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만족이란 게 없죠. 그냥 만족해 버린다면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고체 덩어리가 되는 셈이니까요. 단원들의 기량, 지금 자신이 처한 조건이 낱낱이 음악으로 승화되는 거죠』
林憲政
1953년 출생. 서울大 音大 작곡과 졸업. 美 메네스 音大 대학원, 줄리아드 音大 대학원 작곡과 석사. 美 밀레오페라단 상임지휘자, KBS 교향악단 副지휘자 역임. 현재 서울大 音大 작곡과 교수 및 부천필 상임지휘자. 동아콩쿠르 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음악평론가協 음악상, 호암상(예술) 수상.
林憲政
1953년 출생. 서울大 音大 작곡과 졸업. 美 메네스 音大 대학원, 줄리아드 音大 대학원 작곡과 석사. 美 밀레오페라단 상임지휘자, KBS 교향악단 副지휘자 역임. 현재 서울大 音大 작곡과 교수 및 부천필 상임지휘자. 동아콩쿠르 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음악평론가協 음악상, 호암상(예술) 수상.
林憲政(임헌정·54·서울大 작곡과 교수)은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서울의 위성도시에 불과하던 부천市를 음악도시로 만들었다. 「부천」 보다 「부천필」이 더 유명하다면 틀린 말일까? 부천에 가면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거리에서 만나고, 브람스가 베토벤을 질투하며 만든 「교향곡 1번」을 들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부천필에는 林憲政이 있다.
林憲政이 1989년부터 부천필을 이끌며 수많은 레퍼토리를 연주했지만 아무래도 말러 全曲(전곡) 연주를 첫머리로 꼽아야겠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계속된 부천필의 「말러 시리즈」는 국내 클래식 공연사에 이정표를 세웠다. 말러 애호가라는 「말러리아」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전석 매진」이라는 진기록을 지방도시가 세웠다. 그래서 「말러 인 부천」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林憲政은 말러 全曲을 끝낸 뒤 R.슈트라우스와 브루크너 등의 大편성 관현악 작품에 손을 대는 한편, 쇤베르크와 바르토크 등 20세기 작품에 관심을 쏟았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베토벤과 슈만, 슈베르트, 브람스 등의 정통 레퍼토리를 다듬어 내고 있다.
지난 4월1일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2007년 교향악 축제」의 스타트로 부천필의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사가 몰아친 그날 관객들은 마스크를 써야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 이미주와 협연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브람스 교향곡 1번에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그를 만난 것은 지난 4월5일 서울大 연구실이었다. 피아노 한 대와 책상, 낡은 소파가 전부인 검소한 공간이었다. 검정 양복에 셔츠도 검정, 구두도 검정이었고 귀를 덮은 「더벅머리」 스타일은 다소 차갑고 무거운 인상을 갖게 만들었다. 대화를 시작하니 웬걸 격이 없는 리버럴함이 느껴졌다.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인 걸 모르셨어요?(웃음) 검은색 외에는 어울리는 게 없대요. 외모에 신경 쓰는 게 싫고. 파마를 해보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휴, 난 소심해서 자신이 없어요』
젊은 시절 음악적 우상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직도 젊은데 무슨 소릴 하냐』고 반문했다.
『그런 것 없었어요. 그냥 구름따라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뭐가 돼야지, 나는 이 길을 가야지 하는 생각은 없었어요. 한때는 신학대학에 가려 했습니다. 누나들이 신학대학을 많이 나와서 집안 분위기가 그런 쪽으로 흘렀어요. 고민해 보니, 목회의 길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말주변도 없고…』
빈농의 아들
빈농의 아들이었던 그는 어머니 申東順(신동순·100) 여사가 마흔다섯 살에 낳은 10남매 중 막내였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치긴 했지만 비싼 레슨비를 주고 악기를 배울 형편이 못 됐다고 한다. 강원도 원주中을 나와 상경, 대광高에 입학한 뒤 특별활동 시간에 첼로를 배웠다. 그렇다고 뒤늦게 첼리스트가 되는 꿈은 꾸지 않았다.『아휴~ 능력이 돼야지 꿈을 꾸죠. 집안에 돈이 있어야 레슨을 받는데 어디 돈이 있어야지요. 목회의 길을 갈까 고민을 하는데, 음악에 끌렸습니다. 작곡 수업을 받으니 화성법이 어렵지 않아 高3부터 음악공부를 했습니다. 독학으로 하다가 입시를 앞두고 몇 달간 학원에 다닌 게 전부였어요』
―음악을 하겠다고 하니 부모님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목회를 바라셨지만 제 결정을 항상 믿어 주셨습니다. 두 분은 시골분이셨는데 충북 청주에서 농사를 짓고 자그마한 사업도 하셨어요. 아버지 마흔여덟, 어머니 마흔다섯에 저를 낳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외삼촌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친 분이셔요. 지금은 성경을 읽으십니다』
어머니 申東順 여사는 지난해 5월 문화관광부에서 수여하는 「예술인의 장한 어머니賞」을 수상했다. 그녀는 농사일은 물론 동네의 허드렛일을 모두 도맡아 자식을 키웠다. 궁핍한 살림에 음악을 포기할 생각을 했을 때 어머니는 묵묵히 아들을 격려했다. 당시 시상식에는 몸이 불편한 어머니 대신 아들만 참석했다. 사회자가 「어머니를 대신해 자리를 채워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감히 어머니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끝내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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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한 어머니와 함께. 왼쪽부터 아내, 큰누님, 어머니, 임헌정 교수. |
부천에 간 사연
林憲政은 서울大 音大를 졸업한 후 미국 메네스 音大와 줄리아드 音大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1985년 귀국, 서울大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부천시립합창단의 지휘자이자 성심女大 교수인 최병렬 교수가 한번은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崔교수가 「심포니를 맡아 보지 않겠냐」고 해요. 제가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니까 「부천이라는 곳인데…」 그래요. 「예? 인천 부평 말이에요?」 당시 인천 부평은 알았지만 부천은 市가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林憲政은 부천市에다 「지원은 하되 단원선발을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1989년 2월인가 서울大 음대생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대만·홍콩·싱가포르 등으로 연주여행을 떠났어요. 마지막 날 학생들에게 「(부천필) 단원이 많지 않다니까 관심 있으면 연락해라」는 얘기를 했죠』
그해 3월부터 오디션을 열어 단원들을 뽑고 젊은 유학파들을 수석단원으로 초빙, 물갈이를 시작했다. 이때 들어온 이들이 박경옥(첼로), 백희진(첼로), 이혜경(플루트), 김창호(콘트라베이스), 이관호(트럼펫) 등 쟁쟁한 멤버들이다. 단원들은 자연스레 서울大 제자들로 메워졌다. 때문에 「부천필은 서울大 음대 5학년 오케스트라」라는 말이 나돌았다.
『결과적으로 서울大 출신들이 많이 들어오게 됐는데 그 때문에 오해를 받고 빈정대는 소리가 나왔어요. 심지어 「어느 학교는 서류전형에서조차 탈락시킨다」 하고…. 철저히 실력으로 뽑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요. 주위에서 그런 말을 하면 「저더러 비리를 저지르란 얘깁니까」 하고 반문해요』
―공직에서 보면, 흔히 지역 안배도 하고, 性別(성별) 안배도 하잖아요.
『음악에서 실력 없는 사람을 뽑으면 그건 비리예요. 안배의 문제가 아니라 최고의 멤버를 뽑지 않으면 그건 비리예요. 망하는 길입니다. 「단원 봉급도 조금 주면서 좋은 단원이 오면 고마워해야지, 오는 사람 보고 뭐라고 하면 있겠냐」고 했죠』
청중을 즐겁게 하는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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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광高 시절 친구와 함께. 기타를 든 이가 임헌정 교수다. |
1990년 「바흐와 쇤베르크」 기획연주 이후 부천필의 명성은 커져 갔고, 이후 「서거 200주년 기념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全曲 연주회」를 비롯하여 코펠리아와 지젤의 발레 공연과 수편의 오페라 및 송년 오페레타 「박쥐」, LG아트센터 개관기념 음악회, 브람스 페스티벌, 말러 교향곡 全曲 시리즈 등 최고의 실력을 갖춘 한국 최정상의 교향악단으로 인정받았다.
카를로스 클라이버 (1930~)라는 지휘자가 있다. 그의 손을 거치면 같은 곡이라도 달리 들린다. 때론 농부의 거친 춤에서 궁정 귀부인의 우아한 무도회까지 그의 손을 거치면 곡의 정체가 분명해진다.
지휘자는 어떤 천재성보다는 음악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정확히 전하는 메신저 능력이 있어야 한다. 화성법이나 익혀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기량을 뿜어내게 만들고 이를 하나의 선율에 담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다. 스포츠 단체경기에서 한두 명의 국가대표급 기량만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없는 법이다.
지휘자의 길
『음악에 만족이란 게 없죠. 그냥 만족해 버린다면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고체 덩어리가 되는 셈이니까요. 음악은 계속 바뀌고, 할 때마다 느낌이 다르잖아요. 바로 순간의 예술입니다. 그것이 매력이에요. 순간의 모든 상황, 조건들이 하나의 현실로서 드러나는 게 연주입니다. 단원들의 기량, 지금 자신이 처한 조건이 낱낱의 현실로서 승화되는 거죠』音大 기악 전공자들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부천필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부천市의 재정형편상 단원 봉급이 적은 편인데도 상관없단다. 서슴없이 「좋은 음악이 하고 싶다」고 말한다. 왜냐면 林憲政 교수가 대패질하는 미끈한 음악을 원하기 때문이다. 음악팬들은 부천필의 연주를 손꼽아 기다린다. 부천필이 일년에 몇 차례 서울 예술의전당으로 나들이 올 때면 객석이 거의 매진이 된다.
『말러 연주를 한 뒤 「부(천필)사모」가 생겼습니다. 우리나라엔 프로페셔널한 청중이 많지 않은데 부천필이 청중 확산에 기여했다고 봐요. 서로 주소를 모르던 애호가와 프로 청중들이 모이게 된 계기가 됐다는 말들을 하더군요. 물론 부천필에 불만이 있는 사람도 있죠. 예컨대 어느 오케스트라 음반을 들어 보고 거기에 빗대어 부천필의 연주 템포와 다르면 「너무 빠르다」는 식이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일종의 유행인데 괜히 아는 척하는 사람도 있고(웃음)』
그는 「오케스트라 조련사」로 불릴 만큼 연습에 철저하다. 몇 번이고 다시 연습을 시키고 단원들과 타협하지 않는다. 완벽을 주문한다. 그렇다고 화를 버럭내거나 고집을 피우진 않는다고 한다. 단원들은 이 까다로운 지휘자를 신뢰하고 좋아한다.
『단원들을 틀에 가두려 하지 않아요. 오히려 틀을 깨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을 빌려 「예수 가라사대,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틀 안에 있으면 어떤 「법」도 묻혀 버려요. 단원들이나 서울大 제자들이 「이렇게 하면 안 되나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답합니다』
「말러 인 부천」
부천필은 편안한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다. 1990년 「바흐와 쇤베르크」 기획연주를 시작으로 당시 거의 연주되지 않던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 바르톡, 베르크, 베베른 등 일련의 의욕적인 무대로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고전·낭만파 음악에 중독된 국내 클래식界에 부천필의 20세기 음악 조명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98년 부천필 창단 10주년 때에는 난곡에 가까운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과 바그너의 「파우스트 서곡」을 국내 초연했다.
아무래도 부천필을 이야기하면 말러 全曲 연주를 꼽아야겠다. 그는 예술의 전당과 공동 주최로 1999년부터 말러의 교향곡 1번에서 10번까지 全曲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4년에 걸친 부천필 말러 교향곡 全曲연주회의 대장정은 1999년 11월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시작됐다. 그는 말러의 첫 교향곡인 1번 D장조 「거인」과 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지휘했다. 「방황하는…」의 솔로는 바리톤 전기홍이 맡았다. 연주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악단의 합주력, 이른바 톤 컬러였는데 당시 언론은 이렇게 평가했다.
<오케스트라는 긴장 탓인지 1악장에서 좀 뻣뻣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경직이 풀리면서 유장한 흐름을 풀어 냈다. 특히 죽음에서 승리로 나아가는 4악장에서 관 파트의 약진은 눈부셨다. 거칠고 불안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자신감이 인상적이었다.
4악장의 시작은 고통스럽다. 현은 비명을 지르고 관은 울부짖는다. 그것이 승리의 팡파르로 끝나기까지 오케스트라는 험한 길을 헤쳐나가야 한다. 마지막 승리의 팡파르는 곧 부천필의 승리를 알리는 것이 됐다…> (한국일보 1999년 12월1일 17면)
―말러 全曲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유가 있습니까. 종교적인 이유 때문인가요.
『아뇨, 아무런 이유 없어요. 말러라는 사람이 쓴 좋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고, 요즘 歐美(구미)의 극장 프로그램을 보면 말러나 부르크너의 작품이 많아요. 사명감보다는 내가 하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행복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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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필의 공연 모습. 임헌정이 격정적인 몸짓으로 지휘하고 있다. |
신비한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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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임영균(중앙大 사진학과 교수) |
『당시 건강이 안 좋았어요. 회복이 안돼요. 병원에서조차 원인을 몰라요. 체크해 보면 문제 없는데 기운이 뚝 떨어졌어요. 서울大 개교 50주년 기념 연주회로 「부활」을 연주하는데, 버틸 자신이 없었습니다. 1악장 지휘는 제자에게 시키고, 2악장부터 의자에 앉아 지휘를 했어요. 그냥 손만 까딱하는 지휘 동작밖에 안 했는데 엄청난 에너지가 쏟아졌어요.
특히 마지막 악장에서 「부활하라」는 합창을 하는데 연주자고 합창단이고 모두 울었습니다. 그 소리의 에너지는 제가 경험해 보지 못했어요. 마지막 5분 정도 남겨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를 하게 됐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아마 그런 경험이 부천필에서 말러를 하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됐나 봐요』
―대학생을 상대로 어떻게 말러 연주를 할 생각을 가지게 됐나요.
『말러 심포니를 한다고 하니 당시 겁을 내고 엄두를 안 내요. 「야, 그래도 한 번 해야 되는 것 아닌가」 했죠. 하지만 나 혼자 엄두가 안 나 할까 말까를 1년 가까이 고민했죠. 필요한 인원만 100명인데, 돈도 들고 수업시간 틈틈이 연습해야지, 홍보·대관해야지 일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예술의전당에 가서 꼬셨죠. 처음엔 「망하려고요?」 그래요. 제가 「망해도 제가 망할게요. 합시다. 인생 한 번 산다는데 해야지」 했죠』
지난해 12월16일 서울大 개교 60주년 연주회에서는 말러의 「천인 교향곡」을 연주했다. 「천인 교향곡」은 독창과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거대한 혼합체라고 할 수 있다. 연주를 위해 동원된 학생만 400명이나 됐다. 연주회에서 자신 없는 음색, 지극히 학생다운 소리를 들려 주는 부분이 있었지만 프로 오케스트라 소리와 견주어 못하다 할 만한 부분을 딱히 찾기 어려웠다는 평이 나왔다. 林憲政이 있어 가능한 열연이었다.
말러를 듣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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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러 공연 포스터. |
「말러 초심자들이 유의할 점이 뭐냐」고 물었더니 林憲政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우선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1번에서부터 들으면 돼요. 처음에 말러를 연주하겠다고 하니까, 「그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하려느냐」고 해요. 말러의 음악은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 농부의 춤이 나오고, 하류계층의 음악, 선술집의 유행가가 있잖아요. 하류 인생이랄 수 있는 억압받은 민족, 농부들의 흥겨움이 녹아 있는 게 말러거든요.
말러가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두려움을 버리고 가까워지면 됩니다. 말러는 프로이드에게 정서불안 진단을 받았어요. 빈의 디렉터가 되기 위해 개종을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면 보헤미안이 되었지요. 「디아스포라」라는 말처럼 정처없이 떠다니는 유목민 같은 삶을 느껴야 했어요』
국내 초연한 말러 연주는 그에게 「말러 클럽」이 생겨나게 하고 전석 매진의 기록을 세웠지만 뼈아픈 기억이 있다. 2000년 11월28일 말러 교향곡 3번 연주 때 건강악화로 1악장은 다른 지휘자에게 맡겼고, 2악장부터 간신히 의자에 앉아 지휘한 게 청중들에겐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02년 6월18일 교향곡 5번을 연주할 때였다. 당시 한국과 이탈리아의 월드컵 16강전이 있던 날로 말러 시리즈 중 최소의 관객 수를 기록했다. 1층이 채 다 차지 않은 객석이었으나 음악적 깊이만큼은 월드컵 결승전과 다름없었다.
『당시 연주 스케줄을 짤 때, 안호상 서울문화재단 대표가 「잘 하면 이탈리아 와 경기하겠다」 해요. 제가 「그럼, 뭐 장렬하게 전사하는 거죠」 했죠. 열심히 연습하고 무대에 서니까 청중도 붉은 티셔츠를 입고 와 객석이 벌겋더라구요. 연주회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파트가 떠들썩해요. 설기현 선수가 동점골을 넣었더군요』
예종 음악원 vs 서울大 音大
音大 진학생들에게는 몇 년 전부터 고민거리가 생겼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이 생기면서 음악 영재들이 서울大 音大로 가느냐, 「예종 음악원」을 가느냐를 두고 고민한다. 예종 음악원은 실기 위주로 음악 전문가를 양성하는 곳이라면, 종합대학인 서울大는 아카데믹한 수업 위주다. 많은 영재들이 일찌감치 예종 음악원에 진학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임동혁·손열음·김선욱,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가 대표적인 예다.
―예종 음악원과 서울大 音大를 두고 고민하는 학생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저는 전인교육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실기 중심 교육도 나름대로 맞는 말이지만 실기만 가지곤 음악이 안 되지요. 아무리 손가락이 잘 돌아가고 감각이 좋더라도, 음악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여러 가지인데, 균형이 깨지면 제대로 자랄 수 없어요. 역사의식이나 사회성 등 그 사람을 버텨 주는 밸런스를 채워 줘야 해요.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도록 가르쳐야 되는데, 예종은 너무 실기부터 가르쳐 걱정스러웠어요. 미국이나 구라파 음악학교를 가도 방향은 실기 중심에서 전인교육 쪽으로 갑니다. 줄리아드는 박사학위 과정이 개설돼 있는데 우리만 역행하고 있습니다. 걱정스러워요』
―예종 음악원 교수 중에는 서울大 音大 교수들이 있습니다.
『이강숙 선생님은 제 연구실과 가깝게 있었어요. 그분도 전인교육을 주장하던 분이셔요. 아쉬워요. 처음 시작할 땐, 조금 더 전인교육하면서도 입시 틀에서 자유스럽게 해주는 식으로 갔어야 하는데, 그 학교 역시 개교한 지 6개월 만에 대학으로 하겠다고 하자 다른 대학의 반발이 많았죠.
그렇다고 서울大가 좋은 시스템을 갖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에요. 서울大의 장점 살리면서 좀더 실기를 강화할 수 있는 전인교육 시스템이 정답일 텐데 아쉬워요』
神童이 오래 살려면
세계적 콩쿠르를 섭렵한 神童(신동)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피아니스트 김선욱이나 손열음 같은 이들을 만나면 종종 충고를 해요. 「빨리가지 마라, 빨리 가다가 사고나면 안 되니까. 그리고 인생은 치를 만큼 치러야 되고 음악도 그만큼 과정이 있으니까 속성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동이라는 게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에너지 때문에 키워지는데, 일단 감사할 일이죠. 하지만 망가진 신동을 너무 많이 봐 왔어요.
자기 멘탈리티와 사회적 시각, 역사의식이 밸런스가 안 맞으면 소위 영양실조에 걸리죠. 망가지게 됩니다. 제가 만났던 기가 막힌 연주자들이 지금은 흔적도 없어요. 얼마나 낭비입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변에서 가만히 놔둬야 돼요. 제가 강원도 원주시향 음악감독을 한 일이 있는데 원주 출신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잘 압니다. 그의 어머니께 「절대 속성하지 말라」고 얘기했어요. 나중에 불균형이 되면 서른 넘어 음악가로 안착하지 못한다고요. 음악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역사의식이고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사회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것 없이 일찍 외국에 간 신동들이 망가지는 것은 균형을 못 잡았기 때문이죠』
그는 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의식」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음악적 영역이 길러지는 것이라고 했다.
『말러가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는데요. 다른 음악가와 교류하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자기가 하는 연주가 다른 사람과 무얼 나누고 있는지, 또 자기가 돋보이고 싶은, 최고여야 하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자신이 가득 차야 될 것 아닙니까. 예종으로 가는 영재들에게 드는 걱정이 그것입니다. 어른들이 자꾸 부추겨서 앞으로 가지만, 적어도 20년이 지나야 자신이 걷는 길을 압니다』
솔리스트보다 오케스트라 단원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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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동아콩쿠르 작곡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웬만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고 있어요. 줄리엣 강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들어간 뒤 지금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부악장으로 있습니다. 데이빗 김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악장을 하고 있어요』
요즘 와서 분위기가 바뀌긴 했지만 솔리스트를 꿈꾸는 연주자로선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는 것을 마지막 선택이라 생각해 왔다. 왜 그럴까.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런 인식이 있었죠. 자기가 음악가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꿈을 허황되게 꾸는 것 같아요. 미국의 커티스는 영재학교인데도 오케스트라 학교로 바뀌었어요. 커티스 출신이 톱 클래스 심포니에 가장 많이 들어간다고 하고, 맨해튼 스쿨이나 줄리아드도 오케스트라 교육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줄업생 한 명이 맨해튼 스쿨에 입학했는데 곧바로 뉴욕필에 들어갔더라고요. 뉴욕필 악장이 글렌 딕테로인데, 그곳에는 재능 있는 한국 출신 연주자가 많다고 합니다.
솔리스트는 1년에 한두 번 연주하는 게 고작인데 그런 개런티 가지고 어떻게 삽니까. 게다가 한국처럼 개런티가 터무니없는 데가 없고요. 딕테로가 「솔리스트로 1년에 한 번 연주해야 1만 달러 정도밖에 못 버는데 뉴욕필의 말단이 10만 달러 수준이다. 나는 악장으로 몇십만 달러 받지, 덤으로 솔로도 하고 실내악도 한다. 오케스트라에 들어와 너무 행복한데 왜 허황되게 솔리스트를 꿈꾸나」 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바뀌어야 돼요. 세계에서 솔로해서 밥먹고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나요』
『전인교육이 필요하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독일 하노버로 유학 갔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자기 자유죠』
―지금도 잘하는데 거기 간다고 실력이 늘까요.
『자기 자유죠. 일찍 유학 가는 게 장단점이 있는데 문화적 충격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충격을 소화할 능력이 없을 때 가면, 꼭 문제가 생겨요. 영국인도 유럽 대륙에 콤플렉스가 있었던가 봐요. 예컨대 그림을 배우러 파리에 가고, 발레는 러시아, 빈과 독일에 가서 음악공부를 합니다.
이를 보고, 본 윌리엄스라는 영국 음악가가 젊은 음악도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해요. 「사이비 빈, 독일 음악인이 돼 귀국하지 말고 영국에서 충분히 공부한 뒤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서 떠나라」는 겁니다. 맞는 말이죠』
그는 지난 3월 신학기를 앞두고 서울大 音大에 지휘자 김덕기 교수와 함께 「오케스트라 교육 개선을 위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솔리스트는 많은데 국내 교향악단의 기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줄리아드의 2005년 9월부터 12월까지 커리큘럼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 베토벤 교향곡 3·5·6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스트라빈스키, 바그너 등 클래식의 기본 레퍼토리를 매주 연습하는데, 한국의 대학 음악교육은 「솔리스트 중심」이란 얘기다.
『독일이나 일본, 미국에 가면 합주 훈련을 어릴 때부터 하잖아요. 학교마다 오케스트라가 정규과목으로 돼 있어요. 우리가 그런 커리큘럼을 도입하면 학부형들이 난리날 걸요. 토양 자체가 오케스트라가 발전하기 어려운 구조예요. 학교 시스템이 약한데다 처우도 약하죠. 남자 단원들은 기회만 있으면 떠납니다. 악단 활동에만 전념해서는 생활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저는 졸업생들에게 「외국 가서 오케스트라 들어가라. 거기서 음악하며 살라」고 합니다』
부천市는 2010년을 목표로 부천필 전용 콘서트 홀 개관을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市 재정이 열악한데다 지하철 건설에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 판이어서 개관이 뒤로 미뤄질 것이란 우려가 높다.
『부천市에서 전화가 왔는데 예산이 없어서 올해는 단원을 2명만 뽑으래요. 대외 신인도 문제가 있을 텐데… 홀도 짓는다고 하고(미루어지고)… 지하철 때문에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군요. 경기도나 문광부에서 도와주면 딱 좋겠는데 부천市는 능력이 안 되고… 심포니는 자생적으로 커있고 우리는 답답하고』
―그래도 부천市에서 지원을 많이 하잖습니까.
『市가 원체 돈이 약해요. 형평성 문제가 있어 부천필만 지원하기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경기도는 돈이 많잖아요. 서울시는 얼마예요? 경기도립 오케스트라의 한 해 예산이 150억원인가 그래요. 우리는 30억원인데 다섯 배 차이입니다. 돈이 있어야 단원을 뽑고 봉급도 올리고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강화할 텐데 너무 열악해서 게임이 안 돼요』
―부천필이 그 정도라면 다른 곳은 더하겠네요.
『다른 곳은 돈이 많아요. 수원, 인천이 더 많아요』
金文洙 경기도지사의 제안
―부천필을 보면 음악은 돈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네요.
『그래서 제가 단원들을 설득하느라고 얼마나 애를 쓰는데요. 「너희들은 음악가야. 음악가라면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얘기하죠. 조직을 이끌려면 동기가 필요하고 한마음으로 모이게 해야 하는데 단원들이 잘 따라 주니 고맙죠. 참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에요. 연습실 하나 없고 봉급은 적고…』
그가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놨다. 부천 국회의원 출신인 金文洙(김문수) 경기도지사가 경기도립 오케스트라를 그에게 맡길 생각으로 타진해 온 것이다.
『삼고초려를 하는데 제가 부천필을 떠날 수는 없고 그래서 「내가 싼 사람이냐. 돈으로 못 산다」고 했죠. 부천市도 저를 뺏기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컸다고 해요. 제가 얘기했죠. 「돈 준다고 가느냐. 다만 부천필이 여력상 힘이 드니 병합을 하자. 관리는 내가 하겠다」고 했죠. 부천市가 항의하니까 다신 말을 안 합니다. 시립보다 도립의 연주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도립이 시립보다 잘하라는 법이 어디 있나요?』●
<진행·李相姬 月刊朝鮮 조사담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