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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0주년 특별기획] 白善燁이 만난 6·25전쟁의 영웅들 <下·끝>

흥남철수 때 피란민 10만명 구한 ‘義人’ 金白一 중장

글 : 오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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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로 勝戰譜 전한 ‘백마고지’의 영웅, 金鍾五 대장
⊙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에서 중공군 격퇴, 李龍文 장군
⊙ 교육훈련의 대가 ‘타이거 송’, 宋堯讚 장군
⊙ 63세에 제주훈련소장 수락한 창군원로, 李應俊 장군
⊙ 영천전투의 영웅, 李成佳 장군
⊙ ‘지연전’으로 반격의 기회 만든 ‘오성장군’, 金弘壹 장군
⊙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개전초기 전쟁을 지도한 丁一權 장군
⊙ 군번 1번, 李亨根 장군
⊙ 통영상륙작전과 ‘귀신 잡는 해병 신화’ 만든 金聖恩 장군
⊙ 한국 海軍의 아버지, 孫元一 제독
⊙ 전투에만 전념한 참군인, 劉載興 장군
⊙ 한국군 최고의 智將, 金點坤 장군
⊙ 한국군 최고의 연대장, 林富澤 장군.

사진 : 白善燁 예비역 대장 제공
  지난 4월 21일 전쟁기념관에 있는 6·25전쟁 유엔참전국 전사자 기념홀, 백선엽(白善燁) 전 육군참모총장(예비역 육군대장)이 유엔 참전국 전사자 명비(名碑)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밴 플리트의 아들 존 중위가 생각나요. 그의 시신도 못 찾았어.”
 
  밴 플리트 8군사령관의 아들 밴 플리트 2세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후 공군에 다시 들어가 폭격기 조종사가 됐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6·25전쟁에 참전했다. 1952년 4월 4일, 압록강 남쪽 순천지역에 단독 출격해 임무를 수행하던 중 대공포화에 맞아 전사했다.
 
  “아들 소식을 보고받은 밴 플리트는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한동안 응시했다고 들었어요. 며칠 뒤 ‘그 정도면 충분하다’며 구출작전을 중지하도록 그가 명령했지. 익산 옥구(沃溝) 비행장 존 중위의 장교숙소에 가니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쓰던 물건이 그대로였어. 밴 플리트는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어요.”
 
  6·25전쟁 당시 142명의 미군 장성 아들들이 참전해 이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밴 플리트 2세는 그중 한 명이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워커 8군사령관, 해리스 미 해병항공사단장, 조이 제독 등이 아들과 함께 참전했어요. 클라크 사령관의 아들 클라크 대위는 보병중대장으로 싸우다 중상을 입고 후송됐고, 미 해병항공사단장 아들 해리스 소령은 해병 대대장으로 장진호(長津湖) 전투에서 전사했고요.
 
  미군 지휘관들도 예외가 아니에요. 마틴 미 34연대장은 천안전투에서 전사했고, 워커 8군사령관은 교통사고, 무어 미 9군단장은 헬기 사고로 순직했고, 딘 24사단장은 대전전투에서 포로가 돼 만포진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지요. 6·25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부사관)의 뒤를 이어 한국에 온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처럼, 지금도 미군 장병 70여 명이 대를 이어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미군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면, 한국군은 ‘국가수호’를 위해 그것을 실천했다”면서 “한국군 장교들도 열악한 여건이지만 미군 장교들 못지않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잘 싸웠다”고 했다.
 
  “채병덕(蔡秉德) 육군총참모장, 김백일(金白一) 1군단장, 이용문(李龍文) 남부지구경비사령관, 박범집(朴範集) 육군본부 초대항공국장이 장군 신분으로 전사했지요. 신태영(申泰英) 국방장관과 신응균(申應均) 국방차관, 유승렬(劉升烈) 육군소장과 유재흥(劉載興) 국방장관처럼 6·25전쟁에서 부자(父子)들도 경쟁하듯 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발발 60년, 이젠 참전군인들도 하나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며 “전쟁 주역으로 싸운 선배와 동료들의 위업(偉業)을 후세에 전할 마지막 의무가 내게 있다”고 했다.
 
 
  흥남철수 때 피란민 10만명을 구한 ‘義人’ 金白一 장군
 
 
  1951년 3월 27일, 38선으로 전선이 일단 굳어지는 시점이었다. 매튜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여주의 미8군 전방작전지휘소에 한미(韓美) 야전지휘관들을 불러모았다. 여주의 넓은 모래사장에 대형 텐트 20여 개가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리지웨이가 막사로 들어섰다. 3월 말의 날씨는 비교적 차가웠다. 막사 안에는 두 개의 난로가 있어 초봄의 추위를 막아내고 있었다. 의자가 20여 개 놓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밀번 1군단장, 아몬드 10군단장 등 중서부 전선을 담당하는 모든 지휘관이 모였다. 한국군에서는 정일권 참모총장, 김백일 1군단장, 유재흥 3군단장, 장도영 6사단장, 그리고 내가 참석했다.
 
  리지웨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38선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공세적인 방어로 거점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38선을 넘어서 최대한 북상해 방어가 유리한 거점을 먼저 차지해야 한다.” 그는 캔자스선(Kansas Line)을 상기시켰다. 서쪽으로 임진강에서 중부의 화천저수지, 동쪽으로는 양양을 잇는 선이다. 아군의 작전통제선이다. 리지웨이는 북진을 멈추겠다는 미국 정가(政街)의 결심을 충실히 따르는 모양새였다.
 
  나는 회의를 마친 뒤 지프에 올랐다. 급히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때 누군가가 “사진 한 장 찍고 가야지”라고 말했다. 리지웨이 사령관을 필두로 지휘관들이 모두 카메라 앞에 섰다. 나도 얼른 뒷줄에 다가가 얼굴만 내밀었다.
 
1950년 12월 19일, 묵호진에서 신병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김백일 소장. 육군 1제군단장인 김 소장은 유엔군의 반격과 함께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 혜산까지 북상했다.
  도열한 지휘관 왼쪽 끝에 김백일(金白一·1917~51) 1군단장이 서 있었다. 그는 나와 함께 만주군의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에서 근무했다. 북간도 용정 출생으로 봉천군관학교를 나와 월남길에 동행한 사람이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많았지만, 형제처럼 지냈다. 그는 “백씨로 개명한다”며 이름자에 백(白)자를 넣을 정도로 나를 각별하게 생각했다.
 
  임진강의 1사단으로 돌아왔다. 그때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김백일 장군이 회의 직후 경비행기 편으로 강릉으로 돌아가다 악천후를 만나 대관령 산중에 추락했다는 것이다. 김 장군의 시신을 5월이 지나서야 발견했다.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도 지인(知人)의 타계소식이 날아들 때면 늘 만감이 교차한다. 34세의 짧은 생애였다.
 
1951년 3월 27일, 여주의 미8군 전진지휘소. 김백일 군단장은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진이다. 앞줄 맨 오른쪽부터 김백일 군단장, 정일권 총참모장, 리지웨이 8군사령관, 아몬드 10군단장, 훼렌바우 7사단장, 소울 3사단장, 유재흥 3군단장, 콜터 8군부사령관, 밀번 미1군단장, 앨런 8군참모장, 뒷줄 오른쪽부터 백선엽 1사단장, 장도영 6사단장, 브래들리 25사단장, 호그 9군단장, 스미스 해병사단장, 파머 1기병사단장, 펠로 미군사고문단장, 브라이언 24사단장.
  그는 전장에서 많은 목숨을 살린 의인(義人)이다. 1950년 12월,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중공군의 벽에 부딪혀 밀려 내려올 때, 그는 동부전선에 있었다. 서부전선에는 육로가 열려 있어 피란민들이 걸어 내려오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은 육로가 거의 막혀 있었다.
 
  오갈 데 없는 피란민 9만여 명이 몰린 곳이 흥남(興南)이었다. 미 10군단은 당초 이들을 배에 태우기를 꺼렸다. 그 가운데 스파이가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를 설득한 사람이 김백일 장군이었다. 그는 아몬드 10군단장과 담판했다. 결국 피란민을 배에 태웠다. 대규모 피란민을 부산까지 안전하게 싣고 온 드라마틱한 철수작전의 주역은 바로 그였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며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말뚝에 '아아, 감격의 38선 돌파'라는 문구를 새겨넣고 있다.
  북진 때 그가 지휘하는 1군단 예하 3사단이 1950년 10월 1일 국군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것도 자랑스러운 업적이다. 한강 이북에서 결딴난 부대를 합칠 때, “기왕이면 1사단과 5사단을 합쳐달라”는 내 부탁을 선선히 들어주던 김백일 작전참모부장이었다.
 
  6척이 넘는 장신(長身)에 활달하고 의기가 넘쳤던 김백일 장군. 힘겨운 전장에서 수많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그 의로움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가 보다. 김 장군의 아들 김동명(예비역 준장, 6군단 참모장 역임) 함경북도지사도 부친의 뒤를 이어 육사(28기)에 들어가 젊음을 조국에 바쳤다.
 
  흥남철수작전은 1951년 12월 12~24일 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의 병력 10만5000여 명과 피란민 9만8000여 명, 그리고 35t의 군수물자를 선박편으로 함경남도 흥남부두에서 부산·거제 등 남쪽으로 옮긴 작전이다. 이를 위해 193척의 선박이 동원됐다.
 
  피란민의 애절한 사연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로 시작하는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모티브가 됐다.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만4000명의 피란민을 거제도로 데려다 주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만들었다. 희생자는 한 명도 없었고, 모두 다섯 명의 아기가 배 안에서 태어났다.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에서 중공군 격퇴, 李龍文 장군
 
 
  이용문(李龍文·1916~1953, 육군 소장 추서) 장군을 한마디로 평하라면 정의감과 인간미를 겸비한 호남아(好男兒)다. 그는 수도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남부지구 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다 김백일 장군처럼 비행기 사고로 전사한 인물이다.
 
  1916년 1월 평양시 대신동에서 출생한 그는 평양고보·일본 육사(50기)를 졸업하고, 기병소위로 임관했다. 일본이 패망할 무렵, 소령으로 남방전선에서 싸웠다고 들었다.
 
  광복 후 뒤늦게 귀국한 이용문 장군은 정부수립 후인 1948년 11월 육군 소령으로 임관했다. 육사 7기 특임장교였다. 임관 한 달 만에 중령으로 진급했고, 초대 기갑단장이 됐다. 1949년 4월 그는 내 후임으로 제2대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왔다.
 
1951년 무렵, 육본 작전교육국장 이임식에서 연설하는 이용문 준장. 오른쪽은 작전교육국 차장 박정희 대령이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육본의 ‘연락 겸 독전(督戰) 요원’으로 선발돼 서울방어선에 투입됐다. 1950년 6월 28일 밤, 3사단 참모장 김종갑(金鍾甲·육군준장, 국방차관 역임) 대령과 성북경찰서에서 500여 명의 장병을 지휘하며 적과 맞섰다. 북한군 전차부대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이용문 대령의 부대는 중과부적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 도하에 실패한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남산으로 들어갔다. 게릴라전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탄약 등 여건이 여의치 않자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그는 홀로 시내로 잠입했다. 적이 점령했던 3개월 동안 서울에 은거(隱居)했다. 그 때문에 그는 서울 수복 후 군 수사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51년 3월 무렵, 9사단이 인민군 10사단을 소탕하자 전리품을 구경하기 위해 정일권 총참모장(왼쪽에서 두번째)이 부대를 방문했다. 박정희 9사단 참모장(오른쪽에서 두번째), 이용문 부사단장(세번째) 모습도 보인다.
  1951년 5월이 되면서, 그는 9사단 부사단장으로 중공군 춘계공세를 맞이하게 된다. 9사단은 3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이 적에게 뚫려 불가피하게 철수했다. 이때 이용문 부사단장은 “무질서하게 후퇴하지 마라”면서 3사단과 9사단을 통합해 선두에서 지휘해 피해를 최소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 직후 이용문 장군 묘소를 서울 수유리로 이장했다. 오른쪽은 장남 이건개 변호사.
  1951년 9월 수도사단장으로 그는 중부전선의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전투’에서 중공군과 맞섰다. 보름간 계속된 전투에서 그가 지휘하는 수도사단은 240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대(大)전과를 올렸다.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이라는 중요한 ‘감제고지(瞰制高地·적 활동 관측이 가능한 고지)’를 확보한 것이다.
 
  이용문 장군은 1952년 10월 전북 남원에 주둔한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당초 미국 유학대상 장성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를 ‘좌천성’으로 보낸 것은 테일러 8군사령관이었다. 그가 부산에서 외신기자들에게 “국군의 탄약공급이 부족하다”고 하자, 테일러 사령관이 격분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 일대의 대대적인 공비토벌 작전을 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용문 장군이 탄 헬기는 1953년 6월 전북 남원 운봉 북방 15km 지점에서 항공작전을 지휘하던 중 악천후를 만나 추락했다. 부인과 아들(李健介 변호사) 하나만을 남겨둔 채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정부는 그를 육군소장으로 추서했고, 그해 7월 17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金鍾五 장군
 
   김종오(金鍾五·1921~1966) 육군참모총장은 전쟁 초기 중동부 전선 춘천-인제를 담당하는 국군 6사단장으로 춘천·홍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국군 최초의 승전보(勝戰譜)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동락리(同樂里) 전투의 대승, 낙동강의 신녕(新寧) 전투, 북진 시 압록강변에 선두로 도착하는 등 적지 않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1952년 10월 9사단장이었던 그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2개 사단을 궤멸시켰다.
 
  1921년 5월 충북 청원에서 출생한 그는 법관이 되기 위해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진학했고,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인생의 진로가 바뀌었다. 귀국 후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그는 1946년 1월 육군참위(소위)로 임관, 건군(建軍)의 주역이 됐다.
 
1963년 6월 1일 신임 김종오 합동참모회의의장(오른쪽)과 민기식 육군참모총장(가운데)의 취임식.
  임관 후 그는 전북 이리(익산)에서 중대장 김백일 부위(중위)를 비롯해 이한림(李翰林), 정래혁(丁來赫)과 함께 3연대 창설에 참여했다. 그는 1949년 1월 1연대장이 됐고, 전쟁 불과 보름 전인 1950년 6월 춘천-인제 지역(90km 방어전면)을 방어하는 6사단을 맡았다.
 
1962년 1월 박정희 대장(오른쪽)과 악수하는 김종오 대장.
  전쟁이 발발하자 사단 작전지역 내 천연 장애물인 소양강과 북한강, 그리고 홍천 말고개 등을 활용해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춘천·홍천 전투 승리는 적의 남진(南進)을 저지하는 동안 국군 주력부대들이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는 6사단은 이후 동락리전투, 수안보전투, 이화령전투 등에서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며 적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했다.
 
  1950년 7월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자 신녕지구에서 북한군 8사단을 재기불능 상태가 될 정도로 타격을 가해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열흘 동안 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백마고지 전투는 단기간 지역 전투로서는 전쟁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치열했다. 무명의 395고지는 ‘백마고지’로, 제9사단은 ‘백마부대’로 불리게 됐다. 1952년 10월 8일 철원 북쪽 백마산 기슭 모습이다.
  10월 26일 최초로 압록강변인 초산(楚山)을 점령했으나, 교통사고를 당해 후송된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무렵인 1952년 5월, 김종오 장군은 중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 철원(鐵原) 지역을 담당하는 9사단장에 임명됐다.
 
  그는 그곳에서 6·25전쟁 기간 중 가장 치열한 ‘진지전’이었던, 백마고지 전투를 치렀다. 1952년 10월 철원 북방 395고지(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9사단은 귀순한 중공군 군관으로부터 “중공군 사단이 백마고지를 공격할 것”이란 첩보를 입수했다.
 
  9사단은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 열흘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며 일곱 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처절한 사투를 펼쳤다. 10월 15일,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고지를 사수함으로써 백마고지 전투의 신화를 창조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사용한 포탄피들.
  백마고지 전투 후 그는 휴전 때까지 육사(陸士)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 초급간부 양성에 주력했다. 휴전 후 1군단장에 임명됐고, 1954년 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교육총본부 총장(현 교육사령관), 합참의장, 참모총장 등을 지냈다.
 
  김종오 장군은 육군참모총장 재직 때인 1962년 1월 국군 사상 다섯 번째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1965년 4월 19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으나, 1년 후인 1966년 3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김종오 장군의 전속부관을 지낸 진종채(陳鍾埰·육군대장 예편, 2군사령관 역임) 장군은 “그분은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다”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빈틈이 없고, 책임감이 강해 모시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고 했다.
 
  북한군 2군단장 김무정은 충주방어선 일전을 앞두고 “6사단을 박살내라. 그것만 잡아 족치면 우린 중부 이남을 확 쓸어버릴 수 있다. 김종오 사단장을 포로로 잡아오라”고 독전했다고 한다.
 
 
  교육훈련의 대가 ‘타이거 송’, 宋堯讚 장군
 
 
  송요찬(宋堯讚·1918~1980, 육군중장 예편) 육군참모총장은 미군들로부터 ‘타이거 송’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교육훈련의 대가(大家)였다.
 
  1918년 2월 충남 청양에서 출생한 그는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 일본군 조장(曺長·하사관)으로 복무했다. 광복 후 그는 최경록(崔慶祿·육군중장 예편) 전 육군참모총장의 도움으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해 1946년 육군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그는 부산 5연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5연대장이었던 나와 처음으로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는 인연을 맺었다. 그는 박병권(朴炳權) 참위와 함께 모병에 전념했다. 1946년 9월 5연대의 일부 병력을 모체로 강릉에 8연대를 창설하게 되자, 8연대 창설을 위해 강릉으로 떠났다.
 
  9연대장에 임명된 후 그는 11연대로부터 제주도 평정작전 임무를 인수받아 수행했다. 1949년 6월 강릉에 주둔하고 있던 6사단 10연대장으로 전보됐다.
 
  10연대장으로 재직할 때 그는 ‘강태무·표무원 대대 집단 월북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육본이나 미 군사고문단의 명령 없이 38선 이북에 위치한 양양에 돌입해 인민유격대 재훈련소 시설 등을 파괴한 ‘양양돌입사건’으로 1949년 7월 연대장에서 해임됐다.
 
1959년 무렵,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왼쪽)이 백선엽 연합참모회의의장을 예방해 환담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그는 1949년 4월 최영희(崔榮喜·육군중장 예편) 전 국방장관(당시 대령) 후임으로 헌병사령관에 임명됐다. 전쟁 발발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그는 전쟁 초기 적의 공세에 밀려 국군이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 낙오병(落伍兵)을 수습해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국군을 재편성하는 데 기여했다.
 
  임시수도이자 부산의 관문인 대구를 북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하자, 육군본부는 송요찬 헌병사령관을 8월 10일부로 대구방위사령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1950년 9월, 그는 백인엽(白仁燁·육군중장 예편, 6군단장 역임) 대령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에 임명돼 안강·경주 부근에서 전투를 치러 1군단이 반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그때 전공으로 9월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가 지휘하는 수도사단은 38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나섰다. 이때부터 수도사단은 회양, 신고산, 원산(10월 1일 점령), 함흥, 흥남을 거쳐 11월에는 소만(蘇滿) 국경 근처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소만 국경을 목전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하게 됐다.
 
1952년 남부지구사령관 시절 송요찬 준장(왼쪽 두 번째).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붙잡은 빨치산을 심문하고 있다.
  1950년 12월, 흥남에서 묵호항으로 상륙한 수도사단은 1951년 1월 강릉을 점령했다. 사단은 동해안에서 주로 전투를 하다가 중공군 5월 공세 때 1군단장인 내 명령에 따라 적의 좌측 돌파구에 해당하는 대관령을 점령, 적의 강릉 진출을 차단했다.
 
  그는 월비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1951년 11월 나와 다시 만났다. 수도사단이 내가 지휘하는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 부대인 ‘백야전전투사령부’에 배속돼 작전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엄격한 통솔로 부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했다. 이듬해인 1952년 그는 재편된 나의 2군단에 다시 배속돼 춘천 북방으로 이동, 수도고지 전투를 수행했다.
 
  1952년 7월 육군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약 2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수도사단의 지휘권을 이용문 준장에게 넘겨주고, 전북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지구경비사령부 초대사령관에 임명됐다. 그의 공비토벌 경력이 높이 평가받았던 것이다.
 
  1952년 10월, 그는 다시 수도사단장으로 와 ‘지형능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휴전 무렵, 도미 유학을 대기하던 중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다시 금성 동남지역을 방어하던 8사단장에 임명됐다. 이때 그의 사단은 금성천 이북까지 진출해 적의 최후공세인 7·13공세를 물리치고, 휴전선의 확정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했다.
 
  그는 1959년 2월 내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4·19 후인 1960년 5월, 14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5·16 후 그는 내각수반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했으나, 1980년 10월 6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54년 무렵, 송요찬 3군단장(앞줄 왼쪽 두번째)이 박정희 준장(송 군단장 오른쪽)의 5사단을 방문했다. 둘째줄 맨오른쪽이 정보참모 차규헌 중령, 왼쪽에서 두번째가 전속부관 한병기 중위. 박정희의 모범적인 차렷 자세가 인상적이다.
  송요찬 장군은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해도 반드시 실천하고, 그 결과에 대해 평가를 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고집불통인 ‘석두(石頭)’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전시에 긴급을 요하는 상황에서 그의 이러한 행동은 자칫 대세를 그르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1951년 5월 중공군 대공세 때 그는 “대관령을 확보하라”는 내 명령을 무시하고 장시간 부대기동을 지연시켰다. 그 때문에 자칫 한국군과 유엔군 전체의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올 뻔했다.
 
  나는 정예부대인 수도사단 1연대장 한신(韓信) 대령을 대관령에 급파하도록 송 사단장에게 지시했으나, 그는 “수도사단 정면이 위급하다”며 거부했다. 나는 허리에 45구경 권총을 차고 지프에 올라 전조등을 켠 채 수도사단사령부로 달렸다.
 
  내가 “귀관은 내 명령에 복종할 거냐, 불복할 거냐”라고 하자,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각하, 죄송합니다.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즉각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다.
 
  30세 안팎의 혈기방장한 장교들이 계급과 보직에 차이가 났으니 통솔상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상급자가 단호하지 않으면 부대 기강이 유지될 수 없었다. 1연대는 이 전투에서 적 1180명을 사살했고, 우리 측은 전사자가 12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육훈련을 통해서만 군인이 필요로 하는 필승의 신념과 책임감, 그리고 인내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장군으로 정평이 나 있다.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그가 사단장으로 있던 광릉의 수도사단을 방문했고, 아이젠하워는 수도사단의 교육훈련 상태를 직접 눈으로 보고 매우 만족해 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63세에 제주훈련소장 수락한 創軍 원로, 李應俊 장군
 
 
  이응준(李應俊·1890∼1985) 장군은 창군(創軍) 원로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그는 대한제국 참령(參領) 출신 이갑(李甲)의 사위이며, 이형근 장군의 장인이다.
 
  그는 7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5세에 안주읍 내 한약방에서 일하던 중 이듬해 러일전쟁으로 귀향했다. 1906년 상경해 한때 독립운동가 노백린(盧伯麟)의 집을 거쳐 이갑의 집에 기거하면서 신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그는 1908년 구한국 무관학교에 편입,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유년학교 예과와 본과를 마치고 일본 육사에 입학해 1914년 26기생으로 졸업했다. 이갑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무남독녀인 정희(正熙)씨와 결혼했다.
 
1954년 라이딩스 미 군사고문단장(왼쪽)이 정일권 참모총장과 함께 제주도1훈련소를 방문, 이응준 훈련소장(가운데)으로부터 훈련소 현황을 듣고 있다.
  일본군에 배속돼 1941년 대좌로 원산항 수송업무를 담당하다 광복을 맞았다. 1946년 미군정 국방부 군사고문으로 임명돼 광복군 출신 유동열(柳東悅) 장군을 통위부장으로 추천하는 등 한국군 장교 110명에 대한 인사 조언을 미 군정 아고 대령에게 했다. 말하자면 국방경비대의 산파역(産婆役)이었다.
 
용산 관저에서 말을 탄 이응준 일본군 소좌.
  1948년 정부수립 후 그는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초대 육군 총참모장에 취임했다. 60세인 1949년 2월에는 소장이 됐다. 그해 5월 ‘강태무·표무원 월북사건’이 나자 총참모장을 사임하고 3사단장으로 향로봉 지역에서 공비토벌을 했다.
 
  6·25가 발발했을 때 그는 5사단장이었다. 그는 사단을 인솔해 6월 27일 미아리전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 4사단의 남진(南進)을 저지했다. 그는 그해 11월 군문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맥아더가 필리핀 전선에서 화려하게 현역으로 복귀한 것처럼, 1952년 4월 63세의 나이에 육군대학 총장으로 복귀했다. 내가 참모총장 시절, 이 장군에게 “제주 1훈련소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환갑이 넘은 이 장군은 나를 보고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면 늙은 몸이나마 헌신해야지”라며 흔쾌히 수락했다.
 
이응준 장군과 망중한을 보내는 부인 이정희 여사(왼쪽). 이 여사는 구한국 육군 참령을 지낸 이갑 선생의 딸이다.
  나는 이 장군의 예우를 위해 진급을 상신해 훈련소장 부임과 동시에 중장으로 진급토록 했다. 그는 1954년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하고, 1955년 66세의 나이로 예편했다. 한국군 현역 장성 가운데 최고령 기록을 세웠다.
 
 
  영천전투의 영웅, 李成佳 장군
 
 
  이성가(李成佳·1922~1975) 장군 하면 ‘영천전투’가 떠오른다. 그는 5군단장을 역임한 전형적 야전군인이다. 전쟁 발발 당시 강릉-동해안을 담당하는 8사단장으로 전투를 치렀다. 그는 낙동강전선에서 북진까지 8사단장으로 내리 부대를 지휘했다.
 
  특히 전쟁 초기 강릉-주문진 전투에서 8사단 장병들을 잃지 않아 대관령에서 6사단과 함께 지연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그의 8사단은 낙동강 방어선의 영천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의 주력을 궤멸시켜 대구와 경주를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는 김일성의 기도(企圖)를 좌절시켰다. 그는 7사단장으로 백석산전투에서도 전공을 세웠다.
 
  1922년 만주 퉁화(通化)에서 출생한 그는 신흥무관학교 칠도구분교장(七道溝分校長)을 지낸 부친 이관석(李寬錫)의 유언에 따라 중국 남경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중국 왕정위(王精衛) 군대에 들어갔다.
 
  그는 중국군 소령으로 진급, 12군사령부 인사참모를 지냈다. 광복 무렵 중국 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 북경책임자 진영륜 소장 권유로 그 밑에서 정보기관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6년 6월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부위(중위)로 임관했다. 1연대 창설요원, 4연대장을 지냈고,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하고 1949년 10월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공비토벌을 했다. 이형근 장군 후임으로 8사단장이 됐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38선을 방어하는 10연대에 적을 저지하도록 하고, 삼척에 주둔하고 있는 21연대를 강릉으로 이동시켜 주(主)저항선인 연곡천-사천선에서 ‘천연장애물’인 하천을 이용해 북한군을 저지했다. 그는 강릉지구 전투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교두보로 격전지 중의 하나였던 영천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경북 영천시 영천 호국용사묘지에 건립한 6·25 ‘영천대첩비’.
  육본은 이성가 대령에게 “원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단양에서 남한강 남안(南岸)에 2개 연대를 배치해 북한군 8사단의 남진을 6일간 막았다.
 
  어쩔 수 없게 된 북한군은 충주방면 12사단을 이 지역에 투입하게 됐고, 아군이 서부전선에서 저지선을 만들 시간적 여유를 벌어주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자, 그의 사단은 1950년 9월 영천지역을 통해 대구와 경주로 진출하는 북한군 15사단의 주력을 궤멸시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반격작전 때는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는 2군단에 배속돼 희천-묘향산 지역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물을 삼키며 38선으로 철수했다.
 
  7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강원도 양구지역에서 중공군과 백석산,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접전을 벌여 승리를 맛봤다. 휴전 이후 1군사령부 부사령관, 3군단장, 5군단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육군대학 총장을 거쳐 1962년 3월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이나 큰 전공에 비해 관운(官運)은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1975년 3월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연전’으로 반격의 기회 만든 ‘오성장군’, 金弘壹 장군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은 사흘이란 기간을 지체했다. 6월 25일 아침 거침없이 밀고 내려왔던 그 기세가 크게 꺾인 것은 물론이다. 추측으로는 병사를 잡아먹는 도시병(都市病)에 걸린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부대가 도시에 오래 머물면 전투력을 상실하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전선의 살벌함과 피곤함이 싫어지고 평안함에 묻히면 전투력이 크게 꺾인다. 북한군이 그랬다.
 
  전쟁이 끝난 뒤 김일성은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렀던 사흘을 반성하는 발언을 했다. 전략적 패착이었던 것이다. 북한의 판단실수도 있었지만 아군 입장에서 보면 6·25전쟁 중 ‘지연전(遲延戰)’의 개념을 확실하게 학습한 기간이었다.
 
  그 주인공이 김홍일(金弘壹·1898~1980) 소장이었다. 그는 중국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인 국부군(國府軍)에서 활동했던 분이다. 김 장군은 국부군에서 별을 두 개까지 달았다. 외국인으로서 그 자리까지 오른 인물은 드물다. 그만큼 전쟁 국면을 크게 아우르는 능력을 갖춘 분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평북 용암포 출신이다. 일제 시기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오산중학교를 수석으로 마친 뒤 중국 귀주(貴州)의 군사학교 격인 강무당(講武堂)에서 수학했다. 국부군 소장으로 있다가 광복을 맞아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북지역 한국교민사무처장을 지냈다.
 
  조만식 선생은 생전에 가끔 “중국 군대에는 왕일서(王逸曙)라는 유명한 조선 장수가 있다”고 말했다. 바로 김홍일 장군이었다. 김 장군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왕일서’라는 중국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덕망과 리더십이 뛰어나 따르는 군대 후배들이 많았다.
 
1950년 7월, 충북 진천지구 방어전에서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가운데)이 1군단장 김홍일 소장(맨왼쪽)에게 전황을 보고하고 있다.
  김 장군은 6·25 초기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맡았다. 남쪽으로 내려간 육군본부를 대신해 적과 얼굴을 맞대고 시흥과 영등포 지역의 일선 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했다. 도시병에 걸려 주춤하고 있는 북한군과 영등포 쪽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맞붙은 것이다.
 
  김 장군은 중국에서 국부군으로 활동할 때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과 싸운 경험이 풍부했다. 그때는 일본군이 우세한 전력으로 중국 군대를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국부군은 그에 밀려 후퇴하면서도 시간을 끄는 지연전을 펼쳤다. 시흥지구 사령관을 맡은 김 장군은 그때의 경험을 발휘했다.
 
  적에 밀려 뿔뿔이 흩어져 내려오는 병력을 수습하고 이를 재편성하여 전선에 내보내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우리 1사단도 그중 하나였다. 김 장군은 나를 보자 “잘 왔다”며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의정부와 동두천에서 밀린 병력, 육사 생도대, 임진강 북쪽에서 철수한 1사단이 그의 수습 능력에 힘입어 다시 전열을 갖출 수 있었다.
 
  김홍일 장군의 지휘 아래 재편성된 부대는 일선으로 다시 나갔다. 그 때문에 시흥지역에서 적은 5~6일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리 군이 부산과 낙동강 등 후방에서 전선으로 내보낼 병력과 무기를 확보하는 시간을 벌게 해 주었다.
 
  김 장군은 한강선 방어에 이어 지연전 상황에서 수도사단, 3사단, 8사단으로 신설된 1군단장 임무를 맡았다. 우리 1사단도 조치원에서 1군단 휘하로 들어가 한동안 김 장군의 지휘를 받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전쟁 초기 서울이 함락된 상황에서 그가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맡아 한강선을 방어하고, 1군단을 지휘해 7월 중순까지 지연전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김 장군은 훗날 부산 동래의 육군종합학교 초대교장으로 임명됐다. 여기서 그는 전쟁기간 중 각급 부대에서 훌륭하게 전투를 치러낸 ‘갑종장교’들을 대거 배출했다. 김 장군은 1951년 3월 전역한 뒤 당시 ‘중화민국’(오늘날 대만·대한민국 수교국) 대사로 나갔다.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개전초기 전쟁을 지도한 丁一權 장군
 
 
  정일권(丁一權·1917~1994) 전 육군참모총장은 6·25전쟁이 발발한 후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채병덕(蔡秉德·육군 중장 추서, 육군참모총장 역임) 장군 후임으로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개전 초기 전쟁을 지도했다.
 
  그는 1950년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계엄사령관으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는 1917년 11월 21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했다. 만주로 건너가 용정 광명중학과정을 고학으로 마친 그는 만주 봉천군관학교(5기)를 나와 일본 육사(55기)에 유학한 수재다. 봉천군관학교 재학 시절, 미남형의 그가 제복을 입고 나타나자 많은 남학생이 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그는 소위로 임관돼 만주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던 중 광복을 보게 됐다.
 
  일본이 패망하자 중국 동북지구의 한교보안대(韓僑保安隊) 편성을 주도하며 교민보호를 위해 노력했으나, 신경(新京) 주둔 소련군에 구류돼 시베리아로 연행돼 가던 중 열차에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 평양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1951년 2월, 동부전선 시찰에 나선 유엔군 수뇌부. 왼쪽부터 리지웨이 사령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맥아더 원수.
  광복된 조국의 국군창군 대열에 참여해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를 가장 먼저 졸업하고 육군정위(대위, 군번 5번)로 임관, 제1연대 창설중대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제4연대장에 임명됐다. 그는 국방경비대 참모장, 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을 역임하고 1949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장군 진급 후, 그는 육군본부 참모부장과 참모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여순반란사건 잔당에 대한 소탕작전을 지휘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1950년 전쟁 발발 직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군사시설을 시찰하고, 귀국하던 도중 하와이에서 전쟁발발 소식을 들었다.
 
  정일권 장군이 귀국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임명과 동시에 육군소장으로 진급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권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채병덕 참모총장을 해임한 것이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수원에 와서 전황을 보고받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지휘부 교체를 건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50년 서울 탈환후 한강변에서 정일권 참모총장(왼쪽)과 작전을 숙의하고 있는 백선엽 1사단장.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워커 8군사령관과 긴밀한 협동작전을 유지해 전황의 열세를 낙동강방어선에서 극복하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압록강변까지 선봉부대를 진출시키는 지휘력을 발휘했다.
 
  중공군 개입으로 상황이 급변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북한지역으로부터 철수를 단행, 38선에서 전선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51년 2월, 국군 최초로 육군 중장에 진급한 그는 1951년 중공군의 두 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물리치고 전선이 고착되기 시작하던 1951년 7월 미 지휘참모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미 지휘참모대학을 수료하고 귀국한 그는 3성장군으로 전무후무하게도 ‘2사단장’에 보직돼 중동부 전선의 요충인 ‘저격능선 전투’를 지휘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17차례의 백병전을 치르며 1만여 명의 적을 살상하고 저격능선을 장악했다.
 
1951년 3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된 뒤 정일권 참모총장(왼쪽)과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가운데)이 반격작전을 숙의하고 있다.
  육군참모총장을 거친 정일권 중장을 2사단장에 보임하자, 정 장군은 크게 실망해 내게 “다른 일자리를 찾아봐야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난 “사단장과 군단장 경험이 없는 정 선배를 위한 배려이니 후배들을 위해 모범을 보여달라”고 간청했다.
 
  휴전 후인 1954년 2월, 이형근(李亨根) 장군과 함께 육군 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육군참모총장(8대)에 다시 임명됐다. 그는 육군참모총장으로 휴전 후 육군 전력증강의 중책을 담당하고 대미(對美) 군사외교에 진력했다.
 
  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난 후 그는 연합참모본부총장(합참의장)을 거쳐 1957년 5월 11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고 육군대장으로 전역했다.
 
  정일권 장군은 깔끔한 용모와 화려한 언변으로 인해 후배들이 가장 본받고 싶은 장군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항상 따뜻한 미소로 사람을 맞이하고 대하는 ‘신사’였다.
 
  정일권 장군은 전쟁 초기까지 내 상관이자 선배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경쟁관계를 뛰어넘어 계급과 직책의 역전현상을 몸소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이렇게 평가했다.
 
1952년 말경, 화천 2군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2군단장, 이승만 대통령, 백선엽 육군참모총장, 테일러 미8군사령관.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중추요직을 두루 거친 군력(軍歷)은 그대로 장군의 탁월한 장재(將才)를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백 장군은 선후배의 서열에 대한 예절이 근엄하여 서로 노경(老境)에 접어든 지금(1985년)도 나를 언제나 형님으로 대해 주곤 합니다. 내가 자기보다 3년 먼저 태어나서입니다. 그리고 나의 흠을 따뜻이 감싸주는 참으로 고마운 성우(星友)입니다.”
 
  1950년 7월 27일, 정일권 총장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함께 상주의 1사단사령부를 찾아와 “장군 승진을 축하한다”며 악수를 청하더니 별 하나의 준장 계급장을 전투복 옷깃에 달아주었다. 그때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새롭다.
 
 
  군번 1번·351고지전투의 영웅, 李亨根 장군
 
   이형근(李亨根·1920~2002) 육군참모총장은 1950년대 대한민국 ‘3대장(大將) 시대’를 열게 한 국군 주역의 한 사람이다. 이 총장은 1920년 2월 충남 공주에서 미국계 상사(商社)를 운영하던 개화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하 경성제일고보(경기고)에 입학했으나 졸업은 청주고보에서 했다.
 
  그는 청주고등보통학교에서 일본 육사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박정희 대통령보다 한 기수 빠른 육사 56기로 졸업했다. 일본 육사 졸업 후, 일본군 야포병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그는 대전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1945년 11월 장인인 이응준 초대 육군참모총장의 권유를 받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다. 군번 1번을 받고 육군 정위(대위)로 임관했다. 그의 이름 석 자를 사람들은 ‘군번 1번’의 ‘보통명사’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1946년 2월, 그는 충남 대전의 2연대 창설요원으로 내려갔고, 두 달 후 국방경비사관학교 초대교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9월 그는 다시 2연대장으로 복귀했고, 한 달도 채 안돼 초대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겸 군기사령관(헌병사령관)이 됐다.
 
1951년 11월, 판문점 휴전회담 대표시절의 이형근 장군.
  1948년 2월, 그는 통위부 초대 참모총장에 임명됐다. 얼마 후 미 조지아주에 있는 미 육군보병학교(포트 베닝)의 고등군사반(OAC) 과정을 위해 도미(渡美)했다. 교육을 받던 중 그는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주미 한국대사관 초대 무관을 지냈고, 그때 주미한국대사는 장면(張勉) 박사였다.
 
  1949년 6월 귀국길에 오른 그는 전쟁 발발 불과 닷새 전인 6월 20일 대전의 2사단장으로 발령났다. 이형근 장군은 예하부대를 이끌고 의정부 전선에 투입됐으나 역부족으로 물러났다. 그는 이천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돼 군경 3000명의 혼성연대를 지휘,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켰다.
 
  이형근 장군은 장인이 사령관으로 있는 전남편성관구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갔다가, 육군중앙훈련본부장을 거쳐 1950년 10월 3군단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1952년 8월 휴전회담이 재개되자 내 후임 한국 측 대표로 참여했고, 1952년 11월 내 후임으로 1군단장에 임명됐다.
 
  1군단장 시절, 그는 국군증강계획에 따라 3개 전투사단 창설에 나섰다. 특히 수복지구에 대한 군정(軍政)을 담당했다.
 
  1952년 7월 동부전선 최북단 돌출고지인 ‘351고지’에서 북한군 1군단·3군단과 맞서 고지를 사수했다. 적 445명을 사살하고 포로 5명을 잡았다.
 
대장 시대을 열었던 주역 3인방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이형근 합동참모회의 의장,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1군사령관.
  6·25전쟁 발발 후 2사단장, 이천지구사령관, 3군단장, 1군단장 등 전투지휘관을 역임했으나, 1군단장을 제외하고는 오래 지휘관으로 있지 않았다. 건군과정에서 경비대 총사령관과 통위부 참모총장 등 그의 화려한 경력과는 비교된다.
 
  1954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장군과 함께 육군대장으로 그를 진급시켰다. 진급한 그는 초대 연합참모본부총장(합참의장)에 임명됐다. 그는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후임으로 활동하다 1958년 8월 12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다. 참모총장 이임사에서 “군인은 절대 정치와 정치인의 사병(私兵)이 돼선 안 된다”고 한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통영상륙작전과 ‘귀신 잡는 해병 신화’ 만든 金聖恩 제독
 
 
  한국군 해병대의 대부(代父)인 신현준(申鉉俊) 장군과 함께 6·25전쟁을 통해 해병대를 키운 이를 꼽으라면 자신 있게 김성은(金聖恩·1924~2009, 해병 중장 예편) 제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병대는 일천(日淺)한 역사에도 불구, ‘귀신 잡는 해병’, ‘무적 해병’으로 불렸다. 한국 해병대는 1948년 여순반란사건 이후 상륙작전의 필요성에 따라 창설됐다. 신현준 당시 중령이 “상륙군 없이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할 수 없다”고 보고하자, 손원일(孫元一) 해군참모총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신현준 대령을 사령관으로 하고, 김성은 중령을 참모장으로 간부진을 구성해 진해(鎭海)에서 창설됐다. 창설 직후 해병대는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됐다. 김성은 중령은 토벌지휘관이 돼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일대에서 출몰하는 공비들을 소탕했다.
 
  1949년 12월,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한 해병대는 한라산 일대의 공비를 토벌했다. 전쟁 발발 당시 해병대가 제주도에 주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해병대는 2개 부대(제주읍·모슬포) 1166명으로 편성된 연대 규모였다.
 
2001년 6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국가보안법 개정반대 및 국군포로 송환을 촉구하며 도보행진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김성은, 이상훈, 유재흥 전 국방장관, 정승화 전 육군 참모총장.
  해병대는 전쟁을 거치며 장족의 발전을 했다. 신현준 제독이 초석(礎石)을 놓았다면, 김성은 제독은 전투를 통해 ‘해병혼(海兵魂)’을 불어넣었다. 그가 29세에 장군으로 진급하고, 39세에 최연소 국방장관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6·25전쟁은 해병대를 무적의 부대로 각인시켰다. 개전 초기 해병대는 육군에 배속돼 지연작전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고길훈(高吉勳) 해병소장 부대가 수행하다, 나중에는 김성은 부대가 고길훈 부대를 통합했다. 고길훈 부대는 7월 22일 여수에 상륙한 김성은 중령 부대에 지휘권을 인계하고 부대이름도 ‘김성은 부대’로 개칭했다. 김성은 부대는 낙동강 방어작전에 참전했다.
 
해군창설 50주년을 기념하는 리셉션이 1995년 11월 11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해군회관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이상무 해병대사령관, 김성은 전 해군참모총장, 안병태 해군참모총장, 홍은혜 고 손원일 제독의 부인.
  김성은 부대는 지연작전을 할 때 민기식(閔耭植·육군대장 예편, 육군참모총장 역임) 대령이 지휘하는 ‘민부대’에 배속돼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에서 싸웠고, 그 이후 마이켈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미 27연대에 배속돼 진주방어에 가담했다.
 
  해병대 위상을 결정적으로 높인 전투는 ‘통영상륙작전’이다. 북한군 7사단이 전략요충지인 마산과 진해를 해상봉쇄하기 위해 통영을 점령하자, 해군본부는 탈환임무를 김성은 부대에 맡겼다.
 
해병 제1여단이 실시한 은성작전을 참관하는 박정희 대통령(왼쪽 담배 물고 있는 사람)과 김성은 당시 국방장관.
  김성은 부대는 1950년 8월 17일, 통영해안에 한국 최초의 상륙작전을 감행해 통영을 탈환했다.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조기에 확보하면서 낙동강 서쪽의 위협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었다. 김성은 부대의 신속한 작전을 본 외국기자들은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로 해병은 일약 ‘귀신 잡는 해병’이란 명성을 얻었다.
 
  해병대는 미군의 인정을 받게 됐다.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상륙전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 성우회장으로 있던 그가 전작권 전환 반대 집회에 병든 몸을 이끌고 참여하는 것을 보고 ‘군인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구나’라고 느꼈다. 우리 해병을 세계 최고 수준의 해병으로 만든 그의 공로는 해병사(海兵史)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한국 海軍의 아버지, 孫元一 제독
 
 
  사람들은 손원일(孫元一·1909~1980) 전 국방장관을 ‘한국 해군의 아버지’라고 한다. 해군에서도 그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는 모든 여건이 불비(不備)한 상황을 뚫고 바다 사나이들을 규합해 해군의 초석을 다지고 성장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해군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해군 창설에 일생을 바친 ‘바다의 신사(紳士)’였다. 경술국치 한 해 전인 1909년 평남 강서(江西)에서 태어난 손원일 제독은 상해 임정 의정원의장(국회의장)을 지낸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가 요시찰 인물로 감시하는 독립운동가를 아버지로 둔 손원일 가족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길림 문관중을 졸업한 손 제독은 김일성 집안과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김일성은 그의 동생 손원태가 다닌 육문중학교를 다녔고, 부친 손정도는 자신의 친구인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이 죽자 그의 아들 김일성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한다. 김일성과 그의 동생은 이런 연유로 같은 중학에 다녔고, 친한 친구로 오랜 인연을 이어갔다.
 
지난 2월 26일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여사가 서울 영등포구 자택에서 남편 손원일 제독과 자신의 옛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손원일은 중국 남경의 중앙대 농학원 항해과에 입학하면서 바다와 인연을 맺는다. 그가 훗날 술회에서 항해과를 지망한 이유를 “바다에서 조국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지금 나라를 잃었지만 언젠가 되찾는 날엔 바다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항해과 수료 후 그는 1만5000t급 독일 상선 람세스호 선원으로 지중해·대서양·인도양·태평양을 누볐다. 그는 그때 영어·독일어·일어·중국어 등 5개 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그가 오대양을 누빌 때인 1930년 길림의 한 병원에서 가족의 임종(臨終)도 없이 쓸쓸하게 49세로 생을 마감했다. 손원일도 부친 장례를 위해 귀국하다 일경(日警)에 붙들려 고향인 강서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1년 출감했다.
 
  그는 광복 후 해군 창설에 매진했다. ‘조국의 광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 있는 동지들을 구함.’
 
  1945년 8월 21일 손원일은 민병증과 함께 서울 거리에 이런 벽보를 붙이다 정긍모(鄭兢謨·해군참모총장 역임)를 만났다. 정긍모도 비슷한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있었다.
 
  그날 한갑수가 합류하면서 이들은 의기투합, ‘해사대(海事隊)’를 결성했다. 그는 해사대를 조선해사보국단과 통합해 ‘조선해사협회’로 개칭한 뒤, 1945년 11월 11일 11시 서울 관훈동 옛 표훈전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립했다. 해방병단은 장차 한국이 독립하면 해군으로 개편한다는 전제로 창설한 공식 군사조직이었다.
 
  해군은 신사여야 한다고 믿는 손원일은 한자 ‘十一’을 세로로 쓰면 ‘士(선비 사)’자가 된다는 점에 착안, 창설일을 ‘士’자 2개가 계속되는 11월 11일로 정했다.
 
1950년 9월 인천에 상륙하기 직전 미 수송선 함교에서 상륙 명령을 기다리는 손원일 제독(왼쪽).
  이 조직을 미 군정청은 ‘해안경비대(Coast Guard)’라고 불렀고,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모태가 됐다. 군대조직을 갖춘 후 손원일 제독은 해군 간부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 해군병학교(海軍兵學校)를 1946년 설립해 1기생을 모집했다. 생도들을 가르칠 선생이 없자, 그는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출신들을 초빙해 가르쳤다.
 
  해원양성소를 수석 졸업한 이성호(李成浩) 전 해군참모총장도 이때 들어왔다. 육군 소위로 임관한 김성은 제독이 해군에 온 것도 손원일 제독의 권유에 의해서다. 해군은 손 제독의 ‘발품’ 덕에 면모를 일신해 나갔다.
 
  건국 후 손원일 제독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돼 장병들의 성금을 모아 전함(戰艦) 백두산호(600t급) 등 4척을 구입했고, 상륙작전에 대비해 해병대를 창설했다. 특히 그는 전쟁 초기 북한군 유격부대의 상륙을 막은 ‘옥계해전’을 비롯해 PC 701함의 해전 승리로 동서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만일 6·25전쟁에서 우리 해군과 미 7함대 소속 제5순양함대가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6·25전쟁 때 해군과 해병대가 인천상륙·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한 것은 모두 그의 공로다. 그는 휴전회담이 진행 중일 때 해군참모총장으로 이종찬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문산 평화촌을 방문해 나를 격려해 주셨다.
 
  손 제독은 휴전 한 달 전인 1953년 6월 국방장관에 임명돼 전후 군의 전력증강에 기여했다. 2006년 1800t급 214급잠수함 1번함이 취역했다. 그 1번함 이름이 ‘손원일함’이었다.
 
  지난해는 손 제독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해군은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해군은 부인 홍은혜(93) 여사에게 작은 그랜드피아노 모양의 공로패를 선물했다. 그 선물에선 홍 여사가 작곡한 해군가 ‘바다로 가자’가 흘러나온다고 한다.
 
 
  전투에만 전념한 참군인, 劉載興 장군
 
   한국군 장성 가운데 군 경력이 가장 화려하면서도 육군참모총장이 되지 못한 분이 한 사람 있다. 그는 유재흥(劉載興·1921~) 전 국방장관이다.
 
  14년간의 군 생활 중 사단장·군단장 3차례, 교육사령관, 참모차장 4차례, 군사령관, 합참의장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유 장군은 그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육군참모총장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경쟁상대들이 모두 대장으로 진급하고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거친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그의 인품·능력·경력이 뒤지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1921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육사(55기)를 졸업하고 1941년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구마모토 박격포연대 대대장으로 있다가 광복을 맞았다고 한다. 그는 이응준 장군의 권고에 따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군번 3번)하고, 대위로 임관했다.
 
1950년 8월, 다부동전투에서 미 29연대 지휘소를 방문한 유재흥 1군단 부군단장(오른쪽 두번째).옆에 철모를 쓴 이는 프리먼 연대장(NATO 사령관 역임), 뒤편에 영국군 모자를 쓴 사람은 윈스턴 처칠 수상의 아들 랜돌프 처칠 기자.
  조선경비대총사령부 보급관(군수국장)으로 출발이 좋았다. 유재흥 장군은 여단 참모장, 여단장, 사단장(6·2·7사단),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을 거치며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28세의 나이에 장군이 됐다.
 
  전쟁 때 그는 7사단장, 1군단 부군단장, 2군단장(2차례), 참모차장(3차례), 3군단장으로 전쟁 초기부터 낙동강 방어작전과 북진, 그리고 청천강 전투, 1·4후퇴·유엔군 재북진·고지쟁탈전·휴전까지 한 번도 전장을 떠나본 적이 없는,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전투지휘관이었다.
 
6·25전쟁 기간중 만난 백선엽 장군과 유재흥 장군.
  그는 전쟁 초기 적의 주공(主攻)이 겨냥하고 있던 의정부-포천 축선의 수도권 방위를 책임진 7사단장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때 전차·자주포로 무장한 적 정예 2개 사단(3·4사단)과 맞서 의정부-창동-미아리 전선에서 7사단장 겸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전력투구했다. 그러나 화력부족으로 한강 이남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국군이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자, 그는 적이 노리는 동작동-대방동 방어책임을 맡은 혼성 7사단장으로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내, 미군이 증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1950년 7월, 스미스부대를 필두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증원되면서 한미 간에 ‘지연전략’이 채택됐다. 이때 책임구역이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가도(京釜街道)를 중심으로 서쪽은 미군(美軍), 동쪽은 한국군이 전담하면서 산악지역에서 작전 지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1군단을 창설했다.
 
1950년 6월 18일 미국무부 고문 덜레스가 38선 상황을 시찰하고 있다. 유재흥 7사단장이 손을 들어 설명하고 있고, 신성모 국방장관이 쌍안경을 들고 서 있다.
  유재흥 준장은 1950년 7월 중순, 새로 창설된 2군단장이 됐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1사단·6사단을 지휘, 다부동·영천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나와 김종오 6사단장은 유재흥 군단장의 요청으로 1개 연대씩을 빼내 영천탈환을 위해 지원했던 적이 있다. 나는 11연대 김동빈 대령을 차출해 보냈으나, 미군 전차지원을 받지 못해 연일 악전고투를 한 적이 있다.
 
  북진 때 그는 2군단장으로 3개 사단(6·7·8사단)을 지휘해 미군보다 먼저 압록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에게 시련도 주었다.
 
  중공군은 1·2차 공세에 나서면서 미군 부대를 피해 화력(火力)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2군단을 집중 타격한 것이다. 그 여파로 2군단이 해체되고 그는 참모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0년 6월, 휴전선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오른쪽)에게 유재흥 1군사령관이 기념품을 전달하고 있다.
  1951년 1·4후퇴 직후 다시 중동부 전선을 맡은 3군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군단장 초기 유엔군의 재진격에 맞춰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1951년 4월 서울을 점령하려는 ‘4월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국군 3·9사단을 지휘하는 3군단이 그들의 공격목표가 됐다. 이른바 ‘현리전투’의 서막이었다. 이때 국군 3군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밴 플리트 8군사령관은 군단을 해체했다. 어떠한 지휘관이라도 당시 중공군의 집중적 공세를 국군의 부족한 화력으로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52년 7월 내가 2군단장에서 참모총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유재흥 장군은 다시 2군단장으로 금성돌출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1953년 초 군단장을 정일권 중장에게 물려준 그는 참모차장에 복귀해 휴전을 맞이했다. 6·25전쟁 37개월 동안 그는 야전지휘관으로 전장을 누비며 전투에만 전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그를 국방장관에 임명하며, “장관께서는 4성장군이 못 되시고 군을 떠나셨다”며 “이제 장관 밑에 4성장군이 넷이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시라”고 위로했다. 그는 전장에서 적을 전율케 한 용장(勇將)이면서도, 부하들에게는 특유의 친화력을 갖춘 온화한 미소로 오래 기억되고 있다. 덕장의 면모를 두루 갖춘 분이다.
 
 
  한국군 최고의 智將, 金點坤 장군
 
 
  중국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개국공신으로 장자방(張子房)이 있다. 그는 지모(智謀)가 뛰어난 인물이다. 김점곤(金點坤·1923~) 장군은 내 밑에서 장자방처럼 뛰어난 지휘관과 참모로서 6·25전쟁을 훌륭하게 치러냈다.
 
  김점곤 장군은 내게는 ‘바늘과 실’ 같은 존재였다. 내가 정보국장을 할 때 그는 전투정보과장이었고, 14연대 반란토벌사령부 참모장이었을 때 보좌관, 1사단장일 때 연대장, 백야사토벌사령관을 할 때 참모장을 했다.
 
  그뿐 아니다. 그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으로 가자 육본으로 와 인사국장, 내가 원주의 1군사령관으로 가면 참모장으로 따라왔다. 합참의장일 때는 합참본부장으로 나의 분신(分身)처럼 행동했다.
 
  1923년 4월 15일 전남 광주에서 출생한 그는 광복 후 국방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1기생으로 입교했고, 이듬해인 1946년 6월 육군참위(소위)로 임관했다.
 
  그 후 그는 미 군정 시절 통위부장(국방장관) 군사특별보좌관, 8연대 중대장, 육사 근무를 마치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여순반란사건 진압 후, 5여단에 근무하며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정보국 차장으로 있을 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10월 20일, 평양탈환에 성공한 후 환호하고 있는 김점곤 12연대장(철모 쓴 이).
  전쟁 초기 광복군 출신으로 53세의 고령인 전성호(全盛鎬) 12연대장(대령)이 부상하자, 나의 요청으로 12연대장이 되면서 인연을 맺었다. 그는 낙동강 방어작전, 북진작전, 중공군 개입에 따른 37도선으로의 후퇴, 1951년 유엔군이 다시 반격할 때 12연대장으로 활약했다. 그와의 끈끈한 인연의 시작이다.
 
  그는 전투 때마다 탁월한 군사학적 지식을 활용해 작전을 수립해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낙동강 방어전 때 유학산(遊鶴山)과 수암산(水岩山) 전투로 이름을 떨쳤다. 평양탈환 작전 때는 1사단의 주공연대로 공격 선봉에 나서 그로든 중령의 미 전차대대와 함께 평양탈환의 선봉에 섰다.
 
  그는 한국군 지휘관 중에서 미군부대와의 연합작전, 특히 ‘연결작전’을 가장 많이 경험했던 지휘관이다. 숙천·순천 공수작전, 문산탈환 공정작전 때 미군 공정부대(空挺部隊)와 연결작전을 지휘했다. 그만큼 연합작전에 능했고, 나와 미군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조선일보>와 공동주최로 열린 ‘한-미 안보토론회’에서 주제발표하는 김점곤 평화연구원장.
  중공군 개입 이후인 1951년 이후부터 그는 1사단의 최선임 연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동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던 최영희(崔榮喜) 대령과 김동빈(金東斌) 대령은 각각 사단장(최영희), 사단참모장(김동빈)으로 영전했고, 전쟁 초기 연대장은 12연대장 김점곤뿐이었다.
 
  1951년 중공군 4월 대공세 때 내 후임 사단장으로 갓 전입해 온 강문봉(姜文奉·육군중장 예편, 군사령관 역임) 장군이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김점곤 대령 같은 연대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52년 10월, 마침내 그는 육군 준장으로 별을 달고, 9사단장으로 갔다. 이때 육군참모총장은 나였다. 그의 진급은 능력과 전공(戰功)을 고려할 때 빠른 것이 아니었다. 그 뒤 육본 인사국장을 거쳐 6사단장으로 있다가 휴전을 맞았다.
 
  휴전 후 그는 내가 1군사령관으로 있던 원주에 참모장으로 왔고, 보병학교장을 거쳐 헌병사령관, 연합본부장, 국방차관보를 역임했다. 1962년 3월, 16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육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그는 ‘학자’(경희대 정외과 교수)로 변신했다. 그후 국제정치와 군사학 분야에서 뛰어난 교수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한국이 낳은 대표적 인텔리 군인이었다. 전쟁터에서나 전역 후 학문의 세계에서나 항상 최선을 다하는 건실함을 보여왔다. 다부동(多富洞) 전투에서 김 장군은 갓 전선에 투입된 신병(新兵)들을 곧장 전투에 투입하는 것에 무척이나 신중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배경 때문인지,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했다.
 
 
  한국군 최고의 연대장, 林富澤 장군
 
   6·25전쟁 초기 가장 먼저 승전보를 전한 지휘관은 누굴까.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연대장은 임부택(林富澤·1919~2001)이다.
 
  그는 전쟁 초기 국군이 가장 어려울 때, 한국군에 최초의 승전보를 안겨줬다. 그의 6사단 7연대는 ‘패배를 모르는 부대’였다.
 
  그가 개전 초기부터 지휘했던 7연대는 동락리(同樂里) 전투에서 적 1개 연대를 섬멸해 연대장을 비롯한 전 연대원이 1계급 특진했다. 계속된 패전과 후퇴로 지쳐 있던 국군과 국민에게 ‘단비’ 같은 승전 소식이었다.
 
  그는 육사1기 동기생 가운데 가장 빨리 대령 계급장을 달았다. 전투를 통해 동락리 전투가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해 나갔다. 북진할 때는 국군과 유엔군 중 가장 먼저 압록강에 진출한 연대장으로 유명하다.
 
  1919년 9월 전남 나주에서 출생한 그는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했다. 그 후 태릉(육사 자리)의 지원병훈련소에서 교관으로 있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광복 후 그는 군사영어학교에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추천으로 입교했다. 그러나 1연대가 창설되는 과정에서 하사관 요원으로 선발돼 ‘110001’이라는 ‘사병군번 1번’을 받았다.
 
1950년 10월, 6사단7연대가 초산 하도리를 완전 점령해 압록강에 도달했다는 <동아일보> 1면 톱기사.
  1946년 5월, 국방경비사관학교(육사)가 창설되자 1기생으로 입교, 6월 참위(소위)로 임관하면서 장교군번 117번을 달았다. 그는 제주지구전투사령부 대대장을 거쳐, 1949년 5월 8연대의 ‘강태무·표무원 소령의 2개 대대 월북사건(245명)’이 발생한 후, 춘천으로 이동해 7연대장이 됐다.
 
  이때 그는 교육훈련과 38선 일대의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 결과 북한군 남침 이전에 연대는 대대급 전투훈련을 마칠 수 있었고, 방어진지 공사도 전쟁 발발 한 달 전인 1950년 5월 마칠 수 있었다. 다가올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전차 1개 연대로 증강한 북한군 2·7사단을 격파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셈이었다.
 
  임 중령은 춘천 정면을 방어하기 위해 천연장애물인 북한강과 소양강을 활용했고, 포병화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해 적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쳤다. 특히 7연대 57mm 대전차포 소대장 심일(沈鎰) 소위는 특공조를 조직해 화염병과 수류탄으로 SU-76 자주포 2대를 파괴해 뒤따르던 자주포 8대를 퇴각시켰다.
 
  육군본부는 잘 싸운 6사단 7연대에 전선 조정 명령을 내렸고, 7연대를 비롯한 6사단은 홍천을 거쳐 원주, 충북 음성으로 이동했다.
 
  임부택 중령이 지휘하는 7연대는 충북 음성 북방 동락리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박성철 소장) 48연대를 전멸시켜 개전 이래 한국군 최초로 대승을 거뒀다. 패퇴를 거듭하던 국군에 기쁜 소식이었다.
 
  우리 1사단은 1950년 6월 음성에서 임부택의 7연대와 방어임무를 교대하도록 돼 있었다. 임 중령은 동락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라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는 임 중령에게 내 처지를 털어놓았다.
 
  “보다시피 우리 병력은 지쳐 있고, 포도 없고 중화기도 없다. 이대로 교대하면 위태롭다. 준비가 될 때까지 도와달라.”
 
  임 중령은 흔쾌히 내 뜻을 받아 주었고, 우리는 7연대와 함께 방어전에 임했다. 임 중령은 포병으로 사단 정면을 엄호해 줘 적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재향군인회 리셉션에서 백선엽 장군(왼쪽)과 함께 담소하고 있는 임부택 장군(오른쪽 두번째).
  결국 개전 초기 6사단 7연대의 방어는 6·25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울 공격의 조공(助攻)부대인 적 2군단을 춘천에서 저지하지 않았다면, 유엔군이 참전하기 전에 부산이 점령당했을 것이다.
 
  7연대는 10월 초 38선을 돌파하고 화천을 점령했다. 계속 북진해 10월 압록강변의 초산(楚山)까지 진출해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합창했다.
 
  중공군이 개입하자 임부택의 7연대는 압록강을 뒤로하고 철수길에 올라 경기도 광주-여주선까지 후퇴했다. 중공군 4월 공세 직전, 임 대령은 6사단 부사단장으로 영전했다. 그러나 사단은 사창리(史倉里) 전투에서 중공군 2개 사단의 공세에 밀려 용문산(龍門山·1157m)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임 대령은 중공군 63군 예하 3개 사단을 맞아 3500여 명의 포로, 2만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고 사창리 전투에서 당한 ‘빚’을 갚았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임부택을 사로잡거나 7연대를 없애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로 임부택 장군은 2차례의 태극무공 훈장에 빛나는 명장이었다.⊙
 
  사진 : 서경리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의 영웅’ 시리즈를 위해 30여 명의 한국군 장성을 선정·증언했으나, 지면 사정상 일부 장성만 게재하게 됐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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