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과 장관이 대통령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합니까. 무서워하는 척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 커리어(career)’입니다. 공직사회는 5년마다 사이클이 바뀝니다. 그들 머릿속에는 ‘언제 베팅하느냐’는 생각뿐입니다.”
⊙ 정권교체로 정부 정책 달라지면 공무원의 변신은 ‘무죄’?
⊙ “위에서 ‘고(go)’ 하면 ‘고’ 하는 것이 관료의 운명”(전직 차관)
⊙ “고위 관료 머릿속엔 이번 정권에 충성하느냐, 다음 정부에 하느냐에 관한 ‘스케줄링(scheduling)’
밖에 없어”(모 행정학교수)
⊙ 박근혜 정부의 국무총리 및 장차관 44명 중 관료출신이 70.5%(31명)
⊙ 대통령의 행정부처 장악력이 떨어지거나 국민(정책) 지지율이 저하되면 ‘책임장관제’는 無用
⊙ 관료 등용한 박정희 정부는 군부-관료간 연합지배적 권력구조
⊙ “관료들을 일하게 만드는 방법은 信賞必罰밖에 없다”
⊙ 정권교체로 정부 정책 달라지면 공무원의 변신은 ‘무죄’?
⊙ “위에서 ‘고(go)’ 하면 ‘고’ 하는 것이 관료의 운명”(전직 차관)
⊙ “고위 관료 머릿속엔 이번 정권에 충성하느냐, 다음 정부에 하느냐에 관한 ‘스케줄링(scheduling)’
밖에 없어”(모 행정학교수)
⊙ 박근혜 정부의 국무총리 및 장차관 44명 중 관료출신이 70.5%(31명)
⊙ 대통령의 행정부처 장악력이 떨어지거나 국민(정책) 지지율이 저하되면 ‘책임장관제’는 無用
⊙ 관료 등용한 박정희 정부는 군부-관료간 연합지배적 권력구조
⊙ “관료들을 일하게 만드는 방법은 信賞必罰밖에 없다”
- 박근혜 대통령의 조각 결과, 많은 전·현직 관료들이 장차관 자리에 올랐다. 이를 두고 ‘관료 천하’라는 말이 나온다. 박 대통령이 3월 27일 외교부,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08년 1월 초 이명박(李明博·MB) 정부 인수위 때의 일이다. 노무현(盧武鉉) 정권 말기, 언론과 가장 대척점에 섰던 국정홍보처의 업무보고 자리에서 한 관료가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 시키는 대로 했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김형오(金炯旿) 인수위 부위원장은 “비참하다”고 탄식했다. 일찌감치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홍보처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정권이 출범하며 홍보처는 역사에서 지워졌다.
이후 국정홍보처 관료들은 어떻게 됐을까. 혹시나 옷을 벗거나 징계를 받지 않았을까. 당시 홍보처는 “국정 홍보를 한 게 아니라 언론과의 ‘갈등 촉진자’ 역할을 했다”는 질타를 받았었다.
기자는 당시 홍보처 핵심 관료 3인의 행적을 알아보았다. 한 명은 문화체육관광부에, 한 명은 해외에, 한 명은 문화부 산하 기관장에 재직하고 있었다. 홍보처를 폐지했던 MB 정부 때 이들이 ‘물을 먹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홍보처 홍보협력단장이던 방선규 국장은 문화부의 가장 노른자위 자리인 문화예술국장에 재직 중이다. 그는 MB 정부 초기 문화부 홍보정책관에 임명됐다가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자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으나 이내 자리를 잡았다. 김희범 홍보처 정책홍보관리실장은 현재 주(駐)애틀랜타 총영사, 서강수 홍보처 콘텐츠운영단장은 MB 정부 때 홍보지원국장을 역임하고 해외문화홍보원 원장을 거쳐 현재는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원장으로 근무 중이다.
문화부 내에서 이들의 행적을 비난하는 이를 찾기 어려웠다. 그를 아는 한 인사는 “그 자리에 합당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묘사했다. 국가공무원법 57조에는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권교체로 정부의 정책기조가 달라지면 공무원은 바뀐 기조에 맞춰야 하고, 그런 공무원의 변신은 ‘무죄’라는 얘기다.
명지대 행정학과 박천오(朴天悟) 교수는 “공무원에게 법적인 복종 의무가 있는 점, 오늘날 정권의 국가비전 실현과 국정관리에 있어 공무원들의 적극적 협력이 필수적인 점, 상급자에 대한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권위주의적 행정문화 등을 이유로 공무원의 정치적 대응(충성)을 무조건적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고 했다. 사실, 전문직업인으로 관료의 소신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의 문제는 매우 모호하다. 계속된 그의 주장이다.
“규범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정책과정에서 공무원이 정권의 방침과 정무직 상관의 지시에 불응하면서까지 자신의 전문가적 소신을 고집하는 행위는 민주주의 원리에 반함은 물론, 조직내 계층제의 원칙에도 위배된다고 볼 수 있어요.”
“도덕적으로 치사하게…”
안전행정부 전직 차관 K씨는 “공무원이 자기 소신에 따라 행정을 하면 우리나라 관료시스템이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
“관료가 업무를 거부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그만두거나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 부당함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위에서 ‘고(go)’ 하면 ‘고’ 하는 것이 관료의 운명입니다.”
그는 취득세 감면을 추진하던 일을 떠올렸다.
“과거 행정자치부 시절, 취득세 인하를 두고 부처 내 논란이 컸어요. 취득세는 광역자치단체의 가장 중요한 재원(財源)이어서 세감면을 하면 수입이 줄 수밖에 없어요. 취득세 인하를 정부와 논의할 때 행자부는 반대의견을 냈어요. 그러나 치열한 공방 끝에 재경부(현 기획재정부)의 논리대로 결정되자, 우리는 토를 달지 않고 집행했습니다. 그동안 지자체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감세의 필요성을 지자체에 설득해야 했지요.
이런 이중적 조건은 언제나 부딪히는 일이죠. 국가정책이 결정되기 전에는 치열한 공방을 벌이지만 일단 결정되면 효과적 집행이 되도록 (관료는) 도와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치사하게 그럴 수 있냐고 하겠지만, 정권교체와 함께 5년마다 관료가 바뀌면 혼란이 옵니다. 미국도 공화당 또는 민주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부자감세 정책’이 거꾸로 갑니다.”
공무원의 이중적 행태 사례는 숱하게 많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9월 기획재정부 윤영선(尹永善) 당시 세제실장이 종합부동산세 완화방안을 밝혔다. “종부세는 과도한 세부담으로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부동산 실무기획단 부단장으로 있을 때는 “종부세 부담이 과하지 않다”며 종부세 당위성을 역설했다.
입장을 바꾼 배경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정권이 바뀌었으면 바뀐 방향에 따라 서포트해 주고 지원해 주는 게 공무원의 기본 책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는 정권과 상관없이 승진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2002년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행정관, 2004년 재경부 세제총괄심의관, MB 정부 때는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2010년 3월에는 관세청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2011년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 “법인세 감면액의 절반이 10대 기업에 돌아갔고, 임시투자세액공제 제도는 대기업 위주의 지원제도였다”며 MB 정부의 감세정책 논리를 뒤집었다. MB 정부 시절, 재정부는 감세정책이 대기업에만 유리하다는 언론보도를 숱하게 반박했었다.
지난 2009년 11월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건설 백지화 입장을 밝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시 건설 계획을 입안한 공무원들은 백지화 논리를 만드느라 밤을 새웠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 때도 공무원이었고, 지금도 공무원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5년 뒤 권력의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국토부와 소방방재청, 교육부의 경우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국토교통부는 어수선하다. 해양수산부가 떨어져 나갔고 4대강 사업을 두고 고강도 감사원 감사가 진행 중이다.
국토부 관료들은 ‘4대강사업추진본부’를 존속시키려 애썼지만 지키지 못했다. 이곳으로 파견 나갔던 관료들이 4월 초 현재 대기발령 상태다. 과장 1명이 도로정책과로 옮겨갔다고 한다. 국토부 공무원들은 4대강 언급을 아예 자제하는 분위기다. 새로 부임한 서승환(徐昇換) 장관도 4대강에 대한 말은 아예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 서기관의 말이다.
“4대강 사업에 참여했던 공무원들은 공황상태입니다. 어떻게 될지 현재로선 짐작할 수 없어요.”
—인사와 관련해 어떤 소문이라도?
“수장이었던 홍영표 부본부장(심명필 본부장은 이미 퇴임)이 자리를 옮기며 은퇴한다는 얘기가 있고 나머지 국장 1명, 과장 2명, 사무관 이하 직원들은 정치적으로 관여한 것이 아니니, 조만간 발령이 날 것으로 보고 있어요. 또 MB 정부 때 청와대에 근무했던 이도 현재 대기발령 상태여서 불안해하고 있어요. 자꾸 인사가 늦어져서 ….”
그는 “4대강 사업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했기 때문에 감사원 감사 결과를 봐야 하지만 불이익이 실무자 선까지 내려오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다들 어수선하고, 속이 상하다”고 했다. 또다른 국토부 공무원은 “대통령이 직접 팔을 걷어붙인 사업을 관료가 무슨 책임을 지느냐”고 했다.
“대통령이 추진한 정책이 위법부당하지 않다면 모든 공무원은 그 집행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대통령 공약을 정책에 담는 것이 관료의 몫이지요. 4대강 사업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비난한다면 앞으로 누가 소신껏 일하겠습니까.”
요즘 소방방재청에서도 혼란스럽다는 얘기가 들린다. 노무현 정부 시절, ‘리틀 노무현’이라던 김두관(金斗官) 행자부 장관의 신임을 받던 남상호(南相浩) 당시 소방국장이 박근혜 정부의 새 청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다. 남 청장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 몇 개 대학에서 외래·대우·겸임 교수로 재직하다 청장으로 발탁됐다.
“‘고도의’ 인사 통치술?… 없는 것 같다”
김두관 장관 시절, 일선 소방 공무원을 상대로 다면평가(인기투표)를 해 소방간부후보생 1기 출신을 대거 배제하고 2기를 발탁하는 과정에서 남 청장은 당시 김 장관과 코드를 맞추며 승진했다고 한다. 그는 소방간부 2기다.
그러나 MB 정부 초대 소방방재청장은 용퇴했던 1기 출신의 최성룡(崔成龍)씨였다. 1기와 2기의 운명이 뒤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로 바뀌고 2기 출신의 남 청장이 다시 방재청으로 컴백했다.
사실, 방재청은 소방직과 일반직, 기술직 공무원 등이 합쳐진 조직으로 직렬 간, 계급 간 갈등이 늘 있어 온 곳이다. 주요 간부들은 고시 출신이거나 행정에서 잔뼈가 굵은 일반직 공무원이 포진해 갈등이 많았다. 안전행정부 관계자의 말이다.
“대학교수 신분인 남 청장이 일반직으로 청장에 부임했지만 원래는 소방직 출신입니다. 그동안 청장이 일반직이면 차장은 소방직, 청장이 소방직이면 차장은 일반직으로 임명했어요. 그 관례에 따라 차장을 소방직으로 임명하려 했는데 방재청 내 일반직이 반발하게 됐어요. 청장, 차장 모두 소방직으로 채우느냐고요. 박근혜 정부의 인사팀이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청장을 뽑았기에 혼란에 빠진 겁니다.”
최근 간부급 인사를 끝낸 교육부는 서남수(徐南洙) 장관을 중심으로 새로운 진용을 갖췄다. 서 장관은 이해찬 교육부 장관 시절, ‘잘나갔던 5인방’ 내지 ‘교육 5적(敵)’에 거론됐던 인물이다. ‘코드’로 본다면 노무현 정부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제가 장관이 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고 했다. 지난 대선 당시에는 투표조차 하지 않았다. 2011년 8월에는 한 토론회에 참석, 이명박 정부의 특목고·자사고 확대정책을 비판한 일도 있다.
그런 그가 교육관료 출신 중 최초로 장관이 되면서 교육부 내에 이런저런 얘기가 나온다. 기자는 익명을 전제로 국회 교육위를 통해 몇몇 관료와 접촉했으나 대부분 쉬쉬하거나 말을 아꼈다. 교육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의 얘기다.
“이주호(李周浩) 장관 시절, 인사를 담당했던 한 관료가 이번에 지방대 사무국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반면 이 장관이 서울시교육청 장학관으로 내려 보냈던 이가 1급 국장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를 두고 ‘과거 용사들이 복귀했다’는 말을 합니다. 서 장관이 대학국장, 차관 시절 가까이 지냈던 라인들이 많이 포진했다는 얘기도 들려요.
이주호 장관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모 국장이 교과부 공무원 워크숍에서 마이크를 잡고 MB 정부의 수월성 교육 입장을 공개 반대했다가 지방으로 좌천된 일이 있으니까요. 정권교체에 따른 인사의 부침은 불가피한가 봐요.”
이번 교육부 인사는 청와대 김재춘(金在春) 교육비서관과 문용린(文龍鱗) 서울시교육감을 비롯한 서울대 사범대 인맥을 중심으로 추천을 받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 인사는 “첫 조각은 무엇보다 대통령과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서 장관이 그런 인물인지, MB 때 배제된 인물을 찾다 보니 발탁된 인물인지 모르겠다. 이번 인사에 어떤 ‘고도의’ 인사 통치술이 담겨 있을까? …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정부 과기부 장관이 사표를 내야 했던 사연
정권에 따라 정책에 관여한 관료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현실, 정권교체기 관료들의 인사혼선이 있다고 해서 공무원을 그저 ‘영혼이 없는 권력의 도구’쯤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누가 뭐래도 한국 최고의 파워 엘리트는 관료이며, 그 집단은 관료조직이다.
정부의 행정개혁 작업에 오래 관여했던 한 교수는 자신이 경험한 관료들의 행태를 이렇게 꼬집었다.
“공무원과 장관이 대통령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합니까. 무서워하는 척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 커리어(career)’입니다. 공직사회는 5년마다 사이클이 바뀝니다. 그들 머릿속에는 ‘언제 베팅하느냐’는 생각뿐입니다. 국장 자리는 1년에서 1년반 이상 있을 수 없고, 로테이션하는 자리도 아니니 이번 정권에 충성해 출세하느냐, 다음 정부를 겨냥하느냐에 관한 ‘스케줄링(scheduling)’에 골몰합니다. 정권교체에 맞춰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어야지 계속 일만 하다가는 밉상이 되기 십상이죠.”
명지대 박천오 교수는 1995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관료들의 정치적 태도를 조사했더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두 조사 모두에서 90% 이상의 관료들이 ‘나의 정책수립 능력이 정당이나 국회와 같은 정치제도를 능가한다’고 믿고 있고, 마찬가지로 90% 이상의 관료들이 ‘우리의 업무에 대한 정치인의 개입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이 내용은 박 교수가 작년에 펴낸 《한국 정부관료제》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 시대가 사라지고 사회내 민주화가 많이 진척됐음에도 관료들의 우월의식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박 교수의 주장이다.
“관료들이 과거의 독점적 역할을 고집하고 스스로 능력을 과신한다면, 여타 정치주체들의 정책참여와 투입을 위한 제도적 개선이 이뤄지더라도, 이들 관료가 설치해 놓은 ‘보이지 않는 장벽’ 탓에 기대만큼의 실효를 못 거둘 것입니다. 한국 관료들은 여전히 다양한 정치주체들의 정책과정 참여의 당위성과 현실적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어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정책을 조율했던 국민대 사회과학대 김병준(金秉準) 교수는 관료들의 조직 이기주의와 그로 인한 조직 갈등을 체험한 인물이다. 그가 들려주는 체험담은 관료가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의 질문 자체를 군색하게 한다.
노무현 정부 초기, 홈오토메이션·텔레매틱스(telematics)·차세대 전지 등 10개 사업을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선정, 육성하려 했다. 물론 대규모 재정투자가 뒤따르는 사업이다. 문제는 이 사업들의 관할부처 조정이었다. 청와대가 조정을 시도했지만 산자부, 정통부, 과기부가 모두 자신들이 맡아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경제부총리가 나섰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양보를 하는 순간, 자기 부처 공무원이나 커뮤니티로부터 배신자, 무능자로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고 결국 대통령이 나섰다. 김 교수의 회고다.
“한 번은 어느 부처의 차관보가 찾아왔어요. 그분 말씀이 자격지심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어요. 지난 6개월 동안 다른 부처의 활동을 모니터하고 그에 대비한 작전을 짜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는 겁니다. ‘저쪽 부처의 오늘 동향이 어떠냐. 협회를 만들었어? 그러면 우리도 빨리 사람을 모아 협회 만들어. ○○부의 누가 청와대 누구한테 전화했다는데 우리도 누구를 찾아가야지’ 등등 이런 일을 집에서까지 전화로 주고받으니까 부인이 그러더랍니다. ‘당신들 국록(國祿)을 받고 사는 게 부끄럽지 않냐’고.”
결국 논란 끝에 10개 신성장동력 사업의 관할 부처는 산자부가 5개, 정통부가 4개, 과기부가 1개를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관할 부처가 적은 과기부 부총리는 사의를 표명했고 얼마 후 대통령은 이를 수리(受理)했다.
“과기부 장관이 사표를 내겠다는 거였어요. 이대로 부처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죠.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하시라고 말했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마구잡이로 결정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항의성 사표를 냈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철학 불분명한 사람들 많이 기용”
그의 체험담은 작년 2월 펴낸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에도 실려 있다. 김 교수는 기자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제 책에 쓰여 있는 부분들은 관료집단이 이러이러하니 정말 나쁘다 하고 끝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정부에 들어가는 사람, 그리고 정권을 잡은 세력이 관료집단을 통제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정도로 어려우니 더 단단한 철학과 정책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관료를 설득해서 이끌 수 있는 기술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설득력 없는 어설픈 아이디어를 가지고 들어가서 말 몇 마디로 움직이게 할 생각이면 아예 정권을 잡지도 말고, 정부에 들어가지도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관료들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뭔가요.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관료들의 가슴을 때릴 수 있을 정도의 철학과 비전, 그리고 현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 중의 하나가 됩니다. 관료집단의 대변인이 되어 부처이익을 대변하거나 아니면 관료집단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결국 좋지 못한 결과를 남기고 자리를 떠나게 되죠. 나와서는 관료 때문에 일을 못했다고 변명하게 되고요.”
—박근혜 정부의 조각(組閣)을 어떻게 보나요.
“박근혜 정부가 관료 출신을 많이 기용하는데,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겠지요. 이해되지 않는 점은 너무 양순하고 철학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많이 기용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관료사회조차도 제대로 설득해 내지 못할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밖에서 들어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최근 해양수산부 장관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들이 들어가서 관료집단을 이끌거나 통제해 낼까요?”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현재 정부 산하 기관장으로 재직 중인 전직 고위 관료를 만났다.
“노무현 정부는 공무원을 동반자로 보지 않았어요. 그럼, 관료들은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자기 부처의 이해관계, 개인의 장래에 비추어 극력 방어를 하게 됩니다. 어차피 그래야 5년 아니냐는 식이죠. 그때 설쳐 대던 양정철(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관료들은 철저히 보복을 했어요. 겉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에서 보고받을 때는 ‘응, 그래. 이놈들이 서서히 바뀌는구나. 더 밀어붙여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겉모습뿐입니다. 그들은 관료 속성을 더 이해하고 활용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운동권 출신이 청와대에 들어가 각 부처 기획실장들 불러 놓고 ‘당신들 왜 협조 안 하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가 있어 과거에도 안 됐던 사안’이라고 말하죠. 그럼 이렇게 일갈합니다.
‘과거의 기득권에서 못 벗어났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이 정책을 펴면 이런 점에서 좋은데 당신들은 사사건건 안 된다고만 한다’고요. 관료들은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지만, 말은 못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합니다. 그런데 승복이 되나요? 하라면 하지만 절대 이뤄 낼 수 없지요. 마음을 못 얻었기 때문이죠.”
관료냐, 정치인이냐
언론인 출신으로 2010년 8월부터 작년 1월까지 특임차관으로 재직했던 김해진(金海鎭)씨는 “공무원들은 영혼이 없는 게 맞다”며 이렇게 말했다.
“영혼이란 정치적 정체성과 철학을 뜻합니다. 공무원은 어디까지나 정책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권한이 있지만, 집행계획을 세워 정신과 철학을 부여하는 일은 집권자의 몫입니다. 제가 경험한 관료집단은 잘 준비된 조직이었어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는 집단이라고 할까요? 어떻게 컨트롤하느냐에 따라 정부 성패가 갈립니다.”
그는 “지난 정권 때 사력을 다한 공무원이 정권이 바뀌면서 물을 먹게 해선 안 된다. 국민들은 전 정권에서 관료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잊어 줘야 한다”고 했다.
“권력자가 공무원을 겁주어서 정책을 끌고 가선 곤란해요.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그 사람의 능력을 끌어내는 용인술이 필요합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처음부터 기 죽이고 인사로 컨트롤하겠다고 덤비면 관료들은 복지부동할 수밖에 없어요. 밖에서 정치를 하다가 부처에 들어간 정무직 장차관들은 큰 그림만 보려 하는데 관료들은 현장의 문제점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전 차관은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정치권, 시민단체 인사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면서 그동안 관료들은 조력자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며 “그러나 정치·시민단체에 대한 불신과 한계가 쌓이면서 한국사회의 발전동력이 서서히 관료로 교체되는 상황이 아닌지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크게 보면,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 정치적인 이념에 편성한 NGO(비정부기구) 세력에 대해 국민이 낙담하는 상황입니다. 그동안 한국사회를 끄는 주력이었지만, 어느덧 후유증이 쌓였다고 봅니다. 국민 입장에선 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의 하나로 관료들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죠.”
반면 MB 정부 시절인 2008년부터 3년 동안 아시아지역 해외공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K씨는 자신이 경험한 관료집단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새누리당 지구당위원장 출신이다.
“다 능력을 인정받은 ‘고시파’지만, 제가 능력을 인정할 만한 이는 3분의 1밖에 없었고, 3분의 1은 과거에 능력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수십 년간 관료로 지내며 고인 물이 되어 자기개발이나 자기발전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었어요.”
그는 “외교관 경력이 30년이라 자랑하는 이들이 있지만 진짜 외교관은 공관장이지 나머지는 그저 배석자일 뿐이다. 공관장 이하 외교관은 현장에서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관료보다 정치인이 더 전문성이 있다”고 했다. K씨는 관료보다는 정치인을 정무직 장차관에 배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전문성이란 한자리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생긴다고 보지 않아요. 오히려 국회의원이 더 전문성이 있다고 봅니다. 국회의원이란 자리는 상임위를 통해 압축된 정보를 모두 듣고 볼 수 있지요. 또 관련 장차관과 부처 실국장을 언제든지 불러 자료를 요청하고 설명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의지를 갖고 노력하면 6개월이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수십 년간 한 부처에서 비능률·보수주의·책임전가·비밀주의·파벌주의에 물든 관료를, 그리고 퇴직한 관료를 다시 자신이 몸담았던 부처에 등용한다는 것은 바림직하다고 볼 수 없어요.”
멘붕의 계절
최근 교수와 연구원 출신 장차관을 배출한 고용노동부, 해수부, 국방부, 국토부 등의 부처는 시쳇말로 ‘멘붕(멘탈 붕괴)’에 빠졌다. 그동안 냉대(?)를 받던 산하기관 인사들이 어느날 갑자기 상사로 부임한 것에 대한 놀라움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개인적 혹은 업무상으로라도 불편한 관계에 있던 공무원들은 행여 보복성 처우를 받지 않을까 좌불안석이란 소문도 들린다. 한 공무원의 얘기다.
“교수나 박사급 연구원들이 보고하러 가면 주로 부처 사무관들이 그들을 상대합니다. 모 장관 후보자도 장관내정 발표가 나기 한 달 전쯤 담당 과장에게 보고를 갔던 모양입니다. ‘이 정도 보고밖에 안 되느냐’는 호된 질책을 받았고, ‘○○님이 보고하라고 해서 왔다. 다음부터 잘하겠다.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해요.
고용노동부 방하남(房河男) 장관은 노동연구원 출신입니다. 노동부 산하 연구원들은 기업쪽, 노조쪽 입장을 각각 대변하는데 방 장관은 중립적 입장이어서 양쪽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어요. 정책과제 용역작업을 수없이 해 왔던 이들의 영전을 관료들이 반길 수 없는 이유지요.”
한 전직 고위 관료는 “교수, 연구원 출신 장관은 필패(必敗)”라고 했다.
“박통(박정희 정권) 때는 장관을 푸시(push)하고, 그래도 안 되면 중앙정보부를 동원하고, 그래도 또 안 되면 청와대 정무팀, 경찰이 나서서 관철시켰어요. 국회나 언론과 스킨십도 쌓고 노하우도 알아야 딜(deal)도 제대로 합니다. 그러려면 그전부터 관계가 축적돼야 합니다. ‘장관님, 법안 처리 도와주세요. 그럼 이것 해드릴게요’라고 말이죠. 외부에서 오는 장관은 6개월 동안 내부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새로운 지시사항이 밑으로 막 내려옵니다. 공무원요? 당황 안 해요. 그 지시사항이란 것도 과거 다 검토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검토지시 내려오면, 답변 보고서가 책상서랍 안에 다 있습니다. 제목 몇 줄만 바꾸면 됩니다. 그걸 모르는 새 장관은 ‘근사하네’ 하지만 밑에선 다 웃어요.”
그는 “이상(理想)은 좋은데 수많은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협조를 얻어내지 못하면 그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새 장관의 의욕에 관료들은 실패할 줄 알면서도 보고한다. 몇 달이 지나면 결국 안 되고, 원상대로 돌아간다. 이것이 관료사회의 현실”이라고 했다.
국방부 군비통제관을 역임한 한 예비역 장성은 가까운 군 인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백승주 국방차관의 임명을 “국방부 조직을 풍비박산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린 인사”라고 했다. 백 차관은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출신이다.
“백 차관은 ‘차관 풀(pool) 100명’에도 못 끼는 도무지 언싱커블(unthink able·터무니없는)한 선택입니다. 부처간 협의에도 끼지 못할 주니어입니다. 김대중 정부에서건, 이명박 정부에서건 TV에 나가 다종다양(?)한 대북정책을 대변해 왔던 한 대북전문가에 불과합니다. 백 박사를 함부로 부려먹던 국방부 국장과 실장들, 특히 정책실의 국·과장 실무자들은 앞으로 조심해야겠네요. 김관진 장관의 개인적 역량과 카리스마로 국방부는 어떻게든 돌아가겠지만 차관 하나 마음대로 못 쓰는 장관이 무슨 책임장관인가요?”
박정희와 박근혜 정부의 닮은꼴 인사스타일
박근혜 정부의 조각을 두고 많은 언론이 ‘관료 천하’라는 표현을 썼다. 3월 24일 현재 국무총리 및 장차관 44명 중 관료 출신이 70.5%(31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교육관료 출신 중 최초의 교육수장이 됐다.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역시 문화부 출신의 최초 장관이다. 산업통상자원부 윤상직(尹相直) 장관도 정부 수립 이후 차관에서 장관으로 첫 내부 승진한 케이스다.
관료 출신이 아닌 경우에도 범(汎) 관료 범주에 드는 국책연구기관 출신 연구원이 다수다. 청와대는 박 정부의 관료 발탁에 대해 “(해당분야의) 전문성을 가장 먼저 고려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 부처에 오래 몸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일을 잘해 낼 적임자로 본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박근혜 대통령의 관료선호 현상은 박정희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을 빼닮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사회의 관료지배적 권력구조를 연구해 온 가야대 경찰행정학과 노병만 교수에게 두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을 물어 보았다.
먼저 박정희 대통령의 관료 충원 형태를 살펴보자. 박정희 정권 당시 장관급 이상의 경우 3공화국에서는 군 경력 출신이 37.8%(31명)로 가장 많이 충원됐고 다음으로 관료 출신이 29.3%(24명), 교육계 출신이 19.5%(14명) 순으로 충원됐다. 유신체제인 4공화국에서도 군 출신이 36.5%(23명), 관료 출신이 34.9%(22명), 교육계 출신이 17.5%(11명) 순으로 많이 충원됐다. 노 교수의 주장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행정영역 권력엘리트’(장관)의 관료 경력은 중요한 충원요인이 되었어요. 또 3공보다 권위주의적인 유신시절, 관료 충원율이 높아졌습니다. 즉, 군부 집권세력은 그들에게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고 집권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지배세력인 관료세력과 결합하고, 여기다 세력기반이 취약한 교육계 출신과 경제계(사업계) 인사를 활용하는 권력구조를 행사했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군부-관료 양대 세력의 연합지배적 권력구조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노 교수는 “일제 식민지 체제에 봉사해 온 관료세력이 도덕적 정통성을 상실해, 아무리 조직과 규모를 갖춘 기존의 지배세력이라 해도 자력으로 현대 한국사회의 집권세력이 될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4·19 혁명 이후의 장면(張勉) 정권과 5·16 쿠데타 이후 30여 년에 걸친 박정희~노태우 정권의 군부집권 세력의 등장은 이러한 관료세력의 도덕적·명분적 취약성하에서 집권세력과 관료세력의 결합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에서는 정치영역이 경시되고 행정기능이 강조돼 권력의 무게중심이 행정영역에 위치해 전체적으로 볼 때 군부-관료 연합지배적 권력구조라 할 수 있어요.”
책임장관제의 함정
노 교수는 양 대통령의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충성스러운 심복인 군출신 인사들을 권력의 핵심과 지원세력의 자리에 기용하는 리더십을 행사했고, 유능한 행정관료 엘리트를 발굴, 행정부처 장관에 기용해 국정과업을 수행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행정관료와 국책연구원들, 즉 유능한 행정관료의 입각이 두드러졌는데 두 대통령 모두 ‘과업형 리더십’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요. 새 국정원장 인사에서 보듯,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육사(陸士)로 대표되는 군부 출신을 신뢰하고 이들을 핵심권력 엘리트로 중용하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다만 소통에 문제가 나타날 수 있는 리더십이 행사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벌써 소통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어요.
“박근혜 대통령은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며 자신의 리더십을 쌓아 왔어요. 원칙과 신뢰는 정치지도자의 덕목으로 마땅히 추구돼야 할 바지만, 이러한 강조는 자신의 소신과 주장에 대한 고집으로 나타날 수 있고, 나아가 권위주의적인 모습 또는 독재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 있어요. 따라서 정책이나 신념에 지나친 또는 잘못된 자기주장을 경계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장관제를 구현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대통령이 해당 부처 장관을 믿고 맡기겠다는 뜻인데, 만약 대통령의 장관 장악력이 부족하다든지, 국정과제 자체에 문제가 있거나 국정과제 수행에 어떤 문제를 야기하게 되면, 책임장관제는 모두 정권의 부담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의 경우 책임장관제로서 의도한 행정과업을 행정부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반면 국민의사에 기반한 정치적 고려에는 소홀했고, 정치는 행정에 비해 소외됐습니다. 이런 점에서 책임장관제는 과도한 과업지향적인 성향을 나타낼 가능성도 있어요. 어떤 경우든 대통령의 행정부처 장악력이 떨어지거나 국민(정책) 지지율이 저하될 경우 책임장관제는 그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통령이 힘이 떨어지면 관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KBS 기자와 YTN 국제부장을 역임한 문재철(文哉喆) KT스카이라이프 대표는 청와대에 출입하며 느낀 권력층과 정치인, 관료들의 행태를 《권력》이란 저서를 통해 꼬집었다.
“부처 간에 예산협의 과정에서 대통령 취임 첫해만 해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실무진은 ‘뭘 도와드릴까요’ 라며 적극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그러다가 2년차가 되면 청와대의 힘을 빌려 도와주라는 지원사격이 있어야 마지못해 요청한 예산을 지원해 줍니다. 하지만 임기 중반인 3년차에 들어가면 ‘청와대가 뭔데 예산 갖고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자기 일들이나 잘하지 …’, 심지어 어떤 공무원은 ‘어떤 놈이 압력을 넣느냐’며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합니다.”
그래도 고위직 관료들은 다소 조심스러워하지만 하위직엔 더욱 청와대의 입김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하위직 공무원은 임기말이 가까워질수록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배째라’는 식으로 안면 몰수합니다. 그러니 임기 4년차, 5년차 때는 어떻겠습니까. 공무원들의 태도변화와 상황판단하는 걸 보면 권력의 흐름이 보이지요.”
문 대표는 “배신의 계절은 자연스레 다가온다. 한낮의 태양도 때가 되면 기울 듯 권력의 흐름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 임기 중에 자신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것을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단임제 권력구조하에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때가 되면 다가오는 것, 권력과 상관없는 이들의 눈에는 훤히 보이는데도 권력에 가까울수록 실감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권력누수인 레임덕”이라고 했다.
관료들이 보는 관료 장관
전·현직 고위 관료들은 이번 박근혜 정부의 첫 조각을 어떻게 평가할까. 기자는 장차관, 국장급 3명의 관료들을 만났다.
내무부 차관과 총무처 장관을 역임한 이상배(李相培)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의 말이다.
“행정은 기술입니다. 행정을 관료가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또 행정은 현장입니다. 정치는 아침저녁 말이 달라질 수 있지만 행정 현장이 조석(朝夕)으로 변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지요. 공무원들 보고 융통성이 없다고 하는데 행정에 자유재량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료를 중용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사실, 5년마다 정권이 바뀌면서 관료들의 신분이 불안해졌어요. 과거엔 단계를 밟아 가다 보면 장관에 오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꿈도 사라졌어요.”
안행부 전직 차관 K씨의 말이다.
“오히려 관료들은 관료 출신을 반길 것 같은데 실상은 안 그렇습니다. 관료들보다 대통령과 허물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치적 동반자를 더 선호하죠. 관료 출신 장관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너무 많이 알아서 불편합니다. 장관이 주무관 정도가 알아야 할 일까지 챙기면 곤란합니다. 경험상 관료 출신 장관은 큰 그림을 못 보고, 그 부처의 시시콜콜한 입장만 볼 뿐입니다. 그것보다 필요할 때(부처의 이익을 챙겨야 할 때) 대통령과 청와대에 전화해 해결하고 다른 부처의 외풍까지도 막아 주는 이가 더 좋죠. 또 언론과 국회와의 관계가 부드러우면 금상첨화(錦上添花)죠. 관료들에게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죠.”
이명박 정부의 홍보업무에 관여했던 언론인 출신 고위 관료 C씨의 말이다.
“박근혜 정부의 화두인 소통과 융합, 창의와 ‘관료 천하’는 뭔가 어색합니다. 국민행복과 창조경제로 상징되는 국정 슬로건은 새로운 발상을 요구합니다. 관료적 습관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창의적인 열정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상명하복과 책임질 일은 하지 않으려는 관성을 지닌 이가 관료들입니다. 좋게 보면 전문성과 효율성, 연속성과 안정성을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보신주의와 무사안일주의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만난 관료들의 행태입니다.”
관료제에 대한 북유럽과 남유럽의 차이
독일 베를린자유대 종신교수인 박성조(朴聖祚) 교수는 “박근혜 정부가 관료 중심으로 가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며 마치 옛 프러시아를 연상케 한다고 했다. 현재 세르비아에 머물고 있는 박 교수는 기자에게 이메일로 자신의 견해를 전해 왔다.
“프러시아는 관료(특히 법률가)들에 의해 정부가 꾸려져 왔기에 ‘안정’과 ‘지속’을 목표로 하는 ‘관료국가(Beamtenstaat)’의 전철을 밟았습니다. 정치인들은 ‘단기적 효율’만을 눈독 들이기에 ‘수준 높고, 도덕심 강한 정치인이 없는 곳’에서는 (정부가) 위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최근 들어 복잡하고 심층적인 기술, 지식, 정보에 대해 정치인 대개가 거수기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문가형 관료들이 더욱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 교수는 그러나 “참신한 개혁, 비전을 갖춘 정부조직을 감안하면 관료들만의 능력으론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는 관료 위주로 정부를 운영하는 독일과 북구(北歐) 유럽과 정당·노조·학자·NGO 출신이 장관을 석권하는 프랑스와 남구(南歐) 유럽을 예로 들었다.
“북유럽 국가는 산업화(2차 산업)를 이미 성공리에 치렀고, 이를 위해 정부와 경제계, 노조간 협력관계(組合主義)를 구축했으며, 지금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바탕으로 첨단기술 분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과거 핀란드가 대표적인 혁신국가(innovative state)였지만, 올해는 스웨덴이 독일을 앞섰다고 해요. 이처럼 북구의 통치방식 특징은 이해·이익간 갈등을 조화롭게 해결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개발도상국 원조에도 대단히 적극적이란 점입니다.”
남유럽 국가는 어떨까. 박 교수는 “남유럽은 오랜 식민지 경영을 해 왔고, 또 독재하에서 살아와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산업화도 이루지 못했고, 노·사·정 협업(協業)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 나라에서 젊은이가 가장 선호하는 직장은 단연 공공분야다. 금융위기나 재정위기로 인한 해고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북구의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도 ‘성숙된 민주주의’이지만, 남구는 한국과 비슷한 ‘민주주의 발전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는 예외입니다만.”
그러나 관료들이 행정엘리트가 되어 국정을 이끄는 것과 젊은이가 직업으로 관료를 선호하는 것은 반대개념에 가깝다. 박 교수의 말이다.
“산업화가 발달하면 사회가 다원화해 많은 일자리가 생깁니다. 북구의 젊은이들은 대개 노동시장에서 잡호핑(job hopping)을 많이 해요. 이리저리 직장을 바꾸는 것이 가치있는 일로 여겨집니다. 공무원 채용시험에 우수한 젊은이가 응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죠.
어찌 보면, 관료만이 사회진출의 기회라고 보는 나라는 후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교사나 공무원을 선호합니다. 산업화·민주화·복지국가가 되면 자기 나라에서 직장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희박해 집니다. 일자리가 많은데 굳이 관료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안 갖게 되죠. 자기 분야에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기 때문에 굳이 관료를 선호하지 않아요. 관료를 선호하는 국가는 ‘직장은 그것밖에 없다’는 인식이 팽배한 후진국이죠.”
박근혜 정부 관료들은 진짜 전문가일까
박성조 교수는 박 대통령이 관료를 중시하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권력엘리트의 부정부패입니다. 군사독재에 아부하던 엘리트, 부동산 투기로 호의호식하는 엘리트, 표절이 팽배하는 학계, 정치에 관심 많은 학자들 등등 이들의 공통분모는 한국사회를 ‘황금만능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박 대통령은 그나마 ‘덜 부패한’ 관료를 뽑아 국가를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다만 발탁된 인사들이 진짜 전문가인지는 알 수 없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독재를 유지하면서 지식과 정보를 갖춘 전문가에게 많은 권한을 일임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이 세계화 속에 잘 버틸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라도 기용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국적과 무관하게 고급인력을 유치하는 장기계획을 세워야 해요. 또 ‘보통사람 아닌 사람들’(예컨대 여성과 노인, 다문화 외국인, 청소년, 장애인 등)을 위한 정책수립과 빈부격차의 지표를 억제하는 공공정책의 윤리도 확립해야 합니다.”
정부개혁연구소 소장인 한성대 이창원(李昌遠) 교수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막는 길에 정부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여러분들의 부하가 각종 비리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는가요? 그렇다면 꼭 알아야 할 속담 3가지가 있는데, ‘하인은 꼭 주인만큼만 정직하다’와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입니다. 이것만 명심해도 5년이란 정권교체 주기와 맞물려 거듭되는 파동에서 당신만큼은 안전할 것입니다.”
[인터뷰] 李相培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
“修身부터 하라”
이상배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은 ‘찔러도 피가 안 나올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깐깐한 정통관료로 통한다. 그런 그가 국회의원을 세 번 역임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그 바탕에는 31년 공직생활에 대한 자부심도 깔려 있다.
이 위원장은 1961년 고등고시(행정과)에 합격, 27세에 군수(경북 울진)로 공직을 시작해 32세에 안동시장을 했고, 이후 경북도지사, 내무부 차관, 청와대 행정수석 비서관, 환경청장, 총무처 장관, 서울시장을 거쳤다.
“31년의 공직생활 동안 휴일 한 번, 휴가 한 번 제대로 가져 보지 못하고 청춘과 장년기를 일 속에 묻어 왔어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과 당위성으로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그의 공직 신조도 ‘일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일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일에 대한 집념 탓에 가족을 제대로 챙길 수 없었다고 한다. 일의 기준이 엄격해 부하 직원을 늘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세월이 지나 생각해 보면, 모두에게 미안하다”면서 “그래도 공직에 열정을 쏟아 행복했다”고 말했다.
“공직자윤리위원장이 되어 관료들의 재산신고 내용을 살펴보니 은행통장이 30~40개나 되는 이가 나오더군요. 자기가 깨끗하고 염치가 있어야 ‘치국(治國)’도 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하고 ‘수신(修身)’을 해야 부정한 문제나 비리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관료로 성공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관료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테크노크라트입니다. 자신의 축적된 노하우를 토대로 현장 중심으로 일해야 합니다. 정책의 집행과정을 하나하나 현장 위주로 확인·검증해야 합니다. 신문에 시책 하나 던져 놓고 나몰라라 해선 곤란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관료를 어떻게 이끌어야 합니까.
“일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못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면 됩니다. 그것이 거꾸로 되면 조직이 무너집니다. 박정희 정부에서 노태우 정부까지 일만 열심히 하면 장관이 될 수 있었지만, 이후 관료조직이 정치의 영향을 받게 됐어요. 5년마다 정권이 바뀌니 자리보장도 어렵게 됐고요. 앞뒤 가리지 않고 일하게 하기 위해선 신상필벌(信賞必罰)만 한 게 없습니다. 중국 한비자(韓非子)도 ‘임금에게 주어진 것은 상을 주거나 벌을 주거나 두 가지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악역을 맡겠다는 이도 없고, 적당히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무사안일 주의가 공직사회에 독버섯처럼 생겼어요.”
이 위원장은 “공무원에게 2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해 가는 이, 다른 하나는 장애물을 걷어내고 전진하는 이”라며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위원회만 여러 개 만들어 시간 끄는 이가 대표적인 미꾸라지 공무원”이라고 했다.
“저는 3공화국이 6공화국으로 바뀌어도 그저 관료로 살았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되는 과정도 보통사람들처럼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전해 들었을 뿐이지, 저와 정권이 직접 연결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고 있으면 큰 과오가 없는 한 직책이나 직위가 올라갈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관료들을 일하게 만드는 지름길입니다.”
이 위원장은 조선 중종(中宗·재위 1506~1544) 때의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가장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꼽았다.
“조광조는 조선조 초기까지 높이 평가되던 사장(詞章)문화, 즉 문학 위주의 공허한 선비사회의 기풍을 걷어 내고, 당시로서는 실천철학이라 할 수 있는 도학(道學)사상을 주장했어요. 그의 정치이념 역시 맑고 깨끗한 도학정치의 구현이었지요. 초야의 깨끗한 인사를 발탁하기 위해 현량과라는 파격적인 과거제도를 도입했고 이들을 통해 국가의 기강을 철저히 바로잡았어요. 개국공신의 후손이라 자부하던 보수 공신파들의 기득권도 인정하지 않았죠. 그것이 자신이 모시던 중종 임금을 위해 가장 바른 길이라 여겼어요. 비록 기득권파에 의해 모함을 받아 38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말았지만 자신의 명예가 아닌, 나라를 위해 일하고 희생한 정신을 후배 관료들이 배워야 합니다.”⊙
이후 국정홍보처 관료들은 어떻게 됐을까. 혹시나 옷을 벗거나 징계를 받지 않았을까. 당시 홍보처는 “국정 홍보를 한 게 아니라 언론과의 ‘갈등 촉진자’ 역할을 했다”는 질타를 받았었다.
기자는 당시 홍보처 핵심 관료 3인의 행적을 알아보았다. 한 명은 문화체육관광부에, 한 명은 해외에, 한 명은 문화부 산하 기관장에 재직하고 있었다. 홍보처를 폐지했던 MB 정부 때 이들이 ‘물을 먹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홍보처 홍보협력단장이던 방선규 국장은 문화부의 가장 노른자위 자리인 문화예술국장에 재직 중이다. 그는 MB 정부 초기 문화부 홍보정책관에 임명됐다가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자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으나 이내 자리를 잡았다. 김희범 홍보처 정책홍보관리실장은 현재 주(駐)애틀랜타 총영사, 서강수 홍보처 콘텐츠운영단장은 MB 정부 때 홍보지원국장을 역임하고 해외문화홍보원 원장을 거쳐 현재는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원장으로 근무 중이다.
문화부 내에서 이들의 행적을 비난하는 이를 찾기 어려웠다. 그를 아는 한 인사는 “그 자리에 합당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묘사했다. 국가공무원법 57조에는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권교체로 정부의 정책기조가 달라지면 공무원은 바뀐 기조에 맞춰야 하고, 그런 공무원의 변신은 ‘무죄’라는 얘기다.
명지대 행정학과 박천오(朴天悟) 교수는 “공무원에게 법적인 복종 의무가 있는 점, 오늘날 정권의 국가비전 실현과 국정관리에 있어 공무원들의 적극적 협력이 필수적인 점, 상급자에 대한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권위주의적 행정문화 등을 이유로 공무원의 정치적 대응(충성)을 무조건적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고 했다. 사실, 전문직업인으로 관료의 소신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의 문제는 매우 모호하다. 계속된 그의 주장이다.
“규범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정책과정에서 공무원이 정권의 방침과 정무직 상관의 지시에 불응하면서까지 자신의 전문가적 소신을 고집하는 행위는 민주주의 원리에 반함은 물론, 조직내 계층제의 원칙에도 위배된다고 볼 수 있어요.”
“도덕적으로 치사하게…”
 |
|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홍보처는 언론과의 ‘갈등 촉진자’ 역할을 했다. 2008년 10월 6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이 선서를 하고 있다. |
“관료가 업무를 거부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그만두거나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 부당함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위에서 ‘고(go)’ 하면 ‘고’ 하는 것이 관료의 운명입니다.”
그는 취득세 감면을 추진하던 일을 떠올렸다.
“과거 행정자치부 시절, 취득세 인하를 두고 부처 내 논란이 컸어요. 취득세는 광역자치단체의 가장 중요한 재원(財源)이어서 세감면을 하면 수입이 줄 수밖에 없어요. 취득세 인하를 정부와 논의할 때 행자부는 반대의견을 냈어요. 그러나 치열한 공방 끝에 재경부(현 기획재정부)의 논리대로 결정되자, 우리는 토를 달지 않고 집행했습니다. 그동안 지자체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감세의 필요성을 지자체에 설득해야 했지요.
이런 이중적 조건은 언제나 부딪히는 일이죠. 국가정책이 결정되기 전에는 치열한 공방을 벌이지만 일단 결정되면 효과적 집행이 되도록 (관료는) 도와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치사하게 그럴 수 있냐고 하겠지만, 정권교체와 함께 5년마다 관료가 바뀌면 혼란이 옵니다. 미국도 공화당 또는 민주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부자감세 정책’이 거꾸로 갑니다.”
공무원의 이중적 행태 사례는 숱하게 많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9월 기획재정부 윤영선(尹永善) 당시 세제실장이 종합부동산세 완화방안을 밝혔다. “종부세는 과도한 세부담으로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부동산 실무기획단 부단장으로 있을 때는 “종부세 부담이 과하지 않다”며 종부세 당위성을 역설했다.
입장을 바꾼 배경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정권이 바뀌었으면 바뀐 방향에 따라 서포트해 주고 지원해 주는 게 공무원의 기본 책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는 정권과 상관없이 승진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2002년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행정관, 2004년 재경부 세제총괄심의관, MB 정부 때는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2010년 3월에는 관세청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2011년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 “법인세 감면액의 절반이 10대 기업에 돌아갔고, 임시투자세액공제 제도는 대기업 위주의 지원제도였다”며 MB 정부의 감세정책 논리를 뒤집었다. MB 정부 시절, 재정부는 감세정책이 대기업에만 유리하다는 언론보도를 숱하게 반박했었다.
지난 2009년 11월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건설 백지화 입장을 밝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시 건설 계획을 입안한 공무원들은 백지화 논리를 만드느라 밤을 새웠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 때도 공무원이었고, 지금도 공무원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5년 뒤 권력의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국토부와 소방방재청, 교육부의 경우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국토교통부는 어수선하다. 해양수산부가 떨어져 나갔고 4대강 사업을 두고 고강도 감사원 감사가 진행 중이다.
국토부 관료들은 ‘4대강사업추진본부’를 존속시키려 애썼지만 지키지 못했다. 이곳으로 파견 나갔던 관료들이 4월 초 현재 대기발령 상태다. 과장 1명이 도로정책과로 옮겨갔다고 한다. 국토부 공무원들은 4대강 언급을 아예 자제하는 분위기다. 새로 부임한 서승환(徐昇換) 장관도 4대강에 대한 말은 아예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 서기관의 말이다.
“4대강 사업에 참여했던 공무원들은 공황상태입니다. 어떻게 될지 현재로선 짐작할 수 없어요.”
—인사와 관련해 어떤 소문이라도?
“수장이었던 홍영표 부본부장(심명필 본부장은 이미 퇴임)이 자리를 옮기며 은퇴한다는 얘기가 있고 나머지 국장 1명, 과장 2명, 사무관 이하 직원들은 정치적으로 관여한 것이 아니니, 조만간 발령이 날 것으로 보고 있어요. 또 MB 정부 때 청와대에 근무했던 이도 현재 대기발령 상태여서 불안해하고 있어요. 자꾸 인사가 늦어져서 ….”
그는 “4대강 사업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했기 때문에 감사원 감사 결과를 봐야 하지만 불이익이 실무자 선까지 내려오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다들 어수선하고, 속이 상하다”고 했다. 또다른 국토부 공무원은 “대통령이 직접 팔을 걷어붙인 사업을 관료가 무슨 책임을 지느냐”고 했다.
“대통령이 추진한 정책이 위법부당하지 않다면 모든 공무원은 그 집행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대통령 공약을 정책에 담는 것이 관료의 몫이지요. 4대강 사업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비난한다면 앞으로 누가 소신껏 일하겠습니까.”
요즘 소방방재청에서도 혼란스럽다는 얘기가 들린다. 노무현 정부 시절, ‘리틀 노무현’이라던 김두관(金斗官) 행자부 장관의 신임을 받던 남상호(南相浩) 당시 소방국장이 박근혜 정부의 새 청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다. 남 청장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 몇 개 대학에서 외래·대우·겸임 교수로 재직하다 청장으로 발탁됐다.
“‘고도의’ 인사 통치술?… 없는 것 같다”
 |
| 서남수 교육부 장관. |
그러나 MB 정부 초대 소방방재청장은 용퇴했던 1기 출신의 최성룡(崔成龍)씨였다. 1기와 2기의 운명이 뒤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로 바뀌고 2기 출신의 남 청장이 다시 방재청으로 컴백했다.
사실, 방재청은 소방직과 일반직, 기술직 공무원 등이 합쳐진 조직으로 직렬 간, 계급 간 갈등이 늘 있어 온 곳이다. 주요 간부들은 고시 출신이거나 행정에서 잔뼈가 굵은 일반직 공무원이 포진해 갈등이 많았다. 안전행정부 관계자의 말이다.
“대학교수 신분인 남 청장이 일반직으로 청장에 부임했지만 원래는 소방직 출신입니다. 그동안 청장이 일반직이면 차장은 소방직, 청장이 소방직이면 차장은 일반직으로 임명했어요. 그 관례에 따라 차장을 소방직으로 임명하려 했는데 방재청 내 일반직이 반발하게 됐어요. 청장, 차장 모두 소방직으로 채우느냐고요. 박근혜 정부의 인사팀이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청장을 뽑았기에 혼란에 빠진 겁니다.”
최근 간부급 인사를 끝낸 교육부는 서남수(徐南洙) 장관을 중심으로 새로운 진용을 갖췄다. 서 장관은 이해찬 교육부 장관 시절, ‘잘나갔던 5인방’ 내지 ‘교육 5적(敵)’에 거론됐던 인물이다. ‘코드’로 본다면 노무현 정부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제가 장관이 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고 했다. 지난 대선 당시에는 투표조차 하지 않았다. 2011년 8월에는 한 토론회에 참석, 이명박 정부의 특목고·자사고 확대정책을 비판한 일도 있다.
 |
| 정권교체로 정부의 정책기조가 달라지면 공무원은 바뀐 기조에 맞춰야 한다. 지난 2월 27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총리실 직원들이 신임 정홍원 총리와 인사하기 위해 집무실 밖에 대기하고 있다. |
“이주호(李周浩) 장관 시절, 인사를 담당했던 한 관료가 이번에 지방대 사무국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반면 이 장관이 서울시교육청 장학관으로 내려 보냈던 이가 1급 국장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를 두고 ‘과거 용사들이 복귀했다’는 말을 합니다. 서 장관이 대학국장, 차관 시절 가까이 지냈던 라인들이 많이 포진했다는 얘기도 들려요.
이주호 장관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모 국장이 교과부 공무원 워크숍에서 마이크를 잡고 MB 정부의 수월성 교육 입장을 공개 반대했다가 지방으로 좌천된 일이 있으니까요. 정권교체에 따른 인사의 부침은 불가피한가 봐요.”
이번 교육부 인사는 청와대 김재춘(金在春) 교육비서관과 문용린(文龍鱗) 서울시교육감을 비롯한 서울대 사범대 인맥을 중심으로 추천을 받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 인사는 “첫 조각은 무엇보다 대통령과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서 장관이 그런 인물인지, MB 때 배제된 인물을 찾다 보니 발탁된 인물인지 모르겠다. 이번 인사에 어떤 ‘고도의’ 인사 통치술이 담겨 있을까? …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정부 과기부 장관이 사표를 내야 했던 사연
 |
| 국정감사에 지친 공무원들. 국정감사 마지막날인 작년 10월 24일 국회 본청 상임위원회 복도에 피감기관소속 공무원들이 주저앉아 쉬고 있다. |
정부의 행정개혁 작업에 오래 관여했던 한 교수는 자신이 경험한 관료들의 행태를 이렇게 꼬집었다.
“공무원과 장관이 대통령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합니까. 무서워하는 척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 커리어(career)’입니다. 공직사회는 5년마다 사이클이 바뀝니다. 그들 머릿속에는 ‘언제 베팅하느냐’는 생각뿐입니다. 국장 자리는 1년에서 1년반 이상 있을 수 없고, 로테이션하는 자리도 아니니 이번 정권에 충성해 출세하느냐, 다음 정부를 겨냥하느냐에 관한 ‘스케줄링(scheduling)’에 골몰합니다. 정권교체에 맞춰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어야지 계속 일만 하다가는 밉상이 되기 십상이죠.”
명지대 박천오 교수는 1995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관료들의 정치적 태도를 조사했더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두 조사 모두에서 90% 이상의 관료들이 ‘나의 정책수립 능력이 정당이나 국회와 같은 정치제도를 능가한다’고 믿고 있고, 마찬가지로 90% 이상의 관료들이 ‘우리의 업무에 대한 정치인의 개입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이 내용은 박 교수가 작년에 펴낸 《한국 정부관료제》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 시대가 사라지고 사회내 민주화가 많이 진척됐음에도 관료들의 우월의식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박 교수의 주장이다.
“관료들이 과거의 독점적 역할을 고집하고 스스로 능력을 과신한다면, 여타 정치주체들의 정책참여와 투입을 위한 제도적 개선이 이뤄지더라도, 이들 관료가 설치해 놓은 ‘보이지 않는 장벽’ 탓에 기대만큼의 실효를 못 거둘 것입니다. 한국 관료들은 여전히 다양한 정치주체들의 정책과정 참여의 당위성과 현실적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어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정책을 조율했던 국민대 사회과학대 김병준(金秉準) 교수는 관료들의 조직 이기주의와 그로 인한 조직 갈등을 체험한 인물이다. 그가 들려주는 체험담은 관료가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의 질문 자체를 군색하게 한다.
노무현 정부 초기, 홈오토메이션·텔레매틱스(telematics)·차세대 전지 등 10개 사업을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선정, 육성하려 했다. 물론 대규모 재정투자가 뒤따르는 사업이다. 문제는 이 사업들의 관할부처 조정이었다. 청와대가 조정을 시도했지만 산자부, 정통부, 과기부가 모두 자신들이 맡아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경제부총리가 나섰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양보를 하는 순간, 자기 부처 공무원이나 커뮤니티로부터 배신자, 무능자로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고 결국 대통령이 나섰다. 김 교수의 회고다.
“한 번은 어느 부처의 차관보가 찾아왔어요. 그분 말씀이 자격지심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어요. 지난 6개월 동안 다른 부처의 활동을 모니터하고 그에 대비한 작전을 짜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는 겁니다. ‘저쪽 부처의 오늘 동향이 어떠냐. 협회를 만들었어? 그러면 우리도 빨리 사람을 모아 협회 만들어. ○○부의 누가 청와대 누구한테 전화했다는데 우리도 누구를 찾아가야지’ 등등 이런 일을 집에서까지 전화로 주고받으니까 부인이 그러더랍니다. ‘당신들 국록(國祿)을 받고 사는 게 부끄럽지 않냐’고.”
결국 논란 끝에 10개 신성장동력 사업의 관할 부처는 산자부가 5개, 정통부가 4개, 과기부가 1개를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관할 부처가 적은 과기부 부총리는 사의를 표명했고 얼마 후 대통령은 이를 수리(受理)했다.
“과기부 장관이 사표를 내겠다는 거였어요. 이대로 부처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죠.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하시라고 말했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마구잡이로 결정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항의성 사표를 냈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철학 불분명한 사람들 많이 기용”
 |
|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 파견 공무원들은 노무현 정부는 물론 박근혜 정부의 ‘전문인력 풀’로 기능했다. 2002년 12월 30일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노무현 당선자가 임채정 위원장과 함께 인수위 현판식을 갖고 있다. |
“제 책에 쓰여 있는 부분들은 관료집단이 이러이러하니 정말 나쁘다 하고 끝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정부에 들어가는 사람, 그리고 정권을 잡은 세력이 관료집단을 통제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정도로 어려우니 더 단단한 철학과 정책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관료를 설득해서 이끌 수 있는 기술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설득력 없는 어설픈 아이디어를 가지고 들어가서 말 몇 마디로 움직이게 할 생각이면 아예 정권을 잡지도 말고, 정부에 들어가지도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관료들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뭔가요.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관료들의 가슴을 때릴 수 있을 정도의 철학과 비전, 그리고 현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 중의 하나가 됩니다. 관료집단의 대변인이 되어 부처이익을 대변하거나 아니면 관료집단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결국 좋지 못한 결과를 남기고 자리를 떠나게 되죠. 나와서는 관료 때문에 일을 못했다고 변명하게 되고요.”
—박근혜 정부의 조각(組閣)을 어떻게 보나요.
“박근혜 정부가 관료 출신을 많이 기용하는데,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겠지요. 이해되지 않는 점은 너무 양순하고 철학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많이 기용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관료사회조차도 제대로 설득해 내지 못할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밖에서 들어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최근 해양수산부 장관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들이 들어가서 관료집단을 이끌거나 통제해 낼까요?”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현재 정부 산하 기관장으로 재직 중인 전직 고위 관료를 만났다.
“노무현 정부는 공무원을 동반자로 보지 않았어요. 그럼, 관료들은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자기 부처의 이해관계, 개인의 장래에 비추어 극력 방어를 하게 됩니다. 어차피 그래야 5년 아니냐는 식이죠. 그때 설쳐 대던 양정철(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관료들은 철저히 보복을 했어요. 겉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에서 보고받을 때는 ‘응, 그래. 이놈들이 서서히 바뀌는구나. 더 밀어붙여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겉모습뿐입니다. 그들은 관료 속성을 더 이해하고 활용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운동권 출신이 청와대에 들어가 각 부처 기획실장들 불러 놓고 ‘당신들 왜 협조 안 하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가 있어 과거에도 안 됐던 사안’이라고 말하죠. 그럼 이렇게 일갈합니다.
‘과거의 기득권에서 못 벗어났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이 정책을 펴면 이런 점에서 좋은데 당신들은 사사건건 안 된다고만 한다’고요. 관료들은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지만, 말은 못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합니다. 그런데 승복이 되나요? 하라면 하지만 절대 이뤄 낼 수 없지요. 마음을 못 얻었기 때문이죠.”
관료냐, 정치인이냐
 |
| 김해진 전 특임차관. |
“영혼이란 정치적 정체성과 철학을 뜻합니다. 공무원은 어디까지나 정책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권한이 있지만, 집행계획을 세워 정신과 철학을 부여하는 일은 집권자의 몫입니다. 제가 경험한 관료집단은 잘 준비된 조직이었어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는 집단이라고 할까요? 어떻게 컨트롤하느냐에 따라 정부 성패가 갈립니다.”
그는 “지난 정권 때 사력을 다한 공무원이 정권이 바뀌면서 물을 먹게 해선 안 된다. 국민들은 전 정권에서 관료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잊어 줘야 한다”고 했다.
“권력자가 공무원을 겁주어서 정책을 끌고 가선 곤란해요.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그 사람의 능력을 끌어내는 용인술이 필요합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처음부터 기 죽이고 인사로 컨트롤하겠다고 덤비면 관료들은 복지부동할 수밖에 없어요. 밖에서 정치를 하다가 부처에 들어간 정무직 장차관들은 큰 그림만 보려 하는데 관료들은 현장의 문제점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전 차관은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정치권, 시민단체 인사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면서 그동안 관료들은 조력자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며 “그러나 정치·시민단체에 대한 불신과 한계가 쌓이면서 한국사회의 발전동력이 서서히 관료로 교체되는 상황이 아닌지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크게 보면,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 정치적인 이념에 편성한 NGO(비정부기구) 세력에 대해 국민이 낙담하는 상황입니다. 그동안 한국사회를 끄는 주력이었지만, 어느덧 후유증이 쌓였다고 봅니다. 국민 입장에선 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의 하나로 관료들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죠.”
 |
| 2006년 10월 24일 김병준 국민대 교수의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 위촉식에 노무현 대통령이 입장하고 있다. |
“다 능력을 인정받은 ‘고시파’지만, 제가 능력을 인정할 만한 이는 3분의 1밖에 없었고, 3분의 1은 과거에 능력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수십 년간 관료로 지내며 고인 물이 되어 자기개발이나 자기발전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었어요.”
그는 “외교관 경력이 30년이라 자랑하는 이들이 있지만 진짜 외교관은 공관장이지 나머지는 그저 배석자일 뿐이다. 공관장 이하 외교관은 현장에서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관료보다 정치인이 더 전문성이 있다”고 했다. K씨는 관료보다는 정치인을 정무직 장차관에 배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전문성이란 한자리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생긴다고 보지 않아요. 오히려 국회의원이 더 전문성이 있다고 봅니다. 국회의원이란 자리는 상임위를 통해 압축된 정보를 모두 듣고 볼 수 있지요. 또 관련 장차관과 부처 실국장을 언제든지 불러 자료를 요청하고 설명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의지를 갖고 노력하면 6개월이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수십 년간 한 부처에서 비능률·보수주의·책임전가·비밀주의·파벌주의에 물든 관료를, 그리고 퇴직한 관료를 다시 자신이 몸담았던 부처에 등용한다는 것은 바림직하다고 볼 수 없어요.”
멘붕의 계절
최근 교수와 연구원 출신 장차관을 배출한 고용노동부, 해수부, 국방부, 국토부 등의 부처는 시쳇말로 ‘멘붕(멘탈 붕괴)’에 빠졌다. 그동안 냉대(?)를 받던 산하기관 인사들이 어느날 갑자기 상사로 부임한 것에 대한 놀라움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개인적 혹은 업무상으로라도 불편한 관계에 있던 공무원들은 행여 보복성 처우를 받지 않을까 좌불안석이란 소문도 들린다. 한 공무원의 얘기다.
“교수나 박사급 연구원들이 보고하러 가면 주로 부처 사무관들이 그들을 상대합니다. 모 장관 후보자도 장관내정 발표가 나기 한 달 전쯤 담당 과장에게 보고를 갔던 모양입니다. ‘이 정도 보고밖에 안 되느냐’는 호된 질책을 받았고, ‘○○님이 보고하라고 해서 왔다. 다음부터 잘하겠다.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해요.
고용노동부 방하남(房河男) 장관은 노동연구원 출신입니다. 노동부 산하 연구원들은 기업쪽, 노조쪽 입장을 각각 대변하는데 방 장관은 중립적 입장이어서 양쪽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어요. 정책과제 용역작업을 수없이 해 왔던 이들의 영전을 관료들이 반길 수 없는 이유지요.”
한 전직 고위 관료는 “교수, 연구원 출신 장관은 필패(必敗)”라고 했다.
“박통(박정희 정권) 때는 장관을 푸시(push)하고, 그래도 안 되면 중앙정보부를 동원하고, 그래도 또 안 되면 청와대 정무팀, 경찰이 나서서 관철시켰어요. 국회나 언론과 스킨십도 쌓고 노하우도 알아야 딜(deal)도 제대로 합니다. 그러려면 그전부터 관계가 축적돼야 합니다. ‘장관님, 법안 처리 도와주세요. 그럼 이것 해드릴게요’라고 말이죠. 외부에서 오는 장관은 6개월 동안 내부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새로운 지시사항이 밑으로 막 내려옵니다. 공무원요? 당황 안 해요. 그 지시사항이란 것도 과거 다 검토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검토지시 내려오면, 답변 보고서가 책상서랍 안에 다 있습니다. 제목 몇 줄만 바꾸면 됩니다. 그걸 모르는 새 장관은 ‘근사하네’ 하지만 밑에선 다 웃어요.”
그는 “이상(理想)은 좋은데 수많은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협조를 얻어내지 못하면 그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새 장관의 의욕에 관료들은 실패할 줄 알면서도 보고한다. 몇 달이 지나면 결국 안 되고, 원상대로 돌아간다. 이것이 관료사회의 현실”이라고 했다.
국방부 군비통제관을 역임한 한 예비역 장성은 가까운 군 인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백승주 국방차관의 임명을 “국방부 조직을 풍비박산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린 인사”라고 했다. 백 차관은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출신이다.
“백 차관은 ‘차관 풀(pool) 100명’에도 못 끼는 도무지 언싱커블(unthink able·터무니없는)한 선택입니다. 부처간 협의에도 끼지 못할 주니어입니다. 김대중 정부에서건, 이명박 정부에서건 TV에 나가 다종다양(?)한 대북정책을 대변해 왔던 한 대북전문가에 불과합니다. 백 박사를 함부로 부려먹던 국방부 국장과 실장들, 특히 정책실의 국·과장 실무자들은 앞으로 조심해야겠네요. 김관진 장관의 개인적 역량과 카리스마로 국방부는 어떻게든 돌아가겠지만 차관 하나 마음대로 못 쓰는 장관이 무슨 책임장관인가요?”
| [노무현 인수위 파견 공무원들의 요즘] 지난 2002년 1월 각 행정부처에서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에 파견된 인사는 모두 247명이다. 이 중 전문위원과 행정관으로 일한 공무원은 대략 190여 명. 모두 각 부처의 에이스급이 차출됐다. 인수위 파견 공무원들은 누가 뭐래도 노무현 정부의 핵심 싱크탱크 역할을 한 전문인력 풀(pool)로 기능했고 박근혜 정부까지 그 풀이 이어졌다. 이들은 인수위가 끝난 뒤에도, 정권이 교체된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권력에 편승했다기보다 다른 관료들보다 유능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노준형(정보통신부에서 파견) 인수위 전문위원은 노무현 정부에서 정통부 장관(2006.3~2007.8)이 되었고, 전군표(국세청)·윤규혁(병무청)·이만기(과기부) 전문위원은 각각 국세청장(2006.7~2007.11), 병무청장(2005.1~2006.8), 기상청장(2006.2~2008.3)이 되었다. 이관세(통일부) 전문위원은 통일부 차관(2007.8~2008.2), 반장식(기예처) 전문위원은 기획예산처 차관(2007.4~2008.2), 김종갑(산자부) 전문위원은 산업자원부 차관(2006.2~2007.2), 이춘희(건교부) 전문위원은 건설교통부 차관(2006.11~2008.2), 강대형(공정거래위) 전문위원은 공정거래위 부위원장(2005.7~2006.7)이 됐고, 배종신·유진룡(문화부) 전문위원은 나란히 문화부 차관(2004.7~2006.1, 2006.1~2006.8)이 되었다. 노무현 인수위 파견 공무원들은 최근 단행된 박근혜 정부 조각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유진룡 전 차관은 문화부 관료 중 최초로 문화부 장관에 올랐고, 조태열(외통부) 전문위원은 외교부 2차관, 정연만(환경부) 전문위원은 환경부 차관, 이복실(여성부) 행정관은 여성가족부 차관이 되었다. 노대래 전문위원은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MB 정부 때 기획재정부 차관·조달청장·방위사업청장을 거쳐 다시 현 정부에서 공정거래위원장이 되었다. |
박정희와 박근혜 정부의 닮은꼴 인사스타일
 |
| 노병만 가야대 교수. |
관료 출신이 아닌 경우에도 범(汎) 관료 범주에 드는 국책연구기관 출신 연구원이 다수다. 청와대는 박 정부의 관료 발탁에 대해 “(해당분야의) 전문성을 가장 먼저 고려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 부처에 오래 몸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일을 잘해 낼 적임자로 본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박근혜 대통령의 관료선호 현상은 박정희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을 빼닮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사회의 관료지배적 권력구조를 연구해 온 가야대 경찰행정학과 노병만 교수에게 두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을 물어 보았다.
먼저 박정희 대통령의 관료 충원 형태를 살펴보자. 박정희 정권 당시 장관급 이상의 경우 3공화국에서는 군 경력 출신이 37.8%(31명)로 가장 많이 충원됐고 다음으로 관료 출신이 29.3%(24명), 교육계 출신이 19.5%(14명) 순으로 충원됐다. 유신체제인 4공화국에서도 군 출신이 36.5%(23명), 관료 출신이 34.9%(22명), 교육계 출신이 17.5%(11명) 순으로 많이 충원됐다. 노 교수의 주장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행정영역 권력엘리트’(장관)의 관료 경력은 중요한 충원요인이 되었어요. 또 3공보다 권위주의적인 유신시절, 관료 충원율이 높아졌습니다. 즉, 군부 집권세력은 그들에게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고 집권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지배세력인 관료세력과 결합하고, 여기다 세력기반이 취약한 교육계 출신과 경제계(사업계) 인사를 활용하는 권력구조를 행사했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군부-관료 양대 세력의 연합지배적 권력구조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노 교수는 “일제 식민지 체제에 봉사해 온 관료세력이 도덕적 정통성을 상실해, 아무리 조직과 규모를 갖춘 기존의 지배세력이라 해도 자력으로 현대 한국사회의 집권세력이 될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4·19 혁명 이후의 장면(張勉) 정권과 5·16 쿠데타 이후 30여 년에 걸친 박정희~노태우 정권의 군부집권 세력의 등장은 이러한 관료세력의 도덕적·명분적 취약성하에서 집권세력과 관료세력의 결합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에서는 정치영역이 경시되고 행정기능이 강조돼 권력의 무게중심이 행정영역에 위치해 전체적으로 볼 때 군부-관료 연합지배적 권력구조라 할 수 있어요.”
[교수 출신 장관의 관료관]
“저는 입당 경력은 없고요. 15대, 16대 때 얘기는 한 분과 관련된 얘기입니다. 지금 새누리당에 계시는 이인제 의원님과 관련돼서, 제가 이 의원님을 당시 존경했고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분 중의 한 분이어서 그분을 도와드렸기 때문으로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음은 지난 3월 6일 인사청문회에서 문병호(文炳浩) 의원과 서 장관의 일문일답. 청문회 분위기가 살벌했다고 해도 답변은 실망스럽다. —(문병호) 교수 입장에서 한국 관료사회 또는 이명박 정부의 국토부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승환) 관료사회 … 이런 부분은 제가 그 당시 경험을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하기에 조금 어려운 것 ….” —바깥에서 보는 게 더 정확할 텐데, 바깥에서 관료사회를 어떻게 보셨어요. “관료사회에 대해 크게 신경 써 본 적이 없어 … 죄송합니다.” —그러면 이명박 정부의 국토해양부나 과거의 건설교통부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그 부분도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몇 년 지나면 서승환 장관의 이름을 국민들이 기억 못할 것 같습니다. 장관으로서 뭘 하고 싶습니까. 한 가지만 말씀해 보십시오. “지금 하고 싶은 것은 주택 쪽에서는 보편적 주거복지를 달성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역대 교수 출신 장관들이 대체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못 받았습니다. 혹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교수 출신 장관이 있는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남덕우(南悳祐) 총리 같은 분은 성공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경우에 따라 부처 공무원을 장악하고 대통령도 설득해야 하는데 잘하실 수 있을지 조금 걱정입니다. “예, 최대한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글쎄요, 장관 답변이 진지하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간단간단하게 답변하시고 그러시는데 …. “예! 유념하도록 하겠습니다.” |
책임장관제의 함정
 |
|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료등용 스타일이 닮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1978년 1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이 농수산부와 상공부를 연두순시, 업무보고를 듣고 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충성스러운 심복인 군출신 인사들을 권력의 핵심과 지원세력의 자리에 기용하는 리더십을 행사했고, 유능한 행정관료 엘리트를 발굴, 행정부처 장관에 기용해 국정과업을 수행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행정관료와 국책연구원들, 즉 유능한 행정관료의 입각이 두드러졌는데 두 대통령 모두 ‘과업형 리더십’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요. 새 국정원장 인사에서 보듯,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육사(陸士)로 대표되는 군부 출신을 신뢰하고 이들을 핵심권력 엘리트로 중용하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다만 소통에 문제가 나타날 수 있는 리더십이 행사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벌써 소통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어요.
“박근혜 대통령은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며 자신의 리더십을 쌓아 왔어요. 원칙과 신뢰는 정치지도자의 덕목으로 마땅히 추구돼야 할 바지만, 이러한 강조는 자신의 소신과 주장에 대한 고집으로 나타날 수 있고, 나아가 권위주의적인 모습 또는 독재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 있어요. 따라서 정책이나 신념에 지나친 또는 잘못된 자기주장을 경계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장관제를 구현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대통령이 해당 부처 장관을 믿고 맡기겠다는 뜻인데, 만약 대통령의 장관 장악력이 부족하다든지, 국정과제 자체에 문제가 있거나 국정과제 수행에 어떤 문제를 야기하게 되면, 책임장관제는 모두 정권의 부담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의 경우 책임장관제로서 의도한 행정과업을 행정부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반면 국민의사에 기반한 정치적 고려에는 소홀했고, 정치는 행정에 비해 소외됐습니다. 이런 점에서 책임장관제는 과도한 과업지향적인 성향을 나타낼 가능성도 있어요. 어떤 경우든 대통령의 행정부처 장악력이 떨어지거나 국민(정책) 지지율이 저하될 경우 책임장관제는 그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통령이 힘이 떨어지면 관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KBS 기자와 YTN 국제부장을 역임한 문재철(文哉喆) KT스카이라이프 대표는 청와대에 출입하며 느낀 권력층과 정치인, 관료들의 행태를 《권력》이란 저서를 통해 꼬집었다.
“부처 간에 예산협의 과정에서 대통령 취임 첫해만 해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실무진은 ‘뭘 도와드릴까요’ 라며 적극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그러다가 2년차가 되면 청와대의 힘을 빌려 도와주라는 지원사격이 있어야 마지못해 요청한 예산을 지원해 줍니다. 하지만 임기 중반인 3년차에 들어가면 ‘청와대가 뭔데 예산 갖고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자기 일들이나 잘하지 …’, 심지어 어떤 공무원은 ‘어떤 놈이 압력을 넣느냐’며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합니다.”
그래도 고위직 관료들은 다소 조심스러워하지만 하위직엔 더욱 청와대의 입김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하위직 공무원은 임기말이 가까워질수록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배째라’는 식으로 안면 몰수합니다. 그러니 임기 4년차, 5년차 때는 어떻겠습니까. 공무원들의 태도변화와 상황판단하는 걸 보면 권력의 흐름이 보이지요.”
문 대표는 “배신의 계절은 자연스레 다가온다. 한낮의 태양도 때가 되면 기울 듯 권력의 흐름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 임기 중에 자신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것을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단임제 권력구조하에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때가 되면 다가오는 것, 권력과 상관없는 이들의 눈에는 훤히 보이는데도 권력에 가까울수록 실감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권력누수인 레임덕”이라고 했다.
관료들이 보는 관료 장관
전·현직 고위 관료들은 이번 박근혜 정부의 첫 조각을 어떻게 평가할까. 기자는 장차관, 국장급 3명의 관료들을 만났다.
내무부 차관과 총무처 장관을 역임한 이상배(李相培)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의 말이다.
“행정은 기술입니다. 행정을 관료가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또 행정은 현장입니다. 정치는 아침저녁 말이 달라질 수 있지만 행정 현장이 조석(朝夕)으로 변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지요. 공무원들 보고 융통성이 없다고 하는데 행정에 자유재량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료를 중용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사실, 5년마다 정권이 바뀌면서 관료들의 신분이 불안해졌어요. 과거엔 단계를 밟아 가다 보면 장관에 오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꿈도 사라졌어요.”
안행부 전직 차관 K씨의 말이다.
“오히려 관료들은 관료 출신을 반길 것 같은데 실상은 안 그렇습니다. 관료들보다 대통령과 허물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치적 동반자를 더 선호하죠. 관료 출신 장관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너무 많이 알아서 불편합니다. 장관이 주무관 정도가 알아야 할 일까지 챙기면 곤란합니다. 경험상 관료 출신 장관은 큰 그림을 못 보고, 그 부처의 시시콜콜한 입장만 볼 뿐입니다. 그것보다 필요할 때(부처의 이익을 챙겨야 할 때) 대통령과 청와대에 전화해 해결하고 다른 부처의 외풍까지도 막아 주는 이가 더 좋죠. 또 언론과 국회와의 관계가 부드러우면 금상첨화(錦上添花)죠. 관료들에게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죠.”
이명박 정부의 홍보업무에 관여했던 언론인 출신 고위 관료 C씨의 말이다.
“박근혜 정부의 화두인 소통과 융합, 창의와 ‘관료 천하’는 뭔가 어색합니다. 국민행복과 창조경제로 상징되는 국정 슬로건은 새로운 발상을 요구합니다. 관료적 습관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창의적인 열정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상명하복과 책임질 일은 하지 않으려는 관성을 지닌 이가 관료들입니다. 좋게 보면 전문성과 효율성, 연속성과 안정성을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보신주의와 무사안일주의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만난 관료들의 행태입니다.”
관료제에 대한 북유럽과 남유럽의 차이
 |
| 베를린자유대 박성조 교수. |
“프러시아는 관료(특히 법률가)들에 의해 정부가 꾸려져 왔기에 ‘안정’과 ‘지속’을 목표로 하는 ‘관료국가(Beamtenstaat)’의 전철을 밟았습니다. 정치인들은 ‘단기적 효율’만을 눈독 들이기에 ‘수준 높고, 도덕심 강한 정치인이 없는 곳’에서는 (정부가) 위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최근 들어 복잡하고 심층적인 기술, 지식, 정보에 대해 정치인 대개가 거수기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문가형 관료들이 더욱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 교수는 그러나 “참신한 개혁, 비전을 갖춘 정부조직을 감안하면 관료들만의 능력으론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는 관료 위주로 정부를 운영하는 독일과 북구(北歐) 유럽과 정당·노조·학자·NGO 출신이 장관을 석권하는 프랑스와 남구(南歐) 유럽을 예로 들었다.
“북유럽 국가는 산업화(2차 산업)를 이미 성공리에 치렀고, 이를 위해 정부와 경제계, 노조간 협력관계(組合主義)를 구축했으며, 지금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바탕으로 첨단기술 분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과거 핀란드가 대표적인 혁신국가(innovative state)였지만, 올해는 스웨덴이 독일을 앞섰다고 해요. 이처럼 북구의 통치방식 특징은 이해·이익간 갈등을 조화롭게 해결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개발도상국 원조에도 대단히 적극적이란 점입니다.”
남유럽 국가는 어떨까. 박 교수는 “남유럽은 오랜 식민지 경영을 해 왔고, 또 독재하에서 살아와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산업화도 이루지 못했고, 노·사·정 협업(協業)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 나라에서 젊은이가 가장 선호하는 직장은 단연 공공분야다. 금융위기나 재정위기로 인한 해고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북구의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도 ‘성숙된 민주주의’이지만, 남구는 한국과 비슷한 ‘민주주의 발전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는 예외입니다만.”
그러나 관료들이 행정엘리트가 되어 국정을 이끄는 것과 젊은이가 직업으로 관료를 선호하는 것은 반대개념에 가깝다. 박 교수의 말이다.
“산업화가 발달하면 사회가 다원화해 많은 일자리가 생깁니다. 북구의 젊은이들은 대개 노동시장에서 잡호핑(job hopping)을 많이 해요. 이리저리 직장을 바꾸는 것이 가치있는 일로 여겨집니다. 공무원 채용시험에 우수한 젊은이가 응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죠.
어찌 보면, 관료만이 사회진출의 기회라고 보는 나라는 후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교사나 공무원을 선호합니다. 산업화·민주화·복지국가가 되면 자기 나라에서 직장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희박해 집니다. 일자리가 많은데 굳이 관료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안 갖게 되죠. 자기 분야에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기 때문에 굳이 관료를 선호하지 않아요. 관료를 선호하는 국가는 ‘직장은 그것밖에 없다’는 인식이 팽배한 후진국이죠.”
박근혜 정부 관료들은 진짜 전문가일까
박성조 교수는 박 대통령이 관료를 중시하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권력엘리트의 부정부패입니다. 군사독재에 아부하던 엘리트, 부동산 투기로 호의호식하는 엘리트, 표절이 팽배하는 학계, 정치에 관심 많은 학자들 등등 이들의 공통분모는 한국사회를 ‘황금만능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박 대통령은 그나마 ‘덜 부패한’ 관료를 뽑아 국가를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다만 발탁된 인사들이 진짜 전문가인지는 알 수 없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독재를 유지하면서 지식과 정보를 갖춘 전문가에게 많은 권한을 일임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이 세계화 속에 잘 버틸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라도 기용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국적과 무관하게 고급인력을 유치하는 장기계획을 세워야 해요. 또 ‘보통사람 아닌 사람들’(예컨대 여성과 노인, 다문화 외국인, 청소년, 장애인 등)을 위한 정책수립과 빈부격차의 지표를 억제하는 공공정책의 윤리도 확립해야 합니다.”
정부개혁연구소 소장인 한성대 이창원(李昌遠) 교수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막는 길에 정부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여러분들의 부하가 각종 비리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는가요? 그렇다면 꼭 알아야 할 속담 3가지가 있는데, ‘하인은 꼭 주인만큼만 정직하다’와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입니다. 이것만 명심해도 5년이란 정권교체 주기와 맞물려 거듭되는 파동에서 당신만큼은 안전할 것입니다.”
[인터뷰] 李相培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
“修身부터 하라”
이상배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은 ‘찔러도 피가 안 나올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깐깐한 정통관료로 통한다. 그런 그가 국회의원을 세 번 역임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그 바탕에는 31년 공직생활에 대한 자부심도 깔려 있다.이 위원장은 1961년 고등고시(행정과)에 합격, 27세에 군수(경북 울진)로 공직을 시작해 32세에 안동시장을 했고, 이후 경북도지사, 내무부 차관, 청와대 행정수석 비서관, 환경청장, 총무처 장관, 서울시장을 거쳤다.
“31년의 공직생활 동안 휴일 한 번, 휴가 한 번 제대로 가져 보지 못하고 청춘과 장년기를 일 속에 묻어 왔어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과 당위성으로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그의 공직 신조도 ‘일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일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일에 대한 집념 탓에 가족을 제대로 챙길 수 없었다고 한다. 일의 기준이 엄격해 부하 직원을 늘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세월이 지나 생각해 보면, 모두에게 미안하다”면서 “그래도 공직에 열정을 쏟아 행복했다”고 말했다.
“공직자윤리위원장이 되어 관료들의 재산신고 내용을 살펴보니 은행통장이 30~40개나 되는 이가 나오더군요. 자기가 깨끗하고 염치가 있어야 ‘치국(治國)’도 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하고 ‘수신(修身)’을 해야 부정한 문제나 비리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관료로 성공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관료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테크노크라트입니다. 자신의 축적된 노하우를 토대로 현장 중심으로 일해야 합니다. 정책의 집행과정을 하나하나 현장 위주로 확인·검증해야 합니다. 신문에 시책 하나 던져 놓고 나몰라라 해선 곤란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관료를 어떻게 이끌어야 합니까.
“일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못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면 됩니다. 그것이 거꾸로 되면 조직이 무너집니다. 박정희 정부에서 노태우 정부까지 일만 열심히 하면 장관이 될 수 있었지만, 이후 관료조직이 정치의 영향을 받게 됐어요. 5년마다 정권이 바뀌니 자리보장도 어렵게 됐고요. 앞뒤 가리지 않고 일하게 하기 위해선 신상필벌(信賞必罰)만 한 게 없습니다. 중국 한비자(韓非子)도 ‘임금에게 주어진 것은 상을 주거나 벌을 주거나 두 가지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악역을 맡겠다는 이도 없고, 적당히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무사안일 주의가 공직사회에 독버섯처럼 생겼어요.”
이 위원장은 “공무원에게 2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해 가는 이, 다른 하나는 장애물을 걷어내고 전진하는 이”라며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위원회만 여러 개 만들어 시간 끄는 이가 대표적인 미꾸라지 공무원”이라고 했다.
“저는 3공화국이 6공화국으로 바뀌어도 그저 관료로 살았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되는 과정도 보통사람들처럼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전해 들었을 뿐이지, 저와 정권이 직접 연결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고 있으면 큰 과오가 없는 한 직책이나 직위가 올라갈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관료들을 일하게 만드는 지름길입니다.”
이 위원장은 조선 중종(中宗·재위 1506~1544) 때의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가장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꼽았다.
“조광조는 조선조 초기까지 높이 평가되던 사장(詞章)문화, 즉 문학 위주의 공허한 선비사회의 기풍을 걷어 내고, 당시로서는 실천철학이라 할 수 있는 도학(道學)사상을 주장했어요. 그의 정치이념 역시 맑고 깨끗한 도학정치의 구현이었지요. 초야의 깨끗한 인사를 발탁하기 위해 현량과라는 파격적인 과거제도를 도입했고 이들을 통해 국가의 기강을 철저히 바로잡았어요. 개국공신의 후손이라 자부하던 보수 공신파들의 기득권도 인정하지 않았죠. 그것이 자신이 모시던 중종 임금을 위해 가장 바른 길이라 여겼어요. 비록 기득권파에 의해 모함을 받아 38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말았지만 자신의 명예가 아닌, 나라를 위해 일하고 희생한 정신을 후배 관료들이 배워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