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53)씨의 오랜 친구인 박태중씨의 비망록을 최근 입수했다. 박씨는 현철씨의 초등학교·중학교 동기동창이자 단짝 친구이다. 1987년과 1992년 대선 때 현철씨를 도왔다. 1992년 사조직인 나라사랑운동본부 총괄사무국장을 맡아 조직과 자금관리를 했다. 이후 현철씨가 ‘소통령’으로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시절에도 여전히 친구이자 최측근이었다. 때문에 박태중씨는 김현철씨에 관한 한 ‘가장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다. 1997년 초 김현철씨가 한보 사건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았을 때 박씨 역시 수사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는 당시 민방 사업자 선정 등 이권 청탁에 개입해 8억7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1999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이번 비망록은 그가 김현철의 주변에서 보고 들은 얘기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양이 많아 주요 부분만 발췌하고 일부 문장을 다듬었다. 대개의 비망록이나 자서전 등이 그러하듯이 이 글에서도 구체적 사실이나 정황이 실제보다 과장 또는 축소되어 서술되거나 주관적 판단에 치우친 대목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일이 가리지 않고 그대로 독자들의 분별에 맡기기로 했다. 비망록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에 대해 반론(反論)이 있을 경우 다음 호에 싣기로 한다. /편집자
⊙ YS 지시로 1992년 현철이와 함께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 만들어 대선 개입
⊙ 나사본 운영자금은 현철이가 대부분 조달했지만, YS한테 내가 직접 받아 오기도
⊙ 1992년 대선때 100억원 넣은 사과박스 갖고 다닌 적도
⊙ 금융실명제 실시를 까맣게 모른 현철, 뒤늦게 나사본 잔금 50억원 실명화를 기업인에게
부탁한 것이 구속의 빌미가 돼
⊙ 나이 마흔도 안된 대통령 아들을 상전처럼 떠받든 고위공직자들의 행태도 문제 있다고 생각
이번 비망록은 그가 김현철의 주변에서 보고 들은 얘기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양이 많아 주요 부분만 발췌하고 일부 문장을 다듬었다. 대개의 비망록이나 자서전 등이 그러하듯이 이 글에서도 구체적 사실이나 정황이 실제보다 과장 또는 축소되어 서술되거나 주관적 판단에 치우친 대목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일이 가리지 않고 그대로 독자들의 분별에 맡기기로 했다. 비망록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에 대해 반론(反論)이 있을 경우 다음 호에 싣기로 한다. /편집자
⊙ YS 지시로 1992년 현철이와 함께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 만들어 대선 개입
⊙ 나사본 운영자금은 현철이가 대부분 조달했지만, YS한테 내가 직접 받아 오기도
⊙ 1992년 대선때 100억원 넣은 사과박스 갖고 다닌 적도
⊙ 금융실명제 실시를 까맣게 모른 현철, 뒤늦게 나사본 잔금 50억원 실명화를 기업인에게
부탁한 것이 구속의 빌미가 돼
⊙ 나이 마흔도 안된 대통령 아들을 상전처럼 떠받든 고위공직자들의 행태도 문제 있다고 생각
내가 김현철을 처음 만난 것은 중앙대 부속초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는 서울 안암동 우촌초등학교를 다니다 4학년 때 전학 왔다. 나이는 같았지만 3월생이라 일찍 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원래 나보다 한 학년 위였다. 우촌초교 3학년 때 급성 신장염으로 1년 동안 학교를 쉬어, 중앙대 부속초교에선 나와 같은 학년이 됐다.
보기와 달리 김현철은 장사였다. 팔 힘도 아주 세서, 팔씨름을 하면 지는 법이 없었다. 체격은 작아도 깡다구와 배짱이 보통이 아니었다. 우촌초교 체육시간에 혼자서 반 아이 60명을 상대로 씨름 시합을 하다 병을 얻었다고 했다.
전학 온 첫날 그의 모습을 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김현철은 친구들에게 인사말을 하라는 선생님 말씀에 “대신 노래를 할게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태연한 얼굴로 “깡통 줄게~ 밥 얻어 와라~ 거지대장 굶어 죽겠다”라는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도 웃었다. 현철이와 나의 30년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현철과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중대 부속중학교 입학 후였다. 중1 때 그는 반장이었고, 나는 규율부장을 맡았다. 또 부반장을 하던 정지수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세 명이 아주 친했다.
김현철과 나는 각기 다른 고등학교에 추첨 배정되면서 잠시 헤어졌다. 우리 셋은 학교는 달라도 다들 인접한 위치에 있어 변함없이 우정을 키워 갔다.
결혼과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87년 귀국한 현철이는 취직을 하려 했다. 여기저기 원서를 넣었지만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셨던 김무성 전의원의 주선으로 현철이는 1987년 쌍용증권에 입사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면서 현철이는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며 대외적으로 정치에 대한 야망을 완전히 접은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잘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정치가 꿈이다”고 줄곧 이야기하던 현철이가 그렇게 쉽게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철 부탁으로 정치에 투신
대선을 앞둔 1987년 현철이는 몇 달 만에 쌍용증권을 그만두고 선거 유세에 뛰어들었다. 부국상호신용금고 전산실에서 근무하던 나도 휴직계를 낸 후 유세에 따라다녔다. 우리는 봉고 승합차를 하나 빌리고 서울 마포에다 사무실을 얻었다. 우리가 한 일은 선거 유인물을 뿌리는 일이었다.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다. 전남, 특히 광주 지역은 냉정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했다. 유세 현장에서 봉고차 앞뒤로 YS의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는 우리 차를 향해 사람들이 돌팔매질을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마치 북한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격전지 광주를 돌아다녔지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주 다음 유세 지역은 마산이었다. 톨게이트에 진입해 밖을 내다보니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었다. 광주에서 당한 대접과 비교하면 지옥과 천국이었다. 돌을 맞아 엉망이 된 봉고차를 수리하러 간 카센터도 마찬가지였다.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자 “돈은 무신 돈입니까? 내가 돈 받자고 차 고치 드린 줄 압니까?”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 광주에서 얻은 상처가 마산에서 싹 나았다.
1987년 대선 한가운데서 일하면서도 사실 나와 친구들은 선거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때 처음으로 여론조사를 도입했다. 박종웅(YS비서·이후 국회의원 역임)씨가 선거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데이터 분석을 해서 보고하니까 YS가 그걸 보고 나서 “아, 이제 선거에서도 여론조사 같은 정확한 데이터 작업이 필요하겠다”며 현철이에게 여론조사기관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1988년 YS의 지시를 받은 현철이가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앞 건물에 ‘중앙조사연구소’를 열었다. 초창기 멤버로는 중대부중 동창인 윤성로가 직장을 그만두고 합류했고, 신동철 고영규 채영일 등이 공채를 통해 선발됐다.
대선이 끝난 후 나는 회사로 복직했다. 하지만 현철이가 하는 일은 계속 돕고 있었다. 특히 중앙조사연구소에서 하는 여론조사 업무는 대부분 전산 작업이라 내 도움을 필요로 했다. 내가 다니던 부국상호신용금고는 신촌에 있었는데 회사 일이 끝나고 나면 연구소로 가서 밤늦도록 데이터 작업을 도와주었다. 여론조사는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하기 때문에 밤 12시까지 작업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현철이는 아예 나보고 당 전산실에서 일해 달라고 했다. 며칠 고민을 하다 “에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데 나도 현철이 믿고 따라가 보자” 하는 심정으로 결정을 내렸다.
1988년 10월경 통일민주당 전산실장으로 정치 입문했다.
전격적인 3당통합과 사조직 만들기
1991년 1월 22일 민정·민주·공화 간 3당 통합이 이뤄졌다. 3당 통합이 있기 전인 1월 20일 저녁 현철이를 만났다.
현철이의 생각은 “민정당과 합당하게 되면 통일민주당에서 대표를 맡게 되는데, 그에 대비해 우리가 미리 사조직을 만들어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직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던 YS는 이미 현철이에게 직접 사조직을 만들도록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현철이와 나는 곧 광화문에 위치한 주택은행 2층에 사무실을 열고 3당 통합에 대비한 사조직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렇게 해서 ‘민주사회연구소’가 만들어졌다. 모태는 현철이가 운영하던 중앙조사연구소였다.
마지막으로 정책실을 따로 만들었다. 김현호씨를 비롯해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선동씨(서울 도봉을), 서울대 법대 출신의 김환학씨와 김태윤씨, 현재 금감원에 있는 임세희씨, 그 밖에 정상환·채영일씨 등이 초창기 멤버로 합류했다. 이들은 모두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청와대로 입성했다. 민주사회연구소장은 KBS 독일 특파원 출신의 엄호현씨가 맡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운영은 김현철이 주도했다. 연구소 운영비로 못해도 한 달에 1000만원 이상은 들어갔다. 그 돈을 야인(野人)인 현철이가 매달 만들어 줬다.
전산실 업무와 관련해 1991년 부활절에 있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전산실에서는 각계 인사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해 관리했다. 정보 전산화 과정에서 한번은 불교계 인사가 기독교 쪽에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그해 부활절 축하카드가 불교계 인사들에게까지 전달되었던 일이 있었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일인데, 그때는 상황이 달랐다. 불교계에서 기독교 신자인 YS가 자신들을 기만했다고 반발했다. YS의 분노는 상상 외로 컸다.
YS는 보통 일주일에 한번씩 연구소에 왔는데, 김기수(전 청와대 수행실장) 선배가 도착 5분 전 전화하면 내가 나가 건물 주변에 사람들이 많지 않을 때 모셔 들어오곤 했다. 그날도 통보를 받고 나갔는데 YS가 “이거 니네가 작업했지. 니들 국민학교도 안 나왔냐. 이놈들, 너희들이 나를 망치려고 작정을 했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로서는 “잘못했다”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YS는 연구소에 들어갈 때까지 욕을 했다.
나중에 데이터베이스를 점검해 보니 잘못 분류된 사람이 10여명이었다. 그래서 불교계에 전산 착오로 실수를 했다는 사과 편지를 써서 보냈더니 YS는 오히려 더 화를 냈다. YS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했던지 기자회견을 했다. 음해 세력이 일부러 장난을 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YS에게 처음으로 실망했다. 3당 합당 후 YS가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있을 때 일이었다.
사조직 나사본을 만들다
나사본(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은 대선을 바로 앞둔 시점인 1992년 6월쯤 만들어졌다.
나사본의 업무가 공조직하고 마찰을 빚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사본에서 대선 기간 선보인 시스템 중에서 대중의 반응이 좋았던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선거유세에 사용한 프롬프터였다. 원래 프롬프터라는 것은 TV 뉴스 앵커들이 원고를 읽을 때 보는 것인데 우리는 YS가 유세장에서 연설할 때마다 이것을 사용했다. 장안에 한동안 ‘YS가 갑자기 머리가 좋아졌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다른 후보와 차별화한 것 중 또 하나는 방탄조끼였는데 유세장을 돌아다닐 때 YS는 항상 최신형 방탄조끼를 입었다. 그 제안은 김혁규씨가 했다. 선거가 과열되고 있으니 미리 조심하자며 사비를 들여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나사본의 총괄본부를 맡고 있던 사람은 최형우 의원이었다. 그리고 김혁규씨와 내가 총괄본부 실무를 맡고 있었다. 최형우 의원은 우리와 함께 있을 때면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너희 셋은 나와 끝까지 간다”고. 현철이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만약 그분이 (1993년) 뇌졸중으로 쓰러지지만 않았더라면 현철이나 내 인생은 분명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든 우리를 보호해 주었을 것이다.
최형우 의원은 우리 셋과 만나면 YS를 민자당 대통령후보로 만들기까지 겪었던 무용담을 자주 들려줬다. 주로 박철언씨와 손주환씨에 관한 이야기였다.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손주환씨는 손명순 여사의 집안 동생뻘 되는 사람이다. 그는 YS가 대통령 되는 걸 반대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 그를 최형우 의원이 하루는 일식집으로 불렀다. 그러곤 젓가락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YS가 대통령 되면 너희 가문의 영광이지 우리 가문의 영광이냐?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당신이 자꾸 반대하면 이 자리에서 눈알을 쑤셔 버린다.”
최형우 의원의 성격을 잘 아는 손주환씨는 겁을 먹고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은 박철언씨였다. 최 의원은 그를 만나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제 너 죽고 나 죽고다. 그러니 너 조용히 하고 가만있어. 이미 딴 데로 간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내부에서 쑤시려면 너도 다른 데로 가. 자꾸 딴지 걸면 내가 너 죽이고 나도 죽는다.” 박철언 전 정무장관은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소문이 났던 사람이다.
편지봉투에 가득 찬 100만원짜리 수표
나사본 운영자금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현철이의 주머니에서 나왔지만 조직을 본격 운영하면서부터 내가 YS한테 직접 받아다 쓰기도 했다. 두 번 정도 YS를 직접 만나 돈을 받아 왔던 기억이 난다. YS는 내가 갈 때마다 5~6개의 일반 편지봉투에 100만원짜리 자기앞수표를 가득 채워서 주곤 했다.
나사본의 간부와 직원들은 일체의 경비를 모두 나에게 타서 썼다. 현철이가 나에게 자금 운영을 맡겼기 때문이다.
대선 후 YS 정권에서 인천시장을 했던 최기선씨는 대선 당시 돈 문제를 놓고 나와 다툰 적이 많았다. 최기선씨는 영수증을 빨리 처리해 주지 않을 때면 사무실 밖에서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 경우 입장이 난처했다. 최기선씨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얼굴을 마주하고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큰 마음 먹고 “돈 좀 아껴 쓰시라”고 하면 최기선씨는 “부하 직원들이 돈 썼다는데 그럼 내 돈을 주라는 말이냐”며 오히려 나에게 화를 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그를 만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경우이기는 했지만 YS 정권에서 내무장관을 했던 김우석씨는 평소 나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형님 밑의 사람들한테 최대한 돈을 아껴 쓰라고 하고 불필요한 영수증은 올리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나사본 시절의 에피소드 중 하나는 최형우 의원의 업무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내가 ‘03(영삼) 시계’를 만든 게 사건이 돼서 국민당 소속 당원 몇 명이 정주영씨 지시로 나를 잡으러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랑 김혁규씨 둘이서 한동안 그들을 피해 숨어 다녔다. 하루는 최형우 의원이 우리 둘을 서교호텔로 불러냈다. 만나자마자 그는 대뜸 욕을 퍼부으면서 “이 중요한 시기에 너희들이 도망을 다니면 도대체 선거는 누가 맡아서 하냐, 이 미친 새끼들아!!” 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면서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내일부터 당장 나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날 최형우씨는 평소와 다르게 술을 많이 마셨는데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이다. 최 의원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YS의 홍보 전단지를 작업할 때였는데, 그 업무는 홍보본부장이었던 박관용씨(그후 국회의장 역임)가 전적으로 맡아서 진행하고 있었다.
김현철, 최형우와 자주 충돌
당시 홍보본부는 외부에 있었다. 박관용씨가 홍보 전단지를 가져오자 최형우씨는 나와 김혁규씨를 불러 놓고 전단지를 검토했다. 상석에는 최형우씨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 박관용씨가 앉아 있었다. 최 의원은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와 김혁규씨를 돌아보며 “에이, 이게 뭐냐?”라고 했다.
박관용씨는 “일반인들이 보면 마음에 안 들지는 몰라도 홍보 전문가 입장에서 판단했을 때 이게 가장 나은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최형우 의원이 “그럼 이 전단지를 일반인인 국민들이 보는 거지 전문가들이 보냐? 일반 사람들 무시하고 전문가들 눈에만 좋은 게 최고라면 니네 전문가들끼리 봐라” 하고 대놓고 화를 냈다.
성질 하면 현철이도 결코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 최형우 의원과 부딪친 적도 많았다. 특히 운영자금을 두고 다툰 적이 꽤 있었다.
민주산악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던 최 의원은 자금 문제로 많이 시달린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나한테는 부담을 주기 싫어서인지 내 앞에서 돈 얘기를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분이 어느 날은 지나가는 말처럼 “산악회에도 자금지원 신경을 좀 써 주라”는 말을 했다. 그제서야 ‘아차’ 하는 마음이 들어 그 이야기를 현철이한테 전했던 적이 있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한때 언론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100억짜리 사과박스는 정치판에 뛰어든 이후 나도 심심찮게 만져 보았다.
사과박스 하나에 100만원짜리 헌 수표를 채우면 100억원이 된다. 선거 당시 유세를 지원하러 다니던 현철이와 나, 그리고 친구들은 100억짜리 사과박스를 만들어 유세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미처 은행에 넣을 시간이 없어 내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닌 것이다. 그 돈은 내가 나사본 운영자금으로 썼다.
나사본의 대선 잔금은 120억원
한번은 100억원 돈 박스를 들고 이태원 캐피탈 호텔을 찾았다. 그곳에 금고를 하나 마련해 두고 돈을 그 안에 두었는데, 금고 하나에 100억이라는 돈이 다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호텔 방 안의 가구 틈새나 눈에 잘 안 띄는 곳곳에 수표 다발을 숨겨 놓았고, 그래도 남는 돈은 양복 안주머니에 감추고 다닌 적도 있었다. 양복 안주머니에 수표 다발을 넣고 다니는 날에는 행여 수표를 한 장이라도 잃어버릴까 봐 불안해서 양복 웃옷조차 제대로 벗지 못했다.
당시 용산에 이동통신 사무실이 있던 자리에다 나사본 사무실을 만들려고 인테리어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 기자들이 사무실로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현철이를 비롯한 나사본 당직자들은 가능한 우리 조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하고 있었다. 언론에 알려지면 분명 좋지 못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총괄조직본부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 바로 옆 건물에 다시 사무실을 차렸다. 나사본에서는 따로 언론과 기자 관리를 하지 않았다.
나사본에서 운영자금으로 사용하고 남은 돈은 120억여원이었다. 남은 자금은 통장을 만들어 현철이한테 주었다. 현철이는 나한테 관리를 부탁했다. 당시 은행이자가 13.5%일 때였는데 120억원을 예치해 두면 세금을 제외한 1년 이자만 10억이 넘게 나왔다. 금융실명제 이전이라 차명(借名)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려 매월 이자만 관리하는 통장을 따로 만들었다.
그때 나를 도와 나사본 자금을 집행했던 사람 중에 백모라는 친구가 있었다. 현철이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가 사업을 하다 5억원을 부도내고 미국으로 도망갈 처지에 놓였다. 내가 현철이에게 2억7000만원만 도와주자고 했지만, 현철이는 “난 기업에 돈 한 푼 안 받는다”며 거절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날 현철이가 나한테 전화를 했다. 현철이는 시간을 정해 주며 라마다르네상스 호텔 지하로 내가 직접 차를 몰고 가면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가 돈을 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약속 장소로 차를 몰고 가자 현철이의 말대로 헤드라이트를 켜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차가 한 대 있었다. 그가 건네 준 여행용 가방에는 2억7000만원이 현금으로 들어 있었다. 가방이 어찌나 무겁던지 하는 수 없이 비서를 시켰다. 나중에 이 돈이 문제가 돼 검찰 조사를 받았다.
당시 돈을 받을 때에는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검찰 조사 과정에서 알고 보니 현철이가 나에게 준 2억7000만원은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이 준 것이었다. 그날 돈 가방을 들고 온 기사는 이성호 회사의 직원이었다. 나중에 성호한테 들으니 현철이가 전화를 해 사정을 설명한 후 2억7000만원을 현찰로 나에게 갖다주라고(백모씨에게 주도록) 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이성호가 보관한 현철이의 70억
성호가 현철이의 돈을 맡게 된 것은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발표 때문이었다. 금융실명제 발표 전까지 현철이와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실명제 발표 후 현철이와 당연히 120억원에 대한 대책을 상의했고, 주변에 그 자금을 실명화할 수 있는 사람이 이성호뿐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현철이는 성호에게 50억원을 주면서 성호의 회사를 통해 실명화시키라고 했다. 나머지 70억원은 김기섭씨에게 주어 처리했다고 들었다.
나는 성호에게 내가 돈을 관리하던 방식에 대해 일러 주었다.
그동안 13.5%라는 은행이자는 따로 이자 통장을 만들어 저금해 주었으니, 나처럼 돈은 은행에 맡겨 두고 이자만 따로 챙겨 현철이에게 주라고 일렀다. 거금을 떠안게 된 성호는 혼자 꽤 고민한 모양이었다. 성호가 끝내 그 돈을 은행에서 관리하지 못하고 집 안에 보관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후 검찰조사를 통해서였다.
현철이 곁을 떠나 다시 내 사업을 시작하게 되어 마음이 후련하기만 했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지 못했고, 성호가 어떻게든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딱하게도 성호는 현철이가 떠맡긴 50억을 자기 부친 명의로 실명화하긴 했으나, 은행에 예치한 채로 두지 못하고 모두 현찰로 바꿔 2년 반 동안 자기 집 벽장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래도 사정을 모르는 현철이에게는 2년 반 동안 자기 주머니를 털어 이자 명목으로 돈을 갖다준 것이었다.
이런 성호의 속사정을 모르는 현철이는 2년 후 성호에게 다시 20억원이 넘는 돈을 갖다주고 그것도 같이 맡아 달라고 했다. 그 20억은 2년 반 동안 성호가 현철이에게 이자로 갖다준 돈이 포함된 것이었다.
나중에 맡았던 돈 합계 70억원을 현철이에게 돌려줄 때 성호가, 나에게 (백모씨에게 주도록) 전해 준 2억7000만원을 빼고 주었더니 현철이는 “왜 돈이 비냐?”고 물었다고 한다. 결국 성호는 현철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또 자기 돈으로 2억7000만원을 채운 후 70억원을 만들어 현철이에게 돌려주어야만 했다.
YS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부쩍 현철이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정치인뿐 아니라 재계 인사들도 현철이를 수시로 찾았다. 내가 현철이의 뒤치다꺼리를 한 것 중 가장 주요한 일은 현철이 앞으로 수도 없이 오는 각종 보고서와 이력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 기억을 못하지만 내가 본 이력서 중에는 당시 현직 차관과 현역 장성 이력서도 나한테 있었다. 그런 것을 파기 안 하고 갖고 있다가 나중에 대검 수사할 때 문제가 되기도 했다.
현철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이력서들
현철이는 자기가 보고 난 후 쓸모없다고 판단한 보고서나 이력서는 모두 나를 줬다. 일주일이면 그게 산더미처럼 쌓였다. 나는 현철이가 넘겨준 그 문건들을 함부로 누구에게 줄 수도 없어 일일이 그것들을 분쇄했다.
나중에 현철이를 아끼는 사람들은 현철이에게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충고한 적도 있었다. “네가 10명을 만나면 들어줄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몇 개냐? 한 가지도 들어줄 수 없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부탁을 들어준 한 사람은 너를 좋아하겠지만 나머지 아홉 명은 너의 적이 되는 것이니 아예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는 말도 했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현철이는 그 충고를 새겨듣지 않았다. 아침 식사 시간부터 시작해 저녁 식사 시간까지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날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아침 두 번, 저녁 식사를 두 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방에 가면 꼭 어떤 모임에 가는데, 그런 자리에서는 사람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뭘 써서 몰래 밑으로 내 쪽으로 건네준 적도 있다. 현철이가 준 메모에는 ‘이게 뭐하는 모임이냐?’는 말이 적혀 있곤 했다. 그럴 정도로 그때 현철이는 사람들한테 치여 정신없이 다녔다. 그저 매일 현실에 쫓겨 다니면서 누가 만나 달라고 하면 ‘이게 아버지를 위하는 일인가 보다’ 하고 만나고, 어떤 모임에 와 달라고 하면 ‘아버지가 못 가니 나라도 가야지’ 하고 참석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에 치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회사 일로 외국 출장을 가게 될 때면 내 사무실로 3~4명이 찾아와 나를 기다리는 일이 허다했다. 여행 경비로 쓸 돈을 주려는 의도에서였다. 봉투를 열어 보면 보통 100만원 정도의 돈이 들어 있었다.
고위직 인사들이 수시로 전화를 걸고 찾아오니 내 사무실의 직원들도 의아해할 정도였다. 한번은 새로 입사한 여직원이 다른 직원에게 “우리 사장님 뭐 하시는 분인데 정부 인사들이 저렇게 매일 전화하느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친구인 나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현철이에게는 오죽했겠는가.
한국行 비행기에서 처음 안 한보사건
1997년 초 한보사건이 맨 처음 터졌을 때, 나는 미국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보고 처음 알았다. 그때만 해도 내가 한보와 연관되어 조사를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신문 기사를 읽고 ‘한보가 난리 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언론 보도와 달리 나는 한보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 정태수 회장을 만난 적도 없고 그 자녀들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상아제약 회장으로 있던 둘째 아들 정원근과만 술자리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임채정 의원이 현철이와 나를 두고 한보철강 2000억 리베이트설을 제기하자 검찰에서는 내 회사인 심우 사무실과 집을 압수수색했다. 주요 혐의 요지는 한보가 철강 기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현철이가 한보에 열연 및 냉연설비 기계를 판 독일의 SMS사로부터 2000억 리베이트를 받았고 그 중간 역할을 내가 했다는 것이었다.
검찰의 압수수색 날짜는 1997년 3월 21일이었다. 나는 그 날짜를 지금까지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날이 바로 내 둘째 아들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아이 낳는 것을 지켜보고 무심코 TV를 켰는데 압수수색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1997년 3월 현철이는 국정농단을 이유로 검찰 조사를 받은 직후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현철이는 한보 리베이트설이 터지고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씨가 현철이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공개하면서 다시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박경식 테이프에는 현철이가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과 YTN 사장 인선과 관련한 내용을 놓고 통화하는 모습 등이 담겼다. 국정농단의 결정적 증거가 드러난 것이다.
한보사건 와중에 한보철강 리베이트설까지 터져 나오자 현철이와 나는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언론에서 우리가 받았다고 하도 강력하게 써 대니까 현철이와 나는 서로를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너 정말 나 몰래 받은 거 없냐?”고 상대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한보에 관해서만큼은 철저히 결백했다. 한보 쪽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했고, 또 2000억이라는 그 많은 돈은 아무리 현철이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검찰 조사에서도 이 문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2000억 리베이트설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한보사건이 터진 후 홍인길(전 대통령 총무수석)씨가 구속된 이후 이런 일이 있었다. 박정태씨라고 당시 도로공사 사장이 있었는데 그분은 상도동계 원로였다. 하루는 그분이 느닷없이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그분은 얼굴이 사색이 돼 “큰일 났다”며 자신이 YS에게 한보 정태수씨를 소개해 준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정태수씨와 박정태씨는 동부 이촌동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서 살았는데, 정태수씨가 하도 부탁을 해 YS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자기 집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분명 YS랑 정태수는 관련이 있을 거다. 그렇다면 한보사건이 터지면 안 되는데 이렇게 터져 버렸으니 어쩌면 좋겠냐”고 조바심을 했다. 이후 이 얘기를 현철이에게 했는데 현철이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는 “YS와 정태수 두 사람은 아무 관계도 없다”며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미처 알지 못하고 저지른 범죄
한보사건과 관련한 검찰의 1차 조사와 국회 청문회가 끝난 후 대검의 한 간부가 간접적으로 연락을 해 왔다. 그땐 이미 홍인길 전 수석이 구속되고 난 후였다. “4월 20일경 검찰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냐. 개인적으로 정리할 거 있으면 미리 정리하고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YS와 현철이에 대한 당시 여론분위기로 볼때 막연하지만 구속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현철이랑 내가 구속되지 않으면 결코 사건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혼자 신변 정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만 나 자신은 특별히 처벌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검찰이 어떤 사안으로 나를 구속시킬까 그 점이 궁금했다.
검찰과 출두 날짜를 조율하고 있는 도중에 이 간부로부터 또 연락이 왔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시간을 오래 끌면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조사 기간을 줄이기 위해 몇 가지 사안들에 대해 미리 염두에 두고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 몇 가지 사안 중 하나는 민방 선정 과정에서 내가 각종 이권에 개입, 영향력을 행사해 거액의 자금을 받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방사업 신청서를 낸 기업들 중 임광토건, 라인건설, 삼정건설, 한국종합건설 대표들과는 최동렬의 소개로 몇 차례 자리를 가졌다. 임광토건 부사장으로 있던 임재풍은 이미 그전부터 나와 친구 사이였다. 광주 지역에 신청서를 낸 라인건설의 공병곤 부회장과는 그 전까지 일면식이 없던 사이였는데 민방 선정 문제로 처음 만났다. 대전 지역 신청 업체인 삼정건설의 이강연 사장, 인천지역의 한국종합건설 김병희 회장 등과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에서는 민방 선정 과정에서 내가 이들 업체와의 친분을 앞세워 압력을 행사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 이 사람들과 나는 이들 업체가 민방에서 탈락한 후 오히려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이들로부터 돈을 빌리게 된 이유는 내가 하던 사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한보사건이 터졌을 무렵 나는 복권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5년 복권기계를 사 놓고도 시험 가동이 늦어져 수주를 할 수 없었다. 1996년 한 해만 30억 정도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다행히 1997년 초 국민체육진흥공단, 근로복지공단과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공장 가동 자금이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그 사람들한테 돈을 빌렸다. 그렇게 빌린 돈이 총 8억7000만원이었다. 그들에게 빌린 돈은 나중에 대가성이라는 이유로 모두 추징금을 맞게 되었다.
검찰 출두 전 대검 간부는 이런 내용을 미리 전해 주었다.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회사 운영을 위해 썼고, 무작정 손을 내민 것도 아니고 우리 회사의 어음을 주고 빌렸는데, 왜 대가성이라고만 몰아붙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나’ 하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알선수재’라는 죄목
약속한 날 대검 청사로 갔다. 이훈규 중수부 과장은 나에게 내가 관리하다 현철이에게 돌려준 120억의 행방을 아주 소상하게 정리한 메모를 보여주었다. 최초의 돈 출처와 최종 사용처만 종이로 가려 둔 채 나머지 돈이 흘러간 행방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출두할 때부터 검찰 조사 내용을 부인할 생각도 없었지만 이 과장은 한마디의 말도 없이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내가 별다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이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지금부터 수사관하고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수사관은 내가 들어가자 백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에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만난 사람들의 명단을 다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짐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백기투항한 마당에 감출 것도, 감추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빠르게 적었다. 1~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 나간 수사관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3~4시간 동안 딱딱한 의자에 꼬박 앉아 있으려니 미칠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로 거의 폭발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수사관이 다시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명단을 쓰윽 살펴보더니 “우리랑 길게 싸울 것 같지는 않네요”라고 했다.
민방 사업 신청업체들로부터 빌린 돈에 대한 알선수재 여부를 놓고 검찰과 가장 오랫동안 맞섰다. 나는 처음부터 정당하게 회사 어음을 주고 빌려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사관은 “박태중씨야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겠나? 그 정도 위치에 있는 당신에게 혹시 돈을 안 빌려주면 나중에 불이익을 당할 거라고 생각해 빌려준 거 아니야?”고 반박했다. 공방 끝에 “그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내가 그 속을 어떻게 알겠나? 어쩌면 그런 부담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겠다”라고 대답했다. 검찰은 “그러면 그건 알선수재에 해당된다”고 간단히 결론지었다
검찰, 대선잔금·한보에 대해선 묻지도 않아
내가 쉽게 손을 들게 된 또 다른 다른 이유는 친구인 임광토건 임재풍 사장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다른 사업자와 달리 검찰 조사 결과에 강하게 반발해 상당한 고초를 겪고 있었다. 조사를 받던 중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치자 임재풍은 “야, 나 너한테 돈 꿔준 거 맞잖아!”라고 화를 냈다.
임재풍은 고집이 보통이 아닌 친구라 검찰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48시간 이상 구금할 수 없다는 법조항 때문에 이틀 후 나갔다가 다시 검찰로 들어오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런 그를 지켜보기 안쓰러워 내가 먼저 임재풍과의 대질을 요구했다. 그와 둘이 만난 자리에서 “네가 나한테 돈을 안 빌려주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돈을 주었다면 그건 알선수재가 된다고 하더라. 그러니 더 끌지 말고 그렇다고 해”라고 일러주었다. 결국 임재풍은 내가 시킨 대로 했다.
임광토건의 경우는 나중에 나한테 준 돈 4억은 빌려준 것이라며 되돌려 받겠다고 나를 상대로 민사소송를 따로 내 승소하기도 했다.
이틀간의 조사가 끝난 후 나는 알선수재 등의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나사본에서 쓰고 난 잔여분 120억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다. 한보에 관한 문제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 유명한 몸통이니, 깃털이니 하는 한보 자금의 배후에 대해서는 아예 조사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한보 때문에 잡혀 들어갔는데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120억 부분에 대해 고심을 많이 했다. 결국 ‘대선자금’이란 표현은 못하고 대신 ‘나사본 운영 잔여금’이란 표현을 썼다.
김현철의 自繩自縛
검찰은 이 사건을 매듭지으려면 미국에 나가 있는 성호도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현철이가 성호의 귀국을 철저히 막고 있었다. 검찰은 성호의 회사인 세미냉장과 포스코 납품회사를 상대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사건 담당인 김준호 검사는 이성호와 신일고 선후배 사이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내가 조사를 받고 있는 방으로 와 “성호더러 귀국해서 조사 받으라고 해. 그래야 매듭이 지어진다”고 했다. 구속 상태였던 나는 그 자리에서 성호에게 전화를 걸어 보겠다고 대답했다.
검찰이 귀국을 종용한 가장 큰 이유는 나사본 잔금 120억 중 성호에게 건네진 50억에 대한 부분이었다. 구속을 원칙으로 현철이를 소환하기로 결정했지만 막상 현철이에게 적용할 만한 적당한 죄목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현철이는 조세포탈 혐의와 알선수재로 구속됐다. 우리나라에서 세금 포탈로 정치인이 구속된 것은 현철이가 처음이라고 들었다. 검찰이 생각해 낸 가장 유력한 죄목은 알선수재였는데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철이의 이권 개입 여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성호가 귀국해서 조사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검찰의 속사정을 알고 있던 나는 성호에게 “지금 안 들어오면 너희 회사 망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너만 손해를 보게 된다”며 무조건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그런데도 성호는 현철이의 양해가 있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성호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지경에 처하고도 현철이에 대해 변함없는 충성을 보이는 성호가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날 끝내 성호의 고집을 꺾지 못한 나는 “지금 내 처지가 현철이랑 통화할 수가 없고, 설득도 하기 어려운 상태다. 그러니 직접 연락해서 어떻게든 현철이를 설득해 귀국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랑 통화를 한 후 성호도 회사를 살리려면 자신이 귀국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철이를 설득했다고 한다. 성호와 통화를 한 후 현철이는 마침내 성호의 귀국을 허락했다.
그 대신 현철이는 자신이 성호에게 맡긴 70억의 이자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법을 잘 모르는 현철이의 실수였다. 차라리 이자로 받았다고 하면 될 것을 공연히 덮어 두려다 그것이 알선수재로 걸려 결국 발목을 잡히게 된 것이다.
검찰에 나온 성호는 죄수복을 입은 나를 보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런 성호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성호와 만난 자리에서 “내가 보기에 너는 구속될 일이 없다. 특히 120억 부분에 대해서는 네가 알고 있는 대로 이야기해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김현철 구속에 숨겨진 진실
1997년 5월 현철이가 검찰에 소환됐다. 그간 검찰의 돌아가는 내용을 직접 겪은 성호와 나는 현철의 협조가 있으면 사안이 간단해지리라 판단했다. 문제는 이 모든 사건의 진행이 빨리 멈추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철이 소환되기 전날 이훈규 과장에게 제안하기를, 현철이를 따로 만나게 해 주면 수사에 협조하도록 성호와 함께 설득을 해 보겠다고 요청했다.
이 과장은 현철이에게 “박태중씨랑 이성호씨랑 먼저 이야기를 좀 나누시라”고 한 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검찰은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전부 다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변명거리는 없다. 그러니 감추려 들지 말고 모두 다 이야기하라”고 말해 주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현철이는 대뜸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고 말을 잘랐다.
그는 “조금 전 들어오다 아버지랑 통화했다. 나 절대 구속 안 된다고 했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훈규 과장이 우리에게 할애해 준 시간은 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들어온 이 과장은 “박태중씨, 이성호씨 수고했습니다. 그만 들어가십시오”라며 우리를 수사관실로 돌려보냈다. CCTV로 현철이와 나의 대화 내용을 모니터했던 것이었다.
YS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살았던 현철이였기에 그는 끝까지 자신이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검찰에서 제시하는 각종 혐의 내용들도 모두 부인하며 끝까지 버텼다. 경복고 동문들인 두양건설의 김덕영 회장, 우성건설 최승진 부사장, 신성그룹 신영환 회장이 매달 모아서 준 6000만원은 동문회 차원에서 현철이의 활동비 명목으로 준 것이라 검찰도 그것을 대가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현철이와 나 사이에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던 일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친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돈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현철이가 경복고 동문들로부터 매달 돈을 받았다는 사실도 검찰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현철이가 대동주택 곽인환 사장을 만난 건 강상일의 소개였다. 당시 청와대 총무수석실 인사재무비서관으로 일하고 있던 강상일은 곽 사장의 부탁으로 그를 현철이의 광화문 사무실로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그때 곽 사장이 현금 5억원이 든 사과박스 두 개를 준비해 갔다고 한다. 곽 사장이 돌아가자 현철이는 강상일을 따로 불러 “날더러 이 돈을 어떡하란 말이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더니 10억원을 모두 10만원권 수표로 바꿔 오라고 지시했다. 강상일은 그 후 돈을 모두 10만원권으로 바꿔 주었다.
대동주택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밝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강상일은 그 일로 인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현철이는 곽인환 사장에게서 받은 사과박스 안에 돈 5억이 들어 있었다고 했고, 대동주택 측은 현철이에게 분명히 10억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양쪽 말이 다르다 보니 중간에서 심부름을 한 강상일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사실 확인을 위해 현철이와 강상일을 대질심문까지 했다.
나중에 현철이는 “내가 착각을 한 것 같다. 10억을 받은 게 맞다”라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 후 그는 YS에게 “강상일이 대동주택에서 받은 5억을 떼먹었다”고 말했다. 그 일로 현철이와 강상일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기게 되었고, 지금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지내는 상태다.
“도대체 무슨 혐의로 구속인가”
현철이는 임의동행 시간인 48시간을 다 채우고 구속됐다. 나중에 이훈규 과장은 현철이에게 구속 사실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과장이 현철이에게 “이건 구속할 수밖에 없는 사안입니다”라고 말을 꺼내자 현철이는 몹시 의아하다는 듯 “도대체 나를 무슨 혐의로 구속시킬 거냐?”고 되물었다 한다. 당시는 대동주택으로부터 받은 돈 10억이 불거져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검찰은 일단 조세(증여세)포탈 혐의로 현철이를 구속했다. 민방 사업과 관련된 알선수재는 나중에 추가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현철이가 가장 난감해했던 사항은 성호와 관련된 이자 부분이었다. 성호는 현철이가 하도 당부를 하니까 조사를 받을 때 그 돈은 이자로 준 것이 아니라 활동비로 준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
구속 후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현철이가 자신의 담당 변호사인 여상규씨와 만나 이 얘길 전하자 여상규 변호사는 ‘활동비로 받았다면 알선수재가 된다’며 오히려 ‘성호 쪽에서 이자조로 줬다고 말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여 변호사가 따로 성호를 만나 진술을 번복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사건이 일단락된 뒤였기 때문에 성호가 여 변호사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성호가 진술을 번복한다 해도 오히려 검찰의 더 심한 추궁에 역효과만 날 뿐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현철이는 자신이 감옥에 가게 된 이유는 모두 성호 때문이라며 그를 원수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이성호와의 인연
성호와 현철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김기섭씨를 통해서였다. 원래 김기섭씨는 신라호텔 상무였는데, 성호 아버님인 이건 회장이 그곳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성호와 김기섭씨가 연결된 것이다. 내가 이성호를 알게 된 건 1992년 대선이 한창이던 때였다.
대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현철이와 친하게 동행하던 그를 보고는 의아해했다. 내가 모르는 현철과 친한 사람이 몇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는 자연스레 친해져 별별 고락을 같이 겪는 사이가 되었다. 성호는 여러모로 부족함 없이 자란 탓에 현철이처럼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거나 지시를 따르는 일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런 성호가 유일하게 자신을 죽이고 따른 상대가 바로 현철이였다.
YS 재임시절 현철이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어디 가서 마음 편히 술을 마실 수도 없었다. 그런 현철이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준 것도 바로 성호였다.
문민정부 시절 우리 셋이 그나마 가장 많이, 가장 마음 편히 만날 수 있은 사이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이였기에 큰일을 겪고난 후 이렇게 각자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 더욱 마음 아프다. 현철과 나는 초등학교 이후 거의 모든 생활을 공유할 만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따라서 내가 현철이를 욕하는 건 나 자신의 반 이상을 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성호는 입장이 달랐다. 그는 건설업을 하고 있었기에 구설수에 많이 오르내릴 수 있다는 걸 알아서 이권과 관계없는 사업을 하고자 애썼다. 성호는 새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나와 자주 상의를 했기 때문에 세부 내용에 대해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나중에 오인환 전 공보처장관이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성호의 회사는 서초 케이블 TV 선정과정에서 2등 업체보다 월등히 높은 점수차로 1등을 했다. 또 현철이가 힘을 써 따낸 것처럼 알려진 포스코 대리점도 현철이의 힘이 작용한 것이 아니었다. 현철의 측근 중에 사업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끊임없이 이런저런 이권에 시달렸지만, 현철이의 혜택을 봤다면 친하다는 이유로 그저 남들이 알아서 대우해 주는 정도의 혜택을 봤을 뿐이라는 걸 나는 잘 안다.
김현철이의 자금을 보관해 오던 이성호는 실명화한 50억원 부분으로 오히려 자금출처 조사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자금을 더 이상 보관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반납하고 스스로 외국생활을 택했다. 실명화 직후 성호에게 자금을 맡기자고 현철이에게 제안했던 나로서는 이성호에게 마음의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김현철, YS가 대통령 된 후 변하기 시작
아버지에 대한 강한 집착과 책임을 제외하면 현철이는 어려서부터 평범한 아이였다. 현철이는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자신을 ‘파파보이’라고 인정했지만 그 사실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현철이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목표를 정했던 때는 아버지 YS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인생을 위한 것이지 자기 스스로의 삶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현철이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였다. 나는 그를 변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주변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철이는 “아버지가 대통령인데 너도 한자리해야 될 거 아니냐?”는 식으로 권력욕을 부추기고 욕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유혹을 많이 받았다.
YS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현철이나 나는 마흔이 채 안된, 즉 불혹(不惑)의 나이에 못 미쳤다. 보통의 남자라면 직장에서 선후배 눈치 살피며 자기 처신에 고민하며 살아야 할 나이인 것이다. 현철이는 그 나이에 장관급 인사들로부터 상관(上官) 대접을 받았다. 제 아무리 겸손의 미덕을 갖춘 사람이라도 주변에서 끝없이 비위를 맞추고 좋은 소리만 하면 결국 그 분위기에 취할 수밖에 없다.
현철이는 처음부터 청와대나 정보기관은 우리 쪽에서 잡아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김기섭씨를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앉히고, 이충범·김혁규씨 등을 청와대 사정비서관 민정비서관 등에 대거 포진시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 있으니 고급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무리 진심 어린 고언을 했다 하더라도 현철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현철이의 정보력이 무시할 수 없는 집단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현철이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뭣도 모르고 까분 죗값’
이 글을 정리하면서 내가 가장 반성하는 부분은, 내 스스로 제일 싫어하는 짓을 현철이랑 같이 했다는 사실이다. 나의 첫 번째 잘못은 자기 노력에 의하지 않고 너무 쉽게 그런 중요한 자리에 올라갔다는 것이고, 둘째로, 더 중요한 것은 현철이나 나나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해 좋은 방향으로 전진시키지 못하고 그 상황에서 즐기기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현철이나 나나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사실 나는 현철이 곁을 지킨 대가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그래서 가끔 옛날을 돌이켜 보면 속이 상해 울화가 치밀 때도 있다. 하지만 돈이든 권력이든 내 노력으로 이룬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별로 욕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뒤늦게나마 마음을 잡아 본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1심 주심판사 앞에서의 최후진술을 항상 머리 속에 되뇌면서 살고 있다.
“뭣도 모르고 까분 죄가 있으니 죗값을 받는 거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나 때문에 피해를 입으신 여러 분들한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고, 또 국민들에게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죄송스럽습니다. 현철이와 어려서부터 친구지만 친구의 사회적 입장을 망각하고 경거망동한 것을 사죄 드립니다.”⊙
보기와 달리 김현철은 장사였다. 팔 힘도 아주 세서, 팔씨름을 하면 지는 법이 없었다. 체격은 작아도 깡다구와 배짱이 보통이 아니었다. 우촌초교 체육시간에 혼자서 반 아이 60명을 상대로 씨름 시합을 하다 병을 얻었다고 했다.
전학 온 첫날 그의 모습을 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김현철은 친구들에게 인사말을 하라는 선생님 말씀에 “대신 노래를 할게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태연한 얼굴로 “깡통 줄게~ 밥 얻어 와라~ 거지대장 굶어 죽겠다”라는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도 웃었다. 현철이와 나의 30년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현철과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중대 부속중학교 입학 후였다. 중1 때 그는 반장이었고, 나는 규율부장을 맡았다. 또 부반장을 하던 정지수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세 명이 아주 친했다.
김현철과 나는 각기 다른 고등학교에 추첨 배정되면서 잠시 헤어졌다. 우리 셋은 학교는 달라도 다들 인접한 위치에 있어 변함없이 우정을 키워 갔다.
결혼과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87년 귀국한 현철이는 취직을 하려 했다. 여기저기 원서를 넣었지만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셨던 김무성 전의원의 주선으로 현철이는 1987년 쌍용증권에 입사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면서 현철이는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며 대외적으로 정치에 대한 야망을 완전히 접은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잘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정치가 꿈이다”고 줄곧 이야기하던 현철이가 그렇게 쉽게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철 부탁으로 정치에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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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11월 14일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유세가 열린 광주역 광장에서 YS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선거유인물을 불태우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다. 전남, 특히 광주 지역은 냉정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했다. 유세 현장에서 봉고차 앞뒤로 YS의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는 우리 차를 향해 사람들이 돌팔매질을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마치 북한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격전지 광주를 돌아다녔지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주 다음 유세 지역은 마산이었다. 톨게이트에 진입해 밖을 내다보니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었다. 광주에서 당한 대접과 비교하면 지옥과 천국이었다. 돌을 맞아 엉망이 된 봉고차를 수리하러 간 카센터도 마찬가지였다.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자 “돈은 무신 돈입니까? 내가 돈 받자고 차 고치 드린 줄 압니까?”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 광주에서 얻은 상처가 마산에서 싹 나았다.
1987년 대선 한가운데서 일하면서도 사실 나와 친구들은 선거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때 처음으로 여론조사를 도입했다. 박종웅(YS비서·이후 국회의원 역임)씨가 선거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데이터 분석을 해서 보고하니까 YS가 그걸 보고 나서 “아, 이제 선거에서도 여론조사 같은 정확한 데이터 작업이 필요하겠다”며 현철이에게 여론조사기관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1988년 YS의 지시를 받은 현철이가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앞 건물에 ‘중앙조사연구소’를 열었다. 초창기 멤버로는 중대부중 동창인 윤성로가 직장을 그만두고 합류했고, 신동철 고영규 채영일 등이 공채를 통해 선발됐다.
대선이 끝난 후 나는 회사로 복직했다. 하지만 현철이가 하는 일은 계속 돕고 있었다. 특히 중앙조사연구소에서 하는 여론조사 업무는 대부분 전산 작업이라 내 도움을 필요로 했다. 내가 다니던 부국상호신용금고는 신촌에 있었는데 회사 일이 끝나고 나면 연구소로 가서 밤늦도록 데이터 작업을 도와주었다. 여론조사는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하기 때문에 밤 12시까지 작업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현철이는 아예 나보고 당 전산실에서 일해 달라고 했다. 며칠 고민을 하다 “에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데 나도 현철이 믿고 따라가 보자” 하는 심정으로 결정을 내렸다.
1988년 10월경 통일민주당 전산실장으로 정치 입문했다.
전격적인 3당통합과 사조직 만들기
1991년 1월 22일 민정·민주·공화 간 3당 통합이 이뤄졌다. 3당 통합이 있기 전인 1월 20일 저녁 현철이를 만났다.
현철이의 생각은 “민정당과 합당하게 되면 통일민주당에서 대표를 맡게 되는데, 그에 대비해 우리가 미리 사조직을 만들어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직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던 YS는 이미 현철이에게 직접 사조직을 만들도록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현철이와 나는 곧 광화문에 위치한 주택은행 2층에 사무실을 열고 3당 통합에 대비한 사조직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렇게 해서 ‘민주사회연구소’가 만들어졌다. 모태는 현철이가 운영하던 중앙조사연구소였다.
마지막으로 정책실을 따로 만들었다. 김현호씨를 비롯해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선동씨(서울 도봉을), 서울대 법대 출신의 김환학씨와 김태윤씨, 현재 금감원에 있는 임세희씨, 그 밖에 정상환·채영일씨 등이 초창기 멤버로 합류했다. 이들은 모두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청와대로 입성했다. 민주사회연구소장은 KBS 독일 특파원 출신의 엄호현씨가 맡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운영은 김현철이 주도했다. 연구소 운영비로 못해도 한 달에 1000만원 이상은 들어갔다. 그 돈을 야인(野人)인 현철이가 매달 만들어 줬다.
전산실 업무와 관련해 1991년 부활절에 있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전산실에서는 각계 인사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해 관리했다. 정보 전산화 과정에서 한번은 불교계 인사가 기독교 쪽에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그해 부활절 축하카드가 불교계 인사들에게까지 전달되었던 일이 있었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일인데, 그때는 상황이 달랐다. 불교계에서 기독교 신자인 YS가 자신들을 기만했다고 반발했다. YS의 분노는 상상 외로 컸다.
YS는 보통 일주일에 한번씩 연구소에 왔는데, 김기수(전 청와대 수행실장) 선배가 도착 5분 전 전화하면 내가 나가 건물 주변에 사람들이 많지 않을 때 모셔 들어오곤 했다. 그날도 통보를 받고 나갔는데 YS가 “이거 니네가 작업했지. 니들 국민학교도 안 나왔냐. 이놈들, 너희들이 나를 망치려고 작정을 했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로서는 “잘못했다”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YS는 연구소에 들어갈 때까지 욕을 했다.
나중에 데이터베이스를 점검해 보니 잘못 분류된 사람이 10여명이었다. 그래서 불교계에 전산 착오로 실수를 했다는 사과 편지를 써서 보냈더니 YS는 오히려 더 화를 냈다. YS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했던지 기자회견을 했다. 음해 세력이 일부러 장난을 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YS에게 처음으로 실망했다. 3당 합당 후 YS가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있을 때 일이었다.
사조직 나사본을 만들다
나사본(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은 대선을 바로 앞둔 시점인 1992년 6월쯤 만들어졌다.
나사본의 업무가 공조직하고 마찰을 빚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사본에서 대선 기간 선보인 시스템 중에서 대중의 반응이 좋았던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선거유세에 사용한 프롬프터였다. 원래 프롬프터라는 것은 TV 뉴스 앵커들이 원고를 읽을 때 보는 것인데 우리는 YS가 유세장에서 연설할 때마다 이것을 사용했다. 장안에 한동안 ‘YS가 갑자기 머리가 좋아졌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다른 후보와 차별화한 것 중 또 하나는 방탄조끼였는데 유세장을 돌아다닐 때 YS는 항상 최신형 방탄조끼를 입었다. 그 제안은 김혁규씨가 했다. 선거가 과열되고 있으니 미리 조심하자며 사비를 들여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나사본의 총괄본부를 맡고 있던 사람은 최형우 의원이었다. 그리고 김혁규씨와 내가 총괄본부 실무를 맡고 있었다. 최형우 의원은 우리와 함께 있을 때면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너희 셋은 나와 끝까지 간다”고. 현철이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만약 그분이 (1993년) 뇌졸중으로 쓰러지지만 않았더라면 현철이나 내 인생은 분명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든 우리를 보호해 주었을 것이다.
최형우 의원은 우리 셋과 만나면 YS를 민자당 대통령후보로 만들기까지 겪었던 무용담을 자주 들려줬다. 주로 박철언씨와 손주환씨에 관한 이야기였다.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손주환씨는 손명순 여사의 집안 동생뻘 되는 사람이다. 그는 YS가 대통령 되는 걸 반대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 그를 최형우 의원이 하루는 일식집으로 불렀다. 그러곤 젓가락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YS가 대통령 되면 너희 가문의 영광이지 우리 가문의 영광이냐?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당신이 자꾸 반대하면 이 자리에서 눈알을 쑤셔 버린다.”
최형우 의원의 성격을 잘 아는 손주환씨는 겁을 먹고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은 박철언씨였다. 최 의원은 그를 만나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제 너 죽고 나 죽고다. 그러니 너 조용히 하고 가만있어. 이미 딴 데로 간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내부에서 쑤시려면 너도 다른 데로 가. 자꾸 딴지 걸면 내가 너 죽이고 나도 죽는다.” 박철언 전 정무장관은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소문이 났던 사람이다.
편지봉투에 가득 찬 100만원짜리 수표
나사본 운영자금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현철이의 주머니에서 나왔지만 조직을 본격 운영하면서부터 내가 YS한테 직접 받아다 쓰기도 했다. 두 번 정도 YS를 직접 만나 돈을 받아 왔던 기억이 난다. YS는 내가 갈 때마다 5~6개의 일반 편지봉투에 100만원짜리 자기앞수표를 가득 채워서 주곤 했다.
나사본의 간부와 직원들은 일체의 경비를 모두 나에게 타서 썼다. 현철이가 나에게 자금 운영을 맡겼기 때문이다.
대선 후 YS 정권에서 인천시장을 했던 최기선씨는 대선 당시 돈 문제를 놓고 나와 다툰 적이 많았다. 최기선씨는 영수증을 빨리 처리해 주지 않을 때면 사무실 밖에서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 경우 입장이 난처했다. 최기선씨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얼굴을 마주하고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큰 마음 먹고 “돈 좀 아껴 쓰시라”고 하면 최기선씨는 “부하 직원들이 돈 썼다는데 그럼 내 돈을 주라는 말이냐”며 오히려 나에게 화를 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그를 만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경우이기는 했지만 YS 정권에서 내무장관을 했던 김우석씨는 평소 나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형님 밑의 사람들한테 최대한 돈을 아껴 쓰라고 하고 불필요한 영수증은 올리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나사본 시절의 에피소드 중 하나는 최형우 의원의 업무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내가 ‘03(영삼) 시계’를 만든 게 사건이 돼서 국민당 소속 당원 몇 명이 정주영씨 지시로 나를 잡으러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랑 김혁규씨 둘이서 한동안 그들을 피해 숨어 다녔다. 하루는 최형우 의원이 우리 둘을 서교호텔로 불러냈다. 만나자마자 그는 대뜸 욕을 퍼부으면서 “이 중요한 시기에 너희들이 도망을 다니면 도대체 선거는 누가 맡아서 하냐, 이 미친 새끼들아!!” 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면서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내일부터 당장 나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날 최형우씨는 평소와 다르게 술을 많이 마셨는데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이다. 최 의원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YS의 홍보 전단지를 작업할 때였는데, 그 업무는 홍보본부장이었던 박관용씨(그후 국회의장 역임)가 전적으로 맡아서 진행하고 있었다.
김현철, 최형우와 자주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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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우 전 의원. |
박관용씨는 “일반인들이 보면 마음에 안 들지는 몰라도 홍보 전문가 입장에서 판단했을 때 이게 가장 나은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최형우 의원이 “그럼 이 전단지를 일반인인 국민들이 보는 거지 전문가들이 보냐? 일반 사람들 무시하고 전문가들 눈에만 좋은 게 최고라면 니네 전문가들끼리 봐라” 하고 대놓고 화를 냈다.
성질 하면 현철이도 결코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 최형우 의원과 부딪친 적도 많았다. 특히 운영자금을 두고 다툰 적이 꽤 있었다.
민주산악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던 최 의원은 자금 문제로 많이 시달린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나한테는 부담을 주기 싫어서인지 내 앞에서 돈 얘기를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분이 어느 날은 지나가는 말처럼 “산악회에도 자금지원 신경을 좀 써 주라”는 말을 했다. 그제서야 ‘아차’ 하는 마음이 들어 그 이야기를 현철이한테 전했던 적이 있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한때 언론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100억짜리 사과박스는 정치판에 뛰어든 이후 나도 심심찮게 만져 보았다.
사과박스 하나에 100만원짜리 헌 수표를 채우면 100억원이 된다. 선거 당시 유세를 지원하러 다니던 현철이와 나, 그리고 친구들은 100억짜리 사과박스를 만들어 유세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미처 은행에 넣을 시간이 없어 내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닌 것이다. 그 돈은 내가 나사본 운영자금으로 썼다.
나사본의 대선 잔금은 120억원
한번은 100억원 돈 박스를 들고 이태원 캐피탈 호텔을 찾았다. 그곳에 금고를 하나 마련해 두고 돈을 그 안에 두었는데, 금고 하나에 100억이라는 돈이 다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호텔 방 안의 가구 틈새나 눈에 잘 안 띄는 곳곳에 수표 다발을 숨겨 놓았고, 그래도 남는 돈은 양복 안주머니에 감추고 다닌 적도 있었다. 양복 안주머니에 수표 다발을 넣고 다니는 날에는 행여 수표를 한 장이라도 잃어버릴까 봐 불안해서 양복 웃옷조차 제대로 벗지 못했다.
당시 용산에 이동통신 사무실이 있던 자리에다 나사본 사무실을 만들려고 인테리어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 기자들이 사무실로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현철이를 비롯한 나사본 당직자들은 가능한 우리 조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하고 있었다. 언론에 알려지면 분명 좋지 못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총괄조직본부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 바로 옆 건물에 다시 사무실을 차렸다. 나사본에서는 따로 언론과 기자 관리를 하지 않았다.
나사본에서 운영자금으로 사용하고 남은 돈은 120억여원이었다. 남은 자금은 통장을 만들어 현철이한테 주었다. 현철이는 나한테 관리를 부탁했다. 당시 은행이자가 13.5%일 때였는데 120억원을 예치해 두면 세금을 제외한 1년 이자만 10억이 넘게 나왔다. 금융실명제 이전이라 차명(借名)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려 매월 이자만 관리하는 통장을 따로 만들었다.
그때 나를 도와 나사본 자금을 집행했던 사람 중에 백모라는 친구가 있었다. 현철이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가 사업을 하다 5억원을 부도내고 미국으로 도망갈 처지에 놓였다. 내가 현철이에게 2억7000만원만 도와주자고 했지만, 현철이는 “난 기업에 돈 한 푼 안 받는다”며 거절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날 현철이가 나한테 전화를 했다. 현철이는 시간을 정해 주며 라마다르네상스 호텔 지하로 내가 직접 차를 몰고 가면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가 돈을 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약속 장소로 차를 몰고 가자 현철이의 말대로 헤드라이트를 켜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차가 한 대 있었다. 그가 건네 준 여행용 가방에는 2억7000만원이 현금으로 들어 있었다. 가방이 어찌나 무겁던지 하는 수 없이 비서를 시켰다. 나중에 이 돈이 문제가 돼 검찰 조사를 받았다.
당시 돈을 받을 때에는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검찰 조사 과정에서 알고 보니 현철이가 나에게 준 2억7000만원은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이 준 것이었다. 그날 돈 가방을 들고 온 기사는 이성호 회사의 직원이었다. 나중에 성호한테 들으니 현철이가 전화를 해 사정을 설명한 후 2억7000만원을 현찰로 나에게 갖다주라고(백모씨에게 주도록) 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이성호가 보관한 현철이의 70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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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 |
이후 현철이는 성호에게 50억원을 주면서 성호의 회사를 통해 실명화시키라고 했다. 나머지 70억원은 김기섭씨에게 주어 처리했다고 들었다.
나는 성호에게 내가 돈을 관리하던 방식에 대해 일러 주었다.
그동안 13.5%라는 은행이자는 따로 이자 통장을 만들어 저금해 주었으니, 나처럼 돈은 은행에 맡겨 두고 이자만 따로 챙겨 현철이에게 주라고 일렀다. 거금을 떠안게 된 성호는 혼자 꽤 고민한 모양이었다. 성호가 끝내 그 돈을 은행에서 관리하지 못하고 집 안에 보관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후 검찰조사를 통해서였다.
현철이 곁을 떠나 다시 내 사업을 시작하게 되어 마음이 후련하기만 했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지 못했고, 성호가 어떻게든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딱하게도 성호는 현철이가 떠맡긴 50억을 자기 부친 명의로 실명화하긴 했으나, 은행에 예치한 채로 두지 못하고 모두 현찰로 바꿔 2년 반 동안 자기 집 벽장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래도 사정을 모르는 현철이에게는 2년 반 동안 자기 주머니를 털어 이자 명목으로 돈을 갖다준 것이었다.
이런 성호의 속사정을 모르는 현철이는 2년 후 성호에게 다시 20억원이 넘는 돈을 갖다주고 그것도 같이 맡아 달라고 했다. 그 20억은 2년 반 동안 성호가 현철이에게 이자로 갖다준 돈이 포함된 것이었다.
나중에 맡았던 돈 합계 70억원을 현철이에게 돌려줄 때 성호가, 나에게 (백모씨에게 주도록) 전해 준 2억7000만원을 빼고 주었더니 현철이는 “왜 돈이 비냐?”고 물었다고 한다. 결국 성호는 현철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또 자기 돈으로 2억7000만원을 채운 후 70억원을 만들어 현철이에게 돌려주어야만 했다.
YS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부쩍 현철이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정치인뿐 아니라 재계 인사들도 현철이를 수시로 찾았다. 내가 현철이의 뒤치다꺼리를 한 것 중 가장 주요한 일은 현철이 앞으로 수도 없이 오는 각종 보고서와 이력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 기억을 못하지만 내가 본 이력서 중에는 당시 현직 차관과 현역 장성 이력서도 나한테 있었다. 그런 것을 파기 안 하고 갖고 있다가 나중에 대검 수사할 때 문제가 되기도 했다.
현철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이력서들
현철이는 자기가 보고 난 후 쓸모없다고 판단한 보고서나 이력서는 모두 나를 줬다. 일주일이면 그게 산더미처럼 쌓였다. 나는 현철이가 넘겨준 그 문건들을 함부로 누구에게 줄 수도 없어 일일이 그것들을 분쇄했다.
나중에 현철이를 아끼는 사람들은 현철이에게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충고한 적도 있었다. “네가 10명을 만나면 들어줄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몇 개냐? 한 가지도 들어줄 수 없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부탁을 들어준 한 사람은 너를 좋아하겠지만 나머지 아홉 명은 너의 적이 되는 것이니 아예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는 말도 했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현철이는 그 충고를 새겨듣지 않았다. 아침 식사 시간부터 시작해 저녁 식사 시간까지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날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아침 두 번, 저녁 식사를 두 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방에 가면 꼭 어떤 모임에 가는데, 그런 자리에서는 사람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뭘 써서 몰래 밑으로 내 쪽으로 건네준 적도 있다. 현철이가 준 메모에는 ‘이게 뭐하는 모임이냐?’는 말이 적혀 있곤 했다. 그럴 정도로 그때 현철이는 사람들한테 치여 정신없이 다녔다. 그저 매일 현실에 쫓겨 다니면서 누가 만나 달라고 하면 ‘이게 아버지를 위하는 일인가 보다’ 하고 만나고, 어떤 모임에 와 달라고 하면 ‘아버지가 못 가니 나라도 가야지’ 하고 참석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에 치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회사 일로 외국 출장을 가게 될 때면 내 사무실로 3~4명이 찾아와 나를 기다리는 일이 허다했다. 여행 경비로 쓸 돈을 주려는 의도에서였다. 봉투를 열어 보면 보통 100만원 정도의 돈이 들어 있었다.
고위직 인사들이 수시로 전화를 걸고 찾아오니 내 사무실의 직원들도 의아해할 정도였다. 한번은 새로 입사한 여직원이 다른 직원에게 “우리 사장님 뭐 하시는 분인데 정부 인사들이 저렇게 매일 전화하느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친구인 나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현철이에게는 오죽했겠는가.
한국行 비행기에서 처음 안 한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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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철의 국정농단을 폭로한 의사 박경식씨. |
언론 보도와 달리 나는 한보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 정태수 회장을 만난 적도 없고 그 자녀들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상아제약 회장으로 있던 둘째 아들 정원근과만 술자리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임채정 의원이 현철이와 나를 두고 한보철강 2000억 리베이트설을 제기하자 검찰에서는 내 회사인 심우 사무실과 집을 압수수색했다. 주요 혐의 요지는 한보가 철강 기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현철이가 한보에 열연 및 냉연설비 기계를 판 독일의 SMS사로부터 2000억 리베이트를 받았고 그 중간 역할을 내가 했다는 것이었다.
검찰의 압수수색 날짜는 1997년 3월 21일이었다. 나는 그 날짜를 지금까지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날이 바로 내 둘째 아들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아이 낳는 것을 지켜보고 무심코 TV를 켰는데 압수수색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1997년 3월 현철이는 국정농단을 이유로 검찰 조사를 받은 직후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현철이는 한보 리베이트설이 터지고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씨가 현철이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공개하면서 다시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박경식 테이프에는 현철이가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과 YTN 사장 인선과 관련한 내용을 놓고 통화하는 모습 등이 담겼다. 국정농단의 결정적 증거가 드러난 것이다.
한보사건 와중에 한보철강 리베이트설까지 터져 나오자 현철이와 나는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언론에서 우리가 받았다고 하도 강력하게 써 대니까 현철이와 나는 서로를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너 정말 나 몰래 받은 거 없냐?”고 상대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한보에 관해서만큼은 철저히 결백했다. 한보 쪽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했고, 또 2000억이라는 그 많은 돈은 아무리 현철이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검찰 조사에서도 이 문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2000억 리베이트설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한보사건이 터진 후 홍인길(전 대통령 총무수석)씨가 구속된 이후 이런 일이 있었다. 박정태씨라고 당시 도로공사 사장이 있었는데 그분은 상도동계 원로였다. 하루는 그분이 느닷없이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그분은 얼굴이 사색이 돼 “큰일 났다”며 자신이 YS에게 한보 정태수씨를 소개해 준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정태수씨와 박정태씨는 동부 이촌동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서 살았는데, 정태수씨가 하도 부탁을 해 YS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자기 집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분명 YS랑 정태수는 관련이 있을 거다. 그렇다면 한보사건이 터지면 안 되는데 이렇게 터져 버렸으니 어쩌면 좋겠냐”고 조바심을 했다. 이후 이 얘기를 현철이에게 했는데 현철이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는 “YS와 정태수 두 사람은 아무 관계도 없다”며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미처 알지 못하고 저지른 범죄
한보사건과 관련한 검찰의 1차 조사와 국회 청문회가 끝난 후 대검의 한 간부가 간접적으로 연락을 해 왔다. 그땐 이미 홍인길 전 수석이 구속되고 난 후였다. “4월 20일경 검찰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냐. 개인적으로 정리할 거 있으면 미리 정리하고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YS와 현철이에 대한 당시 여론분위기로 볼때 막연하지만 구속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현철이랑 내가 구속되지 않으면 결코 사건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혼자 신변 정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만 나 자신은 특별히 처벌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검찰이 어떤 사안으로 나를 구속시킬까 그 점이 궁금했다.
검찰과 출두 날짜를 조율하고 있는 도중에 이 간부로부터 또 연락이 왔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시간을 오래 끌면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조사 기간을 줄이기 위해 몇 가지 사안들에 대해 미리 염두에 두고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 몇 가지 사안 중 하나는 민방 선정 과정에서 내가 각종 이권에 개입, 영향력을 행사해 거액의 자금을 받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방사업 신청서를 낸 기업들 중 임광토건, 라인건설, 삼정건설, 한국종합건설 대표들과는 최동렬의 소개로 몇 차례 자리를 가졌다. 임광토건 부사장으로 있던 임재풍은 이미 그전부터 나와 친구 사이였다. 광주 지역에 신청서를 낸 라인건설의 공병곤 부회장과는 그 전까지 일면식이 없던 사이였는데 민방 선정 문제로 처음 만났다. 대전 지역 신청 업체인 삼정건설의 이강연 사장, 인천지역의 한국종합건설 김병희 회장 등과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에서는 민방 선정 과정에서 내가 이들 업체와의 친분을 앞세워 압력을 행사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 이 사람들과 나는 이들 업체가 민방에서 탈락한 후 오히려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이들로부터 돈을 빌리게 된 이유는 내가 하던 사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한보사건이 터졌을 무렵 나는 복권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5년 복권기계를 사 놓고도 시험 가동이 늦어져 수주를 할 수 없었다. 1996년 한 해만 30억 정도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다행히 1997년 초 국민체육진흥공단, 근로복지공단과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공장 가동 자금이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그 사람들한테 돈을 빌렸다. 그렇게 빌린 돈이 총 8억7000만원이었다. 그들에게 빌린 돈은 나중에 대가성이라는 이유로 모두 추징금을 맞게 되었다.
검찰 출두 전 대검 간부는 이런 내용을 미리 전해 주었다.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회사 운영을 위해 썼고, 무작정 손을 내민 것도 아니고 우리 회사의 어음을 주고 빌렸는데, 왜 대가성이라고만 몰아붙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나’ 하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알선수재’라는 죄목
약속한 날 대검 청사로 갔다. 이훈규 중수부 과장은 나에게 내가 관리하다 현철이에게 돌려준 120억의 행방을 아주 소상하게 정리한 메모를 보여주었다. 최초의 돈 출처와 최종 사용처만 종이로 가려 둔 채 나머지 돈이 흘러간 행방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출두할 때부터 검찰 조사 내용을 부인할 생각도 없었지만 이 과장은 한마디의 말도 없이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내가 별다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이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지금부터 수사관하고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수사관은 내가 들어가자 백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에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만난 사람들의 명단을 다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짐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백기투항한 마당에 감출 것도, 감추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빠르게 적었다. 1~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 나간 수사관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3~4시간 동안 딱딱한 의자에 꼬박 앉아 있으려니 미칠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로 거의 폭발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수사관이 다시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명단을 쓰윽 살펴보더니 “우리랑 길게 싸울 것 같지는 않네요”라고 했다.
민방 사업 신청업체들로부터 빌린 돈에 대한 알선수재 여부를 놓고 검찰과 가장 오랫동안 맞섰다. 나는 처음부터 정당하게 회사 어음을 주고 빌려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사관은 “박태중씨야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겠나? 그 정도 위치에 있는 당신에게 혹시 돈을 안 빌려주면 나중에 불이익을 당할 거라고 생각해 빌려준 거 아니야?”고 반박했다. 공방 끝에 “그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내가 그 속을 어떻게 알겠나? 어쩌면 그런 부담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겠다”라고 대답했다. 검찰은 “그러면 그건 알선수재에 해당된다”고 간단히 결론지었다
검찰, 대선잔금·한보에 대해선 묻지도 않아
내가 쉽게 손을 들게 된 또 다른 다른 이유는 친구인 임광토건 임재풍 사장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다른 사업자와 달리 검찰 조사 결과에 강하게 반발해 상당한 고초를 겪고 있었다. 조사를 받던 중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치자 임재풍은 “야, 나 너한테 돈 꿔준 거 맞잖아!”라고 화를 냈다.
임재풍은 고집이 보통이 아닌 친구라 검찰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48시간 이상 구금할 수 없다는 법조항 때문에 이틀 후 나갔다가 다시 검찰로 들어오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런 그를 지켜보기 안쓰러워 내가 먼저 임재풍과의 대질을 요구했다. 그와 둘이 만난 자리에서 “네가 나한테 돈을 안 빌려주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돈을 주었다면 그건 알선수재가 된다고 하더라. 그러니 더 끌지 말고 그렇다고 해”라고 일러주었다. 결국 임재풍은 내가 시킨 대로 했다.
임광토건의 경우는 나중에 나한테 준 돈 4억은 빌려준 것이라며 되돌려 받겠다고 나를 상대로 민사소송를 따로 내 승소하기도 했다.
이틀간의 조사가 끝난 후 나는 알선수재 등의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나사본에서 쓰고 난 잔여분 120억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다. 한보에 관한 문제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 유명한 몸통이니, 깃털이니 하는 한보 자금의 배후에 대해서는 아예 조사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한보 때문에 잡혀 들어갔는데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120억 부분에 대해 고심을 많이 했다. 결국 ‘대선자금’이란 표현은 못하고 대신 ‘나사본 운영 잔여금’이란 표현을 썼다.
김현철의 自繩自縛
검찰은 이 사건을 매듭지으려면 미국에 나가 있는 성호도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현철이가 성호의 귀국을 철저히 막고 있었다. 검찰은 성호의 회사인 세미냉장과 포스코 납품회사를 상대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사건 담당인 김준호 검사는 이성호와 신일고 선후배 사이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내가 조사를 받고 있는 방으로 와 “성호더러 귀국해서 조사 받으라고 해. 그래야 매듭이 지어진다”고 했다. 구속 상태였던 나는 그 자리에서 성호에게 전화를 걸어 보겠다고 대답했다.
검찰이 귀국을 종용한 가장 큰 이유는 나사본 잔금 120억 중 성호에게 건네진 50억에 대한 부분이었다. 구속을 원칙으로 현철이를 소환하기로 결정했지만 막상 현철이에게 적용할 만한 적당한 죄목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현철이는 조세포탈 혐의와 알선수재로 구속됐다. 우리나라에서 세금 포탈로 정치인이 구속된 것은 현철이가 처음이라고 들었다. 검찰이 생각해 낸 가장 유력한 죄목은 알선수재였는데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철이의 이권 개입 여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성호가 귀국해서 조사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검찰의 속사정을 알고 있던 나는 성호에게 “지금 안 들어오면 너희 회사 망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너만 손해를 보게 된다”며 무조건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그런데도 성호는 현철이의 양해가 있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성호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지경에 처하고도 현철이에 대해 변함없는 충성을 보이는 성호가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날 끝내 성호의 고집을 꺾지 못한 나는 “지금 내 처지가 현철이랑 통화할 수가 없고, 설득도 하기 어려운 상태다. 그러니 직접 연락해서 어떻게든 현철이를 설득해 귀국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랑 통화를 한 후 성호도 회사를 살리려면 자신이 귀국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철이를 설득했다고 한다. 성호와 통화를 한 후 현철이는 마침내 성호의 귀국을 허락했다.
그 대신 현철이는 자신이 성호에게 맡긴 70억의 이자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법을 잘 모르는 현철이의 실수였다. 차라리 이자로 받았다고 하면 될 것을 공연히 덮어 두려다 그것이 알선수재로 걸려 결국 발목을 잡히게 된 것이다.
검찰에 나온 성호는 죄수복을 입은 나를 보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런 성호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성호와 만난 자리에서 “내가 보기에 너는 구속될 일이 없다. 특히 120억 부분에 대해서는 네가 알고 있는 대로 이야기해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김현철 구속에 숨겨진 진실
1997년 5월 현철이가 검찰에 소환됐다. 그간 검찰의 돌아가는 내용을 직접 겪은 성호와 나는 현철의 협조가 있으면 사안이 간단해지리라 판단했다. 문제는 이 모든 사건의 진행이 빨리 멈추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철이 소환되기 전날 이훈규 과장에게 제안하기를, 현철이를 따로 만나게 해 주면 수사에 협조하도록 성호와 함께 설득을 해 보겠다고 요청했다.
이 과장은 현철이에게 “박태중씨랑 이성호씨랑 먼저 이야기를 좀 나누시라”고 한 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검찰은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전부 다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변명거리는 없다. 그러니 감추려 들지 말고 모두 다 이야기하라”고 말해 주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현철이는 대뜸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고 말을 잘랐다.
그는 “조금 전 들어오다 아버지랑 통화했다. 나 절대 구속 안 된다고 했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훈규 과장이 우리에게 할애해 준 시간은 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들어온 이 과장은 “박태중씨, 이성호씨 수고했습니다. 그만 들어가십시오”라며 우리를 수사관실로 돌려보냈다. CCTV로 현철이와 나의 대화 내용을 모니터했던 것이었다.
YS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살았던 현철이였기에 그는 끝까지 자신이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검찰에서 제시하는 각종 혐의 내용들도 모두 부인하며 끝까지 버텼다. 경복고 동문들인 두양건설의 김덕영 회장, 우성건설 최승진 부사장, 신성그룹 신영환 회장이 매달 모아서 준 6000만원은 동문회 차원에서 현철이의 활동비 명목으로 준 것이라 검찰도 그것을 대가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현철이와 나 사이에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던 일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친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돈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현철이가 경복고 동문들로부터 매달 돈을 받았다는 사실도 검찰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현철이가 대동주택 곽인환 사장을 만난 건 강상일의 소개였다. 당시 청와대 총무수석실 인사재무비서관으로 일하고 있던 강상일은 곽 사장의 부탁으로 그를 현철이의 광화문 사무실로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그때 곽 사장이 현금 5억원이 든 사과박스 두 개를 준비해 갔다고 한다. 곽 사장이 돌아가자 현철이는 강상일을 따로 불러 “날더러 이 돈을 어떡하란 말이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더니 10억원을 모두 10만원권 수표로 바꿔 오라고 지시했다. 강상일은 그 후 돈을 모두 10만원권으로 바꿔 주었다.
대동주택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밝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강상일은 그 일로 인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현철이는 곽인환 사장에게서 받은 사과박스 안에 돈 5억이 들어 있었다고 했고, 대동주택 측은 현철이에게 분명히 10억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양쪽 말이 다르다 보니 중간에서 심부름을 한 강상일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사실 확인을 위해 현철이와 강상일을 대질심문까지 했다.
나중에 현철이는 “내가 착각을 한 것 같다. 10억을 받은 게 맞다”라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 후 그는 YS에게 “강상일이 대동주택에서 받은 5억을 떼먹었다”고 말했다. 그 일로 현철이와 강상일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기게 되었고, 지금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지내는 상태다.
“도대체 무슨 혐의로 구속인가”
현철이는 임의동행 시간인 48시간을 다 채우고 구속됐다. 나중에 이훈규 과장은 현철이에게 구속 사실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과장이 현철이에게 “이건 구속할 수밖에 없는 사안입니다”라고 말을 꺼내자 현철이는 몹시 의아하다는 듯 “도대체 나를 무슨 혐의로 구속시킬 거냐?”고 되물었다 한다. 당시는 대동주택으로부터 받은 돈 10억이 불거져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검찰은 일단 조세(증여세)포탈 혐의로 현철이를 구속했다. 민방 사업과 관련된 알선수재는 나중에 추가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현철이가 가장 난감해했던 사항은 성호와 관련된 이자 부분이었다. 성호는 현철이가 하도 당부를 하니까 조사를 받을 때 그 돈은 이자로 준 것이 아니라 활동비로 준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
구속 후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현철이가 자신의 담당 변호사인 여상규씨와 만나 이 얘길 전하자 여상규 변호사는 ‘활동비로 받았다면 알선수재가 된다’며 오히려 ‘성호 쪽에서 이자조로 줬다고 말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여 변호사가 따로 성호를 만나 진술을 번복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사건이 일단락된 뒤였기 때문에 성호가 여 변호사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성호가 진술을 번복한다 해도 오히려 검찰의 더 심한 추궁에 역효과만 날 뿐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현철이는 자신이 감옥에 가게 된 이유는 모두 성호 때문이라며 그를 원수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이성호와의 인연
성호와 현철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김기섭씨를 통해서였다. 원래 김기섭씨는 신라호텔 상무였는데, 성호 아버님인 이건 회장이 그곳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성호와 김기섭씨가 연결된 것이다. 내가 이성호를 알게 된 건 1992년 대선이 한창이던 때였다.
대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현철이와 친하게 동행하던 그를 보고는 의아해했다. 내가 모르는 현철과 친한 사람이 몇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는 자연스레 친해져 별별 고락을 같이 겪는 사이가 되었다. 성호는 여러모로 부족함 없이 자란 탓에 현철이처럼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거나 지시를 따르는 일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런 성호가 유일하게 자신을 죽이고 따른 상대가 바로 현철이였다.
YS 재임시절 현철이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어디 가서 마음 편히 술을 마실 수도 없었다. 그런 현철이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준 것도 바로 성호였다.
문민정부 시절 우리 셋이 그나마 가장 많이, 가장 마음 편히 만날 수 있은 사이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이였기에 큰일을 겪고난 후 이렇게 각자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 더욱 마음 아프다. 현철과 나는 초등학교 이후 거의 모든 생활을 공유할 만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따라서 내가 현철이를 욕하는 건 나 자신의 반 이상을 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성호는 입장이 달랐다. 그는 건설업을 하고 있었기에 구설수에 많이 오르내릴 수 있다는 걸 알아서 이권과 관계없는 사업을 하고자 애썼다. 성호는 새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나와 자주 상의를 했기 때문에 세부 내용에 대해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나중에 오인환 전 공보처장관이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성호의 회사는 서초 케이블 TV 선정과정에서 2등 업체보다 월등히 높은 점수차로 1등을 했다. 또 현철이가 힘을 써 따낸 것처럼 알려진 포스코 대리점도 현철이의 힘이 작용한 것이 아니었다. 현철의 측근 중에 사업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끊임없이 이런저런 이권에 시달렸지만, 현철이의 혜택을 봤다면 친하다는 이유로 그저 남들이 알아서 대우해 주는 정도의 혜택을 봤을 뿐이라는 걸 나는 잘 안다.
김현철이의 자금을 보관해 오던 이성호는 실명화한 50억원 부분으로 오히려 자금출처 조사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자금을 더 이상 보관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반납하고 스스로 외국생활을 택했다. 실명화 직후 성호에게 자금을 맡기자고 현철이에게 제안했던 나로서는 이성호에게 마음의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김현철, YS가 대통령 된 후 변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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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 |
현철이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였다. 나는 그를 변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주변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철이는 “아버지가 대통령인데 너도 한자리해야 될 거 아니냐?”는 식으로 권력욕을 부추기고 욕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유혹을 많이 받았다.
YS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현철이나 나는 마흔이 채 안된, 즉 불혹(不惑)의 나이에 못 미쳤다. 보통의 남자라면 직장에서 선후배 눈치 살피며 자기 처신에 고민하며 살아야 할 나이인 것이다. 현철이는 그 나이에 장관급 인사들로부터 상관(上官) 대접을 받았다. 제 아무리 겸손의 미덕을 갖춘 사람이라도 주변에서 끝없이 비위를 맞추고 좋은 소리만 하면 결국 그 분위기에 취할 수밖에 없다.
현철이는 처음부터 청와대나 정보기관은 우리 쪽에서 잡아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김기섭씨를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앉히고, 이충범·김혁규씨 등을 청와대 사정비서관 민정비서관 등에 대거 포진시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 있으니 고급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무리 진심 어린 고언을 했다 하더라도 현철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현철이의 정보력이 무시할 수 없는 집단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현철이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뭣도 모르고 까분 죗값’
이 글을 정리하면서 내가 가장 반성하는 부분은, 내 스스로 제일 싫어하는 짓을 현철이랑 같이 했다는 사실이다. 나의 첫 번째 잘못은 자기 노력에 의하지 않고 너무 쉽게 그런 중요한 자리에 올라갔다는 것이고, 둘째로, 더 중요한 것은 현철이나 나나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해 좋은 방향으로 전진시키지 못하고 그 상황에서 즐기기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현철이나 나나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사실 나는 현철이 곁을 지킨 대가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그래서 가끔 옛날을 돌이켜 보면 속이 상해 울화가 치밀 때도 있다. 하지만 돈이든 권력이든 내 노력으로 이룬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별로 욕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뒤늦게나마 마음을 잡아 본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1심 주심판사 앞에서의 최후진술을 항상 머리 속에 되뇌면서 살고 있다.
“뭣도 모르고 까분 죄가 있으니 죗값을 받는 거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나 때문에 피해를 입으신 여러 분들한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고, 또 국민들에게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죄송스럽습니다. 현철이와 어려서부터 친구지만 친구의 사회적 입장을 망각하고 경거망동한 것을 사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