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相仁 JSI파트너스 대표
⊙ 1950년 서울 출생.
⊙ 동국대 행정학과ㆍ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졸업.
⊙ 한국전력, 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 팬택계열 기획홍보실장ㆍ전무 역임.
현재 일본 나고야 중부전략연구회 특별회원.
⊙ <홍보 머리로 뛰어라>, <현해탄 波高 저편에>
⊙ 1950년 서울 출생.
⊙ 동국대 행정학과ㆍ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졸업.
⊙ 한국전력, 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 팬택계열 기획홍보실장ㆍ전무 역임.
현재 일본 나고야 중부전략연구회 특별회원.
⊙ <홍보 머리로 뛰어라>, <현해탄 波高 저편에>

- 고우즈시마에 있는 오다 줄리아 묘지. 중앙의 田자는 십자가를 숨기기 위해서 표기했다는 설이 있다.
1600년 양아버지 고니시(小西)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줄리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로 전락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주교 박해령으로 줄리아는 1612년 4월, 그녀의 나이 21세에 오오시마(大島), 니이지마(新島)를 거쳐 절해고도인 고우즈시마(神津島)로 유배됐다.>
오다 줄리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다. 오다 줄리아는 고우즈시마에서 주민들을 교화하는 등 봉사의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뜻을 기리기 위해 고우즈시마에서는 매년 5월 세 번째 주말에 축제가 열린다. 축제의 공식 명칭은 ‘오다 줄리아제(祭)’다. 필자는 2008년 5월 16일, 오다 줄리아제에 참가하기 위해 도쿄에 갔다.
5월 17일 이른 아침, 도쿄 다케시바산바시(竹芝棧橋) 선착장으로 갔다. 시간적으로 다소 여유가 있었으나 초행길이라 새벽부터 서둘렀다. 오오시마, 고우즈시마 행 선박이 출항 준비 때문인지 제복을 입은 선원들이 제법 분주하게 들락거렸다.
7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이가 지긋한 수녀 한 사람과 할머니 신자들이 두리번거리면서 여객대합실로 들어섰다. 한눈에 봐도 오다 줄리아제에 가는 발걸음들이었다. 동해기선 소속의 제트船(선)은 도쿄만을 뒤로한 채 잔잔한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다 줄리아 기념비 앞에서 열린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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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다 줄리아祭의 기념 미사. 도쿄교구 신부들이 주관한 이 미사에는 80여 명의 참배객들이 참여했다. 대부분이 도쿄지역 성당에서 단체로 온 신자들이다. |
잠시 기항했던 제트선은 다시 뱃고동을 울리며 파도를 헤쳐 나갔다.
드디어 목적지인 오다 줄리아의 섬, 고우즈시마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정확히 4시간이 걸린 셈이다. 직선 거리로 178㎞인 이 섬까지 객선으로는 13시간 반이 걸린다고 한다. 당시 오다 줄리아는 며칠이나 걸렸을까?
외딴섬인지라 호텔은 하나뿐, 대부분 민박을 한다. 우메다(梅田莊)라는 민박집에서 봉고차를 몰고 마중을 나왔다.
점심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미사가 이어졌다. 미사는 오다 줄리아 顯彰碑(현창비: 숨어 있는 선행을 밝히어 세상에 널리 알리는 비석) 앞 작은 광장에서 열렸다. 미사를 주재한 도쿄 敎區(교구)의 우라노 유우지(浦野雄二)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가 오다 줄리아 님의 ‘겐쇼우비(顯彰碑)’ 앞에 모인 이유는 하늘의 뜻입니다. 400여 년 전 조선에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정벌에 따른 피해자로서, 이 섬에서 복음을 전하다 생을 마감한 오다 줄리아 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다 같이 기도합시다.”
신자들은 땡볕 아래서도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숙여 기도했다. 도미자와 히테코(富澤日出子ㆍ67) 할머니는 “얼마 전 성당의 잡지에 난 글을 읽고 감동해 처음 이 축제에 참석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온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고 했다.
도쿄의 하치오지(八王子) 성당에서 단체로 온 쓰카모토 세치코(塚本世智子ㆍ54)씨도 “최근 이런 사실을 접하고 건강이 좋지 않지만 무리해서 참석했다”며 만족해 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아픔이 배어났다. 스스로 ‘한국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줄리아 終焉의 섬
미사를 마치고 섬에서 내어 준 버스에 분승해 ‘아리마’ 전망대에 올랐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가다가 정상 부근에 이르러 도보로 올라갔다. 높은 십자가 밑에는 ‘줄리아 종언(終焉: 임종)의 섬’이라는 제목과 함께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오다 줄리아는 조선 전쟁의 고아였다. 크리스천인 아우구스치노(小西行長)에 의해 일본에 와 양녀로 자랐다. 가톨릭 세례명은 ‘줄리아’였다. …(중략)… 1612년 크리스천 탄압에 의해 체포되어 오오시마, 니이지마를 거쳐 고우즈시마에 이송됐다. …쇼와 45년(1970년) 5월 25일, 제1회 오다 줄리아祭가 시작돼 오늘에 이르렀다.>
미사에 참석했던 신부들을 비롯해 참배객들 모두 십자가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오다 줄리아도 이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느낄 수 있었을까. 철모르는 나이에 이국 땅에 잡혀와 한 많은 세월을 살다 이곳에 묻혔으리라.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자 건너편 비탈진 언덕에 외롭게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風霜(풍상)의 세월을 견디면서 살았을 소나무와 오다 줄리아의 삶이 나란히 겹쳐졌다.
인구 2000명 남짓한 작은 섬마을 골목마다 태극기가 휘날렸고, 곳곳에 늘어선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오다 줄리아의 묘지에도 커다란 태극기와 일장기가 꽂혀 있었다. 필자는 머리 숙여 기도했다.
‘당신의 곁에 오기까지 400년이 걸렸습니다.’
묘지 주변에는 작은 석상들이 눈물 방울 같은 세월을 머금고 서 있었다. ‘외딴섬에 유배되어 죽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묘지’라 한다. 민초들의 묘지가 줄리아의 묘지를 둘러싸고 있었고, 묘지에는 꽃다발과 과일들이 가득했다. 묘비 중앙에 새겨져 있는 田(전)자는 “십자가를 감추기 위해 그렇게 표기했을 것”이라는 것이 현지인의 설명이다.
오후 4시부터 공연이 펼쳐졌다. 이곳의 전통음악과 춤, 어부의 노래, 고기잡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그 중에 조선통신사 행렬도 있었다. 모두가 일본인들이 꾸민 무대였다. 사이타마 현에서 온 에토 요시아키(江藤善章·58) 씨는 팬파이프로 ‘아리랑’을 연주하더니, 관객 모두에게 ‘아리랑’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필자도 함께 불렀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반딧불이 같은 눈물이 스쳐갔다.
‘세월이 변해도, 국적이 달라도 이 순간만은 모두 하나구나.’
“오늘 우리들은 줄리아 님의 遺德(유덕)을 기리기 위해서 이 섬에 모였습니다. 가신 임의 뜻을 잘 받듭시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아직도 전쟁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간의 존엄성이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내년이 오다 줄리아 님 축제 40주년입니다. 내년에 또 만납시다.”
우라노(浦野) 신부의 맺음말이었다.
‘내 집은 어떤가. 반석 위에 서 있는가. 모래 위에 서 있는가… 원하옵건대 하나님이시여! 제게 힘을 주시옵소서!’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이 있는 곳에 神도 있다>에 나오는 글이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 있을까? 나약한 인간들이여 허세를 부리지 말지어다.
민박집에서 극성스러운 섬 모기와 싸우다 잠을 설치고, 다음날 뒤풀이 행사에 참가했다. 참배객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많이 모였다. 행사는 떡을 치는 대회였다. 우리 식으로 인절미를 만드는 것이었다. 절구통에 떡쌀을 넣고 젊은 청년들이 떡메를 들어 시범을 보이자, 참배객들이 번갈아 가면서 경쟁하듯 팔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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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주민과 참배객들이 모여 인절미를 만드는 행사 장면. 콩가루 인절미, 무 인절미, 쑥 인절미 등 즉석에서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인절미를 나눠 먹었다. |
“세월이 흘러서 변한다 할지라도, 信仰(신앙)이 변해서는 안 됩니다.”
고우즈시마무라(神津島村)의 산업관광 과장 마에다 코우(前田弘) 씨는 “몇 년 전부터 한국의 신부님과 연락이 두절됐다”면서 “한때는 100여 명의 참배객들이 한국에서 왔는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라고 했다.
참배객들은 주최 측에서 제공한 도시락을 하나씩 들고 오다 줄리아와 작별했다. 필자도 이들과 함께 섬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배를 탔다. 고우즈시마(神津島)가 점점 작아졌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다 줄리아는 훌륭한 聖人(성인)이었다. 시즈오카(靜岡)의 한 극단에서 오다 줄리아를 주제로 연극을 만든다고 한다. 제목은 聖女流轉(성녀유전)이란다.
‘줄리아 님! 당신은 행복하십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고 있으니까요.’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에 노을이 빨갛게 물들었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 되어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 聖女 오다 줄리아
필자는 오다 줄리아가 일본 사람들로부터 큰 추앙을 받는 데 대해 무척 궁금했다. 어린 나이에 전쟁포로로 잡혀가 왜장 고니시(小西)의 양녀로 자라면서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심을 잃지 않고 어려움을 감내하며 살았던 사실 자체가 일본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배지인 고우즈시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도 그녀가 추앙받는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섬사람들은 대부분 미신을 믿고 있었던 터라 오다 줄리아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어려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섬사람들을 교화시켰다 한다. 특히 고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 산에서 캔 약초로 약을 만들어 그들을 치료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결국 섬사람들은 오다 줄리아가 신통한 의술을 가진 특별한 여자라고 여기게 되었으며, 이는 곧 섬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계기가 됐다. 오다 줄리아는 가르치기도 했단다.
필자는 도쿄의 환경보전연구회 직원인 이노우에 아키노리(60) 씨에게 일본인들이 왜 오다 줄리아를 존경하는지를 물었다. 그의 답변이다.
"제가 오다 줄리아를 존경하는 이유는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를 당한 26성인(聖人)에 버금가는 순교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다 줄리아도 이들과 같은 성인의 대열에 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본 사회는 오다 줄리아와 같은 순수성을 지닌 사람이 없습니다. 동정녀 오다 줄리아를 통해 인간의 순수성과 존엄성을 배워야 합니다. 시류에 얽매여 자신을 팔아버리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저는 내년의 40주년 행사에도 다시 참여할 예정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박해에 이어 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크리스천이 神道(신도)와 불법을 방해하고 있다”며 금교령을 내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독교인이라면 이가 갈린다”며 “오다 줄리아를 일본 땅 밖으로 추방하라”고 했다.
오다 줄리아는 이 섬에서 40여 년 살다가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다 줄리아가 사망한 후에도 섬사람들은 그녀를 섬의 수호자로 받들게 되었으며, 그 전통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고우즈시마는 절해고도로 정치범들이 유배되던 ‘일본 밖’에 해당하는 곳이다. 섬에 유배된 사람은 섬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고, 유배자들이 사망해도 유해가 섬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섬의 묘지에 묻혀야 했다. 오다 줄리아가 처했던 박해에 대해서는 일본에 온 마치우스라는 선교사가 예수회 앞으로 보낸 보고서(1613년 1월 12일자)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섬사람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오다 줄리아의 묘지에 참배했으며, 이 묘지에 참배하면 병이 낫고, 소원도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본 사람들은 그녀를 귀족의 딸, 혹은 전쟁고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간행된 <고려왕족치명사략>(高麗王族致命事略)에는 ‘有一高麗王族李氏女子 聖儒立亞被倭將’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왕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출생 신분과는 상관없이 오다 줄리아는 일본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도 이런 사랑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해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