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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사이드

반기문을 왜 김대중은 죽이고 노무현은 살렸나

반기문, 충청 인맥 덕분에 노무현 정권에서 부활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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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정부 때 시련 겪은 반기문, 백소회百笑會 멤버 도움으로 노무현 정부 외교보좌관으로 임명
⊙ 구삼열씨도 반 총장 적극 추천
⊙ 노무현 핵심 386, 반기문 평판 확인하려 외교부장관, 외교보좌관 임명설 흘려
⊙ “윤영관 장관 후임자리 약속할 테니 외교보좌관부터 맡아 달라”(노무현 정부 핵심 관계자)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오세훈·김문수 등 여권 대선 주자들이 타격을 입으면서 여권 내에선 ‘반기문 대안론’이 한층 힘을 받고 있다. 반기문 유엔 총장은 정치권 밖 인물 중 거의 유일하게 상당수 국민이 눈여겨보는 인물이다. 이는 여론조사 지지율로 나타난다.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여론조사를 종합해 보면 반 총장에 대한 지지율은 상당하다.
 
  비정치인인 반 총장이 여론을 업고 대권주자로 떠오른 데에는 ‘유엔사무총장’이라는 직함이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여론조사, 정치평론가들은 “반 총장이 유엔사무총장이 되지 못했다면 이 정도의 지지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 총장이 유엔사무총장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정권 때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하던 반 총장이 김대중 정부 때 큰 시련을 겪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을 승계했다. 뿌리가 같다. 김대중 정권에서 밀려난 고위공직자가 노무현 정권에서 부활하는 것은 정치공학상 쉽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반 총장이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특별한 끈으로 연결된 사이가 아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반기문의 최대 시련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김대중 정권 외교부 차관 시절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문제로 인해 경질됐다.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를 찾은 반 총장. 사진=조선일보
  반 총장은 김영삼 정부에서 외교부 차관보→청와대 의전수석→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승승장구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관운이 좋지 못했다. 주(駐) 오스트리아대사에서 2000년에야 차관이 됐다. 차관이 된 지 1년 만에 고비가 왔다. 외교관 인생 31년 만의 최대 위기였다. 정통 미국통에 외교관의 표상(表象)으로 불리던 그도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문제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NMD 체제 문제가 표면화한 것은 2001년 2월 21일 이정빈 전 장관이 상공회의소 초청연설 때였다. 당시 장관이던 이 전 장관은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후의 NMD 체제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을 묻는 말에 NMD 체제에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했다.
 
  “미국이 NMD 문제를 생각하는 원인은 일부 국가가 장거리미사일을 개발하고, 그 미사일로 미국 본토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국이 NMD를 강력히 추진하는 것보다는 이 같은 원인제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르고 손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취재 중인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들은 이 발언을 회사로 송고했다. 차관이었던 반 총장은 기자실로 급히 내려와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달라고 외교부 출입기자들에게 요청했다. “이 장관이 대량살상무기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강조했을 뿐, 정부 입장은 정해진 것이 없다”며 진화에 나선 것이다.
 
  반 총장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이 전 장관의 발언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후 ‘한미 관계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사건이 발생,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새로 출범한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을 열흘 정도 앞둔 시점인 2001년 2월 27일 서울에서 한·러 정상회담이 열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ABM 조약(미국과 러시아 정부가 1972년 맺은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은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라는 내용이 담긴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NMD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ABM 조약을 개정하려고 한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ABM 조약은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라는 문구에 합의한 것은 노골적인 러시아 편들기로 보였다.
 
  문제의 최종 공동성명 문안이 확정된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하기 이틀 전인 2월 24일 토요일이었다. 우리 정부는 지난 1월쯤 러시아 정부와 공동성명 문안 작성에 들어간 후, 푸틴 대통령 방한을 이틀 앞두고서야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당시 외교부 내에서는 이 문장이 포함되는 것이 좋은지를 두고, 해당 부서 간에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의 공동성명은 2월 26일 월요일 차관이던 반 총장, 이정빈 전 장관을 거치는 과정에서 별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은 채 그냥 통과돼 버렸다.
 
  공동성명 파동 이후인 2001년 3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DJ는 부시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을 설명하면서 김정일을 지도자로 인정할 것을 호소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싸늘했다.
 
  정상회담을 마친 DJ는 “한·러 공동성명 문제로 미국 측에 얼마나 많이 사과를 해야 했는지 모른다”며 외교진을 질책했다. 이로 인해 2001년 4월 이 장관과 차관이던 반 총장이 차례로 경질됐다. 문책인사였다. 불명예 퇴진한 반 총장은 “죽고 싶다. 내가 단 1시간도 나를 위해 쓴 적이 없는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당시 반 총장을 만났던 인사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억울함을 강하게 표시했다. 반 총장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다. 거의 세상 포기한 사람 같았다”고 했다.
 
  반 총장은 《반기문과의 대화》라는 책에서 당시 상황을 이같이 밝혔다.
 
  〈2001년 한·미 정상회담을 천천히 진행하라고 말렸지만, DJ는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아주 무례했어요. 그 때문에 김 대통령 이미지가 많이 손상됐습니다. 총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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