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에서 현장에 전도금을 내려보낼 때 ‘이번에는 30개(30억)를 녹여 오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녹여 오라’는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증빙자료를 만들어 비자금을 현찰로 들고 오라는 소립니다.”
(비자금 관리해 온 건설회사 임원 A씨)
“비자금이 없는 회사는 없다고 봅니다. (검찰에서) 털기로 작정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죠.”
(전직 검찰관계자 G씨)
⊙ 주로 건설회사 통해 조성… 토목공사에서 가장 큰 규모 가능
⊙ 매출 1조원이면 비자금 500억원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
⊙ 오너의 재산증식에 사용되는 비자금이 가장 문제
‘녹여 오라’는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증빙자료를 만들어 비자금을 현찰로 들고 오라는 소립니다.”
(비자금 관리해 온 건설회사 임원 A씨)
“비자금이 없는 회사는 없다고 봅니다. (검찰에서) 털기로 작정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죠.”
(전직 검찰관계자 G씨)
⊙ 주로 건설회사 통해 조성… 토목공사에서 가장 큰 규모 가능
⊙ 매출 1조원이면 비자금 500억원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
⊙ 오너의 재산증식에 사용되는 비자금이 가장 문제
“대한민국에 비자금(示必資金) 없는 회사가 있느냐고요? 제가 알기로는 한 곳도 없을 겁니다.”
건설업체 현직 임원으로 있는 A씨의 말이다. A씨는 사견(私見)임을 극구 강조했지만, 거듭 “절대로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는 회사는) 한 곳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A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오너의 비자금을 직접 조성하고, 운용했던 인물이다.
대한민국이 비자금에 빠져 있다.
한화증권을 퇴사한 직원은 올해 초 금융감독원에 “회사가 비자금 관리에 쓰는 불법(不法) 계좌를 갖고 있다”고 제보했다.
태광그룹의 이호진(李豪鎭) 회장은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해 정·관계(政官界)에 로비를 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C&그룹이 위장 계열사를 이용해 비자금을 관리한 정황도 검찰 수사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재벌그룹의 비자금 조성과 관리, 정권의 실세에게 전해졌다는 얘기는 이제 뉴스도 아닐 지경에 이르렀다.
비자금은 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방법으로 관리될까. 결국 어떤 용도로 사용될까. 과거에 비자금을 만들었거나 관리한 사람들, 이런 불법자금을 찾아온 검찰 관계자들을 만나 ‘비자금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현금으로만 오가
‘비자금’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다. 통상 무역이나 계약 등 기업 활동에서 관례적으로 발생하거나, 조작해서 생긴 부정(不正)한 돈을 비자금으로 정의한다. 영어로는 ‘비밀스러운 펀드(Secret Fund)’라고 부른다.
전직 검찰 관계자는 “비자금은 범죄행위에 제공할 자금, 넓게는 영수증 처리를 할 수 없는 자금 거래에 사용되는 모든 자금이다”라고 정의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다수의 관계자들은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수법으로 이뤄진다”고 증언했다. 초기 비자금이 모두 ‘현금’으로 조성되고, ‘현금’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기묘한 신(新)기법은 있을 수 없다고도 했다.
이들은 비자금의 최초 조성 창구로 건설사를 꼽았다.
H씨의 얘기다. 그는 30년 가까이 검찰에 비자금 수사를 맡았다.
“시작은 건설사입니다. 제조업이나 금융회사 등에서 일부를 만들 수 있지만, 큰 규모는 아닙니다. 제조업은 원가 계산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건설업은 여전히 주먹구구식(式)으로 일이 처리됩니다. 인건비, 자재비 부풀리기는 여전하죠. 검찰에서 수사를 할 때 자재 소요량을 역(逆) 산출해서 비자금 조성을 찾아낸 적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이 힘듭니다. 과거보다 투명해졌다고는 하나, 건설사의 어느 조직에서 정확하게 얼마의 돈을 사용했는지 내역을 알 수가 없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인건비, 자재비 지출 내용 등에 관한 증빙 자료를 완벽하게 조작해서 올려보냅니다. 고전적인 방법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피아노 도장’ 으로 찍어 노무비 부풀리기
건설업체 임원 A씨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본사(本社)에서 지침이 하달된다”고 말했다.
“공사에 착수하기 전에 ‘전도금(前渡金)’이 내려갑니다. 공사를 하다 보면 소액의 자금 지출이 자주 이뤄지는데 이때를 감안해서 경리 직원에게 일정 금액을 미리 지급하고 나중에 정산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 예비비인데 공사 현장에서는 ‘전도금’이라고 부릅니다. 회사에서 전도금을 내려보내면서 ‘이번에는 30개를 녹여 와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녹여 오라는 것이 뭡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비자금으로 둔갑시켜 현찰로 올려보내라는 소립니다. ‘개’는 ‘억’입니다. 30개를 녹이라는 건 30억원에 대한 증빙서류를 만들고, 내려보낸 돈을 현금으로 찾아 도로 가져오라는 겁니다. 요즘은 컨소시엄 형태로 공사를 하지만, 과거에는 단독 수주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 공사비가 전체 수주 금액의 70%밖에 되지 않은 적이 많았습니다.”
―증빙자료 조작은 어떻게 이뤄집니까.
“가장 쉬운 방법은 노무비 부풀리기입니다. 큰 공사 현장에는 일용직 근로자가 한 번에 1000~2000명 정도 투입됩니다. 실제로는 1000명을 투입했는데 2000명을 사용한 것처럼 조작하면, 이들 1000명에 대한 일당은 고스란히 본사의 비자금이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일용직 근로자들은 신용불량자나 주거지가 일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회사에서 임금을 통장에 입금하기보다, 하루 일이 끝나면 일당을 현금으로 줍니다. 아침에 공사현장에 나와서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저녁에 돈을 받아 가죠. 세금을 떼지 않는 근로비입니다. 일당이 4만원인 사람이 한 달을 꽉 채우면 120만원을 받아 가죠. 일하지 않은 1000명에게 임금을 지급했다고 허위 기재를 하면 한 달에 12억원의 비자금을 챙길 수 있습니다. 건설회사의 현장이 한 군데가 아니지 않습니까? 인원 투입이 많은 현장 몇 곳에서만 빼도 100억원은 금방 챙길 수 있죠. 결국 일한 적이 없는 일당 근로자들이 여기저기서 계속 일한 셈이 되는 겁니다.”
“몇 억씩 녹인 현장은 축복받은 거죠”
A씨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고 했다.
“예전에 본사에서 마음먹고 중복된 노무비를 찾았는데 300억원이 넘었습니다(웃음). 같은 날에 여러 현장에서 근무한 것으로 돼 있더라고요.”
―확인할 길이 없습니까.
“없죠. 법인세법상 일용직이 일당을 받아 갈 때 사인을 하지 않고 도장을 찍도록 돼 있습니다. 자기들이 직접 도장을 파서 오지 않잖습니까. 막도장을 한꺼번에 수천 개 파서 임금 지급 대장에 계속 도장을 찍는 겁니다. 현장에서 은어로 ‘피아노 도장’이라고 부릅니다. 도장이 피아노 건반처럼 똑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피아노 도장’으로 노무비를 받아 갔다고 꽝꽝 찍어서 수십억 원의 비자금을 챙기는 겁니다. 세금 한 푼 안 내는 비자금입니다. 회사 측에서 이 장부를 계속 보관해야 하는 의무가 없기 때문에 사실 찾을 길이 없습니다.”
―현장에서 누군가가 폭로할 확률은요.
“아이쿠, 없습니다. 오히려 영광으로 알 겁니다. 사내(社內)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현장 책임자로 내려보냈다는 얘기 아닙니까.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몇 억씩 녹인 현장은 축복받은 거죠. 그동안 장부에 못 올렸던 기록까지 다 올리면 되니까.”
―이 방법이 계속될까요.
“요즘은 더 좋아졌지요. 일당이 8만원으로 올랐거든요. 단순 계산을 해 보세요. 비자금으로 챙길 수 있는 파이가 더 커졌다는 소리 아닙니까.
A씨는 “가공(架空) 원가가 전체의 20%를 넘으면 위험하다”며 “노무자가 적게 투입되는 현장에서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고 유의사항(?)까지 말했다.
비자금의 백미는 토목공사
건설회사의 각종 부문에서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로 보인다.
모 재벌그룹의 K대표이사는 얼마 전에 공사비가 5000억원 가까이 들어가는 건물을 지었다. 그는 “본업(本業)이 건설업이 아니어서, 건물을 증축하기 위해 전직 건설회사 임원을 스카우트했다”고 했다.
K대표의 얘기다.
“스카우트 얘기를 하는데 그 임원이 현장에 대한 전권(全權)을 요구했습니다. 제가 워낙 건설업에 문외한이고 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이번 공사로 얼마를 챙기고 싶으냐’고 하더군요. 그 임원은 ‘필요한 액수가 있으면 지금 말해라. 알아서 올려 보내 주겠다. 나중에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데 그때 필요하다고 하면 현장에서 귀찮아진다’고 했습니다. 건설업이 처음이었는데 그 임원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를 해서 오히려 제가 놀랐습니다.”
노무비 부풀리기는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일 중 하나로 보인다.
가장 큰 금액이 오가는, 소위 건설 비자금의 백미는 ‘토목’이다. 건설은 ‘토목-건축-전기-기계-조경’의 순(順)으로 이뤄진다.
전직 검찰 관계자 H씨의 얘기다.
“토목은 비용이 크고, 그만큼 변동이 많습니다. 그만큼 비자금을 만들 수 있는 구멍이 많이 있다는 소리죠. 건설회사에서 원래 흙 100t을 쓰려던 현장에 1000t을 투입해서 비용이 늘었다고 주장했다 칩시다. 흙 사느라 쓴 비용이며, 노무비가 10배로 늘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건설회사에서 원래 땅을 10m쯤 파려고 했는데, 100m를 파게 되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공사가 다 끝난 땅을 갈아 엎어서 진짜 100m를 팠는지 확인할 겁니까? 진짜 사용한 비용 이외에 90%는 비자금이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토목공사비가 천문학적으로 부풀려지는 겁니다.”
―해당 관할구청에서 검사를 나오지 않습니까.
“검사를 해도 건설 회사에서 미리 지점을 정해 놓습니다. 땅을 얼마나 깊게 팠는지를 알 수 있는 기계가 있지만, 건설사에서 미리 정한 자리는 정상이지요. 예전에 검찰에서 수사를 할 때 인근의 땅을 전부 확인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습니다. 진짜 그만큼을 팠는지 일일이 전부 확인하라고요. 하지만 이런 수사가 일상적인 것은 아니지요.”
토목 관련 영수증으로 방 하나 채워져
또다른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관계자 B씨의 얘기다. 우리나라 도급 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대형회사다.
“공사를 하는 와중에 땅속에 박힌 돌이 안 깨져서 며칠 동안 수백 명의 인원을 투입했다고 우기면 어쩔 겁니까? 일일이 공사에 투입됐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탐문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토목공사가 그런 겁니다. 요즘은 PQ제도(사전적격심사제도)가 있어서, 과거에 경험이 풍부한 한 건설회사가 원(原)청사로 선정됩니다. 그 원청사가 수많은 작은 건설사, 관련업체에 하청을 주는 식입니다. 토목이 공사 규모나 단가가 크고, 가장 많은 사람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조작을 하면 찾을 길이 없습니다.”
B씨는 “토목공사 하나를 하면, 그 관련 영수증으로 방 하나를 채울 수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복잡하고 많은 사람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비자금을 조성해도 찾을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취재에 응한 사람들의 얘기에 따르면 토목 이외에도 모든 과정에서 비자금을 만들 수 있다. 예전보다 투명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허점이 많은 곳이 건설회사이기 때문이다.
B씨의 얘기가 이어졌다.
“토목이 크게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일 뿐이지 다른 곳에서 다 뺄 수 있습니다. 가령 골프장을 만드는데 조경수를 한 그루당 5억원에 사 왔다고 말합니다. 5000만원짜리인지 5억원짜리인지를 누구한테 확인할 겁니까? 또 골프장 관리를 하려고 농약 구입비로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다고 주장하면 그냥 그런 겁니다. 농약이 실제로 들어왔는지, 직원들이 일일이 뿌렸는지 확인할 길이 있습니까.”
이 관계자는 “중견 회사 중에는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골프장을 만든 곳도 있다는 얘기가 나돈다”고 전했다.
‘재료상’의 실체
건설현장 주변에는 소위 말하는 ‘꾼’들이 많이 모인다.
‘재료상’들은 먼저 접근을 해온다. ‘재료상’은 건설회사에서 허위로 발급한 세금계산서를 사들이는 사람들을 부르는 업계 은어다. 주로 재료비 명목으로 허위 계산서를 발행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A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노무비를 부풀리기 어려운 작은 공사 현장들이 있다. 자재비가 5000만원이 들어가야 정상인 곳에 8000만원짜리 세금계산서를 발행한다. ‘재료상’들이 세금계산서를 사들여서 이 중 5%를 떼간다. 나머지 금액은 건설회사의 비자금이다. 건설사는 국세청에 정상적으로 세금을 신고하고, ‘재료상’들이 세금 신고를 누락한다.
A씨의 얘기다.
“건설회사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신고를 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고, ‘재료상’은 매출이 일어났지만 수익이 나지 않았다며 차일피일 세금 납부를 미룹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대표이사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회사 주식이 한 주 없는 ‘바지사장’일 경우는 의무가 없습니다. 실질 주인을 찾아서 책임을 물려야 하는데 절대 나타날 수 없는 구조로 돼 있습니다. 대주주인 것 같은 사람의 뒤에 또 다른 주인이 있고, 그 뒤에 실 주인이 있는 식입니다. 결국 국세청은 법인에 대해서만 행정처분하고 사람에게는 책임을 지우지 못합니다. ‘재료상’들은 5%의 수수료를 받고 이렇게 일을 끌다가 법인을 폐쇄합니다. 일종의 떴다방과 같은 조직이죠.”
―비슷한 수법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폐쇄하다 보면 들통나지 않습니까.
“거의 찾아내기 힘들 겁니다. 실 소유주들은 철저히 뒤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주명부도 허위입니다. 전문꾼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대기업 하청업체의 이야기
사업을 하는 C씨는 대기업 하청업체다. 그는 대기업의 요청으로 한 번에 10개(10억원)까지 ‘녹여준 적’이 있다고 했다.
“가령 수주금액이 10억원인데 11억원이 결제됐다고 칩시다. 1억원은 현금으로 바꿔서 올려보내 달라는 얘기입니다. 차액을 대표이사, 임원들에게 배당형태로 지급한 뒤에 다시 이 돈을 찾아서 대기업에 가져다줬습니다. 회사 간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세는 나중에 환급을 받으면 되고, 법인세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각자 회사 경영진이 선택하기 나름입니다. 대기업에서 일정 수준을 보존해 주기도 하고, 나중에 수의계약 등 큰 공사를 따낼 요량으로 (중소기업이) 떠안기도 합니다.”
―임원들에게 배당한 돈이 비자금이군요.
“중소기업들은 보통 친인척이나 믿는 사람들끼리 사업을 하지 않습니까. 배당으로 주고 매일 조금씩 그 돈을 찾아서 현금화합니다. 일정 금액 이상을 인출하면 금감원에 신고하게 돼 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시차를 두고 매일 찾아서 (우리 회사 임원들이) 다 썼다는데 당국에서 어쩔 겁니까. 이 돈을 대기업에 전달하면 고스란히 비자금이 되는 거죠.”
지난 2005년, 두산그룹이 비자금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다. 계열사였던 두산산업개발이 1997~2005년까지 협력업체에 실제보다 부풀린 공사비를 지급하고 나중에 돌려받는 방법으로 230억원의 비자금을 만들어서다. 두산은 다른 계열사인 동현엔지니어링과 세계물류 등에서 같은 방식으로 총 70억원을 비자금화(化)했다.
건설업이 비자금의 대표 창구라는 것이지 그 외에도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C씨는 “재벌그룹 계열사들끼리 학교, 병원 등 건물을 지을 때 100억원짜리 공사가 200억원으로 둔갑해도 찾을 길이 없다”며 “(그룹 내부에는) 합법적으로 보이는 증빙서류를 만드는 일만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비자금을 조성, 관리해 온 건설회사 임원 A씨도 “제조업은 건설업처럼 ‘화려하게’ 비자금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작게, 지속적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했다. A씨가 말한 방법 중 하나는 자재의 입고 시차를 이용해 비자금을 만드는 방법. 가령 몇 년 전에 들어온 자재와 최근에 들어온 자재의 단가를 조정해서 장부상으로 비자금을 만드는 것이다.
대기업의 하청업체 D 대표이사는 “해외법인은 언제든 비자금 창구로 쓰일 수 있다”고 했다.
“대기업에서 베이징지점, 도쿄지점을 통해서 해외에 물건을 판매한다고 칩시다. 이런 회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컨테이너가 밖으로 나갑니다. 컨테이너 안에 그들이 적시한 물품이 적량 들어 있다고 일일이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해외법인이나 지사에 이전하면서 가격을 조작하면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전직 검찰관계자 H씨의 얘기도 비슷했다.
“무역업의 오버밸류(overvalue)와 언더밸류(undervalue)를 활용해서 비자금을 조성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실제로는 물건이 100억원어치인데 현지의 사정상 150억원에 팔았다고 합니다. 50억원은 고스란히 해외법인에 파킹(parking)됩니다. 반대로 100억원어치를 수입했다고 신고했는데 사실은 80억원밖에 지급하지 않았다고 치면, 차익 20억원을 비자금화할 수 있습니다. 서울 본사와 해외 법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거래는 일일이 확인할 길이 없죠.”
―이런 돈을 국내로 유입하는 과정에서 들통나지 않습니까.
“뭣 하러 한국에 들고 들어옵니까. 그냥 해외법인에 놔 두면 됩니다. 해외법인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조세회피지역은 블랙박스
A씨는 이런 비자금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루트에 대해 설명했다.
“기업 중에서 버뮤다 삼각지 조세회피지역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많이 들통나기도 했습니다만. 본사의 비자금으로 해외에 투자를 한다고 페이퍼컴퍼니에 송금합니다. 조세회피지역은 ‘블랙박스’라고 불립니다. 이곳에 한 번 나갔다 들어온 자금은 추적이 안됩니다. 회사에서 ‘블랙박스에 뺐다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 비자금이 외국인 투자자로 변해서 우리나라 증권 시장으로 들어옵니다. 장내(場內)에서 주식을 사들여서 지분을 높이죠. 결국 비자금이 경영권을 위한 우호지분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검은머리 외국인’이죠. 대기업은 이런 수법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코스피에서 중급 상장사들, 코스닥에서 대표이사가 자주 바뀌는 회사는 의심해 봐야 합니다.”
자금추적이 전문이었던 전직 검찰 관계자 G씨는 애로사항을 털어놨다.
“해외로 빠져나가서 수출대금으로 들어오는 자금을 추적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대부분의 국가와 형사사법공조를 맺었지만 그들에게서 자료를 건네받는데 통상 6개월이 걸립니다. 현지 국가의 협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왜 쉽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불법 반출이지만, 그 국가 입장에서 보면 외환보유고로 잡힙니다. 우리가 범죄수익 환수라고 해서 전부 거둬들일 경우 자국(自國)의 국고만 줄어드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협조가 쉽지 않죠. 결국 관련자가 확실한 진술을 할 경우에 상대국을 세게 압박해 협조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대기업들이 계열사에 물량을 대량으로 밀어주는 행위, 업체에서 리베이트 수수, 분식회계를 통한 장부상 조작은 빈번히 일어나는 비자금 조성 수법이다.
방법은 비슷한 대기업의 비자금 조성
현대상선은 지난 1992년, 미국 회사에 하역비를 지급한 사실이 없음에도 송장을 변조해 이 돈을 인출하고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삼성화재는 지난 1999~ 2002년까지 미지급 보험금을 지점에 내려준 것처럼 회계장부를 조작하고, 실제로는 차명계좌를 통해 1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당국에 적발됐다.
SK그룹은 지난 2003년, 1조4000억원의 분식회계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방식은 이랬다.
계열사인 SK글로벌은 지난 2001년 매출 18조원, 13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의 조사결과, 이 회사는 당기순손실을 줄이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공채권을 회계장부에 포함시키고, 미국, 유럽, 홍콩 등 해외법인에 출자했다가 입은 손실을 줄이기 위해 해외법인의 순자산을 불리고 지분법 평가손실을 사업보고서에서 고의로 누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혀 발생하지 않은 일을 회계장부상에서 끼워 맞춰 눈속임을 하려 했던 것이다.
C&그룹은 지난 10월, 계열사인 C&중공업의 6개 해외법인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차명계좌로 보관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K 대표이사)
비자금 조성은 불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이 검찰에 걸리는 것은 비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가 아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비자금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외부로 새나간다.
전직 검찰관계자 H씨는 “요즘과 같은 내부 폭로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경우는 드물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검찰의 첩보, 씀씀이가 갑자기 커졌다는 제보 등으로 내사에 착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증거가 나오면 곧장 검찰 수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수사관의 직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수십 년 동안 업무를 하다 보면 직감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데, 희한하게도 거의 들어맞습니다. 요즘과 같이 회사의 내부 직원 폭로로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김용철(金勇澈) 사건’으로 알려진 삼성그룹의 비자금 의혹사건은 김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이 “내 계좌에 나도 모르는 50억원어치의 돈과 주식이 있다”고 폭로하면서 실체가 밝혀졌다.
한창 수사가 진행 중인 한화그룹의 비자금 사건은 전직 직원이 “한화그룹이 한화증권을 통해 차명계좌(借名計座)를 운영하고 있다”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케이스다.
내부 직원의 폭로건, 검찰의 첩보건, 수사관의 감이건 상관없이 중요한 사실은 비자금의 ‘관리’가 소홀해서 검찰에 덜미가 잡힌다는 점이다.
이유는 ‘차명계좌’ 때문이다.
모 재벌 3세인 K 대표이사는 “비자금을 국내에서 보관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차명계좌 이외에는 없다”고 말했다.
비자금을 직접 조성했고, 관리했던 A씨 역시 “법인계좌의 거래 내역은 모든 과정을 증빙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법인계좌에 비자금을 넣어 둘 수는 없다”며 “소액을 금고에 넣어 두는 것 이외에는 결국 차명계좌를 이용해 불법 자금을 관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금감원과 국세청은 통상 100억원 이상의 예치 예금에 대해서는 꾸준히 추적하고 관리를 한다. ‘차명계좌’를 여러 개 둘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추적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은행 전표 보관기간 5년이면 권력실세 잡기 어려워”(전직 검찰관계자)
차명계좌는 말 그대로 남의 이름을 빌리거나 도용해서 개설한 불법적 금융거래계좌를 말한다. 비자금이나 불법적 로비활동, 탈세 행위 등을 위해 이용하는 것으로 돼 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지난 1993년 8월에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면서 그 존재가 더욱 부각됐다.
차명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차명인의 신분증, 위임장, 인감증명 등을 제시해야 한다. 계좌개설은 은행이나 증권회사, 보험사 등을 통해서 이뤄진다.
전직 검찰 관계자 G씨는 “은행이 차명계좌 개설에 대해 엄격하다면 이런일이 비일비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G씨의 얘기다.
“차명계좌는 최고 VIP를 위해서 이뤄집니다. 한두 개가 아닌 수백 개씩을 만들 때 은행의 협조가 없다고 보기 어렵죠. 자신과 거래가 큰 회사에서 요청하는데 안 해 줄 수 있습니까. 게다가 신규로 대규모의 현금을 유치할 경우 은행의 실적이 됩니다. 차명계좌 개설은 창구에서 이뤄지지만 사실 알면서 묵인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검찰이 수사를 시작해도 은행의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으면 힘듭니다.”
그는 “은행이 전표를 보관하는 기간을 민사시효인 최소 10년으로 규정해야 한다”며 “현재와 같이 5년 동안 보관한다면 정권 초기에 돈을 받은 고위층을 퇴임 이후에 조사할 근거가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은행의 전표 보관 기간은 1997년 법 개정으로 인해 기존의 10년에서 5년으로 줄어든 상태다.
국내 재벌그룹은 은행을 소유할 수 없다. 이 때문인지 삼성그룹은 삼성증권, 한화그룹은 한화증권을 통해서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
비자금을 차명으로 운영하다 보니 말 못할 사고들이 생긴다.
국내 10위권 건설회사의 회장에게 하루는 편지 한 통이 전달됐다. 발신인은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에 파견된 지점장. 그는 회장에게 “더 이상 저를 찾지 말아 달라”고 했다.
비서실에서 그곳에 가 보니 지점장은 벌써 해외법인에 보관하던 30억원을 들고 잠적한 뒤였다. 당시 상황을 직접 알고 있는 관계자는 “이럴 경우 어쩔 도리가 없다. 회계상으로는 30억원이 증발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게 꾸몄다”고 했다.
K 대표이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자신의 계좌에 회장님 비자금으로 보이는 돈이 있다고 협박하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인사 불이익을 당하거나 정리해고 등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로 그럽니다. 불법으로 조성된 자금이고, 불법으로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 오너 입장에서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간혹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너의 치부를 많이 아는 사람을 쳐내기 힘들다는 얘기들을 하죠. 이런 식의 비밀스런 일이 수차례 형성됐기 때문일 겁니다. 협박을 하는 경우는 그나마 낫습니다. 회사에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은행계좌(그룹에서 차명으로 관리하는)에 가처분 신청을 하는 직원도 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
비자금을 관리하는 사람들
사내(社內)에서 비자금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은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어지간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
비자금을 관리했던 A씨에 따르면 보통 재무팀의 회계부서에서 비자금을 조성하면, 재무부서에서 가공한다고 한다.
A씨의 얘기다.
“회사의 규모에 따라 굴리는 비자금의 액수가 다릅니다. 매출이 1조원이면 비자금 500억원은 기본입니다. 노무비만 솎아도 그 정도는 될 겁니다.”
―매출의 5%를 비자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긴데요.
“5%요? 너무 가볍죠. 그 정도는 최소한 만들 수 있는 ‘껌값’이죠.”
특이한 점은 오너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을 이 자리에 앉히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비자금을 관리한 A씨는 “우연찮게 맡는 경우가 많다”며 “오너와 직접 연관이 있는 사람은 중용하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
전직 검찰 관계자 H씨는 과거의 수사경력을 예로 들며 ‘부인과 관련된 사람들을 주로 썼다’고 했다.
“부인 친인척이라든가 부인 친구의 자식 등 오너 부인과 관련된 사람들이 주로 비자금 관리를 했습니다. 이들의 프로필을 살펴봐도 오너 본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찾을 수 없습니다. 대개 입이 무거운 편이어서 수사 과정에서 정확한 증거자료를 들이대지 않으면 입을 열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회사에서 조성된 비자금은 현금으로 조성되지만, 정작 외부에 건네질 때는 상황이 다르다. ‘비자금 세탁’은 필수다.
스무 단계 거쳐서 최종 목적지 전달되기도
전직 검찰 관계자 H씨는 “비자금이 거액이기 때문에 수표, 현금, CD, 채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인출한다”며 “일부는 현금으로 찾아 다른 계좌로 이동하고, 또 다른 명의로 이동해서 돈이 보태지고 결국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전직 검찰 관계자 G씨는 기자에게 ‘비자금 세탁 경로’를 보여줬다. 경로는 A4 용지 몇 장을 빼곡하게 채울 정도로 정교했다.
방식은 이랬다. 은행 또는 증권의 지점에서 인출된 비자금이 3~4명의 차명계좌로 입금됐고, 이 차명계좌에 있던 기존의 금액과 합쳐서 다시 일부가 다른 차명계좌로 옮겨졌다. 다시 이 중 일부를 인출해 타행에 입금하고, 또 다시 찾는 등 비자금에 비자금을 얹고 빼는 과정이 계속됐다. 최초의 비자금이 최종 목적지까지 도달하는데 보통 스무 단계 이상이 걸렸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의의로 단순한 과정을 거쳐 인출한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전직 검찰 관계자 H씨는 요즘은 미술품 거래, 금괴로 교환 등의 방법으로 자금을 세탁하는 일이 잦다고 말했다. 큰 금액이 오가는 금은보석상이나 고급음식점, 슬롯머신 등에서 타인이 사용한 수표와 맞바꾸는 경우가 있다. 현금 거래가 많은 대학교 앞 클럽도 수표를 현금과 바꾸는 장소가 되곤 한다.
검찰의 비자금 찾기
복수의 전직 검찰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비자금이 완벽하게 들통나지 않을 수는 없어 보인다.
전직 검찰 관계자 G씨는 “비자금이 없는 회사는 없다고 본다. (검찰에서) 털기로 작정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했다.
H씨는 “비자금 세탁 방법이 예전보다 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검찰의 추적법도 다양해졌다”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수사가 흐지부지될 수는 있지만, 회사의 첨단 금융기법 때문에 불법자금 추적을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된다”고 했다.
보통 은행에서 대규모의 현찰을 찾을 경우에는 종이 끈으로 ‘띠지’를 묶어서 준다. H씨에 따르면, 한때 ‘띠지 추적’은 검찰에서 비자금 세탁법을 조사할 때 사용했던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제 이런 방법은 쓰지도 않는다. 회사에서 대규모의 현찰을 찾아오면서 띠지를 버리고 고무줄 밴드로 묶는 일이 당연시됐고, 검찰은 회사의 이런 수법을 알고 있어서다.
G씨의 말이다.
“차명계좌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차명계좌는 주민등록증 사본의 사본을 복사하기 때문에 조사해 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금거래 명의자의 재력에 비춰 많은 돈이 오가는 경우, 막도장을 사용하고 비밀번호에 통일성이 있는 경우는 모두 의심되는 계좌입니다. 또 계좌개설 장소와 실제 주거지 주소가 확연하게 차이가 있는 경우, 자금이 일시적으로 유입되고 유출된 흔적이 잦은 경우는 모두 어김없이 문제의 계좌입니다. 입출금이 잦다 보면 반드시 허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관계자는 “비자금 중에는 악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비자금이 무조건 나쁜 곳에만 사용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보입니다. 실제 조사를 해 보면 뇌물로 지급된 규모가 작을 때도 있어요. 일부에서 검찰이 봐주기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오해할 때 괴로웠습니다.”
비장을 찾아라!
전직 검찰 관계자 H씨는 베테랑 수사관이었다. 회사 압수수색만 수십 차례 했다. 압수수색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비장’을 찾는 것이었다. ‘비장’은 검찰에서 비자금 장부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회사 압수수색을 하면 ‘비장’을 찾는 데 몰두합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비자금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너들에게 ‘비장’을 정기적으로 보고합니다. 보고하고 지우고, 없애는 식입니다. 예전에 A사를 급습했을 때 경리부서를 내사해서 곧장 핵심 관계자를 찾아 앞세웠습니다.”
―뒤따라 들어가면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의 심리가 참 웃깁니다. 책임자를 앞세우면 ‘비장’이 있는 근처를 무의식 중에 쳐다보거나 머뭇거립니다. 눈빛을 유심히 봤다가 그곳을 털면 여지없습니다. 회사의 벽면이나 천장에 유난히 손때가 탄 곳이 있습니다. 미세한 차이지만 수사관의 눈으로 보면 보입니다.”
H씨는 “회장님의 사무실 근처나 재무팀 근처에 있는 경우는 잘 없었다. ‘비장’을 금고 안에 넣어 두는 경우도 전체의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은 재무팀과 멀리 떨어진 창고 등에 있다고 했다.
압수수색을 하다 보면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모 회장의 자택 압수수색을 할 때였단다. ‘비장’을 찾으러 갔는데 정작 그가 발견한 것은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였다.
“회장 집 천장이 유난히 닳아 있었습니다. 위를 툭 쳤는데 머리 위로 반짝반짝한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서 방바닥에 다 떨어졌습니다. 옆에 있던 회장 부인이 ‘내 다이아, 다이아’ 하면서 소리지르고 있더군요.(웃음)”
그런가 하면 비자금을 관리하는 핵심 자금 거래자가 본인의 집 안에 ‘비장’ 사본을 보관하는 경우도 있단다. 회사를 상대로 한,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검찰은 비자금 수사에 착수하면 작은 증거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전직 검찰관계자 G씨의 얘기다.
“압수수색 현장에서 나오는 수첩, 메모 한 장도 세밀히 살핍니다.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밝혀진 경위는 간단했습니다. 시중의 모 은행 비서실에서 호텔, 대형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영수증을 수거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판공비로 쓴 것처럼 비자금을 둔갑시킬 목적이었죠. 그 과정을 따라가다 비자금을 발견했습니다.”
비자금은 어느 국가에나 있다고 봐야
취재 결과에서 만난 복수의 관계자들은 “비자금 자체를 나쁘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비자금 조성이 대부분 불법으로 이뤄짐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직 검찰 관계자 G씨는 “증빙서류를 내기 어렵지만 꼭 사용해야 하는 용처가 있다”고 했다.
대기업 하청업체인 C씨의 얘기는 좀 더 구체적이었다.
“빌딩을 하나 올리는데 현장에서 별의별 일이 있습니다. 시끄러워서 못살겠다는 옆동네 항의도 있고, 양아치들도 수시로 드나들고, 장애인협회에서 기부를 요청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비용이 발생합니다. 정부에서 여기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적법하게 인정하면 비자금을 만드는 규모나 횟수가 훨씬 줄어들 겁니다. 현장에서 생기는 자질구레한 일들, 급히 처리해야 하는 소액 금액들을 지출하게끔 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작다 보니 비자금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건설회사 임원 A씨는 이렇게 말했다.
“건설업을 하다 보면 기술경쟁력은 비슷한데 입찰 경쟁을 붙어야 합니다. 이럴 때는 로비를 해서 수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해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비가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상황인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싱가포르의 공무원들은 접대비가 2만원 이상이면 당국에 신고를 해야 하고 투명하다고 말합니다. 천만에 만만에 콩떡입니다. 싱가포르 고위직에 로비를 할 때는 주변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 있는 차명계좌로 돈을 송금합니다. 공사 수주를 위해 쓰는 로비자금을 비자금 이외의 통장에서 빼낼 수 있습니까? 어느 국가에나 비자금은 있다고 봅니다.”
취재원들은 비자금이 사용되는 최악의 코스로 ‘오너 일가를 위한 경우’를 꼽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비자금은 회사 오너의 개인 쌈짓돈으로 사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난 2005년에 있었던 두산그룹의 비자금 사건은 ‘오너 쌈짓돈’의 전형적 케이스였다.
비자금을 보관하고 나눠 주는 역할은 박용성(朴容晟) 두산중공업 회장의 장남 진원(珍原)씨가 맡았다. 회장 비서실 직원들은 매월 600만~700만원을 정기적으로 진원씨의 삼촌, 고모 계좌로 보냈고, 매달 5월에는 목돈 8000만원을 묶어 운전기사를 통해 건넸다.
오너의 재산증식으로 사용되는 비자금이 가장 문제
현대자동차 그룹은 ‘일감 몰아주기’ 형식으로 비자금을 만들었고, 이 중 일부는 정몽구(鄭夢九) 현대차 회장의 외아들인 의선(義宣)씨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등 현대차 계열회사들은 2001년에 설립된 물류회사인 글로비스에 자신들의 물류 업무 95%를 넘겨줬고, 글로비스는 5년 만에 600% 이상의 매출 신장세를 보였다. 당시 글로비스의 최대주주는 정몽구 회장의 아들 의선씨였다. 순익의 일정 부분은 배당금 형식으로 의선씨에게 지급됐다.
삼성그룹의 비자금 사건은 회사의 최고 수뇌부들이 오너의 재산을 부풀려주기 위해 총출동한 사건이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저가에 발행, 이를 외아들인 재용(在鎔)씨가 사들이는 과정을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재벌 3세 경영인은 이런 얘기를 했다.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은 불법행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처벌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법을 넘어서 회사 경영인으로서 주주(株主)들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표이사들의 배임행위죠. 비자금을 회사 직원을 위해 사용하거나, 사세(社勢)를 확장하고자 사용하는 것은 그나마 봐줄 만합니다. 비자금의 용처가 많은 경우에는 문제를 삼더라도 솔직히 특정인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불법이지만,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불법으로 조성된 비자금이 국가,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인을 위해 사용될 때입니다. 한 사람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수많은 주주를 기만하고, 회사 임직원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된 행위죠. 비자금이 이렇게 사용되는 것만큼은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에 나선 회사 관계자 대다수는 “비자금이 없을 수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전·현직 수사관들은 “솔직히 전부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나는 사람 위에는 또 어떤 사람이 있는 걸까. ⊙
건설업체 현직 임원으로 있는 A씨의 말이다. A씨는 사견(私見)임을 극구 강조했지만, 거듭 “절대로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는 회사는) 한 곳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A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오너의 비자금을 직접 조성하고, 운용했던 인물이다.
대한민국이 비자금에 빠져 있다.
한화증권을 퇴사한 직원은 올해 초 금융감독원에 “회사가 비자금 관리에 쓰는 불법(不法) 계좌를 갖고 있다”고 제보했다.
태광그룹의 이호진(李豪鎭) 회장은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해 정·관계(政官界)에 로비를 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C&그룹이 위장 계열사를 이용해 비자금을 관리한 정황도 검찰 수사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재벌그룹의 비자금 조성과 관리, 정권의 실세에게 전해졌다는 얘기는 이제 뉴스도 아닐 지경에 이르렀다.
비자금은 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방법으로 관리될까. 결국 어떤 용도로 사용될까. 과거에 비자금을 만들었거나 관리한 사람들, 이런 불법자금을 찾아온 검찰 관계자들을 만나 ‘비자금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현금으로만 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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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자금을 조성, 유용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호진 태광산업 회장이 2010년 10월 15일, 네팔 여행을 갔다가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
전직 검찰 관계자는 “비자금은 범죄행위에 제공할 자금, 넓게는 영수증 처리를 할 수 없는 자금 거래에 사용되는 모든 자금이다”라고 정의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다수의 관계자들은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수법으로 이뤄진다”고 증언했다. 초기 비자금이 모두 ‘현금’으로 조성되고, ‘현금’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기묘한 신(新)기법은 있을 수 없다고도 했다.
이들은 비자금의 최초 조성 창구로 건설사를 꼽았다.
H씨의 얘기다. 그는 30년 가까이 검찰에 비자금 수사를 맡았다.
“시작은 건설사입니다. 제조업이나 금융회사 등에서 일부를 만들 수 있지만, 큰 규모는 아닙니다. 제조업은 원가 계산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건설업은 여전히 주먹구구식(式)으로 일이 처리됩니다. 인건비, 자재비 부풀리기는 여전하죠. 검찰에서 수사를 할 때 자재 소요량을 역(逆) 산출해서 비자금 조성을 찾아낸 적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이 힘듭니다. 과거보다 투명해졌다고는 하나, 건설사의 어느 조직에서 정확하게 얼마의 돈을 사용했는지 내역을 알 수가 없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인건비, 자재비 지출 내용 등에 관한 증빙 자료를 완벽하게 조작해서 올려보냅니다. 고전적인 방법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피아노 도장’ 으로 찍어 노무비 부풀리기
건설업체 임원 A씨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본사(本社)에서 지침이 하달된다”고 말했다.
“공사에 착수하기 전에 ‘전도금(前渡金)’이 내려갑니다. 공사를 하다 보면 소액의 자금 지출이 자주 이뤄지는데 이때를 감안해서 경리 직원에게 일정 금액을 미리 지급하고 나중에 정산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 예비비인데 공사 현장에서는 ‘전도금’이라고 부릅니다. 회사에서 전도금을 내려보내면서 ‘이번에는 30개를 녹여 와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녹여 오라는 것이 뭡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비자금으로 둔갑시켜 현찰로 올려보내라는 소립니다. ‘개’는 ‘억’입니다. 30개를 녹이라는 건 30억원에 대한 증빙서류를 만들고, 내려보낸 돈을 현금으로 찾아 도로 가져오라는 겁니다. 요즘은 컨소시엄 형태로 공사를 하지만, 과거에는 단독 수주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 공사비가 전체 수주 금액의 70%밖에 되지 않은 적이 많았습니다.”
―증빙자료 조작은 어떻게 이뤄집니까.
“가장 쉬운 방법은 노무비 부풀리기입니다. 큰 공사 현장에는 일용직 근로자가 한 번에 1000~2000명 정도 투입됩니다. 실제로는 1000명을 투입했는데 2000명을 사용한 것처럼 조작하면, 이들 1000명에 대한 일당은 고스란히 본사의 비자금이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일용직 근로자들은 신용불량자나 주거지가 일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회사에서 임금을 통장에 입금하기보다, 하루 일이 끝나면 일당을 현금으로 줍니다. 아침에 공사현장에 나와서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저녁에 돈을 받아 가죠. 세금을 떼지 않는 근로비입니다. 일당이 4만원인 사람이 한 달을 꽉 채우면 120만원을 받아 가죠. 일하지 않은 1000명에게 임금을 지급했다고 허위 기재를 하면 한 달에 12억원의 비자금을 챙길 수 있습니다. 건설회사의 현장이 한 군데가 아니지 않습니까? 인원 투입이 많은 현장 몇 곳에서만 빼도 100억원은 금방 챙길 수 있죠. 결국 일한 적이 없는 일당 근로자들이 여기저기서 계속 일한 셈이 되는 겁니다.”
“몇 억씩 녹인 현장은 축복받은 거죠”
A씨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고 했다.
“예전에 본사에서 마음먹고 중복된 노무비를 찾았는데 300억원이 넘었습니다(웃음). 같은 날에 여러 현장에서 근무한 것으로 돼 있더라고요.”
―확인할 길이 없습니까.
“없죠. 법인세법상 일용직이 일당을 받아 갈 때 사인을 하지 않고 도장을 찍도록 돼 있습니다. 자기들이 직접 도장을 파서 오지 않잖습니까. 막도장을 한꺼번에 수천 개 파서 임금 지급 대장에 계속 도장을 찍는 겁니다. 현장에서 은어로 ‘피아노 도장’이라고 부릅니다. 도장이 피아노 건반처럼 똑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피아노 도장’으로 노무비를 받아 갔다고 꽝꽝 찍어서 수십억 원의 비자금을 챙기는 겁니다. 세금 한 푼 안 내는 비자금입니다. 회사 측에서 이 장부를 계속 보관해야 하는 의무가 없기 때문에 사실 찾을 길이 없습니다.”
―현장에서 누군가가 폭로할 확률은요.
“아이쿠, 없습니다. 오히려 영광으로 알 겁니다. 사내(社內)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현장 책임자로 내려보냈다는 얘기 아닙니까.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몇 억씩 녹인 현장은 축복받은 거죠. 그동안 장부에 못 올렸던 기록까지 다 올리면 되니까.”
―이 방법이 계속될까요.
“요즘은 더 좋아졌지요. 일당이 8만원으로 올랐거든요. 단순 계산을 해 보세요. 비자금으로 챙길 수 있는 파이가 더 커졌다는 소리 아닙니까.
A씨는 “가공(架空) 원가가 전체의 20%를 넘으면 위험하다”며 “노무자가 적게 투입되는 현장에서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고 유의사항(?)까지 말했다.
비자금의 백미는 토목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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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27일, 서울서부지검 관계자들이 한화그룹 계열사를 압수수색한 후 증거물을 들고 건물을 나서고 있다. |
모 재벌그룹의 K대표이사는 얼마 전에 공사비가 5000억원 가까이 들어가는 건물을 지었다. 그는 “본업(本業)이 건설업이 아니어서, 건물을 증축하기 위해 전직 건설회사 임원을 스카우트했다”고 했다.
K대표의 얘기다.
“스카우트 얘기를 하는데 그 임원이 현장에 대한 전권(全權)을 요구했습니다. 제가 워낙 건설업에 문외한이고 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이번 공사로 얼마를 챙기고 싶으냐’고 하더군요. 그 임원은 ‘필요한 액수가 있으면 지금 말해라. 알아서 올려 보내 주겠다. 나중에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데 그때 필요하다고 하면 현장에서 귀찮아진다’고 했습니다. 건설업이 처음이었는데 그 임원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를 해서 오히려 제가 놀랐습니다.”
노무비 부풀리기는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일 중 하나로 보인다.
가장 큰 금액이 오가는, 소위 건설 비자금의 백미는 ‘토목’이다. 건설은 ‘토목-건축-전기-기계-조경’의 순(順)으로 이뤄진다.
전직 검찰 관계자 H씨의 얘기다.
“토목은 비용이 크고, 그만큼 변동이 많습니다. 그만큼 비자금을 만들 수 있는 구멍이 많이 있다는 소리죠. 건설회사에서 원래 흙 100t을 쓰려던 현장에 1000t을 투입해서 비용이 늘었다고 주장했다 칩시다. 흙 사느라 쓴 비용이며, 노무비가 10배로 늘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건설회사에서 원래 땅을 10m쯤 파려고 했는데, 100m를 파게 되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공사가 다 끝난 땅을 갈아 엎어서 진짜 100m를 팠는지 확인할 겁니까? 진짜 사용한 비용 이외에 90%는 비자금이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토목공사비가 천문학적으로 부풀려지는 겁니다.”
―해당 관할구청에서 검사를 나오지 않습니까.
“검사를 해도 건설 회사에서 미리 지점을 정해 놓습니다. 땅을 얼마나 깊게 팠는지를 알 수 있는 기계가 있지만, 건설사에서 미리 정한 자리는 정상이지요. 예전에 검찰에서 수사를 할 때 인근의 땅을 전부 확인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습니다. 진짜 그만큼을 팠는지 일일이 전부 확인하라고요. 하지만 이런 수사가 일상적인 것은 아니지요.”
토목 관련 영수증으로 방 하나 채워져
또다른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관계자 B씨의 얘기다. 우리나라 도급 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대형회사다.
“공사를 하는 와중에 땅속에 박힌 돌이 안 깨져서 며칠 동안 수백 명의 인원을 투입했다고 우기면 어쩔 겁니까? 일일이 공사에 투입됐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탐문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토목공사가 그런 겁니다. 요즘은 PQ제도(사전적격심사제도)가 있어서, 과거에 경험이 풍부한 한 건설회사가 원(原)청사로 선정됩니다. 그 원청사가 수많은 작은 건설사, 관련업체에 하청을 주는 식입니다. 토목이 공사 규모나 단가가 크고, 가장 많은 사람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조작을 하면 찾을 길이 없습니다.”
B씨는 “토목공사 하나를 하면, 그 관련 영수증으로 방 하나를 채울 수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복잡하고 많은 사람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비자금을 조성해도 찾을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취재에 응한 사람들의 얘기에 따르면 토목 이외에도 모든 과정에서 비자금을 만들 수 있다. 예전보다 투명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허점이 많은 곳이 건설회사이기 때문이다.
B씨의 얘기가 이어졌다.
“토목이 크게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일 뿐이지 다른 곳에서 다 뺄 수 있습니다. 가령 골프장을 만드는데 조경수를 한 그루당 5억원에 사 왔다고 말합니다. 5000만원짜리인지 5억원짜리인지를 누구한테 확인할 겁니까? 또 골프장 관리를 하려고 농약 구입비로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다고 주장하면 그냥 그런 겁니다. 농약이 실제로 들어왔는지, 직원들이 일일이 뿌렸는지 확인할 길이 있습니까.”
이 관계자는 “중견 회사 중에는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골프장을 만든 곳도 있다는 얘기가 나돈다”고 전했다.
‘재료상’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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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24일, 구속영장이 집행된 C&그룹 임병석 회장이 구치소로 가기 위해 대검찰청을 나서고 있다. |
‘재료상’들은 먼저 접근을 해온다. ‘재료상’은 건설회사에서 허위로 발급한 세금계산서를 사들이는 사람들을 부르는 업계 은어다. 주로 재료비 명목으로 허위 계산서를 발행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A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노무비를 부풀리기 어려운 작은 공사 현장들이 있다. 자재비가 5000만원이 들어가야 정상인 곳에 8000만원짜리 세금계산서를 발행한다. ‘재료상’들이 세금계산서를 사들여서 이 중 5%를 떼간다. 나머지 금액은 건설회사의 비자금이다. 건설사는 국세청에 정상적으로 세금을 신고하고, ‘재료상’들이 세금 신고를 누락한다.
A씨의 얘기다.
“건설회사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신고를 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고, ‘재료상’은 매출이 일어났지만 수익이 나지 않았다며 차일피일 세금 납부를 미룹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대표이사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회사 주식이 한 주 없는 ‘바지사장’일 경우는 의무가 없습니다. 실질 주인을 찾아서 책임을 물려야 하는데 절대 나타날 수 없는 구조로 돼 있습니다. 대주주인 것 같은 사람의 뒤에 또 다른 주인이 있고, 그 뒤에 실 주인이 있는 식입니다. 결국 국세청은 법인에 대해서만 행정처분하고 사람에게는 책임을 지우지 못합니다. ‘재료상’들은 5%의 수수료를 받고 이렇게 일을 끌다가 법인을 폐쇄합니다. 일종의 떴다방과 같은 조직이죠.”
―비슷한 수법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폐쇄하다 보면 들통나지 않습니까.
“거의 찾아내기 힘들 겁니다. 실 소유주들은 철저히 뒤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주명부도 허위입니다. 전문꾼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대기업 하청업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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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큰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는 토목공사 현장.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음. |
“가령 수주금액이 10억원인데 11억원이 결제됐다고 칩시다. 1억원은 현금으로 바꿔서 올려보내 달라는 얘기입니다. 차액을 대표이사, 임원들에게 배당형태로 지급한 뒤에 다시 이 돈을 찾아서 대기업에 가져다줬습니다. 회사 간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세는 나중에 환급을 받으면 되고, 법인세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각자 회사 경영진이 선택하기 나름입니다. 대기업에서 일정 수준을 보존해 주기도 하고, 나중에 수의계약 등 큰 공사를 따낼 요량으로 (중소기업이) 떠안기도 합니다.”
―임원들에게 배당한 돈이 비자금이군요.
“중소기업들은 보통 친인척이나 믿는 사람들끼리 사업을 하지 않습니까. 배당으로 주고 매일 조금씩 그 돈을 찾아서 현금화합니다. 일정 금액 이상을 인출하면 금감원에 신고하게 돼 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시차를 두고 매일 찾아서 (우리 회사 임원들이) 다 썼다는데 당국에서 어쩔 겁니까. 이 돈을 대기업에 전달하면 고스란히 비자금이 되는 거죠.”
지난 2005년, 두산그룹이 비자금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다. 계열사였던 두산산업개발이 1997~2005년까지 협력업체에 실제보다 부풀린 공사비를 지급하고 나중에 돌려받는 방법으로 230억원의 비자금을 만들어서다. 두산은 다른 계열사인 동현엔지니어링과 세계물류 등에서 같은 방식으로 총 70억원을 비자금화(化)했다.
건설업이 비자금의 대표 창구라는 것이지 그 외에도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C씨는 “재벌그룹 계열사들끼리 학교, 병원 등 건물을 지을 때 100억원짜리 공사가 200억원으로 둔갑해도 찾을 길이 없다”며 “(그룹 내부에는) 합법적으로 보이는 증빙서류를 만드는 일만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비자금을 조성, 관리해 온 건설회사 임원 A씨도 “제조업은 건설업처럼 ‘화려하게’ 비자금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작게, 지속적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했다. A씨가 말한 방법 중 하나는 자재의 입고 시차를 이용해 비자금을 만드는 방법. 가령 몇 년 전에 들어온 자재와 최근에 들어온 자재의 단가를 조정해서 장부상으로 비자금을 만드는 것이다.
대기업의 하청업체 D 대표이사는 “해외법인은 언제든 비자금 창구로 쓰일 수 있다”고 했다.
“대기업에서 베이징지점, 도쿄지점을 통해서 해외에 물건을 판매한다고 칩시다. 이런 회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컨테이너가 밖으로 나갑니다. 컨테이너 안에 그들이 적시한 물품이 적량 들어 있다고 일일이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해외법인이나 지사에 이전하면서 가격을 조작하면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전직 검찰관계자 H씨의 얘기도 비슷했다.
“무역업의 오버밸류(overvalue)와 언더밸류(undervalue)를 활용해서 비자금을 조성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실제로는 물건이 100억원어치인데 현지의 사정상 150억원에 팔았다고 합니다. 50억원은 고스란히 해외법인에 파킹(parking)됩니다. 반대로 100억원어치를 수입했다고 신고했는데 사실은 80억원밖에 지급하지 않았다고 치면, 차익 20억원을 비자금화할 수 있습니다. 서울 본사와 해외 법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거래는 일일이 확인할 길이 없죠.”
―이런 돈을 국내로 유입하는 과정에서 들통나지 않습니까.
“뭣 하러 한국에 들고 들어옵니까. 그냥 해외법인에 놔 두면 됩니다. 해외법인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조세회피지역은 블랙박스
A씨는 이런 비자금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루트에 대해 설명했다.
“기업 중에서 버뮤다 삼각지 조세회피지역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많이 들통나기도 했습니다만. 본사의 비자금으로 해외에 투자를 한다고 페이퍼컴퍼니에 송금합니다. 조세회피지역은 ‘블랙박스’라고 불립니다. 이곳에 한 번 나갔다 들어온 자금은 추적이 안됩니다. 회사에서 ‘블랙박스에 뺐다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 비자금이 외국인 투자자로 변해서 우리나라 증권 시장으로 들어옵니다. 장내(場內)에서 주식을 사들여서 지분을 높이죠. 결국 비자금이 경영권을 위한 우호지분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검은머리 외국인’이죠. 대기업은 이런 수법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코스피에서 중급 상장사들, 코스닥에서 대표이사가 자주 바뀌는 회사는 의심해 봐야 합니다.”
자금추적이 전문이었던 전직 검찰 관계자 G씨는 애로사항을 털어놨다.
“해외로 빠져나가서 수출대금으로 들어오는 자금을 추적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대부분의 국가와 형사사법공조를 맺었지만 그들에게서 자료를 건네받는데 통상 6개월이 걸립니다. 현지 국가의 협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왜 쉽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불법 반출이지만, 그 국가 입장에서 보면 외환보유고로 잡힙니다. 우리가 범죄수익 환수라고 해서 전부 거둬들일 경우 자국(自國)의 국고만 줄어드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협조가 쉽지 않죠. 결국 관련자가 확실한 진술을 할 경우에 상대국을 세게 압박해 협조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대기업들이 계열사에 물량을 대량으로 밀어주는 행위, 업체에서 리베이트 수수, 분식회계를 통한 장부상 조작은 빈번히 일어나는 비자금 조성 수법이다.
방법은 비슷한 대기업의 비자금 조성
현대상선은 지난 1992년, 미국 회사에 하역비를 지급한 사실이 없음에도 송장을 변조해 이 돈을 인출하고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삼성화재는 지난 1999~ 2002년까지 미지급 보험금을 지점에 내려준 것처럼 회계장부를 조작하고, 실제로는 차명계좌를 통해 1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당국에 적발됐다.
SK그룹은 지난 2003년, 1조4000억원의 분식회계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방식은 이랬다.
계열사인 SK글로벌은 지난 2001년 매출 18조원, 13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의 조사결과, 이 회사는 당기순손실을 줄이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공채권을 회계장부에 포함시키고, 미국, 유럽, 홍콩 등 해외법인에 출자했다가 입은 손실을 줄이기 위해 해외법인의 순자산을 불리고 지분법 평가손실을 사업보고서에서 고의로 누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혀 발생하지 않은 일을 회계장부상에서 끼워 맞춰 눈속임을 하려 했던 것이다.
C&그룹은 지난 10월, 계열사인 C&중공업의 6개 해외법인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차명계좌로 보관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K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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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08년 4월 4일, 삼성특검에 출석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이 검찰에 걸리는 것은 비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가 아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비자금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외부로 새나간다.
전직 검찰관계자 H씨는 “요즘과 같은 내부 폭로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경우는 드물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검찰의 첩보, 씀씀이가 갑자기 커졌다는 제보 등으로 내사에 착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증거가 나오면 곧장 검찰 수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수사관의 직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수십 년 동안 업무를 하다 보면 직감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데, 희한하게도 거의 들어맞습니다. 요즘과 같이 회사의 내부 직원 폭로로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김용철(金勇澈) 사건’으로 알려진 삼성그룹의 비자금 의혹사건은 김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이 “내 계좌에 나도 모르는 50억원어치의 돈과 주식이 있다”고 폭로하면서 실체가 밝혀졌다.
한창 수사가 진행 중인 한화그룹의 비자금 사건은 전직 직원이 “한화그룹이 한화증권을 통해 차명계좌(借名計座)를 운영하고 있다”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케이스다.
내부 직원의 폭로건, 검찰의 첩보건, 수사관의 감이건 상관없이 중요한 사실은 비자금의 ‘관리’가 소홀해서 검찰에 덜미가 잡힌다는 점이다.
이유는 ‘차명계좌’ 때문이다.
모 재벌 3세인 K 대표이사는 “비자금을 국내에서 보관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차명계좌 이외에는 없다”고 말했다.
비자금을 직접 조성했고, 관리했던 A씨 역시 “법인계좌의 거래 내역은 모든 과정을 증빙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법인계좌에 비자금을 넣어 둘 수는 없다”며 “소액을 금고에 넣어 두는 것 이외에는 결국 차명계좌를 이용해 불법 자금을 관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금감원과 국세청은 통상 100억원 이상의 예치 예금에 대해서는 꾸준히 추적하고 관리를 한다. ‘차명계좌’를 여러 개 둘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추적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은행 전표 보관기간 5년이면 권력실세 잡기 어려워”(전직 검찰관계자)
차명계좌는 말 그대로 남의 이름을 빌리거나 도용해서 개설한 불법적 금융거래계좌를 말한다. 비자금이나 불법적 로비활동, 탈세 행위 등을 위해 이용하는 것으로 돼 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지난 1993년 8월에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면서 그 존재가 더욱 부각됐다.
차명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차명인의 신분증, 위임장, 인감증명 등을 제시해야 한다. 계좌개설은 은행이나 증권회사, 보험사 등을 통해서 이뤄진다.
전직 검찰 관계자 G씨는 “은행이 차명계좌 개설에 대해 엄격하다면 이런일이 비일비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G씨의 얘기다.
“차명계좌는 최고 VIP를 위해서 이뤄집니다. 한두 개가 아닌 수백 개씩을 만들 때 은행의 협조가 없다고 보기 어렵죠. 자신과 거래가 큰 회사에서 요청하는데 안 해 줄 수 있습니까. 게다가 신규로 대규모의 현금을 유치할 경우 은행의 실적이 됩니다. 차명계좌 개설은 창구에서 이뤄지지만 사실 알면서 묵인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검찰이 수사를 시작해도 은행의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으면 힘듭니다.”
그는 “은행이 전표를 보관하는 기간을 민사시효인 최소 10년으로 규정해야 한다”며 “현재와 같이 5년 동안 보관한다면 정권 초기에 돈을 받은 고위층을 퇴임 이후에 조사할 근거가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은행의 전표 보관 기간은 1997년 법 개정으로 인해 기존의 10년에서 5년으로 줄어든 상태다.
국내 재벌그룹은 은행을 소유할 수 없다. 이 때문인지 삼성그룹은 삼성증권, 한화그룹은 한화증권을 통해서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
비자금을 차명으로 운영하다 보니 말 못할 사고들이 생긴다.
국내 10위권 건설회사의 회장에게 하루는 편지 한 통이 전달됐다. 발신인은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에 파견된 지점장. 그는 회장에게 “더 이상 저를 찾지 말아 달라”고 했다.
비서실에서 그곳에 가 보니 지점장은 벌써 해외법인에 보관하던 30억원을 들고 잠적한 뒤였다. 당시 상황을 직접 알고 있는 관계자는 “이럴 경우 어쩔 도리가 없다. 회계상으로는 30억원이 증발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게 꾸몄다”고 했다.
K 대표이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자신의 계좌에 회장님 비자금으로 보이는 돈이 있다고 협박하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인사 불이익을 당하거나 정리해고 등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로 그럽니다. 불법으로 조성된 자금이고, 불법으로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 오너 입장에서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간혹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너의 치부를 많이 아는 사람을 쳐내기 힘들다는 얘기들을 하죠. 이런 식의 비밀스런 일이 수차례 형성됐기 때문일 겁니다. 협박을 하는 경우는 그나마 낫습니다. 회사에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은행계좌(그룹에서 차명으로 관리하는)에 가처분 신청을 하는 직원도 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
비자금을 관리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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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삿돈을 빼내 366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 가운데 326억원을 개인적으로 쓴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에 대한 공판이 지난 2005년 11월 30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
비자금을 관리했던 A씨에 따르면 보통 재무팀의 회계부서에서 비자금을 조성하면, 재무부서에서 가공한다고 한다.
A씨의 얘기다.
“회사의 규모에 따라 굴리는 비자금의 액수가 다릅니다. 매출이 1조원이면 비자금 500억원은 기본입니다. 노무비만 솎아도 그 정도는 될 겁니다.”
―매출의 5%를 비자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긴데요.
“5%요? 너무 가볍죠. 그 정도는 최소한 만들 수 있는 ‘껌값’이죠.”
특이한 점은 오너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을 이 자리에 앉히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비자금을 관리한 A씨는 “우연찮게 맡는 경우가 많다”며 “오너와 직접 연관이 있는 사람은 중용하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
전직 검찰 관계자 H씨는 과거의 수사경력을 예로 들며 ‘부인과 관련된 사람들을 주로 썼다’고 했다.
“부인 친인척이라든가 부인 친구의 자식 등 오너 부인과 관련된 사람들이 주로 비자금 관리를 했습니다. 이들의 프로필을 살펴봐도 오너 본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찾을 수 없습니다. 대개 입이 무거운 편이어서 수사 과정에서 정확한 증거자료를 들이대지 않으면 입을 열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회사에서 조성된 비자금은 현금으로 조성되지만, 정작 외부에 건네질 때는 상황이 다르다. ‘비자금 세탁’은 필수다.
스무 단계 거쳐서 최종 목적지 전달되기도
전직 검찰 관계자 H씨는 “비자금이 거액이기 때문에 수표, 현금, CD, 채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인출한다”며 “일부는 현금으로 찾아 다른 계좌로 이동하고, 또 다른 명의로 이동해서 돈이 보태지고 결국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전직 검찰 관계자 G씨는 기자에게 ‘비자금 세탁 경로’를 보여줬다. 경로는 A4 용지 몇 장을 빼곡하게 채울 정도로 정교했다.
방식은 이랬다. 은행 또는 증권의 지점에서 인출된 비자금이 3~4명의 차명계좌로 입금됐고, 이 차명계좌에 있던 기존의 금액과 합쳐서 다시 일부가 다른 차명계좌로 옮겨졌다. 다시 이 중 일부를 인출해 타행에 입금하고, 또 다시 찾는 등 비자금에 비자금을 얹고 빼는 과정이 계속됐다. 최초의 비자금이 최종 목적지까지 도달하는데 보통 스무 단계 이상이 걸렸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의의로 단순한 과정을 거쳐 인출한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전직 검찰 관계자 H씨는 요즘은 미술품 거래, 금괴로 교환 등의 방법으로 자금을 세탁하는 일이 잦다고 말했다. 큰 금액이 오가는 금은보석상이나 고급음식점, 슬롯머신 등에서 타인이 사용한 수표와 맞바꾸는 경우가 있다. 현금 거래가 많은 대학교 앞 클럽도 수표를 현금과 바꾸는 장소가 되곤 한다.
검찰의 비자금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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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차그룹 비자금 조성 및 경영권 편법승계 등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정몽구 회장이 지난 2006년 4월 24일, 대검찰청으로 출두하고 있다. |
복수의 전직 검찰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비자금이 완벽하게 들통나지 않을 수는 없어 보인다.
전직 검찰 관계자 G씨는 “비자금이 없는 회사는 없다고 본다. (검찰에서) 털기로 작정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했다.
H씨는 “비자금 세탁 방법이 예전보다 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검찰의 추적법도 다양해졌다”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수사가 흐지부지될 수는 있지만, 회사의 첨단 금융기법 때문에 불법자금 추적을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된다”고 했다.
보통 은행에서 대규모의 현찰을 찾을 경우에는 종이 끈으로 ‘띠지’를 묶어서 준다. H씨에 따르면, 한때 ‘띠지 추적’은 검찰에서 비자금 세탁법을 조사할 때 사용했던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제 이런 방법은 쓰지도 않는다. 회사에서 대규모의 현찰을 찾아오면서 띠지를 버리고 고무줄 밴드로 묶는 일이 당연시됐고, 검찰은 회사의 이런 수법을 알고 있어서다.
G씨의 말이다.
“차명계좌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차명계좌는 주민등록증 사본의 사본을 복사하기 때문에 조사해 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금거래 명의자의 재력에 비춰 많은 돈이 오가는 경우, 막도장을 사용하고 비밀번호에 통일성이 있는 경우는 모두 의심되는 계좌입니다. 또 계좌개설 장소와 실제 주거지 주소가 확연하게 차이가 있는 경우, 자금이 일시적으로 유입되고 유출된 흔적이 잦은 경우는 모두 어김없이 문제의 계좌입니다. 입출금이 잦다 보면 반드시 허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관계자는 “비자금 중에는 악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비자금이 무조건 나쁜 곳에만 사용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보입니다. 실제 조사를 해 보면 뇌물로 지급된 규모가 작을 때도 있어요. 일부에서 검찰이 봐주기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오해할 때 괴로웠습니다.”
비장을 찾아라!
전직 검찰 관계자 H씨는 베테랑 수사관이었다. 회사 압수수색만 수십 차례 했다. 압수수색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비장’을 찾는 것이었다. ‘비장’은 검찰에서 비자금 장부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회사 압수수색을 하면 ‘비장’을 찾는 데 몰두합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비자금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너들에게 ‘비장’을 정기적으로 보고합니다. 보고하고 지우고, 없애는 식입니다. 예전에 A사를 급습했을 때 경리부서를 내사해서 곧장 핵심 관계자를 찾아 앞세웠습니다.”
―뒤따라 들어가면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의 심리가 참 웃깁니다. 책임자를 앞세우면 ‘비장’이 있는 근처를 무의식 중에 쳐다보거나 머뭇거립니다. 눈빛을 유심히 봤다가 그곳을 털면 여지없습니다. 회사의 벽면이나 천장에 유난히 손때가 탄 곳이 있습니다. 미세한 차이지만 수사관의 눈으로 보면 보입니다.”
H씨는 “회장님의 사무실 근처나 재무팀 근처에 있는 경우는 잘 없었다. ‘비장’을 금고 안에 넣어 두는 경우도 전체의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은 재무팀과 멀리 떨어진 창고 등에 있다고 했다.
압수수색을 하다 보면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모 회장의 자택 압수수색을 할 때였단다. ‘비장’을 찾으러 갔는데 정작 그가 발견한 것은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였다.
“회장 집 천장이 유난히 닳아 있었습니다. 위를 툭 쳤는데 머리 위로 반짝반짝한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서 방바닥에 다 떨어졌습니다. 옆에 있던 회장 부인이 ‘내 다이아, 다이아’ 하면서 소리지르고 있더군요.(웃음)”
그런가 하면 비자금을 관리하는 핵심 자금 거래자가 본인의 집 안에 ‘비장’ 사본을 보관하는 경우도 있단다. 회사를 상대로 한,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검찰은 비자금 수사에 착수하면 작은 증거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전직 검찰관계자 G씨의 얘기다.
“압수수색 현장에서 나오는 수첩, 메모 한 장도 세밀히 살핍니다.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밝혀진 경위는 간단했습니다. 시중의 모 은행 비서실에서 호텔, 대형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영수증을 수거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판공비로 쓴 것처럼 비자금을 둔갑시킬 목적이었죠. 그 과정을 따라가다 비자금을 발견했습니다.”
비자금은 어느 국가에나 있다고 봐야
취재 결과에서 만난 복수의 관계자들은 “비자금 자체를 나쁘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비자금 조성이 대부분 불법으로 이뤄짐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직 검찰 관계자 G씨는 “증빙서류를 내기 어렵지만 꼭 사용해야 하는 용처가 있다”고 했다.
대기업 하청업체인 C씨의 얘기는 좀 더 구체적이었다.
“빌딩을 하나 올리는데 현장에서 별의별 일이 있습니다. 시끄러워서 못살겠다는 옆동네 항의도 있고, 양아치들도 수시로 드나들고, 장애인협회에서 기부를 요청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비용이 발생합니다. 정부에서 여기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적법하게 인정하면 비자금을 만드는 규모나 횟수가 훨씬 줄어들 겁니다. 현장에서 생기는 자질구레한 일들, 급히 처리해야 하는 소액 금액들을 지출하게끔 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작다 보니 비자금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건설회사 임원 A씨는 이렇게 말했다.
“건설업을 하다 보면 기술경쟁력은 비슷한데 입찰 경쟁을 붙어야 합니다. 이럴 때는 로비를 해서 수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해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비가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상황인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싱가포르의 공무원들은 접대비가 2만원 이상이면 당국에 신고를 해야 하고 투명하다고 말합니다. 천만에 만만에 콩떡입니다. 싱가포르 고위직에 로비를 할 때는 주변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 있는 차명계좌로 돈을 송금합니다. 공사 수주를 위해 쓰는 로비자금을 비자금 이외의 통장에서 빼낼 수 있습니까? 어느 국가에나 비자금은 있다고 봅니다.”
취재원들은 비자금이 사용되는 최악의 코스로 ‘오너 일가를 위한 경우’를 꼽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비자금은 회사 오너의 개인 쌈짓돈으로 사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난 2005년에 있었던 두산그룹의 비자금 사건은 ‘오너 쌈짓돈’의 전형적 케이스였다.
비자금을 보관하고 나눠 주는 역할은 박용성(朴容晟) 두산중공업 회장의 장남 진원(珍原)씨가 맡았다. 회장 비서실 직원들은 매월 600만~700만원을 정기적으로 진원씨의 삼촌, 고모 계좌로 보냈고, 매달 5월에는 목돈 8000만원을 묶어 운전기사를 통해 건넸다.
오너의 재산증식으로 사용되는 비자금이 가장 문제
현대자동차 그룹은 ‘일감 몰아주기’ 형식으로 비자금을 만들었고, 이 중 일부는 정몽구(鄭夢九) 현대차 회장의 외아들인 의선(義宣)씨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등 현대차 계열회사들은 2001년에 설립된 물류회사인 글로비스에 자신들의 물류 업무 95%를 넘겨줬고, 글로비스는 5년 만에 600% 이상의 매출 신장세를 보였다. 당시 글로비스의 최대주주는 정몽구 회장의 아들 의선씨였다. 순익의 일정 부분은 배당금 형식으로 의선씨에게 지급됐다.
삼성그룹의 비자금 사건은 회사의 최고 수뇌부들이 오너의 재산을 부풀려주기 위해 총출동한 사건이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저가에 발행, 이를 외아들인 재용(在鎔)씨가 사들이는 과정을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재벌 3세 경영인은 이런 얘기를 했다.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은 불법행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처벌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법을 넘어서 회사 경영인으로서 주주(株主)들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표이사들의 배임행위죠. 비자금을 회사 직원을 위해 사용하거나, 사세(社勢)를 확장하고자 사용하는 것은 그나마 봐줄 만합니다. 비자금의 용처가 많은 경우에는 문제를 삼더라도 솔직히 특정인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불법이지만,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불법으로 조성된 비자금이 국가,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인을 위해 사용될 때입니다. 한 사람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수많은 주주를 기만하고, 회사 임직원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된 행위죠. 비자금이 이렇게 사용되는 것만큼은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에 나선 회사 관계자 대다수는 “비자금이 없을 수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전·현직 수사관들은 “솔직히 전부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나는 사람 위에는 또 어떤 사람이 있는 걸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