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5월 대선(大選)

안철수 傳奇 - 55개 장면으로 본 그의 55년 인생 (2/3)

“외가도 부자, 처가도 부자 … 1등 인생만 질주해 온 그가 이번에도 1등 할 수 있을까?”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고향이 경남 양산 … 양산서 사는 문재인과 ‘양산(梁山)혈투’
⊙ 아버지는 ‘범천동 슈바이처’, 어머니는 갑부의 딸로 이화여대 출신
⊙ “결혼전까지 양말 아무 데나 던지고 이불 한 번 개 본 적 없어”
⊙ 어릴 적부터 독서광 … 초·중학교 때 성적 하위권이 고교 진학 후 급상승
⊙ 원래 공대 가려다 아버지 가업 이으려 의대로 전환
⊙ 1982년 친구 집에서 처음 컴퓨터 본 후 독학으로 공부
⊙ 서울의대 대학원 나온 뒤 안철수연구소 차려 창업
⊙ 오래전부터 언론 활용, 좋은 이미지 장기적으로 심어
⊙ 무상급식 논쟁 때 정치입문 결심 … 서울시장-대권후보 잇달아 양보
⊙ “금강산 관광-개성공단 즉각 재개 … 개성공단 형태 북에 더 세워야”
⊙ “대미(對美)-대중(對中)외교 균형론”, 노무현의 외교 인식과 비슷
안철수 후보의 부인 김미경씨.
  14. 결혼
 
  안철수는 1988년 4월 김미경씨와 결혼한 과정에 대해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여러 언론이 보도했다.
 
  〈대학생 때 만난 부인 김미경 서울의대 교수는 1년 후배로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이었다. 처음에는 봉사 진료를 하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같이 도서관에서 자리 잡아 주는 사이로 지냈고 쉬는 시간에 커피도 마시면서 사랑을 키웠다. 안철수는 “당시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의과 대학교에서 굉장히 유명한 커플이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함께 대학 생활을 했고 당시 궁핍한 학생이었던 안철수는 아무 것도 없이 같이 살자며 프로포즈를 했다. 생각과 가치관도 비슷했고, 같은 공부에 같은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이를 두고도 거짓말 논란이 일었다. ‘궁핍한 학생’이라는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안철수의 집안은 부산에서 유명한 재력가이고 아내가 된 김미경의 집안도 광주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만한 거부(巨富)였기 때문이다.
 
 
  15. 안철수연구소 설립
 
  안철수는 7년 동안 모아 놓은 모든 백신 자료들을 가지고 비영리 공익법인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려고 정부 부처를 다니며 관계자들을 설득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특히 삼성 소프트웨어 관련 업체에도 찾아가 삼성 로고를 달고 배포한다고 약간의 돈과 인력을 지원해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소프트웨어 업체 관계자가 찾아와 기업을 만들라는 조언을 해 왔고 안철수는 그 의견에 동의하여 1995년 3월 15일 창업을 하게 된다. 이것이 안철수연구소다.
 
  안철수가 의사생활을 그만두고 회사를 차리겠다고 하자 그의 부모는 반대했지만 아내 김미경씨가 “해 보라”고 권하면서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회사 경영자가 됐다.
 
  기업을 만들더라도 백신을 개인에겐 무료로 보급하고, 기업들에만 사용료를 받아 기업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개인 유저들에 한해서 1989년부터 도스용 백신 소프트웨어인 V3+ 네오라는 백신을 무료로 제공했다.
 
  안철수는 사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4년간은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의 월급 날은 매월 25일이었는데 월초부터 직원들의 월급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이었고 자신은 월급을 받지 않고 직원들의 월급을 줄 때도 있었다.
 
  회사를 세우고 몇 개월 지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공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안철수가 미국 유학 중 1997년 미국의 백신업체 맥아피에서 1000만 달러에 인수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맥아피 회장이 안철수 앞에서 직접 인수를 제안했으나 안철수는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회장은 과거 자신에게 매각했던 일본인과 안철수를 통화하게 했다. 일본 대표는 “당시 적자가 났는데 많은 돈을 받고 회사를 팔고 난 후 걱정 없이 잘 지낸다”며 안철수를 설득했으나 뜻을 바꾸지 않았다.
 
  맥아피는 전 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당시 안철수연구소로 인해 한국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인수한 후 안철수연구소를 폐기하고 미국 백신으로 한국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서 이러한 인수 제의를 한 것이었다.
 
  안철수는 회사를 팔면 직원들이 해고돼 직장을 잃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한 한국의 백신이 미국 업체에 의해 장악당하는 결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감정을 소비하는 후회는 원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안철수연구소는 1999년 4월 26일 CIH 바이러스(체르노빌 바이러스) 사건이 일어나면서 흑자로 전환됐다. CIH 바이러스로 인해 30만대가량의 컴퓨터가 파괴돼 수천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역으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바꿨다.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직원이 50명가량이었는데 하루 종일 전화가 걸려와 업무가 마비될 수준이었고 컴퓨터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매출은 급증했고 1999년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업체로는 한글과컴퓨터에 이어 두 번째로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이후 세후순익 100억원 돌파는 안철수연구소가 최초로 달성했다.
 
 
  16. 미국 유학 시절
 
미국 유학 시절의 안철수(오른쪽) 후보와 가족. 안 후보가 MBA 석사 과정을 밟는 동안 아내 김미경씨는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 자격을 땄다.
  2005년 당시 안철수연구소의 사정은 매우 좋았으나 다른 벤처 기업들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안철수는 자신의 능력을 산업 전반에 써 보겠다고 생각했다. 1년간 고민하다 회사 창립 10년이 되는 2005년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이사직을 사임했고 대신 이사회 의장 자리를 맡았다.
 
  발표날까지 직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안철수는 2000년에도 안철수연구소 전 직원 125명에게 각각 650주씩, 자신의 지분에서 총 8만주(전체 발행주식 수의 1.5%)를 나눠 줬다. 그는 “전체가 잘될 수 있다면 개인적 이해타산과 상관없이 어떤 선택도 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갖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CEO를 그만두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에서 MBA 2년 과정을 밟았다. 같은 시기에 딸도 미국에서 유학했는데 ...

프리미엄 결제안내

본 기사는 유료기사입니다. 전문을 보시려면 로그인 후 프리미엄회원 등록을 하시기 바랍니다. 로그인하기

프리미엄 결제하기

* 월간조선 정기독자는 추가 비용 없이 프리미엄 이용이 가능합니다.   정기독자 프리미엄 신청

캐시 결제 안내(건별기사)

캐시로 결제하기

캐시 충천은 1,000원부터 입니다.
캐시로 결제된 기사는 결제 후 1시간 동안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캐시 충전 하러 가기      캐시 충전내역 확인법

* 캐시를 정상적으로 충전 후 위의 '캐시로 결제하기' 버튼을 한번더 클릭하여 주셔야만 기사전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