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5월 대선(大選)

안철수 傳奇 - 55개 장면으로 본 그의 55년 인생 (1/3)

“외가도 부자, 처가도 부자 … 1등 인생만 질주해 온 그가 이번에도 1등 할 수 있을까?”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고향이 경남 양산 … 양산서 사는 문재인과 ‘양산(梁山)혈투’
⊙ 아버지는 ‘범천동 슈바이처’, 어머니는 갑부의 딸로 이화여대 출신
⊙ “결혼전까지 양말 아무 데나 던지고 이불 한 번 개 본 적 없어”
⊙ 어릴 적부터 독서광 … 초·중학교 때 성적 하위권이 고교 진학 후 급상승
⊙ 원래 공대 가려다 아버지 가업 이으려 의대로 전환
⊙ 1982년 친구 집에서 처음 컴퓨터 본 후 독학으로 공부
⊙ 서울의대 대학원 나온 뒤 안철수연구소 차려 창업
⊙ 오래전부터 언론 활용, 좋은 이미지 장기적으로 심어
⊙ 무상급식 논쟁 때 정치입문 결심 … 서울시장-대권후보 잇달아 양보
⊙ “금강산 관광-개성공단 즉각 재개 … 개성공단 형태 북에 더 세워야”
⊙ “대미(對美)-대중(對中)외교 균형론”, 노무현의 외교 인식과 비슷
사진=뉴시스
  안철수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의 지지율이 급등하고 있다. 3월 초까지만 해도 한자릿수에 머물렀지만 3월 말부터 두자릿수에 진입했고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의 1대1 가상 대결에서는 문 후보를 앞지르는 결과도 나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3자·4자·5자 대결에서도 문 후보와 양강(兩强) 구도다.
 
  안철수 후보는 서울대 출신 의사에서 컴퓨터 백신 회사 CEO로 변신했다가 교단(敎壇)으로 돌아가는 듯하더니 정계에 입문해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다가 박원순 서울시장, 대권후보로 발돋움했다가는 문재인씨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그의 55년 삶을 55개 장면으로 풀어 보기로 한다(문재인 후보의 삶을 살펴보는 《문재인전기》는 《월간조선》 2월호에 게재).
 
 
  1. 출생
 
  1962년 2월 26일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상가 1길10에서 안영모-박귀남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안 후보의 부친은 당시 밀양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안 후보가 태어난 집은 현재 갈비집으로 변했다고 한다.
 
 
  2. 안철수의 부모
 
  안 후보의 아버지 안영모(87)씨는 의사다. 원래 공고를 나왔지만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으며 1963년부터 부산의 판자촌이었던 범천동에 병원을 열어 최근까지 운영했다. ‘범천동 슈바이처’라는 별명도 얻었다.
 
  안씨의 집안은 경남 양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양산 서창에서 태어난 그의 할아버지는 목수 일을 했으며 안영모씨의 아버지, 즉 안 후보의 증조부는 부산상업학교를 나와 농협지점장을 지냈다.
 
  안철수의 어머니 박귀남(83)은 부잣집 셋째 딸로 이화여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안철수 외가는 상당히 유력한 집안이었는데 당시 ‘부산에서는 외할아버지 함자만 대면 통하지 못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안철수 부모는 중매를 통해 결혼했고 안철수는 어머니에 대해 “부잣집 딸로 귀염만 받다가 시집을 가셨다”고 했다. 박귀남은 대학을 졸업했으나 사회생활을 한 것 같지는 않고 결혼 후에는 살림과 육아에만 전념한 듯하다. 박귀남은 그 유명한 ‘자녀에게 높임말을 하는 어머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이 어떤 교육철학이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박귀남은 자녀들에게 자립심과 사회성을 키워 주는 양육과정을 보이지 못했다. 그래서 안철수는 결혼 전까지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 던지곤 했다. 그리고 한 번도 자신의 이불을 개 본 적이 없었다.
 
 
  3. 안철수라는 이름
 
  “안철수라는 이름은 저희 부친이 지으셨어요. 돌림자나 호를 쓴 건 아니고, 부친이 아는 분 중에 이름을 지으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께 찾아가 만든 이름이에요. 그래서 저희 아이들 이름은 다 달라요. 둘째는 안상욱, 셋째는 안선영. 부친이 아이들을 참 예뻐하셨어요.”(안철수의 부친 안영모씨, 2001년 《여성조선》과의 인터뷰에서)
 
 
  4. 안철수의 외가 - 부산의 최고 부자
 
  안 후보의 외조부는 박덕봉(朴德奉·1906~1993)씨다. 안 후보의 외조부와 그의 딸이자 안 후보의 어머니인 박귀남씨는 부산시 동구 수정동 232번지에 살았다.
 
  이곳 주민들에 따르면 “수정동 일대에서는 우체부에게 박덕봉 이름 석 자만 대면 바로 그 집을 찾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수정동은 조선시대부터 왜관이 설치된 곳으로 일제시대 일본 거류민이 가장 많았던 곳이다. 특히 대마도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이 집은 일제시대 조선인을 착취하던 거부 고미야 만지로(小宮萬次郞)가 살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고미야는 대마도 출신으로 1877년 조선에 건너와 각종 사업을 벌여 부를 축적했는데 그중에서도 해녀들을 착취하는 조선해조주식회사(朝鮮海藻株式會社)와 흑연광업소 사장 등을 지냈다.
 
  안 후보의 부친 안영모씨의 친구에 따르면, 안 후보의 외조부 박덕봉은 동구의 유명한 재력가로 수정동 일대(현 부산은행 수정동지점 주변)의 많은 일본주택과 상가를 소유했으며 이를 임대하고 임대료를 수금하러 다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고 한다. 박덕봉이 엄청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사망하기 오래 전부터 자식들에게 부동산을 나누어 줬다.
 
 
  5. 부산 동성국민학교 시절
 
  안 후보는 2009년 6월 17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직접 말한 바 있다. 학창 시절 반 60명 중 30등을 할 정도로 평범했으며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는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대담집에서도 안 후보는 “초등학교를 한 살 빨리 입학했으며 공부를 아주 못했다. 키도 제일 작았다. ‘앞으로 나란히’라는 구령에 맞춰 손을 앞으로 뻗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 한글도 초등학교 들어가서 익혔는데 공부도 영 못 따라갔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내내 공부를 못했는데요, 성적표에 ‘수’, ‘우’가 별로 없었어요. 옛날 MBC에서 〈성공시대〉를 찍을 때 PD분께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부산 가서 성적표를 직접 촬영해 와서 TV에 방영한 적이 있어요. 그때 보니 성적표에 ‘수’가 보이긴 하더군요. 제 이름 철수예요.”
 
  독서는 매우 좋아했다. 국민학교 재학 시절 학교 도서관의 책을 매일 몇 권씩 읽어 결국 도서관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었다. 당시 도서관 사서는 매일 몇 권씩 대출과 반납을 하는 안철수가 장난친다고 생각해서 책 대출을 거부할 정도였다. 안철수는 “당시 책의 페이지 수, 발행 연월일, 저자까지 모두 다 읽고 바닥에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그것마저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활자 중독증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교과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과학책이나 소설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린 철수는 숫기 없는 아이였다고 한다. 알을 품으면 부화한다는 말에 메추리알을 품고 자기도 했으며 동네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리기보다 병아리나 토끼와 놀기를 즐겼다. 동생이 실수로 키우던 병아리를 밟아 날개가 부러졌다. 아들이 너무 슬퍼하자 부친이 다친 병아리에게 깁스를 해 줬다.
 
 
  6. 부산 중앙중학교 시절
 
중학교 졸업식에서의 안철수 후보(왼쪽에서 셋째). 안 후보의 왼쪽이 아버지 안영모씨, 오른쪽은 남동생 상욱씨, 맨 왼쪽은 여동생 선영씨.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책에도 독서에 대한 부분이 자세히 나온다.
 
  “아버지께서 아는 사람이 병원에 책을 팔러 오면 어린이용 세계문학전집, 과학전집 등을 사 주셨어요. 그러면 마음이 급해서 박스를 막 뜯어 책을 꺼낸 뒤 박스 위에 앉아 읽었지요. 이렇게 닥치는 대로 읽는 버릇이 중학교 때까지 갔는데 아마 평생 읽은 책의 절반 정도는 중학교 때까지 본 것 같아요. 고등학교, 대학 땐 아무래도 입시공부, 전공공부 하느라 그전처럼 다른 책을 많이 읽진 못했고요. 만일 제가 초등학교 때 학교공부를 잘했다면 딴 생각 없이 의사가 되어 평생 그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 학교공부에 흥미를 못 붙이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은 것이 인문학적 소양을 넓혀 주고 인생 전체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도 전교는 둘째치고 반에서 1등 한 번 못해 봤고요. 성적이 조금씩 올라 중3 때 반에서 2, 3등 했던 것 같고.”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못했으니 반장을 시켜 주지 않았고요. 중학교 때 언젠가 2학기에 선거로 반장에 당선됐어요. 그런데 1학기 때 선생님이 지명해서 반장을 했던 친구가 전교 부회장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전교 부회장이 학급 반장을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되니 선거를 취소하자’고 하셨어요. 당시 그 친구 엄마가 유명한 치맛바람 엄마였는데 선생님이 그러시는 걸 보고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꼈어요. 중학생치고는 조숙하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같은 사회의식이 강한 소설을 한창 읽을 때였는데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라고 생각했죠.”
 
 
  7. 부산고등학교 시절
 
  “고등학교 때 조금씩 (성적이) 나아지더니 고3 때 반에서 1등 하고 이과 전체 1등을 처음 해 봤어요. 그때만 해도 부산고등학교에서 이과 1등 하면 서울의대를 갔죠.”
 
  “고등학교 땐 공부에 집중하느라 학급 임원을 잘 맡지 않는 분위기였고요.”
 
  안철수의 부산 집에는 한의사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의 동생이 경희대 한의과를 나와 현재 서울에서 개업하고 있다. 복수의 한의사들에 따르면 안 후보의 집은 부자였으며 어머니가 ‘투자’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안 후보는 고교시절부터 과외를 받으러 서울에 올라와 비행기 마일리지가 상당했다고 한다.
 
 
  8. 서울의대 시절
 
  “(의대를) 제 스스로 선택한 것은 맞아요. 저는 원래 초등학교 때부터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과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죠. 어릴 때 라디오부품을 사다가 조립해서 진공관 라디오를 직접 만들기도 했어요. 일본어로 된 설계도를 보고 부산 남포동 부품상가에 가서 부품을 구입해 조립하곤 했죠. 그런데 고등학교에 가 보니 장남이 가업(家業·의사)을 잇는다고 하면 부모님이 기뻐하실 것 같았어요. 취미가 직업이 될 필요가 있을까, 기계 만지는 것은 취미생활로 하자고 생각했고요. 아버지도 환자가 없을 때는 좋아하는 소설을 읽으셨거든요. 부모님은 ‘얘가 공대 가겠지’ 하고 계시다가 의대를 가겠다고 하니 아주 기뻐하셨어요.”
 
  “의대에 가서 임상의가 되는 대신 기초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대학에 가서 처음 알았어요. 환자를 한명 한명 직접 진료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병의 원인을 알아내거나 치료법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기계를 좋아하니 실험하고 결과를 측정하는 데도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고요. 남들이 흔히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도 흥미롭겠다 싶었고 계속 연구해서 노벨의학상에 도전해 보자는 꿈도 가졌었죠. 그때나 지금이나 의대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가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의료봉사와 관련) 가톨릭학생회가 주관하는 진료봉사였는데요, 저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 가입했습니다. 의대 본과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3년간 활동했죠. 매주 토요일 오후에 서울 구로동의 한 성당을 빌려서 진료소를 차렸어요. 무의촌 진료를 가면 기본적으로 대변검사를 해서 회충 알이 나오면 구충제를 먹게 했어요. 어느 해 여름에 제가 대변검사를 맡았는데 수백 명의 변을 채취해서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회충 알이 있는지 찾아내는 작업을 했죠. 그 당시는 대부분의 경우 알이 발견됐고요.”
 
  어릴 때부터 피를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그에겐 만만치 않은 하루하루였다. 동물 해부를 시작한 본과 1학년 때부터는 일상이 ‘지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학업을 포기할 뻔한 적도 있었다.
 
  결국 안철수는 의대 본과 1학년 겨울방학 때, 시쳇말로 ‘멘탈붕괴’ 상황에 직면한다. 고향집에 갔다가 다음 학기 공부가 걱정되어 예정보다 일주일 일찍 서울로 올라가 하숙방에 들어선 안철수에게 불현듯 지독한 외로움과 공부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는 견디다 못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 공부가 너무 힘듭니다”라고 말하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안철수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 바로 서울로 올라가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내려왔다. 안철수의 아버지 소개로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은 후 학업에 복귀했다. 훗날 안철수는 그때 받았던 상담이 도움이 되지 않아서 결국은 혼자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고 말했다.
 
 
  9. 안철수와 컴퓨터의 조우(遭遇)
 
안철수연구소 시절의 안철수 후보.
대학 3학년 때 컴퓨터와 만난 그는 결국 의사 대신 벤처기업인의 길을 걸었다.
  서울의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2년 가을, 친구의 하숙집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하면서 이후 컴퓨터에 흥미를 갖게 됐다. 독학으로 컴퓨터를 배웠으며 난생 처음 돈을 빌린 것도 새로 나온 IBM 컴퓨터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0. 서울의대 대학원 시절
 
  198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과 생리학 교실에서 기초의학을 전공했다. 1988년 〈동방 결절 내에서의 흥분 전도에 미치는 Adrenaline, Acetylcholine, Ca++ 및 K+의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1991년 〈토끼 단일 심방근 세포에서 Bay K 8644와 Acetylcholine에 의한 Ca2+ 전류의 조절기전〉이라는 논문으로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1. 안철수와 컴퓨터 바이러스의 해후(邂逅)
 
  의대 대학원에서 심장 부정맥을 연구하는 ‘심장 전기 생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처음 컴퓨터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그가 컴퓨터를 공부한 이유는 의사로서 전공 실험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컴퓨터 잡지에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한국에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자신의 컴퓨터와 50장가량의 디스켓을 검사해 보니 3장의 디스켓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었다.
 
  프로그램의 세부 데이터를 살피는 프로그램을 통해 확인해 보니 프로그램에 누군가 (c)Brain이라고 써 놓은 것이었다. 그 바이러스는 최초로 파키스탄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떤 형제 둘이 컴퓨터 가게를 차려 자기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팔아 가게를 운영하려 했다.
 
  당시는 프로그램을 하나만 팔아도 금세 불법 복제가 되는 시절이었다. 형제는 불법 복제 때문에 가게가 망하자 화가 나 불법 복제를 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이러스의 시작이었다.
 
  이 바이러스의 원본에는 만든 사람의 이름, 주소, 집전화까지 모두 표시되어 있었으나 국내에 유입된 바이러스에는 그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지워져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한국까지 오는 데 3년이 걸렸다. 그 당시엔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손에서 손으로 파키스탄에서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안철수는 컴퓨터 언어 공부를 막 끝낸 참이었다. 절묘한 시기에 바이러스를 만난 것이었다. 그러던 중 후배가 안철수에게 찾아와 바이러스를 치료할 방법을 물었다. 안철수는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나 후배는 이해하지 못했다.
 
  답답한 안철수는 직접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 밤을 새워 분석한 끝에 1988년 6월 10일 바이러스가 감염된 과정을 반대로 하면 치료할 수 있겠다 생각하여 ‘백신’(Vaccine)이란 이름의 앤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치료에 성공했다. 이것이 V3 최초 버전인 V1이다.
 
  안철수는 자신이 만든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이 세계 최초(《강원일보》 2011년 7월 보도)라고 했으나 실제로 처음 문서화된 컴퓨터 바이러스 제거 프로그램은 1987년에 발표된 번트 픽스(Bernd Fix)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하간 안철수가 백신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곳저곳에서 도와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안철수는 이후로도 신종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혼자서 만든 백신을 무료로 배포했다. 이후 당시 악명을 떨친 LBC, 예루살렘 바러이스 등을 치료하는 기능이 추가된 ‘V2’, ‘V2Plus’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했다. 특히 V2Plus는 한 기업이 디스켓으로 제작해 무상으로 대량 배포해 높은 인기를 누렸다.
 
  7년간 안철수는 낮에는 의사, 밤에는 백신 제작자로 이중 생활을 했다.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만큼 나도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 방송에서 밝혔다. 의사 생활과 백신 제작을 모두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백신 제작을 하고, 의대에 가서는 박사 과정으로 생활했다. 당시 한국에는 안철수를 제외하고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12. 해군 군의관 시절
 
  안철수는 2009년 6월 한 방송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군대에 갈 무렵 미켈란젤로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렸는데, 이에 대한 백신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3개월 동안 피해가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V3 최초 버전을 군대 가는 날 1991년 2월 6일에 만들어서 PC통신으로 전송하고 입대했다. 내무반에서 다른 사람들이 입대 전날 가족들과 헤어진 얘기를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족들한테 군대 간다는 말을 안 하고 나왔다.”
 
  입대하는 날까지 가족과 만나지도 못한 채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었다는 이야긴데 그의 아내인 김미경 서울대 의대 교수는 2011년 8월 20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로 인해 안철수가 자신을 미화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군대 가는 날 아침까지 백신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하더니 허둥지둥 지하철 타고 서울역으로 달려가더라. 기차 태워 보내고 혼자 돌아오는데 무지 섭섭했다.”(김미경 교수)
 
  해군 군의관 시절 안철수는 가장 빨리 퇴근하고 가장 늦게 출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에 참여한 복수의 해군 고위 장성들에 따르면 해군 시절 그의 별명은 ‘뺀질이’였으며 월요일에 늦기 일쑤였다고 증언했다. 안철수는 이후 대위로 전역했다.
 
 
  13. 위수(衛戍)지역 이탈 논쟁
 
  안철수가 해군 군의관 시절, 주말마다 진해에서 서울로 비행기 타고 왕래한 것 때문에 위수지역 이탈 문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위수’란 군대가 일정한 지역의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려고 장기간 머무르면서 경비하는 일을 말한다. 이에 따라 위수지역은 군인이 외출이나 숙박을 허용하는 지역이란 뜻인데 육군의 경우 위수지역이 있지만 해군은 위수지역 개념이 없다는 말도 있다. 해병대의 경우 제2해병사단만 수도군단 통제를 받아 위수지역 개념이 있고 제1해병사단은 신속대응부대를 제외하고는 2시간 내 복귀, 그리고 섬인 제6해병여단 및 제9해병여단은 따로 위수지역이 없다. 배를 타지 않으면 섬을 못 벗어나기 때문이다. 애초 해군은 육군과 달리 지역이 아니라 시간제였다고 한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711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정기구독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