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불구경
2 대세론에 安住
3 충청권에 대한 무대책
4 안티세력 희석에 실패
5 과학적 대선전략 全無
“누군가가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부동의 1위였던 사람을 위협하면, 내 한 표를 (뜨는 사람한테)보태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거든요. 대세론이 오랫동안 유지되면 독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회창 후보의 경우가 딱 그러했지요.” (이회창 대선캠프 최고위층 B의원)
2 대세론에 安住
3 충청권에 대한 무대책
4 안티세력 희석에 실패
5 과학적 대선전략 全無
“누군가가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부동의 1위였던 사람을 위협하면, 내 한 표를 (뜨는 사람한테)보태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거든요. 대세론이 오랫동안 유지되면 독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회창 후보의 경우가 딱 그러했지요.” (이회창 대선캠프 최고위층 B의원)
- 이회창 후보가 2002년 12월 12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유세에서 대형 북을 치고 있다.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지요. 대통령제를 가진 다른 국가에서 연구할 겁니다. 이런 조건에서도 질 수 있다는 샘플이 나온 겁니다.”
한나라당 전직 의원 A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A씨는 지난 2002년 대선(大選)에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이하 존칭 생략) 후보의 최측근 인사로 선거과정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던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은 초반부터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렸다. 당내(黨內)경선에서 50%가 넘는 지지율을 얻으며 대선후보가 됐고, 한나라당 대(對) 새천년민주당(2002년 초반에는 이인제씨가 40%가 넘는 지지율로 대권후보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가상대결에서도 압승이 예측됐다. 이른바 ‘이회창 대세론’이었다.
상황은 2002년 3월 들어 다소 변했다. ‘이인제(李仁濟)-김근태(金槿泰)-한화갑(韓和甲)-노무현(盧武鉉)’ 등 민주당 후보들의 경선에 여론이 쏠리면서 이회창의 인기가 주춤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선거를 한 달 반 남짓 남겨 둔 시점에서조차 이회창의 청와대행(行)은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2002년 11월 11일에 실시된 KBS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의 이회창 36%, 국민통합21의 정몽준(鄭夢準) 22.8%,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22.1%였다. 하지만 노무현-정몽준 후보가 단일화를 선언한 직후에 판세는 뒤집혔다. 2002년 11월 19일 동아일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41.1%, 이회창 37.5%였다.
이회창은 끝내 이를 뒤집지 못했다. 그의 대권(大權) 재수(再修)는 이렇게 물거품으로 끝났다.
‘박근혜 대세론’이 한창인 지금, 9년 전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이회창 측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유력을 넘어 당선 확실 주자였던 이회창이 청와대에 입성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대선 직후부터 온갖 분석이 난무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언론의 피상적인 분석이 전부였다. 이회창은 진짜 왜 졌을까.
이회창 주변에 모였던 전·현직 국회의원들, 상대편이었던 노무현과 정몽준 캠프의 관계자들 등 총 9명을 인터뷰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익명(匿名) 보도를 요청했다. ‘한때 모셨던 주군에 대한 예의’라는 이유와 ‘다른 당(자유선진당) 대표인 사람에 대해 평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정몽준-노무현 단일화에 대한 오판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 본 결과, 첫 번째 패인(敗因)은 노무현-정몽준(MJ)의 단일화에 대한 부정확한 판단이었다. ‘절대 1위’였던 이회창이 여론조사에서 뒤지기 시작한 것은 두 사람이 힘을 합친 뒤부터였다. 문제는 이에 앞서 한나라당 대선기획단에서 여러 차례 얘기가 오갔지만, 어느 누구 하나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점이다.
B의원은 이회창 대선기획단의 최고위층 인사로서, 이회창과 MJ의 세력을 연합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 왔다. 그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MJ와의 단일화였고, 적어도 MJ와 노무현의 연대(連帶)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회창-정몽준-노무현’의 3각 구도에서라면 충분히 승세(勝勢)를 이어 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B의원은 “대선후보 등록을 하루 앞두고 MJ와 노무현의 단일화가 이뤄졌을 때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그의 얘기다.
“MJ와 노무현이 누굽니까. 한국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사람 아닙니까. 재벌의 아들과 빈농(貧農)의 아들, 고학력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 한국 사회의 주류(主流)와 비(非)주류, 어느 것 하나 어울리려야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이 합친 것 자체가 희한한 거지요. 2002년 대선은 그때 벌써 끝난 겁니다. 국민의 시선이 그리로 확 쏠리는데 정말 감당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코드로 보면 이회창-MJ가 낫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솔직히 지금도 모르겠어. MJ가 노무현과 ‘러브샷’을 할 정도인데, 도대체 우리랑은 왜 안했는지.”
―당에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까. 첩보 수준의 정보라도 갖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냥 상식적인 측면에서 그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난 다음에 이 후보를 비롯해서 대선기획단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게 참 문제예요. 깜짝 놀란 것은 당연지사이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설마 그래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어’라면서 막연히 기대하는 의원들이 있더라고. 근데 내가 보니까 이건 뭐, 도저히 안되겠더라고. 단일화 이후에는 어떻게 뒤집으려고 해도 분위기 자체가 우리한테 오지를 않아. 단순히 둘이 힘을 합친 것이 아니라 노무현 후보랑 MJ가 같이 선거운동을 다녔잖소.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려 해도 모든 여론이 거기로만 쏠리는 거야. 그때 벌써 대세(大勢)는 끝난 거지.”
그는 이 부분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9년이 지났는데도 그 생각만 하면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말도 거칠어졌다.
“단일화!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이회창)
윤여준(尹汝雋) 전 환경부장관은 이회창의 최측근 인물이다. 2000년 한나라당 16대 총선기획단장과 2002년 대선기획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대선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7월에 자리를 떠났다가, 대선 막바지에 다시 대선 중심 측으로 돌아왔다.
윤 전 장관의 얘기다.
“이 후보가 대전에서 주무시고 전라도로 이동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근처에 있었습니다. 제가 중도에 대선기획단에서는 떠났지만 찾아뵙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밤 10시반쯤 들렀습니다. ‘총재님, 단일화가 되면 선거가 힘들어집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제 판단으로는 노무현과 MJ가 단일화를 해서 부산의 민심(民心)이 돌아서면, 한나라당으로서는 고전(苦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 총재가 제 무릎을 툭 쳤습니다. ‘윤 의원, 단일화 문제!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말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가볍게 넘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아, 총재가 단일화가 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고급 정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안했지만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보자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노무현-MJ의 연대’가 불가(不可)한 것으로 단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대방 캠프에선 그렇지 않았다.
황장수(黃壯秀)씨는 2002년에 민주당 총재특별보좌관을 지냈고, 단일화 이후에 정몽준 캠프에서 일했다. 그는 “이회창 후보의 폐쇄성이 상대방과의 연합을 가로막았다”고 분석했다.
“정몽준 후보가 굳이 이회창 후보와 손을 잡지 않았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정 후보는 당시에 대권 쟁취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없었고, 1등을 하는 쪽에 힘을 실어 주고자 하는 생각이 분명 있었죠. 1997년에 물과 기름 같았던 DJ(김대중)와 JP(김종필)가 연합해서 이회창 후보를 눌렀습니다. 이런 경험을 했던 이 후보가 왜 노무현-MJ 연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만일 이회창 후보가 정몽준 후보에게 단일화 제안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이 후보가 정 후보에게 러브콜을 보냈다면 상황은 많이 다를 수 있었겠죠. 이 후보는 아마 1등인 자신이 2등 정 후보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노무현 후보는 정 후보와 연합하면서 공동정부를 구성하자는 등 여러 제안을 던졌습니다. 두 사람의 약속이 다 깨졌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회창-MJ의 연합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이 후보의 폐쇄성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부산 의원들, “우리가 부산 지킨다” 자만
하지만 노무현-정몽준의 단일화가 된 이후에도 일부 의원들은 그 ‘후폭풍’에 대해 안일한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A 전 의원은 단일화로 여론이 돌아섰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상황을 역전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부 의원들은 부산 민심부터 챙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철현(權哲賢) 당시 비서실장(부산 사상구 국회의원)을 지역구로 내려보내, 부산 민심을 챙겨야 한다는 얘기들이 오갔다. 하지만 정작 부산에 내려가 있던 국회의원들은 이같은 우려를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우리가 여기(부산)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부산 민심을 걱정했던 의원들이 오히려 머쓱해져서 전화를 끊을 정도였다. 이회창은 나중에 부산에 거주하는 몇몇 친구들의 전화를 받고 ‘부산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를 들은 후에야 권 실장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일부 의원들은 ‘숨은 지지율 5%’를 들고 나왔다. 단일화 이후에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이 후보를 눌렀지만, 수치에 나오지 않는 ‘5%의 표’가 한나라당의 우호지분이라는 소리였다. 이즈음, 이회창은 ‘8인방’이니 ‘9인방’이니 하는 중진의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B의원은 “본인 스스로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지만, 이 후보는 그즈음 인(人)의 장막에 갇혀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그리고 선거일 하루 전날,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철회를 했을 때조차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쾌재를 부르는 분위기가 있었다.
B의원은 “선거 전날 MJ가 단일화를 철회했을 때 당내에서 ‘(MJ가) 차라리 빨리 주저앉았으면 얼마나 좋으냐. 지지철회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빨리 알려야 한다’는 얘기들이 오갔다”며 “MJ의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철회가 이회창 후보에게 유리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MJ의 선택은 젊은층의 노무현 후보에 대한 표 몰아주기로 끝났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혁혁한 공(功)을 세우고 말았다.
개혁·변화의 국민욕구 읽지 못해
이회창 대세론이 물거품으로 끝난 두 번째 이유는 대세론을 믿고 현실에 안주(安住)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를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라고 표현했다.
윤여준 전 장관의 말이다.
“이회창 후보가 2000년 총선을 치르면서 공천파동을 겪었습니다. 중진의원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고, 그 후유증으로 당이 내홍(內訌)을 겪었습니다. 이 후보는 ‘3김(金)식의 구태정치를 탈피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총선에 임했고, 중진의원들을 공천에서 탈락시킨 그의 선택을 국민들이 믿어 줬습니다. 한나라당은 DJ정부에서 다수당이 됐습니다. 이 후보는 이후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각종 제안을 내놓으면서 개혁세력이 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총선에서 압승한 이후에 이 후보는 달라졌습니다. 특정 지역 출신을 중심으로 왕당파가 생겼고, 결국 이는 2002년 대선 전에 ‘이회창 대세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회창 후보가 제시했던 ‘새로운 정치’는 불과 2년 뒤에 노무현 후보의 캐치프레이즈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만들었던 브랜드를 상대 후보에게 뺏기고 만 겁니다. 대세론이라는 현실에 안주하는 사이에, 본인 스스로가 개혁의 대상이 되는 정치인으로 추락하고 만 겁니다.”
2002년 대선에서 정책기획 업무를 맡았던 한나라당 C의원은 “이 후보가 시류(時流)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했다.
“한나라당 내에서 당시의 변화나 국민들의 개혁의지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 후보 주변에는 이미 견과류에 가까운 단단한 벽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요구,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할 정도로 탄탄한 벽이었습니다. 대선캠프 안에 있으면서 여러 번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국민들의 요구를 거부할 정도인데 ‘박찬종(朴燦鍾)을 만나라’, ‘JP를 찾아가라’는 말이 통할 리가 있습니까. 이런 것은 티끌에 불과한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호랑이가 토끼 새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사력(死力)을 다하는데, 대통령이라는 큰 고기를 잡으려는 이 후보는 느긋하게 걸어갔습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체험할 만큼 했습니다. 배고픔이나 교육수준이 다 해결됐죠.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읽고 반영하는 선진적인 정치가 요구되는 시점에서 전혀 이를 읽지 못했습니다.”
대세의 늪에 빠져 허우적
B의원은 “대세론이 독(毒)이 됐다”고 했다.
“대선에서 패하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원망을 합디다. 그때 ‘MJ랑 손을 잡지, JP 찾아가지’ 라면서요. 당시 상황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주위에서 다들 이겼다고 하고, 대세론이 나오니까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빠져드는 겁니다. ‘어차피 내가 이긴다는데 뭣하러 다른 사람(MJ나 JP 등)한테 신세를 지느냐’는 식(式)이죠. 이 후보의 입장에서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는 신세갚음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하기 싫었던 거지요.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대통령에 당선될 거니까. 그게 대세론의 맹점입니다. 누구든 오랫동안 ‘대세’라는 소리를 듣다 보면 그 늪에 빠집니다. 그런데 유권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약자에게 동정심이 생기고, 처음부터 1등을 한 사람보다는 지지율이 형편없었는데 점차 치고 올라오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겁니다. 비단 노무현 후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부동의 1위였던 사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오면, 내 한 표를 보태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거든요. 그래서 대세론이 오랫동안 유지되면 독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회창 후보의 경우가 딱 그러했지요.”
이회창, 부친상 문상 온 JP를 홀대
‘충청표’에 대한 인식 부족도 이회창이 대권을 쟁취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덧셈의 정치가 아닌 뺄셈의 정치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B의원은 “충청도의 표심(票心)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얘기다.
“이회창 후보가 1997년도에 패한 것도 따지고 보면 JP 때문입니다. DJP연합(김대중-김종필)이 김대중 대통령을 탄생시킨 거 아닙니까. 2002년도에 김종필 총재는 조건없이 이회창 후보를 도우려고 했습니다. 이 후보가 11월 초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 직접 찾아 조문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 후보를 도울 의사가 분명했다고 기억합니다. JP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참모진에서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이 후보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막판에 전세(戰勢)가 기울 무렵이 돼서야 관심을 보였지만, 그때는 이미 JP의 마음이 돌아선 후였습니다.”
한나라당 전직의원 A씨는 “이회창 후보가 조건없이 자신을 도우려 했던 JP를 끌어안지 못한 것은 뺄셈 정치의 극단을 보여주는 예”라고 말했다.
“선거는 한 사람이라도 내 편으로 더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의원들이 잘 뛰지 않는 겁니다. 이유를 물으니까 수뇌부에서 ‘까먹을 짓만 하지 말아라’는 얘기가 전달됐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대통령이 되는데, 괜한 짓을 해서 표를 잃지 말라’는 얘기였습니다. 당 실무자들이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나라당은 DJ로부터 정권을 뺏어와야 하는 야당이었습니다. 도전자인 야당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선거를 치르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 하나만 봐도 한나라당이 얼마나 ‘뺄셈의 정치’를 했는지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A 전 의원은 한나라당이 대선 며칠 전에 자민련 의원들을 대거 영입한 것도 충청도의 민심을 돌아서게 한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 충청도에 있었는데, 밤사이 싸늘하게 돌아 버리는 충청 민심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A 전 의원은 “자민련 의원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는데 충청도 사람들이 ‘쥑일 놈들’이라고 하더라. 내가 JP를 보고 찍어 줬지, 너희 의원들이 잘나서 찍어 준 줄 아느냐며 핏대를 세웠다. 충청도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돌아 버리더라”고 증언했다.
‘행정수도’의 영향 간과
선거기획가인 D씨는 1992년부터 2007년까지 대선이 치러지는 동안에 여야(與野)를 오가며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다. 그는 “이회창 후보가 대선의 기본 특징을 너무 몰랐다”고 했다.
“우리나라 대선의 특징 중 하나는 영남·충청이 손을 잡으면 무조건 승리한다는 점입니다. 수도권은 갈수록 독자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호남은 아직까지는 물과 기름이지요. 이회창 후보가 충청도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선산이 충청에 있으니 연고권을 주장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거든요. 그런데 충청을 그렇게까지 못 잡을 수 있습니까. TV토론에 나와서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자신의 소신으로 비칠 수 있지만, 격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충청도 사람들의 마음은 그때 떠난 겁니다. 노무현 후보와의 최종 격차가 59만 표 정도였는데, 충청에서만 25만 표 졌다는 점을 보면 그가 얼마나 충청도를 잡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다고 생각했을 때 JP라도 손을 잡았어야 했는데. 이런 게 정치인의 자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선기획단 최고위층이었던 B의원은 “수도를 충청도로 옮긴다는 것이 사실 황당무계한 얘기인 것은 맞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 파괴력을 누군가는 진지하게 검토했어야 했는데, 후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니까 다들 별거 아니라고 하고 넘어가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먹혔잖습니까”고 했다.
부동의 1위보다 더 큰 부동의 안티세력 무시
2002년 정몽준 대표가 이끄는 국민통합21 대변인을 맡았던 김행(金杏)씨는 2002년 3월에 이회창 면전(面前)에서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 전문가로서 여의도의 한 빌딩에서 열린 포럼장에서였다. 그의 생각은 분명했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38%’에 고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김행씨의 얘기다.
“대선 1년 전부터 내내 ‘이회창 대세론’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38%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악마의 ‘마’자를 붙여서 ‘마의 38%’라고 불렀습니다. 대선후보의 지지율은 확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후보는 줄곧 1위라고 언급이 되면서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나머지 60%는 완벽한 반창(反昌)세력이었습니다. 안티세력이 너무 컸으니, 지지율이 더이상 늘 수가 없는 겁니다. 혜성처럼 등장하는 상대 후보가 있다면 오히려 잃을 부분만 남았죠. 그래서 이회창 대세론이 나올 때부터 저는 ‘당신은 대통령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최악의 후보를 내세운 셈이었습니다.”
한나라당 C의원 역시 “1997년에 고배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에 이회창 안티세력을 전혀 희석시키지 못한 채 후보를 만들었다”고 했다.
C의원의 얘기다.
“대선을 치르기 위해 민심을 파고들어 보니 1997년도의 상처가 여전했습니다. 시민들은 이 후보가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것, 며느리의 원정출산, 고급빌라에 거주했던 점 등을 전혀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해를 살 만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반박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잊었을 것으로, 또 국민들이 용서했을 것으로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이회창 후보가 2000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막연하게나마 대선을 무난히 치러 낼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했던 겁니다.”
네 번의 대선을 현장에서 치러 낸 D씨의 아들은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權永吉)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었다.
D씨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차마 노무현 후보를 찍지는 않았지만, 도저히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이회창 후보를 찍을 수는 없었다는 말에 안티의 정도를 절감했다”고 했다.
한나라당에는 이렇다 할 대선전략이 없었다.
A 전 의원은 “한나라당 의원들은 감(感)에 의존해 선거를 치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얘기다.
“자신의 선거 경력에 과신(過信)하는 중진의원들이 지나치게 많이 이 후보 옆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몇몇 의원들이 전략을 언급할 때마다 ‘당신, 선거 한 번 안 치러 본 사람 아니야? 나 4선(選)의원이야’는 등의 얘기가 오갔습니다. 솔직히 영남이나 호남의 선거가 제대로 된 선거입니까. 지역감정으로 치른 선거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 출신 다선(多選)의원들 중 일부는 본인의 전략이 특출해서 선거에서 이겼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주먹구구식 행동으로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윤여준 전 장관은 요즘도 ‘선거는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선거는 통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여론조사를 통해서 지지율을 분석하고, 또 그 지지율 이면에 있는 국민의 복심(腹心)을 읽어 내는 조사를 한 다음에 선거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막판 대선기획단에 다시 합류했을 때 그간의 전략을 요청했는데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와서 안 보여주는 줄 알고 화를 냈더니, 대선기획단 간부가 ‘정말 없습니다. 안 믿어지겠지만, 그런 것이 정말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더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상식 있는 국민들의 마음을 잡는 것이 대선입니다. 초인적인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감에 의존해서 선거를 치러 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죠.”
노무현의 감성광고에 감탄한 한나라당
E씨는 대선이 끝난 이후에 ‘노무현 당선과정’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는 “노무현 후보는 이슈선점에 있어서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얘기다.
“노 후보는 대선 내내 늘 이슈를 몰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조·중·동 등 이른바 메이저 언론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한나라당 및 보수층과 철저하게 차별화를 했습니다. 언론사 세무조사, 국가보안법 폐지 등 다양한 이슈를 만들어 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부산시장 공천권을 위임하는 의사를 내비쳤고,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전격적으로 수용했죠. 또 미국을 공격하고,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를 적극 활용하면서 젊은층 공략에 나섰습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노 후보가 주장한 행정수도 이전이나 서울대 폐지론이 황당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전략이 국민들의 마음에는 먹혔습니다. 적과 아군을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낮은 지지층을 점차 끌어올리는데 성공했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거의 매달 이슈를 생산할 때마다 한나라당은 손 놓고 구경만 했습니다.”
이회창과 노무현의 태도는 ‘TV광고’에서 극명하게 엇갈렸다.
취재에 응한 사람들은 2002년에 TV로 보도된 ‘노무현의 눈물’ 광고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이 광고가 승패(勝敗)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고 보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윤여준 전 장관의 얘기다.
“‘노무현의 눈물’ 편을 보고 도저히 뒤집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무현 후보의 TV광고는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했습니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확 빠져들게 하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회창 후보의 ‘버스편’은 국민들의 사고(思考)를 요했습니다. 유능한 운전사가 운전을 해야 버스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간다는 등 한참을 지켜봐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노무현의 감성정치에 당한 케이스죠.”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이외에도 여러가지의 패인(敗因)을 들먹였다. 한나라당이 20대(代)의 표심잡기에 몰두하느라 정작 보수층을 챙기지 못했다는 것,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 적절한 입장표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 미디어 선거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등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다 이긴 2002년 대선에서 진 것을 두고 당내에서 150가지가 넘는 이유들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회창 대세론 vs 박근혜 대세론
그렇다면 2002년 이회창 대세론과 2011년 박근혜(朴槿惠) 대세론은 같을까, 다를까.
대선을 세 번 치러 낸 D씨는 둘의 공통점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이회창과 박근혜는 현재 당내에 뚜렷한 경쟁자가 없다는 것과 상대당(야권통합이 이뤄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에 뚜렷한 주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1등을 달리고 있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또 대세론이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되고, 대선 또는 당내 대선경선에서 실패의 경험이 있다는 점도 같죠. 또 패했던 상대가 대통령이 됐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차이점은 뭡니까.
“박근혜 전 대표는 이회창 후보보다 지역구도가 견고합니다.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원안 고수로 캐스팅보트인 충청도의 표심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충청에서는 고(故)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고향이 충북 옥천이다 보니, 박 전 대표를 ‘충청의 딸’로 여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회창 후보가 아들의 병역문제, 원정출산, 고급빌라 거주 등 약점이 많았다는 것에 비해서 박 전 대표는 이렇다 할 약점이 없죠. 일부 고령층에서는 부모(父母)를 모두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는 동정론도 있으니 유리한 편입니다.”
김행씨는 ‘박근혜와 이회창의 가장 큰 차이는 안티세력의 크기’라고 꼬집어 말했다.
“박근혜는 안티가 세지 않습니다. 때문에 지지율 확장성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가령 이회창 후보의 경우에는 ‘죽어도 싫다’는 극렬 안티세력이 있어서 지지율의 확장성이 약했지만, 박근혜 후보는 ‘그저 그렇다’는 층, 즉 나중에 박 후보의 지지세력으로 변할 수 있는 층이 존재합니다. 정치인은 고정적인 지지율 외에 자신의 안티를 희석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박근혜 대표는 그런 점에서 이회창 대세론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대세론’이라는 어감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모습이다.
B의원은 “처음부터 겸손하지 않은 정치인은 없다”며 “대세론이라는 말이 주는 함정에 빠지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국민은 1등에 대한 ‘피로도’가 있다. 누가 됐든 게임이 될 수 있는 상대를 찾기 마련이고, 그런 상대가 나타난다면 전세는 역전될 수 있다. 대선을 1년반 이상 남겨둔 시점에서 대세론이 나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D씨는 “향후 국내 안보상황에 따라 여성이라는 것이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며 “야당에서 ‘PK’ 출신으로 박 전 대표와 전혀 다른 인물을 내세워 양강구도로 갈 경우 지금의 대세론에 변화가 올 수 있다”고 했다.
위에 인용한 증언자 중 한 사람은 익명을 전제로 박 전 대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 전 대표는 무언(無言)의 정치인, 단문(短文)의 정치인입니다. 이건 반대로 콘텐츠가 없다는 공격을 받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공주과’죠. 이것 또한 공격하기 참 쉽죠. 아버지 박정희가 누굽니까. 18년 동안 논쟁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안티세력이 의외로 많다는 얘기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시작부터 박근혜, 박근혜 하는 것도 얼마나 지겹습니까. 측근을 자처하며 조개 껍데기처럼 입닫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보기 싫습니까. ‘나른한 오후 3시에 박카스 한 병’ 같은 후보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보기에 지금 박근혜는 2002년 10월의 이회창으로 보입니다.”⊙
한나라당 전직 의원 A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A씨는 지난 2002년 대선(大選)에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이하 존칭 생략) 후보의 최측근 인사로 선거과정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던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은 초반부터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렸다. 당내(黨內)경선에서 50%가 넘는 지지율을 얻으며 대선후보가 됐고, 한나라당 대(對) 새천년민주당(2002년 초반에는 이인제씨가 40%가 넘는 지지율로 대권후보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가상대결에서도 압승이 예측됐다. 이른바 ‘이회창 대세론’이었다.
상황은 2002년 3월 들어 다소 변했다. ‘이인제(李仁濟)-김근태(金槿泰)-한화갑(韓和甲)-노무현(盧武鉉)’ 등 민주당 후보들의 경선에 여론이 쏠리면서 이회창의 인기가 주춤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선거를 한 달 반 남짓 남겨 둔 시점에서조차 이회창의 청와대행(行)은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2002년 11월 11일에 실시된 KBS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의 이회창 36%, 국민통합21의 정몽준(鄭夢準) 22.8%,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22.1%였다. 하지만 노무현-정몽준 후보가 단일화를 선언한 직후에 판세는 뒤집혔다. 2002년 11월 19일 동아일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41.1%, 이회창 37.5%였다.
이회창은 끝내 이를 뒤집지 못했다. 그의 대권(大權) 재수(再修)는 이렇게 물거품으로 끝났다.
‘박근혜 대세론’이 한창인 지금, 9년 전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이회창 측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유력을 넘어 당선 확실 주자였던 이회창이 청와대에 입성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대선 직후부터 온갖 분석이 난무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언론의 피상적인 분석이 전부였다. 이회창은 진짜 왜 졌을까.
이회창 주변에 모였던 전·현직 국회의원들, 상대편이었던 노무현과 정몽준 캠프의 관계자들 등 총 9명을 인터뷰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익명(匿名) 보도를 요청했다. ‘한때 모셨던 주군에 대한 예의’라는 이유와 ‘다른 당(자유선진당) 대표인 사람에 대해 평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정몽준-노무현 단일화에 대한 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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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2002년 11월 15일 밤, 후보 단일화 방식에 합의한 뒤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으로 '러브샷'을 하고 있다. |
B의원은 이회창 대선기획단의 최고위층 인사로서, 이회창과 MJ의 세력을 연합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 왔다. 그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MJ와의 단일화였고, 적어도 MJ와 노무현의 연대(連帶)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회창-정몽준-노무현’의 3각 구도에서라면 충분히 승세(勝勢)를 이어 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B의원은 “대선후보 등록을 하루 앞두고 MJ와 노무현의 단일화가 이뤄졌을 때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그의 얘기다.
“MJ와 노무현이 누굽니까. 한국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사람 아닙니까. 재벌의 아들과 빈농(貧農)의 아들, 고학력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 한국 사회의 주류(主流)와 비(非)주류, 어느 것 하나 어울리려야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이 합친 것 자체가 희한한 거지요. 2002년 대선은 그때 벌써 끝난 겁니다. 국민의 시선이 그리로 확 쏠리는데 정말 감당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코드로 보면 이회창-MJ가 낫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솔직히 지금도 모르겠어. MJ가 노무현과 ‘러브샷’을 할 정도인데, 도대체 우리랑은 왜 안했는지.”
―당에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까. 첩보 수준의 정보라도 갖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냥 상식적인 측면에서 그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난 다음에 이 후보를 비롯해서 대선기획단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게 참 문제예요. 깜짝 놀란 것은 당연지사이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설마 그래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어’라면서 막연히 기대하는 의원들이 있더라고. 근데 내가 보니까 이건 뭐, 도저히 안되겠더라고. 단일화 이후에는 어떻게 뒤집으려고 해도 분위기 자체가 우리한테 오지를 않아. 단순히 둘이 힘을 합친 것이 아니라 노무현 후보랑 MJ가 같이 선거운동을 다녔잖소.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려 해도 모든 여론이 거기로만 쏠리는 거야. 그때 벌써 대세(大勢)는 끝난 거지.”
그는 이 부분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9년이 지났는데도 그 생각만 하면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말도 거칠어졌다.
“단일화!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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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창 후보(왼쪽)와 노무현 후보의 공식 선거홍보물. |
윤 전 장관의 얘기다.
“이 후보가 대전에서 주무시고 전라도로 이동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근처에 있었습니다. 제가 중도에 대선기획단에서는 떠났지만 찾아뵙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밤 10시반쯤 들렀습니다. ‘총재님, 단일화가 되면 선거가 힘들어집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제 판단으로는 노무현과 MJ가 단일화를 해서 부산의 민심(民心)이 돌아서면, 한나라당으로서는 고전(苦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 총재가 제 무릎을 툭 쳤습니다. ‘윤 의원, 단일화 문제!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말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가볍게 넘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아, 총재가 단일화가 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고급 정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안했지만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보자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노무현-MJ의 연대’가 불가(不可)한 것으로 단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대방 캠프에선 그렇지 않았다.
황장수(黃壯秀)씨는 2002년에 민주당 총재특별보좌관을 지냈고, 단일화 이후에 정몽준 캠프에서 일했다. 그는 “이회창 후보의 폐쇄성이 상대방과의 연합을 가로막았다”고 분석했다.
“정몽준 후보가 굳이 이회창 후보와 손을 잡지 않았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정 후보는 당시에 대권 쟁취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없었고, 1등을 하는 쪽에 힘을 실어 주고자 하는 생각이 분명 있었죠. 1997년에 물과 기름 같았던 DJ(김대중)와 JP(김종필)가 연합해서 이회창 후보를 눌렀습니다. 이런 경험을 했던 이 후보가 왜 노무현-MJ 연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만일 이회창 후보가 정몽준 후보에게 단일화 제안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이 후보가 정 후보에게 러브콜을 보냈다면 상황은 많이 다를 수 있었겠죠. 이 후보는 아마 1등인 자신이 2등 정 후보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노무현 후보는 정 후보와 연합하면서 공동정부를 구성하자는 등 여러 제안을 던졌습니다. 두 사람의 약속이 다 깨졌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회창-MJ의 연합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이 후보의 폐쇄성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부산 의원들, “우리가 부산 지킨다” 자만
하지만 노무현-정몽준의 단일화가 된 이후에도 일부 의원들은 그 ‘후폭풍’에 대해 안일한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A 전 의원은 단일화로 여론이 돌아섰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상황을 역전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부 의원들은 부산 민심부터 챙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철현(權哲賢) 당시 비서실장(부산 사상구 국회의원)을 지역구로 내려보내, 부산 민심을 챙겨야 한다는 얘기들이 오갔다. 하지만 정작 부산에 내려가 있던 국회의원들은 이같은 우려를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우리가 여기(부산)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부산 민심을 걱정했던 의원들이 오히려 머쓱해져서 전화를 끊을 정도였다. 이회창은 나중에 부산에 거주하는 몇몇 친구들의 전화를 받고 ‘부산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를 들은 후에야 권 실장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일부 의원들은 ‘숨은 지지율 5%’를 들고 나왔다. 단일화 이후에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이 후보를 눌렀지만, 수치에 나오지 않는 ‘5%의 표’가 한나라당의 우호지분이라는 소리였다. 이즈음, 이회창은 ‘8인방’이니 ‘9인방’이니 하는 중진의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B의원은 “본인 스스로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지만, 이 후보는 그즈음 인(人)의 장막에 갇혀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그리고 선거일 하루 전날,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철회를 했을 때조차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쾌재를 부르는 분위기가 있었다.
B의원은 “선거 전날 MJ가 단일화를 철회했을 때 당내에서 ‘(MJ가) 차라리 빨리 주저앉았으면 얼마나 좋으냐. 지지철회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빨리 알려야 한다’는 얘기들이 오갔다”며 “MJ의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철회가 이회창 후보에게 유리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MJ의 선택은 젊은층의 노무현 후보에 대한 표 몰아주기로 끝났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혁혁한 공(功)을 세우고 말았다.
개혁·변화의 국민욕구 읽지 못해
이회창 대세론이 물거품으로 끝난 두 번째 이유는 대세론을 믿고 현실에 안주(安住)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를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라고 표현했다.
윤여준 전 장관의 말이다.
“이회창 후보가 2000년 총선을 치르면서 공천파동을 겪었습니다. 중진의원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고, 그 후유증으로 당이 내홍(內訌)을 겪었습니다. 이 후보는 ‘3김(金)식의 구태정치를 탈피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총선에 임했고, 중진의원들을 공천에서 탈락시킨 그의 선택을 국민들이 믿어 줬습니다. 한나라당은 DJ정부에서 다수당이 됐습니다. 이 후보는 이후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각종 제안을 내놓으면서 개혁세력이 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총선에서 압승한 이후에 이 후보는 달라졌습니다. 특정 지역 출신을 중심으로 왕당파가 생겼고, 결국 이는 2002년 대선 전에 ‘이회창 대세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회창 후보가 제시했던 ‘새로운 정치’는 불과 2년 뒤에 노무현 후보의 캐치프레이즈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만들었던 브랜드를 상대 후보에게 뺏기고 만 겁니다. 대세론이라는 현실에 안주하는 사이에, 본인 스스로가 개혁의 대상이 되는 정치인으로 추락하고 만 겁니다.”
2002년 대선에서 정책기획 업무를 맡았던 한나라당 C의원은 “이 후보가 시류(時流)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했다.
“한나라당 내에서 당시의 변화나 국민들의 개혁의지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 후보 주변에는 이미 견과류에 가까운 단단한 벽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요구,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할 정도로 탄탄한 벽이었습니다. 대선캠프 안에 있으면서 여러 번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국민들의 요구를 거부할 정도인데 ‘박찬종(朴燦鍾)을 만나라’, ‘JP를 찾아가라’는 말이 통할 리가 있습니까. 이런 것은 티끌에 불과한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호랑이가 토끼 새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사력(死力)을 다하는데, 대통령이라는 큰 고기를 잡으려는 이 후보는 느긋하게 걸어갔습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체험할 만큼 했습니다. 배고픔이나 교육수준이 다 해결됐죠.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읽고 반영하는 선진적인 정치가 요구되는 시점에서 전혀 이를 읽지 못했습니다.”
대세의 늪에 빠져 허우적
B의원은 “대세론이 독(毒)이 됐다”고 했다.
“대선에서 패하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원망을 합디다. 그때 ‘MJ랑 손을 잡지, JP 찾아가지’ 라면서요. 당시 상황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주위에서 다들 이겼다고 하고, 대세론이 나오니까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빠져드는 겁니다. ‘어차피 내가 이긴다는데 뭣하러 다른 사람(MJ나 JP 등)한테 신세를 지느냐’는 식(式)이죠. 이 후보의 입장에서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는 신세갚음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하기 싫었던 거지요.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대통령에 당선될 거니까. 그게 대세론의 맹점입니다. 누구든 오랫동안 ‘대세’라는 소리를 듣다 보면 그 늪에 빠집니다. 그런데 유권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약자에게 동정심이 생기고, 처음부터 1등을 한 사람보다는 지지율이 형편없었는데 점차 치고 올라오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겁니다. 비단 노무현 후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부동의 1위였던 사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오면, 내 한 표를 보태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거든요. 그래서 대세론이 오랫동안 유지되면 독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회창 후보의 경우가 딱 그러했지요.”
이회창, 부친상 문상 온 JP를 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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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부친 빈소를 찾은 자민련 김종필 총재를 끝내 품에 안지 못했다. |
한나라당 B의원은 “충청도의 표심(票心)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얘기다.
“이회창 후보가 1997년도에 패한 것도 따지고 보면 JP 때문입니다. DJP연합(김대중-김종필)이 김대중 대통령을 탄생시킨 거 아닙니까. 2002년도에 김종필 총재는 조건없이 이회창 후보를 도우려고 했습니다. 이 후보가 11월 초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 직접 찾아 조문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 후보를 도울 의사가 분명했다고 기억합니다. JP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참모진에서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이 후보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막판에 전세(戰勢)가 기울 무렵이 돼서야 관심을 보였지만, 그때는 이미 JP의 마음이 돌아선 후였습니다.”
한나라당 전직의원 A씨는 “이회창 후보가 조건없이 자신을 도우려 했던 JP를 끌어안지 못한 것은 뺄셈 정치의 극단을 보여주는 예”라고 말했다.
“선거는 한 사람이라도 내 편으로 더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의원들이 잘 뛰지 않는 겁니다. 이유를 물으니까 수뇌부에서 ‘까먹을 짓만 하지 말아라’는 얘기가 전달됐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대통령이 되는데, 괜한 짓을 해서 표를 잃지 말라’는 얘기였습니다. 당 실무자들이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나라당은 DJ로부터 정권을 뺏어와야 하는 야당이었습니다. 도전자인 야당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선거를 치르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 하나만 봐도 한나라당이 얼마나 ‘뺄셈의 정치’를 했는지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A 전 의원은 한나라당이 대선 며칠 전에 자민련 의원들을 대거 영입한 것도 충청도의 민심을 돌아서게 한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 충청도에 있었는데, 밤사이 싸늘하게 돌아 버리는 충청 민심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A 전 의원은 “자민련 의원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는데 충청도 사람들이 ‘쥑일 놈들’이라고 하더라. 내가 JP를 보고 찍어 줬지, 너희 의원들이 잘나서 찍어 준 줄 아느냐며 핏대를 세웠다. 충청도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돌아 버리더라”고 증언했다.
‘행정수도’의 영향 간과
선거기획가인 D씨는 1992년부터 2007년까지 대선이 치러지는 동안에 여야(與野)를 오가며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다. 그는 “이회창 후보가 대선의 기본 특징을 너무 몰랐다”고 했다.
“우리나라 대선의 특징 중 하나는 영남·충청이 손을 잡으면 무조건 승리한다는 점입니다. 수도권은 갈수록 독자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호남은 아직까지는 물과 기름이지요. 이회창 후보가 충청도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선산이 충청에 있으니 연고권을 주장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거든요. 그런데 충청을 그렇게까지 못 잡을 수 있습니까. TV토론에 나와서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자신의 소신으로 비칠 수 있지만, 격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충청도 사람들의 마음은 그때 떠난 겁니다. 노무현 후보와의 최종 격차가 59만 표 정도였는데, 충청에서만 25만 표 졌다는 점을 보면 그가 얼마나 충청도를 잡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다고 생각했을 때 JP라도 손을 잡았어야 했는데. 이런 게 정치인의 자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선기획단 최고위층이었던 B의원은 “수도를 충청도로 옮긴다는 것이 사실 황당무계한 얘기인 것은 맞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 파괴력을 누군가는 진지하게 검토했어야 했는데, 후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니까 다들 별거 아니라고 하고 넘어가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먹혔잖습니까”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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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 대선후보 첫 경선을 하루 앞둔 2002년 4월 12일, 당사에 후보들의 포스터가 나붙었다. |
부동의 1위보다 더 큰 부동의 안티세력 무시
2002년 정몽준 대표가 이끄는 국민통합21 대변인을 맡았던 김행(金杏)씨는 2002년 3월에 이회창 면전(面前)에서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 전문가로서 여의도의 한 빌딩에서 열린 포럼장에서였다. 그의 생각은 분명했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38%’에 고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김행씨의 얘기다.
“대선 1년 전부터 내내 ‘이회창 대세론’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38%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악마의 ‘마’자를 붙여서 ‘마의 38%’라고 불렀습니다. 대선후보의 지지율은 확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후보는 줄곧 1위라고 언급이 되면서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나머지 60%는 완벽한 반창(反昌)세력이었습니다. 안티세력이 너무 컸으니, 지지율이 더이상 늘 수가 없는 겁니다. 혜성처럼 등장하는 상대 후보가 있다면 오히려 잃을 부분만 남았죠. 그래서 이회창 대세론이 나올 때부터 저는 ‘당신은 대통령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최악의 후보를 내세운 셈이었습니다.”
한나라당 C의원 역시 “1997년에 고배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에 이회창 안티세력을 전혀 희석시키지 못한 채 후보를 만들었다”고 했다.
C의원의 얘기다.
“대선을 치르기 위해 민심을 파고들어 보니 1997년도의 상처가 여전했습니다. 시민들은 이 후보가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것, 며느리의 원정출산, 고급빌라에 거주했던 점 등을 전혀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해를 살 만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반박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잊었을 것으로, 또 국민들이 용서했을 것으로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이회창 후보가 2000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막연하게나마 대선을 무난히 치러 낼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했던 겁니다.”
네 번의 대선을 현장에서 치러 낸 D씨의 아들은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權永吉)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었다.
D씨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차마 노무현 후보를 찍지는 않았지만, 도저히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이회창 후보를 찍을 수는 없었다는 말에 안티의 정도를 절감했다”고 했다.
한나라당에는 이렇다 할 대선전략이 없었다.
A 전 의원은 “한나라당 의원들은 감(感)에 의존해 선거를 치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얘기다.
“자신의 선거 경력에 과신(過信)하는 중진의원들이 지나치게 많이 이 후보 옆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몇몇 의원들이 전략을 언급할 때마다 ‘당신, 선거 한 번 안 치러 본 사람 아니야? 나 4선(選)의원이야’는 등의 얘기가 오갔습니다. 솔직히 영남이나 호남의 선거가 제대로 된 선거입니까. 지역감정으로 치른 선거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 출신 다선(多選)의원들 중 일부는 본인의 전략이 특출해서 선거에서 이겼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주먹구구식 행동으로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윤여준 전 장관은 요즘도 ‘선거는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선거는 통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여론조사를 통해서 지지율을 분석하고, 또 그 지지율 이면에 있는 국민의 복심(腹心)을 읽어 내는 조사를 한 다음에 선거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막판 대선기획단에 다시 합류했을 때 그간의 전략을 요청했는데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와서 안 보여주는 줄 알고 화를 냈더니, 대선기획단 간부가 ‘정말 없습니다. 안 믿어지겠지만, 그런 것이 정말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더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상식 있는 국민들의 마음을 잡는 것이 대선입니다. 초인적인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감에 의존해서 선거를 치러 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죠.”
노무현의 감성광고에 감탄한 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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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2월 19일 밤,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의 노무현 후보. |
그의 얘기다.
“노 후보는 대선 내내 늘 이슈를 몰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조·중·동 등 이른바 메이저 언론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한나라당 및 보수층과 철저하게 차별화를 했습니다. 언론사 세무조사, 국가보안법 폐지 등 다양한 이슈를 만들어 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부산시장 공천권을 위임하는 의사를 내비쳤고,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전격적으로 수용했죠. 또 미국을 공격하고,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를 적극 활용하면서 젊은층 공략에 나섰습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노 후보가 주장한 행정수도 이전이나 서울대 폐지론이 황당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전략이 국민들의 마음에는 먹혔습니다. 적과 아군을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낮은 지지층을 점차 끌어올리는데 성공했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거의 매달 이슈를 생산할 때마다 한나라당은 손 놓고 구경만 했습니다.”
이회창과 노무현의 태도는 ‘TV광고’에서 극명하게 엇갈렸다.
취재에 응한 사람들은 2002년에 TV로 보도된 ‘노무현의 눈물’ 광고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이 광고가 승패(勝敗)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고 보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윤여준 전 장관의 얘기다.
“‘노무현의 눈물’ 편을 보고 도저히 뒤집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무현 후보의 TV광고는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했습니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확 빠져들게 하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회창 후보의 ‘버스편’은 국민들의 사고(思考)를 요했습니다. 유능한 운전사가 운전을 해야 버스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간다는 등 한참을 지켜봐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노무현의 감성정치에 당한 케이스죠.”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이외에도 여러가지의 패인(敗因)을 들먹였다. 한나라당이 20대(代)의 표심잡기에 몰두하느라 정작 보수층을 챙기지 못했다는 것,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 적절한 입장표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 미디어 선거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등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다 이긴 2002년 대선에서 진 것을 두고 당내에서 150가지가 넘는 이유들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회창 대세론 vs 박근혜 대세론
그렇다면 2002년 이회창 대세론과 2011년 박근혜(朴槿惠) 대세론은 같을까, 다를까.
대선을 세 번 치러 낸 D씨는 둘의 공통점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이회창과 박근혜는 현재 당내에 뚜렷한 경쟁자가 없다는 것과 상대당(야권통합이 이뤄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에 뚜렷한 주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1등을 달리고 있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또 대세론이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되고, 대선 또는 당내 대선경선에서 실패의 경험이 있다는 점도 같죠. 또 패했던 상대가 대통령이 됐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차이점은 뭡니까.
“박근혜 전 대표는 이회창 후보보다 지역구도가 견고합니다.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원안 고수로 캐스팅보트인 충청도의 표심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충청에서는 고(故)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고향이 충북 옥천이다 보니, 박 전 대표를 ‘충청의 딸’로 여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회창 후보가 아들의 병역문제, 원정출산, 고급빌라 거주 등 약점이 많았다는 것에 비해서 박 전 대표는 이렇다 할 약점이 없죠. 일부 고령층에서는 부모(父母)를 모두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는 동정론도 있으니 유리한 편입니다.”
김행씨는 ‘박근혜와 이회창의 가장 큰 차이는 안티세력의 크기’라고 꼬집어 말했다.
“박근혜는 안티가 세지 않습니다. 때문에 지지율 확장성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가령 이회창 후보의 경우에는 ‘죽어도 싫다’는 극렬 안티세력이 있어서 지지율의 확장성이 약했지만, 박근혜 후보는 ‘그저 그렇다’는 층, 즉 나중에 박 후보의 지지세력으로 변할 수 있는 층이 존재합니다. 정치인은 고정적인 지지율 외에 자신의 안티를 희석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박근혜 대표는 그런 점에서 이회창 대세론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대세론’이라는 어감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모습이다.
B의원은 “처음부터 겸손하지 않은 정치인은 없다”며 “대세론이라는 말이 주는 함정에 빠지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국민은 1등에 대한 ‘피로도’가 있다. 누가 됐든 게임이 될 수 있는 상대를 찾기 마련이고, 그런 상대가 나타난다면 전세는 역전될 수 있다. 대선을 1년반 이상 남겨둔 시점에서 대세론이 나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D씨는 “향후 국내 안보상황에 따라 여성이라는 것이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며 “야당에서 ‘PK’ 출신으로 박 전 대표와 전혀 다른 인물을 내세워 양강구도로 갈 경우 지금의 대세론에 변화가 올 수 있다”고 했다.
위에 인용한 증언자 중 한 사람은 익명을 전제로 박 전 대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 전 대표는 무언(無言)의 정치인, 단문(短文)의 정치인입니다. 이건 반대로 콘텐츠가 없다는 공격을 받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공주과’죠. 이것 또한 공격하기 참 쉽죠. 아버지 박정희가 누굽니까. 18년 동안 논쟁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안티세력이 의외로 많다는 얘기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시작부터 박근혜, 박근혜 하는 것도 얼마나 지겹습니까. 측근을 자처하며 조개 껍데기처럼 입닫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보기 싫습니까. ‘나른한 오후 3시에 박카스 한 병’ 같은 후보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보기에 지금 박근혜는 2002년 10월의 이회창으로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