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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孔魯明 전 외교부장관의 대한민국 외교 50년 (上)

베트남 억류 외교관 석방 위해 북한과 ‘간첩과의 맞교환’ 협상

정리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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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민항기 불시착 교섭대표단에 쉬광젠 외교부 부국장도 끼여… 중국의 발빠른 대응 의혹
    이제야 풀려
⊙ 중공 민항기 사흘 밤 새우며 처리하니 훈장 대신 계고장… 한·중수교의 터 닦아 보람
⊙ 베트남 억류 외교관 석방 대표로… 北, 1 대 70 교환 주장하며 남한 간첩 ‘재고조사’

孔魯明
⊙ 82세. 서울대 법학과 졸업. 英 런던대 정경대 연수.
⊙ 외무부 아주국장, 정무차관보, 주브라질 대사, 뉴욕 총영사, 주러시아 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남북고위급회담 대변인, 주일본 대사, 외무부 장관(제25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
    세종재단 이사장 역임.
⊙ 現 동서대 석좌교수, 동아시아재단 이사장.
  1983년 5월 5일 오후 2시30분, 그날은 시각까지도 또렷이 기억난다. 어린이날이자 일요일 오후의 평화로운 정적을 깨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확인 비행체의 출현에 따라 발령한 공습 경계경보로 수도권 지역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중공(中共) 국적의 항공기 한 대가 휴전선을 넘어 대한민국 영공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이 항공기는 우리 공군 F-5 전투기가 출격하자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귀순(歸順)’ 의사를 밝혔고, 강원도 춘천의 헬기 비행장인 캠프 페이지(CAMP PAGE)에 불시착하면서 공습경보는 7분 만에 해제됐다. 승객 96명과 승무원 9명 등 105명을 태우고 중국 선양(瀋陽)에서 상하이(上海)로 향하던 이 항공기는 줘장런(卓長仁) 등 6명의 납치범에 의해 다롄(大連) 상공에서 공중 납치됐다. 영국 트라이던트 2E(Trident 2E) 기종인 이 민항기는 춘천 미군 비행장 활주로를 50여m나 지나 멈춰 섰다. 육중한 두 바퀴는 땅속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동서 냉전의 한복판에서, 그것도 6·25전쟁 당시 우리와 총부리를 겨눈 중공 국적 항공기가 대한민국 땅에 내렸다는 사실은 외교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여객기 납치 사건도 주목받을 일이었지만, 중국이 미수교국인 한국을 상대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도 전 세계인들의 관심사였다.
 
  휴일이라 정경일(鄭慶逸) 외무부 구주과장과 골프를 치고 일찍 귀가했던 나는 오후 4시쯤 무심코 태평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지금 비상이 걸렸다”며 “청와대 회의가 있으니 빨리 올라가시라”고 했다.
 
  중공 민항기 불시착 소식에 청와대는 긴장된 분위기였다. 함병춘(咸秉春) 대통령 비서실장은 오후 5시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실무자들은 물론이고 장차관들마저도 엄청난 사태 앞에 모두들 난감한 표정이었다. 회의도중 장세동(張世東) 경호실장이 방금 수신한 티까(외신 전문)를 들고 황급히 회의실로 들어왔다. 중국민항국장 명의로 ‘교섭 대표단을 태운 특별기를 보낼 테니 착륙 허가를 내달라’는 전문이었다.
 
 
  中 대표단 신원파악 위해 휴지통까지 뒤져
 
1983년 5월 5일 오후 2시30분쯤 105명이 탑승한 중국민항 소속 여객기가 상하이로 향하던 중 공중 납치돼 춘천의 미군 헬기비행장 캠프 페이지에 불시착했다.
  중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전문을 보낸 것은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전문에서 처음으로 ‘Republic of Korea(대한민국)’라는 정식 국호를 표기한 점이다.
 
  중국 대표단의 입국 문제와 양국의 협의과정, 방법 등에 관한 전문 교섭이 급진전해 이틀 후인 5월 7일, 베이징을 출발한 중국 비행기는 교섭대표단 33명을 싣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선투(沈圖) 총국장의 요청에 따라 서울 국군병원으로 가 납치범 총격으로 부상당한 2명의 승무원을 위문했다.
 
  우리 정부는 중국 측에 대해 교섭대표로 정부 인사를 꼭 포함시켜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그들은 33명의 대표 성명만을 알려주었다. 다만 대표단 가운데 단장인 선투 총국장의 신분만 밝혔을 뿐이다. 그러나 대표단원들의 신분은 표면적으로 ‘민항국 직원’으로 돼 있었으나, 실제로는 중국 외교부와 정부기관의 부국장급 인사가 대거 포함돼 있었다.
 
  워커힐호텔에서 선투 총국장과 얼굴을 대하고 있을 때, 외무부 조약국 직원들이 내게 ‘대표 중에 중국 외교부 조약국 직원이 있다’는 메모를 무릎 밑으로 건넸다. 우리 정보 당국은 신원파악을 위해 그들의 휴지통까지 뒤졌고, 그들 대부분이 민간인이 아니라 중국 정부 관리들일 것으로 판단했다.
 
  중국 대표단은 도착 첫날부터 우리 정부와 협상을 서둘러 사흘 만인 5월 10일 새벽에 극적으로 기체와 승객의 인도 조건에 합의했다. 양국은 6명의 납치범 처리에 집중했다. 이들 납치범은 중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뒤 해외 도피를 위해 항공기를 납치했던 것이다. 중국 측은 이들이 일반 범죄자이니 승객과 여객기 기체는 물론 납치범까지 모두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우리 정부는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국제관례”라며 거부했다.
 
  3일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납치범들의 즉각 망명을 허용하지 않고 우리 국내법을 적용해 처벌하는 쪽으로 타결됐다. 납치범들은 우리 법정에서 재판을 거쳐 징역형을 확정했지만, 1년 후 형집행정지로 석방해 추방 형식으로 대만으로 보냈다.
 
  중국과 수교까지 한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당시 협상 과정에서는 사건의 본질보다 외교 문제가 골치를 아프게 했다. 합의문서에 국호(國號)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느냐의 여부였다. 우리 정부는 사건의 마무리를 두 나라 정부 차원에서 매듭지으려 한 데 반해, 중국 측은 북한을 의식해 그들의 민항총국과 우리 정부와의 합의를 고집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면 국가 승인을 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했다.
 
  실제로 외교관계가 없는 양국이 상호 정부를 어떻게 호칭하느냐에 따라 당사국의 외교적 속내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호의 공식 사용 여부를 놓고 양국의 속내는 확연히 달랐다. 중국은 국호 공식 사용을 내켜하지 않았다. 우리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민항기 사건을 계기로 ‘북방외교’의 돌파구를 마련해 보려는 전략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정부의 이러한 의도는 사건 한 달여 뒤인 6월 29일 이범석(李範錫) 당시 외무부장관이 국방대학원 특강에서 “우리 외교의 과제는 소련, 중공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북방정책에 있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확인된다.
 
  우리 측 교섭 대표단은 “남의 안방에 들어와서 안방 주인에게 인사도 안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논리를 내세우며 합의문서에 양국의 공식 명칭을 집어넣도록 압박했고, 마침내 중국의 양보를 이끌어 냈다.
 
  결국 합의각서의 서명자를 두 나라 정부의 공식 대표로서 ‘대한민국 외무부 제1차관보 공로명’과 ‘중화인민공화국 중국민항총국 국장 선투’로 하기로 합의했다. 정부 간 정식 외교교섭 형식을 통한 사건 타결을 고집하던 우리 정부와 중국 측이 한 발씩 양보하는 선에서 타협을 본 것이다. 중국과 전쟁을 벌인 지 30년여 만에 양국의 공식 국호를 사용한 외교교섭이 처음으로 성사된 것이다.
 
 
  당시 신화사 기자, “민항국 관리신분으로 취재”
 
중공의 피랍기 승객송환을 위한 한·중공 대표 간의 회담을 마친 양측 대표가 1983년 5월 10일 이륙직전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이 한국 공로명 대표, 왼쪽이 중공의 선투 총국장.
  사건 발생 5일 만인 5월 10일, 피랍 승객과 승무원 그리고 교섭 대표단을 싣고 피랍기가 떠남으로써 사건은 막을 내렸다. 중국은 군사정전위원회 공산군 측 중국 대표단을 통해 춘천비행장의 활주거리를 파악해 베이징에서 이착륙 훈련을 한 후 피랍 항공기를 몰고 갔다고 한다. 결국 중국 여객기 피랍 사건은 북방외교의 출발점이자 9년 뒤인 1992년 이뤄진 한·중 수교의 주춧돌이 됐다.
 
  중국인 승객과 교섭대표단이 한국에 체류한 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우리 정부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대한민국을 홍보하고 선전했다. 당시 민항기는 춘천 미군기지 비행장이 헬기 전용이라 활주로가 짧은 탓에 이를 지나쳐 불시착했다. 정부는 이를 십분 활용했다.
 
  중국 측은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정부는 비행기 수리를 명목으로 시간을 계속 끌면서 스킨십을 통해 ‘한국 홍보’에 나섰다. 워커힐호텔에 숙소를 마련하고 삼성전자 등 첨단 기업체와 자연농원 등을 둘러보게 했고, 총격으로 부상당한 승무원에게 컬러 텔레비전, 승객들에게는 라디오와 내복 같은 선물을 안겨 주며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려 애썼다.
 
  당시 대표단 일원으로 다녀간 신화사통신 첸원룽(錢文榮) 전 뉴욕지국장은 수교 직후 중국 신문에 기고한 ‘9년 전의 한국기행’이란 글에서 “이튿날(5월 6일) 새벽3시 신화사 본부의 국제부에서 당직을 하다 ‘센투 민항국장이 남조선에 가 사건을 처리하는 데 동행해 취재 및 국내연락 임무를 맡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상대방(한국) 규정에 따라 실무진으로 기자가 갈 수 없어서 민항국 관리의 신분으로 와 민항총국의 업무보고 전보 격식으로 기사를 송고했다”고 회고했다.
 
  첸원룽 기자는 “전세기 도착 후 남조선 당국은 외무부 차관, 우리나라 공자의 후손인 공로명, 그리고 아주사(亞州司) 사장(아주국장) 김병영, 민항국장 김철영 등 고급관리들이 공항에서 영접했고, 붉은색 카페트를 귀빈실까지 깔아 국빈을 접대하는 것 같았다”면서 “공로명 선생은 서울 최고급 식당에서 만찬을 베풀었고, 유창한 베이징어를 구사하는 중국에서 출생한 사람과 혼혈아동 등으로 하여금 우리를 접대케 했다”고 했다.
 
  첸 기자는 “환담 중 그들은 외교부 조법사(條法司)의 쉬광젠(許光建)과 나를 주목했다”면서 “허 선생의 옆에 앉은 국제회의 참가 경험이 많은 한국 외무부의 국제사(國際司) 관리는 계속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를 물었고, 실제로 상대방은 이미 일본・미국의 주중대사관을 통해 우리 두 사람의 신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했다.
 
  합의각서 작성에 대해 첸 기자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우리 측은 비망록 작성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상대방의 인도증서와 우리 측의 영수증을 교환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을 예정이었으나, 상대방은 쌍방이 서명한 문서작정을 고집했다”면서 “상대방은 비망록(합의각서) 초안에 모두 9곳에 ‘대한민국’ 칭호와 ‘중화인민공화국’ 국호를 적어 넣었고, 그 의도는 정식 문서상에 대한민국을 승인하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민항기에 中 미사일 전문가 탑승 밝혀져
 
자전에세이 《지리산골에서, 세계의 바다에서》를 통해 중국민항기 납치사건 당시 중국 민항기에 중국 최고의 군사기밀을 갖고 있는 미사일 전문가가 탑승하고 있었다고 밝힌 고 박춘호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
  그는 “쌍방은 이틀간 결론을 보지 못했고 나중에 공로명 선생이 ‘중국 대표단은 우리 정부의 동의를 거쳐 서울에 왔는데, 중국 대표단이 주인의 국호를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손님이 주인집에 와서 주인의 뺨을 때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우리 측은 적당한 타협점을 찾게 됐다”면서 “문서상에 ‘대한민국’의 국호를 한 번만 사용하고 기타 8곳은 ‘서울’ 또는 ‘남조선’ 당국으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고 적었다.
 
  한편, 그동안 북한의 견제로 중국이 한국산 면직물에 ‘원산지 증명’을 요구하는 바람에 대구의 섬유산업이 큰 타격을 받았었다. 민항기 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한국에 대해 원산지 증명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한·중 간의 무역은 급격하게 활발해졌다. 이듬해인 1984년부터 면직물을 비롯해 대(對)중국 수출이 급증한 것이다.
 
  사건 대응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무언가에 쫓기듯 발빠른 대응을 보여준 배경을 놓고 보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1961년 민항국 소속의 조종사 2명이 귀순한 이래 항공기나 선박 납치 사건이 5차례나 있었지만, 중국은 단 한 번도 문제 해결을 서두르거나 교섭대표를 파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1982년 10월 미그 19 전투기 조종사 우룽건(吳榮根)의 귀순 때나 민항기 납치사건 3개월 후인 미그 21 전투기 조종사 쑨톈친(孫天勤)이 자유중국(대만)으로 망명을 희망하고 귀순했을 때도 기체와 조종사의 송환을 요구하긴 했으나, 적극적인 대응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탑승객 가운데 해답이 있었다. 당시 납치됐던 여객기에는 중국의 최고 군사기밀을 쥐고 있는 미사일 전문가가 탑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로서는 이처럼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납치되자 미수교국인 한국에 대규모 교섭대표단까지 급파해 가며 그의 ‘무사귀환’을 위해 백방으로 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제의 승객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고, 그가 서류 등 기밀문건을 지니고 있었으리란 짐작도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박춘호(朴椿浩) 전 고려대 교수(2008년 작고)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그는 회고록 《지리산골에서, 세계의 바다에서》에서 ‘내가 중국 측과 회담할 당시 중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했던 쉬광젠 현 중국인민대학교 공공관리학원 부원장이 중국 외교부의 고위관리라는 것을 확인해 준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첸쉐썬 박사보다 훨씬 중요인물 탑승”
 
1983년 중국민항기 납치사건 때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던 쉬광젠 중국인민대학교 공공관리학원 부원장. 당시 중국 외교부 부국장급이었다.
  박 교수는 당시 《조선일보》 김대중(金大中) 정치부장으로부터 중국 대표단의 사진을 보고 일행 중에 중국 외교부 관리가 있는지를 밝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박 교수는 사진 속에서 쉬광젠 씨를 바로 알아봤다.
 
  그는 중국 외교부의 국제법조약 및 국제기구사(國際機構司, 司는 우리의 局에 해당)의 부과장 신분이었던 것이다. 이튿날 《조선일보》에는 중국 외교부의 국제법조약 및 국제기구사의 주요 간부 이름과 함께 쉬 씨의 신원을 정확히 밝힌 기사가 사진과 함께 1면에 실렸다.
 
  중국 정부는 과거 쉬광젠이 유엔 해양법 관련 회의에 참석해 그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것이란 우려에도 불구, 외교 관례에 정통하고 유엔 등 국제기구와 잘 통하는 그를 적임으로 보냈던 것이다. 참고로, 박 교수는 민항기 사건 이후 베이징에서 쉬광젠과 서너 차례 만나 식사를 했으나, 고위 관료 신분임을 감안해 민항기 사건 때 방한한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쉬광젠은 외교부 조약국제기구 사장, 즉 국장까지 승진하고 1990년 초 퇴임했다.
 
  중국 민항기 사건이 있은 지 몇 달 지나 박춘호 교수는 뉴욕에서 열린 해양법 관계 유엔회의에 참석해 유엔본부 법제국 소속 리스광(李世光) 박사를 만났다. 박 교수와는 평소 연구자료를 교환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중국인 해양법 학자였다.
 
  리 박사는 유엔본부의 한 중식당에 박 교수를 초대해 “귀국하더니 활약이 대단하다”고 말문을 연 뒤, 《조선일보》에 난 쉬광젠 씨의 신분이 중국 외교부의 기구와 주요인물의 이름까지 곁들여 정확히 보도된 건 틀림없이 박춘호 교수가 취재원(取材源)일 것이라고 자신의 동료 사이에 화제가 됐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마오쩌둥과 대화하고 있는 중국 미사일의 아버지 고 첸쉐썬(錢學森) 박사(오른쪽).
  박 교수가 “우리 속담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몰래 남의 집 울타리 구멍으로 드나드는 건 도둑과 개밖에 없다”면서 “도대체 납치 승객 가운데 어떤 거물이 타고 있길래 이름만 밝힌 정체불명의 대표단이 33명이나 오고, 그중에 외교부 관리가 신분을 감춘 채 외교 관계도 없는 남한에 급파됐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박 교수는 또 “중국에서 먼거리를 항공기로 다닐 만한 사람은 당이나 정부의 고위관리일 가능성이 높고, 선투 단장이 승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눌 때 외견상으로도 거물답게 보이는 인물과는 아주 정중한 자세로 인사를 하더라”며 거물 인사가 누구냐고 채근했다. 이에 대해 리 박사는 처음에 “거물은 무슨 거물”이라고 시치미를 떼다, 가까스로 입을 열어 최고의 국방 기밀을 쥐고 있는 ‘유도탄 학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 교수가 “그렇다면 미국에서 건너와 유도탄을 개발한 첸쉐썬(錢學森) 박사냐”고 하자, “첸 박사는 옛날 분이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이라며 “우리나라 유도탄 학자의 이름을 몰라도 해양법 연구에 지장이 없을 텐데, 뭘 그리 알려고 하느냐”며 말문을 닫았다고 한다.
 
  민항기 사건을 수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은 고체연료 추진체를 사용하며 최대 500킬로톤(kt) 위력의 핵탄두 탑재도 가능한 둥펑21(DF-21) 탄도탄의 1985년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아무튼 당시 외무부 제1차관보로서 교섭 대표단을 이끌었던 나는 중국 민항기 피랍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중국에 대해 적의(敵意)가 없고 실질적인 관계를 갖길 원한다는 진의를 전달했다고 자부한다. 중국 대표들이 “공자(孔子)의 후손 아니냐”고 하길래, “조상 고향이 산둥성(山東省)”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여객기의 불시착으로 5박6일간의 서울구경을 하고 1983년 5월 10일 특별기편으로 귀국하는 중국민항 승객들과 중국 대표단 일행. 이들의 양손에 선물꾸러미가 가득 들려 있다.
  여담으로 사흘간 밤을 새워 가며 민항기 사건을 처리한 나는 정부로부터 ‘칭찬’ 대신 ‘매’를 맞았다. 민항기 사건 당일, 공무원들의 비상연락망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당시 이범석 장관은 국내에 없었고, 장관 대리였던 노재원(盧載源) 차관(중국대사 역임)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장차관을 제외하고는 휴대전화나 페이저(Pager)도 없던 시대였다.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감사원에 감사를 지시했고, 하루는 감사원 관계자가 밤중에 전화를 걸어 “특명에 의해 감사를 하니 양해해 달라”면서 물었다. 나는 사건 당일 행적에 대해 자초지종을 솔직하게 얘기해 줬다. 얼마 있다가 대통령 명의로 ‘~계고함’이라고 적힌 계고장(戒告狀)이 날아들었다. 그 이후로 외무부 간부들은 페이저(삐삐)를 차고 다니기로 했다.
 
  외교부 장관을 물러나고 난 후, 가족들과 영주 부석사(浮石寺, 676년 창건)를 갔을 때, 절간 앞 식당 주인이 “아니, 공 차관보 아니냐”며 반갑게 악수하며 밭에서 딴 과일을 선물로 주었다. 국민들은 외교부장관 공로명보다 민항기 사건으로 텔레비전에 ‘율 브리너(?)’로 비친 나를 더 기억하는 것 같았다.
 
 
  통역장교 1기로 6·25전쟁 참전
 
1996년 3월 22일 공로명 외무부장관이 베이징에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왼쪽)을 만나고 있다.
  내 고향은 명태라는 생선의 유래가 된 함경북도 명천(明川)이다. 내과 의사였던 아버지 공한석(孔漢錫)과 경기고녀와 서울사범을 나와 명천에서 교사를 한 어머니 김은혜(金恩惠)와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소학교 3학년 때 서울 교동(校洞)공립국민학교로 전학했고, 경기중학교를 거쳐 1951년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독일 의학이 발전하는 것은 대를 잇기 때문이다. 환자의 카르테(처방전)는 자산”이라며 의대 진학을 권유하셨으나, 의학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서울대 법대 2학년 때, 통역장교 1기로 입대했고, 육군대위로 예편하기까지 6년간 군복무했다. 신설 22사단(사단장 박기병 준장)의 통역장교로 양양에서 근무하다 강원도 화천 사창리에서 휴전을 맞이했다. 내가 모신 69연대장 김익권(金益權) 대령은 일본군 학병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육사 5기생으로 임관했다.
 
  그분은 훗날 5사단장과 육군대학 총장(육군 소장)을 끝으로 전역했는데, 콧수염이 인상적인 강직한 엘리트 군인이었다.
 
  내가 외무부에 들어간 것은 1958년 4월이었다. 1996년 외교부장관을 끝으로 외교부를 떠났으니 38년간 외교무대에 서 있은 셈이다. 이때의 외무부는 태평로 청사로, 지금의 서울파이낸스 빌딩 자리에 있었다. 직원 수는 고작 100명 안팎이었다. 재외공관은 외교공관 12곳과 영사공관 6곳에 불과했다. 내가 들어가기 직전인 1957년 7월에야 제네바에 대표부가 생겼으니 짐작이 갈 것이다.
 
  나는 그 전해인 1957년 겨울 외무부 촉탁으로 근무하게 됐다. 전쟁 후 외교 요원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군 장교 중에서 충원하기로 한 외무부는 1955년에 1차 채용시험을 통해 인원을 뽑았다. 이때 들어온 사람 중에는 윤하정(尹河珽) 대사(외무차관 역임), 김정태(金正泰) 대사(인도대사 역임) 등이 있다.
 
  두 해 뒤인 1957년에도 대상자를 모집했으나, 그해 합격한 사람은 나 한 명밖에 없어 이듬에 봄에 3차 모집을 했다. 이때의 채용조건은 촉탁을 거쳐 1년 내에 3급(지금의 5급)으로 임용한다는 것이었다. 외교관이 되는 길은 고등고시와 외무부 자체 채용시험을 통한 임용 등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당시의 고등고시는 지금과 같은 임용시험제가 아니라 자격시험제로 여겨졌다. 따라서 고등고시 3부(외교) 합격자는 매기에 따라 한 명이 있을 때도 있었으며, 대체로 5~6명 전후에 불과했다.
 
 
  태평로 시절의 외무부
 
  외무부에 들어가서 처음 석 달 동안 오전에는 교육, 오후에는 배치된 과에서 일과를 보게 됐다. 신임 외교관 교육은 외국인 교관의 영어와 영미문화 오리엔테이션, 외무부 업무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으로 나뉘었다. 외국인 교관은 미국 코네티컷 주의 주니어칼리지인 코네티컷 여자대학(Connecticut Woman's College) 학장 출신의 마이네키 여사(Mrs. Meineke)였고, 한국 교관은 최문경(崔文卿) 대사였다.
 
  최문경 대사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으로, 일제시대 때는 여주군수를 지냈다. 여주군수 시절 말에서 낙상해 2km를 끌려가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넘겨서인지 말이 어눌했다. 광복 후 장택상(張澤相) 초대 외무장관 밑에서 초대 정무국장을 지낸 장철수(張徹壽)씨의 권유로 외무부에 들어와 총무과장으로 초창기 외무부의 직제 등 제반 행정적 기틀을 만든 분이었다. 최문경 대사는 그 후 홍콩 총영사를 거쳐 1962년에 외무차관을 지내고 퇴임했다.
 
  장철수씨는 도쿄대를 졸업하고 일제하 일본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유일한 한국인으로, 일본 도조 내각이 1942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대동아성을 만들며 외무성을 해체하자, 그는 조선총독부로 전보됐다. 명동에서 술을 먹고 “일본 망한다”를 거리에서 외치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면 “이다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조선주둔군사령관, 뒤에 육군상 역임. 전범으로 처형)를 만나게 해 달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때마다 이다가키 사령관이 방면하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장철수씨가 외무성 시절 마쓰다이라 쓰네오(松平恒雄) 주중공사(초대 참의원의장)를 수행하면서 조선에 들 렀을 때 두 사람이 안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를 떠난 후에는 《사상계》에 ‘외교평론’을 연재하는 등 외교평론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고 간 분이다.
 
  우리는 외교 입문서인 헤럴드 니콜슨(Herold Nicolson)의 《외교(Diplomacy)》를 한 권씩 받아 공부했고, 그 외에 국제법 등의 강의를 들었다. 당시 니콜슨의 《외교》와 더불어 외교관의 필독서 중 하나였던 책으로 찰스 다이어(Charles Thayer)의 《외교관(Diplomat)》이 있다. 다이어는 특이하게 웨스트포인트 출신인데 직업 외교관으로 변신한 소련 전문가다. 또 영국의 일본학 대가 어네스트 사토(Ernest Satow)가 지은 《외교입문(A Guide to Diplomatic Practices)》도 훌륭한 참고서였다.
 
  교육을 마치고 배치를 받았다. 당시 촉탁의 보수는 7000~8000환이어서 한 달 동안 구내 다방에서 마신 외상 커피값을 치르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눈에 띄게 부유한 집 자제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한 처지여서 마음이 편했다. 《논어》의 ‘팔을 굽혀 베개를 삼더라도 부귀는 흘러가는 구름과 같다(曲肱而枕之 富貴如浮雲)’는 심경으로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신입 부원들에게는 매년 4~5명 정도 미국 연수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영어, 국제법, 경제)도 치른다. 나도 다행히 1958년 합격했다. 막상 떠나려 하니 서울법대 학점이 부족해 미국 대학원에 입학이 되지 않는다고 해, 이듬해까지 졸업하는 것을 조건으로 연기했다. 당시 서울법대 학생과장은 나의 서울법대 2년 선배이자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경남고 동기인 배재식(裵載湜) 전 서울대 법과대학장이었다.
 
  그러던 중 4·19혁명이 일어나 이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허정(許政) 과도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외무부 내의 사정도 달라졌다. 그래서 나는 해외연수를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로 보내 주기를 요청했다. 외무부는 이를 위해 주영 대사관에 수속을 밟게 했더니,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는 1년 코스가 없고, 런던정경대(LSE)에 새로 독립하는 영연방 국가들의 외교관 후보생 교육코스가 있다고 해 그곳으로 가게 됐다.
 
  LSE에서 연수를 받던 어느 날, 대사관 리셉션에 참석했다. 이때 영국 외무성 한국담당 데스크를 만나 자기소개를 하면서 “LSE에서 연수하고 있다”고 했더니, “어떻게 이승만(李承晩) 정부가 외교관을 공산주의자 학교에 보내느냐”고 농을 던졌다. LSE가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한 학교로 알려져 있었던 탓이다. 페들러(Peddler)라는 성을 가진 그는 후일 라오스 주재 영국 대사로 근무했다.
 
 
  외교의 달인 李承晩 박사, 외교관 부릴 줄 알아
 
프란체스카 여사(왼쪽)의 간병을 받으며 하와이 마우나라니 정양원에서 말년을 쓸쓸히 보냈던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는 영국이 6·25전쟁 중에 중공을 승인하고 수교했다는 이유로 외교관들의 연수를 미국으로만 보내고 있었다. 영국의 중공 승인 대책을 추궁하는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변영태(卞榮泰) 외무부장관은 “영국과 일전을 불사하겠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요새의 감각으로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나, 그 당시 외무부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올리는 문서는 영문으로 작성했다. 문서 형태는 수신, 발신, 제목 순으로 문서 서두에 쓰고 내용을 적은 후, 외무부의 의견을 기술하고 결재를 앙청(仰請)하는 방식이었다.
 
  오늘날 여권 발급 업무는 지방자치단체에 위임하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여권 발급도 관용여권과 유학여권(문교부의 해외유학생 시험 합격자만 해당)을 제외한 일반여권은 문화여권이라고 해 경무대에 가부를 물었다. 특히 외화 경비가 드는 안건은 반드시 경무대의 결재가 필요했고, 영문으로 올라가는 서류는 임시정부 시절부터 비서 역할을 한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대통령의 의견을 물어 결정했다고 한다.
 
  영문 서류의 결재는 ‘SR’, 국문 건의서에는 달필(達筆)로 ‘가만(可晩)’이라는 사인이 적혀 내려왔다. 이 박사의 프린스턴대 국제관계학 박사학위 논문의 펜으로 쓴 롱핸드(손글씨)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따라서 이때 외무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비서처(秘書處)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한평생 독립이라는 섭외교섭에 전념했던 이 박사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외교를 몸소 챙겼던 것이다. 외교관의 입장에서 이승만 박사는 외교를 제대로 알고 외교관을 제대로 부린 사람이다. 경제건설에 우선 순위를 두고 외교를 하나의 부속물로 생각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 동백림(東伯林)사건, 박동선(朴東宣)의 코리아게이트 등이 터지자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사실, 1970년대 한국 외교는 ‘수난의 외교’였다.
 
  이승만 박사는 카이로 선언 중 “한국 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해서 적절한 시기에 한국은 해방되고 독립을 얻게 될 것이다”에서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표현에 크게 우려하면서, 이 말이 곧 루스벨트 대통령의 식민지 국가에 대한 인식의 반영이라고 했다. 즉 루스벨트가 필리핀의 예를 제시하며 신생국가의 경우 적당한 기간 동안의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 박사는 1946년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했고, 이것은 동서냉전이 이미 시작됐고 미·소 간 합의에 의해 한국문제는 해결이 안 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린 건국 시기에 이승만 박사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4·19 뒤 하와이로 간 이후, 뇌일혈로 쓰러져 오랫동안 트리플러 미 육군병원(Tripler Hospital)에서 요양했다. 이때 자주 문병했던 고 이동진 목사(호놀룰루 감리교연합교회 원로목사)에 의하면, 말년의 이승만 박사는 영어를 다 잊어버려 한국어로만 통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종일(羅鍾一) 대사가 안기부 차장 시절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을 면회한 내용을 기록한 책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에도 강민철이 우리말을 완전히 잊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도 나는 영어를 잊어버린 이승만 박사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런던정경대 유학을 마치고 1961년 귀국하면서 외무부 국제기구과에 근무하게 됐다. 당시 이범석 전 외교부장관이 과장이었다. 1년 정도 근무하다 주미 대사관 근무를 위해 워싱턴으로 떠났다. 정일권(丁一權) 대사(국회의장 역임), 김정렬(金貞烈) 대사(국무총리 역임) 두 분을 모셨다. 1964년 5월 귀국해 동북아과로 배치됐다. 일본과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이 탄생한 이후 이듬해 12월 3일부터 1965년 6월 22일까지 약 7개월간 한일회담의 마무리 작업인 제7차 한일회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철거한 중앙청에 자리 잡고 있었던 동북아과에서 광화문을 바라보면 연일 한일회담 반대데모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해군 LST선에서 내린 사람들
 
베트남 수도 사이공이 월맹군에 함락되기 하루 전, 미 대사관 옥상에 비상착륙한 소형 헬기로 필사의 탈출을 하는 사람들.
  1968년 5월 13일부터 시작됐던 미국과 월맹(북베트남) 간의 평화협상이 5년 만에 결실을 맺어 파리평화협정이 1973년 1월 27일에 조인됐고, 그 이틀 뒤인 29일에는 닉슨 대통령의 종전선언이 있었다. 60일 이내에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다는 협정의 규정에 따라 3월 29일에 전 미군이 베트남을 떠났다.
 
  우리 한국군은 이에 앞서 3월 23일 철수를 완료했다. 미군의 군사적 지원이 끊긴 베트남의 장래에 대해 많은 사람이 비관적 시선으로 그 추이를 지켜보았다. 특히 1975년 4월 10일 포드 행정부가 요구한 7억2200만 달러의 대 베트남 군원(軍援) 예산이 미 의회에서 부결되자, 베트남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가 되고 말았다.
 
  베트남 사태가 급박해짐에 따라 우리 정부도 주월 대사관과 교민의 철수가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1975년 3월부터 공관과 민간인들의 철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외무부는 김정태(金正泰) 정무차관보 주재로 국방부와 베트남 사태에 관한 정세판단을 협의했다.
 
  이때 내가 “베트남 육군 병력이 아직도 40만~50만명이나 되는데 쉽게 패하겠느냐”고 묻자, 이희성(李熺性) 당시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국장(육군 소장)은 “베트남군은 전세가 유리할 때는 강하나 일단 전세가 기울면 벽돌집이 무너지듯 순식간에 와해될 가능성이 많다”며 사태의 긴박성을 경고했다.
 
  4월에 들어서자 정부는 공관원과 가족의 철수를 명함과 동시에 교민들의 자진 철수를 독려했다. 이때 본부는 베트남 현지 대사관 측과 사태의 긴박성에 대한 온도차를 느끼고 있었다.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끊긴 티우 베트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군수물자의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정부는 이 요청에 부응해 긴급 군원 물자를 해군 LST 3척에 실어 베트남으로 급파했다. 이들 LST가 다낭에 도착할 무렵, 다낭은 공산군의 포위공격에 의해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뱃머리를 사이공의 뉴포트항으로 돌렸다.
 
  정부는 이들 LST편에 잔류 교민들을 철수시키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LST 선단이 사이공 근해에 이르렀을 때, 사이공 주변의 치안상태가 극히 유동적이어서 우리 함정이 무사히 사이공 뉴포트항에 입항할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LST 함대 측은 입항을 주저하고 해군본부에 명령을 요청했다. 이때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김영관(金榮寬) 대사가 강력히 입항을 요청해 LST 함정 두 척이 사이공강을 거슬러 올라 4월 22일 뉴포트항에 무사히 입항했다.
 
  수송해 온 지원물자를 하역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우리 교민 다수는 순순히 승선했으나, 함정이 출항하려는 순간에 200명 가까운 교민들이 배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사이공에 잔류해 사태의 추이를 좀 더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일주일 후인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하게 되자, 최후의 미군철수 헬리콥터에 합승하려 미 대사관으로 몰려들어 종국에는 우리 공관원 철수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가져왔다.
 
  뉴포트항에 입항했던 LST함 두 척은 우리 교민 319명과 그 베트남인 가족 및 기타 베트남인 피란민 1011명에 우리 대사관의 공유차량을 포함한 물자까지 싣고 4월 26일에 뉴포트항을 출항, 무사히 공해로 빠져나와 5월 13일 오전 8시25분 부산항에 입항했다.
 
  미국 대사관원들의 철수 작전 시 우리 공관원들은 미국 대사관과의 협의에 의해 미군 헬리콥터 편으로 철수하게 됐다. 4월 29일 최후의 철수가 시작됨에 따라 김영관 대사와 이상훈(李相勳) 참사관, 그리고 무관들은 미 대사관 측의 안내로 철수했다. 이대용(李大鎔) 공사 이하 9명의 공관원들은 별개의 그룹으로 미 대사관 내에 집결했는데, 이때 많은 베트남인과 우리 교민 100여 명이 미 대사관의 담장을 넘어 밀려와 혼잡을 이루었다.
 
  이에 대사관의 교민철수 작전을 책임졌던 이 공사는 “우리 공관원이 끝까지 있을 테니 안심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철수하라”고 교민들을 설득했다. 4월 30일 오전 3시45분, 철수작전의 종료가 임박하자 미 해병대는 한국 대사관원의 우선 철수를 종용했으나, 이 공사가 교민들의 철수를 계속 돌보는 가운데 미군이 철수를 종료하자 9명의 우리 공관원들은 교민들과 함께 탈출의 기회를 잃고 공산 치하 사이공에 남게 됐다.
 
  철수하지 못한 공관원들은 처음에 사이공의 일본대사관을 찾아가 망명처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이 하노이에 대사관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최근 600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우호국 대우를 받고 있었기에 월맹 공산군이 일본대사관을 침범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아직 월맹과 정식 외교관계가 없는 상황이므로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하고, 대신 본국에 구출 요청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정부는 4월 30일 오전 11시,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대용 공사의 메시지를 입수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이 공사와 9명의 우리 공관원이 철수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의 구출요청을 알게 됐다. 정부는 즉각 월맹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우방국인 프랑스, 일본, 벨기에, 스위스 및 교황청에 우리 공관원이 긴급피난을 요청할 경우에 보호해 주도록 선처를 요청했다. 그리고 프랑스를 통해 우리 공관원들은 대사관저에서, 교민들은 교민회관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최후로 남은 3인
 
2013년 9월 3일 이대용 전 주월남 공사가 공산 베트남 감옥 수감 당시 북한 공작원을 향해 취했던 태권도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5월 3일, 김창근(金昌根) 2등서기관은 평소 안면이 있던 베트남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편에 공관원들이 함께 탈출하자고 제의했다. 이대용 공사는 집단탈출에 따른 위험이 최악의 경우를 낳을 수 있음을 염려해 정세의 추이를 관망하자고 결정했다. 그러나 김 서기관은 5월 3일 소형 선박 편으로 베트남을 빠져나와 싱가포르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8명의 잔류 공관원들은 대사관저에서 집단생활을 하던 중, 공산군 점령 당국이 외국인의 퇴거를 허가함에 따라 이규수(李圭守) 참사관, 김형준(金炯準) 2등서기관, 신상범 3등서기관, 김교양 통신기사, 양종렬 통신사 등 총 5명이 5월 7일 사이공을 출발, 방콕을 경유해 귀국했다.
 
  그러나 공산 당국이 정보기관 출신으로 지목한 이대용 공사, 안희완(安熙完) 2등서기관, 서병호(徐丙鎬) 총경은 출국을 불허하고, 이후 이들을 사이공 내의 교도소에 수감했다. 이는 엄연한 불법행위였다.
 
  정부는 공산 측 수중에 든 이들 3명의 생명과 안전을 크게 우려했다. 특히 북한과 동맹관계에 있는 월맹이 이들 공관원을 어떻게 대할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이들 공관원의 조기귀환을 위해 백방으로 외교력을 동원했다. 사이공 함락 후에도 사이공에 계속 공관을 유지하며 월맹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프랑스를 위시해 유엔인권위원회(UNCHR), 국제적십자사(ICRC) 등 국제기구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그해 11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주한 스웨덴 대사 대리를 청와대로 불러 각서를 주면서 스웨덴 정부가 사이공 당국과 교섭해 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1977년 3월에는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미국을 방문해 밴스 국무장관에게 그해 5월 파리에서 열릴 미·베트남 관계정상화 교섭 시에 우리 공관원의 석방을 제기해 줄 것을 미국에 요청한 적도 있다. 4월 1일에서 4일까지 프랑스를 방문한 남덕우(南悳祐) 부총리는 프랑스 방문이 예정된 팜반둥 베트남 수상에게 억류 공관원의 조기 석방을 거론해 달라고 프랑스의 바르 수상에게 요청했다. 바르 수상은 이런 뜻을 팜반둥 수상에게 전했다. 이때 팜반둥 수상은 한국 외교관의 조기 석방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으나, 북한이 강경히 관여하고 있어 곤란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러던 중 11월 24일 윤석헌(尹錫憲) 주불대사가 프랑스 외무성 노아빌 국장과의 대화를 보고해 왔다. 모로 주월 프랑스 대사가 월맹 고위층 인사에게 한국 외교관의 석방을 권유해 본 결과, 월맹 측은 북한의 반대로 어떤 조치와 계기 없이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것이다.
 
  프랑스 측은 한국이 만일 억류중인 북한의 간첩들과 우리 공관원들의 교환 교섭을 고려한다면 프랑스 측이 이 교섭의 진행을 담당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남북 간 교환석방 교섭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우리의 최우선 목표가 억류 공관원의 조기 석방에 있으므로 북한이 누구를 요구하는지 그 의도를 먼저 타진해 봄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북한과 월맹을 포함한 3자간의 교섭에 임하게 됐다.
 
  3자협상은 우선 우리 측이 교환교섭 의사가 있음을 프랑스를 통해 월맹에 통고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1978년 1월 30일 베트남 제1외무부장관 구엔코탁은 남북 합의가 이뤄진다면 그에 협력하겠으며, 만일 합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한국 외교관 3명은 절대로 북한에 인도하지 않겠다는 회답을 보내 왔다. 우리 측은 현재 한국에서 복역 중이거나 미결수로 수감돼 있는 북한 공작원 중 북한이 원하는 교환 인원을 우리 공관원과 동수인 3명 이내에서 알려줄 것을 요구했다.
 
  하노이에서 베트남과 교섭했던 모로 주월 프랑스 대사는 그의 교섭상대였던 부호암 베트남 외무성 영사국장이 북한 측이 요구가 많아 난항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 기회에 3명보다 훨씬 많은 수의 북한 간첩들을 석방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런 관측은 그 후 3자회담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3자회담 제의 시 베트남 측이 요구해 우리가 통보한 1978년 8월 16일 현재 한국에 수감 중인 북한 간첩 사형수는 8명이었다. 그중 재일교포 출신이 6명, 남한 출신이 2명이었다.
 
 
  北, 1 대 70 교환 주장
 
1999년 6월 22일 베이징 켐핀스키호텔에서 남북 차관급 회담을 시작하면서 남쪽 수석대표 양영식 통일부 차관과 북측 단장 박영수 조평통 부국장(오른쪽)이 악수하고 있다.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악명 높은 박영수는 베트남 비밀회담 대표로 참석하면서 이대용 공사 등을 찾아와 심문하며 협박 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3자회담 절차를 협의하기 위한 제1차 예비회담은 뉴델리 베트남 대사관에서 1978년 7월 7일 있었다. 한국으로서는 월맹 측과 외교 협상 테이블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한국 측 수석대표였고, 북측은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악명 높은 박영수를 내보냈다. 월맹 측은 하 주이(Ha Zuy)가 수석대표였다.
 
  예비회담은 이미 프랑스와 베트남이 대강을 합의했기 때문에 순조로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이런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베트남과 북한 측은 본회담 의제가 “체포 투옥된 남조선 혁명가들과 베트남에 억류되어 있는 남조선 측 인원들과의 교환문제”라고 주장했다. 우리 측이 이해했던 ‘복역 중인 사형수’가 아닌 ‘체포 구금된 남조선 혁명가들’라는 것이었다. 교환 대상의 범위를 놓고 양측은 논쟁을 거듭했다. 여섯 차례에 이르는 예비회담을 가졌으나 합의를 보지 못했다. 북한 측이 남쪽에서 교환대상이 누구인지는 서로 안다고 했으니 본회담 의제는 각자 편리한 대로 부르기로 하고 회담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본회담 수석대표의 격에 대해서도 실랑이가 있었다. 북한 측이 “대사는 북한의 기준으로 국장급”이라며 “현직 차관급에는 대사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대사가 서열상 어떤 급수인가 하는 문제는 해당 국가의 문제임에도 북한의 기준을 내세우며 억지를 부린 저의는 한국 측이 이범석(李範錫) 주인도 대사를 본회담 수석대표로 임명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속셈으로 보였다. 북한은 1972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의 남측 수석대표였던 이범석 대사를 껄끄러워했다.
 
  제1차 본회담은 1978년 7월 24일 뉴델리의 베트남 대사관에서 3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막을 열었다. 우리 측은 윤하정 본부대사를 수석대표로 하고 이범석 주인도 대사가 교체수석으로 나서고 외무부 아주국장인 내가 대표로 나섰다. 북한은 조명일 조평통 부위원장을 수석대표로 박영수 조평통 참사가 대표로 참석했고, 베트남은 항 루옹(Hang Luong) 외무차관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제1차 본회담에서 북한은 남측 인원의 석방 결정권은 자기들과 베트남의 손에 있다면서 회의의 기선을 제압해 우리 측을 압박하려고 책동했다. 본회담에서는 베트남 측의 제안에 따라 교환비율의 책정, 교환자 명단 결정, 교환 절차와 방법 등을 논의하기로 했다.
 
  북한의 교환비율은 국제적 선례 중 최대치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 대 70을 요구했다. 이는 브라질 게릴라와 브라질 정부 간 내전에서 게릴라에 납치됐던 주 브라질 스위스 대사의 석방을 위해 그와 70명의 게릴라 부대원들을 맞교환한 사례를 든 것이다. 우리는 1 대 1의 비율이 적당하다고 맞섰다. 이는 동독에서 1977년 8월에 체포, 복역 중인 미국 대학생 석방을 위해 미국에서 체포된 소련 KGB 요원 로버트 톰슨 소령을 석방 인도한 예를 따른 것이다.
 
  남북 간의 교환비율 논쟁은 1978년 7월 26일 열린 제2차 본회담부터 시작해 장장 11월 17일까지 격렬하게 오고갔다. 북한 측의 요구는 1 대 70, 1 대 40, 1 대 15, 1 대 10으로 계속해서 내려왔고, 우리도 그에 맞춰 1 대 1에서 1 대 2, 1 대 4, 1 대 5로 상향 조정했다. 결국 11월 17일 남북 양측 수석대표회의에서 한국이 주장한 1 대 5와 북한이 주장한 1 대 10에서 대략 중간치에 해당하는 1 대 7로 결정했다.
 
 
  캄보디아 문제로 충돌한 베트남과 북한
 
  교환비율에 합의한 남북은 1978년 11월 21일 남북한 비공식 회담(베트남이 불참해서 그렇게 부름)부터 교환자 명단 선정을 위한 회담을 시작했다. 우리 측이 회담 초기부터 교환대상에 남한 출신은 포함할 수 없다고 선언한 점을 의식한 북한은 교환 대상자 선정에서 ▲3자회담이 시작한 1978년 7월 7일 현재 남쪽 감옥에 수감된 혁명가들과 베트남 측에 억류된 남한 측 인원 3명과의 교환 ▲본인의 본적지, 출생지, 가족과 친척의 거주지에 관계하지 않는다 ▲쌍방은 상대측의 요구하는 인원을 무조건 인도한다는 세 가지 원칙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우리 측은 그런 원칙은 난관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일축하고,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인도받기 원하는 인원의 명단을 베트남 측에 통보한 만큼, 북한도 자기들이 희망하는 인원의 명단을 우리 측에 주면 이를 검토해 결정하겠다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명단을 일괄 제출하지 않은 채 한 명씩 이름을 제시하며 교환 가능성을 타진했다. 우리 측이 그 사람은 이미 사형이 집행됐다고 답하면, 사형됐다는 증거를 내놓으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마치 큰 양보라도 하는 듯 일괄 제시한 21명의 명단에는 우리가 북한에 제시한 8명의 사형수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미 사형이 집행된 자이거나 생존자의 경우에도 전원이 남한 출신이었다.
 
  명단 확정을 위한 토의에서 북한이 의도한 것은 그들이 지난 30년 동안 남파한 간첩들에 대한 ‘재고 조사’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교환자 명단에 합의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북한 측은 우리 측이 제시한 21명의 명단에 있는 조총련 소속 사형수를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고, 대신 남한 출신 복역자의 인도를 고집했다. 이들은 1993년 북으로 간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처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원했다.
 
  특히 북측은 1979년 5월 17일 제13차 남북한 비공식회담에서 나눈 수석대표 간 비공식 접촉에서 6명의 재일교포 사형수에 대해 “우리는 재일교포와 전혀 관계없으며, 따라서 그들을 데려갈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단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용도 폐기하는 그들의 잔학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휴전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터너 조이(Turner Joy) 제독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협상에서 철저하게 ‘살라미 전술’을 구사했다. 회담장에서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위협적 언사를 구사하던 그들이 지금도 생각난다.
 
  우리 정부가 북한과 이 이상 회담을 계속할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과정에서 베트남과 북한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던 것도 하나의 요소가 됐다. 이범석 대사가 베트남 대사와의 접촉에서 회담 초기의 베트남 태도와는 다른 분위기를 감지하게 됐다. 특히 1979년 1월 12일자 《로동신문》은 사설에서 베트남이 캄보디아의 독립과 주권을 유린했다고 비난하면서 베트남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베트남의 무력침공이 국제법 위반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신용추락이라고 보도함으로써, 북한과 베트남 간의 관계에 틈바구니가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3월 19일 이범석 대사와 신(Sinh) 베트남 대사의 접촉에서 이 대사가 북한이 교환대상자 명단 접수를 거부하고 있어 회담의 진전을 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베트남이 중간 역할을 해 줄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베트남 대사는 “현재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는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北, 李大鎔 공사 일행 6차례나 협박하며 北行 시도
 
공로명 전 장관이 광복부터 박정희 시대까지 한국외교 50년을 정리해 최근 펴낸 《나의 외교노트》(기파랑). 외교관 개인의 신변잡기나 편견에 가까운 개인적 판단, 불필요한 자화자찬을 배제한 외교 1차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979년 5월 23일 이범석 대사는 제14차 남북한 비공식회담에서 회담의 종결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북한 측 수석대표 조명일은 우리 측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우리는 이 회담을 깨버릴 생각이 없다”고 했다. 북한과 회담을 마친 이범석 대사는 그날 오후 신 베트남 대사를 만나 남북한 간의 회담 종결을 통고했다.
 
  신 대사는 우리의 종결 선언이 서울의 훈령에 의한 것인지, 또 확고부동한 결정인가를 물었다. 이 대사가 “그렇다”고 하자, 신 대사는 “하노이에 이 사실을 보고하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그 후 이범석 대사는 인도 정부 당국자를 만나 뉴델리에서 개최됐던 3자간의 회담이 끝났음을 알렸다. 지금 생각하면 북한은 자신들의 도그마(독단) 때문에 스스로 멈출 수 없는 기관차가 돼, 목적했던 것을 날려 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1 대 7로 교환을 했더라면, 21명의 간첩들을 데려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3자회담이 시작된 후 회담장 밖에서 한국과 베트남은 11차례의 비공식 접촉을 가졌다. 제1차 접촉이 있었던 1978년 11월 16일에 신 대사는 우리가 1 대 7의 교환비율을 수락할 것을 종용하면서, “만일 회담이 결렬되면 베트남에 억류된 세 명이 북한으로 보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발언을 했다.
 
  11월 29일 접촉에서는 “교환비율이 확정돼 실제 교환이 시간문제인 만큼, 사이공에 억류된 우리 공관원의 대우가 나아질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자, 신 대사는 “아무 염려 말라”고 하며 우리 측을 안심시켰다.
 
  12월 17일에는 다시 명단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사정 설명을 해 주자 신 대사는 “베트남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면서 개인 의견을 전제로 “한국 측은 현재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좋겠으며, 설사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베트남이 억류하고 있는 한국 공관원 세 명을 북한에 인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금도 베트남 당국자들에게 고마운 것은 우리 외교관을 끝내 북한으로 넘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북한은 이 시기를 전후해 6차례에 걸쳐 협박, 회유 등 갖은 방법을 통해 우리 공관원을 북한으로 끌고 가려고 획책했다. 정부는 수감 중인 공관원들이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도록 본국 정부가 계속 이들의 석방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에 힘썼다. 박정희 대통령은 억류 공관원들의 안위에 직접 관심을 보였고, 특히 가족의 생계에도 신경을 쓰며 재외공관 봉급을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李大鎔 공사 일행 끝내 못 보고 눈감은 朴正熙 대통령
 
유대인 상인 사울 아이젠버그는 5·16 이후 박정희 정부가 외자도입에 의한 경제성장 정책을 밀고 나갈 때 서독 차관을 끌어와서 우리나라 기간산업에 연결시켜 주고 많은 이익을 챙긴 인물이다. 그는 이대용 공사 석방을 위한 비밀협상에도 간여해 우리 정부의 훈장까지 받았다.
  후일 이대용 공사가 밝힌 바에 의하면, 그를 심문한 세 명의 북한 요원 중에는 바로 8월 30일 뉴델리에서 3자회담 본회의에 참석했던 박영수가 포함돼 있었다. 그는 억류 공관원 석방을 위한 3자회담의 예비회담에서 수석대표로 참석했으며, 그 후의 본회담에서는 대표로 참석했다. 그 후 박영수는 199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국장 겸 대변인으로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자 접촉에서 우리 측 송영대 통일부차관에게 “서울은 여기에서 멀지 않다,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선생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해 특사교환 회담이 결렬되게 만든 장본인이다.
 
  프랑스의 중재로 시작한 남북한과 베트남 간의 3자 비밀회담이 성과 없이 결렬되자, 정부는 계속 우방국들과의 협력을 모색하며 세 명의 조기석방을 위해 힘썼다. 주 스웨덴 대사로 발령받은 상태로 3자회담 본회담의 수석대표로 참석했던 윤하정 대사가 계속 스웨덴 정부에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던 중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인1980년 3월 31일 라이프란드(Leifland) 차관이 윤 대사를 불러 반가운 소식을 알렸다.
 
  라이프란드 차관은 그간 베트남의 타크(Thach) 외무장관과 수차례 접촉해 왔는데, 타크 장관을 통해 베트남이 4월 11일에 한국 외교관을 석방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전달받았다는 것이었다. 그해 4월 12일 라이프란드 차관과 닐슨(Ake Nilsson) 장관비서관이 사이공에서 우리 공관원을 인계받았다. 우리 공관원 일행은 사울 아이젠버그(Saul Eisenberg) 회장의 전용기 편으로 5년 만에 고국의 품에 안겼다.
 
  이 사건의 마지막 단계에 아이젠버그 회장이 개입한다. 이스라엘 국적인 아이젠버그 회장은 독일 뮌헨 태생으로 한국전 당시부터 서울에서 무역상을 했고,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소요되는 외자유치에 적극 개입, 전화기 교환 설비, 화력발전소, 캐나다 중수로원자로(CANDU) 도입 등 많은 프로젝트에 간여했던 인물이다. 그는 말년에 베트남, 중국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가 베트남 측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김인권(金寅權) 주 태국대사가 보고해 왔다. 김 대사가 1980년 1월 스웨덴 대사를 예방했을 때, 그는 본국 정부 훈령에 따라 1979년 4월 하노이를 방문해 억류된 4명(3명의 외교관과 1명의 민간인)의 한국인 석방을 교섭했다는 것이다. 당시 수상실 장관이던 타크 씨가 국제정세를 지켜보며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으며, 바로 그 타크 장관이 외무장관으로 취임했으니 그가 말한 대로 아이젠버그 회장을 통해 적극 교섭하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보고해 온 것이다. 이대용 공사 일행의 석방을 노심초사(勞心焦思) 고대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안타깝게도 이들의 귀환을 보지 못하고 6개월 전 최측근의 흉탄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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