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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⑤ 윌리엄 데이비드 레이놀즈

한국어 聖經 완역한 한국판 마르틴 루터

글 :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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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66권 가운데서 40권 번역하는 ‘괴력’을 발휘한 천재적 학자
⊙ 미국 햄든 시드니대 수석 졸업… 1892년 ‘7인의 선발대’로 조선 땅 밟아
⊙ 성서번역위원회 위원장 맡아… 1900년 신약전서 완간에 이어 1910년 구약성서 번역
⊙ 장남 윌리엄 전염병으로 잃어… 1937년 귀국 때까지 부인 볼링과 함께 사역

梁國柱
⊙ 65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1931년경의 레이놀즈 모습.
  “나는 전주 이씨, 이눌서요.” 윌리엄 데이비드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1867〜1951)는 늘 자신을 가리켜 “나는 전주(全州) 이(李)씨, 이눌서(李訥瑞)”라고 소개했다. 윌리엄 레이놀즈는 전주 서문 밖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두 명의 조선인 조수와 함께 성경 번역에 몰두했다.
 
  1892년 11월 조선에 온 그는 호남 지역의 선교를 개척한 7명의 선교 리더(테이트, 전킨, 테이트의 여동생 매티, 데이비스, 전킨의 부인 리번, 레이놀즈의 부인 볼링) 가운데 하나였다. 기독교 포교를 시작한 1897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주에 머물면서 전주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기독교 시인의 정수(精髓)인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 1913~1975) 시인의 아버지 김창국(金昶國)에게 세례를 줬다. 그가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 구약의 마지막 구절 번역을 마치자마자 서울에 있던 영국성서공회의 대리인인 휴 밀러(Hugh Miller)에게 전보를 보냈다. ‘Punyuk ta toiesso.’(번역 다됐소)
 
  1904년에 신약 성경이 출간된 이래 구약 전권(全卷)은 1910년에 번역이 끝나 이듬해 3월 출간되었다. 1911년 첫해에만 구약 8000부가 팔려 나갔다. 조선말로 쓰인 책 읽기를 경멸하는 선비들도 성경을 볼 수 있도록 유길준(兪吉濬)의 친동생인 법률가 유성준(兪星濬)이 국한 혼용 신약 성경을 제작하고 1906년 출간하였다.
 
  4월 25일 세브란스의 에비슨 원장과 언더우드, 휴 밀러가 궁궐로 가서 신약 성경 몇 권을 고종(高宗)에게 바쳤다. 성경을 손에 든 임금은 “아주 좋도다. 이 책을 만드느라 수고가 많았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국성서공회 릿손 편지.
 
  평양신학교 설립자 마펫 선교사와의 만남
 
  윌리엄 레이놀즈는 1892년 11월 3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밤새 배를 타고 이튿날 아침 용산 나루에 도착했다. 동료 부인들을 배 안으로 밀어 놓고 장정(壯丁)들은 비좁은 갑판에서 밤새도록 모기와 사투를 벌였다. 큰 기대를 갖고 들어왔던 조선에서의 첫날 밤은 모기와의 피나는 전투요, 모진 경험이었다. 레이놀즈가 성경 번역 팀의 멤버가 된 데에는 남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그가 조선에 선교사로 부임하던 때는 스물다섯 살이 채 안 되던 때였다. 1867년 12월생인 그는 서울에 온 후 한 달 뒤에야 스물다섯 번째 생일상을 받았다.
 
  그런 그가 1895년 10월에 성경 번역 위원에 뽑힌 것은 자신도 모르는 남다른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미국의 북부장로교와 감리회에서 파송된 선교사 그룹이 있었다. 레이놀즈는 남부장로교회 소속으로, 이들이 한국에 들어온 시기보다 7년이나 늦은 셈이다.
 
  당시 서소문에 사택을 마련하고 한글을 익히던 그에게 북장로교 선교사 새뮤얼 모펫(Samuel Moffett)은 자신이 미래 선교부의 기지가 될 공주와 청주를 정탐 여행 하려는데 동행해도 좋다는 말을 꺼냈다.
 
  한국에 온 지 채 두 달이 안 된 호기심 많은 청년 레이놀즈는 기꺼이 그를 따라 나섰다. 노새를 타고 400km의 여정에 나선 때가 크리스마스를 갓 지난 이틀 후였다. 몇몇 선교사들은 “그곳은 강도도 많고 위험하니 안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그런 충고가 그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우리는 남쪽으로 100마일을 노새를 타고 여행해 공주와 청주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오늘날의 북감리교회와 북장로교회의 선교지부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그곳으로 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시골 지역에는 강도들이 창궐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강도들에게 완전히 불타 재로 변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장이 선 마을을 점심 무렵 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있는 동안, 험상궂게 생긴 한국인들이 몰려와 짐짝을 들어 보고는 ‘이렇게 상자가 무거운 것을 보니, 돈이 꽤나 많이 들어 있나 보다’라며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수상한 언행을 눈치 챈 우리 언어 선생은 황급히 우리 방에 들어와 해가 지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 강도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강도들은 결코 우리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모펫과 나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해 그날 저녁 무렵부터 밤 10시까지 줄행랑을 쳤습니다.”
 
  새뮤얼 모펫과 윌리엄 레이놀즈의 추억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미국의 남과 북에서 제각기 한국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당시 남과 북은 남북전쟁의 상흔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들이 자리를 함께한다는 것조차 어색할 때였다. 점심도 거른 채 거구의 두 미국인이 조선 노새에 올라타고 밤 10시까지 내달렸으니, 얼마나 마음이 화급을 다투었을까.
 
  죽음을 무릅쓰고 여행길에 나선 두 사람. 마치 전장(戰場)에서 생명을 나눈 전우보다 더 끈끈한 우정이 꽃피었을 것이다. 250마일 왕복여행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나누어진 대화가 평생을 간 것이다.
 
  한 사람은 평양으로 올라가 조선의 목사들을 길러내는 신학교를 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조선 사람이 읽기 쉽도록 성경 66권 가운데서 40권을 번역하는 ‘괴력’을 발휘한 천재적 학자로 남았다.
 
  더욱이 레이놀즈는 모펫이 문을 연 평양신학교에 올라가 은퇴할 때까지 31년간에 걸쳐 ‘조직신학(組織神學)’을 강론했다. 조직신학은 신학 분야에서 가장 어렵고, 신학의 진수가 담긴 학문이다. 이것은 짧은 며칠 동안의 여정에서 레이놀즈의 학문적 깊이를 꿰뚫어본 모펫의 통찰력에 기인한다.
 
 
  아펜젤러 반대 무릅쓰고 성경 위원에 임명
 
햄든 시드니 대학.
  모펫은 1895년 10월 성경 번역 위원으로 레이놀즈를 추천했고, 이 사실을 40년 동안 드러내지 않았다. 모펫의 인품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1895년 레이놀즈는 자신이 성경 번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랐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처음에 그를 위원으로 선출하는 안(案)에 반대했다.
 
  그는 “레이놀즈 선교사는 먼저 이곳에서 좀 더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는 언더우드나 자신은 이미 조선에 온 지 10년이 지나 한국어 사용에 문제가 없지만, 조선에 온 지 3년밖에 안 된 레이놀즈에게 그런 중책을 맡긴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여긴 탓이다.
 
  그러나 레이놀즈가 번역에 조금씩 관심을 보였고, 성경 번역 위원 선출에 가장 반대했던 아펜젤러의 마태복음 원고를 대담하게 줄을 그어 가며 몇 가지 수정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선임 번역위원들은 레이놀즈가 지적한 아펜젤러의 번역상의 오류를 솔직히 인정하고, 조선에 들어온 지 3년밖에 안 된 ‘하룻망아지’에게 번역 일을 주기로 결정했고, 구약의 여호수아서와 신약의 고린도 전후서 번역부터 맡겼다.
 
  레이놀즈와 함께 번역을 시작했던 언더우드는 1911년 이래 지독한 신경쇠약에 시달린 나머지 1916년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서 소천(召天)했다. 자신의 성경 번역 위원 선출을 반대했던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교회 일을 돌보며 성경을 번역하던 레이놀즈를 만나러 오다 군산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리고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th Gale·1863~1937년)은 1925년 성경의 번역상 오류를 검토하는 개역위원회(改譯委員會)에서 자신의 검토 정책이 거부되자 스스로 사임하고 말았다. 게일이 성경개역위원회에서 물러난 후 독자적인 번역을 시도하였고, 한국인 조력자 이원모(李源謨), 이창직(李昌稙) 등의 도움을 얻어 번역을 마치자 윤치호(尹致昊)에게 출판을 맡겼다.
 
  당시 기독교 출판사 창문사(彰文社)를 열어 다양한 기독교 서적을 발간하던 윤치호는 거금 2만원을 들여 게일의 성경을 출판했다가 막대한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출판사 문을 닫아야 했다. 레이놀즈는 신약의 고린도 전후서 2권과 예레미야서를 제외한 38권의 구약 성경 번역을 모두 마쳤다.
 
  1904년 10월에 시작해 1910년 4월에 구약 성경 번역을 마무리짓기까지 5년 6개월을 수고한 레이놀즈에게 그의 모교 햄든 시드니 대학은 1908년 신학박사 학위를, 1924년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햄든 시드니 대학은 미국에 정착한 아이리시-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자신의 후예들을 위해 1775년 남부 버지니아에 세운 남성들에게만 입학을 허가하는 명문대학이다.
 
  미국의 독립운동과 건국, 그리고 헌법 제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불러일으킨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이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메디슨, 버지니아 초대 주지사이며 독립운동을 이끌고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패트릭 헨리와 더불어 세운 대학이었다.
 
  햄든 시드니 대학이 오랜 역사 속에서 레이놀즈에게 개교 133년 만에 처음으로 명예 신학박사를 주었고, 이어 법학박사 학위까지 수여한 사실은 이역에서의 성경 번역에 대한 그의 공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가늠케 한다.
 
 
  조선 백성들의 삶에 침투해 들어간 聖經
 
부위렴 선교사가 조직한 1920년대 밴드부.
  세종이 1446년 한글을 창제한 이래 지난 660년 동안 백성의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책은 무엇일까. 백성의 삶을 이롭고 편하게 하고자 만든 한글은왜 조선 500년 동안 민중의 삶을 뒤바꾸어 놓지 못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국교로 정해진 유교의 성리학도 아니고 불교의 경전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답은 논어(論語)가 아니라 성경(聖經)이요, 향교(鄕校)가 아니라 교회(敎會)에 있다.
 
  8만대장경이 제 아무리 불사(佛事)를 일으켜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이 또한 한자로 만들어진 탓에 백성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형편이 아니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제 아무리 심오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 양반들이 한글을 업신여기고 한자만을 고집한 탓에 한글이 민중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만큼 말로써 반포만 되었지 쓰임새 있는 글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향교 역시 남성의 전유물로 균형감각을 상실한 기구요, 성균관은 양반제도를 지켜 내는 반상(班常)의 산물이었다. 때마침 1910년대를 전후해 주시경(周時經)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뒤늦게 훈민정음을 읽고 쓰기 쉽도록 한글 보편화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지만, 기독교의 포교와 성경이 반포되던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소위 선교사들은 기독교 포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위장막’으로 YMCA와 YWCA를 내세워 계몽활동인 양 은밀하게 성경 지식과 찬송가를 가르쳤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위생이나 비누 사용법,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 주기 위해 작명가(作名家) 노릇도 했다.
 
  그들은 시골 동네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을 누볐다. 태어나서 자전거를 처음 보는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면 이들은 간단한 전도지를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고, 단편 ‘쪽 복음서’로 인쇄된 성경은 돈을 받고 팔았다. 파란 눈의 서양 사람이 서투른 우리말로 인사하며 내미는 성경을 값을 치르고 샀다. 그 당시에는 무성 축음기나 환등기나 밤을 밝히는 랜턴만 들고 가도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1899년, 군산에 정착했던 윌리엄 불(William Bull, 한국명 부위렴) 선교사는 당시 조선에서 흔치 않은 밴드부를 만들어 전라도 시골을 돌며 천막 전도 집회를 열었다. 한국인 목사가 트럼펫을 불었고 동네방네 다니며 밴드를 불어제치니 그 인기가 가히 하늘을 찌를 태세였다.
 
  그러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아낙들이 교회에만 들어서면 성경을 읽고 교육을 받으면서 체계적인 학습을 이루었다. 그래서 한때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비아냥거리는 말 가운데 “예수 믿으면 말쟁이가 된다”는 말도 돌았다. 교회 모임에 가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게 많다 보니 자연 유식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터의 독일어가 독일을 평정하기까지
 
이눌서 목사와 번역 일꾼들.
  일찍이 독일 게르만 민족에게 문화와 문명을 가능케 한 것 역시 성경에서 비롯되었다. 루터는 1521년 12월 21일,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로 결단했다. 당시 독일에는 이미 15개의 독일어 성경 번역본이 있었으므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는 기존의 성경을 단순히 단어를 번역해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사람들이 쓰던 말과 어휘, 의미를 정확하게 골라 번역하는 데 힘썼다. 루터는 마치 해변가에서 수많은 조개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조개를 찾아내는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정성껏 조합해 그야말로 국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고 이해가 가능한 낱말로 독일어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루터는 독일어 성경 번역을 시작한 지 11주 만에 220쪽에 달하는 신약 성경 27권의 번역을 마쳤다. 그 후 몇 달 동안 수정을 거쳐 1522년 9월, 3000부의 신약 성경을 인쇄했다. 성경은 날개 돋친 듯이 판매되었으며, 엄청난 수요 때문에 3개월 후 다시 인쇄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루터의 번역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22년부터 1546년까지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만 신·구약 성경이 10판이나 인쇄되었으며, 신약 성경만은 따로 80판이 인쇄되었다. 같은 기간에 독일 전역에서는 260판의 성경이 인쇄되었고, 1712년부터 1883년까지 할레(Halle) 지역에 있는 인쇄소에서는 580만 부의 성경이 인쇄되었다. 그야말로 ‘읽기 혁명’이었다. 단순 수치상으로만 본다면 독일의 거의 모든 계층이 성경을 읽게 된 것이다.
 
  루터의 작업으로 인해 독일어 어휘에도 변화가 생겼다. 한 예로 독일어로 ‘직업’을 의미하는 ‘베루프(Beruf)’는 그 당시 직업적 목사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였다. 그러나 루터는 돈을 받고 일하는 모든 직업군에 이 단어를 사용했으며 지금까지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루터가 살던 1500년대 초, 독일에는 20개 정도의 지역 방언이 존재했다. 크게는 북부와 남부 독일어로 나누어져 있었고, 루터는 두 지역의 경계인 비텐베르크에 살았기 때문에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 ‘눈물’을 의미하는 단어를 남부에서는 ‘트레넨(Tränen)’이라고 하고 북부에서는 ‘체레(Zähre)’라고 했는데, 루터는 이 두 단어를 서로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층, 피지배층, 남녀노소 등 다양한 세대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했다.
 
  이로 인해 루터 성경 번역본은 ‘독일어 통일’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독일은 런던이나 파리와는 달리 지방으로 나누어진 분권적 제후가 통치하는 지역이었던 탓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없었고, 독일 전역을 아우르는 집권자나 통합 세력도 없었다. 그러나 루터 성경 번역본의 출현이 이러한 상황에 변화의 물꼬를 터 준 셈이다. 독일인들이 통일된 언어로 말하게 되면서 비로소 국가적 국민적 동질성을 의식하게 되었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 쓰인 독일어가 통일 독일의 표준어가 되기까지는 약 300~400년이 걸린 것으로 보고 있다. 루터의 성경은 독일에서 5가정마다 1권씩 비치하고 있을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소수여서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동네의 공터에 모여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읽어 주는 성경을 들었다.
 
  이에 루터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 도시의 시장이나 지배층에게 학교를 세워 달라고 했고,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오랫동안 독일 내 개신교 지역 학교에서 유일한 교재로 사용되었다.
 
  또 헤르더, 괴테, 하이네 같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목사들은 설교에서 루터 성경본을 인용하였고, 루터의 독일어를 극찬해 마지않았다. 그 결과 19세기에 들어서 루터가 쓴 독일어가 모든 백성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
 
  동화 작가 야코프 그림(Jakob Grimm)은 “루터의 독일어는 그 순수함과 엄청난 영향력으로 인해 현대 독일어의 기초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루터는 1534년 성경 번역본에서 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기 시작했다. 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는 것은 17세기 들어 다른 유럽어에서는 사라졌지만 독일어에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만큼 루터는 독일 역사뿐 아니라 독일어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존재였다. 루터가 독일어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 독일어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언어학자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최근 국제성경공회(UBS)는 “2013년 기준으로 전 세계 7105개 언어 중, 실제로 구약과 신약이 모두 번역된 언어는 511개에 불과하다”며 “이는 여전히 성경을 모국어로 읽을 수 없는 사람이 많고, 이 때문에 성경 번역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각 지역별 성경 번역본의 수는, 아시아·태평양이 1067개로 가장 많다. 이어 아프리카 748개, 아메리카 519개, 유럽 214개 순이다.
 
 
  레이놀즈의 성경 번역이 가져온 한국 교회의 성장
 
  우리나라에는 지난 2012년 기준으로 4300만 권의 신구약 성경이, 6900만 권의 신약 성경이, 7200만 권의 단편 성경이 보급되었다. 1883년 서상륜(徐相崙) 등이 심양에서 번역, 인쇄하여 의주 변문(邊門)으로 목숨을 걸고 몰래 들여오기 시작했던 성경으로부터 시작해 작금에 이르기까지 배포되었던 것이다.
 
  서상륜 등이 로스(J. Ross)를 도와 심양에서 제작했던 성경은 권서인(勸書人·각지를 돌며 성경을 팔기도 하고 전도용으로 반포하는 이들)이 1883년과 1886년 사이에 모두 1만5690권을 조선에 배포하였다.
 
  언더우드가 처음으로 황해도 장연의 소래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이미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조선에서 권서인으로 수년간 고용되었던 서상륜이 전도한 일단의 개종자들을 발견하였다. 비록 심양에서 제작한 성경의 번역에 힘을 쏟았던 사람들이 평안도 의주(義州)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평안도 방언으로 번역된 이 성경은 그 효과가 극히 미미했다. 그럼에도 조선 성경번역사에 있어 로스 선교사와 서상륜, 이수정(李樹廷)의 이름 석 자는 길이 남는 비명(碑銘)과 같다.
 
  1894년도에 새뮤얼 모펫이 평양에서 교회 사역을 시작하면서 “북쪽 지방에서 언더우드 박사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달라”고 하였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선교사 공의회(公議會) 의장직을 맡고 있던 레이놀즈는 모펫에게 전국적으로 200명의 장로교인들 가운데 서울 이북 지역의 세례교인 54명의 명단을 그에게 보냈다.
 
  그런데 레이놀즈가 조선에서의 45년간 사역을 마치고 1937년에 은퇴할 즈음의 보고에 따르면, 초창기 3~4개에 불과했던 교회의 숫자가 전국적으로 3500개에 이르고, 교인들의 숫자는 25만명에 이르는 괄목할 성장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왕성하게 번져 갔습니다.” 그야말로 한국 선교와 기독교 전파는 ‘현대 선교의 경이(驚異)’라고 불릴 만큼 기적의 연속이었다. 이 모든 것이 성경 번역과 보급에서 비롯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입국 6개월 만에 한국어로 설교
 
이눌서가 배우던 한글 학습 노트.
  레이놀즈는 개화기 한국에 실로 다양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설교가이자 교수였으며 웅변가였고 번역가였다. 또한 신학자였고 지극히 가정적인 가장이기도 했다. 그는 초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레이놀즈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누가 뭐라 해도 그가 옮긴 한국어 성경일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이 책만큼 한 나라의 발전과 정신적 유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우리 선조가 살았던 조선시대에 한글은 여러 지역 방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 방언들을 어떻게 하나의 근대 언어로 통합하였던 것일까. 딱히 중산 계층이 형성된 것도 아니고, 일제의 통감 식민정치로 민중의 삶이 핍절했던 때였다. 세계 최초의 활자를 만들었다는 한국이건만, 인쇄 기술의 발달도 보편적이지 못하고 제 몫을 못했다. 바로 기독교의 성경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레이놀즈에게 언어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기능 이상으로 언제나 흥미로운 도구였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때에도 이미 독일어와 라틴어 헬라어에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그가 평양에서 조직신학을 강론할 때에는 중국 신학자 가옥명(假玉命·Chia Yu Ming)의 신도학(神道學)을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중국어에도 능수능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레이놀즈의 동료 선교사인 윈(S. Winn)은 1942년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캘리포니아 주 몬트리트 서머센터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레이놀즈 박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어의 권위자”라고 증언했다. 레이놀즈 목사가 한국에 입국한 지 불과 6개월이 지나지 않아, 감리교 선교사로 배재교회와 학교를 맡고 있던 올링거(Ohlinger) 선교사가 레이놀즈에게 주일 설교를 부탁할 정도였다.
 
  이제 조선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선교사에게 주일 설교를 부탁하다니. 그렇지만 그는 올링거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만약 올링거 선교사가 언어도 낯선 새로운 선교사에게 설교를 부탁할 정도로 무모하다면, 자신도 또한 그런 무모한 결정에 상응해서 설교를 하는 것도 시도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놀즈는 설교를 영어로 준비했고, 그 내용을 최대한 한국어로 자신의 한국어 선생에게 말해 주었다. 레이놀즈는 한국어 선생이 올바른 한국어 토씨를 달도록 해, 그것을 자기에게 매일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레이놀즈는 그것을 복습했다. 레이놀즈는 정확하게 19분 동안을 설교를 했다. 그 동안, 그는 자신의 손에 움켜쥔 원고에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그해 봄인 1893년, 레이놀즈와 언어 선생은 어느 시골 마을에 머물며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다. 하루는 한국식 풍습에 따라 격식을 차린 인사말을 연습하고 있을 때였다. 레이놀즈는 만난 사람에게 “당신의 호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라며 한국식으로 물었다.
 
  그때 그 사람이 “당신은 한국에 오신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레이놀즈가 정중하게 “5개월에서 6개월쯤 되었네요”라고 하자, 그 사람은 펄쩍 뛰면서 “당신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어떻게 반 년밖에 안 된 사람이 이렇게 한국말을 잘할 수 있느냐”고 했다고 한다. 레이놀즈는 “지난 반 년 동안 인사말만 연습해, 인사말 외에는 다른 말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배운 학습 노트를 보면 2년 만에 논어(論語)를 깨우치고 도량형(度量衡)의 셈법과 계산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맹자(孟子)의 양혜왕(梁惠王) 편 상(上)에 나오는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의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즐겨 인용하곤 했다.
 
 
  ‘팔방미인’ 레이놀즈
 
1937년 평양 거주 증명서.
  레이놀즈는 1887년 6월 햄든 시드니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문학사와 예술사 두 학위를 취득했고, 라틴어와 헬라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의 4대 언어과정을 수료하였다. 그가 재학한 3년 동안 모든 전공과목에서 그의 평균점은 96.5점이었다. 졸업식에서 그는 졸업생을 대표해 라틴어로 졸업 축사를 하기도 했다.
 
  대학 신문은 그를 가리켜서 졸업반을 대표하는 ‘운동선수’로 소개하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졸업생 중에서도 최고의 스케이트 선수이자 테니스 선수였고, 제2야구팀의 투수였고, 2년간 풋볼 팀의 주장이었다.
 
  심지어는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한 이후에도 84세까지 미국에서 스케이트를 즐겼을 뿐 아니라 1930년에는 자신의 집이 있는 평양 경창리 선교부지 내 선교사 사택과 신학교에 자신이 직접 설계한 작은 9홀 골프 코스를 만들었다. 또한 지리산 속에 자리 잡은 우리의 여름 별장(지리산 노고단)에도 인부들을 시켜서 골프장을 만들었다. 그와 사위 존은 그곳에서 한 달 내내 골프를 치기도 했다. 때로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뿌연 새벽안개가 걷혀서 공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도 했다.
 
  그는 유니온 신학 전 수강과목에서 높은 학점을 유지하였다. 특별히 히브리과목은 학기말 논문에서 100점 만점을 기록하였다. 그의 히브리학과 교수였던 무어(W. W. Moore) 박사는 논문의 뒷장에 ‘토브 메오드’라고 적었는데 이는 ‘최고로 좋음’이란 뜻이다. 그가 신학교에 있는 동안 전체 기도회 모임이 매 수요일 저녁마다 채플에서 열렸다. 졸업반 학생들이 교대로 설교를 인도하면 예배를 마친 뒤 교수들은 설교한 학생의 설교를 놓고, 내용과 전달 방식에 대해서 평가를 해 주었다.
 
  그런데 레이놀즈가 설교를 마친 다음에, 토머스 캐리 존스턴(Thomas Carey Johnston)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은 놀라운 칭찬을 해 주었다. “레이놀즈의 오늘 설교는 그가 아주 특별한 지성의 소유자인 것을 충분히 반증하고 있습니다.”
 
  레이놀즈는 많은 면에서 특별한 은사(恩賜)를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천재적인 면모 중에서 그 영향력에서 가장 책임이 무거우면서도 가장 덜 알려진 것이 번역가이자 학자로서의 그의 재능과 능력이다. 레이놀즈의 이런 면모가 통일된 국가 한국의 성장에 다소라도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번역가는 절대로 혼자 번역하면 안 돼”
 
레이놀즈를 기념해 제작한 스테인드그래스 벽화.
  그가 구약 성경을 번역하는 와중에도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모두 배운 터지만, 혼자서 성경을 번역하려 하지 않았다. “번역가는 절대로 혼자 일해서는 안 된다. 혼자 번역을 하면 적절한 최상의 단어를 찾을 수 없다”는 최초의 영어 성경 번역자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1494~1536년)의 번역 원칙을 충실히 따랐다.
 
  그래서 레이놀즈는 이승두(李承斗)와 김정삼(金鼎三)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에 충실한 성경을 번역하도록 하였다. 그는 평생 한 번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아파 본 적이 없었다. 그때도 의사들이 그가 회복할 가능성을 포기했는데, 시골로 순회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끓이지 않은 물을 무심코 마신 탓이었다. 그는 그 차를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차를 내어 온 주인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묻지 않고 마셨다.
 
  의사들은 그의 몸을 얼음으로 쌌다. 그리고 마침내 회복이 되었을 때도 그는 걸음마부터 새로 배워야 했다. 일요일 아침마다 그는 결혼식 때 입었던 ‘프린스 알버트 공’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남장로교의 선교 센터인 서소문 딕시에서 두성부채(인현동)까지 설교를 하기 위해서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가 예배당에 거의 다다랐을 때 좁은 골목을 잽싸게 자전거를 운전하면서 가고 있었다. 기름 장사를 하는 여인네가 기름병을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그녀 옆을 눈치 채지 못하게 지나치려고 자전거를 모는 순간, 길 반대쪽에 있던 어떤 남자가 이 광경을 보고 기름을 머리에 이고 오는 여인에게 “위험하니 빨리 길을 비키라”고 고함을 쳤다. 그 순간, 그녀는 안타깝게도 레이놀즈가 비집고 지나가려는 길을 막아섰다.
 
  자전거는 머리 위에 기름병을 잔뜩 이고 가던 그녀를 뒤에서 추돌했고, 기름병이 가득한 받침대를 흔들리게 했다. ‘머리 위에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사방에 기름이 흥건하게 쏟아진 가운데 레이놀즈는 몸을 추슬러 일어나면서 그녀에게 사과하며 지갑을 완전히 털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녀의 손에 얹어 놓았다. 그날의 설교는 다른 면에서 부족할지는 몰라도 설교자의 옷 위에 기름부음의 역사가 충만하여 예배당 안에는 향기로운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큰아들 전염병으로 잃어
 
이눌서를 조선에 파송한 버지니아 노포트 제2장로교회.
  윌리엄 레이놀즈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북한산 절간에서 태어났던 첫 아이 윌리엄이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양화진 무덤에는 그가 이 땅에 남긴 혈육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한번은 전주에서 남쪽으로 25마일쯤 떨어진 교회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댕기머리를 한 노총각들이 예배 전에 레이놀즈 목사에게 면담을 신청하였다.
 
  노총각들은 “교회에 나오게 되면 장가가게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고, “혹 잘못해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 선교사들이 좀 빼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렇도록 단순하고 정이 많았던 전라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45년을 한국에서 살았던 그는 1950년 6·25 전란의 소식을 미국에서 접했을 때 얼마나 가슴 태우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까.
 
  1951년 레이놀즈가 미국에서 84세로 소천하자, 서둘러 미국으로 건너간 언더우드(원한경 박사)는 탁월했던 천재 레이놀즈의 묘소를 찾아 함께하지 못한 정리를 가슴에 새기고 아쉬움을 달랬다. 오늘도 우리는 이 땅에 와서 그 삶을 드리고 조선의 민중과 더불어 진한 애정을 나누었던 벽안의 청년들을 그리워한다. 그들이 이 땅에 남기고 간 사랑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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