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망 사실상 모토로라 테트라가 독점, 호환 문제로 3600억이던 당초 예산 3조5000억으로 증가
⊙ 2008년 감사원, “특정회사 독점과 예산과다 투입, 선정된 통신기술 방식과 사업추진 방식
재검토하라”
⊙ “청와대·경찰청·소방방재청 간부 등이 특정 업체와 유착해 국가 예산을 낭비한 노무현 정권의
총체적인 부패 스캔들”(이은재 의원)
⊙ SOP(표준운영절차) 마련이 기술방식 선정보다 우선돼야
⊙ 극소수 기관만 구축했으나 현재까지 1800억원 넘게 투입, 322개 기관 구축하려면 수조원 들 것으로
예상
⊙ 2008년 감사원, “특정회사 독점과 예산과다 투입, 선정된 통신기술 방식과 사업추진 방식
재검토하라”
⊙ “청와대·경찰청·소방방재청 간부 등이 특정 업체와 유착해 국가 예산을 낭비한 노무현 정권의
총체적인 부패 스캔들”(이은재 의원)
⊙ SOP(표준운영절차) 마련이 기술방식 선정보다 우선돼야
⊙ 극소수 기관만 구축했으나 현재까지 1800억원 넘게 투입, 322개 기관 구축하려면 수조원 들 것으로
예상
2008년 감사원 감사로 중단됐던 국가재난안전무선통신망(이하 재난망) 구축사업이 재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 사업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통합무선망이 없어 인명 피해가 컸다는 감사원의 지적에 따라 추진됐다. 국가적인 재난·재해가 발생했을 때 관련 기관들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지휘통신 체계를 일원화하는 것이 이 사업의 목적이다.
당시 국무조정실(후에 행자부 소방방재청으로 업무 이관)은 2006년까지 3600억원의 예산을 들여 디지털 TRS(Trunked Radio System·주파수공용통신)의 테트라(TETRA·Terrestrial Trunked Radio) 방식으로 관련 기관의 무선망을 통합하겠다고 발표했다. 해당 기관은 소방방재청, 경찰청, 철도청(현 코레일), 군(軍) 등 1441개 기관이었다. 디지털 TRS에는 자가망에 유리한 유럽 방식의 테트라와 상용망에 사용 중인 북미(北美) 방식의 아이덴(iDEN) 등이 있다. 테트라는 자체 독자망을 운영할 수 있으나 망을 새로 깔아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 반면 아이덴은 민간이 운영하는 망을 사용하므로 경제성이 뛰어나다.
예산 10배 증가
2003년 국무조정실과 정보통신부는 테트라 방식을 선정한 것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꼽았다. 이 기술이 개방형 유럽표준으로 다른 제조사의 테트라 장비(교환기·단말기)와 연동이 쉽다는 점, 재난 관련 주요 기관인 경찰청이 2001년부터 이 방식으로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테트라 방식에는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없는 모순이 숨어 있었다. 같은 테트라 장비(시스템)라도 제조한 회사가 다를 경우, 해당 회사가 모두 프로토콜(통신 규약)을 공개해야 함께 쓸 수 있다. 그러나 시장점유율이 높은 회사가 영업비밀이나 다름없는 프로토콜을 공개하기란 쉽지 않다. 당시 세계 테트라 시장에서 점유율이 압도적인 회사는 미국의 모토로라였고, 경찰청이 2001년부터 구축한 테트라 장비는 이 회사가 공급하고 있었다. 모토로라가 프로토콜을 공개하지 않는 한 재난망 장비는 모두 이 회사로부터 공급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를 파악한 전문가들은 특정 업체의 독과점과 국내 중소업체들의 줄도산 및 기술종속을 예고하며 우려를 표명했다. 모토로라 한국 총판은 기술 이전을 통해 단말기를 한국 내에서 만들겠다고 했으나 이는 모토로라 본사에서 시스템 프로토콜을 공개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전문가들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모토로라의 테트라 장비가 다른 제조회사의 테트라 장비와 호환이 안되는 바람에 망 구축을 완료하기 위해서는 예산을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늘려야 할 상황이 됐다. 예비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총 사업비가 3조5000억원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같은 장비를 납품하는 업체들 간의 입찰 담합도 적발됐다. 게다가 특정 기업의 독과점 의혹까지 나오면서 사업 추진에 제동이 걸렸다. 일부 언론은 ‘테트라 사업’을 ‘테트라 사건’으로 보도하며 노출된 문제 외에 숨은 의혹들을 제기했다. 이런 내용들은 국정감사에도 매년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결국 감사원이 메스를 들고 나섰다. 2007년 4월부터 6월까지 1달여에 걸쳐 통합망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한 것이다. 그 결과 ‘특정회사 독점과 예산과다 투입 등의 문제가 있으니 선정된 통신기술 방식과 사업추진 방식을 재검토하라’는 결론이 나왔다. 사업은 전면 중단되고 백지화됐으며, 업무 관계자들은 옷을 벗거나 좌천됐다.
전문가 의견 무시
이후 사업은 소방방재청에서 행안부로 이관됐다. 행안부는 소방방재청과 경찰청 등에서 파견된 인력을 토대로 재난안전통신망구축기획단(단장 정상봉)을 구성, 새로운 구축방안을 검토해 왔다. 최근에는 관련 기업들이 제안한 테트라, 아이덴, 와이브로(WiBro·휴대 인터넷) 등의 기술방식에 대한 기술검증을 한국정보화진흥원(NIA)에 위탁해 6개월 동안 실시했다. 그 결과 ‘테트라와 와이브로 기술방식으로 자가망을 구축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냈다.
이 내용이 발표되자 전문가들은 “결국 2008년 감사원 감사결과 발표 이전으로 돌아갔다”며 한숨을 쉬었다. “테트라를 띄우기 위해 주파수도 확보되지 않은 와이브로를 들러리로 내세웠다”고 혀를 찼다. 그도 그럴 것이 적합판정을 받은 테트라는 2008년 이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호환성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특정 장비 납품업체 간의 담합의혹도 씻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와이브로의 경우 NIA의 기술검증 때 700MHz 주파수를 사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이 또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주파수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아날로그 방송용으로 사용하고 있고, 방송 부문과 통신 부문이 서로 사용하겠다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어 재난망 용도로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주파수 할당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 측도 ‘사용불가’ 판정을 내렸다.
2011년 11월 재난망 관련 공청회에서 만난 업계 전문가는 “정부는 어떤 이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테트라 방식으로만 밀어붙이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그는 “사업 초기부터 기관별 업무특성을 고려치 않고 모든 기관을 테트라 방식으로 묶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혈세 낭비라고 수없이 지적했지만 정부는 강행했다”며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지 않으면서 공청회며 토론회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행안부는 기존에 제기됐던 문제점을 해결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보다 기존 망에 연동해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국책 연구원 출신의 한 전문가는 “지난 10년 동안 테트라 없이도 재난·재해에 대응하는 데 큰 차질이 없었다”며 “시스템이나 기술방식 선정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SOP(Standard Operating Procedure·표준운영절차)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확한 SOP도 없이 재난망을 구축하는 것은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고 혀를 찼다. 사실 SOP 미비 문제는 이 사업 초기부터 수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지적됐던 사항이다. 그런데도 아직껏 제대로 된 SOP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사업배경 석연치 않아
이쯤 되고 보니 정부가 전문가와 언론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재난망 구축에 테트라 방식만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지난 정부 실세와 고위 공무원들이 특정 업체를 밀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전문가는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가며 굳이 자가망을 구축하려는 배경에는 퇴직자를 위한 일자리 창출 의도가 숨어 있다”고 말했다. 테트라 방식의 자가망이 구축되면 보수 유지를 위해 KT와 같은 통신 사업자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국감 때마다 자가망 구축의 문제점을 지적해 온 국회의원들도 이 사업의 배경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자유선진당 이명수(李明洙) 의원 측은 이 사업 주무부처 직원들을 불러 대면보고를 받을 때마다 지난 정권의 실세로부터 온갖 공갈과 협박을 받았다고 했고, 한나라당 이은재(李恩宰) 의원 측은 모 인사로부터 “그만큼 했으면 됐으니 이제 멈추라”는 ‘경고 메시지’를 전달받았다고 한다.
이은재 의원은 2008년 말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김경한(金慶漢) 당시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통합망 사업에 관련된 기관들의 공통점은 ‘모토로라’라는 회사가 등장하는 것”이라며 “통합망 사업은 전 정권의 청와대·경찰청·소방방재청 간부 등이 특정 업체와 유착해 국가예산을 낭비한 노무현 정권의 총체적인 부패 스캔들”이라고 몰아붙인 바 있다.
기자는 이번 취재를 위해 몇몇 국회의원 외에 10명이 넘는 업계 전문가들을 만났다. 이들은 재난망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거나 이 사업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었다.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며 이들은 재난망 사업과 관련해 지난 10년 동안 품은 의혹들을 풀어 놓았다.
1. 대구 지하철 참사, 정말 국산장비 때문인가
정부가 재난망 사업을 추진한 것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직후다. 당시 감사원은 청와대 지시로 국책사업감사단을 조직,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 지하철 무선통화 시스템 감사에 나섰다. 이 평가단에는 감사원의 A씨와 B씨가 포함돼 있었다. 이 두 사람을 잘 아는 업계 전문가 지모씨는 “오류투성이인 두 사람의 보고서 때문에 TRS 사업은 출발부터 단추를 잘못 꿰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씨의 말이다.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B씨였습니다. 철도청 무선관리소 출신인 B씨는 평소 모토로라 신봉자였어요. 모토로라 무선장비가 하늘이면 국산 장비는 바닥이라며 우습게 여겼던 인물이죠. B씨는 당시 지하철 사고가 마치 무선장비가 국산이어서 일어난 것처럼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나중에 <대구지하철 감사 백서>라는 책자로 나왔는데, 잘못된 곳이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청와대에 민원을 냈고, 책임자인 A씨를 어렵게 만났습니다. A씨는 제가 잘못된 부분을 조목조목 짚어 내자 땀을 뻘뻘 흘리며 ‘민간인이 왜 국가사업에 관여하느냐’고 역정을 내더군요.”
백서는 전국 철도와 지하철의 무선장비를 바꾸기 위한 행정절차나 다름없었다. 오류투성이인 백서를 토대로 주요 기관들의 통신망을 일제히 점검하게 됐고, 국산 무전기를 잘 활용하고 있는 곳까지 디지털 통합망 장비로 교체하라는 정부의 지시가 내려졌다. 당시 전국 지하철의 대부분은 아날로그 방식인 VHF(Very High Frequency·초단파) 시스템의 장비를 사용하고 있었다. VHF 시스템은 주파수 30~300MHz 대역으로 직진성이 강해 단거리 항공통신이나 라디오 방송, 밀집된 공간의 통신망에 유리한 시스템이다.
지씨의 주장에 대해 B씨는 “통합망 구축 논의는 대구 지하철 참사 이전부터 진행됐고, 대구 지하철 참사의 원인이 VHF 시스템 때문이라고 보고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사고 원인 중 하나로 통신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지적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국내 최대 무선통신 장비 업체였던 한국전기통신(주)은 대구(1,2호선), 대전, 광주, 서울(1,3,4호선), 인천(1호선), 부산 등의 지하철에 저렴하면서 성능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국산 VHF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공사를 수주한 시행사는 삼성SDS, LG산전, SK C&C, 대우통신 등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감사원이 삼성SDS와 LG산전이 수주한 대구, 대전, 광주, 인천 지하철은 그냥두고 서울과 부산만 진행 중이던 구축작업을 중단시켰다는 점이다.
2003년 당시 한국전기통신(주)에 근무했던 지씨는 “힘없는 기업만 때려잡은 것 같다”며 “당시 대우통신 사주 조풍언씨는 대우 구명로비 혐의를 받고 있었고,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결과적으로 사고가 난 대구 지하철은 그냥두고, 엉뚱하게 부산과 서울 지하철만 작업을 중단하고 TRS 시스템으로 교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으니 아이러니 아닙니까. 서울의 경우 SK C&C가 146억원에 수주해 이미 공사가 80% 진행된 상황이었습니다. 이걸 TRS로 바꿀 경우 10배에 가까운 1200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됐죠. 서울 메트로 입장에서는 난감했습니다. 당시 교체를 완강히 반대했던 통신 담당자는 갑자기 정직당했고, 후에 복귀했으나 보직이 변경되었습니다.”
지씨 역시 이 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그는 “대구 지하철 참사가 감사원 백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VHF 시스템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의문”이라며 “당시 수사기관에서도 참사의 주 원인은 VHF 시스템과 무관하다고 발표했었다”고 말했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검찰은 대구 지하철 참사는 통신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대응체계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발표했다.
2. 설계 없이 재난·재해에 안전한 집 지을 수 있나
오랫동안 무선통신 기기업계에 몸담아 온 강모씨는 “대구 지하철 참사는 VHF 시스템이 아니라 초기대응 미숙으로 피해가 커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2004년 2월 홍콩에서 발생한 지하철 화재사건의 경우 신속한 대응으로 인명과 재산피해가 없었습니다. 홍콩지하철의 통신시스템은 대구지하철 1호선에서 사용하는 VHF와 동일한 시스템이었죠. 그런데도 피해가 없었던 것은 관련 기관들이 SOP에 따라 신속하게 대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11년 11월 말 이명수 의원실에서 있었던 재난망 관련 행안부 관계자들의 대면보고 자리에서도 SOP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이날 대면보고 자리에는 행안부 측에서는 재난안전통신망구축단 정상봉 단장과 한국정보화진흥원 직원 둘, 경찰청 직원 하나가 참석했고, 이명수 의원 측에서는 담당 보좌관과 외부 전문가 둘, 그리고 기자가 동석했다.
본격적인 질의응답에 앞서 정상봉 단장은 주 보좌관에게 동석한 3명과 인사를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담당 보좌관은 거절했다. 신분이 밝혀지면 곧바로 업체로부터 로비가 들어오기 때문에 소개할 수 없다고 했다.
이명수 의원 측은 재난망 기술방식으로 테트라와 와이브로가 적합하다고 발표한 행안부 측에 “자가망만 고집하지 말고 모든 기술에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며, 특히 이미 구축되어 있는 상용망(기존에 구축돼 있는 공공 무선망 포함)을 활용한 연동을 세밀하게 검토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이미 구축돼 있는 망을 무시하고 새롭게 망을 구축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예산낭비인 동시에 비효율적이며, 예전의 문제점을 다시 유발시킨다는 것이었다.
동석했던 외부 전문가 강씨는 “SOP가 확실하게 구성되어 있으면, 기술방식은 큰 의미가 없다”며 “(정부는)SOP에 대한 정확한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통신망을 선정하여 무작정 밀고 나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관련 기관별, 지역별, 단위별로 대응할 행동요령 및 업무 프로세스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지, 어떤 통신망을 사용할 것인지는 그 후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강씨는 SOP가 마련되어 있다는 행안부 측에 “SOP는 재난상황에서 필요한 업무를 BPR(Business Process Reenginering)을 통해 수행하는 일종의 설계도로 무엇보다 중요한데 아직 SOP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며 SOP의 개념을 수차례 설명했다.
강씨가 “SOP가 마련되어 있느냐”고 묻자 행안부 측은 “세부적으로 총 8종의 SOP 자료가 있는데, 관련 내용은 정확히 파악해 추후 제출하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이명수 의원 측은 “기술검증을 하면서 SOP에 대한 기본계획조차 세우지 않은 것 같다”고 꼬집었다.
강씨에 따르면 재난 관련 8대 기관에 재난망을 구축할 계획이라면, 우선 이들 기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 SOP에 반영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SOP를 만들다 보면 기존의 통신망으로도 재난의 90% 이상을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행안부는 왜 SOP보다 기술방식 선정을 우선시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3. 모토로라의 초저가 입찰은 미끼였나
전문가들은 재난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정확한 SOP를 마련할 경우 비용 대비 효율 면에서 테트라 방식은 부적합 판정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테트라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SOP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추정하는 이들이 많다.
전문가들은 재난망을 테트라 방식으로 구축하는 것에 애초부터 거세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지난 10년 동안 이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2003년 당시 정부는 테트라 방식을 선정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이미 경찰청이 구축하고 있기 때문임을 꼽았다. 경찰청이 프로토콜도 공개하지 않는 모토로라 장비를 선정한 배경은 뭘까.
오랫동안 무선통신 중계기 업체에 근무한 P씨는 “무선통신에 대한 당시 경찰 관계자들의 무지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2001년 TRS 자가망을 처음으로 구축한 곳은 부산지방경찰청, 대구지방경찰청, 대전지방경찰청, 광주지방경찰청 등 4개 지방경찰청이었습니다. 당시 입찰에 미국의 모토로라, 영국의 시모코(Simoco), 독일의 로데&슈바르즈(R&S), 핀란드의 노키아(Nokia·현 EADS) 등 4개 업체가 참여했지요. 이 중 파격적인 가격조건을 제시한 모토로라가 낙찰을 받았습니다. 경쟁입찰이어서 시스템과 단말기 가격이 상당히 낮았지요. 하지만 4개 청이 개별적으로 망을 구축해 서로 연동이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단말기 간 연동은 되지만 교환기 간 연동이 되지 않은 것이죠. 당시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입찰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공개입찰 당시 경찰 측이 ‘프로토콜을 공개해야 한다’는 조건만 달았어도 지금의 독과점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토로라가 프로토콜 공개 없이 초저가 낙찰을 받은 것은 미끼나 다름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들 4개 지방경찰청 설치 이후 테트라 망을 구축한 곳은 서울지방경찰청이었다. 정부는 이때 이미 구축된 4개 지방경찰청과 연동해 통합망을 구축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당시 공개 입찰 역시 4개 회사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경찰청이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가위원단을 구성해 이들 4개 업체 장비의 장단점을 분석했다는 것. 평가위원들에 의해 프로토콜을 공개하거나 규격을 낮추는 조건으로 입찰이 진행돼 처음에는 영국의 시모코가 낙찰을 받았으나 결국은 모토로라에 돌아갔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기술평가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전모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4개 업체가 입찰에 참여해 모토로라와 시모코가 최종 후보가 되었습니다. 두 업체의 가격경쟁이 치열한 상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모토로라가 4개 지방경찰청 때와 달리 엄청난 금액을 써냈습니다. 서울 지역 예가가 130억원으로 나왔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180억원을 써냈지요. 결국 78억원을 쓴 시모코가 낙찰을 받았습니다만 이 무렵 영국 본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낙찰 가처분 신청 등의 우여곡절 끝에 모토로라 차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모토로라가 최종 입찰경쟁에서 예가를 훌쩍 뛰어넘는 180억원을 써 낸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는 “서울지방경찰청과 함께 테르라 망을 구축하기로 한 고속도로순찰대의 경우 타 테트라 제조사가 검토되었으나 연동 문제로 포기하고, 나중에 보니 이곳 역시 모토로라 장비가 들어가더라”고 말했다.
4. 新型 두고 舊型 모델 선정, 특별한 이유 있나
모토로라의 테트라 장비는 신형이 아닌데도 고가(高價)다. 교환기나 단말기 가격이 타사 제품에 비해 두세 배 높다. 그 이유를 전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모토로라는 1950~60년대 이후 장비를 직접 생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공급하고 있는 장비는 모두 OEM 방식으로 생산하는 것들이죠. 구형이기 때문에 이들 업체가 생산을 중단하면 공급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사실 서울경찰청이 TRS 자가망을 구축할 당시 유럽에서는 IP 기반의 신형 장비가 개발돼 출시되고 있었습니다. 이 장비들은 시스템 가격이 기존에 비해 3~4분의 1 정도로 저렴하고, IP 기반이라 라우터만 있으면 연동이 쉽게 되는 장점이 있죠. 이 장비들 중 하나가 현재 인천지방경찰청에 구축돼 있는 스페인 텔트로닉스(Teltronix)사의 테트라입니다.”
모토로라 것은 제조업체가 많지 않은 구형이라 가격이 높은 셈이다. 2001년 당시 신형 장비가 출시되었는데도 모토로라가 구형 장비를 공급한 까닭은 뭘까. 한 전문가는 “신형 장비가 나왔지만 당시 유럽에서 구동되고 있던 장비가 구형이어서 그랬을 것”이라면서 “IP 기반의 신형 장비는 타사 제품과의 호환성이 좋아 설치 후 보수 유지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보수 유지비가 지속적으로 많이 들어가는 사업이 수익 면에서 유리하다는 얘기였다. 이 전문가는 “결국 테트라 망은 언젠가 모두 IP 기반의 장비로 교체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계기 업체 P씨는 “프로토콜만 오픈되면 그 어떤 장비도 연동 및 국산화가 가능하다”며 “한국전력의 경우 EADS(구 노키아) 장비가 들어가 있는데, 입찰에 참여한 테트라 제조사가 데이터 부분 프로토콜을 공개해 미리 연동 시험을 했고, 각 제조사 간의 경쟁체제로 인해 입찰 시 가격이 대폭 내려가 교환기와 단말기 등을 국산으로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서울경찰청과 고속도로순찰대의 경우 ‘프로토콜 공개’를 입찰 조건으로 붙일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입찰조건에 ‘프로토콜 제공 조항’이 있었고, 그에 동의해 모토로라가 낙찰받은 것으로 압니다. 실제로 서울경찰청도 프로토콜을 받았다고 했고요. 그런데 프로토콜인 것으로 알고 받은 것이 나중에 보니 테트라 규격집(한국의 KS와 같은 공인규격)이었습니다. 프로토콜은 집의 설계도와 같아서 오픈할 경우 모든 장비와의 연동이 가능하지만 규격집은 몇 개의 방문을 열어 보이는 것 정도여서 공개해도 극히 일부 장비의 연동만 가능하죠. 현재 장비가 다른 인천지방경찰청이 다른 기관과 음성 연동만 되는 것도 모토로라가 프로토콜이 아닌 규격집만 공개했기 때문입니다.”
입찰 당시 프로토콜을 제공하기로 해 놓고 규약집을 제공한 것은 법적 제재가 가능한 계약위반이다. 그럼에도 해당 기관인 서울경찰청이나 정부가 이를 문제 삼지 않은 까닭은 뭘까. 당시 서울경찰청 통신 담당자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그는 이미 고인이 돼 있었다. 2009년 경기도 여주경찰서장으로 부임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5. 모토로라 독점으로 재미 본 국내 업체 의혹
테트라 자가망 구축을 모토로라가 독식하고 있는 가운데 꾸준히 성장한 국내 기업이 하나 있다. 모토로라 통신장비 국내 공급처 중 하나인 중소업체 L사다. 이 회사는 2006년 A사와 K사가 합병되면서 탄생했다.
1991년 설립된 K사는 미국 모토로라와 1992년에 컴퓨터 공급계약을, 1999년에는 통신장비 공급계약을 각각 체결, 각종 사업권을 따냈다. 2000년에는 인천국제공항과 4개 지방경찰청에 테트라 시스템을 공급, 구축했다.
A사 역시 K사와 같은 분야에서 사업을 해 오다 흡수 합병됐다. L사는 테트라 공급권뿐만 아니라 112시스템 등 경찰청과 관련된 사업권을 많이 따냈다. 한 전문가는 “모토로라의 테트라와 112시스템의 공통점은 한 번 시스템을 깔아 놓으면 보수 유지 등으로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L사가 유독 경찰청 사업권 수주에 강한 것을 두고 “공동대표인 L씨 형이 뒤를 봐줘서 그렇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L씨 형은 노무현(盧武鉉) 정부 때 검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L사는 지난 11월에도 경찰청 112시스템과 서울지방경찰청 유지보수 용역을 수주했다. 이 두 사업권만으로도 100억원이 넘는 규모다. 그런데 이렇듯 잘나가는 L사에 최근 변화가 생겼다. 공동대표이자 최대 주주였던 L씨가 2011년 6월 자신의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하고 사업에서 손을 뗀 것이다.
이에 대한 업계 시각은 분분하다. “벌 만큼 벌었으니 빠진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한 위장전술”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6. 공정위의 솜방망이 처벌로 업체 간 담합 여전
모토로라의 통신장비를 국내에 공급하는 업체는 L사 외에 H사와 S사도 있다. 이들 3개 업체의 낙찰률은 평균 95%가 넘었다. H사와 S사가 각각 98%,와 97%를 적어 내면 L사가 96%를 제안해 낙찰되는 식이어서 담합 의혹이 짙었다. 게다가 합병회사인 L사가 출현하기 전인 2005년까지는 A사가 싹쓸이하다시피 해 특혜 의혹까지 샀다.
끊이지 않는 담합 의혹 제기에 급기야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했고, 이들의 담합 증거를 적발해 냈다. 공정위는 2008년 3월, 경찰청 등이 발주한 15개 테트라 구매입찰에서 3개 업체가 담합한 행위를 적발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9억7800만원을 부과했다.
모토로라로부터 1000억원대 장비를 납품받는 과정에 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제보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주무 기관인 감사원과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금품 수수 및 로비 정황'에 대해 아직까지 사실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2008년 발표된 감사 보고서에도 이 부분은 없다. 이를 두고 업계 관계자들은 “솜방망이 처벌”에 “물감사”라고 비판했다.
기자는 2008년 감사원 보고서에 담지 못한 내용이 궁금해 당시 감사를 진행한 전 감사원 직원과 통화했다. 그는 당시 감사를 마친 후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전화 통화에서 그는 “좌천된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을 시기여서 발령이 난 것인데, 예고 없이 갑자기 난 것뿐”이라고 밝혔다. 또한 보고서에 담지 못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 근무지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밝힐 수 없다”면서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재난의 80% 이상이 소방방재청 소관인데, 경찰청 중심의 재난망이 구축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모토로라 장비 공급업자들의 담합의혹은 이후로도 계속 제기됐다. 소방방재청의 경우 재난망 유지보수 입찰 이후 4년 동안 L사가 사실상 100% 수주했는데, 평균 낙찰률이 99%가 넘었다. 유사 정부 입찰은 평균 낙찰률이 83~85% 수준이었다.
한 통신 전문가는 “최근 4년 동안에도 소방방재청의 재난망 유지보수 평균 낙찰률은 99%가 넘었다”고 전했다. 조달청 자료를 입수, 확인해 보니 평균 낙찰률이 99.5%였다. 심지어 2010년을 제외하곤 모두 L사가 낙찰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2011년 소방방재청의 재난망 유지보수 낙찰금액은 13억800만원이었다.
경찰청 중심의 통합망 사업이 진행된 2003년 이후 L사가 테트라 시스템과 관련해 각 기관으로부터 수주한 금액은 600억원이 훨씬 넘는다. 2008년부터 최근 4년 동안 수주한 금액이 300억원에 이르는데, 이는 경쟁업체들의 총량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규모다.
7. 국민에겐 ‘재난망’이 재난이 될 수 있다
재난망 사업은 더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으나 이미 구축한 일부 기관에 대한 유지보수는 계속하고 있다. “엄청난 예산과 자리가 생기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어떻게 하든 이 사업을 추진하고 싶어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테트라는 실용성 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현장에서 속속 들려오고 있다. 화재 현장에 출동하는 소방관은 “테트라 망 단말기는 지하 시설물에서는 통신이 끊겨 사용이 불가능하다”며 “이 때문에 기존에 쓰던 무전기까지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고 토로했다. 또 코레일에 근무하는 한 승무원은 “재난망 단말기는 워낙 고가여서 부담스럽다”며 “행여나 떨어뜨려 고장날까 싶어 함부로 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한 지하철 근무 직원은 “특수 기능인 핫마이크(Hot Mike)를 잘못 건드려 곤욕을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요새는 이 기능을 아예 꺼 놓았다”고 말했다. 핫마이크는 PTT(Push to Talk·버튼 하나만 누르면 통화 대기 시간 없이 원하는 상대와 바로 통화할 수 있는 서비스) 버튼을 누르지 않고 무선통화가 가능한 기능이다. 긴급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하도록 고안된 이 특수기능을 많은 이들이 꺼 놓고 있다는 것은 실제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이래서 기술방식보다는 SOP를 먼저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실제 현장에 있는 일선 소방관이나 경찰관은 “다른 복잡한 기능 필요 없이 음성 기능만 확실하면 얼마든지 재난·재해에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전문가들 중에는 “통합망 구축안이 마련된 10년 전에 비해 민간 이동통신 기술이 눈부시게 진화해 요즘은 SNS를 통해 재난·재해에 대응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ETRI 출신의 전학성 박사는 “지금은 통합망보다 재난 감지 조기경보 체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재난망 구축은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해도 행안부는 요지부동이다. 일례로 최근 행안부 차관 주재로 각 부처 국장·과장급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 있었던 한 참석자에 따르면 이날 방송통신위원회는 자가망 구축에 반대 입장을 견지한 반면 행안부는 계속 자가망으로 가야 한다고 전체 분위기를 몰고 갔다고 한다.
2003년 본격화된 주요 관계 기관의 재난망 사업에 현재까지 투입된 예산은 18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단됐던 재난망 사업을 추진하며 행안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재난망 구축 대상은 중앙 및 지방 행정기관, 광역자치단체, 기초자치단체, 의료기관, 공공기관 등 8개 분야 321개 기관이다. 전문가들은 “이들 기관에 행안부가 밀고 있는 테트라 망을 구축할 경우 시스템 장비와 보수 유지까지 수조원의 비용이 투입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상용망을 연동해 구축할 경우 이미 연동장치까지 개발돼 있어서 250억원 정도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10년 동안 재난망 부재로 피해가 커진 재난은 없었다. 적은 비용으로 쉽게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을 놔두고 수조원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테트라망 구축이야말로 국민들에게는 ‘혈세 낭비’라는 커다란 재난이 될지도 모른다.
한편 정부의 재난망 구축안은 실정법상 위법 소지까지 있다. 행안부가 자가망을 ‘평상시에는 기관별 자체 업무용으로 이용하다가 재난이 발생했을 때 즉각 재난 지휘용으로 활용한다’고 했는데, 이는 전기통신사업법에 저촉된다.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은 자가망의 경우 태풍, 홍수, 해일, 화재, 폭발 등의 재난이 아닌 경우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난망은 법으로 정한 재난 외의 용도로 사용할 경우 전기통신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법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현행법상 테트라 망은 재난이 없는 평상시에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당시 국무조정실(후에 행자부 소방방재청으로 업무 이관)은 2006년까지 3600억원의 예산을 들여 디지털 TRS(Trunked Radio System·주파수공용통신)의 테트라(TETRA·Terrestrial Trunked Radio) 방식으로 관련 기관의 무선망을 통합하겠다고 발표했다. 해당 기관은 소방방재청, 경찰청, 철도청(현 코레일), 군(軍) 등 1441개 기관이었다. 디지털 TRS에는 자가망에 유리한 유럽 방식의 테트라와 상용망에 사용 중인 북미(北美) 방식의 아이덴(iDEN) 등이 있다. 테트라는 자체 독자망을 운영할 수 있으나 망을 새로 깔아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 반면 아이덴은 민간이 운영하는 망을 사용하므로 경제성이 뛰어나다.
예산 10배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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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 방식의 국산 단말기. |
하지만 테트라 방식에는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없는 모순이 숨어 있었다. 같은 테트라 장비(시스템)라도 제조한 회사가 다를 경우, 해당 회사가 모두 프로토콜(통신 규약)을 공개해야 함께 쓸 수 있다. 그러나 시장점유율이 높은 회사가 영업비밀이나 다름없는 프로토콜을 공개하기란 쉽지 않다. 당시 세계 테트라 시장에서 점유율이 압도적인 회사는 미국의 모토로라였고, 경찰청이 2001년부터 구축한 테트라 장비는 이 회사가 공급하고 있었다. 모토로라가 프로토콜을 공개하지 않는 한 재난망 장비는 모두 이 회사로부터 공급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를 파악한 전문가들은 특정 업체의 독과점과 국내 중소업체들의 줄도산 및 기술종속을 예고하며 우려를 표명했다. 모토로라 한국 총판은 기술 이전을 통해 단말기를 한국 내에서 만들겠다고 했으나 이는 모토로라 본사에서 시스템 프로토콜을 공개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전문가들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모토로라의 테트라 장비가 다른 제조회사의 테트라 장비와 호환이 안되는 바람에 망 구축을 완료하기 위해서는 예산을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늘려야 할 상황이 됐다. 예비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총 사업비가 3조5000억원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같은 장비를 납품하는 업체들 간의 입찰 담합도 적발됐다. 게다가 특정 기업의 독과점 의혹까지 나오면서 사업 추진에 제동이 걸렸다. 일부 언론은 ‘테트라 사업’을 ‘테트라 사건’으로 보도하며 노출된 문제 외에 숨은 의혹들을 제기했다. 이런 내용들은 국정감사에도 매년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결국 감사원이 메스를 들고 나섰다. 2007년 4월부터 6월까지 1달여에 걸쳐 통합망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한 것이다. 그 결과 ‘특정회사 독점과 예산과다 투입 등의 문제가 있으니 선정된 통신기술 방식과 사업추진 방식을 재검토하라’는 결론이 나왔다. 사업은 전면 중단되고 백지화됐으며, 업무 관계자들은 옷을 벗거나 좌천됐다.
전문가 의견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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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용 아날로그 단말기 PCS 833. 그룹 통화가 안 돼 여러 개를 들고 다녔다. |
이 내용이 발표되자 전문가들은 “결국 2008년 감사원 감사결과 발표 이전으로 돌아갔다”며 한숨을 쉬었다. “테트라를 띄우기 위해 주파수도 확보되지 않은 와이브로를 들러리로 내세웠다”고 혀를 찼다. 그도 그럴 것이 적합판정을 받은 테트라는 2008년 이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호환성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특정 장비 납품업체 간의 담합의혹도 씻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와이브로의 경우 NIA의 기술검증 때 700MHz 주파수를 사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이 또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주파수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아날로그 방송용으로 사용하고 있고, 방송 부문과 통신 부문이 서로 사용하겠다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어 재난망 용도로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주파수 할당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 측도 ‘사용불가’ 판정을 내렸다.
2011년 11월 재난망 관련 공청회에서 만난 업계 전문가는 “정부는 어떤 이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테트라 방식으로만 밀어붙이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그는 “사업 초기부터 기관별 업무특성을 고려치 않고 모든 기관을 테트라 방식으로 묶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혈세 낭비라고 수없이 지적했지만 정부는 강행했다”며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지 않으면서 공청회며 토론회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행안부는 기존에 제기됐던 문제점을 해결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보다 기존 망에 연동해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국책 연구원 출신의 한 전문가는 “지난 10년 동안 테트라 없이도 재난·재해에 대응하는 데 큰 차질이 없었다”며 “시스템이나 기술방식 선정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SOP(Standard Operating Procedure·표준운영절차)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확한 SOP도 없이 재난망을 구축하는 것은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고 혀를 찼다. 사실 SOP 미비 문제는 이 사업 초기부터 수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지적됐던 사항이다. 그런데도 아직껏 제대로 된 SOP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사업배경 석연치 않아
이쯤 되고 보니 정부가 전문가와 언론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재난망 구축에 테트라 방식만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지난 정부 실세와 고위 공무원들이 특정 업체를 밀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전문가는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가며 굳이 자가망을 구축하려는 배경에는 퇴직자를 위한 일자리 창출 의도가 숨어 있다”고 말했다. 테트라 방식의 자가망이 구축되면 보수 유지를 위해 KT와 같은 통신 사업자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국감 때마다 자가망 구축의 문제점을 지적해 온 국회의원들도 이 사업의 배경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자유선진당 이명수(李明洙) 의원 측은 이 사업 주무부처 직원들을 불러 대면보고를 받을 때마다 지난 정권의 실세로부터 온갖 공갈과 협박을 받았다고 했고, 한나라당 이은재(李恩宰) 의원 측은 모 인사로부터 “그만큼 했으면 됐으니 이제 멈추라”는 ‘경고 메시지’를 전달받았다고 한다.
이은재 의원은 2008년 말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김경한(金慶漢) 당시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통합망 사업에 관련된 기관들의 공통점은 ‘모토로라’라는 회사가 등장하는 것”이라며 “통합망 사업은 전 정권의 청와대·경찰청·소방방재청 간부 등이 특정 업체와 유착해 국가예산을 낭비한 노무현 정권의 총체적인 부패 스캔들”이라고 몰아붙인 바 있다.
기자는 이번 취재를 위해 몇몇 국회의원 외에 10명이 넘는 업계 전문가들을 만났다. 이들은 재난망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거나 이 사업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었다.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며 이들은 재난망 사업과 관련해 지난 10년 동안 품은 의혹들을 풀어 놓았다.
1. 대구 지하철 참사, 정말 국산장비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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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토로라가 서울경찰청에 공급하고 있는 테트라 단말기. |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B씨였습니다. 철도청 무선관리소 출신인 B씨는 평소 모토로라 신봉자였어요. 모토로라 무선장비가 하늘이면 국산 장비는 바닥이라며 우습게 여겼던 인물이죠. B씨는 당시 지하철 사고가 마치 무선장비가 국산이어서 일어난 것처럼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나중에 <대구지하철 감사 백서>라는 책자로 나왔는데, 잘못된 곳이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청와대에 민원을 냈고, 책임자인 A씨를 어렵게 만났습니다. A씨는 제가 잘못된 부분을 조목조목 짚어 내자 땀을 뻘뻘 흘리며 ‘민간인이 왜 국가사업에 관여하느냐’고 역정을 내더군요.”
백서는 전국 철도와 지하철의 무선장비를 바꾸기 위한 행정절차나 다름없었다. 오류투성이인 백서를 토대로 주요 기관들의 통신망을 일제히 점검하게 됐고, 국산 무전기를 잘 활용하고 있는 곳까지 디지털 통합망 장비로 교체하라는 정부의 지시가 내려졌다. 당시 전국 지하철의 대부분은 아날로그 방식인 VHF(Very High Frequency·초단파) 시스템의 장비를 사용하고 있었다. VHF 시스템은 주파수 30~300MHz 대역으로 직진성이 강해 단거리 항공통신이나 라디오 방송, 밀집된 공간의 통신망에 유리한 시스템이다.
지씨의 주장에 대해 B씨는 “통합망 구축 논의는 대구 지하철 참사 이전부터 진행됐고, 대구 지하철 참사의 원인이 VHF 시스템 때문이라고 보고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사고 원인 중 하나로 통신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지적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국내 최대 무선통신 장비 업체였던 한국전기통신(주)은 대구(1,2호선), 대전, 광주, 서울(1,3,4호선), 인천(1호선), 부산 등의 지하철에 저렴하면서 성능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국산 VHF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공사를 수주한 시행사는 삼성SDS, LG산전, SK C&C, 대우통신 등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감사원이 삼성SDS와 LG산전이 수주한 대구, 대전, 광주, 인천 지하철은 그냥두고 서울과 부산만 진행 중이던 구축작업을 중단시켰다는 점이다.
2003년 당시 한국전기통신(주)에 근무했던 지씨는 “힘없는 기업만 때려잡은 것 같다”며 “당시 대우통신 사주 조풍언씨는 대우 구명로비 혐의를 받고 있었고,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결과적으로 사고가 난 대구 지하철은 그냥두고, 엉뚱하게 부산과 서울 지하철만 작업을 중단하고 TRS 시스템으로 교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으니 아이러니 아닙니까. 서울의 경우 SK C&C가 146억원에 수주해 이미 공사가 80% 진행된 상황이었습니다. 이걸 TRS로 바꿀 경우 10배에 가까운 1200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됐죠. 서울 메트로 입장에서는 난감했습니다. 당시 교체를 완강히 반대했던 통신 담당자는 갑자기 정직당했고, 후에 복귀했으나 보직이 변경되었습니다.”
지씨 역시 이 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그는 “대구 지하철 참사가 감사원 백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VHF 시스템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의문”이라며 “당시 수사기관에서도 참사의 주 원인은 VHF 시스템과 무관하다고 발표했었다”고 말했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검찰은 대구 지하철 참사는 통신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대응체계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발표했다.
2. 설계 없이 재난·재해에 안전한 집 지을 수 있나
오랫동안 무선통신 기기업계에 몸담아 온 강모씨는 “대구 지하철 참사는 VHF 시스템이 아니라 초기대응 미숙으로 피해가 커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2004년 2월 홍콩에서 발생한 지하철 화재사건의 경우 신속한 대응으로 인명과 재산피해가 없었습니다. 홍콩지하철의 통신시스템은 대구지하철 1호선에서 사용하는 VHF와 동일한 시스템이었죠. 그런데도 피해가 없었던 것은 관련 기관들이 SOP에 따라 신속하게 대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11년 11월 말 이명수 의원실에서 있었던 재난망 관련 행안부 관계자들의 대면보고 자리에서도 SOP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이날 대면보고 자리에는 행안부 측에서는 재난안전통신망구축단 정상봉 단장과 한국정보화진흥원 직원 둘, 경찰청 직원 하나가 참석했고, 이명수 의원 측에서는 담당 보좌관과 외부 전문가 둘, 그리고 기자가 동석했다.
본격적인 질의응답에 앞서 정상봉 단장은 주 보좌관에게 동석한 3명과 인사를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담당 보좌관은 거절했다. 신분이 밝혀지면 곧바로 업체로부터 로비가 들어오기 때문에 소개할 수 없다고 했다.
이명수 의원 측은 재난망 기술방식으로 테트라와 와이브로가 적합하다고 발표한 행안부 측에 “자가망만 고집하지 말고 모든 기술에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며, 특히 이미 구축되어 있는 상용망(기존에 구축돼 있는 공공 무선망 포함)을 활용한 연동을 세밀하게 검토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이미 구축돼 있는 망을 무시하고 새롭게 망을 구축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예산낭비인 동시에 비효율적이며, 예전의 문제점을 다시 유발시킨다는 것이었다.
동석했던 외부 전문가 강씨는 “SOP가 확실하게 구성되어 있으면, 기술방식은 큰 의미가 없다”며 “(정부는)SOP에 대한 정확한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통신망을 선정하여 무작정 밀고 나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관련 기관별, 지역별, 단위별로 대응할 행동요령 및 업무 프로세스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지, 어떤 통신망을 사용할 것인지는 그 후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강씨는 SOP가 마련되어 있다는 행안부 측에 “SOP는 재난상황에서 필요한 업무를 BPR(Business Process Reenginering)을 통해 수행하는 일종의 설계도로 무엇보다 중요한데 아직 SOP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며 SOP의 개념을 수차례 설명했다.
강씨가 “SOP가 마련되어 있느냐”고 묻자 행안부 측은 “세부적으로 총 8종의 SOP 자료가 있는데, 관련 내용은 정확히 파악해 추후 제출하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이명수 의원 측은 “기술검증을 하면서 SOP에 대한 기본계획조차 세우지 않은 것 같다”고 꼬집었다.
강씨에 따르면 재난 관련 8대 기관에 재난망을 구축할 계획이라면, 우선 이들 기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 SOP에 반영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SOP를 만들다 보면 기존의 통신망으로도 재난의 90% 이상을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행안부는 왜 SOP보다 기술방식 선정을 우선시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3. 모토로라의 초저가 입찰은 미끼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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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사용 중인 테트라 단말기. |
전문가들은 재난망을 테트라 방식으로 구축하는 것에 애초부터 거세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지난 10년 동안 이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2003년 당시 정부는 테트라 방식을 선정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이미 경찰청이 구축하고 있기 때문임을 꼽았다. 경찰청이 프로토콜도 공개하지 않는 모토로라 장비를 선정한 배경은 뭘까.
오랫동안 무선통신 중계기 업체에 근무한 P씨는 “무선통신에 대한 당시 경찰 관계자들의 무지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2001년 TRS 자가망을 처음으로 구축한 곳은 부산지방경찰청, 대구지방경찰청, 대전지방경찰청, 광주지방경찰청 등 4개 지방경찰청이었습니다. 당시 입찰에 미국의 모토로라, 영국의 시모코(Simoco), 독일의 로데&슈바르즈(R&S), 핀란드의 노키아(Nokia·현 EADS) 등 4개 업체가 참여했지요. 이 중 파격적인 가격조건을 제시한 모토로라가 낙찰을 받았습니다. 경쟁입찰이어서 시스템과 단말기 가격이 상당히 낮았지요. 하지만 4개 청이 개별적으로 망을 구축해 서로 연동이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단말기 간 연동은 되지만 교환기 간 연동이 되지 않은 것이죠. 당시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입찰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공개입찰 당시 경찰 측이 ‘프로토콜을 공개해야 한다’는 조건만 달았어도 지금의 독과점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토로라가 프로토콜 공개 없이 초저가 낙찰을 받은 것은 미끼나 다름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들 4개 지방경찰청 설치 이후 테트라 망을 구축한 곳은 서울지방경찰청이었다. 정부는 이때 이미 구축된 4개 지방경찰청과 연동해 통합망을 구축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당시 공개 입찰 역시 4개 회사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경찰청이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가위원단을 구성해 이들 4개 업체 장비의 장단점을 분석했다는 것. 평가위원들에 의해 프로토콜을 공개하거나 규격을 낮추는 조건으로 입찰이 진행돼 처음에는 영국의 시모코가 낙찰을 받았으나 결국은 모토로라에 돌아갔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기술평가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전모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4개 업체가 입찰에 참여해 모토로라와 시모코가 최종 후보가 되었습니다. 두 업체의 가격경쟁이 치열한 상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모토로라가 4개 지방경찰청 때와 달리 엄청난 금액을 써냈습니다. 서울 지역 예가가 130억원으로 나왔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180억원을 써냈지요. 결국 78억원을 쓴 시모코가 낙찰을 받았습니다만 이 무렵 영국 본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낙찰 가처분 신청 등의 우여곡절 끝에 모토로라 차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모토로라가 최종 입찰경쟁에서 예가를 훌쩍 뛰어넘는 180억원을 써 낸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는 “서울지방경찰청과 함께 테르라 망을 구축하기로 한 고속도로순찰대의 경우 타 테트라 제조사가 검토되었으나 연동 문제로 포기하고, 나중에 보니 이곳 역시 모토로라 장비가 들어가더라”고 말했다.
4. 新型 두고 舊型 모델 선정, 특별한 이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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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1월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재난망 기술방식 선정 관련 공청회가 열렸다. |
“모토로라는 1950~60년대 이후 장비를 직접 생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공급하고 있는 장비는 모두 OEM 방식으로 생산하는 것들이죠. 구형이기 때문에 이들 업체가 생산을 중단하면 공급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사실 서울경찰청이 TRS 자가망을 구축할 당시 유럽에서는 IP 기반의 신형 장비가 개발돼 출시되고 있었습니다. 이 장비들은 시스템 가격이 기존에 비해 3~4분의 1 정도로 저렴하고, IP 기반이라 라우터만 있으면 연동이 쉽게 되는 장점이 있죠. 이 장비들 중 하나가 현재 인천지방경찰청에 구축돼 있는 스페인 텔트로닉스(Teltronix)사의 테트라입니다.”
모토로라 것은 제조업체가 많지 않은 구형이라 가격이 높은 셈이다. 2001년 당시 신형 장비가 출시되었는데도 모토로라가 구형 장비를 공급한 까닭은 뭘까. 한 전문가는 “신형 장비가 나왔지만 당시 유럽에서 구동되고 있던 장비가 구형이어서 그랬을 것”이라면서 “IP 기반의 신형 장비는 타사 제품과의 호환성이 좋아 설치 후 보수 유지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보수 유지비가 지속적으로 많이 들어가는 사업이 수익 면에서 유리하다는 얘기였다. 이 전문가는 “결국 테트라 망은 언젠가 모두 IP 기반의 장비로 교체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계기 업체 P씨는 “프로토콜만 오픈되면 그 어떤 장비도 연동 및 국산화가 가능하다”며 “한국전력의 경우 EADS(구 노키아) 장비가 들어가 있는데, 입찰에 참여한 테트라 제조사가 데이터 부분 프로토콜을 공개해 미리 연동 시험을 했고, 각 제조사 간의 경쟁체제로 인해 입찰 시 가격이 대폭 내려가 교환기와 단말기 등을 국산으로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서울경찰청과 고속도로순찰대의 경우 ‘프로토콜 공개’를 입찰 조건으로 붙일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입찰조건에 ‘프로토콜 제공 조항’이 있었고, 그에 동의해 모토로라가 낙찰받은 것으로 압니다. 실제로 서울경찰청도 프로토콜을 받았다고 했고요. 그런데 프로토콜인 것으로 알고 받은 것이 나중에 보니 테트라 규격집(한국의 KS와 같은 공인규격)이었습니다. 프로토콜은 집의 설계도와 같아서 오픈할 경우 모든 장비와의 연동이 가능하지만 규격집은 몇 개의 방문을 열어 보이는 것 정도여서 공개해도 극히 일부 장비의 연동만 가능하죠. 현재 장비가 다른 인천지방경찰청이 다른 기관과 음성 연동만 되는 것도 모토로라가 프로토콜이 아닌 규격집만 공개했기 때문입니다.”
입찰 당시 프로토콜을 제공하기로 해 놓고 규약집을 제공한 것은 법적 제재가 가능한 계약위반이다. 그럼에도 해당 기관인 서울경찰청이나 정부가 이를 문제 삼지 않은 까닭은 뭘까. 당시 서울경찰청 통신 담당자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그는 이미 고인이 돼 있었다. 2009년 경기도 여주경찰서장으로 부임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5. 모토로라 독점으로 재미 본 국내 업체 의혹
테트라 자가망 구축을 모토로라가 독식하고 있는 가운데 꾸준히 성장한 국내 기업이 하나 있다. 모토로라 통신장비 국내 공급처 중 하나인 중소업체 L사다. 이 회사는 2006년 A사와 K사가 합병되면서 탄생했다.
1991년 설립된 K사는 미국 모토로라와 1992년에 컴퓨터 공급계약을, 1999년에는 통신장비 공급계약을 각각 체결, 각종 사업권을 따냈다. 2000년에는 인천국제공항과 4개 지방경찰청에 테트라 시스템을 공급, 구축했다.
A사 역시 K사와 같은 분야에서 사업을 해 오다 흡수 합병됐다. L사는 테트라 공급권뿐만 아니라 112시스템 등 경찰청과 관련된 사업권을 많이 따냈다. 한 전문가는 “모토로라의 테트라와 112시스템의 공통점은 한 번 시스템을 깔아 놓으면 보수 유지 등으로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L사가 유독 경찰청 사업권 수주에 강한 것을 두고 “공동대표인 L씨 형이 뒤를 봐줘서 그렇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L씨 형은 노무현(盧武鉉) 정부 때 검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L사는 지난 11월에도 경찰청 112시스템과 서울지방경찰청 유지보수 용역을 수주했다. 이 두 사업권만으로도 100억원이 넘는 규모다. 그런데 이렇듯 잘나가는 L사에 최근 변화가 생겼다. 공동대표이자 최대 주주였던 L씨가 2011년 6월 자신의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하고 사업에서 손을 뗀 것이다.
이에 대한 업계 시각은 분분하다. “벌 만큼 벌었으니 빠진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한 위장전술”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6. 공정위의 솜방망이 처벌로 업체 간 담합 여전
모토로라의 통신장비를 국내에 공급하는 업체는 L사 외에 H사와 S사도 있다. 이들 3개 업체의 낙찰률은 평균 95%가 넘었다. H사와 S사가 각각 98%,와 97%를 적어 내면 L사가 96%를 제안해 낙찰되는 식이어서 담합 의혹이 짙었다. 게다가 합병회사인 L사가 출현하기 전인 2005년까지는 A사가 싹쓸이하다시피 해 특혜 의혹까지 샀다.
끊이지 않는 담합 의혹 제기에 급기야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했고, 이들의 담합 증거를 적발해 냈다. 공정위는 2008년 3월, 경찰청 등이 발주한 15개 테트라 구매입찰에서 3개 업체가 담합한 행위를 적발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9억7800만원을 부과했다.
모토로라로부터 1000억원대 장비를 납품받는 과정에 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제보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주무 기관인 감사원과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금품 수수 및 로비 정황'에 대해 아직까지 사실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2008년 발표된 감사 보고서에도 이 부분은 없다. 이를 두고 업계 관계자들은 “솜방망이 처벌”에 “물감사”라고 비판했다.
기자는 2008년 감사원 보고서에 담지 못한 내용이 궁금해 당시 감사를 진행한 전 감사원 직원과 통화했다. 그는 당시 감사를 마친 후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전화 통화에서 그는 “좌천된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을 시기여서 발령이 난 것인데, 예고 없이 갑자기 난 것뿐”이라고 밝혔다. 또한 보고서에 담지 못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 근무지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밝힐 수 없다”면서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재난의 80% 이상이 소방방재청 소관인데, 경찰청 중심의 재난망이 구축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모토로라 장비 공급업자들의 담합의혹은 이후로도 계속 제기됐다. 소방방재청의 경우 재난망 유지보수 입찰 이후 4년 동안 L사가 사실상 100% 수주했는데, 평균 낙찰률이 99%가 넘었다. 유사 정부 입찰은 평균 낙찰률이 83~85% 수준이었다.
한 통신 전문가는 “최근 4년 동안에도 소방방재청의 재난망 유지보수 평균 낙찰률은 99%가 넘었다”고 전했다. 조달청 자료를 입수, 확인해 보니 평균 낙찰률이 99.5%였다. 심지어 2010년을 제외하곤 모두 L사가 낙찰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2011년 소방방재청의 재난망 유지보수 낙찰금액은 13억800만원이었다.
경찰청 중심의 통합망 사업이 진행된 2003년 이후 L사가 테트라 시스템과 관련해 각 기관으로부터 수주한 금액은 600억원이 훨씬 넘는다. 2008년부터 최근 4년 동안 수주한 금액이 300억원에 이르는데, 이는 경쟁업체들의 총량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규모다.
7. 국민에겐 ‘재난망’이 재난이 될 수 있다
재난망 사업은 더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으나 이미 구축한 일부 기관에 대한 유지보수는 계속하고 있다. “엄청난 예산과 자리가 생기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어떻게 하든 이 사업을 추진하고 싶어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테트라는 실용성 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현장에서 속속 들려오고 있다. 화재 현장에 출동하는 소방관은 “테트라 망 단말기는 지하 시설물에서는 통신이 끊겨 사용이 불가능하다”며 “이 때문에 기존에 쓰던 무전기까지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고 토로했다. 또 코레일에 근무하는 한 승무원은 “재난망 단말기는 워낙 고가여서 부담스럽다”며 “행여나 떨어뜨려 고장날까 싶어 함부로 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한 지하철 근무 직원은 “특수 기능인 핫마이크(Hot Mike)를 잘못 건드려 곤욕을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요새는 이 기능을 아예 꺼 놓았다”고 말했다. 핫마이크는 PTT(Push to Talk·버튼 하나만 누르면 통화 대기 시간 없이 원하는 상대와 바로 통화할 수 있는 서비스) 버튼을 누르지 않고 무선통화가 가능한 기능이다. 긴급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하도록 고안된 이 특수기능을 많은 이들이 꺼 놓고 있다는 것은 실제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이래서 기술방식보다는 SOP를 먼저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실제 현장에 있는 일선 소방관이나 경찰관은 “다른 복잡한 기능 필요 없이 음성 기능만 확실하면 얼마든지 재난·재해에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전문가들 중에는 “통합망 구축안이 마련된 10년 전에 비해 민간 이동통신 기술이 눈부시게 진화해 요즘은 SNS를 통해 재난·재해에 대응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ETRI 출신의 전학성 박사는 “지금은 통합망보다 재난 감지 조기경보 체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재난망 구축은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해도 행안부는 요지부동이다. 일례로 최근 행안부 차관 주재로 각 부처 국장·과장급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 있었던 한 참석자에 따르면 이날 방송통신위원회는 자가망 구축에 반대 입장을 견지한 반면 행안부는 계속 자가망으로 가야 한다고 전체 분위기를 몰고 갔다고 한다.
2003년 본격화된 주요 관계 기관의 재난망 사업에 현재까지 투입된 예산은 18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단됐던 재난망 사업을 추진하며 행안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재난망 구축 대상은 중앙 및 지방 행정기관, 광역자치단체, 기초자치단체, 의료기관, 공공기관 등 8개 분야 321개 기관이다. 전문가들은 “이들 기관에 행안부가 밀고 있는 테트라 망을 구축할 경우 시스템 장비와 보수 유지까지 수조원의 비용이 투입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상용망을 연동해 구축할 경우 이미 연동장치까지 개발돼 있어서 250억원 정도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10년 동안 재난망 부재로 피해가 커진 재난은 없었다. 적은 비용으로 쉽게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을 놔두고 수조원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테트라망 구축이야말로 국민들에게는 ‘혈세 낭비’라는 커다란 재난이 될지도 모른다.
한편 정부의 재난망 구축안은 실정법상 위법 소지까지 있다. 행안부가 자가망을 ‘평상시에는 기관별 자체 업무용으로 이용하다가 재난이 발생했을 때 즉각 재난 지휘용으로 활용한다’고 했는데, 이는 전기통신사업법에 저촉된다.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은 자가망의 경우 태풍, 홍수, 해일, 화재, 폭발 등의 재난이 아닌 경우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난망은 법으로 정한 재난 외의 용도로 사용할 경우 전기통신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법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현행법상 테트라 망은 재난이 없는 평상시에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