다.
 
 
  19. 사외(社外)이사 시절
 
  2005년에는 포스코의 사외이사가 됐으며 2010년에는 포스코 이사회 의장에 선임됐다. 2010년부터 안철수연구소의 사내벤처로 출발한 소셜네트워크 게임 업체인 노리타운스튜디오의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2011년에는 학교법인 포항공과대학교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20.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와 안철수
 
안철수 후보는 이명박 정권 시절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001년 5월 18일 김대중 정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제5분과(교육정보) 자문위원으로 위촉됐으며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국민대표로 8인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2010년 6월부터 이명박 정부 말기까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제2기 민간위원직을 수행했다.
 
  안철수는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30대 후반에 김대중 정부의 정책기획위원을 맡았는데요, 당시 한상진 서울대 교수가 위원장을 맡아 국가의 미래와 인권 개선 등에 대해 토론하고 정책을 건의했습니다. 저는 정보화 등 제 전문 분야에 관한 발표를 맡았는데 인권 등 다른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토론하며 견문을 많이 넓혔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정보통신부 장관직을 제안받고 사양했습니다만 청와대 회의에서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기업의 투명경영 등 경제개혁에 대한 의견을 적극 개진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미래기획위원회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공정거래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를 비롯해 창업 활성화를 위한 대안, 정보기술 산업의 애로사항을 이야기하는 등 경제 전반에 대해 비판적 의견과 대안을 많이 제시했죠. 그런데 이야기를 해도 실행이 되지 않아 참 갑갑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상생’ 얘기를 했을 때 “이슈를 꺼냈으니 꼭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별 소용이 없더군요. 전문 분야와 좀 거리가 있었던 일로는 조국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대검찰청의 정책자문위원을 맡았던 적이 있어요. 검찰개혁 과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검찰의 컴퓨터 수사자문위원과 국가정보원의 정보보호자문위원을 하면서 공안기관을 들여다볼 기회도 있었고요.”
 
 
  21. 안철수와 시민단체
 
  “빈곤 등 민생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하게 된 것은 아름다운재단 이사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이사회에서 재단의 사업을 기획하고 결과를 파악하고 또 희망제작소의 사회적 기업가 양성 프로그램에서 강의도 하면서 ‘사회개혁’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당시 학교 안팎의 빡빡한 강의일정 외에 사회적 기업가 프로그램을 위해 대전에서 서울을 매주 두 번씩 오가면서 정신없이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안연구소 차원에서 아름다운재단에 매년 물품을 기부하고 일일 점원으로 활동한 일도 있고요.”
 
 
  22. 안철수가 존경하는 정치인 - 김근태
 
안철수 후보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은 김근태 전 의원이다.
2015년 12월 30일 김근태 전 의원 추모미사에서 김 전 의원의 미망인 인재근 의원에게 인사하는 안철수 후보.
  “저는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위해 애쓴 분들로부터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고 김근태 의원 등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해서도 큰 고마움을 느낍니다. 다만 저는 같은 시기에 전문가로서 열심히 살면서 사회에 제 몫을 했고 그 가치 역시 낮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화운동 경험이 없는 이들은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고도 하던데요. 모든 사람이 같은 길을 걸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고 김근태 의원과 특별히 개인적인 인연은 없습니다만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진심으로 말씀하시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분이 하셨던 말씀에 대해서도 많이 공감했고요.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안철수의 좌우명
 
  안철수는 ‘무엇인가 도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을 세 가지 들었다.
 
  “첫째, 내가 정말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인가.
 
  둘째,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열정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인가.
 
  셋째, 실제로 내가 일을 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일인가.”
 
 
  24. 정치 입문(入門)
 
2011년 9월 7일 경북 구미 금오공과대학교에서 열린 ‘청춘콘서트’에서 강연하는 안철수 후보.
안철수 후보는 대학생들과의 청춘콘서트 행사 등을 통해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안철수는 여야 정치권에서 정치 입문 제의를 많이 받아 왔다. 젊은층의 지지로 인해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서울시장으로 출마할 것을 제의한 적도 있고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직 제의를 한 적도 있으며 청와대 수석, 국회의원 출마 제의 등등 종류별로 다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안철수는 그동안 “정치를 잘할 자신이 없고 힘(권력)을 즐기지 못하기에 거절했다”며 “실무적인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앞으로 정치를 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해 왔다.
 
  그런 그가 정치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은 2011년 8월 이후로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이 “안철수가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고 정치적 발언을 언론에 알리면서부터다.
 
  이전에 정치 입문에 대해 단호하게 부인해 왔던 안철수의 입장도 애매하게 바뀐 것을 두고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됐으며 9월 실시된 ‘청춘콘서트’에는 기자가 몰려 기자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안철수는 훗날 정치에 나서기로 한 이유를 직접 밝혔다.
 
  “정치에 나서기로 한 것은 한나라당 오세훈 시장이 국민투표를 실시해 무상급식에 찬성하는 결과가 나오면 시장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히면서부터였다. 그 당시 안철수는 무상급식을 격렬히 반대하는 한나라당의 행태를 아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안철수는 자신의 좌우명 세 가지를 정치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첫째 ‘내가 정말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인지’는 정치를 할 명분이 됐는데 둘째와 셋째, 즉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열정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인지’와 ‘실제로 내가 일을 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는데 최근 그것에 대한 의문이 다 풀렸다는 것이다.
 
 
  25. 안철수의 1차 철수(撤收) - 서울시장 불출마
 
  안철수의 서울시장 선거 출마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자 주요 언론사들은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안철수의 지지율은 압도적이었지만 안철수는 자신과 오래전부터 각별한 관계였던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출마를 양보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있은 다음 날 안철수는 박원순과 불과 17분간 만난 뒤 서울시장 후보가 박원순으로 단일화했음을 발표했다. 일단은 ‘누가 출마하느냐’, ‘단일화가 되느냐’ 등이 모두 선거지형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에 또 다시 많은 기자가 몰려들었다. 이 자리에서 안철수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존중하는 동료이신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서 그분의 포부와 의지를 충분히 들었다. 우리 사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시민사회에 새로운 꽃을 피운 분으로서 서울시장을 누구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분이다. 저에 대한 기대도 우리 사회 변화의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우리 미래 세대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겠다. 지금까지 심정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이해해준 박경철 원장님께도 감사하다. 단일화에 대한 아무런 조건도 없다. 출마 안 하겠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꼭 시장 되셔서 그 뜻 잘 펼치시기 바란다.”
 
 
  26. 안철수의 2차 철수 - 대통령 후보 사퇴
 
  서울시장 후보에서 사퇴하자 안철수는 일약 대통령 후보로 도약했다. ‘안철수 신드롬’ ‘안철수 열풍’이 전국을 강타한 것이다. 이것이 안철수의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인지 우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안철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1대1 가상대결에서 43.2%를 기록해 40.6%를 기록한 박근혜를 이겼다. 이명박 정부 들어 박근혜가 차기 대선 지지율 2위를 기록한 것은 처음이다. 휴대전화 여론조사에서는 안철수 59.0%, 박근혜 32.6%로 나와 차이가 더 벌어졌다. 야권 후보들 중에는 지지율 31%를 기록해 2위를 차지한 문재인(16%)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하지만 안철수는 2012년 대선 출마에 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2011년 9월 7일 안철수는 출근길에서 차기 대선 출마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가당치도 않죠. 사실 생각해 볼 여유도 없고 …”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안철수가 이미 정치적 야심을 품고 2011년 11월부터 대선을 겨냥한 ‘과외’를 받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2012년 9월 19일 안철수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각종 여론조사 시 유력한 대권주자였으나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 과정에 여러가지 마찰이 있었으며 2012년 11월 23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후보직 사퇴를 선언했다. 12월 6일 안철수는 문재인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발표, 12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부산, 군포, 대전, 광화문에서 문재인 후보와 4번의 공동유세를 하였고 대구, 강원, 전북 등 전국 40여 곳에서 지원유세를 했다. 문재인은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에게 패했다.
 
 
  27.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는 안철수의 말이 아니다
 
  북한문제에 관해서는 햇볕정책 지지자인 김근식 경남대학교 교수가 안철수를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근식 교수는 언론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안철수에 대해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제 시각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것이 지금은 안철수가 한 말인 것처럼 오도(誤導)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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