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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제기

在美 시인·정치학자의 한국 정치·사회 비판

글 : 최연홍  前 서울시립대 교수, 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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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직사회 혁신은 계급제 타파와 직위분류제 제도화부터 시작해야
⊙ 정치권과 정부는 ‘비용 對 편익’을 먼저 생각해야
⊙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 존중하는 것이 法治
⊙ 대통령의 말이 ‘王命’으로 통하는 풍토가 문제

崔然鴻
⊙ 74세.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美인디애나대 정치학 박사.
⊙ 美위스콘신대 조교수, 올드도미니언대 부교수, 미시시피대 교수, 美 국방장관실 환경정책보좌관,
    워싱턴대 교수, 서울시립대 도시과학대학원 교수 역임. 연세대 재학 중 《현대문학》으로 등단.
⊙ 저서: 시집 《정읍사》 《한국行》 《최연홍의 연가》 《아름다운 숨소리》 등.
주기적인 선거 실시 등 제도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 정착에도 불구하고 대화와 타협의 결여 등 문제가 많다.
  청와대 비밀문건이 밖으로 새나가는 바람에 박근혜(朴槿惠) 정부가 곤욕을 치렀다. 그게 공적인 문서인지 ‘지라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비서관과 행정관이 업무상 획득한 비밀을 외부로 유출한 것은 사실이다. 지라시라면 청와대가 할 일이 없었는지 그런 문건을 만들고 있었으니 참 한심한 일이다. 퇴임한 장관도 이런저런 얘기들을 언론에 털어놓는다. 이젠 장관도 믿을 수 없다. 참 불행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청와대 안에도 믿을 사람이 없는 꼴이 되었다.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 등에서 획득한 비밀문건을 언론에 공개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물론 국회의원은 국회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에 대해서는 면책특권(免責特權)을 갖고 있다. 이는 국익(國益)을 위해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정말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인지 묻고 싶다. 국정감사 등을 통해 정보접근이 가능한 국회의원에게는 그러한 특권에 상응하는 의무가 있다.
 
  이 세상에는 공개해야 할 것과 공개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외부로 유출해서는 안 되는 비밀은 어느 정부에도 있다. 필자가 1980년대 초 일했던 미(美) 국방부 사무실 안에는 1급 비밀문서, 2급 비밀문서, 3급 비밀문서가 들어 있는 문서함(캐비닛)이 있었다. 암호 숫자를 몇 번 좌우로 돌려야 열리는 함이었다. 문서를 꺼내 읽고 난 후 바로 함에 넣어야 하고, 3분 이상 책상 위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필자는 2급 비밀문서 취급허가를 받았다. 이 문서들을 취급하면서 국방부가 필자의 신원조사에 1년이라는 시간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밀’ 없는 정부는 없다
 
  정보를 공개하는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우면서 당당해한다. 모든 정부문건은 공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듯하지만, 현실정치는 불가피하게 수많은 비밀을 필요로 한다. 특히 외교·안보 영역에서 그러하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망명객으로 위싱턴에 체류하고 있던 1980년대의 일이다. 어느 자리에서 그가 레이건 정부의 비밀외교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 나는 김대중씨에게 그를 사형집행에서 구해 낸 것이 비밀외교라고 말해 주었다. 미국이 중국의 문을 열었을 적에도 비밀외교가 있었고, 월남전을 종식시켰을 적에도 비밀외교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2000년 평양방문도 남북 간 극비협상의 산물이었다. 그가 북한에 5억 달러를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그 방문은 처음부터 성사될 수 없었다.
 
  한국의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은 비밀엄수의 필요성에 대해 너무 둔감하다. 미 해군 정보기관에서 일하던 한국계 미국시민이 비밀문서를 한국에 건넨 적이 있다. 한국 측에서 보면 그가 애국자인지 몰라도, 그는 미국시민으로서 미국을 배반했다. 그래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갇혔다. 한국에서 국가기밀을 공개한 죄로 감옥에 간 국회의원이나 공무원들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인사혁신처 설치, 타당한가?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사건 이후 ‘국가개조’를 주장하면서, 공직사회 혁신을 위해 인사혁신처를 만들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중앙인사위원회를 설치했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고위공무원단(Senior Executive Service)을 만들었다. 모두 미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행정토양을 얼마나 고려해서 그런 제도를 만들었는지는 의문이다.
 
  고위공무원단은 국장급 이상 공무원, 즉 3급부터 1급까지 고급 공무원들의 부처 간 이동을 자유롭게 하며 그들을 한국 관료제를 대표하는 엘리트로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도입한 제도다. 한국 관료제는 지극히 닫혀 있는 사회다. 그러한 관료사회를 위에서라도 열어 놓아야 한다는 의도는 좋았다.
 
  부처이기주의는 어느 나라 관료제에서도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부처이기주의를 뛰어넘게 하기 위해 공무원들이 부처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아래로부터 위까지 열어 놓았다.
 
  고위공무원은 행정가이지만, 국민들로부터 선출된 정치인들과 팀워크를 이루어 정책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고위공무원을 교육, 훈련시키는 제도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은 19세기말 엽관제(獵官制)를 타파하고, 직업공무원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인사위원회를 만들었지만, 20세기가 끝날 무렵 폐지했다.
 
  한국은 21세기에 중앙인사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는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하나의 단순체제로 공무원들의 임용, 훈련, 연봉(年俸), 복지를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미 항공우주국(NASA)은 규정된 연봉으로는 유능한 과학자를 채용하기 어렵다. 국립보건연구원도 공무원 연봉으로는 의사를 채용하기 어렵다. 정부 부처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채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정부는 19세기의 정부가 아니다.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결국 ‘분권화(分權化)’할 수밖에 없다. 중앙집권적인 인사행정기구의 설치는 그래서 시대착오적이다.
 
  미국은 1979년 고위공무원단법을 제정, 고위공무원단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노력으로 도입됐지만, 195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제안한 바 있었다. 이러한 제도가 나온 것은, 미국의 경우 직위분류제(職位分類制·position classification)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직위분류제하에서 예산분석가는 국방부에서 일하다 농무부로 가서 일할 수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국무부에서 일하다 교육부로 갈 수 있다. 반면에 고급 관료가 되면 부처 간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고위공무원단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이 고위직으로 가면서 산정(山頂)에서 숲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고위공무원들이 지나치게 전문화되면, 정부 전체나 국민들이 아니라 자신이 종사하는 직종(職種)에 충성하게 될 우려도 있다. 고위공무원단을 만든 것은 이런 폐해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부처 간 인사교류 활성화해야
 
공직사회개혁을 위해서는 지금의 계급제를 타파하고 직위분류제를 도입해야 한다. 사진은 9급 공무원시험장의 모습.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시험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 순환보직(循環補職)을 통해서 조직을 섭렵하고 난 후, 고위직 공무원이 된다. 그러나 순환보직은 조직 내에서만 이루어진다. 외교관들은 외교부에서, 서울시 공무원들은 서울시청에서 30년 세월을 보낸다.
 
  고위공무원단은 조직 간의 인사교류 물꼬를 틀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교부에서 일하다 국방부에도 가고, 국정원도 가면서 부처이기주의를 뛰어넘게 한다면 좋을 것이다. 기존의 파견근무제도를 확대하면, 고위공무원단 제도를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고위공무원단을 통한 고위공무원들의 이동도 중요하지만, 중간관리층 공무원들의 인사교류도 제도화해야 한다. 이미 중간관리층 공무원들 간의 교류가 좋은 반응을 얻은 경험도 있다. 예컨대 과거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와 환경부의 교류가 인상적이었다. 이는 두 부처 간에 수자원(水資源)업무와 같은 공동영역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필자는 1980년대 초 미 국방장관실에서 환경정책보좌관으로 일했었다. 많은 사람이 “펜타곤에도 환경관리하는 공무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장관실에도,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에도 환경을 관리하는 직업공무원과 직업군인이 있었다. 이런 조건 아래서 인사교류는 관료제에 신선함을 선사할 수 있다.
 
  고위공무원단 제도가 성공하려면 직업공무원제도가 정착해야 한다. 정치인들부터 정권을 쥔 후 관직을 전리품(戰利品)으로 여기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일해야 한다는 생각, 기존의 고위공무원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자기 사람’으로 채우려는 생각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이 존재하는 한, 고위공무원단은 들개에 바치는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코드인사’에 대한 집착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물론, 이명박·박근혜 정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국 공무원제도의 개혁은 직위분류제 정착과 계급제 타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의 공무원사회는 계급이 우선이다. 계급이 사람을 짓누르고 있다. 이것은 언어도단이다. 공무원들을 주사니 주사보니 하는 계급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래머 1, 2, 3, 4, 5, 예산분석가 1, 2, 3, 4, 5로 분류해야 한다. 그래야 그 공무원을 계급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그것이 인간다운 관료제를 만드는 것이다.
 
  공무원사회 혁신을 위해 꼭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열린 관료제는 제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문화에서 온다. 직위분류제가 제도화되어야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민주주의 문화가 정착되어야 가능하다.
 
  이와 함께 2~3년 정도 전문가를 공무원으로 초빙하고, 공무원도 대학의 초빙교수로 나갔다 오는 식의 인사교류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정부도 파산할 수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에서는 비용에 대한 고려 없이 경쟁적으로 복지공약을 내걸었다.
  한국 정치의 낙후성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국민이 낸 세금을 국민을 위해 돌려주어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공리(公理)를 잊고 사는 정치인들의 무지와 부도덕성이다.
 
  모든 정부는 주어진 세입(稅入)에 맞춰 프로그램(일)을 계획하고 운영한다. 정부의 프로그램은 ‘비용 대(對) 편익’의 비율을 기초로 만들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정부는 이 ‘비용 대 편익’에 대한 고려 없이 예산안을 짜는 것 같다. 이러한 분석이 없으면, 정부는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게 되고, 부정부패에 빠져들게 된다.
 
  균형예산을 유지해 온 전통을 갖고 있는 한국 정부가 최근에는 세금 걷어들이는 데 열중하고 있다. 복지예산, 국방예산, 교육예산이 끝을 모르고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파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지 않고 있다.
 
  정치인들의 선거공약은 대개 선심공약이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부인 것처럼 행동하며 복지예산 늘리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복지예산이라고 해서 낭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혼부부에게 집 한 채를 거저 주자는 발상이나 공짜 학교 점심은 한국 정치를 파산으로 몰고 가고 있다.
 
  정부는 국민의 세금이 어떻게 국민들에게 돌아가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정부의 기초가 된다. “대표 없이 과세(課稅) 없다”는 간단한 주장이 민주주의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양성을 잃은 시민단체들
 
  한국에 민주주의의 주된 요소인 주기적(週期的) 선거와 언론의 자유는 있다. 그러나 정책결정 과정에서 필요한 평화적이고 이성적 논의와 토론은 보이지 않는다. 한미(韓美) 자유무역협정(FTA) 논의 과정이나 광우병 사태 당시 나타난 반미(反美) 선동이 그 예이다.
 
  비이성적인 집단이 주장하는 이상주의적인 사회평등은 민주주의의 적(敵)이다. 여러 해 동안 그런 집단이 한국의 집권세력이었다. 그런 집단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그들에게 저항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해 온 것은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 경제발전의 결과 형성된 중산층(中産層)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성적 논의가 부족한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북핵(北核) 문제에 대한 환경단체들의 침묵이 그것이다. 원자력발전은 물론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건설도 거부하던 환경단체들이 북한의 핵 실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많은 환경단체 가운데 하나쯤은 목소리를 낼 만도 한데, 이상하다. 그들의 침묵은 1960년대 초 환경의식을 일깨워 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연상케 한다. 한국의 환경단체들은 화학물질보다 훨씬 큰 핵무기가 가져올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환경단체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의 시민단체들을 보면 다양성이 부족하다. 좌파성향의 목소리만 크게 들린다. 이런 좌파성향 시민단체들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며 촛불을 들더니, 작년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박근혜 정권 타도를 외치고 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다양한 단체들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농민단체들도, 노동단체들도, 교사단체들도, 하나의 목소리만 존재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 중간자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정책결정으로 발전해야 하는데 그런 기미가 없다. 중용(中庸)이란 한국사회에서 멸종위기의 언어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보여주는 이상한 현상이다.
 
 
  경찰권 존중해야 인권 지킬 수 있어
 
폭력시위는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공권력의 약화를 가져온다. 사진은 2006년 5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서 벌어진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을 바라볼 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공권력(公權力) 경시 풍조다. 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농민이 죽으면 나라가 뒤집어질 정도로 난리가 난다. 하지만 폭력시위로 경찰이 죽거나 다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정부가 존재하는 기본적인 이유는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 일선에 서 있는 것이 경찰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불의(不義)한 공권력에 도전하는 것이 정의롭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된 지 30년 가까이 되어 가는 지금도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경찰이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진보라는 이름 아래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공권력(경찰력)은 실종되고 있다. 그러면 누가 인권을 지켜 준단 말인가? 누가 민주주의를 지켜 준단 말인가? 무질서, 무정부 상태에선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법과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존경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과 질서를 찾기가 어렵다.
 
  인권과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가 최고로 보장되어 있는 미국에서 경찰관이 시위 군중에게 다쳤다는 뉴스는 들어보지 못했다. 시위 군중이 다쳤다는 뉴스도 듣지 못했다. 미국에서 시위는 평화적이어야 한다. 경찰과 물리적으로 충돌할 이유가 없다. 최근 퍼거슨시 사태처럼,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폭력사태로 번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시위가 폭력적이 되면 반드시 엄중한 진압이 뒤따르게 된다. 모든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시위는 명분이지 폭력이 아니다
 
  미국인 누구나 백악관 인근 워싱턴 광장에서 시위를 벌일 수 있다. 모든 시위는 2주 전에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시위는 평화적이어야 하고, 대통령의 집무를 방해하면 안 된다. 교통의 흐름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 정부청사나 시위 대상기관으로부터 100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할 수 있다.
 
  불법시위를 했을 때에는 연행된다. 대개의 경우는 곧 방면된다. 민권운동이나 반전(反戰)운동 시위는 많은 경우 그렇게 끝난다. 그러나 폭력시위에는 중형이 기다리고 있다. 마약사범이나 강도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는 경우는 있지만, 시위대가 경찰관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했다는 뉴스는 들은 적이 없다.
 
  폭력시위를 ‘언론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그 말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알고 보니 “평화적인 시위는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폭력적으로 나가야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시위는 명분으로 하는 것이지 폭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노동자나 농부들의 반(反) 세계화, 반 FTA 시위도 나름의 명분이 있다. 학생들의 반미운동도 명분은 있다. 하지만 그 명분들을 폭력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폭력을 동반하면 그 시위는 명분을 잃는다.
 
 
  憲裁가 ‘대통령의 졸개’라니…
 
2014년 12월 22일 좌파 성향 재야 인사들은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에 따른 비상원탁회의’를 열어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을 비난했다.
  작년 12월 2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을 위헌(違憲)정당으로 해산하는 결정을 내렸다. 많은 국민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일부는 이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연방대법원이 수행하고 있다. 헌법의 정신이나 법 조항을 해석하는 것은 대법원의 사명이요 특권이다. 대법원을 구성하고 있는 아홉 명의 대법관의 지성과 양식, 지혜는 나라의 마지막 등대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한 번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면 종신(終身)으로 일한다. 대법원의 권위와 위엄은 절대적이다.
 
  미국헌법은 200년 전에 제정됐다. 세월이 가면서 헌법은 자칫 골동품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헌법을 함부로 고칠 수도 없다. 헌법은 한 나라의 기본 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대법원이다. 미국헌법은 대법원의 헌법해석을 통해 진화해 왔다. 흑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권법은 1963년 미국 의회에서 제정됐지만, 흑인들의 동등권은 이미 1954년부터 대법원 판결을 통해 보장받기 시작했다.
 
  미국은 3권 분립에 철저한 나라다. 특히 의회와 정부가 대립하고 있는 와중에도 사법부의 권위를 침해할 수 있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한국처럼 걸핏하면 정치적 분쟁을 법원으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법관들도 정치적 언동을 자제한다. 미국 대법원장이나 판사들은 정치적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불문율(不文律)을 지키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대법원장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돕는 것 정도다. 이조차도 의전적(儀典的) 성격이 강하며, 대통령도 헌법 아래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의미를 갖는다.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결정에 대해 당사자인 통진당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외신기자 회견을 열어 헌재 결정과 정부를 비난하고, 헌재의 의원직 박탈 결정에 불복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른바 ‘원탁회의’라는 재야(在野)의 원로(元老)들도 헌재 결정에 불복하는 언동을 하고 있다.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좌파 원로들의 원탁회의야 그렇다고 쳐도, 좌파 변호사들마저 헌재의 정당해산에 대해 위헌 운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법조인들 스스로 법의 권위를 파괴하는 행위다. 법조인이라면 헌재의 권위를 존중해 주는 것이 옳다. 법조인들마저 정치를 법 위에 두려고 하는 사회는 정말 ‘위험한 사회’다.
 
  지금 좌파세력은 헌재에 대해 ‘대통령의 졸개’라는 식의 표현도 쓰고 있다. 언어도단이다. 대통령이 헌재를 좌우하다니. 헌재를 모독, 농락하는 말을 서슴지 않는 이들이 정말 한국의 정치인들일까. 지성인일까. 그들이 모두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헌재 재판관들인가. 19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이만큼 정착하고 있는데 아직도 대통령이 헌재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은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 아닌가.
 
  몇몇 헌재 재판관들이 역사적 심판을 내린 후 탈진 상태가 되어 휴가를 냈다는 게 이해가 된다. 지금 한국 대통령이 헌재를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가. 오히려 청와대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대통령이라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憲裁 결정 존중해야
 
  어떤 한국 언론은 한 국제적 비영리단체의 수장(首長)이 이번 헌재 결정으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일보 후퇴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관심 있게 보도했다. 미국적·서구적 안목으로 보면, 이번 헌재 결정이 정치적 자유,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내 딸아이도 헌재의 판결이 정치적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남북분단 상황하에서 한국의 안보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물론 헌법재판관 가운데 한 분도, 그런 이유에서 통진당 해산에 반대했다. 하지만 헌법재판관 아홉 분 가운데 여덟 분이 통진당 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면 국민들도, 반대자들도, 그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에서도 연방대법관은 모두 아홉 명이다. 그들 중 다수가 내린 결정을 국민들은 이의 없이 받아들인다.
 
  한국에서는 너무 오래 ‘법의 지배’가 아닌 ‘정치의 지배’가 계속되어 왔다.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한 역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와 시대가 다르다. 나라가 선진국으로 가고 있는데 정치는 아직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 말은 ‘법의 지배’가 그만큼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다. ‘악법(惡法)도 법’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헌법적 판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좌파라고 해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거부할 수는 없다. 모두가 법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대통령의 말이 王命으로 통하는 사회
 
  이제 기존의 나쁜 정치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 그 자리에 법과 상식의 지배가 들어서야 한다. 정치는 온전히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시민들의 투표행태가 이성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기가 있으면 뽑히고 웃기는 재주가 있어도 뽑힌다. 얼굴이 잘생긴 사람, 말 잘하는 사람이 뽑히기도 한다. 폭력적인 언사가 환영받기도 한다. 민주주의 체제가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 나은 체제가 없어서 최선의 선택일 뿐이다.
 
  그동안 한국정치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대선(大選)에 이긴 사람은 자기에 대한 충성심만 보고 사람을 내각이나 청와대에 기용했다. 국민의 동의 없이 위헌적인 대북정책을 펴기도 했다. 대통령도 법의 아래에 존재해야 한다. 국회의원이라고 대리기사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권위주의 정치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정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교수로 근무하는 동안, 정권과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대학의 명예교수가 되고, 청와대가 걸어 온 전화 한 통화에 한 사람을 뽑기로 했던 교수를 세 명 뽑는 것도 보았다. 대통령 후보에게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소문이 돌던 사람이 후일 청와대 비서실장과 장관을 지낸 것도 보았다. 그는 100만 달러 이상의 이득을 보았다는 얘기도 돌아다닌다.
 
  대통령 선거에 이기기 위해 사기꾼을 동원해 경쟁자에게 중상모략을 일삼아도 그 행태를 나무라는 이가 없었다. 언론도 그에 대해 깊이 따지지 못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에 이기고 나면, 모든 잘못이 무죄(無罪)가 되었다. 사기꾼을 동원하고, 경쟁자의 경쟁자를 돈으로 사도 선거가 끝나면 모두 그 사실을 잊었다. 당선자는 그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정치가 사회 다른 분야를 좌우할 정도로 막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이 앓고 있는 병(病)이다. 한국의 부조리는 권력의 힘이 지나치게 강한 데서 비롯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사람 수가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의 말이 ‘왕명(王命)’으로 통하는 풍토가 문제다.
 
 
  언론과 교육이 중요하다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존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은 “신문이 없으면 정치 할 마음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의 비판은 준엄해야 하고 미래지향적 대의를 살려야 한다. ‘지라시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BS》 뉴스가 미국이 월남전에서 승리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통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하야(下野)하게 만들었다. 그런 품질의 언론이 필요하다.
 
  필자가 1980년대 초 미 국방부에서 일할 적에 미국의 고급 관료들도 언론을 기피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언론이 없다면 정부는 국민들과 소통의 통로를 잃게 된다”고 말했다.
 
  언론이 믿을 수 없고 존경받지 못하는 상황은 너무 서글프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높은 품질의 언론이다.
 
  또 하나, 민주정치 발전을 위해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여기서 ‘교육’이란 대학교육뿐 아니라 초·중등교육, 시민교육을 모두 포함한다. 교육이 병들어 있으면 시민들의 정치행태도 병들게 된다. 시민들이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치우치는 투표행태를 보이는 것, 종북세력이 국회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걱정스러운 것은 역사교육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북한체제를 미화하는 듯한 교육을 방치하는 한, 교육도, 민주주의도 희망이 없다. 교육을 통해 좌우를 공정하게 바라보고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 주어야 한다. 물론 한국이 완전한 사회는 아니다. 현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시민도 많다. 이러한 불만을 사회 파괴가 아니라 사회 발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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