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취재] 지난 8년간 정치권·학계가 검토한 개헌 방향은? : 월간조선

청와대의 개헌(改憲) 논의 저지로 정치권이 촉발한 개헌론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국민과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개헌을 찬성하는 쪽이 과반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헌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개헌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

기자는 한국헌법학회(회장 박종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소속 학자들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하려 했다. 결론적으로 쉽지 않았다. 학회 소속 한 교수의 말이다.

“학자들의 특성상 일괄적으로 입장을 듣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설령 조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좌우 성향의 목소리 큰 사람들만 의견을 낼 가능성이 커서 조사 결과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왜곡될 수 있어요. 중간 성향의 학자들은 답변을 잘 하지 않아요.”

헌법학회 회장를 비롯한 일부 집행부 교수들도 취재에 소극적이었다.

19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강창희) 산하 ‘헌법개정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김대환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김형오 국회의장과 강창희 의장 때 헌법개정 관련 기구를 설치·운영해 결과보고서를 냈는데 그동안 정치권과 학자들 사이에 논의한 내용을 상당히 자세히 담고 있다”며 “권력구조 내용만 언론에 보도됐을 뿐 다른 중요한 부분은 거의 공개된 적이 없다”고 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 8월 관훈토론에서 “개헌은 두 차례의 지난 국회에서 준비된 부분이 있어 시작만 하면 빨리 (개헌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도 그동안 논의됐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면 이른 시일에 개헌할 수 있다는 맥락이었다.

盧武鉉, 2006년 헌법학회 결과물 토대로 원 포인트 개헌 주장

2007년 당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원 포인트’ 개헌론을 제안한 이후 정치권은 몇몇 기구와 모임을 결성했다.

2008년 김형오 국회의장이 그해 ‘헌법연구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이듬해 600쪽이 넘는 개헌 보고서를 냈다. 2014년 1월에는 강창희 의장이 ‘헌법개정 자문위원회’를 만들었고 4개월 뒤 세 권으로 된 헌법개정 시안을 냈다. 이와 별도로 2011년에는 국회의원들이 ‘개헌추진 국회의원모임’을 결성했다. 개헌추진 국회의원모임은 2015년 상반기에 독자적인 개헌안을 낸다는 입장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원 포인트 개헌론 제안에 앞서 2006년 6월 한국헌법학회는 자체 학술지인 《憲法學硏究》를 통해 헌법개정 연구 결과물을 내놓았다. 노 대통령은 이 연구 결과물을 토대로 권력구조만 바꾸는 원 포인트 개헌안을 제안했다. 당시 헌법학회는 4개의 분과위를 만들어 영토·통일·경제 조항(1분과위), 기본권 조항(2분과위), 국가권력구조 조항(3분과위), 사법제도 조항(4분과위) 등을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눈에 띄는 대목은 권력구조 항목이다. 당시 임종훈 홍익대 교수는 <국가권력구조의 개편방향>이라는 논문에서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제안했다. 관련 대목이다.

<우리 국민들의 성숙된 민주역량과 표현이 자유의 신장에 따라 여론을 통한 비판, 감시 기능이 강화된 점을 감안하면 이제는 대통령중임제가 실시된다 해도 대통령의 일방적인 독주는 쉽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 후보가 제시한 정책과 비전을 신뢰하고 국민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면 그에게 선거공약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적정한 기간을 확보해 주는 것도 효율적인 국정운영과 국가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4년 중임제로의 개헌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헌법학회는 영토, 통일 조항에 대해서는 ‘모순되지 않고 상호 조화적으로 해석될 수 있어 개정이 불필요하다는 게 다수설’이라는 결론을 냈다.

기본권과 관련해서는 자유권, 정치적 기본권, 평등권, 청구권, 사회권 등 개별적 기본권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법이 논의되고 있는 만큼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봤다(김원배 부산대 교수).

재정·경제 조항은 추가경정예산, 준예산제도의 보완 및 감사원 조직 개편, 경제헌법의 필요성과 타당성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다(이덕연 연세대 교수).

사법제도와 관련해 김승환 전북대 교수는 현행 헌법상의 사법부 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헌법재판소, 대법원 등 개편방향을 제시했다.

議會主義 강화 반영한 2009년 헌법硏究 자문委 보고서

2009년 8월 국회의장 직속 헌법연구 자문위원회는 분권형 이원정부제와 4년 중임 정ㆍ부통령제의 개헌안을 담은 보고서를 확정ㆍ발표했다. 김종인 위원장이 김형오 당시 국회의장에게 보고서를 전달하고 있다.

2008년 18대(代) 국회가 구성된 후 김형오 국회의장은 곧바로 ‘헌법연구 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김종인 전 국회의원과 성낙인 서울대 교수가 각각 위원장,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철수·권영성 서울대 명예교수가 고문을 맡았고 박인수 영남대 교수, 석종현 단국대 교수, 정종섭 서울대 교수 등 10여 명의 법학 교수가 위원으로 활동했다.

권력구조와 관련해, 헌법연구 자문위원회는 두 가지 안을 내놓았다.

제1안(案)으로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권력을 분점하는 이원정부제를, 제2안으로 대통령제 원형에 가까운 정·부통령 4년 중임의 대통령제를 제시했다.

1안인 이원정부제의 경우, 국민이 선출하는 대통령은 임기 5년 동안 계엄권, 긴급명령권, 국회해산권 등 국가를 대표하는 기본 권한만 갖는다. 이에 반해 국회(하원)에서 재적 과반수로 선출되는 국무총리는 국정 전반의 통할권, 내각구성권, 국군통수권 등 대부분의 내정(內政) 권한을 보유한다.

2안인 정·부통령 4년 중임제의 경우, 국민이 선출하는 대통령은 4년 중임이 가능하며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와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지위를 동시에 가진다. 부통령은 대통령의 탄핵소추, 사고 시(時) 권한을 대행한다.

국회 구성은 의회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상하(上下) 양원으로 했다. 하원 임기는 4년, 상원 임기는 6년으로 하고 상시(常時) 국회를 위해 정기회, 임시회 규정을 삭제했다. 그외 감사원을 헌법기관에서 법률기관으로 하향 조정하되, 회계검사 기능을 국회로 이관하도록 했다.

기본권과 관련해서는 헌법의 생활규범성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인간존엄의 전제인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신설하고, 평등사회의 실현을 위한 권리를 강화했다. 또 지식정보화 사회에 대응한 기본권과 국제화·세계화 추세에 따른 정치적 망명권(비호청구권), 공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학교교육 진흥을 위한 국가목표 조항을 새로 넣었다. 전체적으로 기본권 보장을 확대·강화했다.

‘정치인에 의한, 정치인을 위한, 정치인만의 개헌’

국회의장 자문기구가 개헌안을 내놓자 한국헌법학회는 2010년 9월 소속 회원들의 개헌 연구 성과물을 자체 학술지에 실었는데 국회의장 개헌 자문기구가 내놓은 내용과 대체로 유사했지만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당시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는 <정부형태 개헌의 필요성과 방향>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놓았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개헌논의가 뜨겁다.(중략) 그러나 개헌논의가 국민보다는 정치권을 중심으로 주도되고 개헌의 범위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 확대에 관한 기본권보다는 정부형태나 대통령 임기에 관한 통치구조에 집중되는 것은 ‘정치인들만에 의한, 정치인들만을 위한, 정치인들만의 밀어붙이기식 개헌’이 되기 쉽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방향에서 기본권편의 개정에 초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개헌논의가 정부형태 개정에 집중되어서는 곤란하다. 언제까지 개헌을 완료해야 한다는 식으로 개헌의 시간표를 미리 짜놓는 듯한 주장에도 찬성할 수 없다.(중략)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 등으로 바꾸는 데에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정부형태의 변화는 우리 정치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거대한 정치실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대통령과 국회의 극한적 대결은 양원제 도입으로 풀 수 있다. 지역주의를 해결하기 위해 선거구제를 중선거구제로 바꾸고 부통령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정부형태를 꼭 손봐야 한다면 순수 미국형 대통령제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내 민주주의의 개선과 정당정치의 수준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어쩌면 정부형태를 바꾸는 문제보다 정치 선진화를 위해서는 더더욱 중요하다.>

“개정안 작업에 압력 행사한 인사들 있었다”

헌법개정 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한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치권이 아닌 국민을 위한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개헌논의는 잠시 주춤하다가 2014년 들어 강창희 국회의장이 자문기구를 만들며 다시 검토에 들어갔다. 강 의장은 ‘헌법개정 자문위원회’를 만들고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를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위원회의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회의장이 9명,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각각 3명을 추천해 총 15명으로 구성했다.

김철수 교수는 “국회의장 자문기구 형식으로 헌법개정안을 만들었지만 국회나 청와대의 입장을 배제하고 통일을 내다보는 제대로 된 개정 시안을 만들려 노력했다”고 했다. 그는 “논의 과정에서 일부 정치권 인사들이 국회의원이나 입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개정 시안에 넣으려고 대놓고 압력을 행사하려 했는데 (내가 그들에게) 혼을 냈다”고 털어놨다. 그의 말이다.

“국민적 동의가 필요하고 정치권이 합의점을 찾기 쉽지 않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개헌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국회선진화법으로 야당이 오히려 독재를 하는 시대입니다. 개헌보다는 선거법이나 정당법 등 선거제도 개혁을 더 우선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이번에 내놓은 헌법 시안은 국회의원이나 행정부, 사법부를 위한 안이 아니고 국민을 위한 안이라고 자부합니다.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아 국회의 독주나 청와대의 불통·권력독점을 예방할 수 있으며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확대한 점에서 국민에게 최선의 안이라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특징을 말하자면 분권형 헌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1개 조항으로 된 헌법 조문까지 만들었습니다.”

헌법개정 자문위원회가 내놓은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헌법 전문에서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국가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또 대한민국이 통일의 주체임을 적시했다. 공무원의 헌법준수 의무와 국민통합 의무도 추가했다. 국가와 정당의 보호와 방어적(전투적) 민주주의를 채택했다.

개정안 4조에는 ‘대한민국의 국기(國旗)는 태극기이며, 국가(國歌)는 애국가이고, 국어(國語)는 한국어이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기본권 조항을 세분화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이나 유엔인권규약 등을 수정해 반영했다.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확대한 것도 획기적이다. 자유권의 경우 침해받지 않을 소극적 권리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적극적 권리로 강화했다.

권력구조에서는 대통령의 임기를 6년 단임제로 했다. 4년 중임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중임제의 폐해를 감안해 6년 단임제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대통령이 당적을 이탈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재선에 출마할 수도 없도록 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통치권을 행사하고 국무총리는 행정권의 수반으로서 행정권을 행사하도록 양분(兩分)했다.

국회는 민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 등 양원제로 구성해 상호견제·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민의원 임기는 4년, 참의원 임기는 6년으로 했다. 국회의원의 특권도 약화시켰다. 국회선진화법 등 특별정족수를 없앴으며 일반 회의는 모두 다수결 원칙에 따르도록 했다.

“국민이 청원하는 형식으로 개헌해야”

감사원과 관련해 기존 개헌론에서는 국회 산하로 둬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으나 국회의 권한이 더욱 강화될 것을 우려해 감사원을 헌법상 독립기구로 했다. 다만 감사원의 기능을 국가공무원의 기강확립과 직무감찰을 위해 감찰원과, 회계 감사의 정치적 중립성과 효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회계검사원으로 분리했다.

김철수 교수는 지난 5월 내놓은 헌법 개정안에 대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반대할 가능성이 큰 조항들이 많다”며 “그럴수록 국민들이 관련 내용을 숙지해 범국민적 차원에서 개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개헌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하의 통일까지 내다보고 이뤄져야 합니다. 개헌은 국민들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국민들도 어떤 방향으로 개헌을 해야 할지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해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헌법개정 발안권자인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 ‘이런 내용으로 개헌해 달라’고 청원해야 합니다. 정치권을 위한 개헌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의 요구가 있으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