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한국 창조·제2건국·정부혁신’ 등 국민과 공무원을 계몽하려는 구호에 그쳐
⊙ 콘텐츠 없이 변화와 개혁 구호만 내건 것은 결국 집권자의 자아도취로 끝맺어
⊙ 창조경제는 민간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토대로 서로 소통하고 융합해야… 官주도가 되면 헛방이다!
⊙ 콘텐츠 없이 변화와 개혁 구호만 내건 것은 결국 집권자의 자아도취로 끝맺어
⊙ 창조경제는 민간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토대로 서로 소통하고 융합해야… 官주도가 되면 헛방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3월 12일 취임 이후 첫 창조경제 현장방문지로 서울 강남구 서초동에 위치한 IT 벤처기업 알티캐스트를 찾아 스마트 셋톱박스 실연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집권화두로 ‘창조경제’라는 정책적 실천담론을 꺼내 들었다. 박 대통령이 내건 창조경제의 깃발이 ‘감동의 상징’이 될지, ‘위험한 물건’이 될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 박 대통령에 대한 각 부처의 업무보고를 보면 곳곳에 ‘창조’라는 단어를 접두사로 붙여 놓았다. 그렇지만 뒷전에서는 “창조경제가 뭐야”라는 수군거림이 한창이다. 노무현 정부 때 ‘혁신’이란 구호가 등장하고 각종 ‘학습’이 횡행할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박 대통령 스스로 창조경제의 의미를 설명하고 장관, 대통령 수석비서관들이 그 뜻을 설명하려 하지만 아직도 와 닿는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는 ‘창조경제’의 앞날도 현재로선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역대 대통령치고 무언가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를 말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공무원과 민간단체를 동원하고 막대한 예산을 쏟았지만 대개는 국민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고 정권이 바뀌기가 무섭게, 또는 정권이 바뀌기도 전에 잊혔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신한국 창조’,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제2건국’,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정부혁신 운동’,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의 ‘녹색성장’ ‘공정한 사회’가 대표적이다. 국민과 공무원을 계몽(啓蒙) 대상으로 여기고 “나를 따르라”는 식이거나 콘텐츠를 채워 놓지 못한 탓이다.
박 대통령이 ‘창조경제’ 화두를 꺼내 들기 전, 역대 대통령의 정책 메시지가 왜 구호에 그쳤는지 실패연구를 했을까. 변화와 개혁을 내건 과잉구호는 결국 집권자의 자아도취로 끝을 맺었다는 역대 대통령의 교훈을 되새겼을까.
사실, 독재국가가 아닌 이상 상명하복(上命下服)식 대통령의 국정 메시지는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기가 매우 어렵다. 대통령의 정책 메시지가 권위적이거나 국민과 소통하지 못한 일방적 구호가 되면 오히려 그 메시지는 전달만 될 뿐 되돌아오지 못하는 ‘죽은 언어’가 되고, 결국 국론분열의 원인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신한국 창조’ ‘제2건국’ ‘정부혁신 운동’ ‘녹색성장’ ‘공정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랬다.
이런 ‘거대 구호’를 휘두른 대통령과 그 참모들의 욕망이 여러 정권을 거치며 버텨 온 관료들을 설득시킨 예가 없었고, 보여주기식 졸속·전시행정으로 예산만 까먹다가 쓸쓸히 퇴장했던 것이다. 또 피상적인 여론에 가려진 다수의 바닥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국민 역시 대통령의 정책 메시지를 순진하게 체화(體化)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결국 역대 대통령의 정책 구호들은 국민들과 관료들에게 ‘위험한 물건’이 되었다.
추상적 구호는 구호에 그칠 뿐 국민 공감 얻지 못해
사실 박 대통령이 내건 창조경제의 ‘창조’는 김영삼 대통령(YS)이 먼저 쓴 용어다. YS의 국정 슬로건이었던 ‘신한국 창조’를 두고 하는 말이다. YS는 재임시절, ‘한국병(病)’의 상대개념으로 ‘신한국 창조’ 혹은 ‘신한국 건설’이란 말을 자주 썼다.
그가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민주자유당을 해체하고 만든 정당도 신한국당이다. YS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신한국당(1996년 2월 창당, 1997년 11월 해체)은 역대 정부여당 중 가장 지리멸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신한국’의 작명(作名)이 여론의 정반대편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YS는 예산을 들여 매년 전국민을 상대로 ‘신한국인’을 선발하며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도대체 ‘신한국인’이 누구인지, 누구를 닮아야 ‘신한국인’이 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5·6공 핵심인사의 단죄와 군부(軍部)의 정치개입 단절을 통한 권력구조의 재편을 겨냥한 것이 ‘신한국 창조’의 본심이라면 근본적으로 국민운동과는 무관한 것이다.
YS 시절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역임했던 김충남(金忠男)씨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 출신 대통령 세 사람은 참모제도를 활용해 조직을 관리하고 정책과제에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훈련이 돼 있었어요. YS는 ‘신한국 창조’라는 너무나 크고 추상적인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이제 구체적 정책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경험이 없는 엉성한 사람들이 모여서 신한국을 5년 만에 만들 수가 없거든요. 조직이 엉성한 것도 엉성한 것이지만, 할 수 없는 일을 정책과제로 내세운 게 문제입니다.”
‘제2건국 선언’을 내건 김대중 대통령(DJ)도 YS 못지않았다. DJ는 ‘국민의 정부’라는 네이밍보다 ‘제2건국’이란 표현에 늘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제2건국을 위해 관변단체와 시민단체를 동원한 ‘제2건국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존 새마을운동본부를 빼닮은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다. 언론에서는 “굳이 제2건국을 만들겠다면 ‘각오’ 정도면 되지 ‘선언’까지 하는 것은 과잉”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7선(選)을 지낸 이철승(李哲承)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은 “신한국 창조와 제2건국이란 슬로건은 건국(建國)과 제1~6공화국을 부정하는 ‘다른 건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 큰 오해를 낳았다”며 “굳이 국난극복을 위해서였다면 ‘국가재건’과 ‘제2도약’이란 말이 더 어울렸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DJ의 제2건국 선언 주요 내용에는 민주주의·시장경제·세계주의·지방분권·지식산업 중심·안보와 화해의 남북정책 등 6가지 국정과제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들은 시대흐름이나 정치인의 수사(修辭) 속에 이전부터 들어 있었던 것이어서 전혀 새롭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MB)의 ‘(저탄소) 녹색성장’은 이념이 아닌 환경문제에 접근한 새로운 방향제시 메시지였으나 4대강 정비, 나아가 대운하 건설의 속셈을 담고 있다는 의심 때문에 임기 내내 야당의 협조를 못 얻었고 결국 MB 정부가 끝나자마자 ‘녹색’은 퇴출대상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하자 일각에서는 ‘녹색성장’이란 방향은 좋았는데 너무 내용이 없어 아쉽다는 평가가 나왔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환경부는 녹색환경정책관 등 ‘녹색’이 들어간 3곳의 국·과 명칭에서 모두 ‘녹색’이란 단어를 걷어냈다. 녹색환경정책관은 환경정책관, 녹색기술경제과는 환경기술경제과, 녹색협력과는 환경협력과가 됐다.
제도·조직·입법화의 과정은 필수, 그러나…
대통령의 정책의지에 힘이 실리기 위해서는 제도화, 조직화, 입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YS는 대선후보 시절, ‘신한국 창조’를 위해 가칭 신한국건설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인수위 시절, 신한국건설위를 구성치 않기로 했다. 대신 당 공식기구에서 학계·정계의 자문을 거쳐 신한국 건설을 위한 정책기조를 마련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뤄졌다.
김충남 전 청와대 비서관은 “대통령이 도덕·명분·추상으로 (정책의제를) 만들면 공무원 조직과 괴리된다. 게다가 청와대가 공무원을 개혁대상으로 삼으면 공무원이 움츠려서 일을 안 한다. 개혁을 내세웠다면 개혁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실천수단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DJ는 ‘제2건국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와 시민단체의 연대라는 사상 초유의 민관(民官)공동체에 의한 정치개혁을 구상했다. 관료들에게 개혁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신 새마을운동본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를 개편하고 기존 한국자유총연맹를 포함한 보수 관변단체까지 ‘제2건국’ 작업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56개 단체의 모임인 한국시민단체협의회가 반발하고 나섰다. 이유는 ‘정부가 제2의 건국운동이란 명분에 시민사회를 직접 조직하겠다는 발상은 제2의 관변운동을 낳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동아일보》 1998년 10월 31일자 참조) 제2건국 운동이라는 울타리 안에 모든 시민단체를 총망라한 발상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YS와 DJ의 실패를 지켜본 노무현 대통령은 민간단체를 제외하고 관료 주도로 ‘정부혁신 운동’을 폈다. 부처별로 ‘혁신 예산’을 편성하고 행정자치부 정부혁신본부를 중심으로 각 부처에 혁신관리 전담조직을 설치, 혁신 추진체계를 갖추었고 정부혁신지방분권위·정부혁신관리위·정부혁신평가단·정부혁신컨설팅단·정부혁신브랜드위 등의 기구를 수도 없이 만들었다.
나름 제도화·조직화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러나 관료를 동원한 혁신은 오래가지 못했다. 관료들도 혁신 아이디어를 낸다며 과거 서랍속에 있던 행정개혁 아이디어를 재포장했다. 심지어 ‘화장실 깨끗이 쓰기’ 등과 같은 전근대적 제안들까지 동원되면서 희화화되고 말았다.
노 대통령은 계속된 언론의 비판에 “억장이 무너진다”며 전 공무원에게 혁신을 독려하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다음은 이메일 내용 중 일부.
<… 이만한 기사에 마음 흔들릴 일 없지만 열심히 혁신활동을 하고 있는 공무원 여러분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회의를 갖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돼 이 편지를 씁니다. … 과수원에 사과 몇 알 상한 것이 있다고 ‘이 과수원 사과는 다 상했다’, ‘사과농사는 다 망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2005년 3월 3일자 이메일)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혁신이란 말은 금기어(禁忌語)가 됐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도 혁신을 체감했다는 미담(美談)이 사라진 것은 대한민국의 불행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관주도를 견지하되 입법화를 통해 정책 메시지를 구체화시켰다. 이 대통령은 2008년 8·15광복절 경축사에서 ‘저탄소 녹색성장’이란 거대 정책구상 메시지를 발표한 뒤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을 정부안으로 국회에 제출, 처리했다. 이듬해 1월 정부는 ‘녹색뉴딜’을 발표하고 녹색성장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공식 출범시켰다. 녹색뉴딜사업은 향후 4년간 총 50조원을 투자해 95만6000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골자다. 그런데 4대강 살리기 예산은 전체 50조원 예산 중 14조5000억원으로 가장 많은 예산을 차지했고 4대강과 관련이 깊은 우수(雨水)유출시설, 중소댐 건설 예산까지 합치면 예산의 35%가 4대강 살리기에 집중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치적 의도를 담고 제도화·입법화를 가장한 정책 메시지는 이명박 정부 내내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었고 정권이 바뀌자마자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국토교통부 내에 설치됐던 4대강사업추진본부도 폐지되었다.
국민·관료와 소통·토론하라
대통령의 정책 메시지는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국민적 관심을 끌어내야 한다.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이지호 교수팀은 지난 1월 정부에 제출한 <대통령 정책메시지의 성패요인 연구> 용역보고서에서 ‘국민이 관심을 갖고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정책적 행보를 하도록 여론조사, 포커스 그룹 인터뷰, 시민집단 토론회를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 교수는 “선거공약이 집권 이후에 국민들이 크게 선호하지 않을 수 있다. 유권자들이 공약 대신 인물에 좌우되어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표적인 예가 4대강 살리기 사업이다. 선거 표심은 이명박 후보 개인이지 4대강 사업 지지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 지지는 집권 내내 60% 이상의 반대가 지속됐다. 4대강 사업에 대한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공약사항이었더라도 정부는 여론을 살피면서 사업을 결정하고 집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제2건국’ ‘신한국 창조’ ‘정부혁신 운동’도 소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2건국준비위원으로 참여했던 김진홍(金鎭洪) 목사의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가 성공하려면 소통이 먼저입니다. 참여와 토론이 일상화돼야 국가기초가 튼튼해져요. 토론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과거 DJ 정부 때 제2건국추진위원으로 위촉됐는데 첫 모임부터 실망했어요. 각계인사 150명을 모아 놓고 DJ의 연설을 듣고 밥이나 먹고 가라더군요. 저는 ‘이게 무슨 국민운동인가. 우리가 무슨 대통령 강의 들으러 왔나. 국민운동을 하려면 토론을 해야 한다’고 항의했더니 청와대 비서들이 저를 제지하는 겁니다. 그 뒤로 이 모임에 참여하지도 않았어요.”
이 교수는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는 광범위하게 성장했고, 대중들의 소비욕구와 수입형태, 계층적 특징 또한 대단히 다양해졌다”며 “대통령의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국민적 요구와 욕망에 대한 성실한 답변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료들과의 소통도 중요하다. 대통령의 메시지가 제도화·정책화·입법화 과정을 거치려면 관료들과의 협업(協業)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정부혁신 운동’은 공무원을 혁신의 대상으로 삼아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나섰지만 마음을 얻진 못했다.
안전행정부 전직 차관 K씨는 “공무원을 개혁의 동반자로 삼지 않고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실패했다”며 “겉으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지만 진짜 겉모습뿐이었다. 관료들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통령 주변부터 돌아보라
아무리 메시지가 좋아도, 대통령 주변이 그릇되면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역대 대통령의 정책 메시지가 불발에 그친 것도 정권 핵심인사들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YS는 집권 후 단 한 푼의 돈을 받지 않겠다며 ‘신한국 창조’의 일환으로 ‘윗물맑기 운동’을 폈지만 한보사태는 가신(家臣)정치, 측근정치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DJ와 노무현 대통령 역시 임기 내내 측근과 친인척의 비리 연루로 ‘제2건국운동’과 ‘정부혁신’이 자체 동력을 얻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사회’ 화두도 마찬가지였다. 공정사회는 2010년 8·15 경축사에서 제시됐다. 이 대통령은 관련 부처별로 공정사회 실천을 위한 추진방향에 맞게 조직질서를 강화하거나 관련 법을 제정하려 노력했지만 독자적인 기구를 통해 추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정’의 개념 자체가 워낙 다의적(多義的)인 데다 이상득(李相得)·최시중(崔時仲)·천신일(千信一)씨 등 대통령 주변의 불공정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대통령이나 공정하게 일처리를 하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한신대 윤평중(尹平重) 교수는 조선뉴스프레스가 펴낸 《공정과 정의사회》를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 돌이켜보면 201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맨 처음 던진 공정한 사회의 화두는 특정 정권의 정치공학적 계산이 개입한 단순한 수사(修辭)였을 수도 있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공정하지 못한 정부와 대통령이 앞장서 공정성을 외치는 데’ 대한 냉소와 거부감을 감추지 않았다. ‘공정한 사회’ 레토릭은 말과 행동이 다른, 공허한 일과성의 정치 캠페인으로 자연 소멸될 가능성이 컸다. …>
공교롭게도 2010년 광복절 경축사 직후인 8월말부터 9월초에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총리와 장관후보자의 불공정 이력과 당시 외교부장관 딸의 특채 사실이 폭로됐다. 윤 교수는 기자에게 “이른바 ‘고소영, 강부자 정권’의 거듭된 인사 실패와 특채 파동에 분노한 시민들이 정부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그게 과연 공정한 처사인가를 묻는 형국이 전개됐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으로 활동한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宋虎根) 교수는 “무엇보다 정부 요직에 등용된 인사들이 대체로 재력가였다는 사실이 공정사회에 대한 거부감을 촉발하기에 충분했고, 그들이 또한 한국사회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기준들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불쾌감을 자아냈다”고 했다.
“병력미필, 위장전입, 재산증식의 불법성 같이 서민들에게 민감한 사안들이 속속 드러났고, 부동산 투기 이력들이 세간에 공개되자 ‘중도실용’은 좌편향적 정책을 수정하는 정당한 노선이 아니라 불법성을 합리화하고 봉합하는 임시적·타협적 술수 정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래비전연구소 장현규 소장의 창조경제 정의
기자는 《역사를 만드는 리더십》의 저자인 미래비전연구소 장현규(張賢圭) 소장을 만나 창조경제의 의미와 실현방법을 물어보았다. 그는 한국일보 기자와 UC 버클리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Research Associate), 문화체육관광부 홍보정책관을 거쳤다.
창조경제론은 이미 1990년대 유럽 등 선진국에서 시작된 담론이다. 창조경제의 시조로 불리는 영국의 존 호킨스(Howkins) 교수가 《창조경제(The Creative Economy)》를 출간할 당시의 영국 상황을 보면 이해가 쉬울지 모른다. 장 소장은 “당시 영국은 영화·음악·패션·디자인 같은 문화창조 산업을 새로운 발전전략으로 삼았다”며 “<해리 포터> 같은 문학작품이 책으로, 영화로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영국 뮤지컬들이 영화화해 전 세계로 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문화부와 비슷한 영국 정부의 DCMS(Department of Culture, Media and Sport)는 창조경제의 비전을 ‘개인의 창조성·스킬·재능 등에 기반한 산업 내지 지적재산권의 창출과 이용을 통해 부와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산업’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또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도 2008년부터 각국의 창조산업 동향과 경쟁력을 담은 자료를 발간하고 있지요. UNCTAD는 창조경제의 상징성에 대해 ‘경제를 성장 발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창조적 자산 혹은 그에 기반한 산업, 지적 자본을 사용하는 재화 및 서비스의 창출과 생산 및 분배의 전 과정’으로 정리하고 있어요.”
장 소장은 “1990년대 선진국의 싱크탱크 등에서 창조사회 관련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유럽에서 생산성을 높이거나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는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차원에서 창조경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선 낯설지만 20년 전 이미 선진국에서 꽃을 피웠던 개념이란 얘기다.
—창조경제의 기본적인 특성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창조경제의 핵심개념은 아이디어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제는 주로 토지·대량고용·자본 등을 기반으로 발전해 왔지요. 이런 것들은 창조경제에서도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하지만 창조경제에서는 토지·대량고용·자본보다 아이디어에 주안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선 개개인이 자신의 분야에서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조적 열정이 사업으로 연결되는 창조적 생태계가 눈앞에 펼쳐지도록 해야 합니다.”
—경제현장에서는 어떤 변화를 생각할 수 있나요.
“네트워크와 융합의 가치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창조경제의 핵심은 소유보다 연결, 즉 네트워크에 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창조경제 시대의 네트워크는 거미줄처럼 연결된 상호의존의 관계망을 통해 이뤄집니다. 사회관계망을 통해 제품이나 서비스가 창조되고 가치가 확장되는 것이죠. ‘융합’이라는 가치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이 필요합니다. 융합은 산업과 기술의 인위적 구분이 모호해지고 이들 간에 새로운 형태의 융합 상품과 서비스들이 등장하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미 경제현장에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콘텐츠와 콘텐츠,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결합 등 다양한 융합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조경제엔 권력보다 감성과 창의성이 중요
—창조경제가 순항하려면 어디에 주목해야 할까요.
“시너지 효과를 담보할 수 없는 근시안적인 정책을 펴면 효과도 적을뿐더러 정책집행의 효율성이 저하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과거 정부에서 새로운 국정비전이 제시되면 기존 업무에 이름만 빌리는 ‘무늬만 변화’가 많았던 경험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가급적 빨리 창조경제의 총론과 각론에 대한 정리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합니다.”
장 소장은 “지금 세계는 제조업의 전형적인 가치사슬(value chain)이 변화하고 있다”며 “연구개발(R&D)-제조-마케팅-서비스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비슷하지만, 단계별 경중(輕重)이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가령, 예전에는 자본력과 낮은 인건비로 원가를 절감했던 제조단계가 이익창출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지만, 이제는 R&D와 마케팅·서비스가 더 중요해졌어요. 어떻게 보면 창조경제론은 이런 가치사슬의 변화에 부합하는 미래성장전략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요. 창조경제의 핵심은 ‘새로운 발상’과 인문적 상상력 그리고 ‘사고의 전환’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너무 조급하게 성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국가 차원에서 10~20년을 내다보고 추진해야 해요.”
—창조경제의 성공을 위한 리더와 국민들의 자세는 어때야 하나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은 한국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스타일의 창조경제는 새로운 희망의 좌표가 될 수도 있어요. 관료주의적 타성으로는 창조경제의 알찬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창조경제의 콘텐츠와 실행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한 그야말로 ‘창조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창조경제를 꽃피울 기업과 국민의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고, 시행착오와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관 주도로는 안 된다는 말이네요.
“창조경제는 민간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토대로 서로 소통하고 융합할 때 가능한 만큼 관 주도의 일방통행식 발상은 경계해야 합니다. 비전으로 시작해 성과와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 리더십입니다. 창조의 힘은 부드러움과 유연성에서 나오고, 단편적인 지식과 이분법적인 사고는 창조의 적(敵)이라고 할 수 있어요. 21세기는 물리적 힘이나 논리보다 감성과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박 대통령 스스로 창조경제의 의미를 설명하고 장관, 대통령 수석비서관들이 그 뜻을 설명하려 하지만 아직도 와 닿는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는 ‘창조경제’의 앞날도 현재로선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역대 대통령치고 무언가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를 말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공무원과 민간단체를 동원하고 막대한 예산을 쏟았지만 대개는 국민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고 정권이 바뀌기가 무섭게, 또는 정권이 바뀌기도 전에 잊혔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신한국 창조’,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제2건국’,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정부혁신 운동’,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의 ‘녹색성장’ ‘공정한 사회’가 대표적이다. 국민과 공무원을 계몽(啓蒙) 대상으로 여기고 “나를 따르라”는 식이거나 콘텐츠를 채워 놓지 못한 탓이다.
박 대통령이 ‘창조경제’ 화두를 꺼내 들기 전, 역대 대통령의 정책 메시지가 왜 구호에 그쳤는지 실패연구를 했을까. 변화와 개혁을 내건 과잉구호는 결국 집권자의 자아도취로 끝을 맺었다는 역대 대통령의 교훈을 되새겼을까.
사실, 독재국가가 아닌 이상 상명하복(上命下服)식 대통령의 국정 메시지는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기가 매우 어렵다. 대통령의 정책 메시지가 권위적이거나 국민과 소통하지 못한 일방적 구호가 되면 오히려 그 메시지는 전달만 될 뿐 되돌아오지 못하는 ‘죽은 언어’가 되고, 결국 국론분열의 원인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신한국 창조’ ‘제2건국’ ‘정부혁신 운동’ ‘녹색성장’ ‘공정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랬다.
이런 ‘거대 구호’를 휘두른 대통령과 그 참모들의 욕망이 여러 정권을 거치며 버텨 온 관료들을 설득시킨 예가 없었고, 보여주기식 졸속·전시행정으로 예산만 까먹다가 쓸쓸히 퇴장했던 것이다. 또 피상적인 여론에 가려진 다수의 바닥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국민 역시 대통령의 정책 메시지를 순진하게 체화(體化)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결국 역대 대통령의 정책 구호들은 국민들과 관료들에게 ‘위험한 물건’이 되었다.
추상적 구호는 구호에 그칠 뿐 국민 공감 얻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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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국 창조’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김영삼 대통령이 창당한 신한국당 전국위 모습. 1996년 5월 7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당기(黨旗) 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
그가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민주자유당을 해체하고 만든 정당도 신한국당이다. YS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신한국당(1996년 2월 창당, 1997년 11월 해체)은 역대 정부여당 중 가장 지리멸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신한국’의 작명(作名)이 여론의 정반대편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YS는 예산을 들여 매년 전국민을 상대로 ‘신한국인’을 선발하며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도대체 ‘신한국인’이 누구인지, 누구를 닮아야 ‘신한국인’이 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5·6공 핵심인사의 단죄와 군부(軍部)의 정치개입 단절을 통한 권력구조의 재편을 겨냥한 것이 ‘신한국 창조’의 본심이라면 근본적으로 국민운동과는 무관한 것이다.
YS 시절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역임했던 김충남(金忠男)씨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 출신 대통령 세 사람은 참모제도를 활용해 조직을 관리하고 정책과제에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훈련이 돼 있었어요. YS는 ‘신한국 창조’라는 너무나 크고 추상적인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이제 구체적 정책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경험이 없는 엉성한 사람들이 모여서 신한국을 5년 만에 만들 수가 없거든요. 조직이 엉성한 것도 엉성한 것이지만, 할 수 없는 일을 정책과제로 내세운 게 문제입니다.”
‘제2건국 선언’을 내건 김대중 대통령(DJ)도 YS 못지않았다. DJ는 ‘국민의 정부’라는 네이밍보다 ‘제2건국’이란 표현에 늘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제2건국을 위해 관변단체와 시민단체를 동원한 ‘제2건국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존 새마을운동본부를 빼닮은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다. 언론에서는 “굳이 제2건국을 만들겠다면 ‘각오’ 정도면 되지 ‘선언’까지 하는 것은 과잉”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7선(選)을 지낸 이철승(李哲承)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은 “신한국 창조와 제2건국이란 슬로건은 건국(建國)과 제1~6공화국을 부정하는 ‘다른 건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 큰 오해를 낳았다”며 “굳이 국난극복을 위해서였다면 ‘국가재건’과 ‘제2도약’이란 말이 더 어울렸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DJ의 제2건국 선언 주요 내용에는 민주주의·시장경제·세계주의·지방분권·지식산업 중심·안보와 화해의 남북정책 등 6가지 국정과제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들은 시대흐름이나 정치인의 수사(修辭) 속에 이전부터 들어 있었던 것이어서 전혀 새롭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MB)의 ‘(저탄소) 녹색성장’은 이념이 아닌 환경문제에 접근한 새로운 방향제시 메시지였으나 4대강 정비, 나아가 대운하 건설의 속셈을 담고 있다는 의심 때문에 임기 내내 야당의 협조를 못 얻었고 결국 MB 정부가 끝나자마자 ‘녹색’은 퇴출대상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하자 일각에서는 ‘녹색성장’이란 방향은 좋았는데 너무 내용이 없어 아쉽다는 평가가 나왔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환경부는 녹색환경정책관 등 ‘녹색’이 들어간 3곳의 국·과 명칭에서 모두 ‘녹색’이란 단어를 걷어냈다. 녹색환경정책관은 환경정책관, 녹색기술경제과는 환경기술경제과, 녹색협력과는 환경협력과가 됐다.
제도·조직·입법화의 과정은 필수,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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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대통령이 주도한 ‘제2건국 운동’도 공허한 울림으로 끝이 났다. 1999년 2월 3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2의 건국 한마음대회’ 모습이다. |
김충남 전 청와대 비서관은 “대통령이 도덕·명분·추상으로 (정책의제를) 만들면 공무원 조직과 괴리된다. 게다가 청와대가 공무원을 개혁대상으로 삼으면 공무원이 움츠려서 일을 안 한다. 개혁을 내세웠다면 개혁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실천수단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DJ는 ‘제2건국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와 시민단체의 연대라는 사상 초유의 민관(民官)공동체에 의한 정치개혁을 구상했다. 관료들에게 개혁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신 새마을운동본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를 개편하고 기존 한국자유총연맹를 포함한 보수 관변단체까지 ‘제2건국’ 작업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56개 단체의 모임인 한국시민단체협의회가 반발하고 나섰다. 이유는 ‘정부가 제2의 건국운동이란 명분에 시민사회를 직접 조직하겠다는 발상은 제2의 관변운동을 낳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동아일보》 1998년 10월 31일자 참조) 제2건국 운동이라는 울타리 안에 모든 시민단체를 총망라한 발상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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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은 공무원을 개혁의 동반자로 보지 않고 대상으로 삼았다. 2007년 10월 26일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열린 장·차관 정부혁신토론회에 참석한 노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나름 제도화·조직화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러나 관료를 동원한 혁신은 오래가지 못했다. 관료들도 혁신 아이디어를 낸다며 과거 서랍속에 있던 행정개혁 아이디어를 재포장했다. 심지어 ‘화장실 깨끗이 쓰기’ 등과 같은 전근대적 제안들까지 동원되면서 희화화되고 말았다.
노 대통령은 계속된 언론의 비판에 “억장이 무너진다”며 전 공무원에게 혁신을 독려하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다음은 이메일 내용 중 일부.
<… 이만한 기사에 마음 흔들릴 일 없지만 열심히 혁신활동을 하고 있는 공무원 여러분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회의를 갖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돼 이 편지를 씁니다. … 과수원에 사과 몇 알 상한 것이 있다고 ‘이 과수원 사과는 다 상했다’, ‘사과농사는 다 망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2005년 3월 3일자 이메일)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혁신이란 말은 금기어(禁忌語)가 됐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도 혁신을 체감했다는 미담(美談)이 사라진 것은 대한민국의 불행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관주도를 견지하되 입법화를 통해 정책 메시지를 구체화시켰다. 이 대통령은 2008년 8·15광복절 경축사에서 ‘저탄소 녹색성장’이란 거대 정책구상 메시지를 발표한 뒤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을 정부안으로 국회에 제출, 처리했다. 이듬해 1월 정부는 ‘녹색뉴딜’을 발표하고 녹색성장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공식 출범시켰다. 녹색뉴딜사업은 향후 4년간 총 50조원을 투자해 95만6000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골자다. 그런데 4대강 살리기 예산은 전체 50조원 예산 중 14조5000억원으로 가장 많은 예산을 차지했고 4대강과 관련이 깊은 우수(雨水)유출시설, 중소댐 건설 예산까지 합치면 예산의 35%가 4대강 살리기에 집중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치적 의도를 담고 제도화·입법화를 가장한 정책 메시지는 이명박 정부 내내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었고 정권이 바뀌자마자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국토교통부 내에 설치됐던 4대강사업추진본부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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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2월 16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1차 녹색성장위원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녹색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국민·관료와 소통·토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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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대선후보 시절, 박근혜 후보가 작년 10월 18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창조경제 정책발표를 하고 있다. |
이 교수는 “선거공약이 집권 이후에 국민들이 크게 선호하지 않을 수 있다. 유권자들이 공약 대신 인물에 좌우되어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표적인 예가 4대강 살리기 사업이다. 선거 표심은 이명박 후보 개인이지 4대강 사업 지지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 지지는 집권 내내 60% 이상의 반대가 지속됐다. 4대강 사업에 대한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공약사항이었더라도 정부는 여론을 살피면서 사업을 결정하고 집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제2건국’ ‘신한국 창조’ ‘정부혁신 운동’도 소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2건국준비위원으로 참여했던 김진홍(金鎭洪) 목사의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가 성공하려면 소통이 먼저입니다. 참여와 토론이 일상화돼야 국가기초가 튼튼해져요. 토론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과거 DJ 정부 때 제2건국추진위원으로 위촉됐는데 첫 모임부터 실망했어요. 각계인사 150명을 모아 놓고 DJ의 연설을 듣고 밥이나 먹고 가라더군요. 저는 ‘이게 무슨 국민운동인가. 우리가 무슨 대통령 강의 들으러 왔나. 국민운동을 하려면 토론을 해야 한다’고 항의했더니 청와대 비서들이 저를 제지하는 겁니다. 그 뒤로 이 모임에 참여하지도 않았어요.”
이 교수는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는 광범위하게 성장했고, 대중들의 소비욕구와 수입형태, 계층적 특징 또한 대단히 다양해졌다”며 “대통령의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국민적 요구와 욕망에 대한 성실한 답변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료들과의 소통도 중요하다. 대통령의 메시지가 제도화·정책화·입법화 과정을 거치려면 관료들과의 협업(協業)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정부혁신 운동’은 공무원을 혁신의 대상으로 삼아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나섰지만 마음을 얻진 못했다.
안전행정부 전직 차관 K씨는 “공무원을 개혁의 동반자로 삼지 않고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실패했다”며 “겉으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지만 진짜 겉모습뿐이었다. 관료들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통령 주변부터 돌아보라
아무리 메시지가 좋아도, 대통령 주변이 그릇되면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역대 대통령의 정책 메시지가 불발에 그친 것도 정권 핵심인사들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YS는 집권 후 단 한 푼의 돈을 받지 않겠다며 ‘신한국 창조’의 일환으로 ‘윗물맑기 운동’을 폈지만 한보사태는 가신(家臣)정치, 측근정치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DJ와 노무현 대통령 역시 임기 내내 측근과 친인척의 비리 연루로 ‘제2건국운동’과 ‘정부혁신’이 자체 동력을 얻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사회’ 화두도 마찬가지였다. 공정사회는 2010년 8·15 경축사에서 제시됐다. 이 대통령은 관련 부처별로 공정사회 실천을 위한 추진방향에 맞게 조직질서를 강화하거나 관련 법을 제정하려 노력했지만 독자적인 기구를 통해 추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정’의 개념 자체가 워낙 다의적(多義的)인 데다 이상득(李相得)·최시중(崔時仲)·천신일(千信一)씨 등 대통령 주변의 불공정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대통령이나 공정하게 일처리를 하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한신대 윤평중(尹平重) 교수는 조선뉴스프레스가 펴낸 《공정과 정의사회》를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 돌이켜보면 201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맨 처음 던진 공정한 사회의 화두는 특정 정권의 정치공학적 계산이 개입한 단순한 수사(修辭)였을 수도 있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공정하지 못한 정부와 대통령이 앞장서 공정성을 외치는 데’ 대한 냉소와 거부감을 감추지 않았다. ‘공정한 사회’ 레토릭은 말과 행동이 다른, 공허한 일과성의 정치 캠페인으로 자연 소멸될 가능성이 컸다. …>
공교롭게도 2010년 광복절 경축사 직후인 8월말부터 9월초에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총리와 장관후보자의 불공정 이력과 당시 외교부장관 딸의 특채 사실이 폭로됐다. 윤 교수는 기자에게 “이른바 ‘고소영, 강부자 정권’의 거듭된 인사 실패와 특채 파동에 분노한 시민들이 정부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그게 과연 공정한 처사인가를 묻는 형국이 전개됐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으로 활동한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宋虎根) 교수는 “무엇보다 정부 요직에 등용된 인사들이 대체로 재력가였다는 사실이 공정사회에 대한 거부감을 촉발하기에 충분했고, 그들이 또한 한국사회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기준들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불쾌감을 자아냈다”고 했다.
“병력미필, 위장전입, 재산증식의 불법성 같이 서민들에게 민감한 사안들이 속속 드러났고, 부동산 투기 이력들이 세간에 공개되자 ‘중도실용’은 좌편향적 정책을 수정하는 정당한 노선이 아니라 불법성을 합리화하고 봉합하는 임시적·타협적 술수 정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래비전연구소 장현규 소장의 창조경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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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현규 미래비전연구소장 |
창조경제론은 이미 1990년대 유럽 등 선진국에서 시작된 담론이다. 창조경제의 시조로 불리는 영국의 존 호킨스(Howkins) 교수가 《창조경제(The Creative Economy)》를 출간할 당시의 영국 상황을 보면 이해가 쉬울지 모른다. 장 소장은 “당시 영국은 영화·음악·패션·디자인 같은 문화창조 산업을 새로운 발전전략으로 삼았다”며 “<해리 포터> 같은 문학작품이 책으로, 영화로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영국 뮤지컬들이 영화화해 전 세계로 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문화부와 비슷한 영국 정부의 DCMS(Department of Culture, Media and Sport)는 창조경제의 비전을 ‘개인의 창조성·스킬·재능 등에 기반한 산업 내지 지적재산권의 창출과 이용을 통해 부와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산업’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또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도 2008년부터 각국의 창조산업 동향과 경쟁력을 담은 자료를 발간하고 있지요. UNCTAD는 창조경제의 상징성에 대해 ‘경제를 성장 발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창조적 자산 혹은 그에 기반한 산업, 지적 자본을 사용하는 재화 및 서비스의 창출과 생산 및 분배의 전 과정’으로 정리하고 있어요.”
장 소장은 “1990년대 선진국의 싱크탱크 등에서 창조사회 관련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유럽에서 생산성을 높이거나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는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차원에서 창조경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선 낯설지만 20년 전 이미 선진국에서 꽃을 피웠던 개념이란 얘기다.
—창조경제의 기본적인 특성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창조경제의 핵심개념은 아이디어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제는 주로 토지·대량고용·자본 등을 기반으로 발전해 왔지요. 이런 것들은 창조경제에서도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하지만 창조경제에서는 토지·대량고용·자본보다 아이디어에 주안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선 개개인이 자신의 분야에서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조적 열정이 사업으로 연결되는 창조적 생태계가 눈앞에 펼쳐지도록 해야 합니다.”
—경제현장에서는 어떤 변화를 생각할 수 있나요.
“네트워크와 융합의 가치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창조경제의 핵심은 소유보다 연결, 즉 네트워크에 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창조경제 시대의 네트워크는 거미줄처럼 연결된 상호의존의 관계망을 통해 이뤄집니다. 사회관계망을 통해 제품이나 서비스가 창조되고 가치가 확장되는 것이죠. ‘융합’이라는 가치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이 필요합니다. 융합은 산업과 기술의 인위적 구분이 모호해지고 이들 간에 새로운 형태의 융합 상품과 서비스들이 등장하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미 경제현장에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콘텐츠와 콘텐츠,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결합 등 다양한 융합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조경제엔 권력보다 감성과 창의성이 중요
—창조경제가 순항하려면 어디에 주목해야 할까요.
“시너지 효과를 담보할 수 없는 근시안적인 정책을 펴면 효과도 적을뿐더러 정책집행의 효율성이 저하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과거 정부에서 새로운 국정비전이 제시되면 기존 업무에 이름만 빌리는 ‘무늬만 변화’가 많았던 경험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가급적 빨리 창조경제의 총론과 각론에 대한 정리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합니다.”
장 소장은 “지금 세계는 제조업의 전형적인 가치사슬(value chain)이 변화하고 있다”며 “연구개발(R&D)-제조-마케팅-서비스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비슷하지만, 단계별 경중(輕重)이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가령, 예전에는 자본력과 낮은 인건비로 원가를 절감했던 제조단계가 이익창출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지만, 이제는 R&D와 마케팅·서비스가 더 중요해졌어요. 어떻게 보면 창조경제론은 이런 가치사슬의 변화에 부합하는 미래성장전략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요. 창조경제의 핵심은 ‘새로운 발상’과 인문적 상상력 그리고 ‘사고의 전환’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너무 조급하게 성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국가 차원에서 10~20년을 내다보고 추진해야 해요.”
—창조경제의 성공을 위한 리더와 국민들의 자세는 어때야 하나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은 한국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스타일의 창조경제는 새로운 희망의 좌표가 될 수도 있어요. 관료주의적 타성으로는 창조경제의 알찬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창조경제의 콘텐츠와 실행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한 그야말로 ‘창조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창조경제를 꽃피울 기업과 국민의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고, 시행착오와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관 주도로는 안 된다는 말이네요.
“창조경제는 민간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토대로 서로 소통하고 융합할 때 가능한 만큼 관 주도의 일방통행식 발상은 경계해야 합니다. 비전으로 시작해 성과와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 리더십입니다. 창조의 힘은 부드러움과 유연성에서 나오고, 단편적인 지식과 이분법적인 사고는 창조의 적(敵)이라고 할 수 있어요. 21세기는 물리적 힘이나 논리보다 감성과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영일
(201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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