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민주당, 1984년 먼데일 패배 후부터 新민주당 운동 시작, 중도 先占전략으로
1992년 클린턴 집권 성공
⊙ 英 노동당, 생산수단 국유화 폐지, ‘제3의 길’ 채택 등으로 18년 만에 정권 탈환 성공
⊙ 獨 사민당, 당수와 총리 후보 분리한 후 역할 분담해 집토끼와 산토끼 모두 잡는
‘二重전략’으로 1998년 총선 승리
⊙ 스웨덴 보수당, 2006년 총선에서 ‘새로운 노동자 정당’ 자처, 집권 성공
⊙ 세대교체, 이념을 뛰어넘는 정책 채택 통한 중도 先占이 관건
金亨俊
⊙ 57세.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美아이오와대 계량정치학 박사.
⊙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 한국선거학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역임.
⊙ 現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한국정책과학연구원(KPSI) 원장.
⊙ 저서: 《젠더 폴리시스》.
1992년 클린턴 집권 성공
⊙ 英 노동당, 생산수단 국유화 폐지, ‘제3의 길’ 채택 등으로 18년 만에 정권 탈환 성공
⊙ 獨 사민당, 당수와 총리 후보 분리한 후 역할 분담해 집토끼와 산토끼 모두 잡는
‘二重전략’으로 1998년 총선 승리
⊙ 스웨덴 보수당, 2006년 총선에서 ‘새로운 노동자 정당’ 자처, 집권 성공
⊙ 세대교체, 이념을 뛰어넘는 정책 채택 통한 중도 先占이 관건
金亨俊
⊙ 57세.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美아이오와대 계량정치학 박사.
⊙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 한국선거학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역임.
⊙ 現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한국정책과학연구원(KPSI) 원장.
⊙ 저서: 《젠더 폴리시스》.
- 새정치민주연합은 7·30 재·보선 패배 후 박영선 원내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은 전남 순천·곡성에서 50%에 육박한 득표로 승리함으로써 한국 선거 사상 대이변을 일궈냈다.
지역 일꾼론을 앞세운 새누리당 정치 신인들도 새정치민주연합의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던 거물 정치인들을 상대로 예상 밖의 큰 차이로 승리했다. 손학규 상임고문은 선거 패배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김한길 새정치연합 공동대표는 선거 당일 “집권세력이 정신 차리도록 유권자들이 회초리를 들어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정반대로 야당에 매서운 회초리를 들었다.
2010년 7·28 재·보선에서도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지방선거 대승에도 불구하고 참패했다. 전체 8개 지역구 가운데 5곳을 한나라당에 빼앗겼다. 그중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재오 후보(서울 은평을)가 승리해 화려하게 복귀했다.
7·30 재·보선에서 야당의 참패는 그야말로 재앙 수준이다. 세월호 참사, 인사 참사, 유병언 부실 수사 참사와 같이 초대형 호재 속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참패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야당 慘敗의 원인
이번 재·보선에서는 안철수 대표의 리더십이 크게 훼손되어 야권 성향 조직마저 동원하지 못했다. 새정치연합은 지방선거에서 이미 소진된 ‘세월호 심판론’을 다시 들고나왔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정부 무능에 대한 심판론에 대해서는 유권자들의 피로감이 쌓였고 결국 투표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반면, 새누리당은 전략적으로 ‘박근혜 없는 선거’를 주도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재미 봤던 ‘박근혜 마케팅’을 과감히 접고 대신 경제를 들고나왔다. 선거 기간 내내 서민 경제, 내수 진작, 경기 부양책, 경기 활성화 등 경제 관련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반대로 야당은 “세월호 특별법이 처리되지 않을 경우 각종 민생법안을 ‘보이콧’하겠다”고 나섰다. 야당은 오랜 경기 침체 속에서 세월호 참사로 내수 경제마저 위축된 상황에서 유권자는 심판보다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두툼하게 해줄 후보에게 투표한다는 선거의 ABC도 몰랐다.
결국 ‘세월호 특별법’을 인질 삼아 모든 경제 살리기·민생 관련 법안의 입법을 저지한 채 정권 흔들기 ‘묻지 마 투쟁’에만 골몰한 야당의 행태가 국민들로부터 거꾸로 심판을 받은 것이다.
안철수식 새 정치에 대한 국민의 거부도 야당 패배에 한 몫 했다. 지난 3월 창당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은 말로는 새 정치와 미래를 들고나왔지만 행동은 정반대였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아니라 ‘헌정치구태연합’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변화와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거 막판에 성사된 야권 연대(連帶)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 야합으로 비쳤다. 야권 연대가 위력을 발휘하려면 단일화된 후보의 역량과 자질 그리고 명분이 중요한데, 이런 걸 무시하고 무조건 선거에서 승리하면 된다는 기회주의적 처신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7·30 대참사’를 몰고 왔다.
재·보선 직후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국민 다수(69.1%)가 야당의 참패 이유로 ‘새정치연합의 잘못된 선거전략’(46.0%), ‘새정치연합의 공천 파동’(23.1%) 등 새정치연합 스스로의 잘못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여당이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야당이 잘 못해서 진 것이다.
패닉에 빠진 야당
7·30 재·보선 참패로 야당은 당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새정치연합은 지난 8월 5일 박영선 원내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민공감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켜 당 재건을 모색하고 있다. 박 비대위원장은 “이제 정치의 기본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 더 낮은 자세로 국민과 함께하겠다”며 “변화와 혁신의 화려한 겉치레가 아닌 근본에서부터 출발하겠다”고 다짐했다.
과연 박영선 비대위 체제는 성공할 수 있을까?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한 이후 대선평가위원장을 맡았던 한상진 교수는 “박영선 원내대표와 같은 분이 비대위를 끌고 가선 전망이 없다”고 밝혔다. 그 이유로 재·보선을 그르친 당사자인 박영선 원내대표가 ‘혁신’ 비대위를 이끈다는 것은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현재 야권의 관심은 온통 내년 1~3월에 치러질 새 당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전당대회에 쏠려 있다. 누가 당대표가 되고 2016년 총선에서 공천은 어떻게 되는지가 최대 관심 영역이다.
하지만 ‘야당 재창조’를 논의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문제의 본질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전당대회에서 새 당대표를 선출한다고 야당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야당은 2007년 대선 패배를 필두로 “지려야 질 수 없다”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했다. 그런데 야당은 그동안 선거에서 지면 지도부 총사퇴 → 비대위 설립 → 혁신안 도출 → 노선 갈등 → 전당대회 개최 → 새 당대표 선출 → 선거 패배를 반복해 왔다. 새정치연합이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수권(受權)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시대정신과 국민 눈높이에 맞는 혁신을 해야 한다.
이 글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야당에 혁신과 변화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1990년부터 2000년대에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에서 만년 야당이었던 정당들이 정권 교체를 이룩하기 위해 어떻게 당을 혁신하고 새로운 노선을 정립했는지를 고찰해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여하튼 야당이 정상화되고 강해져야 질 높은 정당정치가 이뤄지고 성숙한 민주정치가 만들어질 수 있다. ‘야당 정상화’ 작업은 야당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난 재·보선에서 승리한 새누리당에도 정권 재창출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혜와 과제를 함께 제공한다.
美 클린턴의 新민주당(New Democrat) 운동
1992년 11월 3일에 실시된 미국 대선(大選)에서 46세의 민주당 클린턴 후보가 현직인 공화당 부시 대통령을 무찔렀다. 클린턴은 유효표의 43%, 부시 후보는 38%, 무소속 페로 후보는 19%를 획득했다. 클린턴의 승리는 민주당이 12년 만에 다시 정권을 찾아온 것과 함께 미국 역사상 첫 전후(戰後) 세대 지도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선거 해인 1992년 2월에 실시된 뉴햄프셔 예비선거가 시작될 때만 해도 부시 대통령이 무난히 재선(再選)될 것으로 보였다. 부시 대통령이 1991년 걸프전 승리에 힘입어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악의 미국 경제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 변화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확산시켰고, 미국의 경제 부흥을 핵심 어젠다로 들고나온 클린턴이 대안(代案)으로 떠올랐다. 이에 힘입어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economy, stupid!!)”를 선거 구호로 내세워 부시 대통령의 경제 무능을 공격했다.
클린턴 진영은 공화당 장기 집권 기간(1981~1992년) 동안 빈부 격차가 심해졌고, 미국 경제의 경쟁력이 독일, 일본 등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게 취약해졌다는 것을 집중 공격했다. 클린턴은 “이제는 미국 경제 부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경제력 없는 세계 지도력은 행사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유권자들로 하여금 경제투표를 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클린턴은 1992년 7월 뉴욕 전당대회에서 젊은 상원의원 앨 고어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해 대선을 전전(戰前) 세대와 전후 세대의 대결로 몰고 갔다.
新자유주의 일부 수용
클린턴의 승리는 무엇보다 미국 경제 회복을 희망하는 국민의 변화 심리를 잘 읽은 데서 출발했다. 민주당이 진보적인 정강 정책을 수정해 중도 노선으로 변신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복지제도 개선, 노동자 권익 문제 등에 있어서 과거 투쟁적인 색채를 탈색시켜 중도 보수적 노선을 취했다. 클린턴의 이러한 선거 전략은 ‘신 민주당 운동’과 맥을 같이했다.
신 민주당 운동은 1984년 대선에서 민주당 월터 먼데일이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에게 참패한 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주로 남부 출신 의원과 주지사가 중심이 된 이른바 남부 민주당(Southern Democrats) 그룹은 경제형평, 재분배, 국방예산 삭감, 관대한 사회정책에 치중하는 민주당 다수 노선을 개혁하기 위해서 민주당지도자회의(DLC·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라는 조직을 당 외곽에 설립했다.
당시 DLC의 핵심 주장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이념에 대응하려면 민주당도 신자유주의를 일부 수용해서 공화당에 빼앗긴 중도적인 민주당 유권자를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설명했다. 즉 “재정안정, 자유무역, 규제완화 등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일부 수용하되 사회정의 구현과 시장 실패의 보완을 위해서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중도를 선점(先占)하기 위한 민주당의 ‘산토끼 전략’이었다. 민주당의 이와 같은 노선 변신 덕분에 민주당원이면서 과거 공화당 후보였던 레이건 대통령에게 투표했던 중산층의 ‘레이건 민주당원(Reagan Democrats)’을 대거 흡수할 수 있었다. 이것이 클린턴 승리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공화당, 지나친 급진정책 고집하다 패배
1992년 대선 패배 이후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공화당은 뉴트 깅리치 지도하에 1994년 중간 선거에서 ‘국민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보수 노선으로 예상 밖의 승리를 일궈냈다. 상원에서 우위를 확대하고 1952년 이후 처음으로 하원에서 다수를 획득했다. 그러나 공화당 보수파 의원들은 1994년의 승리에 고무되어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강경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중간 계층의 지지를 잃게 됐다. 특히 낙태 금지, 복지 예산 삭감 등의 개혁정책을 감행, 진보 세력의 기반인 소수 민족과 노동계, 그리고 저소득층의 반발을 가져왔다.
이처럼 클린턴의 중도 노선에 대응하는 공화당 보수파의 이념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그 결과 민주당의 방만한 재정 지출, 정부 규제, 관대한 범죄정책에 반발하여 공화당으로 이탈했던 보수적 민주당원들이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가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다시 말해, 중간 선거 승리에 도취된 공화당의 자신의 지지층을 규합하기 위한 ‘집토끼 전략’은 결국 클린턴의 중도 선점 전략에 무릎을 꿇었다.
英 토니 블레어 혁명: 제3의 길
1997년 5월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Labour Party)은 1979년 보수당에 정권을 내준 지 18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이 선거에서 노동당은 43.2%의 득표로 전체 의석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을 차지했다. 특히 이전 1992년 총선과 비교해 노동당은 무려 141석을 더 얻었다. 결과적으로 노동당은 2차 대전 이후 영국 의회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다수 의석을 가진 거대 여당이 되었다. 반면, 집권당인 보수당은 1832년 이래 최저인 30.7%의 득표율로 165석을 차지해 1906년 이래 최저였다. 1992년 총선과 비교해 무려 178석을 잃었다[표1].
노동당의 압승은 18년이라는 보수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변화 기대 심리, 유럽단일통화를 둘러싼 보수당의 내부 분열, 잇따른 보수당 의원들의 금품수수와 관련된 스캔들 등이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당 압승의 직접적인 원인은 44세의 토니 블레어가 주도한 신 노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블레어는 과거의 노동당이 좌파적 이념에 치우쳐 중산층의 지지를 못 받았던 실패를 거울삼아 ‘신 노동당’ ‘제3의 길’을 외쳤다. 그는 1994년 최연소로 노동당 당수가 되었고 새 당수를 선출한 전당대회에서 66.2%의 지지로 노동당 당헌 제4조 4항(이른바 생산수단의 국유화 조항)을 삭제했다. 이것은 노동당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좌에서 중앙으로 옮기는 거대한 혁명의 시작이었다.
新 노선과 ‘제3의 길’
1996년 6월에는 노동당 신 노선(New Labour)을 공식 발표했다. 집권 이후 국정정책을 담고 있는 1만 자에 걸친 신 노선의 ‘정책선언(The Road to the Manifesto)’은 종래까지 노동당이 추구하던 주요 정책을 오른쪽으로 전환했다.
완전고용 등 전통적인 사회정책의 포기, 1980년 이후 보수당하에서 입안된 노동관계법의 유지, ‘탄력적인’ 최저임금기구의 신설, 유럽연합의 사회헌장 조인 등이다.
이는 전통적인 좌파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으로서 노동당 내 좌익과 노동조합들은 ‘노동당의 우경화(右傾化)’에 분노했다. 보수당마저 자신의 고유한 정책을 노동당이 훔쳐갔다고 비판했다.
블레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 노동당 노선을 밀어붙였다. 선거에 패한 보수당은 “기존의 보수당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블레어가 내세운 신 노선은 다름 아닌 우리의 것이다. 그들은 정부긴축재정, 세금동결, 민영화 등 우리의 정강 정책을 그대로 빌려갔다”고 했다. 보수당은 ‘새로운 노동당, 새로운 위험’이라는 선거 구호를 내세워 블레어를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보수당 장기 집권에 지친 국민들은 노동당을 택했다.
블레어의 실용주의적 중도좌파 노선의 철학적 기저는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이다. 그는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제3의 길’로 불리는 새로운 사회발전 모델을 주창했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경직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이념 모델이다. 여하튼 블레어는 제3의 길을 토대로 2001년과 2005년 총선에서도 계속 승리하여 총리로서 3기 연속 집권하였다. 그리고 2007년 6월에 총리 재임 10년 만에 총리직에서 퇴임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新 중도 노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50여 년간 독일의 진보 정당인 사회민주당(SPD)은 만년 2등이라 할 정도로 수권 경쟁에서 보수 정당인 기독교민주당(CDU/CSU)에 열세였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도 사민당의 약세 현상은 지속되었다.
1998년 이전 연방하원 선거에서 사민당의 평균 득표율은 30%대 후반이었고, 기민당은 40%대에 달했다. 그런데 1998년 9월 27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사민당은 승리했다[표2]. 1982년부터 시작된 기민당 헬무트 콜 수상의 장기 집권을 16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승리 요인은 무엇일까?
통일 과정에서 콜 수상이 제기한 장밋빛 비전과 공약에 대한 기대감이 분노로 바뀐 것이 한 원인이다. 콜 수상은 “3~5년이면 통일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허무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사민당 승리 요인으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54세의 젊은 기수인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추진한 ‘신 중도 노선(Neur Mitte)’이다. 그동안 사민당은 사회의 변화된 구조와 탈(脫)이념화되는 중산층의 증가가 맞물리면서 만년 야당 신세가 되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사민당은 ‘이중(二重) 전략’과 ‘이중 프로그램’으로 1998년 선거에 임했다. 당수인 라퐁텐을 내세워 전통적인 지지층을 끌어안고, 총리 후보인 슈뢰더는 실망하는 기민당/기사당 지지자들을 맡았다.
라퐁텐과 슈뢰더의 역할 분담
당시 사민당은 라퐁텐 당수를 축으로 하는 전통적 사민주의를 옹호하는 그룹과 슈뢰더를 중심으로 우파 개혁을 주장하는 그룹으로 나눠졌다. 라퐁텐 당수는 사회적 분배 정의에 적합한 강력한 국가 개입을 지지하고, 슈뢰더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사회복지국가의 현대화’를 강조했다.
기존의 사회 안전망을 더욱 현대화시켜 개개인 누구나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정책이다. 슈뢰더는 실업수당보다는 일자리 창출에 우선을 두었다.
이런 이중 전략은 정책에서도 이중 프로그램으로 나왔다. 진보 성향의 전통적인 지지층을 겨냥해서는 ‘사회 정의’를 강조했고, 우파 성향의 중산층을 겨냥해서는 자유 경쟁 및 효율을 강조하는 ‘혁신’을 내세우는 신 중도 노선을 채택했다. 이런 이중 전략으로 사민당은 1994년 선거에 비해 약 300만 표를 보수당 쪽과 새 유권자에게서 얻고, 노동층뿐만 아니라 사무직 중산층을 망라하는 지지를 얻었다.
슈뢰더는 정권을 잡은 후 정부의 대표적 정책으로 ‘미래프로그램 2000’을 표방했다. 핵심은 연금 삭감과 실업 기금의 축소를 통해 국가 부채를 줄이는 한편 기업에 대해서는 조세 경감을 통해 자본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슈뢰더는 집권 후 1999년 6월 8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함께 ‘유럽 제3의 길, 신 중도 노선’에 대한 정책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영국 런던 노동당 본부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18쪽짜리 강령은 ▲정부 역할 축소 ▲공공재정 지출 축소 ▲창의력을 북돋울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 개혁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공급 위주의 고용정책 ▲법인세 인하를 통한 기업경쟁력 향상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분명 신자유주의적 요소가 반영된 정책기조였다. 이런 신 중도 노선에 힘입어 슈뢰더는 2002년 총선에서도 승리했다.
스웨덴 2006년 선거: 중도우파 연합의 승리
1932년 이후 잠깐 동안 두 번 실각(失脚)했던 것을 제외하고 65년간 스웨덴을 이끌었던 사회민주당 좌파 정권이 2006년 9월 17일 총선에서 패배했다. 41세의 프레드리크 레인펠트 당수가 이끄는 보수당 중심의 중도우파 연합(중앙·국민·기독민주당)이 12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아래 [표3]에서 보듯이 중도우파 연합(스웨덴을 위한 연합)(48.1%)은 좌파 연합(46.2%)에 1.9% 차이로 신승(辛勝)했다.
물론 우파 연합의 승리가 곧 스웨덴 복지제도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우파 정당들은 집권하더라도 스웨덴 사회제도의 근간을 변화시키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선 쟁점은 스웨덴 모델의 존폐 여부가 아니라 그 운용 방법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잘 먹고 잘사는 복지 혜택을 받던 유권자들이 왜 우파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보수당, 복지제도 ‘부정’ 대신 ‘개선’ 약속
유럽의 주요 언론들은 복지정책의 실패나 복지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아니라 사민당의 정치적 비효율성과 ‘오만한’ 예란 페르손 총리 개인에 대한 심판으로 스웨덴 총선 결과를 분석했다.
그렇지만 사민당이 줄기차게 추진해 나가는 복지우선 정책이 ‘기업 투자심리 위축 → 일자리 감소 → 실업률 상승 → 성장잠재력 저하’로 이어지고 있는 문제점을 보수당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선거 전략이 주효했다. 즉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들의 식상함과 스웨덴 모델의 운용과 관련된 설득력 있는 대안 부재라는 벽에 부딪혀 민심이 이반된 것이 사민당 패배의 핵심 요인이었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중도우파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민당의 복지정책을 뒤엎는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지정책을 기반으로 제도를 개선시키려 한다는 점을 국민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웨덴 복지모델의 설계자인 루돌프 마이드너는 “스웨덴 복지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검증된 모델에 집착하지 않고 달라지는 환경에 따라 개조되고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보수우파 정당들은 이런 충고를 놓치지 않고 선거에서 이용했다. 2002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대규모 세금 감면과 복지지출 축소를 약속했다가 완패(完敗)했다. 그러자 2006년 총선에서는 노동시장 개혁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저소득층에 대한 점진적 감세안으로 정책 수위를 조절했다.
당시 스웨덴의 공식적인 실업률은 6% 수준이었지만 숨겨진 실업(失業)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15% 이상으로 추정됐다. 특히 청년 실업률은 20%를 상회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보수당은 청년 실업 감소대책으로 청년 고용에 대해서는 고용주의 의무부담금을 면제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스웨덴에서는 근로자의 임금에 따라 세율이 달라지지만 대략 임금의 30% 이상을 고용주 세금으로 내야 한다. 고용에 따른 세제감면 혜택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별도로 세금을 내야 한다. 한번 고용하면 쉽게 해고하기 어려운 노동법도 고용을 꺼리는 원인이 되었다.
보수당의 左클릭
보수당은 우파 정당임에도 ‘새로운 노동자 정당(New labor party)’을 자임하며 정치적 무게중심을 ‘좌로 이동’시켰다. 보수당은 “진짜 노동자를 위한 정당은 보수당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고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되찾아주겠다”고 했다.
보수당은 복지시스템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교육과 노인복지 분야에는 오히려 지출을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이것은 좌파와 대립각을 세우기보다 이념적 경계를 초월, 시장근본주의라는 우파적 도그마의 속박에서 벗어남으로써 중도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프레드리크 레인펠트 보수당 당수는 정통 보수주의 노선에서 유권자가 밀집돼 있는 중도 쪽으로 한걸음 옮겨가는 정책 변신을 통해 국민 곁으로 다가갔다. 노동시장을 포함한 기업 활동 관련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정부 소유 공기업은 단계적으로 매각할 것을 약속했다. 공공 부문에 경쟁을 도입하고 민간 부문에 활력을 불어넣어 투자를 활성화하고 일자리 창출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중도우파 정당들이 선거 사상 처음으로 이런 정책들을 공동으로 공약했다는 것이다. 분명 중도우파 연합의 이런 변신은 스웨덴 복지제도의 개혁을 가져왔고 이것이 결국 2006년에 이어 2010년 총선에서도 승리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미래
새정치연합이 ‘도로 민주당’으로 회귀하지 않고 진정한 혁신의 길을 걸어 201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새정치연합은 과거 만년 야당에서 정권 교체에 성공했던 미국과 유럽의 정당들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혁신의 방향과 실천 과제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현 시점에서 새정치연합 혁신 작업의 최우선 과제는 새로운 정치 노선 수립과 실천이다. 그 핵심은 김대중(DJ)과 노무현을 뛰어넘는 것이다. 한국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어젠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모두가 김대중이 되길 원했고 또다시 그런 총재가 돌아오기를 바라겠지만 그런 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옳은 판단이다. 분명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리더와 새로운 노선이 필요하다.
독일 사민당의 슈뢰더 전 총리는 2003년부터 ‘어젠다 2010’과 ‘노동시장 개혁(하르츠 Ⅳ)’을 추진했다. 이것은 일종의 ‘독일경제 재생’ 계획이었다. 핵심 내용은 노동시장 유연성을 위해 해고방지법과 연금, 의료 보험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전 평균 임금 대비 53%였던 연금 수준을 2020년에 46%, 2030년에는 43%로 낮추는 방안이 포함되었다. 연금 수령 나이도 65세에서 67세로 늘렸다. 연금에 발목이 잡혀 국가경쟁력이 계속 하락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정당의 이익보다는 국가와 국민의 장기적 이익을 챙겼다. 새정치연합의 혁신 과정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파격적 조치이다.
한국, 새누리당이 ‘경계 파괴’ 선도
블레어 영국 총리의 신 노동당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앤서니 기든스는 “좌파는 보수화되고 우파는 급진화됨으로써 견고하게만 여겨지던 좌우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의 ‘경계 파괴’는 좌파가 아닌 우파가 주도하고 있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보여준 것이 이런 우파 파괴의 전형이었다. 박 후보는 그동안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어젠다를 들고나왔다. 이런 파격적 조치는 보수가 중도층의 지지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새정치연합도 이런 창조적 파괴를 도입해야 한다. 복지 확대도 좋지만 무엇보다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을 담보할 ‘제3의 길’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집권당의 이념이 국민들의 마음속에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을 때 야당은 여당의 이념을 일부 수용하는 중도 노선을 채택해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반면, 야당이 집권당의 지배적 이념에 정반대되는 이념으로 성공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미국 민주당의 먼데일과 듀카키스가 1984년 대선과 1988년 대선에서 전통적인 뉴딜 이념으로 당시 지배 이념인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에 도전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이를 의식한 클린턴은 1992년 선거에서 신자유주의 이념을 일부 수용하는 제3의 길인 중도 노선을 채택해 승리했다. 블레어는 ‘대처의 아들’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제3의 길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서 세 번 연속 총선에서 승리했다.
박영선이 해야 하는 일
만약 새정치연합이 제3의 길 대신 당내 일부에서 제기하는 ‘선명(鮮明) 야당론’에 ‘강경 노선’의 길을 갈 경우 ‘도로 민주당’이 되어 어두운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문제는 누가 새로운 노선을 주도하고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 하는 방법이다. 현실적으로 새로운 정치 노선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은 박영선 비대위원장, 문재인 의원, 그리고 안철수 의원으로 집약된다.
그중에서도 박 위원장의 역할이 주목된다. 박 위원장은 새정치연합이 낡은 과거와 관행으로부터 지혜롭게 결별하는 방안으로 “투쟁 정당 이미지에서 벗어나 정의로움을 더욱 굳건히 세우는 일,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근간을 둔 생활정치의 실현”이라고 강조했다.
지극히 판에 박힌 말이다. 이런 밋밋한 생각과 자세로는 국민의 혁신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다. 비대위 활동 기간 동안 자신의 정치 철학과 신념이 반영된 새로운 노선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할 수 있는 것만 약속하는, 다시 말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자세를 보여야 한다. 더불어, 내년 당대표 경선 전당대회에도 출마해 자신이 정립한 노선을 관철시키려는 의지와 열정을 보여줘야 한다.
영국의 블레어는 1994년 당수에 취임해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할 때까지 3년, 스웨덴의 레인펠트도 2003년 당수로 선출되어 2006년 총선에서 승리할 때까지 3년 동안 당을 이끌었다. 2010년에 영국 노동당으로부터 13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도 2005년 39세 나이에 당수가 되어 5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룩했다.
한국 야당도 정권 교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분명한 철학적 사고를 토대로 장기간 자신의 정치 노선을 실천하려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박 위원장은 현재 겸직하고 있는원내대표직을 내려놓고 비대위 활동에만 전념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만약 박 비대위원장이 적당히 원내대표 일과 비대위원장 일을 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어정쩡한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지난 8월 7일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해 새누리당과 합의한 것을 지키지 못하고 재협상을 하기로 한 것만 봐도 두 자리를 함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새정치민주연합, 창조적 해체 고려해야
새정치민주연합은 진짜 혁신을 하려면 당을 ‘창조적으로 해체’하고 야권 전체를 재편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새정치연합, 정의당, 노동당의 통합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문재인 의원의 대변신도 기대할 만하다. 문 의원이 당내 강경파인 친노무현계를 설득해 문재인식 신 중도 노선을 제기하고 이를 일관성 있게 실천한다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에게 그런 역량과 통찰력이 있느냐를 별개로 한다면. 반대로 ‘정권 심판’ ‘선명 야당’ ‘강경 투쟁’ 일변도의 목소리에 취한 ‘몽유병 환자’처럼 좌측으로 발걸음을 내디딘다면 또다시 실패의 길을 걸을 것이다.
한상진 교수는 “이제 야당도 운동정치와 제도정치를 구별해야 하며, 거리로 나가는 것은 옳지 않다”며 “실용적인 접근을 택해 민생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의원이 깊이 새겨볼 만한 충고이다.
7·30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난 안철수 의원은 측근들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그가 과거와 같은 정치 노선과 어떻게 결별하고 새로 시작하느냐가 관건이다. 지난 3월 민주당과의 통합 이후 4개월 동안 보여준 정신과 자세로 다시 시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안 의원은 토크 콘서트 재개, 새 정치에 대한 생각만 하지 말고 그동안 선거 일정에 쫓겨 실현하지 못한 정치 혁신 과제 등을 실천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안 의원의 당내 입지는 거의 소멸할 위기에 직면했다. 그렇다고 안 의원이 차기 대선 승리를 위해 당내 세력화에만 치중할 경우, 그의 정치적 운명은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따라서 안 의원은 대통령이 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제안한 성찰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를 아우르는 중도 통합 노선 실현에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안철수는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세간의 부정적 평가도 불식시켜야 한다.
새로운 정치 노선의 정립도 중요하지만 계파 청산 없이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은 없다. 야당은 친노무현계, 486 그룹, 호남 민주계, 손학규계, 정세균계, 평민련계 등으로 분열되어 망당적인 계파 정치의 깊은 늪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대선 패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사라지고 오로지 계파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당내 투쟁만 판을 쳤다.
정치가 꿈과 희망을 줘야 하는데 야당은 계파정치에만 매몰돼 국민에게 실망과 분노만을 안겨주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진정 당을 살리려면 계파 청산을 위한 특단의 조치로 계파 해체 선언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추진해야 할 노선을 합의를 통해 정립할 수 있다.
단언컨대, 새정치민주연합은 단순한 조기(早期) 전당대회를 통한 지도체제 개편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야당의 체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바꾸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투쟁 대신 대안을, 반대를 위한 반대 대신 대화와 타협을, 계파정치 대신 국익정치를, 야권 연대 대신 수권 정당으로서의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
새누리당도 新 노선 모색해야
재·보선 압승으로 세월호 참사 정국으로 수세에 몰렸던 새누리당은 정국 주도권을 회복하고 국가 혁신과 경제 살리기에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선거 승리에 도취되어 오만과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선거에는 영원한 승자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 선거에서는 더 이상 절대 강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10~15년을 주기로 좌에서 우, 우에서 좌로 정권이 교체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미국 대선에서는 ‘10년 시계추(ten year’s pendulum)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권이 약 10년 정도를 주기로 민주당에서 공화당,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주 정권이 교체되는 이유는 경제 변수 때문이다. 무엇보다 ‘높은 실업률’과 일자리 창출(고용)이 핵심 변수였다. 독일 통일의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기민당의 콜 수상은 400만명이 넘는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했다. EU 국가 중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던 스웨덴 사민당의 예란 페르손 총리도 17%에 이르는 높은 청년 실업률 때문에 졌다. 걸프전의 영웅 부시 대통령도 결국 경제가 발목을 잡았다.
무기력한 야당 덕분에 지금 새누리당은 꽃놀이패를 들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2년 내에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적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1988년부터 나타난 ‘10년 정권 교체 주기설’과 맞물려 정권을 빼앗길 수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 국가 선거에서 나타난 도드라진 특징은 특정 정당 또는 선거 연대가 과거와 같이 절대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 유권자들이 정당 충성도와 정당 일체감에 따라 투표하는 경향이 점차 감소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세계화(世界化)가 자리 잡고 있다.
시사주간 《타임》의 편집 컨설턴트를 지낸 리처드 호니크는 “세계화는 혜택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이는 표심의 양극화로 나타나 어느 세력도 절대적 다수파가 될 수 없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절대적 다수파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 유동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 독일, 스웨덴 등의 국가 정권 교체를 수반한 선거에서 ‘면도날처럼 얇은(razor thin)’ 승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이런 현상들과 관련이 있다.
새누리당이 2017년 대선에서 ‘10년 시계추 이론’에 따른 정권 교체의 패배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민에게 약속한 ‘보수 혁신’을 강도 높게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박근혜 없는 선거’에서 ‘박근혜 노선’을 대체할 새로운 노선의 정립이 시급하다.⊙
지역 일꾼론을 앞세운 새누리당 정치 신인들도 새정치민주연합의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던 거물 정치인들을 상대로 예상 밖의 큰 차이로 승리했다. 손학규 상임고문은 선거 패배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김한길 새정치연합 공동대표는 선거 당일 “집권세력이 정신 차리도록 유권자들이 회초리를 들어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정반대로 야당에 매서운 회초리를 들었다.
2010년 7·28 재·보선에서도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지방선거 대승에도 불구하고 참패했다. 전체 8개 지역구 가운데 5곳을 한나라당에 빼앗겼다. 그중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재오 후보(서울 은평을)가 승리해 화려하게 복귀했다.
7·30 재·보선에서 야당의 참패는 그야말로 재앙 수준이다. 세월호 참사, 인사 참사, 유병언 부실 수사 참사와 같이 초대형 호재 속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참패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야당 慘敗의 원인
이번 재·보선에서는 안철수 대표의 리더십이 크게 훼손되어 야권 성향 조직마저 동원하지 못했다. 새정치연합은 지방선거에서 이미 소진된 ‘세월호 심판론’을 다시 들고나왔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정부 무능에 대한 심판론에 대해서는 유권자들의 피로감이 쌓였고 결국 투표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반면, 새누리당은 전략적으로 ‘박근혜 없는 선거’를 주도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재미 봤던 ‘박근혜 마케팅’을 과감히 접고 대신 경제를 들고나왔다. 선거 기간 내내 서민 경제, 내수 진작, 경기 부양책, 경기 활성화 등 경제 관련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반대로 야당은 “세월호 특별법이 처리되지 않을 경우 각종 민생법안을 ‘보이콧’하겠다”고 나섰다. 야당은 오랜 경기 침체 속에서 세월호 참사로 내수 경제마저 위축된 상황에서 유권자는 심판보다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두툼하게 해줄 후보에게 투표한다는 선거의 ABC도 몰랐다.
결국 ‘세월호 특별법’을 인질 삼아 모든 경제 살리기·민생 관련 법안의 입법을 저지한 채 정권 흔들기 ‘묻지 마 투쟁’에만 골몰한 야당의 행태가 국민들로부터 거꾸로 심판을 받은 것이다.
안철수식 새 정치에 대한 국민의 거부도 야당 패배에 한 몫 했다. 지난 3월 창당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은 말로는 새 정치와 미래를 들고나왔지만 행동은 정반대였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아니라 ‘헌정치구태연합’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변화와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거 막판에 성사된 야권 연대(連帶)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 야합으로 비쳤다. 야권 연대가 위력을 발휘하려면 단일화된 후보의 역량과 자질 그리고 명분이 중요한데, 이런 걸 무시하고 무조건 선거에서 승리하면 된다는 기회주의적 처신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7·30 대참사’를 몰고 왔다.
재·보선 직후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국민 다수(69.1%)가 야당의 참패 이유로 ‘새정치연합의 잘못된 선거전략’(46.0%), ‘새정치연합의 공천 파동’(23.1%) 등 새정치연합 스스로의 잘못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여당이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야당이 잘 못해서 진 것이다.
패닉에 빠진 야당
7·30 재·보선 참패로 야당은 당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새정치연합은 지난 8월 5일 박영선 원내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민공감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켜 당 재건을 모색하고 있다. 박 비대위원장은 “이제 정치의 기본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 더 낮은 자세로 국민과 함께하겠다”며 “변화와 혁신의 화려한 겉치레가 아닌 근본에서부터 출발하겠다”고 다짐했다.
과연 박영선 비대위 체제는 성공할 수 있을까?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한 이후 대선평가위원장을 맡았던 한상진 교수는 “박영선 원내대표와 같은 분이 비대위를 끌고 가선 전망이 없다”고 밝혔다. 그 이유로 재·보선을 그르친 당사자인 박영선 원내대표가 ‘혁신’ 비대위를 이끈다는 것은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현재 야권의 관심은 온통 내년 1~3월에 치러질 새 당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전당대회에 쏠려 있다. 누가 당대표가 되고 2016년 총선에서 공천은 어떻게 되는지가 최대 관심 영역이다.
하지만 ‘야당 재창조’를 논의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문제의 본질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전당대회에서 새 당대표를 선출한다고 야당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야당은 2007년 대선 패배를 필두로 “지려야 질 수 없다”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했다. 그런데 야당은 그동안 선거에서 지면 지도부 총사퇴 → 비대위 설립 → 혁신안 도출 → 노선 갈등 → 전당대회 개최 → 새 당대표 선출 → 선거 패배를 반복해 왔다. 새정치연합이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수권(受權)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시대정신과 국민 눈높이에 맞는 혁신을 해야 한다.
이 글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야당에 혁신과 변화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1990년부터 2000년대에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에서 만년 야당이었던 정당들이 정권 교체를 이룩하기 위해 어떻게 당을 혁신하고 새로운 노선을 정립했는지를 고찰해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여하튼 야당이 정상화되고 강해져야 질 높은 정당정치가 이뤄지고 성숙한 민주정치가 만들어질 수 있다. ‘야당 정상화’ 작업은 야당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난 재·보선에서 승리한 새누리당에도 정권 재창출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혜와 과제를 함께 제공한다.
美 클린턴의 新민주당(New Democrat) 운동
 |
| 1992년 미국 대선 당시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실은《타임》 표지. ‘변화를 위한 후보’라는 표제어가 눈길을 끈다. |
선거 해인 1992년 2월에 실시된 뉴햄프셔 예비선거가 시작될 때만 해도 부시 대통령이 무난히 재선(再選)될 것으로 보였다. 부시 대통령이 1991년 걸프전 승리에 힘입어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악의 미국 경제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 변화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확산시켰고, 미국의 경제 부흥을 핵심 어젠다로 들고나온 클린턴이 대안(代案)으로 떠올랐다. 이에 힘입어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economy, stupid!!)”를 선거 구호로 내세워 부시 대통령의 경제 무능을 공격했다.
클린턴 진영은 공화당 장기 집권 기간(1981~1992년) 동안 빈부 격차가 심해졌고, 미국 경제의 경쟁력이 독일, 일본 등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게 취약해졌다는 것을 집중 공격했다. 클린턴은 “이제는 미국 경제 부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경제력 없는 세계 지도력은 행사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유권자들로 하여금 경제투표를 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클린턴은 1992년 7월 뉴욕 전당대회에서 젊은 상원의원 앨 고어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해 대선을 전전(戰前) 세대와 전후 세대의 대결로 몰고 갔다.
新자유주의 일부 수용
클린턴의 승리는 무엇보다 미국 경제 회복을 희망하는 국민의 변화 심리를 잘 읽은 데서 출발했다. 민주당이 진보적인 정강 정책을 수정해 중도 노선으로 변신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복지제도 개선, 노동자 권익 문제 등에 있어서 과거 투쟁적인 색채를 탈색시켜 중도 보수적 노선을 취했다. 클린턴의 이러한 선거 전략은 ‘신 민주당 운동’과 맥을 같이했다.
신 민주당 운동은 1984년 대선에서 민주당 월터 먼데일이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에게 참패한 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주로 남부 출신 의원과 주지사가 중심이 된 이른바 남부 민주당(Southern Democrats) 그룹은 경제형평, 재분배, 국방예산 삭감, 관대한 사회정책에 치중하는 민주당 다수 노선을 개혁하기 위해서 민주당지도자회의(DLC·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라는 조직을 당 외곽에 설립했다.
당시 DLC의 핵심 주장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이념에 대응하려면 민주당도 신자유주의를 일부 수용해서 공화당에 빼앗긴 중도적인 민주당 유권자를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설명했다. 즉 “재정안정, 자유무역, 규제완화 등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일부 수용하되 사회정의 구현과 시장 실패의 보완을 위해서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중도를 선점(先占)하기 위한 민주당의 ‘산토끼 전략’이었다. 민주당의 이와 같은 노선 변신 덕분에 민주당원이면서 과거 공화당 후보였던 레이건 대통령에게 투표했던 중산층의 ‘레이건 민주당원(Reagan Democrats)’을 대거 흡수할 수 있었다. 이것이 클린턴 승리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공화당, 지나친 급진정책 고집하다 패배
1992년 대선 패배 이후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공화당은 뉴트 깅리치 지도하에 1994년 중간 선거에서 ‘국민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보수 노선으로 예상 밖의 승리를 일궈냈다. 상원에서 우위를 확대하고 1952년 이후 처음으로 하원에서 다수를 획득했다. 그러나 공화당 보수파 의원들은 1994년의 승리에 고무되어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강경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중간 계층의 지지를 잃게 됐다. 특히 낙태 금지, 복지 예산 삭감 등의 개혁정책을 감행, 진보 세력의 기반인 소수 민족과 노동계, 그리고 저소득층의 반발을 가져왔다.
이처럼 클린턴의 중도 노선에 대응하는 공화당 보수파의 이념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그 결과 민주당의 방만한 재정 지출, 정부 규제, 관대한 범죄정책에 반발하여 공화당으로 이탈했던 보수적 민주당원들이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가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다시 말해, 중간 선거 승리에 도취된 공화당의 자신의 지지층을 규합하기 위한 ‘집토끼 전략’은 결국 클린턴의 중도 선점 전략에 무릎을 꿇었다.
英 토니 블레어 혁명: 제3의 길
 |
| 1997년 5월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은 18년 만에 정권을 탈환했다. |
이 선거에서 노동당은 43.2%의 득표로 전체 의석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을 차지했다. 특히 이전 1992년 총선과 비교해 노동당은 무려 141석을 더 얻었다. 결과적으로 노동당은 2차 대전 이후 영국 의회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다수 의석을 가진 거대 여당이 되었다. 반면, 집권당인 보수당은 1832년 이래 최저인 30.7%의 득표율로 165석을 차지해 1906년 이래 최저였다. 1992년 총선과 비교해 무려 178석을 잃었다[표1].
노동당의 압승은 18년이라는 보수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변화 기대 심리, 유럽단일통화를 둘러싼 보수당의 내부 분열, 잇따른 보수당 의원들의 금품수수와 관련된 스캔들 등이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당 압승의 직접적인 원인은 44세의 토니 블레어가 주도한 신 노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블레어는 과거의 노동당이 좌파적 이념에 치우쳐 중산층의 지지를 못 받았던 실패를 거울삼아 ‘신 노동당’ ‘제3의 길’을 외쳤다. 그는 1994년 최연소로 노동당 당수가 되었고 새 당수를 선출한 전당대회에서 66.2%의 지지로 노동당 당헌 제4조 4항(이른바 생산수단의 국유화 조항)을 삭제했다. 이것은 노동당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좌에서 중앙으로 옮기는 거대한 혁명의 시작이었다.
新 노선과 ‘제3의 길’
 |
| 토니 블레어의 ‘新노동당’ 노선에 이론을 제공한 앤서니 기든스 교수. |
완전고용 등 전통적인 사회정책의 포기, 1980년 이후 보수당하에서 입안된 노동관계법의 유지, ‘탄력적인’ 최저임금기구의 신설, 유럽연합의 사회헌장 조인 등이다.
이는 전통적인 좌파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으로서 노동당 내 좌익과 노동조합들은 ‘노동당의 우경화(右傾化)’에 분노했다. 보수당마저 자신의 고유한 정책을 노동당이 훔쳐갔다고 비판했다.
블레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 노동당 노선을 밀어붙였다. 선거에 패한 보수당은 “기존의 보수당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블레어가 내세운 신 노선은 다름 아닌 우리의 것이다. 그들은 정부긴축재정, 세금동결, 민영화 등 우리의 정강 정책을 그대로 빌려갔다”고 했다. 보수당은 ‘새로운 노동당, 새로운 위험’이라는 선거 구호를 내세워 블레어를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보수당 장기 집권에 지친 국민들은 노동당을 택했다.
블레어의 실용주의적 중도좌파 노선의 철학적 기저는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이다. 그는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제3의 길’로 불리는 새로운 사회발전 모델을 주창했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경직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이념 모델이다. 여하튼 블레어는 제3의 길을 토대로 2001년과 2005년 총선에서도 계속 승리하여 총리로서 3기 연속 집권하였다. 그리고 2007년 6월에 총리 재임 10년 만에 총리직에서 퇴임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新 중도 노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50여 년간 독일의 진보 정당인 사회민주당(SPD)은 만년 2등이라 할 정도로 수권 경쟁에서 보수 정당인 기독교민주당(CDU/CSU)에 열세였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도 사민당의 약세 현상은 지속되었다.
1998년 이전 연방하원 선거에서 사민당의 평균 득표율은 30%대 후반이었고, 기민당은 40%대에 달했다. 그런데 1998년 9월 27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사민당은 승리했다[표2]. 1982년부터 시작된 기민당 헬무트 콜 수상의 장기 집권을 16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승리 요인은 무엇일까?
통일 과정에서 콜 수상이 제기한 장밋빛 비전과 공약에 대한 기대감이 분노로 바뀐 것이 한 원인이다. 콜 수상은 “3~5년이면 통일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허무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사민당 승리 요인으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54세의 젊은 기수인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추진한 ‘신 중도 노선(Neur Mitte)’이다. 그동안 사민당은 사회의 변화된 구조와 탈(脫)이념화되는 중산층의 증가가 맞물리면서 만년 야당 신세가 되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사민당은 ‘이중(二重) 전략’과 ‘이중 프로그램’으로 1998년 선거에 임했다. 당수인 라퐁텐을 내세워 전통적인 지지층을 끌어안고, 총리 후보인 슈뢰더는 실망하는 기민당/기사당 지지자들을 맡았다.
라퐁텐과 슈뢰더의 역할 분담
 |
| 1998년 독일 총선 당시 라퐁텐 사민당 당수(왼쪽)는 전통적 좌파 지지층을, 슈뢰더 총리 후보는 중도층과 우파 유권자들을 공략했다. |
기존의 사회 안전망을 더욱 현대화시켜 개개인 누구나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정책이다. 슈뢰더는 실업수당보다는 일자리 창출에 우선을 두었다.
이런 이중 전략은 정책에서도 이중 프로그램으로 나왔다. 진보 성향의 전통적인 지지층을 겨냥해서는 ‘사회 정의’를 강조했고, 우파 성향의 중산층을 겨냥해서는 자유 경쟁 및 효율을 강조하는 ‘혁신’을 내세우는 신 중도 노선을 채택했다. 이런 이중 전략으로 사민당은 1994년 선거에 비해 약 300만 표를 보수당 쪽과 새 유권자에게서 얻고, 노동층뿐만 아니라 사무직 중산층을 망라하는 지지를 얻었다.
슈뢰더는 정권을 잡은 후 정부의 대표적 정책으로 ‘미래프로그램 2000’을 표방했다. 핵심은 연금 삭감과 실업 기금의 축소를 통해 국가 부채를 줄이는 한편 기업에 대해서는 조세 경감을 통해 자본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슈뢰더는 집권 후 1999년 6월 8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함께 ‘유럽 제3의 길, 신 중도 노선’에 대한 정책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영국 런던 노동당 본부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18쪽짜리 강령은 ▲정부 역할 축소 ▲공공재정 지출 축소 ▲창의력을 북돋울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 개혁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공급 위주의 고용정책 ▲법인세 인하를 통한 기업경쟁력 향상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분명 신자유주의적 요소가 반영된 정책기조였다. 이런 신 중도 노선에 힘입어 슈뢰더는 2002년 총선에서도 승리했다.
스웨덴 2006년 선거: 중도우파 연합의 승리
 |
| 프레드리크 레인펠트 스웨덴 보수당 당수는 중도 노선으로 이동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
물론 우파 연합의 승리가 곧 스웨덴 복지제도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우파 정당들은 집권하더라도 스웨덴 사회제도의 근간을 변화시키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선 쟁점은 스웨덴 모델의 존폐 여부가 아니라 그 운용 방법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잘 먹고 잘사는 복지 혜택을 받던 유권자들이 왜 우파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보수당, 복지제도 ‘부정’ 대신 ‘개선’ 약속
유럽의 주요 언론들은 복지정책의 실패나 복지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아니라 사민당의 정치적 비효율성과 ‘오만한’ 예란 페르손 총리 개인에 대한 심판으로 스웨덴 총선 결과를 분석했다.
그렇지만 사민당이 줄기차게 추진해 나가는 복지우선 정책이 ‘기업 투자심리 위축 → 일자리 감소 → 실업률 상승 → 성장잠재력 저하’로 이어지고 있는 문제점을 보수당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선거 전략이 주효했다. 즉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들의 식상함과 스웨덴 모델의 운용과 관련된 설득력 있는 대안 부재라는 벽에 부딪혀 민심이 이반된 것이 사민당 패배의 핵심 요인이었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중도우파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민당의 복지정책을 뒤엎는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지정책을 기반으로 제도를 개선시키려 한다는 점을 국민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웨덴 복지모델의 설계자인 루돌프 마이드너는 “스웨덴 복지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검증된 모델에 집착하지 않고 달라지는 환경에 따라 개조되고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보수우파 정당들은 이런 충고를 놓치지 않고 선거에서 이용했다. 2002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대규모 세금 감면과 복지지출 축소를 약속했다가 완패(完敗)했다. 그러자 2006년 총선에서는 노동시장 개혁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저소득층에 대한 점진적 감세안으로 정책 수위를 조절했다.
당시 스웨덴의 공식적인 실업률은 6% 수준이었지만 숨겨진 실업(失業)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15% 이상으로 추정됐다. 특히 청년 실업률은 20%를 상회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보수당은 청년 실업 감소대책으로 청년 고용에 대해서는 고용주의 의무부담금을 면제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스웨덴에서는 근로자의 임금에 따라 세율이 달라지지만 대략 임금의 30% 이상을 고용주 세금으로 내야 한다. 고용에 따른 세제감면 혜택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별도로 세금을 내야 한다. 한번 고용하면 쉽게 해고하기 어려운 노동법도 고용을 꺼리는 원인이 되었다.
보수당의 左클릭
보수당은 우파 정당임에도 ‘새로운 노동자 정당(New labor party)’을 자임하며 정치적 무게중심을 ‘좌로 이동’시켰다. 보수당은 “진짜 노동자를 위한 정당은 보수당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고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되찾아주겠다”고 했다.
보수당은 복지시스템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교육과 노인복지 분야에는 오히려 지출을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이것은 좌파와 대립각을 세우기보다 이념적 경계를 초월, 시장근본주의라는 우파적 도그마의 속박에서 벗어남으로써 중도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프레드리크 레인펠트 보수당 당수는 정통 보수주의 노선에서 유권자가 밀집돼 있는 중도 쪽으로 한걸음 옮겨가는 정책 변신을 통해 국민 곁으로 다가갔다. 노동시장을 포함한 기업 활동 관련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정부 소유 공기업은 단계적으로 매각할 것을 약속했다. 공공 부문에 경쟁을 도입하고 민간 부문에 활력을 불어넣어 투자를 활성화하고 일자리 창출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중도우파 정당들이 선거 사상 처음으로 이런 정책들을 공동으로 공약했다는 것이다. 분명 중도우파 연합의 이런 변신은 스웨덴 복지제도의 개혁을 가져왔고 이것이 결국 2006년에 이어 2010년 총선에서도 승리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미래
새정치연합이 ‘도로 민주당’으로 회귀하지 않고 진정한 혁신의 길을 걸어 201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새정치연합은 과거 만년 야당에서 정권 교체에 성공했던 미국과 유럽의 정당들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혁신의 방향과 실천 과제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현 시점에서 새정치연합 혁신 작업의 최우선 과제는 새로운 정치 노선 수립과 실천이다. 그 핵심은 김대중(DJ)과 노무현을 뛰어넘는 것이다. 한국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어젠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모두가 김대중이 되길 원했고 또다시 그런 총재가 돌아오기를 바라겠지만 그런 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옳은 판단이다. 분명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리더와 새로운 노선이 필요하다.
독일 사민당의 슈뢰더 전 총리는 2003년부터 ‘어젠다 2010’과 ‘노동시장 개혁(하르츠 Ⅳ)’을 추진했다. 이것은 일종의 ‘독일경제 재생’ 계획이었다. 핵심 내용은 노동시장 유연성을 위해 해고방지법과 연금, 의료 보험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전 평균 임금 대비 53%였던 연금 수준을 2020년에 46%, 2030년에는 43%로 낮추는 방안이 포함되었다. 연금 수령 나이도 65세에서 67세로 늘렸다. 연금에 발목이 잡혀 국가경쟁력이 계속 하락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정당의 이익보다는 국가와 국민의 장기적 이익을 챙겼다. 새정치연합의 혁신 과정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파격적 조치이다.
한국, 새누리당이 ‘경계 파괴’ 선도
 |
| 2012년 11월 16일 경제민주화 관련 기자회견을 하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 등 야당의 어젠다를 선점해 대선에서 승리했다. |
그런데 최근의 ‘경계 파괴’는 좌파가 아닌 우파가 주도하고 있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보여준 것이 이런 우파 파괴의 전형이었다. 박 후보는 그동안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어젠다를 들고나왔다. 이런 파격적 조치는 보수가 중도층의 지지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새정치연합도 이런 창조적 파괴를 도입해야 한다. 복지 확대도 좋지만 무엇보다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을 담보할 ‘제3의 길’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집권당의 이념이 국민들의 마음속에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을 때 야당은 여당의 이념을 일부 수용하는 중도 노선을 채택해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반면, 야당이 집권당의 지배적 이념에 정반대되는 이념으로 성공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미국 민주당의 먼데일과 듀카키스가 1984년 대선과 1988년 대선에서 전통적인 뉴딜 이념으로 당시 지배 이념인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에 도전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이를 의식한 클린턴은 1992년 선거에서 신자유주의 이념을 일부 수용하는 제3의 길인 중도 노선을 채택해 승리했다. 블레어는 ‘대처의 아들’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제3의 길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서 세 번 연속 총선에서 승리했다.
박영선이 해야 하는 일
만약 새정치연합이 제3의 길 대신 당내 일부에서 제기하는 ‘선명(鮮明) 야당론’에 ‘강경 노선’의 길을 갈 경우 ‘도로 민주당’이 되어 어두운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문제는 누가 새로운 노선을 주도하고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 하는 방법이다. 현실적으로 새로운 정치 노선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은 박영선 비대위원장, 문재인 의원, 그리고 안철수 의원으로 집약된다.
그중에서도 박 위원장의 역할이 주목된다. 박 위원장은 새정치연합이 낡은 과거와 관행으로부터 지혜롭게 결별하는 방안으로 “투쟁 정당 이미지에서 벗어나 정의로움을 더욱 굳건히 세우는 일,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근간을 둔 생활정치의 실현”이라고 강조했다.
지극히 판에 박힌 말이다. 이런 밋밋한 생각과 자세로는 국민의 혁신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다. 비대위 활동 기간 동안 자신의 정치 철학과 신념이 반영된 새로운 노선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할 수 있는 것만 약속하는, 다시 말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자세를 보여야 한다. 더불어, 내년 당대표 경선 전당대회에도 출마해 자신이 정립한 노선을 관철시키려는 의지와 열정을 보여줘야 한다.
영국의 블레어는 1994년 당수에 취임해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할 때까지 3년, 스웨덴의 레인펠트도 2003년 당수로 선출되어 2006년 총선에서 승리할 때까지 3년 동안 당을 이끌었다. 2010년에 영국 노동당으로부터 13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도 2005년 39세 나이에 당수가 되어 5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룩했다.
한국 야당도 정권 교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분명한 철학적 사고를 토대로 장기간 자신의 정치 노선을 실천하려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박 위원장은 현재 겸직하고 있는원내대표직을 내려놓고 비대위 활동에만 전념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만약 박 비대위원장이 적당히 원내대표 일과 비대위원장 일을 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어정쩡한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지난 8월 7일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해 새누리당과 합의한 것을 지키지 못하고 재협상을 하기로 한 것만 봐도 두 자리를 함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새정치민주연합, 창조적 해체 고려해야
 |
|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7·30 재·보선 다음날인 7월 31일 국회에서 대표직 사퇴를 표명한 뒤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
문재인 의원의 대변신도 기대할 만하다. 문 의원이 당내 강경파인 친노무현계를 설득해 문재인식 신 중도 노선을 제기하고 이를 일관성 있게 실천한다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에게 그런 역량과 통찰력이 있느냐를 별개로 한다면. 반대로 ‘정권 심판’ ‘선명 야당’ ‘강경 투쟁’ 일변도의 목소리에 취한 ‘몽유병 환자’처럼 좌측으로 발걸음을 내디딘다면 또다시 실패의 길을 걸을 것이다.
한상진 교수는 “이제 야당도 운동정치와 제도정치를 구별해야 하며, 거리로 나가는 것은 옳지 않다”며 “실용적인 접근을 택해 민생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의원이 깊이 새겨볼 만한 충고이다.
7·30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난 안철수 의원은 측근들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그가 과거와 같은 정치 노선과 어떻게 결별하고 새로 시작하느냐가 관건이다. 지난 3월 민주당과의 통합 이후 4개월 동안 보여준 정신과 자세로 다시 시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안 의원은 토크 콘서트 재개, 새 정치에 대한 생각만 하지 말고 그동안 선거 일정에 쫓겨 실현하지 못한 정치 혁신 과제 등을 실천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안 의원의 당내 입지는 거의 소멸할 위기에 직면했다. 그렇다고 안 의원이 차기 대선 승리를 위해 당내 세력화에만 치중할 경우, 그의 정치적 운명은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따라서 안 의원은 대통령이 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제안한 성찰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를 아우르는 중도 통합 노선 실현에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안철수는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세간의 부정적 평가도 불식시켜야 한다.
새로운 정치 노선의 정립도 중요하지만 계파 청산 없이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은 없다. 야당은 친노무현계, 486 그룹, 호남 민주계, 손학규계, 정세균계, 평민련계 등으로 분열되어 망당적인 계파 정치의 깊은 늪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대선 패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사라지고 오로지 계파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당내 투쟁만 판을 쳤다.
정치가 꿈과 희망을 줘야 하는데 야당은 계파정치에만 매몰돼 국민에게 실망과 분노만을 안겨주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진정 당을 살리려면 계파 청산을 위한 특단의 조치로 계파 해체 선언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추진해야 할 노선을 합의를 통해 정립할 수 있다.
단언컨대, 새정치민주연합은 단순한 조기(早期) 전당대회를 통한 지도체제 개편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야당의 체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바꾸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투쟁 대신 대안을, 반대를 위한 반대 대신 대화와 타협을, 계파정치 대신 국익정치를, 야권 연대 대신 수권 정당으로서의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
새누리당도 新 노선 모색해야
재·보선 압승으로 세월호 참사 정국으로 수세에 몰렸던 새누리당은 정국 주도권을 회복하고 국가 혁신과 경제 살리기에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선거 승리에 도취되어 오만과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선거에는 영원한 승자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 선거에서는 더 이상 절대 강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10~15년을 주기로 좌에서 우, 우에서 좌로 정권이 교체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미국 대선에서는 ‘10년 시계추(ten year’s pendulum)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권이 약 10년 정도를 주기로 민주당에서 공화당,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주 정권이 교체되는 이유는 경제 변수 때문이다. 무엇보다 ‘높은 실업률’과 일자리 창출(고용)이 핵심 변수였다. 독일 통일의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기민당의 콜 수상은 400만명이 넘는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했다. EU 국가 중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던 스웨덴 사민당의 예란 페르손 총리도 17%에 이르는 높은 청년 실업률 때문에 졌다. 걸프전의 영웅 부시 대통령도 결국 경제가 발목을 잡았다.
무기력한 야당 덕분에 지금 새누리당은 꽃놀이패를 들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2년 내에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적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1988년부터 나타난 ‘10년 정권 교체 주기설’과 맞물려 정권을 빼앗길 수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 국가 선거에서 나타난 도드라진 특징은 특정 정당 또는 선거 연대가 과거와 같이 절대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 유권자들이 정당 충성도와 정당 일체감에 따라 투표하는 경향이 점차 감소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세계화(世界化)가 자리 잡고 있다.
시사주간 《타임》의 편집 컨설턴트를 지낸 리처드 호니크는 “세계화는 혜택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이는 표심의 양극화로 나타나 어느 세력도 절대적 다수파가 될 수 없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절대적 다수파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 유동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 독일, 스웨덴 등의 국가 정권 교체를 수반한 선거에서 ‘면도날처럼 얇은(razor thin)’ 승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이런 현상들과 관련이 있다.
새누리당이 2017년 대선에서 ‘10년 시계추 이론’에 따른 정권 교체의 패배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민에게 약속한 ‘보수 혁신’을 강도 높게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박근혜 없는 선거’에서 ‘박근혜 노선’을 대체할 새로운 노선의 정립이 시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