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실패의 연구 - 대통령 박근혜는 왜 파면됐나

“최순실의 2가지 국정 어젠다 - 충청대망론과 통일예언”
“2012년부터 최순실·정윤회의 발호 시작, 정윤회는 이혼 후 ‘팽’당했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권한 위임을 싫어했고 대 여야관계의 중요성을 몰랐다
⊙ 대통령직 인수도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 아버지를 넘어서겠다는 욕심이 너무 강렬해 판을 너무 크게 벌였다
⊙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대응에 미숙했다
⊙ 과도하게 공천에 개입했고 국회를 불신했다
⊙ 개헌(改憲)카드를 위기 타개용으로 써먹었다
⊙ 성골은 최순실과 이혼 전의 정윤회뿐… 문고리 3인방도 진골
⊙ 월악산 도사의 ‘통일예언’을 확신
⊙ 이완구 총리 기용과 반기문 대권 후보론의 바탕은 ‘충청대망론’
⊙ 친박은 소모품에 불과
⊙ 역대 비서실장 중 한 명은 최순실에 조력
⊙ 검찰도 최순실 치마폭 벗어날 수 없어
  
함성득 전 고려대 교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기를 1년여 앞두고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당했다. 헌법재판의 파면 인용 결정에 대한 찬반 논쟁은 지속될 전망이지만 박 전 대통령이 왜 실패(失敗)했느냐에 대한 원인 분석은 필요하다. 왜 과반수 지지를 받은 박 전 대통령은 제동장치 없이 급전직하(急轉直下)한 것일까.
 
  한국 대통령학의 원조인 함성득 한국대통령학연구소장(전 고려대 교수)은 헌재의 심판이 있기 사흘 전인 올해 3월 7일 《제왕적 대통령의 종언》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함 소장은 박 전 대통령의 파면을 예견이라도 한 듯 그의 실패를 분석했으며 그간 알려지지 않은 비화(話)를 저서에서 밝혔다.
 
  함 소장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들 모두는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뇌물을 받았다고 자인한 대통령도 있었기에 아직 유죄 확정이 되지 않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은 가혹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글은 차기 대권을 꿈꾸는 잠룡(潛龍)에게도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박근혜의 8가지 성공 이유
 
국민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역할을 기대했다.
  첫째, 박근혜 전 대통령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엄청난 역경을 극복했다.
 
  둘째,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줬다.
 
  셋째, 그는 ‘박정희 향수’에 기반한 절대 지지층 30%를 기본으로 가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넷째, 육 여사가 돌아가신 후 1974년부터 1979년까지 5년간 청와대에서 퍼스트레이디 대리자격으로 국정을 경험했다.
 
  다섯째, 5선 의원으로 의정 경험도 풍부했다.
 
  여섯째,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의 거의 모든 선거에서 승리했던 ‘선거의 여왕’이었다.
 
  일곱째, 2007년 8월 대통령 후보 결정을 위한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경선 결과 승복 연설은 ‘경선 불복’을 우리 정치사에서 날려버려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초석을 놓았으며 국민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여덟째, 이 승복으로 그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그늘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자기만의 새로운 정치색깔을 국민에게 보여줬다. 이것이 그를 정치적으로 생존할 수 있게 했으며 나아가 2012년 대선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1〉 권한 위임을 싫어했고 대 여야관계의 중요성을 몰랐다
 
  함 소장은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박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왔다고 했다. 이후는 그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박근혜 대통령은 내게 감사전화를 했다. 통화에서 그는 “좋은 정책을 많이 만들어서 좋은 대통령이 되겠다”며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는 “이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주요 정책의 대부분은 장관과 참모에게 맡기고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일은 정치, 특히 원만한 대 여야관계 형성입니다. 그것이 정책 성공의 지름길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만들어도 입법화가 안 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서 약 10분간 유선상으로 논쟁이 있었다. 나는 당선자에게 “시간이 지나면 저의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 대통령직 인수도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1월 6일 김용준 위원장 등과 함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현판식을 가졌다. 인수위원회는 체계적이지 못한 일처리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대선 전 그의 대통령직 인수에 대한 준비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그는 대선 전부터 내가 강조한 취임 전 대통령직 인수에 대한 준비, 즉 정권 인수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대선 며칠 전 내가 집필한 책(《대통령 당선자의 성공과 실패》)을 보내달라고 해서 이재만을 통해 보냈다. 대선 후 전화통화에서 그는 잘 읽었다고 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대통령직 인수위 임종훈 실장은 이 책을 인수위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했다.
 
  그의 대통령직 인수는 같은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로부터 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정권 인수기부터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 결과 그는 취임 직후 지지율이 44%에 그치면서 역대 최저 지지율로 임기를 시작한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직 인수위와 관련한 가장 큰 문제는 인사(人事)와 관련된 것이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구성과 차기 정부 조각 과정에서부터 유난히 비밀성을 강조하면서 ‘수첩인사’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았다. 불행하게도 2016년 10월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그 수첩인사의 주체를 우리 모두는 알게 되었다.
 
 
  〈3〉 아버지를 넘어서겠다는 욕심이 너무 강렬해 판을 크게 벌였다
 
  나는 2012년 대선 전부터 그의 정치 스타일을 직접 관찰하면서 대통령으로서 직면할 정치적 어려움들을 집권 전부터 예견했다. 걱정 끝에 “(박근혜 당선인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을 넘어서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서 많은 국정과제를 설정하면 오히려 국정운영에 심각한 압박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면서 ‘창조경제’라는 국정과제 아래 우리의 정보통신 기술과 산업체를 융합해 경제활성화를 이룩하여 국민행복 증진에 기여하겠다는 국정과제를 야심 차게 설정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국민행복, 희망의 시대’를 열기 위해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 등의 국정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경제발전보다 더 큰 도약을 이루어내는 경제의 재도약을 이룩하고자 했다.
 
  많은 국민은 그를 보면서 굳센 의지를 지닌 박정희 대통령과 자애로움을 간직한 육영수 여사를 동시에 생각한다. 슬픔과 아련함 속에서도 굳은 의지를 다진 그의 삶을 보고 비장감을 느낄지언정 누가 행복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의 삶의 길에서 ‘국민행복시대’는 국민이 공감하기 매우 어려운 국정과제였다. 창조경제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정치적 삶의 궤적이 창조성과는 연관성이 낮아 창조경제라는 국정목표로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웠다.
 
  더 나아가 국민행복, 창조경제 등의 국정 목표는 모두가 너무나 추상적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일선관료와 산업체 종사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국민 개개인은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각자가 각자의 입장에서 이해했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기가 어려웠다. 아울러 우리 경제 규모가 이미 선진국화되어서 이제는 창조경제가 아니라 그 무엇을 해도 경제성장률이 아버지 시대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저성장, 고령화 시대에서 경제의 재도약이라는 말 자체가 그 현실성이 낮았다. 국정과제 설정과 관련해 그가 직면한 상황은 2002년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의 “모른다는 것조차 모른다(unknown unknowns)”라는 말이 가장 적확했다.
 
 
  〈4〉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대응에 미숙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5월 16일 청와대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 대표단과 면담했다.
  우리는 대통령과 그 정부의 참모습을 큰 국정과제보다는 작지만 현실적인 문제들, 예컨대 소방방재나 방역 등과 같이 재난 또는 위기 사태에서 정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등을 통해 이해한다. 이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정부는 국민행복을 위한 국민안전을 집권 초기부터 매우 강조하면서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개칭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과 정부의 미숙한 초동 대응, 정보 부족, 늑장 대응 등 비효율적이고 무능한 모습에 매우 실망했다.
 
  세월호 참사 1년 후인 2015년에는 ‘중동호흡기 증후군(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또다시 미숙하고 우왕좌왕하는 대통령과 정부를 보면서 국민들은 더욱 실망했다.
 
  아마도 그의 보통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의 한계가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으로서 쩔쩔매고 ‘헤매고 있다’는 비판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그가 박정희 대통령의 큰딸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보지 못해 일반 국민들의 삶을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극단적인 한 단면이기는 하지만 2012년 12월 대선 토론 과정에서 “혹시 6인 병실에 가보셨느냐, (현재 건강보험이) 6인 병실에만 적용되는데 보시면 환자 6명에 간병인 6명 뭐 북새통 같지 않으냐”는 문재인 후보의 질문에 그는 6인 병실의 건강보험 적용과 관련된 사실을 무시하고 “병실에 6인이 들어가고 4인이 들어가고 따져서 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주요 국가정책에 대한 그의 이해 능력은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과 달리 책임자로서 경험과 현장에서 그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보고서를 통해 습득하는 평론가형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5〉 과도한 공천 개입과 국회에 대한 불신
 
  그는 2016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친박(親朴)’이라는 이름으로 공천권을 행사했다. 이는 결국 공천 파동을 일으키면서 예상외로 여당인 새누리당의 총선 패배를 불러왔다. 선거의 여왕으로서 총선에서 여당 내 편 가르기를 통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 시도가 역설적으로 영향력의 축소를 불러왔다.
 
  그러나 여소야대 상황에서도 그의 국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여야대립 정국은 더욱 심화되었다. 비판자들은 이렇게 여야관계에서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그의 정치적 리더십을 신(新) 권위주의 리더십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자신만의 원칙을 앞세우고 야당을 탓하는 ‘마이웨이식’ 통치 스타일은 국정운영 결과에 매우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대통령이 돼도 자기가 한번 해보려는 것을 이렇게 못할 수가 있느냐. 나중에 임기를 마치면 저도 엄청난 한(恨)이 남을 것 같다. 뭔가 국민들에게 그런 희망을 남기고 그만둬야지, 너무 할 일을 못하고 막혀가지고. 대통령이 그렇게 애원하고 몇 년 호소하면 ‘그래 해봐라. 그리고 책임져 봐라’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 해봐’ 그렇게 해놓고 나중에 안 되면 ‘하라고 도와줬는데도 안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욕을 먹는다면 한은 없겠다”라고까지 말했다.
 
 
  〈6〉 개헌(改憲)카드를 위기 타개용으로 써먹었다
 
  최순실 의혹 정국 속에서 임기를 1년4개월 남겨놓은 2016년 10월 박근혜 대통령은 개헌 추진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그는 “이제는 1987년 체제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새롭게 도약시킬 2017년 체제를 구상하고 만들어야 할 때… 임기 내에 헌법 개정을 완수하기 위해 정부 내에 헌법 개정을 위한 조직을 설치해 국민의 여망을 담은 개헌안을 마련하도록 하겠다”며 임기 내 개헌방침을 명확히 했다.
 
  국가 미래를 위한 중대 사안인 개헌을 자신의 정치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술책’으로 사용한 것이다. 국정 난맥과 측근 비리 의혹 등으로 지지율 급락의 위기에 빠진 대통령이 정치적 승부수로서 개헌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었다.
 
  그러나 국정 난맥은 대통령 자신이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말벗(최순실)에게 농락당하면서 초래된 것이었다.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라는 제도가 잘못되었다면서 개헌을 주장했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가 말했던 것처럼 이번에 그는 그가 ‘참 나쁜 대통령’이었다.
 
 
  〈7〉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함 소장이 보는 최순실 게이트의 이면(裏面)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박근혜 대통령을 관찰한 결과와 내 기억에 근거해 밝혀야 할 사실들이 몇 가지 있다. 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의 위기’의 결정판이다. 이제 민낯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환부를 도려낼 수 있고 소생의 길도 찾을 수 있다. 그 믿음으로 몇 가지 사실들을 밝힌다.
 
 
  문고리 3인방도 처음에는 공손했다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린 정호성, 안봉근, 이재만 전 비서관.
  박근혜 대통령을 사적으로 만나면서 ‘접근의 폐쇄성’과 관련해 정윤회(최순실 포함)와 문고리 4인방(고 이춘상 포함)이 지닌 영향력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재만과 안봉근 등은 조금은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가 있지만 늘 공손하고 침착했다.
 
  그들은 내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고 통화하는 문을 비교적 자유롭게 열어준 비서들이었다. 그와 나는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했고 통화했다. 그는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고 침착하고 꼼꼼했다. 다만 이미 결정한 사항은 변경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자신의 주장이 강해 조금은 답답함을 느꼈다. 비판자들은 이를 두고 정치적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방석현 서울대 교수 - 홍윤식을 박근혜와 연결시키다
 
  기억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이회창 후보를 위해 일했던 서울대 방석현 교수와 홍윤식(박 전 대통령의 과거 비선실세. 현 홍원식 행정자치부 장관과는 다른 인물)은 보수 진영의 다음 대선 후보로 박근혜 의원을 꼽고 이를 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4인방의 비협조로 박근혜 의원에게 도저히 접근할 수 없어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이 두 사람을 모시고 가서 직접 소개했다. 이후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노력했다. 2004년 3월 국회의원 총선과 관련, 이들은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의원을 도와 박세일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전격 영입했다. 비례대표 후보 공천의 전권도 박세일에게 넘겼다. 이들은 지방선거와 관련해 2004년 경남지사에 김태호, 2006년에는 대구시장에 김범일 등을 등용했다. 또한 인천시장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던 윤상현을 심각하게 고려하면서 윤상현도 소위 친박 진영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최순실과 정윤회는 대통령의 집사들이었고 4인방 등은 단순히 비서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불행은 2012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불행은 대선을 거쳐서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 뿌리를 내렸다. 뿌리 내린 불행에 또 다른 불행들이 겹쳤다.
 
 
  정윤회·최순실의 발호는 2012년부터 시작됐다
 
  사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참담한 드라마가 대한민국을 덮어버렸다.
 
  불행의 착근 과정을 기억해 보자.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 정윤회(최순실)를 중심으로 한 ‘십상시’가 ‘비정상적인 체제의 정상적인 제도권 안착’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그 문제점을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구체적으로 나는 ‘박근혜 당선인은 정권 인수 기간 동안 삼성동 자택이 아니라 안가로 거주지를 옮겨서 정권 인수를 준비해야 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구성과 인선 과정의 문제점 비판, 미래창조과학부 설치 반대’ 등을 강하게 주장했다.
 
  비판을 거듭하면서 나는 ‘박지만 인맥’으로 분류되어 이들과 멀어졌다. 당선인에 대한 비판은 내게 견디기 힘든 개인적 불행으로 다가왔다. 당시 나는 박지만과 친해서 또는 진보적 이념에 기초해서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학을 연구하는 전문가의 지식과 소신에 기초해서 주장했던 것이다.
 
 
  최순실의 2가지 국정 어젠다 - 충청대망론과 통일예언
 
  최순실은 이미 이 시기부터 정윤회와 문고리 3인방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두 가지 국정 어젠다(?)를 준비했다. 이 두 가지 어젠다는 ‘점’(주술)에서 시작했다. 어떤 무속인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육영수 여사의 도움으로 당선된다’고 예측했다고 한다. 그 무속인은 최순실에게도 두 가지 미래 예측을 했다. 첫째 예측은 ‘충청대망론’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늘 육영수 여사의 돌봄이 있어야 한다. 다음 후계자는 육 여사의 고향인 충청도 출신이 뒤를 이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편안해진다”는 예측이다. 둘째 예측은 ‘통일예언’이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 임기 내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완구 총리 기용은 충청대망론에 기인한 것, 반기문도 같은 맥락
 
박근혜 대통령이 이완구씨를 국무총리로 임명한 것은 ‘충청대망론’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예측을 믿은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은 2014년부터 충청대망론에 기초해 ‘이완구 대망론’을 만들었다. 이완구는 여당 원내대표와 국무총리로 승승장구하다가 성완종 리스트 때문에 정치적으로 추락했다. 그 대안이 ‘반기문 대망론’이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조응천은 “… 최순실씨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블릿PC의 사용자 이메일 계정인 ‘greatpark1819’와 관련, 최근 청와대 근무자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것은 18대에 이어 19대에서도 실질적으로 대통령을 하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개헌을 하든 무엇을 하든 대통령과 최씨 일가가 실권을 쥐고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통일예언에 따라 2014년부터 ‘통일대박론’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을 상징하는 통일대박은 최순실의 아이디어였다. 이와 관련해 김준형은 “최순실이 주도한 주술적 국정농단이라는 변수를 대입하면 비로소 퍼즐이 맞아떨어진다… 월악산의 통일예언이라는 기괴한 얘기까지 들렸다. 30년 전에 풍수지리에 능한 고승이 ‘한국에 여자 임금이 나오고, 그리고 3~4년 있다가 통일이 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2015년 3년 차에 통일대박을 발표하고 북한 붕괴의 맹신이 시작된 이유라고 했다…”라고 주장했다.
 
 
  성골은 최순실과 이혼 전의 정윤회뿐… 문고리 3인방도 진골
 
  폐쇄성이 높았던 박근혜 정부에서 실세, 소위 ‘왕족’은 최순실과 2014년 5월 이혼하기 전까지의 정윤회뿐이다. 그리고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은 진골이다. 왕족의 직간접 추천으로 발탁된 청와대의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등의 청와대 참모진, 행정부의 장·차관, 여당의 국회의원 등을 포함한 집권 ‘친박 인사들’은 일부는 누구의 명인지 알아도 모른 체하면서, 또 다른 일부는 전혀 모르면서 최순실의 명을 수행했다. 그들 모두는 그 대가로 작은 권력을 향유한 육두품과 평민으로 ‘머슴들’이거나 ‘시녀’였다. 대선 전에도 이들 친박들 중 소위 실세라고 칭하는 인사들조차도 문고리 4인방(고 이춘상 포함) 앞에서는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친박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여기에서 나이나 지위는 고려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이들 집권 친박 인사들은 대통령과 국정 철학을 공유한 팀원이 아니었다. 단순히 왕족의 명을 받들어 모시면서 권력을 조금 맛본 ‘자리 지킴이들’이었다. 이들 친박 인사들은 지금까지 사회의 엘리트라고 자부했지만 일종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이들 모두는 허망함과 자괴감을 가슴 속 깊이 느꼈을 것이다. 심지어 정윤회조차 심한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동아일보》는 “(2016년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의 ‘최순실 대국민 사과’에 전·현직 대통령 비서실장들도 당혹해하거나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반응을 보였다. 최씨의 대통령 연설문 수정 의혹에 대해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부인했던 이원종 비서실장의 말은 허언이 되고 말았다. 김기춘 비서실장도 ‘나는 전혀 (연설문 수정 의혹) 내용을 알지 못한다… 도저히 나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장과 비서실장을 지낸 이병기도 ‘최씨 얼굴조차 본 적 없다…(최씨의 국정 개입은) 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라고 보도했다. 이들 비서실장들의 말대로라면 그들도 모르는 일이 청와대 내에서 벌어졌다. 이들의 주장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역대 비서실장 중 한 명은 대선 전부터 최순실에게 조력
 
2014년 7월 10일 국회 세월호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비선 라인의 존재를 부인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옛날 인연을 강조하며 대선 전부터 최순실에게 조력했다. 그는 자신의 잠재적인 정치적 경쟁자들과 박지만과 친하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을 ‘박지만에 대한 최순실(정윤회)의 경계심’을 이용해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제거했다. 이것이 힘든 경우 정치 검찰을 이용하여 솎아냈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 직후부터 박지만 인맥은 점차 사라졌다. 그 후 그는 최순실의 도움으로 비서실장이 되어 특정 분야에서 권력을 향유했다. 아울러 그는 2014년 말 정윤회 문건 파동 전후로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에게는 그저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비서실장들 대부분은 최순실이 청와대에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2부속실(2015년 1월까지)은 최순실을 보좌하고 있었고 그가 국정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 모른 체하면서 작은 권력을 향유했던 ‘비겁한 비서실장들’에 불과했다.
 
  실제로 이근면 전 인사혁신 처장은 “박근혜 정부의 실패는 청와대 일부 참모의 전횡 때문… 문고리 3인방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이 월권을 행사, 청와대·내각의 정상적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았다…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은 어떨 때는 장차관이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하려 해도 가로막고, 이재만 총무비서관은 장관들과 공공기관장들이 참여하는 청와대 인사위원회에 들어와 간섭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들이 3인방에 가로막혀 힘을 쓰지 못하는 사이 우병우 전 수석 같은 이가 대통령에게 직보를 하는 체제가 굳어졌다… 우 전 수석이 통상 업무 범위를 넘어 정부·공공기관 인사 등 온갖 분야에 개입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기춘 비서실장은 2014년 7월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여 “…맹세코 비선 라인은 없습니다. 지금 거기에 언급된 분들은 청와대에 나타나는 일도 사실 없는 분들이고 또 청와대에 있는 비서관은 살림을 꾸려가는 그야말로 비서일 뿐이지 인사도 추호도 관여하는 권한도 없거니와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라는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검찰도 최순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더 큰 불행이 있었다. 검찰 중 일부는 이들 숨은 실세로부터 승진 과정에서 은혜를 받았다. 다른 일부는 영전 또는 승진에 눈이 멀었다. 이들 정치 검찰은 2014년 말 정윤회 문건 파동 때 명(?)을 받들어 진실을 말했던 조응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박관천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 등을 유죄로 기소했다. 정두언은 “정윤회에다가 초점을 맞추느라… 그때 우병우 민정수석이 다 뻥이라고 해서 조쪽(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을 다 구속하고 했지만… 그 공로로 지금까지 저러고 있잖아요. 최(순실)를 보호해 준 공로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박지만의 ‘피보다 진한 물이 있다’라는 발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