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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文學靑年 시절 (16) 소설가 姜石景

「모든 것이 막막했지만 글을 쓰는 일은 내게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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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시절 카뮈에 감염, 「이방인」의 첫 구절 기도문처럼 외워
● 어두운 군부시대와 아버지의 파산, 불안정한 가정, 어디에도 내 영혼이 뿌리 내릴 방은 없었다.
● 작열하는 8월의 사루비아가 필 무렵 등록금 내러 갔다가 불쑥 휴학계를 내
● 李御寧 선생 추천으로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

姜石景
1951년 대구 출생. 이화女大 조소과 졸업. 1973년 문학사상에 「根」과 「오픈게임」으로 제1회 신인문학상 수상하며 등단. 1986년 「숲속의 방」으로 제6회 녹원문학상과 제10회 오늘의 작가상, 2001년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로 제8회 21세기문학상 수상. 작품집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米佛(미불)」, 「밤과 요람」, 「내 안의 깊은 계단」 등.
다락방에서 책읽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청소년기부터 詩(시)를 썼다든가, 남다른 감성과 조숙한 행동거지로 문필가가 될 조짐을 보이는데, 나는 지극히 평범했다. 단 한 번도 작가를 꿈꾼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범생이처럼 일기를 쓴 적도 없었다. 숙제로 쓴 것 외에는.
 
  책은 유난히 좋아했다. 내가 어릴 때 다락 한 면이 아버지의 서가로 채워져 있었는데, 약밥이며 단술·떡가래 등 음식까지 저장된 다락은 내 최상의 놀이터였다. 서가엔 김내성의 「魔人(마인)」부터 「삼국지」, 「마농레스코」 등 온갖 책들이 들어차 있었고,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락에 올라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뜻도 잘 몰랐을 테지만 세상에 책보다 재미있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놀 때도 그렇게 몰입하지는 않았다. 그 나이답게 십자가생이나 고무줄놀이를 즐겨 했지만 반 아이들 속에서 왠지 혼자 동떨어져 있는 듯 했다. 뒤에야 이것이 무엇인지 알았는데, 이방인 의식 같은 것이었다.
 
  거기다 집에서도 무언가 허한 것을 느꼈다. 엄마의 사치 취향으로 집에는 온통 통영자개농들이 번쩍거리고 당시엔 보기 드문 프랑스 인형들이 긴 장갑을 낀 채 유리 케이스 안에서 웃고 있었지만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느낌의 정체도 뒤에야 알았는데 물질의 공허였다.
 
  중학교 때는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며 책을 많이 읽었다. 그때 「가을에 온 여인」, 「김약국의 딸들」 등 박경리 소설을 죄다 읽었고, 박화성과 김말봉의 「찔레꽃」 등 통속소설과 제대로 된 번역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몇 권이나 되는 「홍루몽」도 읽었다.
 
  중학교까지는 만화도 엄청 보고 만화 그림도 즐겨 그렸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선 세계문학전집에 빠져들었다.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은 인생의 고난·격정 같은 것이 한참 가슴에 맴돌았고, 디킨즈의 「데이비드 커퍼필드」는 그 두꺼운 분량에도 손을 놓을 수 없어서 수업시간에 교과서로 한쪽 페이지를 가리고 보았다.
 
  바다의 태풍 장면이 한 페이지가량 묘사된 것을 읽곤 작가란 정말 천재이거나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 반에는 전교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다는 독서파가 있었는데, 늘 조용한 그 아이가 하루는 내게 「17세기」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분위기가 그렇다고 했지만, 공부나 학교생활에 별 흥미를 갖지 않으면서, 다른 세계의 책에 빠져 있는 내가 현실과 동떨어진 인물 같았나 보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유일한 과목이 수학이어서 대학 진학을 결정할 땐 수학과를 선택하려 했지만, 동양화를 배우는 단짝친구를 따라 화실에 갔다가 방향을 돌려 美大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학생 때 잠깐이었지만 만화가가 되고 싶어 했고, 초등학교 때는 내 그림이 곧잘 교실 게시판에 붙곤 해서 공연한 자신감을 가졌다. 내게 데생을 가르친 선생은 國展(국전)에 특선을 한 조소과 대학원생이었는데, 그가 흙으로 작품하는 것을 보고 부드러운 흙에 친화감을 가졌다. 또 입체적인 조각에 마음이 끌렸고, 막연하게나마 예술의 세계로 들어서는 듯했다.
 
 
  대학시절, 「실존」과의 첫 대면
 
1975년 서울 경복궁 돌담길에서. 당시 강석경은 월간지「여학생」社의 기자였다.
  교수에게 레슨을 받지 않고도 원하던 美大에 어렵지 않게 입학했지만, 대학은 내가 보호의 제복을 벗고 처음 나선 세상이었다. 행복의 전도사 같은 발랄한 여대생들이 앞으로 무리지어 지나가면 나는 마치 낯선 별에 떨어진 神의 의붓자식 같아 멈칫거렸다.
 
  대학이라는 집단 속에서 나는 이방인이 된 듯했다. 그즈음 나는 카뮈에 감염되어 「오늘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는 이방인의 첫 문장을 기도문처럼 되새기곤 했는데, 벌거숭이 「이방인」은 화두처럼 내 의식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실존」과의 첫 대면이었다.
 
  첫 채플 시간이었다. 기독교 학교여서 정오마다 채플에 참석해야 하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내 눈을 끌었다. 같은 과의 K로 내 옆 좌석이 그 아이의 지정된 자리였다. 그 아이는 숯으로 칠한 듯 시커먼 일자 눈썹을 찌푸리고 퀭한 눈으로 강단을 쏘아보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반항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한눈에 그 아이에게 매료당했다. 「아름다운 여자」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나는 그 아이를 「뫼르소」라고 마음속으로 불렀다. 군중 속에서 연대감을 가진 유일한 얼굴이었다.
 
 
  뫼르소와 단짝, 자주색 블라우스
 
강석경은 현재 경주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펴고 있다.
경주 봉황대에서.
  나는 뫼르소와 2학기부터 단짝이 되었다. 그 아이와 늘 함께 다닌 고교동창이 휴학을 했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나와 달리 일찍이 미술을 선택한 藝高(예고) 출신이었으나 학교에도 잘 나오지 않았고, 미팅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남자친구가 있었으나 열정의 끝을 다 안다는 듯 데이트를 할 때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맥주잔만 비웠다.
 
  나는 마이크로 하는 교양수업과 美大의 공동작업실에 이내 흥미를 잃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열심히 끼고 다녔다. 카뮈의 「이방인」은 문학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 듯했다. 나는 책에서 生(생)의 상징들과 조우하면서 문학 속의 인생에 탐닉했다. 현실이 오히려 꿈 같았다. 무의식 속에 부유하는 꿈, 깨어나면 공허한 꿈.
 
  그즈음 공화당이 추진한 3選 개헌안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대학가에서도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우리 학교에선 모두 흰 블라우스를 입는 것으로 반대시위를 하기로 했다. 나도 따르려 했지만 그 흔한 옷 중에 흰 블라우스가 없었다.
 
  흰 옷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건 나답지 않은 과장된 행위 같았다. 그래서 검은 자주색 블라우스를 찾아내 그것을 입고 다녔다. 그건 내 식의 반대 표시였지만 물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흰색 물결 속에 자주색이 눈에 튈 수밖에 없고, 뒤에 「개인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외부에 관심 없이 내 세계에 침잠해 있었다.
 
  스스로도 『나는 뫼르소 같아』 라고 말한 K는 2년 만에 학점 경고를 받고 휴학계를 냈다. 그리고 다시는 대학에 돌아오지 않았다. 실기점수를 뺀 K의 교양과목 성적 대부분이 F였다. 나 역시 학점이 바닥을 헤맸지만.
 
  대학 3학년 때 엘리아 카잔 감독의 「열망」이란 영화를 보았다. 페이 다나웨이와 커크 더글러스가 주연을 한 영화로 사회적 야망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려는 남자와 자기 진실을 선택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남자 주인공은 부유한 아내를 둔 회사의 중역으로서 겉보기에는 출세가도를 달리는 능력 있는 사회인이나 그의 아내는 변호사와 바람을 피우고, 그는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출세에 걸림돌이 될까 봐 이혼을 못 하고 이중생활을 하는데, 아이를 갖게 된 연인은 그를 비웃듯 떠난다. 삶의 진실에 대해 물음을 던진 영화로서 「진실」이란 단어가 파문을 일으키며 바윗덩이처럼 나의 심연에 내려앉았다.
 
 
  8월의 사루비아와 휴학
 
장편「숲속의 방」으로 1986년「오늘의 작가상」과「녹원 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수상 식장에서 소설가 김민숙(왼쪽), 시인 김승희와 함께.
  2학기 개학을 앞두고 등록금을 내러 갈 때다. 교문을 들어서면 다리 아래로 철길이 보이는데, 철로 주변에 붉은 사루비아가 무리지어 흐드러져 있었다. 작열하는 8월의 태양 아래 사루비아도 불타 올랐고, 시야로 꽃무리가 피의 강물처럼 번졌다. 순간 가슴속에 묻혀 있던 「진실」이란 단어가 의문표를 던지며 수면에 솟구쳤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삶인가? 대학도 껍질만 다니고 있지 않은가.
 
  세상의 방식대로 덩달아 들어온 대학이었다. 나는 정체성을 찾을 수 없었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허수아비처럼 살다니!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것이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나는 등록금을 내러가다 발길을 돌려 그날로 휴학계를 냈다.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으니 이 충동을 「자아의 반란」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 뒤의 정신적 방황 ― 어두운 군부시대와 시대처럼 황폐한 인간들의 사랑, 아버지의 파산과 불안정한 가정, 어디에도 내 영혼이 뿌리 내릴 방은 없었다. 나는 한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회를 기웃거렸는데, 이익을 위한 전략으로 생존하는 사회의 군상들이 덧없어 보였다. 학교가 순수하다는 걸 깨달았고, 그제서야 나는 상아탑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대학신문 추계문예 현상
 
강석경은 이어령 선생의 추천으로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1997년 이어령 선생의 서재에서.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복병해 있는 사회와 비교하면 대학은 생존의 비무장지대 같았다. 특히 예술교육을 하는 音大·美大는 세속에서 벗어난 성역 같았다. 美大에서 가르침을 받은 조각가 최종태·최의순 선생님은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 주어서 師表(사표)가 되었다. 나도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길을 가리라 마음먹었다. 먹고사는 일보다 소중한 무언가가 있으리라. 아버지의 파산으로 물질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지만 가난이 두렵지 않았다.
 
  흘려보낸 시간을 보상하듯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추구했지만 朴正熙(박정희) 정권 말기라 휴교가 잦았다. 어느 날은 학교에 가면 총을 든 군인들이 막고 있었다. 난 「작업을 하고 싶을 뿐」이라고 소리치고 싶기도 했다. 울적한 마음에 명동에 나갔다가 성당에 들어가 기도한 날도 있었다. 신자도 아니면서.
 
  한번은 전교생이 나라를 위한 철야기도를 하느라 대강당에 모였는데, 나는 철야기도 대신 美大 실기실에서 작품을 하면서 밤을 새우기로 했다.
 
2004년 대구방송(TBC)에 출연, 작가 고은주씨와 함께.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동참이었다. 나는 작품을 하다 말고 밖으로 나가 대강당의 불빛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용서해 다오」 예나 지금이나 집단 속에서는 이방인이 된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
 
  복학한 다음해 대학신문에 추계문예현상 공고가 났다. 단편소설의 상금이 눈에 띄었다. 등록금을 내가 마련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 상금과 장학금을 받으면 한 학기 등록금이 마련될 것 같았다. 나는 상금을 겨냥하고 단편소설을 어렵지 않게 썼다. 습작 한 번 쓴 적 없이 난생처음 써본 소설이지만 왠지 당선이 될 것만 같았다. 여학교 때 숙제로 詩나 독후감을 써내면 학교 교지에 실리거나 선생님이 내 글을 교실에서 읽어 주곤 했다.
 
  마감 전날, 단편을 완성했으나 원고가 든 봉투를 버스에서 잃어버렸다. 나는 그날 밤을 꼴딱 새워 다시 써 내려갔다. 지금이라면 한 문장도 제대로 기억하기 힘들 테지만 그때는 청춘이었고, 모든 것이 절박하여 무사히 해냈다. 이렇게 시련을 받더니 과연 당선통지가 왔다.
 
  「빨간 넥타이」라는 단편이었다. 광고대행사의 기획부장이 자기 생일날 형의 친구를 만나 그가 처한 현실 문제를 유능하게 해결해 주고 서로 옛날을 회상하는데, 빨간색을 화폭에 담았던 美大 시절의 순수한 자신을 뒤돌아보는 이야기였다. 그의 생일날 산 빨간 넥타이는 잃어버린 자아의 상징이었다.
 
 
  李御寧 선생의 추천으로 등단
 
한옥을 리모델링한 경주의 전통찻집「능포다원」에서.
  심사를 한 李御寧(이어령) 선생님이 보자고 하여 국문과 교수실로 찾아갔다. 선생의 저서들을 일찍이 읽었고 명성을 아는 터라 긴장했지만, 선생은 먼저 당선된 소설을 칭찬했다. 이어서 「문학사상」에 추천해 작가로 데뷔시킬 터이니 단편 두 편을 써오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소설가가 될 생각은 하지 않았건만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복학하고야 미술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선 나는 졸업 뒤 취직하여 등록금을 모으면 대학원에 진학하여 조각과 미술비평을 겸하리라 계획하고 있었다.
 
  졸업을 앞둔 겨울, 사업가인 이모부가 알선하여 거래은행에 내 취직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돈이 쌓여 있는 은행을 마다하고 창간하는 어린이 잡지의 기자직을 택했다. 그 아동잡지는 발간한 지 석 달 만에 폐간되었다. 가난한 내겐 직장이 있어야 했지만 조직에 의해 일을 박탈당했다.
 
  그 경험은 개인과 조직의 관계, 사회의 비인간적인 구조를 깨닫게 해주었다. 어떤 직장도 영혼의 일터가 될 수 없다는 것, 나는 좌절감을 딛고 다시 내면의 방에 칩거했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내 방을 잃은 터라 나는 모교의 교수님 연구실을 빌려 밤늦게까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밤 10시경 경비원이 순찰하는 발소리가 들려오면 작업을 중단해야 했지만, 신촌의 야경을 바라보며 대강당의 돌층계를 내려갈 땐 행복했다.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지만 글을 쓴다는 일은 구원과 같았다.
 
 
  심약한 등장인물과 나
 
그녀는 2004년「강석경의 경주산책」을 펴낼 정도로 경주에 대한 애착이 깊다.
  내가 데뷔작으로 쓴 「根」과 「오픈게임」은 두 편 모두 사회체험이 바탕이 되었다.
 
  감원으로 해직된 주인공이 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 나자 다시 회사에서 부르는 내용으로 구성된 「根」은 존재의 뿌리에 대해 생각한 것이었다.
 
  또 밑바닥부터 올라간 광고대행사 영업부장이 시작부터 끝까지 독백하는 「오픈게임」은 사회인의 허무를 그린 작품이다. 쓰고 보니 두 편의 소설 속에 극적인 도구로 「칼」이 등장했다. 해고를 당하고 자의식 속에 나날을 보내는 주인공은 아내가 「빌빌이」라고 부른, 자신의 상징 같은 무력한 개를 향해 칼을 꽂고, 한 인물은 남자가 생기자 자식을 외면하려는 어머니 앞에서 상처를 찌르듯 자기 눈을 찌른다. 비정한 세계를 향해 칼을 벼리다가 자신에게 겨누는 심약한 인물들은 나의 또 다른 얼굴이었을까?
 
  데뷔하기 전에 쓴 세 단편은 모두 「자아 찾기」가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자아 찾기란 다름 아닌 본질에 다가가는 일이다. 문학은 언어로 영혼을 벼리며 자기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행위 같다. 무엇보다 먼저 나에게도 낯선 자신을 탐구하는 방법으로서 조형보다 친절하고 적절한 언어를 택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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