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기고] 국정원 50년 여정과 선진 정보기관의 길 : 월간조선

국가기능은 투명하고 공개적인 방법으로만 작동되지 않는다. 비(非)공개적 기능이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이다. 이를 위해 모든 나라는 나름 국가정보기관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다. 이 비공개적 국가기능의 핵심은 정보활동이다. 기원전 6세기 손자(孫子)는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정보의 본질에 관해 이렇게 썼다.

“정보, 즉 적에 대한 사전(事前)지식은 영감(靈感)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神)이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다. 과거 사례를 참조, 유추(類推)하거나 계산을 통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정보는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알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손자가 지적한 ‘알아내는 활동’을 현대 전문용어로 ‘정보수집’(intelligence collection)이라고 부른다. 수집활동의 방법은 다양하다. 스파이를 활용하는 방법을 포함, 각종 도청(盜聽) 장비, 인공위성 등 다양한 기술적인 방법들이 동원된다.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정보수집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이 감추고자 하는 것을 몰래 ‘훔치는 활동’(stealing)이다.

따라서 통념적(通念的)으로 보면 비신사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때때로 탈법적(脫法的)인 활동이다. 그리고 모든 훔치는 활동이 그렇듯 위험하고 험한 활동이다.

1929년 5월 후버 대통령에 의해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헨리 스팀슨 장관은 “신사는 남의 메일을 읽어서는 안 된다”면서 당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국무부 내 암호해독 부서를 해체해 버렸다. 공개적이고 투명한 방법으로만 국가기능이 작동되지는 않는다는 국제현실을 무시한 나이브(naive)한 발상의 극치였다.

스팀슨 장관의 바람과는 달리 그 후 미국의 정보기관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현재는 10여만 명 이상의 인력이 매년 수백억 달러의 예산을 사용하는 매머드 조직이 됐다. 이렇듯 정보활동은 현대 국가운영의 필수적 기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럴듯한 부인성’

그렇다고 해도 남의 기밀을 훔치는 이 특수한 국가기능을 함부로 아무 데나 남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꼭 필요한 분야에 꼭 필요할 때만 투입되어야 한다.

이를 사용할 경우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한 사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만약 노출될 경우에는 이를 부인하는, ‘그럴듯한 부인성’(plausible denial)을 준비하는 것이 정보운영의 기본 상식이다.

최근 불거진 국가정보원 직원의 인도네시아 특사단(特使團) 숙소 잠입 의혹 사건을 보면, 이런 정보운영의 기본원칙과 상식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치밀한 계획 없이 ‘한번 해보자’는 식의 안이한 태도로 접근했다가 실패한 사례로 보인다.

사실 세계의 모든 정보기관이 크고 작은 실패를 달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례는 그 실패 내용과 과정이 일반인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이번 의혹이 사실이라면 실패의 1차적 책임은 작전에 간여한 일부 국정원 직원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관계 직원의 부주의로 인한 1회성 해프닝으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다. 국정원이 아직도 진정한 선진 프로페셔널 정보기관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고착되어 온 국정원 특유의 관행과 정보문화가 이런 실수를 낳은 구조적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국정원의 지난 50년간의 여정을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초기 中情, 국정 어젠다 관여 불가피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

세계 모든 정보기관의 출범과 운영은 그 나라가 처한 정치·사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현존하는 정보기관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현대 국가정보기관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영국의 MI-6는 19세기 대영제국(大英帝國)의 제국주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의 CIA(중앙정보국)는 소련의 팽창주의 위협이 대두되던 1947년, “미국이 ‘제2의 진주만 기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 의해 창설됐다. 구(舊)소련의 KGB(국가보안위원회)는 공산혁명 후 반(反)혁명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혁명의 도구로 탄생했다. 모사드는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아랍권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중앙정보부(약칭 중정)가 출범한 것은 5·16군사혁명 직후인 1961년 6월 10일이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내외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처리해 국정(國政)에 반영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국가수준의 정보운영을 해본 훈련된 인원도 경험도 전무(全無)했다. 하드웨어는 마련됐지만, 그 내용이 되는 소프트웨어는 턱없이 부족했다.

1960~70년대는 북한과 생존을 건 치열한 체제경쟁을 하던 시대였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상황은 중앙정보부의 운영에도 반영됐다.

김종필(金鐘泌) 초대(初代) 중앙정보부장은 당시 “중앙정보부는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창설됐다”고 말했다. 중정(中情)이 어떤 시대적 배경을 띠고 태어났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래서 중앙정보부는 다른 선진국 정보기관처럼 ‘눈’과 ‘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손’과 ‘발’의 역할까지 해야 했다. 국가정책을 개발해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정책의 실현과정을 모니터해 이를 다시 정책에 피드백(feedback)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중정은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일종의 통치기구(governing body)였다. 중정은 경제발전의 전제인 정치안정을 강제하는 역할에서부터 중동(中東)진출 건설업체들 간의 과당경쟁을 방지하는 역할까지 모든 국정 어젠다에 무소불위(無所不爲)로 간여했다.

이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의지였고, 중정의 숙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권력남용이나 부패, 인권침해 등이 자행되기도 했다. ‘그때 왜 좀 더 인권을 존중하면서 정교하게 일 처리를 못했느냐’고 지금의 잣대로 따지는 것은 결국 ‘나중에 태어난 자의 오만’일 뿐이다. 그 시절 중정의 일처리 수준은 우리나라 전체의 수준과 별로 거리가 멀지 않았다. 당시 중정의 모습은 정권과 밀착해서 움직이는 후진국형 정보기관의 전형이었다.

햇볕정책으로 正體性 상실

김대중 대통령과 이종찬 안기부장이 1998년 5월 12일 ‘정보는 국력이다’라고 쓴 새 부훈석 제막식을 갖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기존 안기부 요원들을 대량 해직했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중정은 부장이 대통령 시해사건의 범인이라는 이유로 대수술을 받았다. 대폭적인 인사교체가 이루어졌고, 부처의 이름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개칭됐다.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화가 숨가쁘게 진행됐지만, 안기부는 과거 중정의 부정적 유산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리더십들도 정보기관에 여전히 ‘국정해결사’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일반에서도 ‘정보기관은 으레 그런 일을 하는 곳’이라는 분위기가 여전했다. 필자도 당시 여권(與圈) 인사들로부터 여러 차례 “왜 안기부가 좀 더 무서운 역할을 하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과거보다 나아진 점도 많았다. 안기부가 국내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인권침해 사례도 거의 사라졌다. 민주화 시대에 걸맞은 정보기관으로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8년 김대중(金大中) 정부의 출범은 우리 정보기관에 새로운 차원의 위기를 불러왔다. 김대중 정권의 출범은 그동안 정보기관의 피해자로 여겨져 온 정치세력의 집권을 의미했다. 자연히 안기부는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1차적으로 손 볼 대상이 됐다. 대폭적 물갈이 인사가 이루어졌다. 많은 직원이 해직되거나, 심지어 정치적 이유로 기소됐다. 이름도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바뀌었다.

보다 심각한 위기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부터 야기됐다. 이 정책은 국정원의 정보기관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갑자기 북한이 더 이상 안보위협이 아니게 된 것이다. 북한은 무슨 짓을 하든 무조건 이해하고 포용하고 지원해야 할 대상이 됐다. 그동안 그렇게 힘들여 쌓아왔던 정보자산이 졸지에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됐다. 간첩을 더 이상 잡아야 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 결과 국정원은 집중해야 할 정보목표를 상실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어정쩡한 기관으로 전락했다.

노무현(盧武鉉) 정부 들어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화됐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앞장섰다. 그는 국정원을 상대하지 않은 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여겼다.

좌파정부 10년은 우리 정보기관의 발전이 정체(停滯), 아니 오히려 퇴행(退行)했던 시기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MB정부, 국정원에 대한 개념부터 잘못 잡고 관행 답습

이명박(李明博)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은 다시 안보위협의 실체(實體)로 떠올랐다. 국정원도 간첩을 잡아들이고, 대북(對北)정보 활동을 적극적으로 정상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정원을 프로 정보기관으로 선진화하려는 치열한 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과거 정부처럼 국정원을 안보기관이 아니라 대통령의 국정 전반을 보좌하는 정무(政務)기관으로 간주하는 인식도 여전했다. 대통령직 인수 시 국정원을 안보외교분과위원회가 아닌 정무분과위원회에서 관장하도록 한 것이 이를 방증(傍證)한다.

또한 국정원장을 비롯한 지휘부 인사 패턴도 과거 정부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정보 전문성은 뒷전으로 밀렸다. 실무 경력이 우선되어야 하는 차장급 인사조차 비전문가로 채워지는 경우가 잦았다. “적절한 인사를 찾을 수 없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지만, 정보 전문성을 경시하는 이런 식의 인사가 지속되면 국정원은 영원히 아마추어 기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안보를 광의(廣義)로 해석, ‘국익(國益)활동’ 전반을 국가안보 개념에 포함시켜 정보기관이 할 일로 만들었던 관행을 그대로 답습했다. 때문에 대통령의 관심에 따라 국정원의 활동 방향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현상이 그대로 지속됐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보활동이라는 정부기능은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 되는 특수기능이다. 공개기능으로 달성할 수 없는 영역에서 꼭 필요할 때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칼’이다. 정보활동은 늘 노출의 위험을 안고 있고 노출되면 큰 후유증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보활동은 여러 국가 이익 중에서 국가 ‘생존’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CIA가 산업정보활동을 손대지 않는 이유

조지 테넷 전 CIA 국장.

1990년 초 냉전(冷戰)이 끝나자 미국에서는 산업정보를 CIA의 업무영역으로 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다. 그러나 기업의 다국적화(多國籍化)와 ‘정보를 수집하더라도 이를 특정기업에 주는 것이 타당한가’하는 점이 지적됐다. 결국 시장경제체제하에서는 산업정보활동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특히 국가안위 문제가 아닌 경제이익활동을 위해 CIA요원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면서 이 논의는 없던 일이 됐다.

정보업무는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질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정보업무는 수집 목표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선행(先行)되고 이에 필요한 정보자산을 조심스럽게 구축한 후에야 추진되는 신중한 과정이다. 국익활동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따라 정보활동 초점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은 제대로 된 정보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파키스탄 핵무기 기술이 북한으로 확산된다는 사실을 잡아낸 것은 소규모 CIA 특수공작팀이 10여 년간 추적한 결과였다. 부인할 수 없는 확고한 정보를 손에 쥔 조지 테넷 CIA 국장은 2003년 9월 24일 뉴욕에서 무샤라프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나 핵 확산 주범인 칸 박사에 대한 제재를 요구했다(조지 테넷 자서전 《폭풍의 중심에서》). 이는 프로 정보기관이 어떻게 정보업무를 수행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정보기관의 선진화’란 ‘선진국 정보기관처럼 일을 처리한다’는 의미다. 현재 국정원의 모습은 선진국 정보기관의 모습과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 선진국 정보기관은 위에서 말한 CIA의 사례처럼 업무 정체성이 뚜렷하다. ‘국익활동’이라는 명분으로 본연의 임무와 관계없는 일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국정원이 선진국 정보기관처럼 되려면, 우선 업무초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국익활동’이라는 명분으로 다양한 일에 손을 대 온 과거의 관행을 과감히 떨쳐버려야 한다.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고 업무를 국가안보 문제로 한정하고, 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업무집중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안보’라는 개념도 좁게 해석해서 실제로 집중해야 할 국가안보과제(portfolio)를 정한 후 이를 담당할 전문요원을 집중적으로 양성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직원들이 헷갈리지 않고 업무에 진력(盡力)하게 된다. 그래야만 국정원이 선진국형 프로 정보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고유업무를 제쳐 놓고 대통령이 그때그때 관심을 보이는 분야를 좇아 움직인다면, 국정원은 영원히 아마추어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대북 정보 외의 다른 활동은 정부 부처로도 충분

이는 국정원법에 명시된 업무를 법대로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정원법은 이 법의 목적에 대해 “국가안전보장업무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법 제3조 제1항에서는 국정원의 직무로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대공, 대정부 전복, 대테러 및 국제 범죄)의 수집·작성 및 배포’를 규정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의 최대 안보 위협 요소는 북한이다. 우리나라에서 국가안전보장 업무란 북한과 관련된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인류 첩보사상 가장 어려운 하드 타깃(hard target)이고, 접근이 근본적으로 거부되고 있는 지역(denied area)이다. 북한을 대상으로 한 정보활동은 국정원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도 충분치 않다.

전 세계에서 북한을 대상으로 체계적·본격적인 정보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미국·일본 세 나라뿐이다. 중국의 경우는 외교적 노력만으로도 정보소요(所要)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입장이다.

북한정보에 관한 한 그 어떤 나라보다도 선도적 위치에 서야 하는 한국이지만, 미국과 일본에 비해 인공위성 분야에서 열세인 형편이다. 따라서 국정원은 우리나라만이 가진 대북 정보 여건을 최대로 활용, 북한정보 수집 강화에 나서야 한다. 다른 국익활동은 국정원이 아니더라도 해당 정부 부처가 챙겨나갈 수 있다. 하지만 대북 정보활동은 다른 부서에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기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국민이 국정원에 바라는 바일 것이다.

국정원 국내 부서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북한 간첩의 색출이라는 기본 업무 외에 우리 사회 내부로부터 체제를 흔드는 세력에 대한 대처, 새로운 안보위협으로 대두하고 있는 국제 테러리즘에 대한 대처, 그리고 최근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북한발(發) 사이버공격에 대한 대응 등 해야 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유념해야 할 것은 정보활동은 늘 제한성과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자신들의 정보역량을 총동원해 10년 동안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하고 있지만, 아직 체포하지 못하고 있다. 대북 정보활동은 이보다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결코 쉽지 않다. 김정일의 동정을 실시간으로 파악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국정원을 무능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보업무의 특성을 이해치 못한 무지(無知)의 소치일 뿐이다.

사무엘 헌팅턴의 경고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CIA 개혁을 위해 구성된 처치위원회를 이끌었던 프랭크 처치.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인 1975년 미 의회는 ‘프랭크 처치 위원회’를 발족시켜 그간 CIA가 저지른 불법활동 사례를 낱낱이 조사했다. 이후 미 상·하원에 정보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보기관에 대한 의회의 감독 기능이 강화됐다. 당시 처치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사무엘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는 이렇게 비판했다.

“처치위원회는 CIA 활동의 부도덕성(im-morality)에만 초점을 맞춰 조사활동을 했고 비판만 가했다. 장래 미국이 직면할 국가정보 소요에 대해 CIA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었다.”

이 비판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간 국정원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의 비판은 주로 과거에 발생했던 ‘권력남용·정치간여·인권탄압’ 등에 관한 것이었다. ‘과거에 몹쓸 짓을 한 기관’이라는 맥락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는 비판 일변도였다.

처치위원회의 활동을 비판한 사무엘 헌팅턴.

헌팅턴의 비판처럼 이제 우리나라가 직면할 정보소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정원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론(公論)이 모였으면 한다.

국정원의 개혁과 강화는 물론 1차적으로 국정원 자체의 몫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정치권은 국정원 역할의 강화를 정치적으로 이해하는 관성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최근 ‘국방개혁 307계획’이 확정됐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는 않지만,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다. 국정원의 경우는 다르다. 국정원 역할 강화 시도가 있을 때마다 늘 정치적 시비가 벌어진다. 테러 관계법이나 통신비밀보호법의 제·개정 논의가 나올 때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이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惡用)하려는 저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국정원을 안보기관이 아닌, 집권자의 정치적 도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그 원인이다. 이런 인식은 하루빨리 불식되어야 한다. 국정원은 군 못지않게 중요한 국가안보 중추기관이다. 국정원 강화 문제는 여야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안보를 튼튼하게 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정보기관은 국가안보의 ‘제1방어선’

《기드온의 스파이》의 저자 고든 토머스.

국가안보는 군사력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정보와 연계된 안보시스템 전체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강한 안보’의 필수조건이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관한 논픽션 《기드온의 스파이》를 쓴 영국 작가 고든 토머스는 “어느 나라든 국가안보는 총구가 아닌 정보로부터 시작된다”고 썼다. 그래서 정보기관을 ‘제1방어선’(The first line of defense)이라고 부른다. 때문에 안보를 생각할 때 ‘제1방어선’부터 강화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북한의 대남위협의 수위가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북한 내부정세도 심상치 않다. 중국의 ‘북한 껴안기’와 거친 외교 행보는 한반도 주변 상황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중동발(中東發) 정세 불안요인이 심각하다.

이런 엄중한 정세 앞에서 ‘제1방어선’, 즉 국정원의 안보기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은 더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다.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잠입 의혹과 같은 문제 때문에 지체할 여유가 없다. 이 사건과 관련 인사 교체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인사 교체가 능사가 아니다. 실패는 사람이나 조직을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잦은 인사 교체는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도 많다. 이 문제는 국정원 자체 판단에 맡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국정원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심기일전(心機一轉)해 안보중추기관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해야 한다.

국정원장직이 ‘힘센 자리’여서는 안 된다

정보요원들은 경계인적(境界人的)인 삶을 산다. 정보요원들이 활동하는 영역은 대체로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하는 영역이다. 정보요원들은 다른 정부부처 공무원들과 달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임무를 위해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때로는 훔치는 일도 해야 하고, 또 매수와 같은 비신사적인 일도 해야 한다. 임무 완수를 위해 공작원을 비정하게 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정보요원들은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선상에서, 윤리적 갈등 속에서 번뇌할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이들은 ‘나는 국가안보를 위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러한 정보요원들의 애환을 국민들은 따뜻하게 이해해 줘야 한다.

1997년부터 7년간 CIA 국장직을 수행했던 조지 테넷은 그의 자서전 말미에 “나는 미국 정부 내에서 최고의 직책(best job)을 거쳤었다”고 썼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CIA 국장 자리가 힘세고 화려한 ‘권력의 자리’여서가 아니다. 또 대통령에게 인정을 받아 오랫동안 CIA 국장직을 수행했다는 자만심에서 나온 말도 아니다.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고되고 힘든 자리지만, 소명(召命)의식에 가득 찬 직원들과 더불어 국가안보를 위해 일했다’는 자부심에서 그렇게 술회했던 것이다.

우리 국정원장 자리는 아직도 ‘힘센 자리’로 인식되고 있다. 국정원장 자리는 권력과는 아무 관계없고, 오직 국가안위(安危)를 노심초사(勞心焦思)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정원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쌓이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국정원이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국가 안보중추기관으로 선진화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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